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에베소서5:1-33

<題目>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

 

<序言>

  본 장에서는 전 장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인의 행동 규범을 더욱 적극적인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이 어떤 것인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빛의 열매를 드러내므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야 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경건생활을 통해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고 항상 감사해야 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정생활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비유로 남편의 도리와 아내의 도리를 언급했습니다. 내용구조는 빛의 자녀로서의 삶(1-14절), 주의 뜻대로 사는 삶(15-21절), 아내의 남편에 대한 도리(22-24절), 남편의 아내에 대한 도리(25-30절), 남편과 아내의 도리에 대한 원리 (31-33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빛의 자녀로서의 삶 (1-14절)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있듯이 이 구절은 전 장의 마지막 구절인 32절의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한 말씀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서로 용서해야 하는 근거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원수되었던 자들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여 아들로 삼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제물로 내어 놓아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예수님은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우리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셨듯이 그리스도인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①어두움에 속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그리스도인은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 아니고 빛에 속한 자들입니다. 사단과 우상과 세상과 육체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말씀과 영에 속한 자들입니다. 본질적으로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는 죄성이 좋아하는 세속적인 목적으로 살았지만 예수를 영접한 다음에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닮아 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두움에 속한 말을 하지 말고 빛에 속한 말을 해야 합니다. '음행'은 성적 부도덕한 행위를 말하고 '더러운 것'은 도덕적으로 추한 행동을 말하고 '탐욕'은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을 말합니다. '누추함'은 더럽고 추한 말을 가리키고 '어리석은 말'은 사리에 맞지 않는 바보같은 말을 가리키고 '희롱의 말'은 상스러운 말을 가리킵니다. '감사하는 말'(ευχαριστια)는 '좋은'(ευ)과 '은혜'(χαριs)의 합성어로서 은혜로운 말을 가리킵니다 (Calvin). 우리는 세속적이고 죄적이고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의 말, 감사의 말, 긍정의 말, 위로의 말, 소망의 말을 해야 합니다. 4:29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②어두움에 속한 자들과 함께 하지 말아야 합니다.

 

  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7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우상 숭배자' '음행하는 자' '더러운 자' '탐하는 자'는 동일선상에 있는 사람들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은 자들의 대표적인 사람들을 열거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세속적 목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옛 사람인 죄성을 따라 삽니다. 욕심과 욕망과 탐심을 따라 그것을 얻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 현상으로 음행을 하며 우상을 섬깁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합니다. 요한계시록21:8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22:15에는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우상숭배나 행음 살인 도둑질 거짓말 등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의 대표적인 죄이며 탐심은 그 근본 원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불순종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됩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는 거짓 교사들도 그와 같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 속하거나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자기들의 탐심을 따라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진리까지 이용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에 속지 말아야 하며 그들과 함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에베소교회 교인들도 전에는 그와 같이 어둠에 속한 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탐심을 따라 우상숭배와 음행 등 더러운 것을 행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빛에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심판 받을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에 속한 자들과 함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한다고 할 때 '시험하다'는 헬라어는 πειραζω입니다 (약1:13). 본문의 '시험하다'는 δοκιμαζω입니다. 본문의 '시험하여 보라'(δοκιμαζοντεs)의 기본형 δοκιμαζω는 '시험하다' '입증하다' '조사하다' '시도하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서12:2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에서 '분별하도록 하라'에서 사용된 기본형도 δοκιμαζω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했습니다. '착함'(αγαθωσυνη)은 온유함과 친절함과 관대한 행위를 말합니다. '의로움'(δικαιοσυνη)은 공정함과 옳은 행위를 말합니다. '진실함'(αληθεια)은 순수함과 정직한 행위를 말합니다. 이런 성품과 행위는 빛의 자녀에게 나타나는 특성입니다.

 

  ③어두움에 속한 자들에게 빛을 나타내야 합니다.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어둠에 속한 자들이 행하는 어둠의 일은 열매가 없습니다.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결국은 멸망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하기도 부끄러운 은밀한 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에 그치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꾸짖고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둠에 속한 자들과 그들의 은밀한 행위를 직접적으로 꾸짖고 드러내라는 것은 아닙니다. 13절에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둠에 속한 자들의 일에 참여하지 않고 빛에 속한 삶을 살게 되면 어둠에 속한 자들의 일이 드러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빛에 속한 삶을 살면 그 빛의 행위가 어둠에 속한 자들과 행위를 비추어 그들의 행위가 드러나고 더 나아가 그들이 마음에 가책을 느끼고 빛 가운데로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어느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여러 내용을 정리한 말씀입니다 (사9:2, 26:19, 51:17, 52:1, 60:1 etc) 그런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이 불신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스스로가 거룩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신 말씀과 상통합니다 (마5:13-15).

 


        3. 주의 뜻대로 사는 삶 (15-21절)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앞 대지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둠에 속한 삶을 살지 말고 빛에 속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둠에 속한 삶을 사는 자는 지혜없는 어리석은 자이고 빛에 속한 삶을 사는 자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행해야 할지 자세히 주의해야 합니다. 어떻게 행해야 할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곧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이해하라'(συνιετε)는 말은 어떤 것에 마음을 기울여 파악하고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10절에도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했고 로마서12:2에서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①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16절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했습니다. '세월'(καιρον)은 '중요한 시기' '금방 지나가 버리는 특별한 기회'를 말합니다. '아끼라'(εξαγοραζομενοι)는 '도로 사라' '속량하라'의 의미입니다. 곧 세월을 아끼라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 중요한 것을 행할 기회를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서 어떤 희생을 해서라도 그 중요한 것을 얻을 기회를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갈6:9-10).

 

  ②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술 취하는 일은 일반화되어 있었고 초대교회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딤전3:3, 딛1:7, 2:3). 술 취함은 그 자체만 문제가 아니라 그 생활이 타락과 방탕을 가져오는데 더 심각성이 있습니다 (잠23:29-35, 눅15:13). 그리스도인이 술 취함으로 방종과 방탕하는 생활을 하지 말라야 할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술에 취할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 제 3위에 속한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보내신 영입니다. 그 성령님은 어떤 힘(power)이나 능력(energy)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입니다. 성령충만은 성령세례나 성령의 내주나 성령의 인치심과는 구분해야 합니다. 성령세례와 성령의 내주와 성령의 인치심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에 단회적으로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하지만 성령충만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도 나타날 수 있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성령충만은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 신자에게 내주하신 성령이 생각과 행동을 온전히 지배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물론 신자의 내부에서만 아니라 외부에서 임재하여 지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성령충만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원어는 두가지입니다. εν πνευμα와 επι πνευμα입니다. 곧 성령이라는 단어 앞에 전치사가 εν과 επι 두 가지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εν은 영어의 in으로서 '...안에'이고, επι는 영어의 on, over, above로서 '...위에'입니다. εν은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을 말하고, επι는 위에서(밖에서) 임하는 성령을 말합니다.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은 주로 인격적 성장인 성령의 열매와 관련이 있고 위에서 주어지는 성령은 사역적 능력인 은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이 충만할 때는 지.정.의의 모든 성향이 완전히 고무되어 교회생활에서 구속의 은혜에 감격하고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순종을 좋아하고 진심으로 찬양을 하게 되고 기도하기를 즐거워 하고 전도의 필요성이 느껴집니다. 개인생활에서 믿음을 가지게 되고 인내하게 되고 기뻐하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위에서 임하는 성령에 충만을 경험할 때는 술취한 사람처럼 황홀경에 빠지기고 하고 쓰러지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떨기도 하는데, 그 결과 소명감과 사명감이 생기고 믿음의 능력과 담대함이 생기고 은사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εν이 사용되었습니다.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에 충만할 것을 말합니다. 믿을 때에 들어와 계시는 성령이 충만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본문 18절 다음에 나오는 19-20절에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했습니다. 마음으로 기뻐 찬송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가 넘쳐야 합니다. 고난이 심할 때는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마음이 기쁨과 감사로 넘쳐야 할 때입니다. 힘들 , 사업문제로 직장문제로 대인관계문제로 많은 상처와 분노를 가지고 괴로워 할 때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술에 취하기 쉽습니다.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것에 취하려 하지 말고 성령에 취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선택 사안이 아니라 필수적이 요구입니다. '충만함을 받으라'(πληρουσθε)의 시상은 현재 수동태 명령형입니다. 현재 시상은 성령충만이 일회적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있어야 함을 시사하고, 수동태 시상은 성령충만이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서 경험되어짐을 시사하고, 명령형은 성령충만이 일부 제한된 신자만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반드시 추구해야 할 명령임을 시사합니다.   

 

  ③주를 찬송해야 합니다. 19절에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은 사람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찬송하게 됩니다. '시'(ψαλμοιs)는 시편 혹은 시편이 가지고 있는 정신과 형태를 가진 일반적인 찬양 노래들을 말합니다. '찬송'(υμνοιs)은 당시 초대교회 내에서 작성하기 시작한 하나님에 대한 영광송을 말합니다. '신령한 노래들'(ωδαιs πνευματικαιs)은 영감에 의해 만들어진 노래들을 말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자는 당연히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깨닫고 그가 자기들에게 베푼 은혜를 찬양하게 됩니다. 찬양의 대상은 본문에 나온 대로 '주'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모두에게 찬양하는 것입니다. 찬양의 내용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해 주신 것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고 말씀을 깨닫게 하고 성화를 돕게 하고 사역을 하게 한 것을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의 도구는 일반적으로 악기와 노래로 하지만 본문에서 강조된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주관하는 기관입니다. 중심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④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20절에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과 형편과 처지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택해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선한 목적을 가지신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그 목적을 위해 시험과 시련과 연단을 통해서, 때론 위로와 격려와 치유로 인도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막아 주시고 감당할 시련만 주신 것 감사해야 합니다. 그 시련 조차도 영적 성장을 가져오게 하고 복을 받는 통로로 사용하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목적을 믿고 주권적인 섭리를 믿으면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5:18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⑤피차 복종해야 합니다. 21절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함을 기초로 공동체 안에서 서록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굴복하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외부적인 환경이나 능력으로 보면 굴복할 수 없고 순종할 수 없습니다. 객관적으로 굴복해야 할 이유가 없고 자존심 때문에라도 굴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섬기는 정신으로 굴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진리를 위해서라면, 사역을 위해서라면,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면,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라면 굴복하기도 해야 하고 순종하기도 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세상적 목적과 자기의 목적은 간 데 없고 오직 구속한 주만 보이는 것입니다.

 


       4. 아내의 남편에 대한 도리 (22-24절)

 

  가정사역자들은 집(house)은 있으나 가정(home)은 없다는 말을 합니다 (잠17:1, 15:17). 사실상 사회적인 문제로 노인문제와 청소년 문제를 들고 있지만 그것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부부문제로 가정이 파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관계가 바로 되지 않으면 자녀 교육도 실패하고 부모 공경도 실패하고 신앙생활도 실패하게 됩니다. 베드로전서3:7에는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는 교훈을 하고 나서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고, 디도서2:5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권면에 이어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2절에서 아내는 남편을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3:18에도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3:1에는 순복하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2:11에는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본문 33절에는 존경하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브라함에 대해 주라 칭하기까지 복종했다고 했습니다 (벧전3:6). 그것이 남편의 마음을 얻는 내적 아름다움입니다 (벧전3:3-5).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웠고 그리스도께서 주장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복종하고 순종합니다. 그 복종과 순종은 강압에 의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을 위해 은혜 베푸시고 인도하시는 사랑에 감복하여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아내는 자발적으로 남편을 복종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33절에는 남편을 존경하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평생 살 수 없어도 존경하는 사람과는 사랑 없이도 평생 살 수 있습니다. 남편이 잘난 것이 없어도 남보다 나은 것이 한가지라도 있으니 그것을 보고 존경해야 합니다. 그래서 남편을 높여 주고 칭찬해 주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의사결정을 존중해 주고 중대사에서 위신을 세워 주고 실수에 대해 변명할 기회를 주고 다른 사람에게 흉을 보지 말고 자존심을 자극하지 말고 부름에 온유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남편에 대한 마음과 사랑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잠언31:10에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자는 남편을 괴롭게 하는 자이고 스스로 남편의 관심이 떠나게 하는 미련한 자입니다. 욥의 아내나 헤롯의 아내나 아합의 아내처럼 하나님의 의를 세우지 못하는 자입니다. 잠언14:1에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고 했고, 12:4에는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의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고 했고, 21:9에는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고, 21:19에는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남편을 가정의 리더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11:3, 8-10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정의 질서를 세울 때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두셨다고 했습니다. 여자를 위해 남자를 지은 것이 아니라 남자를 위해 여자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권세 아래 있는 표로 머리를 길게 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가정의 리더 역할을 할 수 있는 신체 조건과 심리적 기질과 영적 특성으로 만들었고 여자는 남자를 도와 가정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조건과 기질과 특성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정을 세운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가정을 세운 원리와 질서와 제도를 인정하고 하나님이 가정에서 세운 위치를 인정하는 의미에서 남편을 순복해야 합니다.

 

  둘째,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받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3:2-4에 보면 남편들은 아내의 정결한 행위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머리, 의복, 장식품 등으로 꾸미려 하지 말고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원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 다투다가 남편의 마음이 떠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편의 마음을 얻는 것이 아내의 행복이고 가정의 행복이고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길입니다. 남편의 마음을 사려면 남편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 알아야 합니다. 남성들은 또 다른 남자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특성을 가진 여성을 원합니다. 남성에게서 찾아보기 힘들고 여성에게 많이 나타나는 특성은 온유함과 안정됨입니다. 남성의 매력이 관영과 포용과 용서와 배려에 있다면 여성의 매력은 온유함과 부드러움에 있습니다. 남편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는 온유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먹어갈수록 남성은 여성호르몬이 많이 분비되는 반면 여성은 남성호르몬이 많이 분비되어 남성화되어 갑니다. 그래서 결혼생활에서 초기에는 남성이 고분고분하게 대해주는 아내가 사랑스럽다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내가 억세게 나오니까 싫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남성은 마음이 더 여려져서 아내의 태도가 더욱 강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셋째, 신앙적인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베드로전서3:1-2에 보면 아내가 남편을 순복할 때 믿지 않는 남편도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믿음을 가져 구원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남편들은 아내의 두려워 하는 마음과 정결한 행위를 요구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자기가 믿지 않은 경우에라도 아내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호응합니다. 또 디도서2:5에는 아내가 집안 일을 잘 하고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나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믿는 자라 해도 남편은 아내가 현숙하기를 원합니다. 안정된 심령과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순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믿는 남편이라도 믿음이 더욱 좋아집니다.  

 


       5. 남편의 아내에 대한 도리 (25-30절)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25절에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마치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희생적으로 사랑하듯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셨고 현재에도 교회의 정결과 거룩과 성장을 위해 성령으로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고 귀히 여깁니다. 남편은 아내를 귀히 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28절에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3:19에는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 몸처럼 여겨야 합니다 (28절). 부부윤리에서 남편이 아내에 대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아내를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남편은 육체적 우월성을 가지고 연약한 아내를 괴롭게 해서는 안됩니다. 골로새서3:19에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내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매사에 인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귀히 다루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3:7에는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평생 수고해서 얻은 반려자이고(전9:9), 후대를 함께 이어 갈 자이므로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여자는 본래 남자를 도와줄 배필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남자에 비해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의 허물에 관대해야 해야 합니다. 아내의 매력은 온유함과 순종함에 있다면 남편의 매력은 관대함과 포용력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작은 일에 보람을 느끼므로 하찮은 일이라도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념일을 기억해 주고 고민을 들어주며 위로해 주고 존재 가치를 느끼게 해 주고 좋은 점을 칭찬해 주고 개성과 취미를 존중해 주고 가정 경제에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한다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성은 심리적으로 의심이 많아서 사랑해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한다고 말하면 사랑하는 줄 아는 면이 있습니다.  

 

  첫째, 아내는 유업을 함께 받을 자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3:7 중반절에 보면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함께 하나님의 언약적인 축복, 구속사적인 축복을 이을 자입니다. 하나님이 보낸 하나님의 자녀들을 낳아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룰 자입니다.

 

  둘째, 아내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3:7 상반절에 보면 지식을 따라 동거해야 된다고 했고 아내는 연약한 그릇인 줄 알라고 했습니다.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내를 괴롭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골3:19). 아내를 사랑하지만 아내에게는 괴로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법정에 제출한 이혼사유 중 가장 많은 것이 성격차이입니다. 그들에게 인터뷰해 보면 대부분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폭행한 사람도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랬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랑하는데 왜 성격이 도저히 안 맞는다고 생각할까요.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데 아내가 느낄 때는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될까요. 그것은 남편이 왜곡된 인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대부분 아내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아내가 여자인데 여자에 대한 신체적 심리적 영적 특성조차도 모릅니다. 더욱이 자기 아내의 기질과 성품, 아내의 출생과 자란 환경과 교육 내용, 아내의 특기와 취미와 선호도 등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내에 대한 지식을 가지려는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관점에서 자기 방식대로 요구하고 대체하기 때문에 그것이 비록 사랑을 근거하고 있을지라도 아내에게는 괴로움, 학대가 됩니다. 그 결과가 성격 차이라는 말을 낳게 되고 불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아내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지식 가운데 가장 기본적으로 연약한 그릇이라는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남편을 돕는 배필에 합당한 특성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든 특성이 남성보다 연약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그래야 아내를 관용하고 포용하고 배려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이 아내가 느낄 때 사랑으로 느끼게 됩니다. 아내는 상처받아 깨어지기 쉬운 존재인 줄 알고, 관용하고 포용하고 용서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셋째, 신앙적인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베드로전서3:7 하반절에 보면 남편이 아내를 귀히여겨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은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아내와 불화하게 되면 신앙생활에 영향을 받습니다. 특히 교회 일을 잘 감당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3:12절에서 집사는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내를 잘 케어하는 훌륭한 메니져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 남편과 아내의 도리에 대한 원리 (31-33절)

 

  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①몸과 지체의 원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한 몸입니다 (창2:15). 31절에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고 했습니다.

 

  첫째, 남편은 머리가 지체를 귀히 여기듯이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29-30절에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고 했고, 자기 지체가 못났다고 지체임을 학대하거나 잘라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체가 못생기거나 기능이 약해도 여전히 보양합니다. 오히려 못생기고 기능이 약해진 지체를 더 보양합니다. 자라지 못한 지체는 성장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고 보호하고 양육합니다.

 

  둘째, 아내는 지체가 머리를 따르듯 남편을 순종해야 합니다. 23절에 보면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고전11:3, 8-9). 남편은 머리입니다. 머리가 부족한 면이 있다고 해서 그 위치나 기능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머리는 지체에 지시하고 통제하고 관리합니다. 하나님이 남편을 그 위치에 세운 줄 알고 그 위치를 부정할 경우 지체에도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생각하여 머리를 존중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②그리스도와 교회 관계의 원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32절에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했습니다. 남편과 아내에 대한 교훈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유기적 관계의 비밀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에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비유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아4:7-16, 마9:15, 25:1, 계19:7).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자신을 십자가 죽음에 내어 주었습니다 (25절). 말씀으로 거룩하게 합니다 (26-27절). 교회를 흠없게 하려고 양육합니다 (29절, 사61:10). 교회는 신랑되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고린도후서11:2에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 했습니다. 신부의 생명은 깨끗함에 있습니다. 아무리 곱고 학식이 많고 재간이 있고 예물을 많이 준비한다고 해도 정조를 잃은 신부라면 신랑에게 외면을 당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3:8에는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유혹과 핍박이 와도 예수님과 그의 계명을 양보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25:1-13에는 등불과 기름준비에 대한 교훈을 했습니다. 아무리 신앙 연조가 많고 깨달은 진리가 많고 큰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신앙의 절개가 없으면 신랑되는 예수님께 외면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는 신랑되는 그리스도를 만날 때까지 아름다움을 간직해야 합니다. 신부는 신랑이 볼 때 가장 온유하고 유순하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래서 신부는 최대한 아름답게 꾸며야 합니다. 우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외모로 하지 않고 안정된 심령의 썩지 않을 것 곧 순종함으로 단장해야 합니다 (벧전3:3-5). 속 사람을 단장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순종해야 합니다. 계명, 말씀, 사명을 순종해야 합니다. 옳은 행실로 단장해야 합니다 (계19:7-8). 그런 행위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빼앗습니다 (아4:9). 그렇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얻지 못합니다 (잠11:22).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그와 같도록 해야 합니다.  

 

  첫째, 남편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이 사랑해야 합니다. 25-27절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 하늘 보좌를 내 놓으시고 이 땅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셔서 교회의 죄를 없이하기 위해 교회의 죄값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교회를 위해 내어 준 희생적인 사랑을 나타낸 것입니다. 또한 성령으로 교회에 임재하여 운행하십니다. 성령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고 말씀대로 만들어지게 하고 말씀으로 거룩하게 합니다. 그래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공동체로 만들어 갑니다. 그가 다시 오실 때에 흠없는 신부로 맞이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복종해야 합니다. 22-24절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웠고 교회에 임재하고 교회를 주장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고 그와 그의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③창조 원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남자를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창3:16). 이 원리에서 남편과 아내의 위치와 의무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남편은 관리자로서 아내를 잘 돌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내를 위해 남편을 만든 것이 아니고 남편을 위해 아내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남편은 아내를 관리하고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care, management). 본문 23절에서도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된다고 했는데 머리가 된다는 것은 지도자, 보호자, 관리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내는 배필자로서 남편을 잘 도와야 합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로 만들었습니다 (창2:8). 그래서 구약시대부터 결혼에 대해 표현할 때 남자가 여자를 취한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창4:19, 민12:1, 룻4:13, 호1:3). 그래서 바울은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고전11:3, 8-9). 23절에서도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머리가 된다는 것은 지도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남편과 아내가 인격적으로 종속관계에 있다는 의미이거나 차등이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권리 면에서는 평등하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위치와 질서와 직책과 사역상 남편을 머리로 세웠고 아내를 돕는 자도 세웠다는 것입니다.

 

  ④특성상 서로 다른 존재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여성에게는 여성만이 가진 특성이 있습니다.

 

  여성과 남성은 다릅니다. 신체적, 심리적, 영적 성향에서 다양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성은 화성에서, 남성은 금성에서 왔다고 할 정도로 다릅니다. 이에 대해서는 대부분 학자들이 공감합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어떠한 이유로 생겨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다양한 주장을 합니다. 학계에서 여성의 성 역할(gender-role)이 언제 형성되는냐 하는 논쟁이 뜨겁습니다. 첫째는 태어날 때부터 가진 선천적 특성이라는 주장이 있고, 두번째는 태어난 이후 사회화 과정에서 형성된 후천적 특성이라는 주장이 있고, 세번째는 앞의 두 주장을 통합하여 이해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선천적인 특성이라고 보고 후천적으로 사회화 과정에서 더욱 구체화 되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특성이 큰 틀에서 기본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부분적으로는 사회문화 환경의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은 본래적 특성에 근거한 사회적 통념에 의한 영향일 것입니다. 우리가 신뢰하는 성경은 여성은 남성의 독처(獨處)함을 해결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창2:18-23). 그렇다면 당연히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남성이 갖지 못한 여성만이 가진 특성이 부여되었을 것입니다. 사도들도 그 전승을 인정합니다 (벧전3:7, 골3:19, 엡5:25). 남성은 신체도 강하고 심리적으로도 이성적이고 분리중심적이고 목적 지향적입니다. 반면 여성은 신체적으로 부드럽고 심리적으로 감성적이고 관계중심적이고 과정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행동주의 심리학 연구 결과에 의하면 남성과 여성은 염색체(Y)가 다른 것처럼 뇌에 각기 다른 뭔가가 있어서 어렸을 때부터 서로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남성은 자동적으로 장난감 자동차에 흥미를 느끼는 반면 여성은 장난감 인형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남성은 대화할 때 오른쪽 귀만 사용하고 여성은 양쪽 귀를 다 사용한다고 합니다. 남성은 지도를  잘 보는데 비해 여성은 어지러진 책상 위의 물건을 잘 찾는다고 합니다. 길을 찾을 때에도 남성은 방향 중심으로 찾는데 여성은 지형지물을 중심으로 찾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성이 못 듣는 남성에게 화를 내면 안 되는 것처럼 남성이 지도를 못 보는 여성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한 남편이 아내가 박사과정을 마칠 때까지 뒷바라지 했습니다. 아내가 박사 학위를 얻게 되고 직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동의를 얻어 그 동안 소원이었던 작가가 되기 위해 직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런데 가정을 뒷받침했던 남성이 직장을 그만두면서 돈을 벌지 못한다는 스트레스를 받아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동시에 아내는 혼자서 가정을 돌보아야 한다는 생각에 괴로워 하는 지경에 빠졌습니다 (Rubin의 이야기). 집에서 가사일을 돌보고 있는 남성은 그렇지 않는 남성에 비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더 많다는 내용이 신문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차별화되고 있습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못한 기질로 만들어졌다는 여성 비하(卑下)의 의미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보완하고 더 나은 완성을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창2:24, 엡5:31-33). 성향에 있어서도 여성의 특성이 남성의 특성보다 열등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성이 갖지 않은 점을 남성이 도와준다는 의미와 여성에게 남성이 갖지 않은 좋은 특질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상호 보완적으로 하나 되어야 완전성을 이룰 수 있는 '반쪽'인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 나라는 유교문화가 사회 통념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의 인권과 여성의  성향이 무시되어 왔습니다. 지나친 표현일지 몰라도 남성에 종속된 혹은 남성의 소유로 생각해오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유교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유대 사회를 반영한 성경이 남성 위주로 씌어진 것을 여과없이 이해하여 기독교에서는 모든 교의와 설교와 사역에서 암암리에 남성 우월주의 성향이 지배했고 여성을 폄하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더욱이 한국에서는 전통적인 유교 문화와 접목되어 그런 불합리한 것들이 교회 내에 고착화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설교는 대부분 성경 해석에서부터 적용까지 성경의 진정한 의도와는 거리가 멀게 여성을 폄하하거나 주도적인 그룹에서 소외시켰습니다. 그런 메세지는 사회 특히 가정에서 남성의 정신적 폭력을 정당화하고 여성 스스로 체념하게 하는 점들을 노출시켰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여성에게 부여한 중요한 특질들이 개발되는 것을 봉쇄하는 현상을 일으켰습니다. 과거에 유교 문화적 통념이 억압했는데 교회 안에서도 억압한 것입니다. 여성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고통받아왔고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스페인 남부 말라가 근방의 이슬람 사원에서 코란 교사로 일하는 이맘 모하메드 카말 모스타파가 지은 책 '이슬람의 여성들'이 있습니다. 유럽 등지에 사는 이슬람 신도들에게 정통 이슬람교의 여성관을 설명해 주기 위해 지은 책이랍니다. 그 내용에는 "아내를 때릴 때는 얼굴, 머리, 가슴, 배를 피하고 가는 회초리로 손이나 다리만 때려 상처를 남기지 말라." 또 "아내를 제재하는 방법은 우선 말로 타일러 본 뒤 안 되면 '최고의 형벌' 인 성관계 중단을 시도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이슬람인들이 여성을 종속적으로 생각하는 단면입니다. 이것은 여성을 다루는 법이 아니라 학대하는 법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여성을 때린다는 자체는 옳지 못합니다. 세계 각처에서 여성이 남성 사회로부터 학대 당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남성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 여성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이 와 닿습니다. 은사에서도 남성은 지성적이고 의지적인 부분에서 남성은 감정적인 부분이 잘 열립니다. 성령의 예민한 만지심도 여성이 더 쉽게 느낍니다. 대신 심리적 변화와 영적 변화에 쉽게 영향받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여성이 신안적인 면은 유리합니다.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최근 미국인의 종교생활에 대해 조사한 결과 성경 열독률은 여자가 남자보다 높았다고 합니다. 여성은 훌륭한 면이 많습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많이 했습니다. 십자가 아래까지 무덤에까지 찾아간 이들은 여자들이었습니다.

 

  여성에게는 남성의 관심과 배려가 필요합니다. 미국 버클리 대학 사회학 교수인 차도로우(Nancy Chodorow) 교수는 그의 저서 'The Reproduction of Mothering'에서 정신분석학의 도움을 받아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그녀는 자신을 어느 한 쪽의 성별과 동일시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성적 정체감은 1-3살 사이에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즉 '난 남자야' 혹은 '난 여자야' 하는 내적 생각을 성적 정체감(gender identity)이라고 하는데 그 성적 정체감은 애착의 과정과 동일시의 과정을 통해 생겨난다고 합니다. 애착의 과정(attachment)은 중요한 타자(他者)와의 관계를 필요로 하는 과정을 말하고, 동일시의 과정(identification)은 중요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애착을 형성한 아이가 같은 성별을 지닌 보호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대부분 아동의 경우 어머니가 1차 보호자로서 가장 중요한 타자가 되는데, 이때 여자 아이는 성적 정체감을 가지는데 별 어려움을 겪지 않게 되나 남자 아이는 성적 정체감을 형성하기 위해 어머니와 관계를 점차 부인하고 아버지와의 동일시 과정을 겪기 때문에 분리의 과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성은 같은 성별을 가진 중요한 타자인 어머니와 동일시를 통해 관계적 형태로 진행되고 남성은 다른 성별인 어머니와의 분리 과정을 거쳐 아버지와 동일시를 통해 성적 정체감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성은 관계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분리의 경험이 없어서 냉철한 판단과 굳은 의지와 종합적 시간이 떨어집니다. 베드로전서3:7에는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심리적으로 여성이 남성을 이해하는 것보다 남성이 여성을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여성은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연약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남성이 자기 상태와 비교하여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여성의 매력이 부드러움과 사랑스러움에 있다면 남성의 매력은 포용하고 관용하고 배려하고 용서하는데 있습니다. 이제 깨어지기 쉬운 상처받은 연약한 그릇을 잘 보호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성의 성품과 위치를 이해하고 그들을 충분히 배려해야 합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 죄가 없지만 자기 몸이 교회를 위해 자기 몸을 내어 주기 까지 사랑했습니다. 우리도 생명의 유업을 함께 이어 가는 자기 몸인 아내를 자기 몸을 내어 주는 심정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 남성에게는 남성만이 가지는 독특성이 있습니다.

 

  남성은 여성과 전혀 다릅니다. 창세기2:18-25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남자를 만드시고 홀로 외롭게 있는 것이 좋지 않게 보여 돕는 배필로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러기에 남자와 여자는 육체적 구조와 특성 자체가 다릅니다. 신체적으로 남자는 강하면서도 충동적이나, 여자는 약하면서도 지속적입니다. 심리적 특성도 다릅니다. 남자는 종합적 시각이 있으면서도 단순하나, 여자는 예리하면서도 복잡합니다. 남자는 결과를 중요시하는 반면 여자는 과정을 중요시 합니다. 남자는 합리적인 이성적 사고가 발달해 있는 반면 여자는 감성적 사고가 발달해 있습니다. 성장도를 보면 여자는 17세에 이미 다 성장합니다. 그러나 남자는 37세에도 오락과 만화에 빠져 허우적댑니다. 쇼핑도 여자는 미리 필요한 물품의 리스트를 적고 조목조목 따지고 삽니다. 남자는 냉장고에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쇼핑을 하고 좋아 보이는 것은 닥치는 대로 삽니다. 아이에 대한 관심을 보면 여자는 언제 치과를 가야 하고, 언제 학교 연극에 출연하며, 친구들의 이름들이 무엇이고, 장차 꿈과 좋아하는 것 등도 파악해 놓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집에서 돌아다니는 조그만 인간들의 존재에 대해 가끔 느낄 때도 있다는 정도입니다. 신발도 여자는 편한 샌들 등을 비닐봉지에 넣고 출근하여 회사에서 구두를 벗고 샌들을 신습니다. 그리고 결국 샌들도 벗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아무 거나 신습니다. 그리고 하루종일 벗지 않습니다. 빨래를 보면 여자는 이틀에 한 번씩 세탁기를 돌립니다. 남자는 속옷의 화학성분이 바뀌기 전까지 입고 또 입고, 거꾸로 입고, 뒤집어 입고, 또 거꾸로 입고, 덜 더러운 걸로 갈아입고, 구멍 나면 두 개 입고 해서 더 이상 입을 것이 없을 때 비로소 동네 세탁소로 향합니다. 가는 길에 몸매 괜찮은 여자 없나 두리번거리며... 신앙적 종교성도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는 성향이나 은사가 나타나는 성향이 차이가 있습니다. 남자는 둔하지만 강하고 여자는 예민하지만 약합니다. 그래서 남자는 종합적이고 논리적이고 결과적인데 은혜받지만 여자는 지엽적이고 감성적이고 과정적인데 은혜를 받습니다. 이런 영적 성향의 차이를 알지 못하면 부부가 같이 신앙생활 형태를 두고도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여자가 볼 땐 남자는 도무지 감동을 못받고 그 흔한 방언조차도 못합니다. 부부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일 뿐 아니라 서로 다른 배경에서 자랐기에 가치관이 서로 다릅니다. 성격과 생활습관과 문제해결 방식도 다릅니다. 그러기에 서로 다른 부부가 함께 살면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서로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할 땐 싸움이 일어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남성은 거짓 자아와 참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복지부의 자료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3위이고 증가율로는 1위입니다. 연령별로는 1위가 40대, 2위가 30대입니다. 한국자살예방협회에 따르면 남자가 여자보다 배 이상 많고 ('크레머는 3배라고 했음), 80%는 우울증입니다. 그러고 보면 현재 3~40대에 있는 남성이 가장 우울해 있고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여성에 비해 남성들이 태아 때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여성들보다 더 많은 정신적ㆍ육체적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상처받기 쉬운 남성'이란 제목으로 영국 의학 저널에 기재된 이 논문에서 크래머는 "사람들은 보통 남자 아이가 여자아이보다 강할 것으로 기대하지만 사실 남자 아이들은 태아 때부터 여아에 비해 더 큰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의 논문에 따르면 남자 태아는 출산시 여자 태아에 비해 4~6주 가량 덜 성숙된 상태로 세상에 나오기 때문에 사망하거나 각종 질병을 얻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입니다. 또 유아기를 거치면서 소년들은 소녀들에 비해 사회로부터 은연 중에 강인할 것을 요구받기 때문에 감수성이 풍부한 많은 남아들의 경우 생후 1~2년 사이를 거치면서 이런 감수성을 다 잃어버린다는 것. 남성들의 이런 불이익은 유아기에서 끝나지 않고 청소년기와 성년기를 통해서도 지속된다고 보고서는 지적했습니다. 크래머는 "남성은 학교에 입학해선 평균 학습 능력이 뛰어난 여성들과 경쟁해야 하고 성년이 되어서는 여성에 비해 3배나 높은 자살률을 경험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우리 나라 문화적 배경은 남성상을 항상 강한 것으로만 인식되었습니다. 그 문화 속에서 자란 우리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 속에 살아갑니다. 특히 여자 앞에서는 강해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데이트를 해도 생리적으로 추위를 더 타는 남자가 덜 타는 여자에게 옷을 벗어 주고 돈이 없어도 밥을 먹으면 돈을 다 내고 가불해서라도 남이 살 수 없는 것 사주고 청혼고백을  광장에서 하기를 좋아합니다. 사회에서 자기 수준 보다 큰 차를 타려 하고 불 필요한 학력과 명예를 과시합니다. 가정에서는 가정 전체를 자기가 살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습니다. 그래서 직장을 잃으면 집에 못 들어 옵니다. 매일 도시락 싸가지고 나가서 배회합니다. 사업에 실패하면 아직 먹을 것이 있는데도 자살합니다. 그런데 사회는 변하고 있습니다. 여권도 신장되어 여자들은 잘 적응해가고 있습니다.  즉 사회 통념이 만들어 낸 거짓 자기와 내면에 있는 진정한 자기의 모습 속에서 갈등합니다.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과거 왕적인 강한 모습은 더 이상 보일 수 없습니다. 그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고개숙인 남자'입니다. 남성 심리 원형은 왕(King), 전사(Warrior), 마술사(Magician), 연인(Lover) 4가지라고 한다. 왕은 폭군과 나약한 면을 함께 가지고 있고, 전사는 강한 자에게 비굴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면이 있고, 마술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사람을 기쁘게 하지만 사기꾼과 허풍쟁이 성향이 있고, 연인은 살의 대상자에게 달콤함을 주지만 바람둥이와 중독자의 성향이 있습니다. 여자는 방향을 모를 때 주유소에서 물어 봅니다. 남자는 방향을 모를 때 끝까지 헤매다가 기름이 떨어져서 주유소에 들르게 되면 물어 봅니다. 여자 셋이 친구 사이이고 이름이 소영, 희진, 영자이면 서로 "소영", "희진", "영자"라고 불러줍니다. 남자 셋이 친구 사이이고 이름이 길수, 정남, 영철이면 서로 "닭대가리", "x같은새끼", "변태"라고 불러줍니다. 여자는 고양이를 좋아합니다. 남자도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자가 안 볼 때는 고양이를 발로 찹니다. 현대 남성은 시대적 급변으로 인해 유난히 거짓 자기(false self)와 참 자기(true self)사이의 갭이 큰 것을 발견하고 갈등하고 있습니다. 특히 과거 남성 위주의 문화에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므로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21세기 의식 변화에 여성은 잘 적응해 가는 반면 남성은 적응이 어려워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남성에게는 여성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이제 남성은 진정한 자기를 찾기 위해 변해야 합니다. 거짓된 자기를 버리고 진정한 자기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Separation의 단계).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삶의 형태를 전환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엄청난 박탈감과 소외감을 느낍니다 (Liminality의 단계). 그럼으로서 개성화된 완전한 자기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Reintegration의 단계). 그 개성화된 인성의 탄생은 나비의 탄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비로 변화하기 위해서 번데기를 희생시켜야 합니다. 번데기 안에서의 과정은 고립과 고독의 과정이지만 인내하며 심리적 정신적으로 개방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 만큼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일원들이 가장(남편,자녀)을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3:1-2에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 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엡5:22-24). 복종하고 순종하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습대로 존중해 주라는 것입니다. 남편의 위치를 인정해 주고 존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하나님께서 머리로 세운 줄 알고,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한 것 같이, 존중해야 합니다 (창2:8, 3:16, 4:19, 고전11;3, 8-9, 벧전3:6, 골3:18-19, 딤전2:11, 벧전3:1). 교회가 주께 복종해야 하는 것처럼 남편을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복종하는 것은 그를 그리스도로, 구원자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 심정과 원리로 남편의 진정한 위치를 확인해 주어야 합니다. 남편과 아버지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어야 합니다. 남성들위치는 참으로 힘든 위치입니다. 우리는 강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우리의 강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도 우리의 강함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습니다. 전과 같이 왕으로 군림할 수 없습니다. 상사와 부모는 거짓된 자아를 원하고 부하와 아내와 자녀는 개방된 자아를 원합니다. 그런 환경에 적응하려 하니 고통스럽습니다. 그 사이에서 우린 갈등하고 있습니다. 상사에게 부모에게 아내에게 자식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비록 우리의 잘못일지라도 심리적으로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고통이 너무 힘들어 집을 나가고 싶기도 하고 모두 함께 죽고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 변해야 삽니다. 가정을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위로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게 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혼자 발부둥치다가 안되면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여성분들이여 남성이 하나님을 찾을 때까지 참고 기도해주십시오. 격려해 주십시오. 그만큼 가정은 승리하게 됩니다.

 

  21절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공동체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서로 존경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복종할 수 없는 사람과 상황에 대해 그리스도 때문에 양보해야 합니다. 부부관계에서도 서로 기득권을 주장하려 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위해 양보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교회공동체이든 가정이든 서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빌2:5).

 

  셋째, 자라온 배경과 환경이 서로 다릅니다.

 

 사람은 자라온 환경에 의해 가치관이 형성됩니다. 심지어는 작은 행동 하나에서 크게는 모든 판단 기준과 추구점에 영향을 받습니다. 한 동물학자의 실험이 증명해 줍니다. 금방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를 오리와 함께 두었습니다. 병아리는 오리의 소리를 들으며 자라났습니다. 그 결과 병아리가 자란 다음에도 오리 소리만 나면 오리가 자기 엄마인 줄 알고 오리를 따라 가느라고 달려 간다는 것입니다. 부부라 해도 서로 다른 배경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음식이나 습관이나 성품 등이 서로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국 없이 밥을 먹던 가정에서 자란 아내가 무심코 밥상에 국을 놓지 않게 된다면, 남편이 어렸을 때 항상 국을 먹던 가정에서 자랐을 경우 당장 짜증을 낼 것입니다. 아내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불쾌한 반을 나타낼 것입니다. 또 만일 조용 조용하게 말을 하던 어머니와 함께 살던 남성이 결혼한 다음에 아내가 큰 소리로 말을 많이 한다면 짜증을 낼 것입니다. 결단력이 있고 박력있는 아버지와 함께 살던 여성이 결혼해 우유부단하고 명쾌하지 못한 대화를 하는 남편과 함께 산다면 답답해 할 것입니다.  

 

  부부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일 뿐아니라 서로 다른 배경에서 자랐기에 가치관이 서로 다릅니다. 성격과 생활습관과 문제해결 방식도 다릅니다. 그러기에 서로 다른 부부가 함께 살면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서로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할 땐 싸움이 일어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⑤서로 희생하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22-24절에 보면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마치 몸인 교회가 머리인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아내도 머리되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25-28절까지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한 것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여 자기 앞에서 흠이나 주름잡힌 것이 없이 영광스럽게 하려 하는 것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체로서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빌립보서2:5-8에 보면 예수님은 성도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보좌를 내놓으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친히 그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성도를 사랑하되 자기 목숨을 내어 주기까지 한 사랑입니다. 그것을 믿는 성도들은 그를 경배하며 온 인생을 그를 위해 헌신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와도 그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며 그가 맡긴 사명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런 관계가 온전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부부관계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사랑'에는 4가지가 있습니다. 스톨게, 필리아, 에로스, 아가페입니다. 스톨게는 동족적인 사랑, 필리아는 친구간의 사랑, 에로스는 이성간의 사랑, 아가페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아가페(αγαπη)는 하나님의 사랑과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성도들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부부간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겠습니까? 에로스 사랑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에베소서5:25-28이나 골로새서3:19에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사랑'은 모두 아가페(αγαπη)로 나와 있습니다. 남편도 아내를 그리스도가 성도들을 무조건적으로 희생적으로 사랑한 것같이 사랑해야 하고 아내도 성도가 그리스도를 헌신적으로 사랑한 것 같이 남편을 헌신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교회의 심정으로 남편에게 헌신하므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부부관계는 조건 있는 사랑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부부관계는 상대적인 사랑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절대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부부는 합법적인 결혼을 했다면 사람의 의도에서 만난 것 같지만 하나님이 맺어 준 관계입니다 (창2:24). 사람에 의해서 나누어질 수 없는 한 몸입니다 (엡5:28-31). 생명의 은혜를 함께 유업으로 이어갈 자입니다 (벧전3:7). 함께 하나님의 진리를 세워 나가고,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나가고, 함께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어 가고, 함께 하나님의 비젼을 나누고,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함께 하나님의 축복을 누려야 할 자입니다. 부부생활에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⑥서로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부부갈등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은 데서 자주 발생합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배려하는 사람이라도 부부 사이에는 편하게 생각하여 아무렇게나 대하게 됩니다. 특히 말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호칭에 있어서도 '여보,당신'이 아니라 '자기, 아무개씨, 야' 등을 사용하게 되면 오히려 친근감있게 들렸겠지만 결혼 후에는 그런 용어들이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결혼 전에는 '많이 드시지 그러세요' 하던 표현도 결혼 후에는 '그만 먹어 살쪄'라고 쉽게 말하게 됩니다. 짜증날 땐 욕설도 쉽게 하게되어 상대의 자존감을 건드려 싸움이 일어나곤 합니다. 취미와 사고에 대해서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부부라도 상대의 행동과 개성과 생각까지 고치려 한다면 그것은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폭력과 학대에 가까운 행위인 것입니다. 서로의 행동과 생각과 결정을 존중해 주지 않으면 상대는 스트레스를 받아 폭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적 성향과 영적 은사까지도 존중해야 합니다. 신앙생활 형태까지 간섭한다면 당연히 은혜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영적 즐거움을 잃어버려 항상 짜증을 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하나님께서 머리로 세운 줄 알고,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한 것 같이, 존중해야 합니다 (창2:8, 3:16, 4:19, 고전11;3, 8-9, 벧전3:6, 골3:18-19, 딤전2:11, 벧전3:1). 남편된 자는 아내에 대해 하나님이 생명의 유업을 함께 얻을 배필로 주신 줄 알고, 자기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인 줄 알고, 연약한 그릇인 줄 알고, 사랑과 배려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창2:22-23, 전9:9, 엡5:28-29, 벧전3:7, 골3:19).

 

 사랑과 배려에는 반드시 양보와 희생이 감수되어야 합니다 (살전1:3, 빌2:5).  영국의 수상을 지낸 디스렐리의 아내 매리엔은 디스렐리 보다 12살 위의 연상의 여인으로 매우 현숙한 여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의회 연설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차 속에서 디스렐리는 아내의 손에 아침에 보지 못한 붕대가 감겨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의아한 나머지 디스렐리는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내는 조용히 "당신이 아침에 의사당에 도착하여 급히 차문을 닫는 바람에 다쳤어요." 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 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국사를 처리하러 출근하는 남편의 아침 길에 걱정을 끼치는 것은 아내의 도리가 아니죠."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위대한 헌신적 배려입니다.

 

<결론>

  우리는 부부사랑을 통해 예수님과의 교제가 깊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남편이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하듯이 우리에게 자기 몸을 내어 주시기 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며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모든 연약성을 이해하시고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그러면서도 결코 우리를 다른 대상에 빼앗기지 않는 열정으로 대하십니다 (25-30절, 롬8:34-35, 38-39). 그러기에 아내가 남편의 권세 아래 복종해야 하듯이, 교회(성도)되는 우리는 그 사랑에 이끌려 순종하는 것입니다 (23-24, 롬8:36). 우리는 주님이 교회를 위해 희생한 것처럼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주께 복종해야 하는 것처럼 남편을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심정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우리가 주님을 복종하는 마음으로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거꾸로 아내를 사랑하면서 주님의 심정을 느끼고, 남편을 존경하면서 주님에 대한 헌신을 결단하는 은가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때문에 서로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하며, 서로 사랑하면서 주님과의 교제가 더욱 깊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