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에베소서4:1-32

<題目>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序言>

  전 장에서는 교회를 통하여 성취되고 있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본 장에서는 만유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교회가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 (1-10절),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 (11-16절),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활 (17-24절), 새로운 생활의 법칙 (25-32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부르심에 합당한 삶 (1-10절)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바울은 전 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언급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신 부르심에 순종하여 복음 전도에 충성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 그가 에베소교인들에게도 부르심에 합당한 삶에 대해 교훈하였습니다.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고 사명을 주신 소명을 말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에 부응하는 삶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제시한 부르심에 합당한 삶에 대한 성도의 덕목은 5가지입니다.  

 

  ①겸손입니다. 겸손은 교만과 반대되는 말로서 자신을 낮추는 자세를 말합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칭찬 받거나 높임 받으려 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어 섬기는 태도를 말합니다. 엔드류 머레이가 말한 대로 아무도 칭찬하지 않을 때나 비난과 멸시를 받을 때도 평안을 누리는 마음의 상태를 뜻하기도 합니다. 겸손은 예수님이 친히 성육신으로 모범을 보이신 덕목이고 친히 교훈하신 덕목입니다. 빌립보서2:6-7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1:29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5:5-6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겸손해야 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롬12:3,6, 고전10:12, 빌2:3). 빌립보서2:3에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습니다. 겸손한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잠3:34, 18:12, 22:4, 29:23, 약4:6, 10).   

 

  ②온유입니다. 온유는 완악과 반대되는 말로서 부드럽고 정중하고 이해 깊은 자세를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고후10:1). 예수님은 자신을 온유한 자라고 했고 온유를 배우라고 했습니다 (마11:29). 예수님은 온유에 대해 친히 모범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므로 온유함을 보여 주셨고 제자들에게 가르친 교훈에서 온유한 성품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뜻을 버렸고 자신의 목숨까지 버렸으며 핍박하는 무리에 대해 저항하거나 욕하거나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사람 보기에는 그의 온유함이 미련하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지혜의 원천이었으며 승리의 비결이었습니 (요4:34, 18:11, 눅22:42, 마5:39-42). 온유는 성령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갈5:22-23). 바울도 온유할 것을 권면했고 (엡4:2, 골3:12, 딤후2:24, 딛3:2), 베드로도 온유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벧3:3-4). 온유한 자에게는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삼하22:36, 시37:11, 76:9, 마5:5). 모세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서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출2:11-12, 신32:51-52). 세상의 이치와 원리를 보아도 온유한 것이 승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의 뿔이 빠졌다는 말은 있어도 소의 귀가 빠졌다는 말은 없습니다. 치과 병원은 많아도 설과 병원은 없습니다. 사람이 늙어서 죽을 때 보면 20개 이상이 있는 치아는 다 빠지지만 하나뿐인 혀는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원리를 보아도 딱딱하고 강한 것이 오래갈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유순하고 약한 것이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심령을 소유해야 모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③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에 대해 오래 참으십니다 (롬2:4, 9:22, 벧전3:20, 벧후3:15). 오래 참음은 성령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고전13:4, 고후6:5, 갈5:22, 골3:12). 타인과 관계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참고 분노할만 한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고 복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수하지 않아야 합니다.  

 

  ④용납입니다. 용납은 다른 사람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 관용하고 용서하는 덕목입니다. 바울이 골로새서3:13 같은 곳에서는 단순히 '서로 용납하라'고 권면했으나 본문에서는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타인을 용납할 수 있는 힘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사랑을 나타내었는지 깨닫고 경험하게 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데 그 사랑이 있어야 용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근거한 용납은 조건을 내걸지 않으며 상대방의 결점과 약점까지도 받아들이게 됩니다.  

 

  ⑤연합입니다. 서로 하나된 일치된 생활의 강조입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평안'은 예수님이 성육신과 구속으로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시키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되게 했습니다. 그 평안이 기독교 공동체가 하나된 것을 지키도록 매어 주는 줄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 하나된 것을 유지하도록 돕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된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힘써 지키라'에 해당하는 스푸다존테스(σπουδαζοντεs)는 노력하다 보다 더 강한 표현으로서 어떤 목적을 향해 열심 내는 태도를 말합니다. 일치된 연합은 굳은 결심과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교회가 하나되어야 하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①몸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말합니다. 한 몸은 나누어질 수 없는 유기적 통일체인 것입니다 (고전6:15, 10:17, 골1:18). ②성령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는 누구든지 성령이 내주합니다 (1:13-14). 그리스도인은 한 성령을 받은 유기체로서의 통일체인 것입니다. ③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신 것은 개인의 영이 구원받을 뿐 아니라 육도 부활로 구원하게 하려는 것이고, 그 개인들이 모여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교회 공동체들이 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하려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④주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을 구원하고 교회를 이루게 하시고 교회를 주관하십니다. 교회의 주신이 한 분 예수님입니다. ⑤믿음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구주인 것을 받아들이고 그의 통치를 받아 충성하겠다는 결단을 하는 것이고 자신의 삶을 의탁한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⑥세례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에게 주는 의식입니다. 세례는 수세자가 한 믿음에 대한 고백을 근거로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 사함을 받았다는 표호로,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었다는 표호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표호로 주는 것입니다. ⑦하나님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입니다.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시키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 분입니다. 만유에 대해 초월성을 가진 분이고 만유를 회복시켜 하나되게 하신 분이고 만유에 임재하여 편재하신 분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임재하여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교회의 각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인 은혜를 분량대로 주셨습니다. '은혜'와 '은사'와 '선물'은 동일시 되는 단어들입니다 (롬12;1, 고전12:4).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교회를 위해 성령으로 은혜와 은사를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고 했습니다 (8절). 이 말씀은 시편68:18의 인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대적한 자들을 정복하신 후 하나님의 보좌에 오르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은사를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한 것은(9절), 그리스도께서 올라가셨다고 하는 것은 그 전에 내리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 것은(10절)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것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늘에 오르신 목적은 만물을 충만께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는 약속하신 성령으로 우주 만물에 임재하시고 다스리십니다. 물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 (11-16절)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사도'는 예수님이 직접 보낸 자들로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울이 가진 직책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자들로서 부활의 증인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그 직책은 그들의 죽음 이후에 없어졌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전달하고 훈계하는 직책으로서 당시 특별한 기도자들이었습니다. 그 직책은 후에 정경의 등장으로 교회에서 없어졌습니다. '복음전하는 자'는 문자 그대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서 빌립, 디모데, 에바브라 등이 그에 속합니다. '목사'는 교회를 인도하고 양육하는 직책이었습니다. '교사'는 교회에 사도적 교훈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교리적 교수를 담당하는 직책이었습니다. 당시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하는 자는 전체 교회를 대상으로 사역했던 반면 목사와 교사는 지역 교회에 국한하여 사역했던 직책입니다. 당시 그러한 다양한 직책과 은사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서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도를 양육하여 더욱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고, 성도들이 교회를 위해 봉사의 일을 하도록 돕게 하기 위함이고, 궁극적으로 주의 몸된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함입니다 (12절, 고전12:4-12).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하나님이 세운 사역자들의 도움으로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지식을 얻어 나갑니다. 성도는 그것을 기초로 점점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릅니다 (13절). '장성한'(ηλικιαs)은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자란 것처럼 성숙한 상태를 말합니다. '분량'(μετρον)은 척도, 정도, 한계 등을 의미합니다. '충만한'(πρηρωμα)는 가득 찬 것, 가득 채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나가고 닮아 가는 일은 성도의 가장 중요한 신앙의 가치이며 목적인데, 그 일에 제한된 한계의 끝까지 자라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속성을 닮아 가는 것 그것이 영적 성숙입니다. 15절에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범사에'(παντα)는 일반적으로 '모든 일에'로 해석하나 어떤 이는 부사적 목적격으로 보아 '모든 방법으로'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Lincoln). 성도는 모든 일에 있어서 혹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영적 성숙을 이루어야 합니다. 영적 성숙에 대해 본문 에베소서4:13,15에는  자라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빌립보서2:12에는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구원'은 중생를 말할 때도 있고 성화를 말할 때도 있고 영화를 말할 때도 있습니다. 이미 얻은 구원을 이루어 간다는 말은 거듭난 영적 인격이 점점 성장해가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유다서1:20절에는 건축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믿음을 가진 이후에 영적 인격이 성장하는 것은 집을 건축해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성도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자라야 하는 이유는 어린아이가 되지 않고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처럼 미성숙한 상태에 있는 자는 그릇된 교훈의 속임수와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그릇된 풍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닮아 가는 영적 성숙자는 거짓된 교리와 교훈에 대한 분별력을 가지기 때문에 이리 저리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에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참된 것을 하여'(αληθευοντεs)는 '진리를 말하여'의 의미입니다 (speaking the truth -NIV).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말합니다. 개인의 영적 성숙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닮아 가므로 이루어 지지만 공동체적인 영적 성숙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전하고 가르쳐서 이루어가야 갑니다. 그것은 사랑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우리 몸에 비유한다면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몸은 교회이고 각 지체는 성도입니다. 각 지체인 성도가 개별적으로 분량을 따라 영적 성숙을 이루는 동시에 각 지체인 성도들이 서로 사랑 안에서 유기적 결합과 협력을 통해 몸 전체인 교회 공동체의 영적 성숙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활 (17-24절) 

 

  ①이방인처럼 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에게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므로 이방인처럼 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이방인으로 살았었을 것이나 이제 그 때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혜와 복에서 제외되어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첫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합니다. 허탄한 것을 생각하고 추구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둘째, 총명이 어두워져 있습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없어서 하나님도 모르고 진리도 모르고 가치 있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무지한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결국과 그 원인과 거기에서 구원받는 방법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넷째, 마음이 굳어져 있습니다. 마음이 교만하고 완악하여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방법을 인지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과 은혜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감각이 없습니다. 마음이 굳어져 죄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자신을 방탕에 방임합니다. 자신의 행동에서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합니다. 삶에서 옳은지 그른지를 생각하지 않고 욕심을 따라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②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는 이방인의 특성을 배우지 않고 참된 것을 배웠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는 예수님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삶을 살기 위해 훈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첫째,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죄적 성품과 습관을 따라 살던 생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곧 거듭나기 전에 죄적 본성 따라 살던 삶을 말합니다. 죄적 본성은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아가는 성향이 있습니다. 불신앙인들이 추구하는 삶은 아무리 좋게 여겨지는 것이라도 그 결과는 허무와 허망한 뿐입니다. 그 삶은 생명을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썩어져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습을 좇는 것은 유혹의 욕심을 따른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상을 숭배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 우상을 따라가는 것은 그 우상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얻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우상을 따라가는 근본 원인은 욕심 곧 탐심 때문입니다 (골3:5). 우상 숭배자들은 사람들의 욕심을 자극하여 우상을 숭배하도록 유혹합니다. 초대교회 때 거짓 선지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들로 유혹을 합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진리를 근거하지 않고 사람의 욕망을 자극하는 내용으로 미혹합니다.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것이고 유혹의 욕심을 따라가는 것이고 옛 사람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둘째,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거듭난 영적 속성을 따라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 새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는 개역 판에는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로 번역되었었으나 개역 개정판에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로 개정되었습니다. 이에 해당되는 헬라어 성경(GTS)은 'εν δικαιοσυνη και οσιοτητι τηs αληθεωs'로 나와 있습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KJV역의 번역을 때를 경우 '의와 진리의 거룩함 안에서'(in righteousness and true holiness.)이고, NIV역의 번역을 따를 경우 '진리의 의와 거룩함 안에서'(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입니다. 결국 어떤 번역을 취하든지 '진리'는 수식어이고 주 단어는 '의'와 '거룩함'이라는 것입니다. NIV역의 번역을 따를 경우 '진리로부터 나오는 의와 거룩함 안에서'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의와 거룩함은 하나님의 진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 내용이 성경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의와 거룩함의 기준은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의'는 하나님 앞에 옳게 행하는 것이고 '거룩함'은 죄에서 떠나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옳은 것을 선택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새 사람을 덧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새롭게 되어'(τω πνευματι του νοοs, in the spirit of your mind -KJV) 새 사람을 입는 생활을 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4. 새로운 생활의 법칙 (25-32절)

 

  ①참된 것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거짓은 옛 사람의 성품에 속한 것으로서 모든 종류의 부정과 속임과 궤휼입니다. '참된 것'은 새 사람의 속성에 속한 것으로서 진실을 말합니다. 거짓은 대인관계에서 신뢰를 깨트립니다. 타인에게 상처를 받게 하고 공동체의 분열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공동체의 모든 일원이 한 몸의 지체 곧 일체의 마음을 가지고 참된 말을 해야 합니다. 선진인 이기선 목사는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을 첫째도 진실, 둘째도 진실, 셋째도 진실이라고 했습니다.

 

  ②분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이 구절은 얼른 보면 분을 내는 것에 대해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31절에서 노함과 분냄에 대해 금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는 분내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노하기를 더디하라'는 권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마5:22, 갈5:20, 골3:8, 딤전2:8, 딛1:7, 약1:19-20). 사전적으로 '분내는 것'은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을 나타내는 것을 말하고 '노하는 것'은 화내거나 성내는 것을 말하는데, 현상적으로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구분한다면 분(憤)은 마음에 품어서 자신에게 한정되어 있을 때로, 노(怒)는 그 분이 밖으로 표출되어 다른 사람에게 언행으로 나타낼 때로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의분을 나타내기도 하셨지만 (막3:5, 요2:13-17),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대부분 죄성이나 성품이나 울분(Achilles)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 분노를 내지 않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분내는 것은 악령의 모습이며(계12:12),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이유입니다 (신32:49-52). 열번 잘하고도 한번 분노를 발하면 하나님의 의가 다 무너지고 맙니다. 혹 실수로 참지못해 분노했을지라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밤을 넘기면 그 분이 마음 속에서 체계화되고 화해하기도 힘들어집니다. 그것은 악령이 더 큰 죄를 짓게 하려는 술수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을 내지 않도록 해야 하며 분을 내었을 경우 그 날이 지나기 전에 용서를 구하므로 해결해야 합니다.

 

  ③도둑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씀은 십계명 중 제 8계명에 속한 계명입니다 (출20:15). 도둑질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물건을 몰래 훔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도둑질은 직접적인 도둑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당하게 착복하는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Calvin). 절도, 도박, 시기, 거짓증거, 부당한 상거래, 고리대금, 뇌물수수, 임금 미지불, 합당한 노동거부, 차용금 미지급, 타인의 명예와 지위와 권리를 침해하거나 박탈하는 행위 등이 있습니다 (레6:2-4, 신25:13-16, 시37:21, 약5:4). 그리스도인은 소극적으로 도둑질을 하지 말라야 하며 적극적으로는 성실히 일해야 합니다. 장발쟝은 너무 가난하여 빵을 훔쳤습니다. 너무 먹을 것이 없으면 도둑질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실히 일해서 자신이 도둑질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정이 먹고 살 것이 있게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근면성과 창조성을 발휘하여 더 재산을 더 증식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구제하여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도둑질을 하지 않고 가정이 유지되고 선한 일을 하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④더러운 말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더러운'(σαπροs)는 문자적으로 '썩은' '부가치한' '나쁜' '부패한'의 뜻입니다. 그로 보아 '더러운 말'은 비속어나 욕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악의를 가진 비방이나 험담이나 중상모략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31절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고 했습니다. 노함, 분노 뿐아니라 비방 등 모든 악의를 가진 행위는 버려야 합니다.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의 실수와 약점을 말하여 공론화하는 것은 더러운 말입니다. 더러운 말은 자신에게나 듣는 사람에게나 공동체 모두를 침체시키는 요인이 됩니다. 예수님도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고  평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7:1-5). 그리스도인은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말을 하려면 선한 말, 덕을 세우는 말,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이 기쁘고 듣는 사람이 힘을 얻고 공동체에 유익이 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더러운 말을 하는 것은 성령을 근심되게 하는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되게 하지 말라~'(30절) 맨 앞에 '그리고'(και)가 있습니다. 더러운 말을 하는 것이 성령을 근심되게 하는 것임을 암시하는 구조입니다. 사람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에 영이 거듭나고 성령이 내주합니다. 성령은 믿는 자 속에서 예수님이 재림할 때까지 곧 성도가 부활할 때까지 책임지고 성화를 돕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이 선택한 자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한 자이므로 하나님의 목적대로 영적 성장을 이루도록 돕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됨과 구원받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하고 하나님 말씀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도록 감동시킵니다. 영적 성장에 합당한 생각과 판단과 행동을 할 때는 격려하고 합당하지 않는 생각과 판단과 행동을 할 때는 가책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더러운 말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을 하나님 목적대로 성화시키려는 성령을 근심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에 임하여 공동체의 성장을 이끌려 하는 성령을 근심되게 하는 것입니다.

  

  ⑤서로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친절하게 하고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속한 것으로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행위입니다. 특히 용서에 대해서 강조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심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수되었던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하심같이 우리도 지체를 용서하길 힘써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마6:14-15, 18:23-35, 5:23-24, 막11:24-25).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심령이 고통스럽게 되고 인생이 비참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압살롬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13-18장).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닫히고 자신의 심령이 침체되기 전에 용서해야 합니다 (마5:25-26).

 

<結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이제 믿기 전에 살던 모습인 예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육체의 죄성을 제어하고 거듭난 영의 욕망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