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고린도후서5:1-21
<題目>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믿음
<序言>
바울은 앞장에서 겉 사람과 속 사람을 비교하여 영원한 생명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본 장에서는 다시 장막집과 영원한 집을 비교하여 내세의 소망을 다루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사도직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해의 직분임을 밝혔습니다. 내용구조는 그리스도인의 소망(1-10절), 사역의 목적과 요인(11-15절), 사역자의 위치와 사명(18-21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그리스도인의 소망 (1-10절)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①영원한 집이 있다고 했습니다.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육신은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이므로 장막 집입니다. 베드로도 죽음이 임박했을 때 장막을 벗을 날이 가까웠다고 했습니다 (벧후1:14). 육체가 죽으면 영원한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우리의 본향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서 우리가 가야할 곳입니다. 영혼뿐 아니라 썩을 육체도 반드시 부활하여 영화로운 몸이 되어 그 곳에 갑니다 (살전4:13-17). 그러므로 장막(텐트)으로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막이 얼마나 멋있느냐 얼마나 견고하냐 그 자체에 목적을 두고 자랑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육체의 건강뿐 아니라 학식, 재능, 명예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벧전1:24, 약4:14, 욥4:19, 벧전2:11). 우리는 영원한 나라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4절에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육체도 변화될 것, 영화의 몸이 될 것을 믿습니다. 육체가 영화롭게 되는 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는 것입니다 (하반절). 하늘을 사모하는 자, 종말을 사모하는 자는 일상사를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은 벗으려는 것이 아니라 입으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헬라 철학의 이원론에서는 영혼은 거룩한데 육체가 방해하므로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구원으로 생각했습니다. 육체를 죄악시했습니다. 곧 벗는데 중심을 두었습니다. 그 영향을 받은 기독교 이단은 영지주의였습니다. 영지주의는 한편으로는 쾌락주의로, 또 한편으로는 금욕주의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관념론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2절에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 했습니다. 육체가 필요없는 것이 아니고 영화를 위해 점점 거룩한 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부패성, 연약성을 벗으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덧입으려는 탄식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으려는 것이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려는 것이고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만들어지려는 것입니다 (롬13:14, 벧후1:4, 엡4:24).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려는 것입니다 (갈4:19, 엡4:13). 3절에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고전3:12-15, 롬8:13). 모든 육체가 영화롭게 변화되나 그 빛과 자랑은 이 세상에서 노력한 결과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육체와 세상 자체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하며 목적삼지 말아야 합니다.
②성령이 보증한다고 했습니다.
5절에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신자의 보증이 됩니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에 우리 안에 들어와 떠나지 않고 우리를 하나님의 목적대로 이끕니다. 성령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느끼지 못해도 이미 믿을 때에 들어와 계시는 것입니다 (요3:5-8).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아들로서 거듭난 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고전12:1-3, 롬8:15). 그 내주하신 성령은 우리 속에서 우리가 성장하도록 돕습니다 (고전2:13-14, 롬8:5-8, 26). 마음 속에 악행과 선행에 대한 갈등이 있는 자체가 성령이 양심을 통해 역사하는 증거입니다 (롬7:11-15). 그 내적 싸움은 부정적인 싸움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 싸움을 이길 수 있도록 돕습니다 (롬8:1-2, 5:3-4). 그러다가 마침내 영화롭게 되게 합니다 (엡1:13,14,30, 롬8:11). 성령은 우리의 구원과 성화와 영화의 보증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구원과 성화와 영화에 대해서 결코 취소되거나 실패할 수 없습니다.
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고 했습니다. 몸에 거할 때 따로 거한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 하늘나라에 가기 전에는 연약하기 때문에 갖은 실패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성령께서 책임져 주시기 때문에 실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책임져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원 얻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그 뿐 아니라 얻어낸 구원조차 지켜 내지 못합니다. 더욱이 완성 때까지는 이끌어 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돕습니다 (롬8:26). 그러므로 담대하게 됩니다. 코끼리가 다리를 건너는데 쥐가 코끼리 등에 타고 있었는데 다리를 다 건넌 다음에 쥐가 코끼리에게 "우리가 다리를 건넜어!"하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쥐가 건넌 것은 코끼리 때문인 것입니다.
③믿음으로 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7절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열심이나 각오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과 약속에 대해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며 우리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시며 나에게 무엇을 약속했는지를 알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실패하지 않는 것을 말하기 보다 실패 속에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을 외면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해도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고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눅15:11-32). 우리의 실패가 실패가 아니며 우리의 변덕이 하나님의 변덕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실패했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에 대해 신뢰하는 것입니다.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생활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보상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생활의 어려움이 생기고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소홀히 여기거나 우리의 편을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성도라 할 수 없고 오히려 불교 신자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 같은 꼴이라 해도 그것 때문에 신앙의 근거나 내용이 흔들리거나 신앙의 목적과 약속에 변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8절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소원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잘되고 잘사느냐가 아니라 주와 함께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소망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보상받지 않고 하나님께 보상을 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평가받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딤후4:6-8). 이는 성령이 보증이 되어 주기 때문에 나태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현세가 고달파서 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도피적인 차원의 내세관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를 사랑하고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주를 만나고 싶고 주께서 기뻐하는 신앙이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와 함께 영원히 살 날을 바라보며 주를 사모하고 주의 사랑과 기쁨을 얻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기 대문에 가장 나쁜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가장 나쁜 길과 어려운 길이 맡겨진다 해도 주님이 원하신다면 못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행20:22-24). 이 세상에서 안되니까 예수나 줄 믿자는 것이 아니라 주를 사랑하기에 우리에게 어떤 인생을 요구하시든지 어떤 자리에 있으라 하든지 거절하지 안는다는 것입니다 (빌1:20-24). 주께서 오늘 우리를 통해 하실 일이 있다면 우리의 기쁨을 보류하고 환난과 핍박이 기다리는 인생을 살더라도 어떤 곳이라도 기꺼이 가리라는 신앙입니다. 그것이 종말론적인 삶이요 성령의 보증을 아는 신앙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형통과 평탄을 구할지라도 그것이 성령께서 우리를 온전케 해 나가려고 도우시는 일에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④주를 기쁘시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9절에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주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를 기쁘게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주를 기쁘게 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자들이 많습니다. 자신을 위하면서도 세상적이지 않게 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해도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합니다. 그것은 기도라기 보다는 치성에 해당합니다. 헌금을 하거나 봉사를 하는 것도 자기의 대단함을 은연중에 드러내기 위해서 합니다. 그래서 요즘 어떠냐고 물어 보면 잘된다고 대답합니다. 잘 안 된다고 하면 하나님이 외면한 자로, 하나님 앞에 한 번도 떼를 써보지도 않은 자로, 믿음 없는 자로 평가 받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신앙적인 자체보다 다른 문제로 신앙이 흔들립니다. 하나님을 찾는데 하나님이 대답을 하지 않았거나 거룩하게 살려고 했는데 안되었거나 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점수가 좋지 않았거나 우산을 가지고 나갔는데 비가 오지 않을 때 흔들립니다. 우리가 믿어 주는데 그까짓껏 하나 안도와 준다는 식입니다. 주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 무언가 해 드리므로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 놓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소원, 기쁨, 성취, 행복을 목적으로 오용하지 말고 주를 기쁘게 하는 목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빌1:20-21). 그러기 위해서 첫째는 주의 뜻에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골3:16-17). 신자는 무엇을 하든지 주 예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도성인신하여 구속을 이루신 것은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심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두번째는 주께서 맡기신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10절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심판대 앞에서 드러내는 일들은 생전에 행한 일들을 평가받는 것입니다. 종말적 신앙관입니다. 주 앞에서 서는 자로서의 시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현실 도피적 사상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슬 데 없고 저 세상만이 진짜니까 빨리 가겠다는 것 아닙니다. 그 때를 위해 현재의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웨슬레는 "영국을 내게 주옵소서"라고 했는데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한 시대를 바꾸어 놓는 일도 필요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충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나 줍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누구에게는 주고 누구에게는 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희소 가치에만 몰두합니다. 세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고 네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입니다. 사람들은 네잎 클로버를 찾기 위해 수많은 그리고 이미 앞에 있는 세잎 클로버는 짓밟습니다. 가장 평범한 자리이지만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한 달란트를 받았다고 다섯 달란트 줄 때까지 때 쓰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열 달란트 남기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그것이 허황된 것이고 자신이 남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한 달란트로 장사해서 두 달란트 남기면 됩니다 (마25:14-30). 집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시131:1). 그럴 때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2. 사역의 목적과 요인
11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당시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이 역사적 예수를 직접 접했다는 사실과 (16절)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공식적인 추인을 받았다는 점과(3:1) 환상을 보았다는 점 등을(12:1-7) 자랑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사도권을 그와 같은 외적 증거들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그와 같은 외적 증거로 판단하지 말고 내적 증거들로 판단할 수 있기를 권하였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외모로 보지 않고 마음(중심)으로 보는 자들이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바울은 외적인 것으로 일하지 않았고 내적인 것으로 일하려 했습니다. 11절에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주님이 자신에게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다시 주님 앞에 가게 될 때 어떤 모습으로 평가받을지를 생각하면서 사역을 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주님 앞에서 사역을 바로 감당하지 못한 자로 나타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주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일했습니다. 바울이 외모로 일하지 않고 그런 중심으로 일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것을 사람들도 그런 점을 보고 인정해 주기를 바란 것입니다.
①하나님을 위해 일했습니다.
13절에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위해 일하지 않고 고린도교인들을 위해 일했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린도교인의 유익을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위해 일한 것이었습니다. '미쳤어도'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바울이 비난하는 자들로부터 미쳤다는 말을 들을 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과거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다고 도리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증하는 것을 본 베스도 총독은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행26:24). 무디(Moody)도 번창하던 사업체를 포기하고 목회자가 되어 시카고에서 주일학교와 교회를 섬길 때 '미친 무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했습니다 (막3:21).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을 위해 낸 열심이었습니다.
②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일했습니다.
14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미친듯이 사역을 한 것은 주의 사랑이 강권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바울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바울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이 자신을 사랑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서 죄를 없이 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또한 주님이 자신을 사랑하며 자기 같은 죄인에게 생명 살리는 일을 맡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같이 부족한 자를 구원해 주시고 사역을 맡겨 주신 그 사랑에 감복하여 주를 섬기는데 미치도록 열심을 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죽은 것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은 것입니다 (갈2:20). 이에 대한 해석은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전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전 인류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오리겐(Origen)은 예수님이 전 인류를 위해 죽었기 때문에 지옥 갈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지옥 갈 사람이 많다고 말합니다 (마13:41-42, 49-50, 18:8, 25:41, 막9:47-49). 두번째는 예수님이 전 인류를 위해 죽으나 그를 믿는 자만 구원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알미니우스(Alminius)는 예수님이 전 인류를 위해 죽었으나 사람의 개인적인 자유 의지에 의해 믿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cf. 요3:16, 5:24).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약화시킨 것이고 예수님의 구속의 효과를 약화시킨 이론입니다. 세번째는 예수님이 택자를 위해서만 죽었고 택자만 구원을 받는 자는 것입니다. 칼빈(Calvin)은 예수님이 택자를 위해서만 죽었고 택자는 반드시 믿게 되고 택자는 모두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엡1:4, 행13:48, 롬8:30, 9:18, 11:6-7). 결국 우리가 먼저 주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우릴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주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먼저 우릴 사랑한 것입니다 (요일4:19, 롬5:6-10).
15절에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릴 사랑해서였습니다. 우릴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주를 위해 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아닌 주를 위해 살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로마서14:8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5:10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1858년 해버갈(F.R.Havergal)이라는 여인은 아버지의 아픈 눈을 치료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했습니다. 독일에서 어떤 목사님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 목사님 댁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그림 아래에 '내 너를 위하여 이 일을 하였건만 날 위해 무엇을 했느냐?'는 글귀가 씌여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글귀를 보고 종이 한 장에 그것을 주제로 한 시(詩)를 지었습니다. 그녀는 그 시가 만족스럽지 못해 화로에 넣었는데 그 종이가 밖으로 튀어 나왔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 종이를 보고 그 시를 출판해 볼 것을 권면해서 출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에 필립 블리스(P.Bliss)가 곳을 붙여서 찬송가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새찬송가 311장).
16-17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피조물'(κτισιs)는 창조물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구속을 믿고 거듭난 사람은 새롭게 창조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와 함께 죽은 자로서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서 전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목적, 가치, 시각이 달려져야 합니다. 바울이 예수 믿기 전에는 외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외적인 것을 얻기 위해 주의 성도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은 다음부터는 내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내적인 것을 위해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복하여 예수님을 위해 살고 예수님이 맡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인들도 외적인 것으로 판단하지 말고 내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적인 것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사역자의 위치와 사명 (18-21절)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①예수님은 화목케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습니다. 특히 믿는 자를 거듭나게 하여 새로운 창조물이 되게 한 것도, 그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범죄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원수가 되었습니다 (사59:2, 롬5:10).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거룩하신 분으로서 죄인들과 화목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과 화목하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죄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죄인들의 죄값으로 죽으셨습니다 (롬6:23). 그로 인하여 죄인들이 예수님의 구속을 믿을 때 죄 사함을 받고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죄가 없어지므로 하나님과 다시 화목된 것입니다 (롬5:10, 골1:15-22). 결국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이었던 우리 사이를 화목시키시기 위해 오셔서 죽으신 것입니다.
②사역자는 화목케 하는 직분을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와 죄인들을 화목하게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역자들을 통해 자기와 죄인들을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고 계속해서 화목하게 하는 일을 하게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화목케 하는 직책을 따라 고린도교인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使臣)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과 화목되게 하는 사역을 했습니다. 로마서9:3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또한 이미 믿은 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하나님과 계속해서 화목한 상태에 있게 하는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잘못된 교훈을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씀 위에 굳게 서기를 권면한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긍휼과 은혜를 입기를 바란 것입니다. 모세도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 들어섰을 때 시내산 아래서 금송아지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공의로 심판하려 했습니다. 그 때 모세는"~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의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고 했습니다 (출32:31-32).
우리의 사명적 위치가 화목케 하는 직분을 가진 자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 자신의 신앙성장에만 치우쳐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가장 우선된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자기 혼자 신앙생활 잘하는 데만 그쳐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는 방법에 있어서는 정죄보다는 긍휼과 배려와 섬김이어야 합니다. 법대로 하려 하기 보다는 긍휼을 따라 배려해야 합니다. 법이나 명문 법을 세운 것은 살리는 데 목적있지 죽이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통법규를 만든 것은 교통의 흐름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이지 범칙금 부과해서 세수 올리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강원도 한 초등학교에서 체육시간에 피구를 하다가 한 만 아이 20명이 죽었는데 10명은 공 맞아 죽고 10명은 금 밟아서 죽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운동경기에서 법칙을 만든 것은 서로 즐겁게 운영하기 위함이지 이기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운동회하는 것은 서로 즐겁게 운동하므로 하나됨을 확인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살리려는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제 고등학교 때 절친했던 친구가 통합측 신학교를 갔습니다. 예수교 장로회에서 통합측과 합동측이 있는데 교리적으로 통합측은 넓은 편이고 합동측은 좁은 편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말입니다. 합동측은 야구를 하면서 스트라이크냐 아웃이냐 싸우다가 경기를 중단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법이나 교리나 명분이 중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목적을 잃거나 사람을 죽여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걸을 때 제자들이 길을 열면서 이삭을 잘랐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보고 안식일을 범했다고 정죄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하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막2:25-27). 안식일은 사람이 안식을 얻기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옳은 점만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 증명하려다가 사람을 죽여서도 안됩니다.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이 좋은 면이 있으면서도 황당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무라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자녀가 밖에 나가 가게에 있는 떡을 훔쳐 먹었습니다. 가게 주인이 아이를 붙잡고 데리고 찾아왔습니다. "이 얘가 우리 가게에서 떡을 훔쳐 먹었습니다." 사무라이는 아이에게 "떡을 먹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안 먹었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사무라이가 "무사의 자식답게 정직하게 대답해라"고 했는데 아이는 그래도 안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무라이는 자기 자식이 떡을 먹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자기 자식의 배를 갈라서 위장을 뒤집어 보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솔로몬의 재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싸우다가 솔로몬에게 까지 왔습니다. 법정에서도 서로 자기 아이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생각하다가 그 아이를 칼로 절반으로 나누어 절반씩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진짜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죽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없어서 그 아이는 자기 아이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기 아이인데 자기 아이라고 한 것은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거짓말하지 않는 것보다 아이를 살리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너무 법, 명분, 자기의 의만을 나타내려 하지 말고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나 믿음이 어린 사람에게 배려가 필요한 것입니다.
<結言>
바울은 사역에서 외모로 하지 않고 중심으로 했습니다. 자기의 의를 나타내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려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려고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처럼 자신도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어 고린도교인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려 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로부터 보냄 받은 내적 증거였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로 그리스도께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은 자인 줄 알고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데 헌신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