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고린도후서4:1-18
<題目>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
<序言>
바울은 전 장에서 거짓 교사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사도직을 변명했습니다 (3:1). 본 장에서도 의심받고 있는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변명하고 있습니다. 전 장에서는 바울 자신이 가진 복음 사역에 대한 직분 자체의 영광스러움을 강조했지만 본 장에서는 자신이 복음 사역을 하는 자세의 진정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복음 사역에 부름받은 우리의 오해를 발견하게 하고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지 알게 합니다. 내용구조는 복음 사역자로서의 자세(1-6절), 보배를 담은 질그릇(7-11절), 미래에 대한 소망(12-15절) 낙심하지 않는 이유(16-18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복음 사역자로서의 자세 (1-6절)
1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①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8절에는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항상 낙심할 만한 요소가 많았습니다. 바울은 사역을 하면서 수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거짓 교사들의 비방과 고린도교인들의 동조로 마음의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주께서 모세의 율법의 직분보다 영광스러운 복음의 직분을 맡기셨기 때문이고 (3:8), 주께서 그 직분을 긍휼하심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복음 전도자와 그리스도인들을 심히 핍박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데 앞장서고 예루살렘은 물론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까지 체포하는데 앞장섰습니다 (행9:1-2). 이는 주의 몸된 교회를 잔해한 것으로서 주를 핍박한 죄였습니다 (행9:4). 그래서 자신을 죄인 가운데 괴수라고 했습니다 (딤전1:15). 그런데 주께서 불러서 주의 종으로 삼아 주시고 주의 복음을 전하고 주의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직분을 주신 것은 순전히 주의 긍휼과 은혜였습니다. 디모데전서1:12-15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주께서 죄인인 자신에게 그런 긍휼과 은혜를 베풀었으니 고난이 있어도 감사함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주께서 사역을 성공하게 하실 것임을 생각하고 주께서 상주실 것을 바라보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4:16-18).
우리가 구원받아 복음의 직책을 맡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긍휼이며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아야 합니다. 사역에 열매를 맺힌 것도 주의 긍휼과 은혜인 줄 알아야 합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열매를 맺힌 것은 포도나무 원줄기에 붙어서 자양분을 공급받았기 때문입니다. 가지가 원줄기를 떠나서는 어떤 열매도 맺힐 수 없는 것입니다 (요15:1-11).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가 부목사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살을 하려고 가다가 교회 종소리를 듣고 교회를 들어갔습니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왜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가. 기왕 죽으려고 가는 마당에 뭐라고 하는지 듣고나 죽자'하고 간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박영선 목사의 설교를 듣고 회심을 하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박영선 목사는 그 때 자기가 사람들이 감격할 만큼 설교를 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박영선 목사는 그것이 주님이 하신 일이고 주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광은교회 김한배 목사에게 어떻게 해서 교회가 그렇게 부흥했느냐고 제가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하기를 자기는 전도사 때부터 설교를 하고 나오면 설교 후에 눈물을 흐리면서 은혜받았다고 하는 교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는 뭐 특별하게 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제가 창광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 고등부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뉴에이지 운동과 락 뮤직에 나타난 악령의 역사에 대해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고등부 회장이 도전을 받고 신학을 해서 우크라이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그 원고를 보면 그걸 설교라고 했나 싶은 데 그런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순전히 주의 은혜인 것입니다. 사역에 어떤 열매가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긍휼과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②진리만 나타내는 것입니다.
2절에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 했습니다. '숨은 부끄러움의 일'은 드러내지 못할 차피스러운 일'입니다 (공동번역). 바울은 드러내서 떳떳하지 못한 일 곧 속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혼잡하게'(πανουργια)는 불순물을 섞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율법주의나 인본주의적인 요소를 가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을 하나님의 의도대로 순수하게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에게 말씀을 배운 사람들의 양심이 증거해 준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말씀을 배운 사람들이 양심을 따라 판단한다면 바울이 얼마나 진리의 말씀만 드러내려 했는지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의 양심은 선한 양심으로서 말씀의 순수성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딤전1:5, 3:9, 벧전3:16). 필로(Philo)는 "양심은 하나님의 파수꾼으로서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했습니다.
거짓교사들은 육신적 세상적 방법으로 자기들의 실력을 드러내려 했지만 바울은 진리의 말씀만 순수하게 드러내려 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자기들의 육신적인 세상적인 욕망을 채우려는 욕심을 가졌기 때문에 거짓교사들의 인본주의 가르침에 끌린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는 말씀에 인본주의적 이론을 썩지 않고 순수하게 전해야 합니다. 배우는 자는 지적 혹은 기복적 만족을 얻어 자기를 만족하려 하지 말고 순수한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2:2에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3-4절에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현시(顯示)입니다. 6절에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입니다. 하지만 믿는 자들도 있었지만 믿지 않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복음과 말씀을 순수하게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첫째, 그들이 망하기로 결정된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섭리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수건이 가리워졌기 때문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3:14에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했고, 고린도전서1:18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고, 고린도전서2:14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 했고, 마태복음13:13-15에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눅8:10). 둘째, 악령의 역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신이 그들의 마음을 혼미케 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의 영광된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αιωνοs)은 '세대' '시대'의 의미로서 (age) '세상의 신'은 사단에 대한 별칭입니다. 요한복음12:31에는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했고, 에베소서2:2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했고, 에베소서6:12에는 '어두움의 세상의 주관자'라고 했습니다. 사단은 스스로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쫓겨나 지상으로 내려왔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혼미하게 하여'(ετυφλωσεν)는 눈을 멀게 하였다는 의미로 마음의 눈, 영적인 눈을 멀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사단이 영안(靈眼)을 어둡게 하여 깨닫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보면 미혹의 영이 역사하여 미혹당하게 한 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사역에 사용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고 복을 주시지 않으려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2:11-12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역을 하면서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할 때도 모든 사람이 청종한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전할 때 아무도 믿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제가 1980년도에 신학교에 다닐 때 당시 미국 훼이스신학교 부학장이었던 이상찬 박사가 특강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진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바른 말씀을 전한다면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말씀을 듣고 전적으로 청종하는 자들이 있고 하나는 전적으로 대적하는 자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 전적으로 은혜받는 자들이 있든지 전적으로 대적하는 자들이 있으면 우리가 바른 말씀을 전하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구원사의 예정론적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택자와 불택자, 복받을 자와 복받지 못할 자를 드러내고 갈라 내기 위해서 사역을 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외적으로 사역이 잘 안된 것처럼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의 잘못이라고 하기 보다는 그 대상자들이 본질적으로 깨달을 수 없는 자들이고 호응할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역의 실패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부름을 제대로 했다면 대상자들이 호응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가 성공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외부적 결과를 중심으로 사역을 하거나 그 결과 때문에 교만하거나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③그리스도만 높이는 것입니다.
5절에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사역을 통해 오직 예수님이 주되신 것을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의 종노릇(섬김) 한 것도 예수님을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사역을 하는 목적은 예수님을 높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만 나타나고 예수님의 일만 되고 예수님만 존귀하게 되고 예수님만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빌립보서1:20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2:1-5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무엇 때문에 그토록 떨었습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시려 하는데 있어서 바울 자신이 자기의 능력을 나타내려 할까 염려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 주시기만 하면, 일을 시켜 주시기만 하면 자기가 하겠다고 하고 자기의 능력과 실력을 나타내려 하고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 합니다. 자기를 통해 그리스도를 나타내려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통해 자기를 나타내려 합니다. 우리가 잘되는 것을 즐거워 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이루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즐거워 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께서 우릴 불러서 모세보다 영광스런 복음 사역의 직분을 주신 목적대로 행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릴 세운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존귀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2. 보배를 담은 질그릇 (7-11절)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① 바울은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고 했습니다.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보배’는 보물을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구원의 복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빚은 그릇을 말하는데 그리스도인들(사역자와 성도)을 두고 한 말입니다. 보배를 질그릇에 두었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직분(직책)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질그릇은 무가치한 도구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한 표현이며 인간이 갖는 한계성과 연약성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이 보배를 질그릇에 둔 이유는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시람들은 보배를 질그릇에 넣어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복음의 보배를 인간인 질그릇에 두었습니다. 그것은 가치가 보배에 있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직책을 맡았지만 사람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드러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능력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질그릇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질그릇입니다. 모든 사람 자체가 질그릇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신자는 질그릇의 성격을 더욱 많이 가지고 했습니다. 신자는 연약하고 무능력한 자들입니다. 에스겔16:1-5에 보면 이스라엘의 난 땅은 가나안이고 부모는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날 때부터 배꼽 줄도 자르지 않고 물로 정결케 하지도 않고 소금을 뿌리지도 않고 강보로 싸지도 않고 광야에 버림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광야에서 피투성이 된 채로 발짓하고 있었는데도 아무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1:26-28에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않으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고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질그릇을 택하여 복음을 전하게 한 것은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복음을 전하는 자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고린도전서1:29에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그릇을 택하지 않고 질그릇을 택한 것은 보배가 드러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질그릇에 보배를 두어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에서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택하여 구원한 것은 아무도 육체의 조건으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만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사역자를 부름에 있어서도 질그릇 같은 자를 부르십니다. 금그릇을 불러 보배를 담지 않고 질그릇을 불러 보배를 담습니다. 보배가 질그릇을 통해 나타나기를 원해서입니다. 주께서 바울을 복음사역자로 부르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바울은 외모가 볼품이 없었습니다. 유대 사학자 요세프스(Josephus)에 의하면 그는 키가 작았고 머리가 대머리였고 일자 눈썹이었고 메부리 코였고 배는 튀어나왔고 다리는 안짱다리였다고 했습니다. 또한 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후12:7). 말하는 능력도 아볼로 같은 사역자에 비하면 시원스럽게 하지 못했습니다 (고전1:12, 3:5-6).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 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했습니다 (딤전1:13,15). 그렇게 보면 바울은 전혀 하나님의 일꾼다운 면모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바울을 불러 복음전도 사역에 사용하신 것은 그를 통해 전해지는 복음 자체의 위대함을 드러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를 사용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외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복음전도 사역자가 되면 그가 전하는 복음의 가치와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지 않고 그 사람 자체의 훌륭함이 드러나기 쉽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전도 사역자들이 자신이 좋은 조건과 환경에 있지 못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의 가치만을, 하나님의 능력만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실력을 가진 목사가 있는데 한 사람은 학벌과 외모가 뛰어나고 한 사람은 학벌과 외모가 형편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선택하겠습니까? 학벌과 외모가 뛰어난 사람은 자기를 드러내려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학벌과 외모가 형편없는 사람은 자신을 드러낼 것이 없으니 하나님의 능력만 나타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학벌과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 잘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잘해서 사역이 잘되었다고 말하지만 학벌과 외모가 형편없는 사람이 잘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잘되었다고 말합니다. 학벌과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 사역하는 교회에 나가면 목사보고 나간다고 말하지만 학벌과 외모가 형편없는 사람이 사역하는 교회에 나가면 그가 전하는 생명력 있는 말씀을 듣기 위해 나간다고 말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목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신유의 은사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가 기도하면 금방 낫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기도하고 난 다음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는데 아무도 예수를 믿겠다고 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돈을 싸 들고 와서 "목사님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제 딸 좀 고쳐주십시오" 이런 식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을 금 그릇으로 바꾸려하지 말고 하나님이 능력으로 안에 두신 보배를 드러내야 합니다. 타종교는 질그릇 자체를 바꾸려 합니다. 득도나 참선을 통해 신의 가능성에 도달하므로 자신들을 증명하려 합니다 (汎神論). 하지만 기독교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의롭게 되었음을 확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의한 것임을 알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과 사역을 통해 복음만 나타내고 예수님만 증거하고 하나님의 주권만 강조하고 하나님 말씀만 제시하려해야 합니다. 다른 예화나 간증이나 명언이나 논리를 소제로 사용할지라도 그 목적이 바로 복음을 증거하려는 의도여야 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려는 의도여야 합니다. 갈라디아서6:14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1:20-21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그 상황을 통해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하려는 의식을 가진 것입니다.
② 어떤 상황에서도 거꾸러지지 않았습니다.
8-9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질그릇 같이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인 복음전도 사역자였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넘어지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질그릇 같이 연약한 고린도교인들도 그같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말일 것입니다. 첫째,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에워싸고 괴롭혀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에 해당하는 기본형 ‘아포레오’(απορεω)는 ‘빠져나갈 길이 없다’ ‘어리둥절해지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의 뜻입니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표현 가운데 포켓에 갇혔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적군들에게 포위를 당했다는 말입니다. 포켓에 갇히면 보급지원도 끊기고 빠져 나갈 수도 없고 전멸 당할 위기이므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한다는 것은 대적들에게 에워싸여 빠져나갈 길이 없어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셋째,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핍박을 받는 가운데서도 버림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뒤에 남겨져 버려진 자처럼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곧 도움을 받아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넷째,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내동댕이쳐져도 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망하지 아니하고’에 해당하는 ‘우크 아폴뤼메노이’(ουκ απολλυμενοι)는 ‘손상되지 않았고’ ‘죽지 않았고’ 등의 뜻입니다. 대동댕이쳐져도 다치거나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극한 환난과 고난과 고통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1:8-9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라고 했습니다. 11:24-28에 보면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5번 맞았고 태장을 3번 맞았고 돌로 1번 맞았고 3번 파선하고 1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다고 했습니다.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었다고 했습니다. 그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6:4-5, 고전4:11). 바울이 그처럼 극한 고난의 상황에서도 절망하거나 죽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보호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질그릇은 약하여 깨어지기 쉽습니다. 질그릇인 까닭에 많은 공격을 받고 많은 해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안에 보물을 둔 까닭에 하나님이 그 질그릇이 깨어지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전도 사역자에게 복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도 복음이 있고 하나님의 사명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어떤 환경과 상황도 넘어드릴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11:36-38에 보면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고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했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11:38절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8:35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했고, 이어지는 로마서8:36-37에는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했습니다.
③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에 참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0-11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앞서 8-9절에서 말한바 극한 고통의 상황에서도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려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그 예수님의 고난의 죽음을 늘 잊지 않고 짊어지려 했다는 것입니다. 잊지 않고 생각하고 본받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죽음에 넘겨질 때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것은 예수의 생명이 자기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자기 죽을 육체에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자기 몸에 적용되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하므로 예수님의 부활에도 동참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므로 예수님의 영광에 동참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곧 극한 고난을 받을 때도 낙심하지 않은 것은 그 고난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당한 고난이므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므로 예수님의 영광에도 동참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전도 사역 때문에 고난당해 죽으면 예수님의 재림 때 부활할 뿐 아니라 고난을 당하면 예수님 재림 때 영광을 얻게 될 것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3:1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고 했습니다. 우리도 주의 고난에 참여하므로 그의 영광에 참여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4:13에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벧전5:1).
이차적 의미로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므로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원한 것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6:17에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바른 진리를 세우다가 얻게 된 수많은 고난의 흔적을 말합니다. 바울은 사역을 하면서 수많은 박해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 고난당하는 것이 그에게 담대하게 했고 능력있게 했습니다.
3. 미래에 대한 소망 (12-15절)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3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바울은 사망은 자기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고린도교인들 안에서 역사한다고 했습니다 (12절). 이는 바울이 받는 고난이 고린도교인들에게는 유익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택한 백성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기 위해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던 것처럼 바울도 고린도교인들에게 영적 유익을 주기 위해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고 했는데 (13절), 이는 시편116:10에 해당하는 맛소라 본문(Massora Text)에 해당하는 70인역에 대한 해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절망적인 질병과 그에 수반되는 낙담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헤아리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가장 적절한 헌신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시116:1-19). 바울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서도 하나님이 구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고 항상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다하려 했습니다. 바울은 시편 기자와 같은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종말론적으로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것처럼 바울 자신과 고린도교인들을 다시 살려서 하나님 앞에 가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고린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갔을 때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아 큰 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신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4. 낙심하지 않는 이유 (16-18절)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바울도 사역을 하다가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첫째, 육체적인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하고 수없이 맞고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11:23-27에 보면 유대인에게 5번이나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고, 3번 태장으로 맞고, 1번은 돌에 맞고, 3번은 파선하여 일주야를 깊음 지내기도 했습니다. 여러 번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헐벗었습니다. 둘째 정신적인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거짓교사들로부터 사도답지 못하다는 비방을 받았습니다. 외모가 키는 작았고 머리는 대머리였고 눈은 일자 눈썹이었고 코는 메부리코였고 배는 볼록 나온 배였고 다리는 안짱다리였고 (Josephus), 눈병도 가지고 있었고 (12:7). 거기에다가 글을 쓰는 것에 비해 언변도 시원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10:10). 뿐만 아니라 물질을 탐하는 자라는 비방도 받았습니다 (바울이 환난을 당한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해 이방교회들에서 헌금을 하게 한 일과 관련하여). 또한 인격의 신실성이 없다고 비방도 받았습니다 (에베소교회에서 고린도교회를 들렀다가 마게도냐로 가리로 한 계획을 변경하여 고린도교회를 들르지 않고 바로 마게도냐로 간일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과거에 하나님의 교회들을 잔해했고 성도들을 핍박한 자라는 비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믿는 성도들을 색출하고 체포하고 감금하고 스데반을 죽인 것에 앞장선 일과 관련하여). 그런데 자신이 전도하여 가르쳤던 고린도교회 교인들까지 그런 거짓교사들의 악평을 곧이 듣고 바울을 비난하는데 동조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16절上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고 했습니다.
① 속 사람이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이었습니다.
16절下에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 했습니다. 겉 사람은 낡아지고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했습니다. '겉 사람'은 육체를 말하고 '속 사람'은 거듭난 영을 말합니다. 바울은 육체적으로 많은 고난을 당했고 심적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 환난과 고난과 비난으로 인하여 육체는 낡아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날로 새로운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오히려 영적으로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복음전도 사역을 위해 부르신 부름에 부응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자기의 신앙인격이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나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엡4:15, 골3:10).
② 지극히 큰 영광을 이루기 때문이었습니다.
17절에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8:18에도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은 하늘에서 받을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받은 고난에 비하면 하늘에서 받을 영광과 존귀와 상은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5:11-12에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1:8-9에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를 위해 받는 고난이 하나님 앞에 가서 그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존귀와 상을 받을 소망을 가지고 내적인 기쁨을 가진 것입니다.
③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주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18절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주목하고 소망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이고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내세적인 것이었습니다. 물질적이고 육체적이고 현세적인 것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지만 영적이고 내세적인 것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세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인정받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사는 목적이 세상에서 육체가 부요하고 편안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큰 영광과 존귀와 상을 얻어 누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아도 결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벤자민 슈몰크 목사(Rev. Benjamin Schmolk, 1672-1737)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사실성이 있는지는 알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독인 실레지아(Silesia)의 목사 아들로 태어나 개혁교회(루터교) 목사가 되었습니다. 당시 카톨릭의 핍박 속에서 36개의 마을을 돌봐야 했습니다. 마을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 한번 심방을 나가면 며칠씩 집을 비울 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심방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집이 모두 불타버렸고 잿더미 속에서 두 아들이 불타 죽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젊은 목사가 너무 절망해서 아마 이젠 목사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 장례식 때 그가 기도하고 쓴 기도문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것이 찬송가로 만들어졌는데 549장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입니다. 그는 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목회를 계속했고 뇌졸증으로 쓰러져 중풍에 걸렸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목회를 하다가 천국에 갔습니다. 그리고 고려신학교 초대 총무 손양원 목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전라남도 여수에서 문둥환자촌인 애양원에서 목회를 할 때 1948년에 ‘여수,순천10.19’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두 아들 동인 동신군이 순천에서 좌익 친구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여러 가지를 감사하면서 한 아들도 아닌 두 아들을 순교 제물로 받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그는 낙심하여 목회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성경 가르치는 일에 전무 하다가 2년 후 1950년에 6.25전쟁이 났을 때 공산군에게 죽임을 당해 순교를 했습니다. 그가 결코 낙심하지 않은 것은 바울처럼 속 사람이 자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지극히 큰 영광과 존귀와 상을 바라보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가치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結言>
우리에게도 환난과 고난과 시련과 비방이 많았지만 낙심하지 않고 담대하여 영적인 유익으로 삼아야겠습니다. 그래서 8-9절에서 말한 것처럼 해야 합니다. 8-9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