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고린도후서2:1-17

<題目> 교인들을 향한 사랑


<序言>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인들을 꾸중하는 것이 자기의 옳음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함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들을 책망하는 것은 그들을 회개시켜 돌이키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을 용서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도 죄에 참여한 자들에 대해 공격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 용납하고 격려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는 것은 사단의 궤계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잘못한 자에 대한 용서 (1-11절), 절망 가운에서의 승리 (12-17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잘못한 자에 대한 용서 (1-11절)

 

  1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2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3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4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5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9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10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①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10절에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행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죽인 자입니다. 믿는 자를 핍박하려고 다메섹까지 원정하던 자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를 한 다음에 예루살렘교회에서 자기를 소개할 때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사도로 보냄을 받았다고 소개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그가 위장잠입을 한 줄 알고 도망했습니다. 그는 아나니아를 내세워 자신을 소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자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하여 사랑으로 불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2:16-17에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15:1-24에 보면 같은 사건에서 잃은 양 비유와 드라크마 비유와 탕자 비유를 들었습니다. 그 비유들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그 의도는 두 가지 초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한 마리의 양, 한 드라크마, 탕자에 둔 초점입니다. 또 하나는 그것들을 찾는 하나님의 마음에 둔 초점입니다. 두번째 초점을 기준할 때 개별적으로 부르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 전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회개하고 믿는 자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회개하지 않는 바리새인 전체를 찾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믿는 개인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100마리 가운데 1마리 모자란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한 생명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 한 생명은 어떤 상태에 있든지 찾는 노력을 기꺼이 한다는 것입니다. 세리, 창녀, 이방인이라도 찾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주의 사랑과 긍휼과 용서를 받은 경험자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자가 용서받는 경험을 한 자입니다.

 

  ②바울은 교인들을 그 사랑으로 용서하려는 것입니다.

 

  10절에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변명하려고 교인들을 책망한 것이 아닙니다. 1-4절에 보면 고린도교인들에게 직접 가지 않은 이유도 그러했고 또 강한 어조로 편지를 통해 책망한 것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을 넘어뜨리고 근심하게 해서 멸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회개시켜서 기쁨으로 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참고 견디며 책망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을 교인들에게 전하려 함입니다.

 

  ③교인들도 범죄한 자를 용서하기를 원했습니다.

 

  6-9절에 보면 범죄자가 벌을 받는 것은 마땅하나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자신이 고린도교인들을 대함같이 용서와 격려로 사랑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나는 할 일을 다했으니 다음은 당신에게 달렸다'는 식의 자세가 아닙니다. 교인들이 시험 들어 범죄한 것을 보면 잘하고 넘어진 경우도 있고 잘못해서 넘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자기를 드러내려 하기 때문에 넘어집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자기의 옳음을 드러내려는 심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떻든 그런 실수를 한 자를 매장하므로 자신의 옳음을 드러내려 하지 말고 용서와 격려를 아끼지 말라는 것입니다.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보다 함께 하는데 유익이 있는 것이 그런 데 있습니다. 서로 주께 받은 사랑으로 서로 돌보고 눈물 흘리고 기도해주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에베소서5:1-2에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했고, 요한일서3:18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고 했고, 요한일서4:7-8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했고, 베드로전서4:7-8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2. 절망 가운에서의 승리 (12-17절)

 

  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14절은 중요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1:20의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는 말씀과 같은 뜻의 위로입니다.

 

  바울은 드로아에 갔을 때 복음의 문이 열렸는데 고린도교회를 향한 안타까움 때문에 마음이 급하여 전도의 문이 열린 것을 놔두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12-13절). 그런데 고린도교회 입장에서 보면 좋게 평가할 수도 있으나 바울은 실패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린도교회를 개척해서 교인들을 제대로 양육하지 못한 것과 복음의 문이 열렸을 때 기회 포착을 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이 싫었던 모양입니다. 바울은 그런 시점에서 절망할 수 밖에 없었고 자신에 대해 비참한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통해 승리하게 되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14절).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시는 삶을 풍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항상 최고의 것을 주어서 승리하게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아무 문제도 부족함도 실패도 없이 해서 승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련함과 부족함과 실패를 통해 승리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채워서 영광을 받으시기 보다는 어떤 조건도 채워 주지 않고 혼자 일하게 해서 실패하게 한 다음에 우리로 할 말이 없게 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①주님의 필요성을 인정하였습니다.

 

  바울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무엇을 주었기에 승리했다고 고백하게 됩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진동하게 했다고 했습니까? 그것을 말하자면 3~6장 내용 전부다 7장에 나오는 디도를 만나 기쁜 소식을 들은 후에 쓴 글이지만 그 소식을 듣기 이전의 상태를 적은 글입니다. 신자의 승리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슨 일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콩나물 한 줌을 팔아도 왜 파느냐 어떻게 파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빈대떡 장사하다가 천국에 갔다면 주님이 세상에서 뭐하다가 왔느냐고 물을 때 빈대떡 부치다가 왔다고 하면 얼마나 창피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빈대떡을 왜 부쳤으며 어떻게 부쳤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어떤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글쓴이가 다니는 직장 근처에 한 부인이 하는 짜장면 가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가게는 꼭 점심만 한다고 합니다. 그것도 꼭 100그릇만 한다고 합니다. 너무 맛이 있어서 점심때만 되면 사람들이 줄을 서는데 11:30부터 서 있지 않으면 못 먹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가게 문을 닫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가게 문을 닫았는지 아무리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4-5년이 흐른 후 글쓴이가 우연히 찻집에서 그 부인을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서로 얼굴을 아는 처지라 가게를 그만 두게 된 이유를 물었다고 합니다. 그 부인은 자기가 죽을 때까지 그 이유를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너무 그러니 말하겠다고 하면서 했습니다. 언제나 음식을 다음날 끓여서만 낼 수 있도록 미리 전날 준비해 놓는데, 어느 날인가 짜장을 거의 다 팔고 마지막 무렵이 되었을 때 조그만 생쥐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거의 다 팔고 몇 그릇 안 남아서야 그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부인은 손님들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잘못을 구할 생각도 했지만 그렇게 해서 해결이 될 것 같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드로아 선교도 고린도교회 목회도 실패했습니다. 고린도교인에게 배신을 느끼고 안타까워 하고 자신에 대해 비참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 변명하고 꾸중합니다. 그런데 그 안타까운 자신의 변명과 꾸중 속에서 그는 자신의 자격과 힘으로는 안되고 하나님의 힘으로만 되는 줄 알고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부인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한 안타까움과 비참함이 없었다면 쉽게 진행되었다면 몰랐을 것을 일이 안되므로 모든 선한 것이 사람의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승리는 그의 능력이나 기적이나 흠없는 데서가 아니라 처절한 실패와 좌절 속에서 나타난 자기 부인과 하나님에 대한 갈망입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과 외삼촌을 속이고 사기꾼으로 전생애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속에서도 하나님만 의뢰하였습니다. 신자의 매력과 승리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구비한 데 있지 않고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실패와 좌절감마저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려고 주시는 줄 알고 주님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안 순간도 혼자 살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승리인 것입니다.

 

  ②주의 일 자체가 복된 줄 알았습니다.

 

  3:6-9에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속이 상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생하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이것이 무엇인가. 내가 그 꼴을 보려고 그 고생을 했느냐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처럼 징계가 금방 내려왔으면...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광채가 있는데 영생과 생명의 직분을 가진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럽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인들에 대한 말이지만 자신을 향한 납득입니다. 자신이 고생하는 일이 돈을 벌자는 것이나 정권을 쟁취하자는 것이나 남의 땅을 빼앗자는 것이 아닌데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가는 영혼을 위한 안타까운 심정인데 그 자체가 얼마나 복되냐는 것입니다. 이 일은 실패할지라도 맡은 직분 자체의 고귀함이 다른 데서 승리하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영의 직분을 맡고 있는 이 일이야말로 얼마나 고귀한 일인지를 배운 것입니다. 두 개 다 실패를 통해서 말입니다. 4:6-7에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보배를 가졌기에 귀합니다. 4:8-10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있는 이 직분을 감당하려는 노력이 귀한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제일 예쁠 때가 언제입니까? 책상에 앉아서 문제 풀다가 잘 안되어서 책 집어 던질 때 예쁩니다. 영어를 외우고 외우려다가 안 외워져서 사전을 태워서 마시면 그것도 예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생활이 잘 안되어서 고민할 때 예쁩니다.

 

  이것들이 비참함 속에서 배운 가치들입니다. 자신이 구덩이에 빠져 있으면서 배운 것들입니다. 4:16-18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했습니다. 5:13-15에는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5:16-17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結言>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어떤 권사님이 임종 때가 되어 목사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제가 죽으면 천국에 갈까요? 하나님께서 나를 모른다고 하지는 않을까요?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할까요? 나는 왜 이렇게 확신이 없을까요? 이렇게 불안해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불신앙이 아닐까요?"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뭐라고 하셨지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죠. 하나님과 잠시 분리되는 아픔을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절망을 그리스도에게로 몰아갑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몰아갑니다. 실패 속에 승리함을 아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