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요한일서5:1-21

<題目> 성도의 확신

 

<序言>

  본 장은 본서의 마지막 장으로서 저자가 이제껏 그의 독자들에게 당부한 사항을 최종적으로 권면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계명을 지킬 것과 형제를 위해 중보기도할 것과 우상을 피할 것을 당부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저자가 이렇듯 1-4장에 기록한 내용들을 반복한 이유는 본 서신을 맺으면서 다시 한번 수신자들에게 사랑의 실천을 권면하고 전통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 즉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자는 형제를 위한 중보기도와 우상에서 떠날 것을 당부한 것은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고 성도들을 보호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헬라적 이단 사상에 의해 심각한 사상적 도전을 받았던 본서의 독자들은 기독교 교리의 진정성을 확신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절실했습니다. 진리가 흐려지고 성도들이 온통 미혹받는 위기의 상황에서 교회는 사도적인 신앙으로써 극심한 세속의 도전을 물리쳐야 했던 것입니다. 내용구조는 하나님께 속한 증거(1-5절), 기도에 대한 담대함(14-17절), 하나님의 주권적 보호(18-20절), 마지막 권면(21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하나님께 속한 증거 (1-5절)

    

  ①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습니다 (1上절).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요한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난자와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은 자를 언급해왔습니다.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예수님께서 그리스임을 믿는 자입니다. '그리스도'(χριστοs)는 '기름부음 받은 자'의 뜻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란 하나님의 아들 곧 구원자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들'은 같은 자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4:9, 요3:16, 빌2:6, 히1:3, 요1:1,14, 마1:23). 구약시대 때부터 오시리라 약속된 구원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주임을 믿고 고백하는 자는 이미 거듭난 자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마16:16).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나 이 믿음의 고백 위해 세워져야 합니다 (마16:18).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에서 '믿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온(πιστευων)은 현재 시상으로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믿음이 언제나 변함없이 지속되어야 할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자임을 믿고 고백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계7:10).  

 

  ②하나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1下-3절).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3절). 계명을 지키려는 자는 그 계명의 핵심 사상 곧 근본 정신을 지킵니다. 모든 율법의 대강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이웃, 형제)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출20:3-17, 신6:4-5, 레19:18, 눅10:27). 예수님은 새 계명을 준다고 했고 그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새 계명을 준다는 것은 또 다른 계명을 하나 더 추가한다는 말이 아니라 당시 바리새인들이 율법은 지킨다고 하면서도 율법이 근본적으로 지시하는 바 사랑은 행하지 않기 때문에 그 율법의 근본정신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요13:34). 1절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고 했는데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에서 '그에게서 난 자'는 성도 곧 믿는 형제를 의미합니다. 2절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계명의 핵심 사상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고 했습니다. '무거운 것'(바레이아이, βαρειαι)은 부담스럽거나 힘들거나 고통스러운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계명은 그렇게 무거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으로 무거운 짐을 지운다고 책망했습니다 (마23:4, 눅:11:46). 그리고 예수님이 주신 멍에는 가볍고 쉬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11:30). 바리새인들이 지우는 율법 준수 요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외부적으로 지키려 하니 지기 힘든 멍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지우는 율법 준수의 요구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대속 사건을 경험하므로 하나님이 자신들을 먼저 사랑하여 독생자까지 보내 주어 대속과 구원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그 사랑에 감복하여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볍고 쉬운 멍에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 그 율법을 모두 완성하는 것입니다 (롬13:10). 율법이 지시하는 목표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자는 성도끼리 서로 사랑하려 합니다.  

 

  ③세상을 이깁니다 (4-5절).

 

  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하나님께로 난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세상'(코스모스, κοσμοs)는 우주와 물질 세계를 말할 때도 있고 인간 사회의 문명와 문화를 말할 때로 있고 악령들이 지배하는 모든 영역을 말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악령들이 지배하는 모든 영역을 말합니다 (19절, 2:15-17, 4:1-5). '이기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카'(νικα)는 현재 시상으로서 항상 이기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악령들은 여러 방편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인을 넘어뜨리려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 시험을 이겨 나갑니다. 수단은 믿음입니다 (4절). 그 믿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되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5절).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죄 때문입니다. 그가 부활하신 것은 죄를 짓게 하는 악령의 권세를 이긴 것이고 죄의 권세를 이긴 것이고 죄의 결과로 오는 사망을 이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능력이 부여되었습니다 (마10:1).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16:33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이미 이긴 사실을 생각하고 예수님이 입혀 주신 능력을 힘입어 세상을 이겨 나가는 것입니다 (롬7:24-25, 8:32-37).

 


        2. 예수님에 대한 증거자 (6-13절)

 

  1절에서 하나님께 속한 자 곧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에 이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역사적인 예수님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인 것과 우리의 구원자인 것을 의미합니다.  

 

  ①증거자는 물과 피와 성령입니다.

 

  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7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8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이는 셋입니다. 첫째는 물입니다. 예수님은 물로 오셨고 그 물이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임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이 물로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신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음성의 내용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였습니다 (마3:17, 막1:11, 눅3:22, 요1:34). 그로서 하나님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들임을 확실히 증거한 것입니다. 둘째는 피입니다. 예수님이 피로 오셨고 그 피가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때 온 땅에 어둠이 임하며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며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일어났습니다 (마27:45, 51-53, 막15;33,38-39, 눅23:44-45). 그리고 자신도 부활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택한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 그 죄값으로 피 흘려 죽은 것, 그리고 부활하신 것이 그 죄와 죽음의 권세를 정복했다는 증거로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였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므로 자신이 하나님 아들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입니다. 본문에서 '성령은 진리니라'고 한 것은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하는데 성령은 진리이기 때문에 그 증거가 참이라는 의미입니다. '진리'(αληθεια)의 문자적 의미는 '참'이라는 뜻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을 때에 우리 안에 들어와 내주하십니다. 그리고 절대로 떠나지 않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자신이 떠나면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어 영원히 함께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14:16-17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우리 안에서 여러 일을 하시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약속한 보혜사 성령에 대해 요한복음14:17에서 '진리의 영'이라고 했고 요한복음16:13에도 '진리의 성령'라고 했습니다. '진리'(αληθεια)라는 말의 문자적 의미는 '참'이라는 의미이지만,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진리'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요한복음15:26에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 말씀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요한복음16:13에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는 일의 대표적인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언하여 믿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에서 '증언하는 이'의 헬라어 마르튀룬테스(μαρτυρουντεs)는 시제가 현제 분사로서 항상 증언하는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이는 셋입니다. 물과 피와 성령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입니다. 그 셋은 하나입니다. 본질적인 존재로서의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결같이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임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보면 한 사람의 증언은 그 증언을 인정을 받지 못하고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그 증언을 인정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신19:15). 사람들의 증언도 두세 사람이 증언하면 그 증언의 타당성이 인정되는데 하물며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하나같이 증언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9절).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증거가 그 안에 없는 것이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임을 증언하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 되고 맙니다 (10절).    

 

  ②증거의 결과는 영생입니다.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곧 영생을 얻게 됩니다. '영생'(ζωην αιωνιον)은 문자적으로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영생은 일반적으로 종말론적 의미로 사용하여 천국에 가서 영원히 복락을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현세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중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자는 성령의 역사로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납니다. 그것을 거듭남 혹은 중생(重生)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교제를 의미합니다. 거듭난 영이 내주하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내주와 동행을 느끼며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립니다. 셋째는 가치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고 예수님이 대속으로 구원하고 성령으로 내주하여 하나님의 목적에 맞는 삶을 살도록 역사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그 구원사적 목적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그것을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어떤 환경과 형편과 상황에서도 그 가치를 이루는 것을 목적하고 다른 것이 안되더라도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하여 기쁨을 얻습니다. 그것이 생명, 영생을 누리는 삶입니다. 또한 그 삶은 천국에서도 영원히 남아 있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6:27에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고 했습니다.

 


        3. 기도에 대한 담대함 (14-17절)

 

  ①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들어주신다고 했습니다.

 

  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증거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을 향해 담대함을 가집니다. 특히 하나님과의 교제와 기도에 있어서 담대함을 가집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한다는 것은 목적과 관계와 자세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목적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4:3에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구하면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6:33에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인용구절 앞 부분의 내용을 보면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데 우리는 그것들을 염려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그것들이 있어야 하는지 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녀들의 생존을 위한 필요를 책임 져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용에 있어서 생활에 필요한 물질적인 것들은 도무지 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목적을 그것들 자체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구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목적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6:5에는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은 기도를 할 때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길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를 좋아 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기도를 통해 자기들이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신앙이 있는 자로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원해서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했습니다. 기도의 목적이 자기가 영광받기 위함이기 때문에 이미 자기 영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에 보면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할 때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곧 자기 목적으로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또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서 자기가 영광받으려고 기도하는 바리새인들처럼 진실한 믿음없이 주술적이고 습관적인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특별한 기도응답을 받은 사람들의 기도 내용을 보면 가장 강조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한 것이었습니다.    

 

  둘째, 관계에 있어서는 예수님 안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4:14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인용구절 앞 절에 보면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영광을 받기 위해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5:7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는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인용구절 앞 내용을 보면 원리를 설명해 주고 있는데, 마치 포도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포도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기도자가 예수님과 상호 내주하는 관계, 예수님과 동행하는 관계를 유지할 때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과 근거와 가치 형태가 예수님의 구속을 기초로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기도를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5:10에 보면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 사랑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계명을 지키면 사랑 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이든지 주려는 것과 같습니다.  

 

  셋째, 내용에 있어서는 말씀에 맞게 구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5:7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15:10에 보면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거하므로 구속사역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계명 곧 말씀대로 구하고 말씀을 지키면서 구하면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넷째, 자세에 있어서는 죄를 떠나면서 구하는 것입니다. 역대하7:14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흉년과 질병으로 고통 당할 때 죄를 떠나면서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5:16에는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했습니다. 병이 들었을 때 죄를 고백하며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②범죄자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라고 했습니다.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첫째,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습니다. 이 죄는 요한일서에서 꾸준히 지적해온 적그리스도 곧 거짓교사나 배교자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그 죄는 예수를 믿었던 사람이라 해도 교리적이고 의식적이고 고의적인 죄를 짓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회개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을지라도 불 가운데서 얻는 해받는 구원, 해받는 구원,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고전3:15). 히브리서6:4-6절에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한 번 비췸을 얻고'에서 '비췸을 얻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티스덴타스'(φωτισθενταs)는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표현할 때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받아들인 행위를 말합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한 것을 말합니다.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가치를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는 미래 세계에 누릴 능력을 현재의 신앙 공동체 안에서 경험한 것을 말합니다. '타락한 자들'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은혜들을 체험했다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는 것은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연약하여 실수로 범죄한 것이 아니라 고의적, 의식적, 교리적으로 범죄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에서 '다시'로 번역된 접두사 '아나'(ανα)는 '다시'라는 의미보다는 '위에'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다음에 다시 타락한 자가 예수님을 두 번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십자가 위에 못 박는' 의미로 예수님을 거부한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를 믿고 중생하고 말씀을 깨닫고 성령의 은혜를 경험한 자라도 다시 타락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교리적으로 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시 회개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교리적 타락은 의식적(意識的) 타락으로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전에 받았던 건전한 교리가 경험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10:26-27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출21:14, 민15:30). 예수 그리스도 구속에 대한 진리를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하면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짐짓 범한 죄'가 나타내는 성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고의성을 가진 죄라는 것입니다. '짐짓'(εκουσιωs, willfully)은 '고의로' '일부러' '계획적인'의 의미입니다. 본문과 같은 의미를 가진 6:4-6의 의미로 보아도 고의성이 있는 죄입니다. 둘째, 계속적인 죄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시제로 볼 때 '죄를 범한'(αμαρτανοντων)의 시제가 현재 분사로서 계속적인 죄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부정한 죄라는 것입니다. 29절의 내용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부정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성령을 욕되게 한 되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에서 말한 '짐짓 범한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의도적으로 계속적으로 부정하는 죄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진리를 받았으나 후에 구속 진리를 부정하고 성령을 욕되게 하고 배교한 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의식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부정하고 계속적으로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용서받지 못하고 오히려 심판만 있습니다. 맹렬한 불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손상되어 생겨난 격정적인 질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을 것을 시사합니다. 그래서 구약대에도 고범죄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사울의 죄와 다윗의 죄의 차이점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습니다. 17절에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고 했습니다. '불의'에 해당하는 '아디키아'(αδικια)는 '옳지 못한 행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 옳지 못한 행실들이 모두 죄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사망에 이르는 죄 외에 모든 죄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입니다. 이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한 성격 규정을 근거하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어떤 죄라도 회개가 가능하고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셋째,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한 자를 보면 구하라고 했습니다. 16절에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고 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는 회개의 은혜가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죄를 짓고 있는 자에 대해서는 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지은 자에 대해서는 회개의 은혜가 열려 있기 때문에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 기도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가능한 죄를 지은 범죄자를 보면 그를 위한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 범죄자를 보면 정죄부터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갈라디아6:1-3에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짐을 져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법인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몸으로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한 몸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다른 자체가 범죄하면 자신도 범죄한 상태에 있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진 심정을 가지고, 중보기도를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회개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고 그가 회개하면 하나님이 생명을 주십니다. 다시 은혜를 주어 살게 해 주십니다. 중보기도의 힘은 대단히 큽니다. 소돔성에서 멸망당할 롯의 가정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때문에 멸망 중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창18:24-32, 19:29).

 


        4. 하나님의 주권적 보호 (18-20절)

 

  ①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3:9참조)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1장에서부터 계속 언급된 표현으로서 기본적으로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은혜를 베풀어 영광받으려는 계획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본 장 1절에서도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 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않는 줄 우리가 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한 '범죄'는 문맥의 흐름상 사망에 이르는 죄를 말합니다. 본 절 앞 절인 16-17절에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고 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는 요한일서에서 꾸준히 지적해온 적그리스도 곧 거짓교사나 배교자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그 죄는 16-17절에서 이미 강해 한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거부하고(성령의 역사를 거부), 고의적이고, 계속적인 죄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회개할 수 없고 속죄하는 제사가 없으므로 그런 범죄자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6절, 히6:4-6, 히10:26-27). 본 절에 나온 '범죄하지'에 해당하는 '하마르테나이'(αμαρτανει)도 시제가 현제시상으로서 현재에도 계속적으로 범죄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 안에 있는 자는 고의적이고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이나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곧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본절 뒷 부분에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악한 자'는 사탄을 가리킵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했기 때문에 성령으로 내주하여 지키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령들이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를 배교의 자리까지 끌고 가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명이 있는 성도를 보호하십니다. 요한복음17:12에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1:5에는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유다서1:24-25에는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3:6에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 하나니"라고 했고, 3:9절에도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고 했습니다. 이는 요한은 당시 교회 공동체를 미혹하여 파괴하는 영지주의 이론에 대해 반박하는 과정에서 한 말입니다. 미혹하는 자들이 바른 진리를 오용하고 있다는 것 의미로 사용한 말입니다.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는 초대교회 기독교 이단입니다. 영지주의의 영어 표현인 Gnosticism(그노스티즘)은 헬라어 γνωσιs(gnosis, 그노시스)에서 온 말인데 그노시스는 지식, 통찰의 의미입니다. 그들은 헬라(그리이스) 플라톤(Platon) 철학의 이원론(二元論)의 영향을 받은 자들입니다. 당시 정통 기독교회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으나 그들은 영적 지식(靈知)을 깨달으므로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과 합일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영적 지식을 깨달은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했고 죄를 안 짓는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죄를 짓는 것은 육이고 영이 짓는 것이 아니니 죄가 없다고 하는 이들도 있었고 실제로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들도 있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실제 생활은 금욕주의로 나가거나 쾌락주의로 나갔습니다.

 

  본 절은 오늘날에도 난제에 속한 구절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어떤 이들은 거듭난 영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거듭난 영은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났고, 거듭날 때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전체가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났고, 거듭난 영이 범죄한다면 천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영지주의 이론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거듭난 영을 말한다는 근거는 없으며 거듭난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에 해당하는 '호'(ο)는 영어성경들에서 '후'(who)로 해석 했듯이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영이 범죄한다고 해서 천국에 못 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육이 범죄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해 주셨으므로 다시 부활하고 천국에 가는 것처럼 영이 범죄한다고 해도 천국 가는 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후서7:1에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 했습니다. 이는 앞 장 내용에 대한 결론으로 한 말로서 우상숭배와 관련된 더러운 것들로부터 깨끗이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상숭배와 관련된 것들 자체가 더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고린도교인들이 이방인들의 신전 축제에 참여하여 우상숭배와 관련된 범죄들로 인하여 외부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더럽혀졌다는 것을 전제하고 말을 한 것입니다.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육과 영'은 인간의 구성요소의 개념으로 분리해서 언급한 표현이 아니고 인간의 전 인격을 말하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7:34에서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라고 했는데 바울은 그와 같이 '육과 영'을 구분하기 보다는 인격의 외적인 부분과 내적인 부분 곧 전 인격을 표현합니다. 우리가 실 생활에서 육과 영을 조직신학적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행하다 보면 영지주의의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범죄하면 육체뿐 아니라 마음도 더럽혀진 것이고 영도 더럽혀진 것입니다. 마음이 범죄하면 육체도 영향을 받을 수 있고 영도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존이 어떤 범죄를 했다면 우리 의 실존 중 어떤 부분은 범죄하고 어떤 부분은 범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전인이 범죄의 범죄하고 전인이 더럽혀진 것으로 생각하고 전인을 거룩하게 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롬12:1).  

 

  ②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했습니다.

 

  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우리'와 '온 세상'으로 나누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자들을 말하고 '온 세상'은 불신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신자의 영역과 믿지 않는 불신자의 영역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믿는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 뜻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이 지배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악한 영들이 지배합니다. 그들은 사단과 마귀와 귀신의 가치와 목적이 지배하는 삶을 삽니다. 그들은 오로지 물질적 육체적 세속적 우상적 목적으로 살아갑니다. 요한일서2:16에는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살아가는 방법도 악령의 성품을 따라 삽니다. 악령의 속성은 교만입니다. 유다서1:6에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고 했습니다. 악령의 속성은 살인, 욕심, 거짓말입니다. 요한복음8:44에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지배를 받는 자들도 그런 속성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구원과 영생을 보장받아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③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지각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우리에게 참된 자에 대해 알게 했습니다. '참된 자'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뿐 아니라 성품, 의지, 목적, 계획, 섭리 등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1:23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었습니다 (미5:2, 요1:2-3, 히1:2, 골1:16-17). 골로새서1:15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오시면서 우리 눈에 보이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1:18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자체가 하나님을 계시한 것이고 그의 가르침과 사역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신 지를 알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할 때 예수님은 요한복음14:9-11에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본절 하반절에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는 하나님이며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 하나님이시고 성육신한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계시하는 실재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영생을 가지고 있고 영생을 줄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안에 있는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에 참여한 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복락을 누리는 것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속성에 참여하므로 내적 기쁨을 누리 누리게 됩니다.

 


        5. 마지막 권면 (21절)

 

  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요한이 편지의 마지막에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는 권면을 한 것은 피상적으로 보면 본서의 논지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본서에서 우상숭배에 대한 용어를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서의 내용이 당시 영지주의 이단과 그 교훈에 대해 날카롭게 공격하는 것을 볼 때 본 절의 내용도 영지주의와 관련하여 한 말 같습니다. 곧 영지주의 이단의 교훈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하는 교훈으로서 그 교훈을 따르는 것이 우상숭배와 같은 것임을 시사하려는 것 같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 아닌 다른 대상을 섬기는 행위를 말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눈에 보이는 향상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하나님의 바른 진리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우상적 존재인 것입니다. 사무엘상15:23에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고 했습니다. 빌립보서3:19에는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3:5에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형상뿐 아니라 물질, 사람, 단체,  이상, 사상, 교훈, 욕망 등도 우상적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게 하거나 떠나게 할 정도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있다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상적 존재인 것입니다. 특히 본서의 의도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바른 진리를 떠나게 하는 이단 교훈이 우상적 존재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단을 멀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