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고린도후서11:1-33
<題目> 참 사도와 거짓 사도
<序言>
바울은 전 장에서 적대자들의 비난에 대해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했습니다. 이제 본 장에서는 적극적이고 격렬한 어조로 거짓교사들을 용납한 고린도교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고 적대자들에 대한 자신의 사도직의 우월성을 증명합니다. 바울의 이 증명은 단순히 개인적인 자랑이나 이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인들의 바른 신앙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참된 자랑의 자세와 성도들이 자랑해야 할 내용은 복음의 능력과 자신의 연약함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교회에 대한 열심(1-6, 13-15절), 교회에 대한 관심(7-12절), 교회를 위한 염려(16-33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교회에 대한 열심 (1-6, 13-15절)
①열심을 내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1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바울을 자신이 고린도교회에 대해 얼마나 열심을 가지고 있는지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랑은 자신을 위한 자랑이 아니라 고린도교인을 얼마나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열심을 내는지 변명하는 자랑으로서 하나님을 위한 자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리석을 것으로 표현한 것은 겸손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바울의 열심은 고린도교인들을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중매하기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중매'는 정혼이나 약혼을 의미합니다. 마치 아버지가 딸을 정결한 처녀로 길러서 남편에게 시집을 보내는 심정인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성도는 신부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남편으로서 주의 재림 때에 혼인잔치를 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엡5:22-33, 계19:1-9).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어떻게든지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그리스도를 맞이 하게 하기 위해 고린도교인들을 위해 열심으로 책망하고 훈계하는 것입니다. 특히 고린도교회는 당시 거짓교사들의 미혹을 따라 부패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교훈적인 정결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로 하여금 어떻게든지 거짓교사들의 미혹에 들지 않도록 교훈적인 정체성을 가지도록 거짓교사들을 경계시키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주님이 일하실 때까지 정결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교리에 있어서 거룩함, 믿음에 있어서 신실함, 행위에 있어서 경건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계14:3-4, 렘20:9).
③거짓교사들을 경계시켰습니다.
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4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고린도교인들이 거짓교사들을 용납한 것을 책망하고 그들을 경계시키고 있습니다. 거짓교사들은 첫째, 거짓말로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3절). 뱀이 하와를 간계로 미혹한 것과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창3:1-5). 에덴동산에서 뱀이 아담의 아내 하와를 미혹시킬 때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문제를 제기하는 말을 하고 하나님 말씀을 부정하는 말을 하고 자신의 생각을 대치하는 말을 했습니다. 참으로 간계한 접근입니다. 거짓교사들은 사단의 사주를 받습니다. 사단은 처음부터 거짓말장이로서 간교하게 미혹을 합니다 (요8:44). 신자들이 즉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낚시하는 사람이 물고기를 잡을 때 낚시 바늘에 미끼를 달아 미혹하듯이 유혹합니다. 둘째, 다른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4절).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믿을 때에 한 성령을 받는다는 교훈입니다 (롬1:17, 3:28, 5:1, 갈2:16, 3:26, 엡2:8. 빌3:9, 고전12:13, 고후5:5). 참 복음은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행4:12). 그런데 거짓교사들은 유대주의자(세대주의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더라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곧 율법을 행해야 아브라함의 언약에 참여한 자가 되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복음으로서 복음을 흐리게 하여 결국 복음을 변질시키고 복음을 부정하게 하려는 다른 영의 역사인 것입니다. 오늘날 여호와증인에서 자신들의 협회인 워치타워에 가입이 되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무료성경신학원(이만희)에서 이만희가 구원자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교단에 가입되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단교리로서 다른 복음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다른 복음을 받은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갈1:5-10). 셋째, 외식으로 가장한다는 것입니다 (13-15절).
13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그리스도의 사도로, 광명한 천사로, 의의 일꾼으로 가장합니다. '가장'은 거짓으로 꾸미는 변장을 말합니다. 본질은 사단적인데 하나님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모방의 천재로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본 따서 하나님처럼 이적과 기사로 미혹합니다. 거짓교사들도 참 선지자들처럼 이적과 기적을 베풉니다 (계13:13). 그러므로 거짓교사들의 미혹에 들지 않으려면 먼저 교훈(교리)으로 분별하고 그 다음에 열매(행위)로 구별해야 합니다 (요이1:6-10, 마7:15-18). 그리고 바른 목회자에게 배울 수 있을 때 부지런히 배워야 하며 배운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딤후3:14).
③자신을 자랑했습니다.
5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6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바울은 자신이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은 예수님의 12제자 중 주제자들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으나 최근 많은 주해자들은 고린도교회를 미혹시킨 거짓교사들을 가리킨다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을 미혹한 거짓교사들이 예수님의 주 제자들과 비교하면서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했기 때문에 바울이 이미 예수님의 주 제자들과 비교했던 일이 있었던 것처럼 그들과 비교했을 수도 있습니다 (고전9:1, 15:5-8,10, 갈2:9). 하지만 본 장이 거짓교사들에 대해 경계시키는 책망을 하고 있다는 맥락에서 볼 때 후자가 옳을 것입니다. 거짓교사들은 자신들을 사도들보다 훨씬 수준있는 사도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율법 지식과 철학 지식을 기반으로 수사학과 웅변술을 구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미혹된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이 그들보다 말을 못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시인했습니다. 바울은 거짓교사들과 비교했을 때 말에는 부족하지만 지식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은 인간적인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수사학적 웅변을 가리킬 것입니다. '지식'은 신적 계시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일 것일 것입니다. 바울이 율법이나 철학이나 수사학이나 웅변술이 그들에 비해 결코 뒤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행17:16-18).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 전할 때 그런 인본주의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오직 복음을 순수하게 성령의 능력과 확신으로 전하려 했습니다. 오직 주의 십자가만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전2:1-5). 현상적으로 그런 모습을 본 거짓교사들과 미혹된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이 말에 능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언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과 말씀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을 확신있게 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참 사도된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높은 가치로 여기고 그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그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2. 교회에 대한 관심 (7-12절)
바울이 고린도교회로부터 사례금을 받지 않고 다른교들에서 사례금을 보충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들어온 거짓교사들은 그것을 바울에 대해 탈취한다고 비방했고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한 증거로 삼았습니다. 당시 헬라(그리이스) 사회에서는 인정받는 수학자나 철학자 이른바 소피스트들은 전문적인 사람들로서 가르친 후에 사례금을 받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가르치고도 보수를 요구하지 않는 자는 거짓 선생이나 아니면 시시한 선생으로 의심하고 그 가르침을 가치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고린됴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은 데 대해서도 바울이 거짓사도이거나 그의 가르침이 가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고린도교회에서 사례금을 받지 않고 다른 교회에서 받는 것에 대해서도 고린도교인들을 사랑하지 않는 무관심한 처사라고 힐난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그 비방을 곧이 듣고 자비량하는 바울에 대해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①다른 교회에서 부족한 요를 보충했습니다.
7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8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
9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바울의 사역자가 가지는 사례에 대한 권리 인식은 뚜렷했습니다. 디모데전서5:18에 "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고 했고 고린도전서9:11에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라고 했고, 갈라디아서6:6에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그런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량했습니다. 그는 장막 만드는 일을 했는데 밤낮으로 일을 했습니다 (행18:3, 20:34-35, 살전2:9). 그리고 부족한 것은 다른 안정된 교회에서 보충받았습니다. 빌립보교회에서도 급료를 받았고 (빌4:14-18),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에게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안정된 교회와 믿음있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는 받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는 아가야 지방인데 아가야 지방은 아덴(아테네)를 중심으로 헬라(그리이스) 철학자들인 소피스트들이 진리를 가르친다고 강의를 하고 다녔는데 그들은 모두 사례비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사례비를 받으면 자신이 전한 복음 진리가 소피스트들이 강의한 것과 같이 취급받을 수 있기 때문에 받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교회가 아직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배려하기 위해 받지 않은 것입니다. 곧 복음 진리를 위함이고 교회를 위함이고 성도를 위함이었습니다. 복음을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값없이 준다는 신념으로 그리한 것입니다.
②교린도교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10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11 어떠한 까닭이냐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12 나는 내가 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이 그 자랑하는 일로 우리와 같이 인정 받으려는 그 기회를 끊으려 함이라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사례금을 받지 않고 다른 교회에서 보충한 것은 어떻게든지 고린도교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이유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희생하는 것은 그들을 잘되게 하여 그들을 높이려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어렸을 때는 재정적인 권리 주장이 마치 종교적인 사업으로 비치고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데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복음으로 성장하는 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수사학이나 철학이나 자천서도 포기했듯이 재정적인 권리도 포기한 것입니다 (고전9:12-15). 비방하는 자들은 또 바울이 처음에는 사례금을 받지 않다가 후에 다 빼앗으려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바울은 끝까지 받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든지 고린도교인들이 외부적인 일로 실족하지 않고 온전히 성장하여 하나님 앞에서 높아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이 아십니다. 바울은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으려 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전한 복음 진리가 끝까지 세워질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 심정을 전한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헛된 데로 돌아가고 고린도교인들이 잘못된 길로 빠져 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는 열심인 것입니다. 교인들에 대한 부모의 심정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역자가 가져야 할 정신이고 그런 사여자에 대해 교인들은 그 심정을 알아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3. 교회를 위한 염려 (16-33절)
16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17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18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19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20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21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거짓교사들은 외부적인 조건을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외부적인 조건으로 자신들을 높이고 고린도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고린도교인들을 업신여겼습니다. 율법적 노예가 되게 하고 재정권리를 탈취했습니다. 거짓교사들이 외부적인 것으로 권위를 나타내는 데도 고린도교인들은 그것을 쉽게 용납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수준대로 자신을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거짓교사들과 외부적인 것을 비교할지라도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외주적인 것을 자랑하는 것은 주님의 모본도 아니고 어리석은 일이지만 고린도교인들의 수준을 감안하여 불가불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짓교사들을 용납한 것같이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 육체적인 혈통과 조건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유대의 거짓사도들이 주장하는 기준으로 봐도 그들에 비해 조금도 부족한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①출신에 정통성이 있었습니다.
22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바울은 히브리인이고 이스라엘인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인'이라는 것은 혈통적으로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언어를 사용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인'이라는 것은 종교적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선택한 족속으로서 율법과 예배 등 특권을 가진 자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은 언약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3:4-5에는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인이고 이스라엘 족속이고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은 자이고 베냐민 지파라고 했습니다.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말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적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라고 하는 것은 혈통적인 순수성과 율법적인 정통성을 가진 지파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바울은 바리새인이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것은 당시 유대 종파 가운데 율법에 대한 해석과 준행에 있어서 가장 정통성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22:3에 보면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했다고 했습니다. 당시 바리새파 가운데 가장 높이 존경받는 학자(랍비)에게 배운 자로서 가장 신학적 정통성을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②사역에서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주의 일을 하다가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유대인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5번이나 맞았습니다. 이는 유대인의 태형법에 의한 매를 말합니다 (신25:3). 그리고 태장으로 3번이나 맞았습니다. 태장은 로마 형법에 속한 매로서 매 끝에 납을 달아 그 매로 맞으면 살이 찢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돌에 맞기도 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거의 죽게 되었었습니다 (행14:19). 그리고 파선하기도 3번이나 했습니다. 선교를 위해 바다를 항해하다가 배가 부서져서 꼬빡 하루를 밤낮으로 깊은 바다에서 표류한 적도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했습니다. '강의 위험'이란 강이 홍수로 범람하여 다리가 없음으로 인한 위험을 말합니다. '강도의 위험'이란 여행 길에서 강도를 만나는 위험을 말합니다. '동족의 위험'이란 복음의 반대자들의 테러에 대한 위험을 말합니다. '이방인의 위험'이란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신을 우상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죽이려 하는 위험을 말합니다. '시내의 위험'이란 도시의 위험으로서 데살로니가, 베뢰아, 빌립보 등에서처럼 군중들의 선동과 고소의 위함을 말합니다. '광야의 위험'이란 광야에서 길을 잃거나 맹수의 공격을 받는 위험을 말합니다. '바다의 위험'이란 소아시아에서 마게도냐나 아가야 지방을 가기 위해 지중해 연안을 건널 때 만나는 풍랑이나 암초의 위험을 말합니다. '거짓형제의 위험'이란 거짓선지자들의 술수와 비방의 위험을 말합니다.
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33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아레다왕'(Aretas)은 로마의 통치하에서 B.C.9년에서 A.D.40년까지 나바데아(Nabataea)를 다스렸던 왕입니다. 당시 다메섹에서 유대인출신으로서 유대인을 담당하던 지방의 행정장관이 바울을 체포하여 죽이려고 했는데 바울은 그 때 들창문으로 성벽으로 내려가 탈출한 적이 있습니다 (행9:23-25). 바울이 이와 같은 고난을 감수하면서 생명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하려 한 것은 그리스도의 일꾼된 증거입니다.
③교회를 위해 염려했습니다.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바울에게는 외적으로 육체적 고난뿐 아니라 내적으로 정신적인 고난도 있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한지 얼마 안된 교인들이 신앙을 잃어버리고 잘못된 교훈에 빠지고 서로 분쟁했습니다. 바울은 교인들이 믿음이 어린 연고로 시험에 들까 봐 심히 염려했습니다. 그러다가 누가 시험에 들기라도 하면 마음이 애탔습니다. 자신은 강한 믿음을 가졌으나 그들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그들을 강하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롬14:1-3). 그들이 시험에 들면 마치 자신이 죄를 지어 실족한 것처럼 애가 탔습니다. 고통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 하는 고통관이 있습니다. 첫째는 원인론적 시각입니다. 누가 고통을 당할 때 그 원인이 죄인 것을 알게 하고 권면하는 시각입니다. 둘째는 목적론적 시각입니다. 누가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 연단시키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위로하는 시각입니다. 셋째는 상관론적 시각입니다. 누가 고통을 당할 때 그의 아픔을 이해하고 동정하고 함께 고통에 참여해 주는 시각입니다. 바울에게 원인론적 시각과 목적론적 시각도 있었지만 심정적으로는 언제나 관계론적 시각에서 사역을 하려고 했습니다. 누가 아프면 자기가 아픈 것 같은 심정을 가졌습니다. 그런 정신이야말로 그가 그리스도의 일꾼된 참된 증거인 것입니다.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바울은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인 줄 알면서도 부득불 자신을 자랑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사도권이 부정될 때 자신이 전한 복음진리도 권위를 잃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진짜로 자랑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약한 부분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알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신은 주님 앞에서 도저히 사도직을 감당할 수 없는 악하고 무능하고 약한 자였는데 주님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1:13,15에 보면 바울은 자신이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로서 죄인 가운데 내가 괴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귀히 여겨 복음 전도의 직분을 맡겼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15:9-10에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항상 전에 스데반 집사를 죽이고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는 자였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자입니다. 도무지 주의 일을 맡을 자격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복음 전도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주의 일을 하기에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존재인줄 알고 주만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그에게 능력으로 함께 하므로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은 할 수 없는 자이지만 주님이 하게 했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結言>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불가불 자신을 변호하고 변명하고 자랑했습니다. 그것은 거짓교사들이 자신들을 자랑했고 고린도교인들이 그것을 쉽게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 진리의 변호를 위해 자신을 자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교사나 거짓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음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진정 자랑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약한 점이었습니다. 그 약한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불러서 쓰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할수록 주님의 강함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진정 그리스도의 일꾼된 자의 정신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져야 할 정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