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고린도후서12:1-21

<題目> 환상과 육체의 가시

 

<序言>

  바울은 전 장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고 거짓 사도들의 비난을 불식시키려고 자신의 출신과 복음 전도를 위해 고난받은 것과 고린도교인들을 위해 수고한 것을 자랑했습니다. 본 장에서는 자신이 본 환상과 계시에 대해 언급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사도권을 주장하면서 그런 것들을 근거로 자랑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만 자신의 연약함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은혜를 자랑하고 싶어했습니다. 내용구조는 바울의 신비적 체험(1-6절), 은혜로 받은 육체의 가시(7-10절), 바울의 변명과 사도된 징표(11-19절), 바울의 두려움(20-21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바울의 신비적 체험 (1-6절)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본 대지는 바울 자신이 사도성과 고린도교인들에 대한 사랑을 변호함에 있어서 절정 부분에 해당합니다. 이런 개인적인 체험들에 대해 쓰기를 삼가했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하게 자랑한다고 한 것입니다. 아마도 고린도에 있는 거짓 사도들이 자기들이 본 환상이나 계시를 자랑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주님이 그에게 보여주신 환상과 계시를 말하여 그가 거짓 사도들보다 오히려 더 위대한 환상과 계시를 받았음을 증거하려는 것입니다. 그 환상과 계시가 사실이므로 그것을 자랑해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지만 (6절), 하나님이 영광받게 되는 객관적인 체험을 말하면서도 결코 자기를 자랑하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5절).

 

  ①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고 했습니다.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바울은 많은 환상과 계시를 보았습니다. 회심 때 그리스도를 보았고 (행9:3, 22:6)  아나니아가 자기에게 와서 섬기는 것을 보았고 (행9:12) 이방인을 섬기라는 부르심을 받을 때 환상을 보았습니다 (행22:17). 마게도냐로 부르심을 받은 것도 환상에 의해서였습니다 (행16:9). 고린도에서의 사역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도 하나님께 환상으로 위로를 받았고 (행18:9-10).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에도 환상으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행23:11). 풍랑 가운데 있을 때 천사가 나타나 행선자들이 무사할 것을 알려 주기도 했습니다 (행27:23).

 

  본문의 사건은 14년 전에 있었던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후서 기록으로부터 14년 전이므로 다메섹 도상에서 부름받은 후 다소를 향해 출발한 다음부터 (행9:30) 바나바의 방문을 받기까지 (행11:25-26) 그 사이 기간에 해당합니다. 곧 깊은 수양을 하고 있을 때일 것입니다. 고향 다소에서 깊은 기도생활을 하고 있을 때의 것으로 생각됩니다 (행9:30, 11:25). 환상의 역사성과 사실성을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 때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 왔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대기권의 구름이 있는 곳, 대기권 너머 해와 달과 별이 있는 곳, 천체 너머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초감각적인 곳입니다. 그리고 물질계, 정신계, 영계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개념으로 보든지 바울이 본 절에서 말한 '셋째 하늘'은 4절에서 말한 '낙원'을 말한 것입니다. 낙원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겔28:13, 31:8, 계2:7), 예수님이 가신 곳이고 (엡4:10), 예수 믿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간 곳입니다 (눅23:43).

 

  ②바울은 몸 안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바울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을 때 몸이 함께 갔는지, 아니면 몸은 지상에 있고 영만 갔다 왔는지 몰랐습니다. 그것은 자의에 의해 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이끌려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녹이 승천한 것은 하나님께 이끌려 몸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에스겔이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본 것은 성령으로 환상을 본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의 경우는 에스겔의 경우와 비슷하게 환상 가운데 이루어진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③바울은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바울은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신비한 말을 들었습니다. 이 말은 너무 신비하고 아름다워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낙원에 관한 말일 수 있습니다. 또한 들은 것을 말해서는 안 되는 비밀에 관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사8:16, 단12:4). 그렇다면 천국에서만 이야기 되는 거룩한 비밀들로서 아직 사람들에게 계시할 때가 되지 않은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실을 바울을 통해 객관적으로 알리는 것이 아니라 뒤에 요한을 통해 나타내려 했던 것 같습니다.

 

  ④바울은 그에 대해 14년 동안 침묵했습니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바울은 자기를 자랑하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첫째, 14년 동안이나 침묵했습니다. 그가 그 사실을 발표했다면 금방 유명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약한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자랑하려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신비한 체험을 말하는 것은 거짓 사도들의 헛된 점을 드러내고 자신의 사도성을 증거하여 자신이 전한 복음을 효과있게 하기 위해 부득불 한 것입니다. 둘째, 환상을 본 주체를 3인칭으로 사용했습니다. 환상을 본 주체인 자신에 대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등 3인칭 관점에서 말했습니다. 자신의 자랑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자신을 감추는 모습입니다. 셋째, 그마저도  다 말하지 않고 그만 두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할까 봐서입니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높아질까 두려운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에 대해 자랑할 것은 오직 약하고 부족하고 어리석고 무능한 것 밖에 말할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로 인하여 오직 자기에게 은혜 베푸신 하나님만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2. 은혜로 받은 육체의 가시 (7-10절)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하나님이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使者)를 주었다고 했습니다. '육체의 가시'는 금욕의 고통(Catholic), 외부 적들의 핍박(Luter), 양심의 고통을(Calvin)으로 보는 이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육체의 질병으로 봅니다. 육체의 질병 중에서 천질로 보는 보는 이도 있지만 보편적인 설은 안질 곧 눈병입니다. 마치 사탄이 하나님의 주권하에 욥에게 악창을 주었듯이 바울은 자기에도 육체의 지병인 눈병이 있게 했다고 본 것입니다 (욥2:1-8).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보고 사흘 동안 보지 못하다가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눈의 비늘이 벗겨지기는 했지만 그 후유증으로 눈에 만성질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행9:7-8, 17-18). 그래서 공회에서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식별하지 못했고 (행23:5),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도 눈이 잘 안보여 큰 글자로 썼고 (갈6:11), 고린도교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도 대필하게 했다가 마지막 인사만 친필로 섰습니다 (고전6:21).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큰 비방거리가 되었고 고린도교인들에게 시험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고후10:10). 그래서 갈라디아의 어떤 교인들은 자기들 눈까지도 빼어 주려는 심정을 가졌습니다 (갈4:14-15).

 

  바울은 눈병 때문에 실제로 육체가 고통스러웠을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사역이 힘들게 된 것으로 마음도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가시'(σκολοψ)는 심문할 때 쓰는 말뚝 파편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눈병이 너무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그것을 없애 달라고 3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눈병을 낫게 해주시지 않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 했습니다.  그 육체의 가시인 눈병은 은혜로 준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질병이나 여러 고통의 문제가 없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것들이 없어지면 더 좋을 것 같아서 간구해 보지만 하나님은 안 들어 주실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시를 허락하고 거두어 주지 않는 이유는 바울의 상황과 같습니다.

 

  ①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7절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교만하면 누구든지 망합니다 (잠16:18, 약4:6, 벧전5:5, 단4:28:23). 바울은 하나님께 은혜받은 것이 너무 큽니다. 바울은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헬라 철학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이었고 베냐민 지파였고 율법을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 그는 많은 이적을 행했습니다 (12절). 심지어 그가 가졌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자나 귀신 들린 자에게 얹으면 나음을 얻었고 악귀가 떠나갔습니다 (고후11:22, 행22:3, 고후12:1-3, 행14:8-12, 행19:11-12). 천국에 갔다 오기도 했습니다 (1-4절). 주께 받은 계시와 깨달은 진리가 많아서 신약성경중 13권이나 기록했습니다. 그의 사역으로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고 이방세계에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그로 인하여 교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가 교만하여 버림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질병을 주고 그것을 자기 능력으로 고치지 못하고 하나님께 기도해도 안 고쳐 주었던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낮아지고 겸손해져서 하나님만 순종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더 많은 은혜를 더 오래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역을 더 오래 더 가치있게 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지극히 큰 자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 때문에 낮아졌습니다 (11절). 자기를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로 여기고 만삭되어 나지도 못한 자로 알고 죄인 가운데 괴수로 알았습니다 (고전15:9, 딤전1:13-15). 그 낮아짐이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게 된 조건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목적도 이것입니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여 낮아지게 한 다음에 존귀하게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시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빌1:29).      

 

  ②능력이 머물게 하기 위함입니다.

 

  9절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가시 때문에 약해졌고 그 약해진 것 때문에 강해졌습니다. 그 약한 것 때문에 자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인 줄 알고 하나님만 의지하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함께 해 주었습니다. 바울이 처음에는 유대교에서 자기 열심히 하려다가 성도들만 죽이는데 내어 주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다음에도 자기 말과 자기 지혜로 하려다가 교인 몇 명 밖에 얻지 못하고 옥에 갇히고 40에 감한 내를 5번이나 맞고 태장으로 3번이나 맞고 돌에 1번 맞고 파선을 3번이나 당하여 일 주야를 깊음 가운데서 지냈고 여러 번 죽을 위험을 당했고 여러 번 자지 못했고 마시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입지 못했습니다 (11:23-27). 바울은 그런 가운데서도 더욱 큰 은혜를 받고 능력있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많은 고난 가운데서도 연단을 받아 하나님이 가까워지고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모세도 처음에는 자기가 강해져서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 줄 알고 자기의 힘과 지혜로 이스라엘 구원 운동을 하려다가 사람만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여 40년 동안 고난받으면서 하나님과 자기를 발견하여 자기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여 이스라엘을 구원시켰습니다. 디모데도 위병 때문에 낮아져서 목회에 성공했습니다 (딤전5:23). 약하고 병들고 비방받고 멸시 천대를 받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과 차임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고 가난하고 핍박을 받을 때는 심히 약해집니다. 하지만 그 약해짐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게 됩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이 능력으로 함께 하여 강해집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고난받는 것을 기뻐하고 약한 것들을 자랑하게 된 것입니다 (빌3:10). 10절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했습니다. 약함 자체를 좋아한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약함을 허락하신 목적을 이해하고 그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송명희, 크로스비, 미우라아야꼬, 어니벨츠, 레나마리아, 닉부이치치 등은 그에 대한 모범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포사이드(P.T.Forsyth)는 "고통이 완전히 제거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보다는 고통의 전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훨씬 더 위대한 일이다"고 했습니다.   

 

  ③축복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4:17에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고난을 받게 한 것은 마침내 약속한 가나안 축복을 누리게 할 자격을 만들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8:16). 이스라엘 백성이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게 한 것도 그들을 연단시킨 다음에 시온의 축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렘29:11). 욥이 하루 아침에 자녀와 재산과 건강과 인간관계를 상실하게 된 것도 연단시켜 배로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욥23:10). 혹 이 세상에서 복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세에서 비교할 수 없는 상을 얻게 됩니다 (딤후4:7-8, 약1:12, 롬8:18). 바울은 그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육체의 가시 가운데서도 원망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그 소망을 가졌고 모세도 그 소망을 가졌었습니다 (히12:2, 11:24-26). 그래서 고난이 올 때 근심할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하고 오히려 기뻐하도록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1:2-4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1:6-7에도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신앙을 가진 자는 승리적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6:8-10에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했습니다. 결국 고난이 유익인 것입니다 (시119:71-72).

 


       3. 바울의 변명과 사도된 징표 (11-19절)

 

  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나는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바울은 자신의 변명과 자랑이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변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다른 사도들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11절에서 말한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은 11:5에서도 말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 중 주 제자를 말하기 보다는 거짓 사도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12제자 중 주제자들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으나 최근 많은 주해자들은 고린도교회를 미혹시킨 거짓교사들을 가리킨다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을 미혹한 거짓교사들이 예수님의 주 제자들과 비교하면서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했기 때문에 바울이 이미 예수님의 주 제자들과 비교했던 일이 있었던 것처럼 그들과 비교했을 수도 있습니다  (고전9:1, 15:5-8,10, 갈2:9). 하지만 본 장이 거짓교사들에 대해 경계시키는 책망을 하고 있다는 맥락에서 볼 때 후자가 옳을 것입니다. 거짓교사들은 자신들을 사도들보다 훨씬 수준있는 사도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율법 지식과 철학 지식을 기반으로 수사학과 웅변술을 구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미혹된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이 그들보다 말을 못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 거짓 사도들 보다 낫다고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고린도교인들이 거짓 교훈을 따르지 않고 바울 자신이 가르친 복음 진리를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하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여 교회를 세우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19절에 "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고 했습니다.

 

  12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13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라

  14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16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

  17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18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19 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①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했습니다.

 

  12절에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사도로서 초자연적인 자격을 말한 것입니다. '참음'은 육체의 고통과 피곤함과 곤고함, 외부로부터 대적하는 자들의 훼방과 고린도교인들의 비방, 내적인 근심과 걱정과 갈등에 대해 오래 참음을 말합니다. '표적'은 복음과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일으킨 기적을 말합니다. '기사'는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초자연적으로 일으킨 기적을 말합니다. '능력'은 자연원리의 영역에서 떠난 신적 권능을 일으킨 역사들을 말합니다. 이 역사들은 예수님과 예루살렘 사도들의 특징적으로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행2:22-43). 이는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말해 주는 부분입니다.

 

  ②물질에 대해 깨끗했습니다.

 

  16절에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사례금을 받지 않은 것에 대해 거짓 사도들과 고린도교인들은 공교한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악한 일을 계획하기 위한 술책으로 본 것입니다. 처음에 관심을 얻기 위해 받지 않았다가 나중에 그들을 종으로 삼고 그들의 재물을 탈취할 것이라고 비방했습니다. 하지만 13-15절에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라.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사례금을 받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재물을 허비했는데 그것은 어떻게든지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서 복음 진리를 받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이 믿음이 어렸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처럼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희생했습니다. 그것을 바울이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의 사랑을 오해하여 오히려 바울을 비방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뿐 아니라 함께 한 동역자들도 재물에는 깨끗했습니다. 17-18절에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디도는 당시 고린도교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7:15). 바울의 동역자들은 바울과 공동보조를 취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들은 바울과 동일한 정신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도 같은 정신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4. 바울의 두려움 (20-21절)

 

  20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21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은 세번째 고린도교회에 가려고 했는데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낮아질까 근심했습니다. 바울에게 가르침을 받은 고린도교인들이 잘하면 그들을 가르친 바울이 높아지고 그들이 범죄하거나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을 가르친 바울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사역에 대한 평가 기준은 그 교인들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을까 두려워 한 것입니다. '다툼'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시기'는 다른 사람을 시샘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분 냄'은 흥분하여 참지 못하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당 짓는 일'은 친한 사람들끼리 그룹을 조성하고 그 파벌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비방은 다른 사람에게 사실과 상관없이 누명을 씌우는 것입니다. '수근 거림'은 다른 사람에 대해 없는 데서 험담하고 비방하고 악평하는 것입니다. '거만함' 뽐내고 잘난 체하여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입니다. '혼란'은 공동번역에서는 난동을 부리는 것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세상처럼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더러움'은 탐욕과 사치과 방탕하는 생활입니다. '음란함'은 성적으로 난잡한 생활입니다. '호색함'은 음주와 음란으로 방종한 생활입니다. 바울은 전에 갔을 때 이런 죄들이 교회를 어지럽게 해서 편지로 훈계했는데 아직도 그런 죄를 회개하지 않고 있을까 두려워 한 것입니다. 사실 이런 두려움이 사도된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 지도자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입니다.

 

<結言>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거짓 교사들의 비방을 곧이 듣고 그들의 교훈을 떠났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부정되므로 말미암아 자신이 가르친 복음 진리가 세워지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부득불 자신을 변호하고 자랑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교인들이 바른 진리에 서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바울이 가르친 교훈대로 죄를 회개하고 바로 서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곧 그들을 사랑해서였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사도된 증거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교회와 교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와 같아야 참 사역자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