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고린도후서10:1-18

<題目> 사도권의 참 목적


<序言>

  본 장에서부터는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 변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고린도에는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유대인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교인들 중에는 그들의 가르침에 미혹을 받아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의심하고 바울을 적대시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을 반대하는 교인들은 바울과 교제가 없는 자들이었고 교인들이 충성하지 못하도록 미혹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교회 내에 그런 자들을 제거하는 동시에 교인들로 하여금 미혹되지 않게 하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고린도교인들에게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 변호하게 됩니다. 내용구조는 영적인 싸움을 하는 법(1-6절), 영적인 권세를 사용하는 법(7-11절), 영적인 일을 헤아리는 법(12-18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영적인 싸움을 하는 법 (1-6절)

 

  1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2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은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을 떠나 편지로 쓸 때는 강한 어조로 담대하게 말하지만 막상 대면하면 비굴하게 유순한 말로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바울은 그 비난하는 말을 빗대어 비난하는 자들이 그렇게 말할 정도로 자신이 그렇게 한 것은 고린도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대하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대할 때 강하게 책망하므로 상처받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을 대면하기 전에 그들이 바로 서기를 바래서 미리 편지할 때는 강하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곧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을 대면할 때 육신을 따라 바울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대하는 것처럼 단호하게 대하지 않고 은혜롭게 대하기 위해 미리 편지를 통해 엄중하게 책망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3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바울을 모함하는 자들은 바울이 세상적인 가치와 기준과 동기에 따라 행동하며 육체의 이기적인 욕망을 따라 행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에 대해 바울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3절). 비록 세상에 속해 있고 육체의 지배를 받는 실존이지만 결코 세속적이거나 육체적인 대상이나 방법이나 목적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대상과 방법과 목적으로 싸운다는 것입니다.

 

  ①영적인 싸움의 대상은 견고한 진(陣)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악령입니다. 베드로전서5:8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고 했고, 에베소서6:12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했습니다. 악한 영은 사단과 마귀와 귀신들입니다. 악령들은 선한 천사로 지음받았으나 하나님보다 높아지려고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하늘에서 쫓겨났습니다. 자기들이 가야할 유황불 못과 그 곳에 가야 시기가 얼마 남지 않은 줄 알고 분노하여 지상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지상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실패하게 하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여 승천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방해하는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하는 교회와 성도를 공격합니다 (계12:7-12, 사14:12-15, 겔28:17-18, 벧후2:4, 유1:6).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움킬 것은 찾는 사자와 같이 맹렬하게 우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참소하고 성도와 성도 사이를 이간합니다 (계12:10, 욥1:7-12, 2:3-6, 약3:14-16).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하여 교회와 성도를 공격합니다 (창3:1-5). 때로는 간악함으로 핍박하기도 하고 때로는 거짓으로 미혹하기도 합니다 (요8:44, 대하18:20-23, 고후4:4, 11:14). 우리는 그들 때문에 하나님을 훼방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기도 하고 교회를 반대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기도 하고 환경을 원망하기도 하고 자신을 비관하기도 합니다. 영혼을 파리하게 하고 마음을 번민하게 하고 육체를 병들게 합니다. 그들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신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대적들입니다.

 

  둘째, 죄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죄'입니다. 히브리서12:4에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고 했고, 로마서5:12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원죄 때문에 죽음이 오게 되었습니다 (롬6:23). 그 죄 때문에 죽음과 그 증후군인 공포와 번민과 갈등과 미움과 질병이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죽음과 그 그림자들로 인하여 고난과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우리가 날마다 짓는 본죄(자범죄)로 인하여 고통이 더해집니다. 다윗은 그 고통에 대해 뼈가 쇠하고 진액이 마름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시31:10, 32;3-4). 죄야말로 우리로 하나님이 주신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대적입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사단은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우리로 하여금 범죄케 합니다.

  

  셋째, 부패성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성품입니다. 베드로전서2:11에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정욕'은 부패한 성품의 총칭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은 우리 속에 있는 부패한 성품입니다. 우리 속에는 부패한 성품들 곧 죄성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악한 성품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 등입니다 (마15:19, 막7:21-23). 그런 의미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렘17:9). 그런 악한 속성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세력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세력은 우리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 말씀대로 선을 행하려 할 때마다 갈등하게 하고 결국 범죄하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속에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는 선한 마음이 있는 동시에 죄의 법을 따르려 하는 악한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항상 두 세력이 싸우는 것을 발견 했고, 결국 악한 마음이 이겨서 죄의 구렁텅이로 끌고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악한 마음이 '법' 곧 세력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그 세력이 항상 이겨서 죄를 짓게 하는 싸이클을 벗어날 수 없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고 탄식했습니다 (롬7:15-24). 그런 관점에서 바울은 일평생 원수가 자기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9:26-27에서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범죄하는 것이 자기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이 매일 기생집을 갑니다. 늘 마음에 번민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결심하고 기생집을 안 가려고 작정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말이 그 기생집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김유신 장군이 집에 올 때 늘 기생집으로 갔기 때문에 말도 습관이 되어서 기생집으로 간 것입니다. 김유신 장군은 그 말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죽이기까지 했다는 것은 자기가 갈등하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평안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로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원수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나 물질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속에 거하는 부패한 성품입니다. 교만과 욕심과 거짓과 나태입니다.

 

  넷째, 환경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나가는 데 방해되는 모든 요소들이 싸워야 할 대상입니다.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사상일 수도 있고 제도일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16:23에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구속을 이루어야 할 것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인정과 연민으로 만류할 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한 말씀입니다. 그런 모습은 예수님이 모친에 대해서 하신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요2:4). 본문 4절에는 '모든 이론' 5절에서는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 '모든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이론'은 하나님과 분리된 세상 사람들의 모든 사고와 도모를 말합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은 하나님을 알아 가는 데에 방해되는 모든 교만한 마음을 말합니다. '생각'은 부정적인 계획과 계략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영적 전투의 대상으로 여기고 그것들이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물리치려 한 것입니다. 영적 전쟁이라 하면, 선교영역에서의 전투가 있고 교회영역에서의 전투가 있고 개인의 영역에서의 전투가 있는데 바울이 말한 전투는 교회영역에서의 전투를 말한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에 이런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대적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데에 방해물들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자기 마음과 생각 안에 있는 이러한 요소들과도 싸워야 합니다. 그런 요소들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데에 큰 방해물들입니다. 이것들 때문에 바른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에 원한을 가지고 피흘리기 까지 싸워야 합니다.  

 

  ②영적인 싸움의 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4절에 "~ 어떤 견고한 진(陣)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강력)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의 무기는 육체에 속한 세상적 학문, 인간적인 영향력, 권위있는 추천서, 수사학적 달변 등이었습니다 (3:1, 고전2:1). 그러나 바울이 싸우는 무기는 영에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mighty through God -KJV).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고 성도들을 미혹하는 어떠한 교훈들이 아무리 견고한 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물리친다는 것입니다. 모든 잘못된 이론과 사고를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킨다는 것입니다. '능력'(δυνατα)의 원형은 뒤나미스(δυναμιs)로서 다이나마이트(폭탄)의 유래어입니다. 바울은 죄에 대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고전15:57). 죄성에 대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기게 한다고 했습니다 (롬8:2). 사역에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한다고 했고 (살전1:5),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고전2:4). 에베소서6:14-17에는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로마 군병의 무장한 모습을 연상하며 한 말씀입니다.

 

  ③영적인 싸움의 목적은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5절에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것들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싸움을 한다는 것입니다. 6절에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들어온 잘못된 사상과 이론과 생각들을 퍼뜨린 사람들을 물리치는데 그것은 바울 자신에게 복종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복종시키려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것은 비방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바울이 육신대로 행하는 자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자기의 교훈에 복종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복종시킴이 우리 자신의 권위를 높이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려 함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려 함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우리의 사고와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받게 하여 주께 복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2. 영적인 권세를 사용하는 법 (7-11절)

 

  1~6절은 유대 교사들의 비방 곧 바울이 비겁하다는 비방에 대해 영적 싸움을 하는 대상과 방법을 말하면서 해명했습니다. 7~11절은 바울이 약하다는 비방에 대해 영적 권위를 사용하는 목적과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9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 생각하지 않게 함이라

  10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11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

 

  ①유대 교사들은 바울을 외모로만 판단했습니다.

 

  유대 교사들은 바울에 대해 비방하기를 편지는 무게와 힘이 있으나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도 시원치 않다고 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조차 그 말을 옳게 여기고 바울과 그가 가르친 교훈을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외모는 사실 볼품이 없었습니다. 사학자 요세프스(Josephus)에 의하면 머리는 대머리이고, 눈썹은 일자눈썹이고, 코는 메부리코이고, 다리는 안짱다리이고, 키는 작았다고 합니다. 지병인 눈병도 있었습니다 (12:7, 갈4:13-14). 거기에다가 말이 시원치 않았습니다 (10절). 바울은 사역 현장에서 베드로나 요한이나 야고보처럼 직접적 전달도 없었고 아볼로처럼 웅변과 수사학에 뛰어난 것도 없었고 유대 교사들처럼 추천서(천거서)도 없었습니다. 사실 바울이 그만한 실력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도 율법과 철학과 수사학과 변증학에 뛰어났습니다. 회당에서 율법 강론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었고 아덴에서 철학 논쟁에서 보면 스토아철학자들을 굴복시켰습니다. 바울이 아가야 지역에 전도하기 위해서 헬라(그리이스) 철학의 본산지 아덴(아테네)에 왔을 때 그가 가진 헬라 철학에 대한 지식과 논리로 복음을 전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논쟁에서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없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고린도에 내려와 전도를 할 때는 내용에 있어서 철학을 전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방법에 있어서도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고전2:1-5). 그러기에 외모를 보거나 언변을 보거나 철학적 지식과 논리를 크게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호감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분별력을 가진 자는 다르게 보았습니다. 갈라디아교인들은 바울의 외모를 보고도 그것을 인하여 업신여기지 않았고 천사나 예수님처럼 생각했습니다 (갈4:13-14).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설교할 때는 듣는 사람들이 허메(신들의 사자, 신탁 전달자, 웅변가라는 뜻)신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행14:8-18).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용모와 지식과 명예와 부귀 등으로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결혼도 외모를 보고 하면 안됩니다. 어떤 대학교수가 친구의 부탁으로 친구의 처남에게 여자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여자는 키도 크고 잘 생기고 이름있는 집안의 여자입니다. 그런데 결혼 후에 시집온 그 여자가 집안 식구들과 불화하고 재산 싸움을 했습니다. 그 후로 두 교수는 서로 말도 하지 않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전에 증권회사 직원과 어떤 여자가 결혼을 하려다가 일주일 남겨 놓고 파혼했습니다. 그 이유는 증권회사가 부도났다는 이유였습니다. 목사 아들과 목사 딸이 결혼을 하기 위해 약혼을 했는데 그 후에 혼수문제로 문제가 되자 딸 아버지 목사가 파혼을 시켰습니다. 교회나 목회자를 볼 때도 외모로 보면 안됩니다. 물론 설교에서 철학이나 변증학이나 심리학이나 수사학이 등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되고 성령의 감동과 확신으로 전하면 그것을 보고 존중해야 합니다 (고전2:1-5, 살전1:5).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다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의 아들들 가운데 한 사람을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해 찾아가서 엘리압부터 일곱번째 아들까지 제쳐놓고 여덟번째인 다윗에게 세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삼상16:6-13).   

 

  ②바울은 주께서 주신 권세를 주를 위해 바로 사용했습니다.

 

  만일 비방하는 자들이 스스로 그리스도께 속했다고 생각한다면 바울 자신은 더욱 그리스도께 속한 자인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7절). 자신이 주께 받은 권세는 지나치게 자랑해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8절).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주게 보냄을 받았고 객관적으로도 그의 가르침을 통해 많은 열매들이 맺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온유한 면을 보고 권위가 없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권위로 책망하는 편지 내용은 그들을 망하게 하려 함이 아니라 바로 세우려는 것입니다. 그가 속히 그들에게 나아가지 않고 미루었다가 약하게 나아간 것도 역시 사랑을 근거한 것으로서 고린도교인들을 세우려 함입니다. 오로지 책망과 인내 모두가 주를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주게 받은 권세와 권위를 주의 교회를 세우는데 사용한 것입니다. 바울은 전에 고린도전서를 편지로 보냈는데 그 편지를 보낸 자나 대면한 자나 모두 한 바울이라고 했습니다 (11절). 그것은 같은 중심으로 권세를 사용했음을 말합니다.   

 

  장로교 제도의 근본원리(根本原理)는 「첫째,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모든 권위의 원천이시다. 둘째, 그리스도는 말씀을 수단으로 권위를 행하신다. 셋째, 그리스도는 교회에 권위를 주신다. 넷째, 다스리는 권세는 기본적으로 지교회(支敎會)에 있다.」입니다. 주님은 교회에 교리권과 치리권과 봉사권을 주었습니다. 특히 본문과 관련하여 치리권을 주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인에게 죄가 드러나면 책벌해야 합니다. 권면-근신-면직-수찬정지-출교 등의 벌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 모든 책벌은 회개시켜 바로 세워 주 예수의 날에 영혼이라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본받아 범죄하지 않도록 하여 교회의 거룩성을 수호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책벌만 상책이 아니라 참음과 기다림과 관용도 있어야 합니다. 두 가지 성격을 잘 겸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한 쪽을 강조하면 다른 한쪽이 약하게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람도 살리고 교회의 성성도 지킬 수 있는 목적을 가지고 두 가지 성격을 잘 활용하는 것이 주님이 주신 권세를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 양면성을 잘 활용하는 지도자가 훌륭한 지도자이고 그런 양면성이 나타날 때 그 중심을 보는 교인이 주님이 주신 권세에 대해 잘 아는 자입니다.     

 


       3. 영적인 일을 하는 법 (12-18절)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을 변호하는데 주력했는데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는 바울을 비방하는 내용을 공격하는 형태였으나 본문은 그들의 잘못된 사역관을 꼬집어 공격합니다. 바울은 그들과 달리 자신의 선교사역의 활동 범위를 밝히므로 진정한 사역을 어떻게 헤아려야 하는데 알게 합니다.   

 

  ①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한계를 따라 일했습니다.

 

  12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13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4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5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16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거짓교사들은 자기를 칭찬하고 헤아리고 비교했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척도와 표준에 의해 판단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했습니다. 바로 분석하지 못하고 우월과 자만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행한 일과 자신들이 갖고 있는 천거서로 자신을 자랑했습니다. 거짓교사들은 남의 터 위에 세우고 그것을 자랑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한계를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범위의 한계를 따라 사역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구역 곧 이방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해준 활동 영역에서 일하고 그 일을 한 것과 그 일에서 열매 얻은 것으로 자랑했습니다 (행9:15, 22:21). 자신의 판단과 기준과 척도로 판단하지 않았고 그것으로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곧 하나님이 맡겨 주신 곳,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이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판단했습니다. 그것을 자랑했습니다. 고린도에 와서 복음을 전한 것도 그것을 기준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나아간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인의 믿음이 성장하므로 또 다른 곳으로 가서 사역하므로 고린도교인의 뒷받침으로 사역이 잘되길 소망한 것입니다. 그것은 남의 한계를 넘보려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더욱 넓게 전하려는 것입니다. 서바나(스페인)까지 전하려 한 것입니다 (롬15:22-24).

 

  오늘날 남의 터에 세우는 자들이 많고 그것으로 자랑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다른 교회 성도들을 데려다 놓고 통계에 집착하여 그것으로 자랑하는 사역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교역자들이 기존의 교인들을 데리고 나가서 개척을 하고 그것으로 자랑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범위의 한계를 따라 사역을 해야 하고 그것으로 자랑해야 합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맡은 일에 간섭하지 말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고전4:2).   

 

  ②바울은 사람이 아닌 주께 칭찬을 받으려 했습니다.

 

  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거짓교사들은 자신들의 척도에 따라 자신을 자랑했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했습니다. 자랑하려면 주 안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할 일을 자신의 능력으로 삼지 말고 그 일을 시키고 그 일에 도구로 사용된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곧 하나님, 주를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렘9:23-24). 주께 인정을 받고 칭찬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설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고전4:5). 그 때에 상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평가 기준은 사람과 다릅니다 (계2:8-11, 3:14-22). 겉으로만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인정받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 지에 집착하여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도 안됩니다.

 

<結言>

  바울은 주께서 맡긴 범주에서 사역을 하려 했고 그것을 잘하는 것으로 자랑했습니다. 바울은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 인정받고 칭찬받고 상을 받으려 했습니다. 모든 사역을 주님께 표준을 맞춘 것입니다. 빌립보서3:8-9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