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고린도후서1:1-24

<題目> 문안인사와 변론


<序言>

  본서는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아가야(아덴, 겐그리아, 고린도)와 고인도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첫번째 편지인 고린도전서는 에베소에서 보낸 편지로서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여러 문제들을 바울의 신학 관점에서 어떻게 해결했는지 살펴 보았습니다. 두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도 맥을 같이 하는 상황이지만 고린도교회가 전서의 내용을 보고 회개하고 많은 문제 해결을 받은 후에 기록한다는 점에서 좀더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장의 내용구조는 문안인사 (1-2절), 하나님의 위로 (3-7절), 하나님이 환난을 주신 이유 (8-11절), 계획을 변경한 이유 (12-18절), '예'가 되는 약속 (19-24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문안인사 (1-2절)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거짓 선지자들인 유대주의자들은 바울과 다른 교훈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의 정당성과 잘못된 교훈을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바울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자신들의 추천서를 앞세우며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했습니다. 그 증거는 바울이 예수의 진 제자가 아니며 그들의 추천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에서 고린도에 들렸다가 마게도냐로 가기로 했으면서 고린도 방문을 변경한 것에 대해 언행이 일치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비방했습니다. 또 당시 팔레스틴 전체가 찾아온 기근으로 인해서 바울이 연보를 약속시킨 것과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착복한다는 비방을 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그들의 미혹에 대해, 바울을 그들과 비교할 때 바울이 외모가 연약하여 부족하고 언변 또한 부족하다고 생각하여(10:10) 많아 넘어갔고 아직도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어서 후서에서는 그 문제를 중점적으로 논제를 전개했습니다.


  그래서 첫 인사부터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보낸 사도임을 강조하고 아울러 고린도교회에 대신 보냈던 디모데도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가 유대주의자들이나 그들을 동조한 자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임을 인식시킨 것입니다. 특히 자신이 사도로서 잭책 수행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므로 그들도 성도로서 바울 자신을 본받아야 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① 고린도교회 방문을 변경한 이유 (1:12~2:4)


  바울이 즉흥적 결정이나 자기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에서 더 오래 머물다가 마게도냐로 바로 간 것은 첫째로 에베소에 효력을 이루는 문이 열렸고 (고전16:8-9), 둘째로는 고린도교인을 아끼기 때문입니다 (고후1:23). 바울이 바로 고린도에 갔다면 바울이 가진 진리의 양심으로 볼 때 틀림없이 심판권을 행사하여 강하게 책벌할 수 밖에 없어서 회개할 기회를 주고 용서와 회복의 직책을 감당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함이요 사도의 직책을 감당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책벌을 하는 것보다는 용서와 회복을 위해 시간을 미룬 것입니다 (고후2:1, 11:28-30). 그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나도 칼을 뽑는데 이릅니다.


  ② 예루살렘 연보를 요구한 이유 (8-9장)


  그 이유는 고린도교회가 은사가 많고 지식이 많은데 헌금을 통해 남을 돕는 일에도 풍성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후8:7). 착한 일에 넘치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후9:7-8).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사도의 심정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필요한 것을 주어서 고맙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참여한 고급한 일에 대해 기뻐함입니다 (빌4:10-17). 바울은 저들을 하나님의 일에 동참시켜서 저들로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 받고 그 일을 통해 유익을 얻게 하려고 항상 헌금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에 동참해야 합니다. 남을 돕고 헌금하는 것은 많이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들이 얼마나 많이 했느냐에 관심이 있지 않고 얼마나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참여했느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③ 사도직에 대한 변명 (10~13장)


  11~12장에서는 사도보다 부족함이 없음을 드러냅니다. 자랑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전한 복음을 세우고 자기를 통해 하는 하나님의 일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냐 사도가 아니냐, 옳으냐 옳지 않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후10:17-18). 자신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께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피력합니다 (본절). 파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우려 함입니다 (고후10:8). 교인, 하나님 일에 희생하는 것입니다 (고후12:14-15). 아이가 부모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가 아이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것 또한 사람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사명, 사도의 직책을 감당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사도인 증거입니다. 고린도교인도 이 사명을 위해 바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은혜와 평강에 참여해야 합니다 (본절). '성도'(αγιοs)는 히브리어 '코데쉬'로서 구별되다 구분되다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제사장 나라에 대한 사명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은혜'(χαριs)는 선물로서 그리스도 보내 주심이 강조됩니다 (5:19-20). '평강'(ειρηνη)은 히브리어 '샬롬'과 같은 말로서 하나님의 속성에 참여하므로 누리는 영혼의 평안함을 말합니다 (롬1:7, 빌4:7).  



       2. 하나님의 위로 (3-7절)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입니다. 환난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위로를 경험으로 고린도교인을 위로합니다. 곧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므로 받은 고난으로 위로가 넘쳤을 때 이것을 자신이 전하므로 고린도교인도 그러한 고난에 참여하므로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를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환난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요16:33). 비그리스도인들과 똑같이 환난과 고난과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측할 수 있었던 고통이든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고통이든 똑같이 휘청거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환난과 고난이 무겁고 아프지만 그 고통 속에서 눈물 흘릴 때에 곁에 오셔서 함께 해주십니다. 사사시대에 한나라는 여인은 아들이 없으므로 인해 동서에게 갖은 조롱을 당했고 그로 인해 마음에 큰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기도했고 하나님이 아들 사무엘을 낳게 하여 그에게 위로해 주었습니다 (삼상1:1-20). 신약시대에 안나라는 여인은 결혼한 후 7년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혼자가 되었는데 84년 동안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탄생하여 결례를 행하러 온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눅2:36-39). 바벨론포로 시대에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벤느고는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죄로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졌을 때 오실 그리스도가 그들 가운데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여 보호하고 건져 주셨습니다 (단3:23-25). 바울에게는 앞에서 말한 심한 고난을 당했는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사람이며 하나님의 사역자임을 확인시켜 주는 위로를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룬다는 위로(골1:25),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하여 육체에 채우는 위로(골1:24),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위로(롬8:17), 현재의 고난이 장차 받을 영광에 비하면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을 알게 하는 위로(롬8:18), 면류관을 주신다는 위로(딤후4:8)입니다. 그것이 받는 자만이 아는 은혜입니다 (계2:17). 그 위로는 환난과 고난과 고통을 능히 압도할 수 있는 위로입니다.


  ①위로의 방법


  하나님은 성도를 위로할 때 직접 찾아오시는 방법보다는 사람을 통해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환난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하실 때 그 사람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과 같은 또는 그보다 더 큰 어려움을 극복한 사람을 통해 위로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어려움을 겪을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큰 환난을 당했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위로를 받습니다. 아무리 억울해도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보다 억울하지 않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고통스럽지 않고 아무리 남을 위해 수고한다 해도 주님의 수고보다는 수고가 덜합니다.


  예수님이 고난받는 것이 우리에게 넘칩니다 예수님이 고난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끼치듯이 우리가 고난받는 것도 누군가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에게 받은 위로는 다른 사람에게 위로를 주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받은 것처럼 이제 남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장적 입장에서 고난을 받아야 됩니다. 골로새서1:24에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위해 세상에 오신 것같이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것같이 우리도 연약한 성도들이나 아직 주를 믿지 않는 성도들 앞에 서도록 보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고난이든 모든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극복할 힘을 얻고 해결받습니다. 죄를 지어 고통 중에 있을 때에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힘이 없어져 울고 있을 때에도, 그로 말미암아서입니다. 그렇게 힘을 얻습니다. 주를 위해 힘써 일하고 싶을 때 쓰러지면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습니다. 이젠 어린 사람, 늦게 믿게 된 성도, 신앙생활을 아직 시작 안한 성도들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증언하고 대신 업고 가게 하고 기도하게 합니다. 그로 인하여 환난과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위로가 전달되게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당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환난이 없다는 것은 주께 쓰임 받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좇겠습니다"할 때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새들도 거처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마8:20). 무엇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대교인들이 복음에서 벗어난 대목이 이것입니다. 신앙이라는 미명하에 하고 싶은 것을 하나님께 떼쓰는 것을 신앙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잘되고 하고 싶은 일이 잘되었다고 해서 복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신자에게는 더 많은 죄의 무서움과 인간의 연약성을 체험하며 주를 의지하여 극복했느냐의 싸움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아무도 위로할 수 없고 권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겪은 일들 뿐입니다. 내가 겪은 일에 대해서만 압니다. 사람이 얼마나 치사하고 연약하고 이기적인지 자기가 겪은 실패 속에서만 압니다.


  요한복음17:18에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냄같이 우리를 보냅니다. 예수님은 대접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러 오셨고 대속물로 주러 왔습니다. 죽으로 오시고 섬기러 오시고 불쌍히 여기러 오시고 구원을 베풀러 오십니다. 그것이 그의 소원이요 기뻐하심입니다. 예수를 믿었더니 무엇이 되더라, 기도했더니 뭐가 되더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난 능력자가 아닌 죽어지는 자를 하나님이 쓰십니다 (마25:45, 막8:34).


  ②고난의 이유


  하나님은 왜 그런 방법을 사용하시는가. 첫째, 온전케 하기 위함입니다. 고간으로 온전케 됩니다. 히브리서5:8-9에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했습니다. 고난이 없이는 오전해지지 않습니다. 무엇을 배우지 못합니다. 고난을 통해 생각합니다. 자기를 돌보며 새롭게 깨닫습니다. 그래서 고통이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도 큽니다. '실락원'을 쓴 존밀턴은 소경이었고, 대명곡들을 남긴 베토벤은 청력을 상실한 자였고, 찬송시를 많이 남긴 크로스비는 소경이었고, 찬송시를 많이 지은 송명희 자매는 정신박약자였습니다. 제트기가 빠른 것은 꽁무니에 불이 붙었기 때문이라는 우스운 말이 있습니다. 둘째, 상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최상의 자리에 올리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본체시나 낮아져 고난을 당했습니다 (빌2:6-11). 우리도 그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롬8:17). 주님 가신 길을 뒤 따른 자는 상상할 수 없는 지위와 영광을 얻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 가장 크게 보상받고 상급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의 길에 동참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동업자로 부르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서 "그 때 내가 좀더 열심히 할 걸..."하면 너무 늦습니다.  



       3. 하나님이 환난을 주신 이유 (8-11절)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3-7절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담은 신자들의 제사장 사역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8-11도 그 내용의 연속인데 표현이 다릅니다. 특히 성도가 당하는 환난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구체적으로 장소가 어디인지 내용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왜 당하는 것인지 본질적인 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시아에 속한 에베소에서 많은 환난을 당했습니다 (행19:23-29, 고전15:32, 16:9). 선교 기간 동안 말할 수 없는 환난을 당했습니다 (고후11:23-29, 고후12:7). 그 환난의 내용이 고린도서 전체를 보면 고린도교회로 인한 좌절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너무 환난이 심하여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어서 사형선고를 받은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심했습니다. 살 소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적 열심을 안 부리고 살 때는 별 일 없다가 잘 믿어 보려고 하면 여기 저기서 일이 터지고 어려워진 경우를 보게 됩니다. 주를 본받아 살기로 작정한 때부터 환난과 고난이 올 때가 있습니다.


  ①하나님만 의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심한 고난으로 인하여 사형선고를 받은 자처럼 살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장소가 어디인지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시아는 소아시아로서 지금의 터어키 지방입니다. 에베소에 있을 때 은으로 아데미 여신의 신전 모형을 만들어 파는 은세공업자 데메드리오가 동업자들과 직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동역자들을 연극장으로 끌어들여 죽이려 했습니다 (행19:23-29).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우기도 했습니다 (고전15:32). 에베소에서 대적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고전16:9). 바울은 선교를 하면서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고 돌에 맞기도 하고 파선으로 밤새 표류하기도 하였습니다.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강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했습니다. 여러번 자지 못하고 춥고 굶주리고 헐벗었습니다 (고후11:23-28). 지병인 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질병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는지 '사단의 가시'라고 했습니다 (고후12:7). 바울은 환난이 너무 심하여 사형선고를 받은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고통이 심했습니다. 살 소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인식했습니다. 전에는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자기에게 일어난 고통의 문제를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자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통이 있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 여정이 순탄할 때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줄 알고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허영에 빠집니다. 그러나 환난과 고통을 경험하면서 자아를 발견하게 됩니다. 삶의 혹독한 시련 속에서 비로소 자기라는 우상이 부서집니다. 자신이 낮아지고 깨어지고 죽어집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물질이 없어 고통을 당하면 물질을 하나님이 주셔야 되는 줄 알고, 몸이 아파서 고통을 당하면 건강도 하나님이 지켜 주셔야 되는 줄 알고 사역이 안되어 고통을 당하면 사역도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셔야 되는 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②능력이 머물게 하기 위함입니다.


  4:8-10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함을 믿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고통만 생각하게 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고 소망을 갖습니다 (12:8-9, 4:16, 7). 질그릇 속에 보배가 있는 것입니다. 질그릇을 보배되게 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이러한 능력이 머물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약한 것, 핍박, 궁핍, 곤난을 기뻐하는 것은 약할 때 곧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환난 때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릴 사랑하고 우릴 붙잡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감사하게 됩니다.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을 기뻐한 나머지, 그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무엇이며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깨달을 땐 능력이 머뭅니다. 그것은 환난과 고통 속에 이루어집니다.


  ③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이 이런 환난 가운데 고린도 교인을 위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도 그로 인해 감사가 넘치게 하려고 바울을 연단한 것입니다. 제사장적 직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일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1:20-24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쓰기 위한 자는 환난 가운데 연단하십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순종합니다.   


 

       4. 계획을 변경한 이유 (12-18절)


  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13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14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15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6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17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2절과 17절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미리 알린 여행 스케줄을 변경한 데 대한 해명입니다. 15-16절에 나오듯이 바울은 에베소에서 고린도에 갔다가 마게도냐로 가서 다시 고린도로 와서 에베소(유대)로 갈 작정이었는데, 그 계획이 변경되어 고린도를 들리지 않고 마게도냐로 바로 갔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을 신실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거짓교사들은 그런 바울이 우유부단하고 불성실해 보이는 것을 근거로 바울의 사도권과 바울의 교훈을 의심하도록 조장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이유를 설명하게 된 것입니다.


  12절은 계획을 변경한 것이 육체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변경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이나 감정에 따르지 않고 양심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행23:1). 14절은 그 목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곧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재림 때의 기준을 말한 것입니다 (고전15:31, 빌4:1, 살전2:19-20). 고린도전서16:8-9에서는 에베소에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변명하고 있습니다.


  ①진리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바울이 왜 그렇게 강한 어조로 변명하는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가? 그것은 자신을 죄인 가운데 괴수라 하고 만삭되어 나지도 못한 자라고 한 것을 보니 자신이 비판받는 것을 분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교훈과 싸우려는 강한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10:2-6). 자신이 공격 받으므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서 전하게 한 은혜의 말씀과 생명의 진리를 공격하는 것은 참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역사인 거짓교사들과 목숨걸고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심정으로 만나면 그들을 단호하게 치리하고 심판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권계로 교인들이 상처받게 될 것입니다. 그 불똥이 고린도교회에 악영향으로 튈 것이므로 그들을 만나지 않기 위해 계획을 변경한 것입니다. 그래서 편지로 써서 그들이 읽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깨닫고 회개한 뒤에 만나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하나님이 선택했기 때문에 회복시켜 주실 것을 바라보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23-24절). 이 얼마나 진리를 세우는 정신이 강하고 교회와 교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합니까? 외부적인 결과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진리까지 멸시를 당하면 안됩니다. 또한 미혹 당해서도 안됩니다.


  기독교회 안에서 옳고 그름은 교리(신학)적으로 보아야지 윤리적으로 보면 안됩니다. 윤리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불신세계의 기준입니다. 이단과 사이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단'이라는 말은 한문(異端-다를이, 단정할 단)의 어의로 본다면 '다르다고 단정하는 것'을 말하고, 영어(heresy)의 어의로 본다면 '이교, 이단, 이론'을 말합니다. 헬라어(αιρησιs; 하이레시스)의 어의로 본다면 '파, 분파, 당파, 파쟁, 의견, 교리'를 말합니다. 헬레니즘에서는 어떤 특정 철학이나 학파의 교의(교리)를 공포하는 자나 혹은 집단을 가리켜 '이단'이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그런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치는 일반적 교리와 다른 주장을 하는 자나 혹은 집단'을 가리키는데 사용했습니다. 이레네우스는 '올바른 진리의 기준에서 이탈'하는 것으로 규정했고, 터툴리안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그릇되게 부르고 전통적인 가르침을 그르치는 교의(敎義)'로 규정했습니다. 루터는 "어느 한 특정인의 비정상적인 성경 해석을 중심으로 한 극단주의자들의 모임이다"고 했습니다. 여러 의미를 현대적 의미로 종합하여 말한다면 '이단'이란 예수님과 사도들이 가르친 교의(敎義)를 기준한 '정통교리를 부정하거나 변질시키거나 왜곡시켜 바른 진리를 파괴하는 개인이나 집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에서는 "이단이란 본질적으로 교리적인 문제로서, 어떤 교리에 생긴 오류와 잘못이든 성경이 말하고 있고 역사적 전통교회가 믿고 있는 교리를 변질시키고 바꾸어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이단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단과 함께 사용하는 단어는 '사이비'라는 용어입니다. '사이비'(似而非-같을사, 써이, 이닐비)라는 한문 표기는 '같은 것이 아닌 것'으로서 '유사'의 의미입니다. 사이비는 출처의 측면에서 기독교가 아닌 것이 기독교 형태를 띠고 기독교 안에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하는 집단이나 사람을 말합니다. 정도의 측면에서는 이단은 아니나 이단성이 있는 집단이나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는 "사이비란 유사 기독교로서 이단적 사상에 뿌리를 두고, 가정 파괴, 부녀자 성폭행, 금품 갈취 등의 반사회적 반윤리적 행위를 하는 집단이나 사람을 지칭한다"고 했습니다. 일반인들은 사이비이라는 용어가 기독교적 용어라고 생각하고 사이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들이 생각하는 사이비는 윤리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단 문제는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교리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안에서 하나님 앞에 옳은 자인가 그른 자인가의 기준이 교리적인 기준이어야 합니다. 윤리적인 단점 때문에 교훈적인 면까지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윤리적인 부분은 계획적, 습관적, 제도적인 것이 아니라면 육신의 연약함으로 실수한 것으로 여기고 용서해야 합니다. 도리어 안타깝게 여기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노아의 세 아들(함과 셈과 야벳)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노아의 윤리적 약점이 있었을 때 함은 그 사실을 누설하고 셈과 야벳은 가리워 주었습니다. 그 결과 함과 그 후손은 저주를 받았고 셈과 야벳과 그 후손들은 복을 받았습니다 (창9:20-27). 노아가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흠을 드러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에 노아의 흠이 드러날 경우 하나님이 노아를 통해 하시는 구원 사역이 방해를 받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의 사건에서도 비슷한 일을 보게 됩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론과 미리암이 이를 비방했습니다. 그 일을 근거로 하나님이 모세를 지도자로 사용하는 것을 부정했고 하나님이 자신들도 사용하신다고 했습니다 (민20:1-10). 하나님이 구름 가운데 임하여 세 사람을 장막문으로 불러 모세를 들어 쓰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떠났는데 그 후에 미리암이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한 것은 분명히 윤리적으로 잘못한 것이나 그런 약점을 드러내 비방할 경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하시는 말씀의 권위가 상실되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하시려는 구원사역이 타격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 지도자들의 윤리적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은 잘못한대로 기억하시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대적하는 일은 더욱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역자를 대할 때 그런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②교인들을 사랑해서입니다.


  23-24절에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 했습니다. 2:13에는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고 했고, 10:2에는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계획을 변경한 것은 교인을 아껴서입니다. 디도를 보내어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디도가 돌아오지 않자 문제 해결이 안된 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장 그들을 만나면 징계를 할 수 밖에 없게 되기 때문에 교인들이 상처를 받게 될 것을 두려워 하여 후에 그들이 돌이킨 다음에 만나려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주신 권세를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우려는 것입니다 (10:8). 그러므로 징계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고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5:3). 그래서 그렇게 한 것인 결국 그들을 위함인 것입니다. 근심이 되지 않고 기쁨이 되게 하려고 가지 않은 것입니다 (2:1-4).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인 교인, 성도를 사랑해야 합니다. 11:28-29에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고 했습니다. 이런 심정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성도를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만약 죽으면 누가 와서 울어 줄까?'생각하지 말고 "누가 죽으면 내가 울까?"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위로해 줄까?" 생각하지 말고 "누가 외로울 때 내가 위로해 줄까? 생각해야 합니다.



       5. '예'가 되는 약속 (19-24절)


  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23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24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지금까지 고린도교인들이 유대 교사들의 미혹을 받아 바울이 에베소에서 고린도로 들렀다가 마게도냐로 가겠다는 처음 약속을 어기고 바로 마게도냐로 간 일로 인해서 바울이 신실성이 없는 것으로 비방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판단받는 일에 대해 자기가 세운 복음 진리가 훼방을 받는데 분개하고 고린린도교인들을 책망했습니다. 계획을 변경한 데 대해 고린도전서 16장에서는 에베소에서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고린도후서 1장에서는 그 때 스습하러간 디도가 오지 않으므로 아직 회개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므로 바로 고린도에 들린다면 바울 심정으로 볼 때 복음 진리를 바로 세우기 위해 유대 교사들을 징계하고 동조한 교인들이 실족하고 교회에 손해가 가겠기 때문에 편지로 써서 권면한 다음 회개한 다음에 기쁨으로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고린도교회와 교인을 사랑해서였습니다. 본 절에서는 바울이 직접 당장에 가서 해결하지 않고 기다린 것은 좀더 근본적인 면에서 고린도교회를 하나님이 버리지 않을 줄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 확신을 고린도교인들에게 편지로 주지시켜 주는 것입니다.


  ①하나님의 구원은 신실합니다.


  19절에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과 그 신실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은 제한적 속죄이며 우리 편에서 말하면 우리가 한 번 예수를 구주로 믿었으면 누구든지 예외없이 구원을 얻습니다. 한 번 '예' 했다가 '아니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허락했다가 번복되는 일이 없습니다. 로마서10:13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6:37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고 했고, 6:39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②하나님의 구원은 놀랍습니다.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 사실은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에베소서1:4-6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2:1-13에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 세상 풍속과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를 좇던 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므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자, 육체로는 이방인, 무할례당,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 언약에 대해 외인, 세상에서 소망이 없던 자, 하나님 없던 자를 택하여 구원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므로 아버지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를 알지도 못했을 때 찾지도 않았을 때 그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이리와 타조같은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탄스러운 일입니까? 요한일서3:1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고 했고, 베드로전서1:12에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구약 성막의 지성소 안에 있던 속죄소 위에 두 그룹 형상은 속죄소 위를 보고 있었습니다 (출25:20).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대한 감탄입니다.


   ③하나님의 구원은 보증이 있습니다.


  21-22절에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기도 정하고 기름 부은 자는 하나님이며 인친 자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그 보증으로 성령을 마음에 주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동이나 우리의 요구나 우리의 약속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에 근거합니다. 또한 그 증거도 우리의 변화나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보내신 성령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업자를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계획하시고 실현하고 근거를 마련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에서 실패한 것을 책망하는 마당에서 이러한 논리를 펴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을 꾸짖어 이번에 회개하면 자신이 그들을 받고 회개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하는 최후 통첩의 의미가 아닙니다. 자신이 이제 세번째 이야기 하는 것인데 이번에 얘기 해서 못 알아 들으면 이제 책임을 안 진다는 식의 말이 아닙니다. 꾸중을 듣고 따를 것인가 안 따를 것인가를 선택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이며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서 성령으로 구원을 보증한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그들이 실패했어도 하나님이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원을 완성할 수 있거나 혹은 완성할 수 없어서 실패할 수도 있는 조건에서 부름받은 조건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의지와 은혜로 부름받은 것이므로 지금 실패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버리는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예'하고 '아니라'하는 일이 없는 신실된 구원을 받았기에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돌이킬 수도 있고 안 돌이킬 수도 있는 존재가 아니라 돌이킬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그들에 대한 확신을 갖고 당장에 처벌한 것이 아니라 기다릴 수 있고 또한 권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을 기록한 이유입니다. 변경한 이유와 변경한 내용에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이유입니다.


<結言>

  결국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루 2시간 기도하고 하루 2시간 성경보고 하루 2시간 기도해서 하루 6시간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때 신앙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완성된 구원을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금방 슈바이처, 테레사, 어거스틴, 바울같이 되려고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계획과 보증 속에서 완성을 위해 지나가고 있는 여정입니다. 신앙은 목표와 성공이 앞에 있는데 내가 그렇지 못한 것을 확인했을 때 자포자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가 되느냐는 말씀을 믿고 버티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완성된 모습을 기준하고 그것이 안될 때 포기합니다. 눈만 보아도 거룩해지고 말만해도 상대방이 감화받고 영력이 나가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누가 더 오래 견디느냐가 믿음이고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서 서두릅니다. 하나님이 일하심을 자신이 서둘러서 잘난 척 하려고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어디에 와 있어도 좋습니다. 포기하지 말고 하루 하루를 하나님 의지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기를 힘써야 합니다(고전13:4, 계14:12). 그렇게 믿음 위에 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