<聖經> 요한일서2:1-29
<題目> 빛 가운데 행하는 삶
<序言>
전 장에서 하나님은 빛이라고 했고 성도는 당연히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본 장에서도 이어서 성도가 당연히 좇아야 할 삶의 규범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형제를 사랑하라(1-11절),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12-17절), 적그리스도를 경계하라(18-29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형제를 사랑하라 (1-11절)
①예수님은 우리의 대언자입니다.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하나님은 빛이시며 어둠이 전혀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죄를 싫어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화목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우리가 죄로 하나님과 단절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므로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영향력은 온 세상에 미쳤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대속해 주셨을 뿐 아니라 현재에도 하나님 보좌에서 하나님 앞에 대언자로 계십니다. '대언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s)는 문자적으로 '곁에서 돕기 위해 보냄 받은 자'라는 뜻으로서 요한복음에서는 '보혜사'로 번역되었으나 '돕는자' '상담자' '위로자' '증거자' '변호자' '대언자'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본문의 파라클레토스를 '변호자'(advocate-KJV,NASB)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의 죄행을 심판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변호하며 중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삶 속에서 범죄합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공의대로 징계하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대시 죽어서 우리를 구원했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변호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분으로서(히4:15) 우리를 이해하시고 하나님을 설득시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으로 구원한 예수님이 간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어린 아이가 잘못할 때 아버지가 매를 때리는 장면과 같습니다. 아이는 잘못했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심하게 매질하려 합니다. 그 때 어머니가 그 매를 붙잡고 자기가 잘못해서 그렇다고 하면서 아이의 편에 서서 아버지를 설득시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애원으로 인해 매를 내려 놓게 됩니다.
②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는 분이고 하나님과 교제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고 하나님의 말씀인 계명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자라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라면, 하나님 안에서 산다고 하는 자라면 그의 말씀인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인 계명을 지키지 않고 그것을 말씀하신 하나님을 안다고 혹은 사랑한다고 혹은 그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를 알면 그의 말씀을 순종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4:15, 21,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했습니다. 15:10에는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했습니다.
③계명은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율법의 요긴하게 간추린 계명이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으로서 한 단어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마태복음22:37-40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13:34-35에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라는 것은 십계명과 다른 계명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십계명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고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형제를 미워하면서 계명을 지킨다고 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빛 가운데 행한다고 하지만 어둠 가운데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 미움은 눈을 멀게 합니다. 우리는 상처와 분노 때문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데 그 결과는 모든 사안에 대해 분별력을 갖지 못하게 되고 방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12-17절)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이라는 호칭을 반복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이에 대해 실제 연령을 구분하여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고 영적인 상태를 구분하여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수사학적 애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각기 한 말이 육적이든 영적이든 구분된 대상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라 전 성도에게 공통으로 해당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하나님과 교제에 대해 말해왔고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1-12절에는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내용과 본절 12-17절에는 세상을 이겨야 한다는 내용과 18-29절에는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와 이유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 그들의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2절).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은 죄 사함의 결과로 하나님과 다시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 그들이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3절). 14절에는 그들이 아버지를 알았기 때문이고 그들이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키고 '태초부터 계신 이'는 1:1에서 언급한 대로 태초부터 생명의 말씀으로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요1:1,14). 수신자들은 하나님을 이미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그들이 악한 자를 이기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3절). 14절에는 그들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그들이 흉악한 자를 이기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1:1에서 말한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수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믿어 예수 그리스도가 속에 내주하고 있기에 악한 자 곧 흉악한 자를 이기었습니다. '악한 자' '흉악한 자'는 모두 헬라어로 포네론(πονηρον)은 사탄에 대한 인격적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부활하므로 사탄을 이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는 이미 그의 능력으로 사탄을 이긴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이긴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 남아있는 잔재 세력을 계속 이겨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경험적으로는 항상 지는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이겨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①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않게 된다고 했습니다 (15절). '세상'(κοσμοs)은 기본적으로 세계와 우주, 문명과 문화를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사탄의 지배를 받아 사탄의 영향력 아래 있는 모든 영역에 대한 의미로 사용된 말입니다 (4:1-5, 5:4-5,9, 요16:11, 엡2:2). 그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거부하고 대적합니다. 우리로 범죄하게 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합니다. '사랑'(αγαπαω)은 무조건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질과 문명과 문화도 하나님이 내신 것으로서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 안에서 누리면 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나 그것들을 따라간다면, 하나님을 떠나게 할 정도로 마음이 끌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조건없이 세상에 끌려 살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없게 됩니다. 그 세상은 하나님께 반합니다 (약4:4).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사람과 교제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사람 스스로가 하나님과 교제에서 멀어집니다.
②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서 그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16절). '육신'(σαρκοs)은 기본적으로 육체(flesh)를 말하는 단어이지만 여기에서는 인간의 악한 욕망인 죄성을 의미합니다. '정욕'(επιθυμια)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말하는 단어지만 여기에서는 제어되지 못한 탐욕을 말합니다. 그래서 '육신의 정욕'이란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가 아닌 죄성에 의해 가지는 욕망을 말합니다. '안목의 정욕'은 눈으로 즐겁게 하는 일에 몰두하는 욕망을 말합니다. '이생의 자랑'은 소유한 것과 누리는 것으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욕망을 말합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축복으로 주신 것들이 아닙니다.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고 사탄에게 지배받는 죄성으로부터 온 것이고 사탄에게 이용되는 것들로부터 온 것입니다.
③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 지나가고 맙니다.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런 것들은 결국 다 지나가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합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은 죽는 날에 혹은 주의 재림 때 다 없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은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1:24-25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죽을 때에 혹은 주의 재림 때에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산 사람은 천국에 가서 영생을 누리며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은 복락의 근거로 남아 있게 됩니다.
3. 적그리스도를 경계하라 (18-29절)
18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 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1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이이들아'고 했습니다. 공동체 내의 일부 계층에 대한 호칭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대한 애칭입니다. 요한이 수신자들에 대해 자녀들처럼 여기고 아버지의 심정으로 부른 표현입니다.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마지막 때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때'는 말세라는 말입니다. '말세'는 다양하게 예수님의 초림,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 예수님의 재림 등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요한은 두번째와 세번째의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요한이 당시를 마지막 때라고 한 근거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헬라어는 αντιχριστοs(antichrist)로서 문자적으로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대적하는 자를 말합니다. '적그리스도'라는 말을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핍박하는 제국과 그 왕에 대해 적용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거짓 그리스도나 그리스도에 대해 잘못된 교리를 유포하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사용했습니다. 지금 사용하는 단어로 말한다면 이단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들은 처음부터 무신론자들이나 이교도들이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도중에 공동체에서 나간 자들입니다. 그들은 도중에 그릇된 사상에 미혹되어 스스로 교회 공동체에서 나간 자들입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바른 교회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공동체에서 나간 것은 스스로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것을 증명한 것이 됩니다. 수신자들은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압니다 (18절). '기름부음'(χρισμα)은 성령의 내주에 대한 상징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는 성령이 내주하여 사죄의 확신과 양자의 확신과 구원의 확신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진리를 깨닫게 합니다(요16:13). 수신자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들이 성령에 의한 진리 지식에 확고히 서서 이단을 분별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거짓말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자(1:6), 어두움에 행하면서도 죄가 없다고 하는 자(1:8),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4:20)들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면서 그 증거들이 없는 자들을 말합니다 (5:10). 그런데 요한은 당시 그런 무리들이 적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적그리스도'(αντιχριστοs)는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대적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들이 적그리스도인 이유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부인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부인하는 자'(ο αρνουμενοs)는 반박하고 거절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입니다. 성자이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은 성부이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자와 성부뿐 아니라 성령도 하나로서 성자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성령의 내주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이단은 모두 적그리스도인 것입니다.
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26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요한은 수신자들이 이미 받은 복음 진리를 굳게 붙잡고 있기를 권면했습니다. 요한이 이미 적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교회 안에 있었으나 교리적으로 타락하여 교회에서 나간 자들로서 계속해서 교인들을 미혹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수신자들은 그 이단들의 가르침을 잘 분별하고 물리칠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기름 부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27절에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1:21-22에도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기름 부음'은 성령의 임재(臨在)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기름 부음'의 헬라어 기본형 '크리오'(χριω)는 문자적으로 '기름을 바르다'(anointing)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 선지자가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세울 때 감람유(올리브유)를 뿔에 담아 그것을 머리에 부었습니다. 신약시대에 선지자격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병에 담아거지고 다니면서 이마에 바르거나 찍어 주면서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를 표현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기름 부음'이라는 용어는 성령의 임재에 대한 관용적 표현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성령(聖靈)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거룩한 영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한 분이지만 3위(位:자리,위치)가 존재하는데 3위는 각 인격적 특성에 의해 1위는 성부, 2위는 성자, 3위는 성령으로 불립니다. 성부는 하나님으로, 성자는 예수님으로 성령은 성령님으로 불립니다 (눅3:21-22, 요14-16장, 마28:19, 고후13:13). 어떤 사람들은 성령님을 신적 세력인 능력(Power)이나 힘(Energy)으로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임재의 상징으로 보여 준 불, 물, 바람, 구름, 기름, 비둘기 등을 성령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인격적 성품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의 활동을 보면 우리에게 말씀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진리를 가르치고 사역을 명령하고 일을 시키고 책망하고 인도하고 간구하시고 교제를 하십니다 (계2:7, 딤전4:1, 요15:26, 요14:26, 16:13, 느9:20, 행16:6-7, 13:2, 20:28, 요16:8, 롬8:14, 8:26, 고후13:13). 때로 근심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속기도 하고 모욕당하기도 하고 훼방당하기도 하고 소멸당하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사63:10, 행7:51, 행5:3-4, 히10:29, 마12:31-32, 살전5:19, 마2:31-32, 엡4:30-32).
성령의 임재(臨在)의 방식에는 성령의 내주와(內住) 성령의 현재(顯在)가 있습니다. 성령의 내주는 예수를 믿는 자 안에 거주하는 방식을 말하고 성령의 현재는 예수를 믿는 자 밖에 혹은 위에 임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성령의 내주는 주로 바울과 요한의 서신서인 고린도전후서와 갈라디아서와 요한일서에서 나타나고 성령의 현재는 누가의 저서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나타납니다. 성령의 내주를 말할 때는 전치사 엔(εν-in)이 사용되고 (고전3:16, 12:13, 고후1:21, 요일2:27) 성령의 현재를 말할 때는 에피(επι-on,over,above,upon)가 사용됩니다 (눅4:18, 행2:3, 8:16, 10:44, 19:6). 성령의 내주는 성령의 내적 증거라 하기도 하고 성령의 현재는 성령의 외적 경험이라고도 합니다. 성령의 내주는 신자의 신분을 증거하고 성령의 현재는 신자의 사역을 위한 능력을 부여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내주는 성령의 인격적 열매를 맺게 하고 성령의 현재는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게 합니다. 성령의 내주는 보편적이면서도 단회적이면서도 잠재의식적입니다. 성령의 현재는 특정적이면서도 반복적이면서도 경험적입니다. 성령의 내주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에 일어나며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일어나며 의식하지 못한 채 결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현재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이후에 신앙적 열정을 가질 때 일어나며 누구나 의식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기름 부음'은 성령의 내주를 의미합니다. 요일2:27에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εν) 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내주는 모든 믿는 자에게 있습니다 (요14:16-17). 고린도전서3:16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고, 고린도전서12:13에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했고, 고린도후서1:21에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했고, 요한일서2:20에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라고 했고, 요한일서2:27에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공통점은 기름부음(성령의 내주)가 모든 성도에게 있음과 성도에게 이미 있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우리에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성경께서 내주해 계십니다. 그 성령님은 우리가 천국 갈 때까지 절대로 떠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성령이 떠나거나 다시 들어오는 것처럼 표현된 경우가 있는 것은 성령이 본질적으로 떠나거나 다시 들어온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인동형론적 표현으로서 사람이 그렇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인격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범죄하면 마음에서 감동을 시키지 않으니까 떠난 것 같고 회개하면 감동을 시키니까 다시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에 들어온 성령님은 절대로 떠나지 않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마28:20, 요14:16-17, 롬8:26-27, 골1:29, 살전5:19).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죄인으로서 멸망받을 존재인 것을 인지하게 해 주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시인하게 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고,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알게 하고, 구원받은 기쁨과 평안이 있게 하고, 기록된 성경 말씀을 깨달아 그 말씀대로 살도록 감동시키고, 기도를 도와 주시고, 분별력을 가져 바른 판단을 하게 해 주시고, 양심에 죄에 대한 가책을 느껴 회개하게 하고, 죄성을 제어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상처를 위로하여 치우해 주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인격적 성장을 가져오도록 돕고,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정을 가지게 합니다 (눅5:8, 요일5:1, 고전12:3, 롬8:15, 고전2:12-14, 엡5:18-21, 요16:13, 롬8:26, 고전12:1, 골3:10, 갈5:16-18, 22-23).
본문 요한일서2:27에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소아시아에서 사역을 하면서 신앙 공동체를 세웠는데 그가 떠난 후에 영지주의 이단들의 미혹을 받은 자들이 요한이 세운 공동체 일원들을 접촉하며 미혹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인 세운 공동체의 신앙인들게 편지를 써 보내면서 권면한 것입니다. 그 내용 가운데 본문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에게 배운 신앙인들에게 이미 성령이 내주하고 있으니 그 성령께서 안에서 가르실 것이므로 그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주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내주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그 갈등의 문제가 해결되고 주께 합당한 생활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갈등이 있습니다. 영적인 문제, 죄 문제, 심리적인 문제, 대인관계 문제, 사역 문제, 가정 문제, 직장 문제, 학교 문제, 진로문제, 결혼 문제 등 여러 문제에서 갈등합니다. 그런 문제로 갈등할 때마다 우리는 바른 판단을 하고 바른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양심에 어떻게 가르치시는지에 귀 기울이고 그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양심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확고히 하고,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죄를 떠나고, 상처를 회복하고, 영적 만족을 얻고, 가정을 세우고, 사역을 이루고, 신앙공동체를 세워지는 일이라면 성령의 가르침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5:19에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라고 했고, 갈라디아서5:16에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그를 감동을 소멸하지 말고 그의 인도를 따를 때 바른 결정을 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8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29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주 안에 거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를 믿는다 해도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고 잘못된 교리에 미혹당하면 주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구원은 받되 벌거벗은, 수리스러운, 해받는 구원을 받게 됩니다 (계3:18). 성령의 인도를 따라 주 안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증거인 것입니다.
<結言>
오늘날에도 많은 이단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적그리스도입니다. 교회를 파괴하고 성도를 미혹합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우리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들을 분별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참 자녀인 증거이고 그리스도께 속한 증거이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증거입니다. 선한 싸움을 잘 싸우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주님 오실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