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에베소서1:1-23

<題目> 하나님의 구원계획

 

<序言>

  본서는 바울서신 중 가장 원숙하고 신오한 신학사상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변론적인 내용이나 어조가 조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본서의 초점은 논쟁이 아니라 교회의 오묘한 의미와 성도의 고상한 지위 및 그 지위에 합당한 성도의 신앙생활과 직결시키고 있습니다. 본 장의 내용구조는 인사말(1-2절), 구원계획 찬미(3-14절), 지식을 구하는 기도(15-23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인사말 (1-2절)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바울은 자신을 소개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1:1과 골로새서1:1에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이 호칭은 바울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사도'(αποστολοs)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는 선교사역이 자기의 의지나 자질에 의해서 한 것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함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행26:1618, 고전9:1).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한다고 했습니다. '성도들'(αγιοιs)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분리시킨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신실한 자들'(πιστοιs)은 그리스도께 신뢰와 충성을 겸비한 그리스도인들을 비유하는 표현입니다 (고전4:17, 벧전5:12, 요삼1:5). 바울이 에베소교인들에게 그와 같이 표현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함을 입은 성도들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한 자들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2:8).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는 초대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전형적인 인사구로서 대부분의 서신서 서두에 나타납니다 (롬1:7, 고전1:3, 고후1:2, 갈1:3, 빌1:2, 살전1:1, 살후1:2, 딤전1:2, 벧전1:2, 벧후1:2, 계1:5). '은혜'(χαριs)는 일반적인 인사 용어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값없이 누리게 하시는 구원의 은총에 대한 특별한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평강'(ειρηνη)는 히브리어 '샬롬'과 같은 뜻으로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축복과 번영을 기원해 주는 인사말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결과로 나타나는 평안에 대한 축복으로 사용했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본서의 주요 주제라 할 수 있습니다.

 


       2. 구원계획 찬미 (3-14절)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예정(豫定)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5절에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라고 했고, 9절에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라고 했고, 11절에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예정했다는 것입니다. '예정하다'에 해당하는 프로리조(προοριζω)는 '미리 결정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다는 의미의 용어는 작정과 예정이 있습니다. 작정과 예정이 성격 면에서는 미리 정했다는 뜻으로서 같은 뜻이지만 범위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작정(作定)은 모든 만물과 일체의 사건에 대해 사용하는 말이고 예정(豫定)은 도덕적 피조물과 구속에 관한 일에만 사용하는 말입니다. 도덕적 피조물이란 인류(행4:28, 롬8:29-30, 9:11-13, 엡1:4-6), 천사(딤전5:21, 막8:38, 눅9:26, 벧후2:4, 유6), 그리스도이다(벧전1:20, 2:4). 예정은 그런 도덕적 피조물에만 적용하고 그 중에서도 구원사적 내용에만 적용해야 합니다. 그 외의 일에 대해서는 '주권'(主權)이나 '섭리'(攝理)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정론은 어거스틴, 칼빈, 바빙크, 하지 등이 인정한 이론입니다.   

 

  예정론(豫定論)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론(異論)이 있습니다. 첫째, 예정론은 인간의 도적적 자유 의지와 모순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 행동을 작정했다면 인간은 필연적인 행동을 해야 하며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작정하셨을 뿐 아니라 인간이 자기 행위에 대해 자유이며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눅22:22). 그렇다고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덕적 자유는 인간이 자기 사상 성향 욕구 성품 등에 의해 나타나는데 그것은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법칙을 충분히 아시는 지식과 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은 도덕적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미래 행동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예정론은 구원에 대한 인간적 노력의 모든 동기를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멸망을 작정했다면 최선의 노력을 해도 멸망하고 구원을 작정했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모든 수단에 대해 태만해도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예정을 알지 못합니다. 오직 결과를 통해서만 아는 것입니다. 인간은 감추어진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노력의 동기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에4:14). 하나님은 인간의 최종운명뿐 아니라 그 운명으로 인도하는 수단도 작정했기 때문에 수단에 대해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목적은 오직 수단의 결과로만 작정되기 때문에 노력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려합니다 (엡2:10, 빌2:13). 셋째, 하나님을 죄의 조작자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작정하여 인간이 필연적으로 그 죄를 행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죄의 창작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하며 죄를 금하며 성결을 요구하는 분이기 때문에 죄의 조작자가 될 수 없습니다 (시92:15, 전7:29, 합1:3, 요일1:5). 죄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유효성 의해 죄를 생산할 것을 작정하지 않고, 피조물의 자의적 죄행을 허용(許容)하는 것입니다. 죄의 시발자는 사탄이고 뿌리는 교만입니다. 사탄이 교만으로 인간을 유혹할 때 하나님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것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아담, 욥, 가룟유다, 베드로 etc).

 

  ①예정의 내용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첫째, 택하심입니다. 선택입니다. 4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선택했습니다. 선택(選擇)에는 민족적 선택과 개인적 선택이 있습니다. 개인적 선택에는 구원적 선택과 직무적 선택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개인적인 선택 중 구원적 선택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선택에 반대되는 용어는 유기입니다. 유기(遺棄)는 버리기로 작정한 것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이 공의를 나타내기 위해 어떤 사람은 구원하지 않고 버리기로 작정한 것을 말합니다. 유기교리는 멸망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 있게 된다는 이유로 개혁주의권 밖에서는 반대합니다. 그러나 멸망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죄행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전적으로 상실했고, 인간은 자발적 범죄행위로 선택에서 제외된 것이니 스스로 구원을 요구를 갖고 있지 않고, 하나님은 타락한 전 인류를 구원해야할 의무를 갖고 있지 않고, 창조자는 피조물을 임의대로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기교리가 택자에게 주는 유익은 공의의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깊이 알게 되고 타락 전보다 더 큰 축복에 참여한 것을 알게 된다. 선택과 유기교리는 불택자들에게는 분노를 느끼게 하지만 택자들에게는 한없는 은혜를 느끼게 합니다.

 

  둘째, 아들됨입니다. 양자입니다. 5절에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고 했습니다.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의 헬라어 휘오데시안(υιοθεσιαν)은 법적 용어로서 양자 입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히브리적 관념으로 볼 때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닮은 자이고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자이고 아버지의 일을 잇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부요한 은혜와 진리를 가진 자로서 그것들을 나타내는 자,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할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곧 아들이 된다는 것은 유기적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죄사함입니다. 칭의입니다. 7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속량'(τηγ απολυτρωσιν)은 노예가 해방을 얻거나 죄수가 석방되기 위해 지불하는 돈을 말합니다. 인간이 범죄하므로 죄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죄의 결과인 죽음과 그 증후군들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음(롬6:23) 곧 피흘림(레17:11)으로 그 죄값을 지불했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우리의 죄가 없어졌습니다. 죄인이라는 선고와 그 결과로 오는 죽음과 그 증후군들에게서 해방되었습니다. 이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아 죄사함을 얻었고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는 칭의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 중생했습니다.  

 

  넷째,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성령의 내주입니다. 13절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고 했습니다. '인치심을 받았으니'(εσφραγισθητε)는 소유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성령을 보내 준다고 약속했습니다 (눅24:49, 요14-16장).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그 약속한 성령이 들어와 내주하십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성령이 내주하는 성전인 것입니다. 성령의 내주는 예수님으로 구원받은 자,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택한 백성, 하나님의 소유임을 확인하고 증거하는 표시(印)입니다. 그 성령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다섯째, 거룩함입니다. 성화입니다. 4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고 했습니다. 중생한 영은 점점 자라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것을 성화라고 하기고 하고 거룩해진다고 하기도 하고 구원을 이룬다고 하기도 하고 영이 자란다고 하기도 합니다. 곧 점점 죄를 벗어 버리고 인격이 하나님 말씀대로 만들어져 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대해 이미 작정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성화,영화)을 반드시 이루어가실 것을 믿고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로마서8:30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②예정의 시기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4-5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릴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고 했습니다. '창세'는 세상을 창조하기 전으로서 선택이 영원 전에 이루어졌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청세 전에 선택했다는 것은 우리의 공적이나 환경 등의 조건에 의해 선택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無條件的)으로 선택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고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창세 전부터 계셨다는 선재성(先在性)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골1:15-17). 곧 하나님의 예정(豫定)과 선택(選擇)은 하나님이 이미 세상이 있기 전부터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정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예정예지설과 예지예정설이 있습니다. 예정예지설(豫定豫知說)은 하나님이 미리 정하고 정했으니 그대로 될 것을 안다는 설입니다. 이 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을 강조하기에는 좋은 이론입니다.  예지예정설(豫知豫定說)은 하나님이 미리 아시기 때문에 그 지혜를 바탕으로 작정을 했다는 설입니다. 이 설은 하나님의 지혜를 강조하기에 좋은 이론입니다. 하지만 주의해야할 것은 이 두 이론 모두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 전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을 논리적으로 말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정죄하기 보다는 존중해야 할 이론들입니다.

 

  선택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타락전선택설과 타락후선택설이 있습니다. 두 이론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순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타락전선택설(墮落前選擇說)은 하나님이 인류의 구원을 '선택(유기)→창조→타락→구속(멸망)' 순으로 작정했다는 설입니다. 이 설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계획성있는 예정이라는 점에서 논리적인 통일성을 갖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벌하기 위해 창조한 것은 선행에 모순이며, 하나님을 죄와 멸망의 책임자로 삼게 되며, 공(空)과 무(無) 상태에서 선택되기 힘들다는 점에서는 단점이 됩니다. 타락후선택설(墮落後選擇說)은 하나님이 인류의 구원을 '창조→타락→선택(유기)→구속(멸망)' 순으로 작정했다는 설입니다. 이 설은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강조하고, 세상에서 택했다는 성서적 표현을 정당화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는 표현에 권위를 갖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계획없이 일하는 분으로 만들기 쉬운 단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 두 설은 서로 정죄하거나 비판할 설이 아니고 존중해 주어야 할 심오한 진리들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두 설 모두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계획한 아니라 창세 전에 계획한 논리적 차서 관계를 말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릴 구원하기 위해 영원 전부터 완전하신 지혜와 능력을 바탕으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의지에 속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실패하거나 취소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정은 효과적이며 불변적입니다.

 

  ③예정의 목적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4-6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1차적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4절). 거룩하게 하는 것과 흠이 없게 한다는 것은 하나의 언어유희로서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거룩은 우선 우릴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라는 것을 계시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불택자와 구별하고 세상과 구별하고 죄에서 떠난 순결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법적으로 이미 거룩한 자입니다. 그래서 성도(聖徒)인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가 행위에서도 죄를 점점 벗어 버리고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고 거룩하게 하시는 분임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2차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6절).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우릴 통해 영광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범죄하여 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스스로는 죄과 그 결과로 오는 죽음과 지옥형벌을 해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도무지 구원을 얻을 수 없게 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릴 거기에서 구원해주어야 할 의무나 책임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류의 얼마인 우릴 선택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대속하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조건이나 환경을 감안하지 않고 조건없이 그렇게 하기로 예정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신 것을 깨달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고 영광을 돌립니다. 구원의 은혜를 찬송할 뿐 아니라 그 은혜를 삶을 통해 나타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입니다.          

 


       3. 지식을 구하는 기도 (15-23절)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바울은 기도할 때마다 에베소교인들을 기억하고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에베소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의 행위는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교회의 일원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한 한 몸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자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요한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요한일서4:7-8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했습니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기를 원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속 사역에 대해 이해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계시는 문자적으로 감추었던 것을 열어서 보여 준다는 뜻이고,  계시의 영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속 사역에 대해 나타내시는 성령의 역사를 뜻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에베소교인들에게 계시의 영을 주어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첫째는 마음의 눈을 밝혀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은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과 성령의 인치심(내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부르심은 구원이 이루어져 영광된 자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과 목적을 알기를 원한 것입니다. 둘째,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 기업'(τηs κληονομιαs αυτου)은 문자적으로 '그의 기업'으로서 하나님의 기업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기업이었던 것처럼 신약시대에 택한 백성이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기업임을 알기를 원한 것입니다. 셋째,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인지 알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베푼 능력 곧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나 가능성이나 잠재력을 주셨는데 그 광대한 능력이 어떤 한 것인지 알기를 원했습니다.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 우편에 앉히시고,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모든 권세와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만물을 발 아래 복종시키시고,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신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공동체가 교회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 교회의 머리가 되고 충만히 임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풍성하신 능력으로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이 그것을 알기를 원한 것입니다.    

 

<結言>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이 신앙적인 정체성을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대해 말했고 그 목적에 대해 말했습니다. 우리가 성도가 되고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부른 부름에 의한 것인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왜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셨는지 그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