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마태복음10:1-42
<題目>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序言>
예수님께서 제 2차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제 3차 갈릴리 사역을 하기 전에 12제자를 파송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실제로 12제자를 파송한 때가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알기 힘듭니다. 다만 본장에서는 시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12제자 파송의 의의(意義)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열두 제자 파송(1-4절), 전도의 방법에 대한 당부(5-15절), 전도의 자세에 대한 당부(16-23절), 전도의 각오에 대한 당부(24-39절), 전도자의 권위 부여(40-42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열두 제자 파송 (1-4절)
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①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셨습니다 (1절).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전에 밤새껏 기도하신 후 제자들을 택하셨습니다 (막3:7-13, 눅6:12-16). 그리고 제자들을 얼마동안 훈련시켰습니다 (막6:7-13, 눅9:1-6). 그리고 그들에게 권능을 주어 전도자로 파송시켰습니다 (1절). 그 권세와 능력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진 권능입니다. 마가복음16:17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첫째,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입니다. '귀신'은 사탄과 마귀의 수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계20:7-9). 성경에는 귀신을 악신, 더러운 귀신, 더러운 영, 미혹하는 영, 거짓말하는 영, 마귀의 사자 등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삿9:23, 마10:1, 계18:2, 딤전4:1, 왕상22:21~). 악령들은 본래 선한 천사로 지음받았으나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교만하다가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 지상의 공중 권세를 잡은 자가 되었습니다 (벧후2:4, 유1:6, 계20:10). 그들의 사역은 하나님의 이름을 참람되게 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고 성도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 알고 할 수만 있으면 택한 백성들까지도 넘어뜨려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습니다 (마8:29, 벧전5:8). 악령들은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죄를 짓게 하고 외식하게 하고 번뇌케 하고 괴롭게 하고 우울하게 하고 교만하게 하고 시기하게 하고 미워하게 하고 거짓말을 하게 합니다 (삼상18:10, 왕상22:21-23, 약3:13-15). 때로는 사람의 육체를 지배하기도 합니다.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간질을 일으키게 하고 귀머거리가 되게 하고 벙어리가 되게 하고 벌거벗은 채로 공동묘지에 거하게 하기도 하고 자기를 학대하게 하기도 합니다 (마8:28-34, 9:32-33, 12:22, 17:15-18 막5:2-20, 9:20, 25). 심지어 짐승 속에 들어가 죽게 하기도 합니다 (마8:30-32). 악령에게 사로잡히게 된 이유는 신앙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13:1-3, 대상10:13, 살후2:11-12). 망령되고 허탄한 것을 좇기 때문입니다 (벧후2:14, 딤전4:1-2,7). 심리적으로는 상처와 후회와 자책과 우울과 시기와 증오와 근심과 걱정과 분노 탈진 등의 부정적인 상태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는 심각하게 병들었을 때 들어오기 쉽습니다. 악령의 역사로 병이든 경우도 있지만 병든 상황을 악령이 이용하여 지배할 때도 많습니다. 악령의 역사를 물리치려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17:20).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귀신들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앞에 떱니다 (약2:19). 그리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막9:29). 기도를 하여 성령님에 충만해야 성령님의 능력이 생깁니다. 믿음이 없거나 기도를 하지 않으면 귀신들도 알고 압제 합니다 (행19:13-16). 귀신은 대적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야고보서4:7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했습니다.
둘째, 병을 고치는 권능입니다. 질병의 종류는 여러 가지입니다. 크게 육체적 질병이 있습니다. 염병, 열병, 폐병, 간질, 중풍병, 나병, 혈루증, 고창증, 벙어리, 맹인, 귀머거리, 앉은뱅이, 절뚝발이 등이 있습니다. 정신적인 질병도 있습니다. 특히 현대에는 정신적 심리적 인성적 질병이 많습니다. 근심, 걱정, 번민, 충격, 상처, 후회, 자책, 시기, 질투, 증오, 분노, 교만, 열등감 등으로 인한 고통을 겪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질병도 있습니다. 마귀적, 우상적, 세속적, 정욕적, 물질적인 욕망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에서 떠난 경우입니다 (마11:17, 요9:39-41, 벧후1:9, 계3:17-18). 육체적 질병은 대부분 의약으로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육체적 질병도 심리적 요인이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심리적 정신적 감성적 질환은 상담과 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영적인 질환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질병이 오는 원인은 여러 가지입니다. 죄 때문에 징계로 오는 병도 있고 (출9:9-10, 삼하12:15, 왕하5:23, 대하21:12-19, 26:17-20),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오는 병도 있고 (요9:1-7, 고후12:7-9), 귀신의 역사로 오는 병도 있고 (마12:22, 9:32-33), 자연적 현상으로 오는 병도 있습니다. 욥처럼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죄 때문에 온 것이라면 회개를 해야 하고,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거나 연단을 위해 온 것이라면 믿음으로 인내를 해야 하고, 귀신의 역사로 인한 것이라면 예수의 이름으로 축사하거나 찬송을 하거나 말씀을 듣거나 기도를 해야 하고, 자연원리를 어기므로 인한 것이라면 생활습관과 태도와 방식을 교정하거나 의약을 사용해야 합니다.
셋째,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입니다. 신앙적으로 심리적으로 육신적으로 약해지면 의심하고 원망하고 낙담하고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심히 약해져 탈진하면 생의 의욕을 잃게 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자들에게 소망을 줄 수 잇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약해지는 이유는 죄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고전11:26-30).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낙심하게 됩니다. 더욱이 선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 더욱 좌절하게 됩니다. 엘리야나 요나나 세례 요한의 경우가 그런 경우입니다 (왕상19:1-10, 욘4:1-9, 마11:1-2). 약해진 데서 힘을 얻으려면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홀로 살면서 천막 꿰매는 일로 연명하며 갖은 위험을 경험하고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다가 육체의 병으로 인하여 유대인들 뿐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교인들로부터도 비방을 받았습니다 (고후11:24-2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약한 것으로 인하여 주를 더 가까이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주의 능력이 머무므로 더욱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고후12:9). 또한 하나님의 목적과 섭리를 믿는 믿음으로 극복했습니다 (롬5:3-5). 또한 하나님께서 반드시 상주실 것을 바라보고 극복했습니다 (딤후4:6-8). 성령님께서 상황 속에서 함께 하심을 믿고 극복했습니다 (롬8:26). 모세도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던 것은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히11:24-26). 우리는 우리 자신이 치유받아 다른 사람들을 강하게 하고 살게 하는 사역을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권능'을 우리는 보통 능력이나 힘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능력이나 힘은 헬라어로 '뒤나미스'(δυναμις)인데 여기에서는 특권이나 권세를 가리키는 '엑수시아'(εξουσια)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자체에 능력을 주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할 특권을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명령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그 일을 시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6:19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말씀의 원리입니다.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믿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할 특권이 있는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명령해야합니다.
②파송된 제자는 12명이었습니다 (2~4절).
제자들에 대해 '사도'라는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사도’(αποστολος)는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사명을 주어 보낸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12제자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예수님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 확장의 주도적 역할을 할 자라는 점에서 그들에게 합당한 명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따르는 많은 무리 가운데 12명을 택해 사도로 세운 것입니다. 그들은 구약시대에 12족장이 이스라엘을 이루는 기초가 되었듯이 신약시대에 12사도를 세워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하기 위해 세운 자들입니다. 요한복음15:16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한 것처럼 예수님이 그들을 제자로 불러 사도로 세운 것입니다. 그들의 의지가 있었을지라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여 세운 것입니다.
12사도의 명단은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마태복음10:2-4에는 베드로(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나다나엘), 도마(디두모), 마태, 야고보, 다대오(유다), 시몬, 가룟유다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3:16-19에는 베드로(시몬),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나다나엘), 마태, 도마(디두모), 야고보, 다대오(유다), 시몬(베드로), 가룟 유다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6:14-16에는 베드로(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나다나엘), 마태, 도마(디두모), 야고보, 시몬, 유다(다대오), 가룟 유다라고 했습니다. 순서가 조금씩 다르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나오는 다대오를 누가복음에서는 유다라고 했습니다. 다대오와 유다는 같은 인물입니다. 각 사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베드로입니다. 베드로(Πετρος)는 본래 히브리어로 '시몬'(Σιμων)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람어로 '게바'(Κηφας)라는 이름을 가졌고 헬라어로 '베드로'(Πετρος)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몬’은 ‘듣다’는 뜻이고, ‘게바’와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갈릴리 바닷가의 벳새다 출신으로서 직업으로는 어부 출신입니다. 그는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었다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전설에 의하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내가 먼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강제로 본 후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다고 합니다.
둘째는 안드레입니다. 안드레(Ανδρεας)는 ‘남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갈릴리 바닷가의 벳새다 출신 어부였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의 형으로서 자신이 예수님을 만난 후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사람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스구디아, 소아시아, 그리스 등에서 선교를 하다가 그리스에서 몽둥이로 맞고 X자형 십자가에 묶여 방치된 채 순교했다고 합니다.
셋째는 야고보입니다. 야고보(Ιακωβος)는 ‘발꿈치를 잡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갈릴리 바닷가 벳새다 출신 어부였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로서 요한의 형입니다. 그는 헤롯 아그립바에게 참수를 당하므로 12제자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칼에 참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넷째는 요한입니다. 요한(Ιωαννης)은 ‘여호와는 자비하시다’는 뜻입니다. 갈릴리 바닷가 벳새다 출신 어부였습니다. 그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의 동생입니다. 그는 베드로와 각별한 관계를 가지며 초대교회의 주춧돌 역할을 했습니다. 제자들 중 가장 오랫동안 살아서 사역을 한 자입니다. 폴리갑이나 익나티우스 같은 지도자가 그에게서 배웠습니다. 요한은 로마 황제의 대박해 때 소아시아에서 가마솥 형을 받았으나 살아난 후 밧모 섬에서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다섯째는 빌립입니다. 빌립(Φιλιππος)은 ‘말(馬)을 좋아하는’ 뜻입니다. 갈릴리 바닷가 벳세다 출신으로서 안드레와 바돌로매(나다나엘)의 친구입니다. 그는 주님을 만난 후 바돌로매(나다나엘)를 주께 인도한 사람입니다. 그는 헬라어에 능하여 헬라인들을 많이 인도했고 부르기아, 히에라볼리에서 선교를 하다가 소아시아 히에라볼리에서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여섯째는 바돌로매입니다. 바돌로매(Βαρθολομαιος)는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갈릴리 가나 출신으로서 ‘나다나엘’(Ναθαναηλ)과 동일인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애굽, 알마니아, 인도 등에서 선교를 하다가 인도에서 몽둥이로 맞은 다음 산채로 가죽을 벗긴 채 십자가형으로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일곱째는 도마입니다. 도마(Θωμας)는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갈릴리 출신으로서 '디두모'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파르티아에 선교를 하다가 인도에서 교회를 세우고 창에 찔려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여덟째는 마태입니다. 마태(Ματθαι)는 ‘하나님의 은사’라는 뜻입니다. 그는 갈릴리 가버나움의 세관에서 근무한 세리 출신으로서 '레위'(Λευις)와 동일인입니다. 아마 원래 레위인데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마태로 바꾼 것 같습니다. 그는 마태복음을 기록했고 전설에 의하면 에디오피아에서 선교를 하다가 칼에 찔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아홉째는 야고보입니다. 야고보(Ιακωβος)는 ‘발꿈치를 잡다’라는 뜻입니다. 이 야고보는 요한의 형 야고보와 다른 인물입니다. 요한의 형은 세베대의 아들이고 이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입니다. 이 야고보는 요한의 형 야고보와 구분하기 위해 ‘작은 야고보’라 하기도 합니다. 참고로 야고보는 주의 동생 야고보도 있습니다. 작은 야고보는 블레셋, 애굽에서 선교하다가 예루살렘에서 곤봉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열째는 다대오입니다. 다대오(Θαδδαιος)는 ‘사랑스러운 아이’라는 뜻입니다. '유다'(Ιουδας)라고 하기도 하는 이로서 유다서를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며 앗수르, 시리아, 페르시아에서 선교하다가 페르시아에서 포박당해 순교했다고 합니다 (죽임당한 방법은 정확히 모름).
열한째는 시몬입니다. 시몬(Σιμων)은 갈릴리 출신으로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그를 '가나나인'이라고 했습니다. 개역판에서는 ‘가나안인’이라고 번역했었는데 개역개정판에서는 ‘가나나인’으로 번역했습니다. '가나나인'은 '가나안인'의 오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나니테스'(Κανανιτης)는 '가나안인'이라는 뜻도 있고 '열심당원'이란 뜻도 있습니다. 영어성경 KJV에서는 가나안인(Canaanite)으로, NASB와 NIV에서는 열심당원(Zealotes)으로 번역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셀롯이라는 시몬’이라고 했는데 ‘셀롯’(Ζηλωτης)은 ‘열심당원’(Zealotes)이라는 뜻입니다. 열심당(Zealot)은 유대의 독립을 위해 로마 제국에 폭력으로 저항하여 싸웠던 애국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약탈과 방화와 살인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시몬은 페르시아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톱으로 사타구니에서부터 머리까지 두 동강 내는 형벌로 순교당했다고 합니다.
열둘째는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Ισκαριωτης Ιουδας)는 ‘그리욧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가룟’(Ισκαριωτης)은 지명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그곳은 헤브론에서 약 3km 떨어져 있는 '그리욧 헤스론'(Kerioth Hezron) 지방이나 (수15:25), 모압 땅 '그리욧'(Kerioth)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렘48:24). 하지만 열심당(Zealot) 운동에서 사용되는 라틴어 시카리우스(sicarius-자객, 암살자)의 음역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에게 은 30세겔을 받고 예수님을 은밀하게 체포할 수 있는 장소와 시간 등의 정보를 제공하고 체포대를 인도하여 예수님을 체포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목매어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사도들이 가룟 유다를 대신할 자를 뽑았는데 맛디아였습니다 (행1:21-16). ‘맛디아’(Ματθιας)는 제비뽑기에 의해 사도 수에 추가된 자였습니다. 성경에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그의 활동은 잘 알 수 없으나 에디오피아에서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현을 목격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이방선교의 사명을 받았다는 사도가 있는데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행9:1-19, 22:6-16, 26:12-18). ‘바울’(Παυλος)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원래 사울(Σαυλος)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난 후에 바울로 개명되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베냐민지파 후손으로서 길리기아 다소 출신인데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 율법학자에게 수학을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여 투옥시키는 일에 열심이었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후 소아시아와 그리스와 고린도와 마게도냐 등에서 전도를 했으며 성경 10권 이상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로마에서 투옥되어 참수형으로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제자(μαθητης)는 배우는 학생을 말하고 사도(αποστολος)는 사명을 위해 보냄 받은 자를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제자로 부름 받았고 사도적 사명을 부여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요15:16).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습니다 (롬11:29).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며 예수님께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마11:29, 빌2:8). 그리고 복음전도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마10:7-8, 28:19-20, 행1:8, 벧전2:9).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눅14:25-27, 18:18-26). 십자가를 질 생각과 죽을 각오까지 해야 합니다 (눅9:23,24-25, 딤후3:12).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요15:26, 행1:8).
2. 전도 방법에 대한 당부 (5-15절)
예수님이 제자들을 복음전도 사역에 내보내면서 당부한 말씀은 마가복음6:7-13과 누가복음9:1-6에도 나옵니다.
5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11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①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했습니다 (5-6절).
예수께서 12제자를 파송하시면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했습니다. '이방'은 유대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을 말하고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북 이스라엘은 이민족과 혼혈되었고 종교도 혼합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집 잃어버린 양'은 남 유다에 속한 유대인을 말합니다. 유대인에게 먼저 전하라고 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언약백성으로 선택했고 그들에게서부터 회개와 복음운동을 하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렘50장, 겔34장).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시면서 그들이 목자없는 양같이 유리방황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고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할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9:36). 둘째는 오랫동안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의 예언들을 통해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알고 있었고 그 구원자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삼하7:12-16). 그 구원자가 오셨다고 전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복음전도에 용이했고 효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②천국이 가까웠다고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7절).
복음을 전파하되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라 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복음 전도의 내용은 그리스도가 오시므로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③치유사역을 하되 거저 주라고 했습니다 (8절).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표적으로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치유사역을 할 때 대가를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 권능을 예수님께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사실 복음과 복음 정도의 방편으로 베푸는 모든 은혜는 대가를 바라지 말고 거저 주어야 합니다. 대가를 받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2세기 초에 기록된 '12사도훈'(Didache)은 만일 돈을 요구하는 자는 그가 거짓 사도임이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서 사역을 할 때 복음전도자로서의 정당한 물질적 권리가 있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지 복음의 효과를 위해 대접을 받지 않으려했습니다 (고전9:11-12,15).
④전대와 옷과 신발과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9-10절).
복음전도를 할 때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전대'는 돈 주머니를 말하고 '금이나 은이나 동'은 돈을 말합니다. 또한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배낭'은 식량 등의 일용품의 여유분을 담아 다니는 도구를 말합니다. '두벌 옷'은 갈아입을 여벌옷을 말합니다. 팔레스틴에는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심해 여벌옷으로 두벌을 더 가지고 다녀야 했을 것입니다. '신'은 여벌 신발을 말합니다. '지팡이'는 지칠 때 의지하거나 위험에 대처하는 데에 필요한 도구입니다. 마가복음6:8-9에는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9:3에는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고 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했으나, 마가는 지팡이 외에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했으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가는 기본적으로 이미 신고 있는 신발이나 입고 있는 옷이나 가지고 있는 지팡이 외에 앞으로의 일을 염려하여 어떤 것도 준비하지 말라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마태와 누가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생략한 채 앞으로의 일을 염려하여 어떤 것도 준비하지 말라는 말만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여행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준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전도 사역에 전무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파송받은 목적인 복음 전파 사역에만 전력을 다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복음전도 사역에 전무하지 않고 마음을 자기 신변과 생활에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전도 사역에 충성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일이 되어지도록 그 사역자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고 했습니다 (10절).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실 것이니 하나님만 의지하고 복음전도에 매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이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면 마음을 생활에 빼앗기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역에 전무할 수 없게 됩니다. 이 지침은 기본적으로 복음전도자에게 주신 지침이지만 복음을 받은 자에 대한 의무도 생각하게 하는 지침입니다 (고전9:14, 갈6:6, 딤전5:18).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시는 방법은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을 통해 공급해 주실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마11절, 눅9:3). 그런 점은 복음을 받은 피전도자에 대한 의무도 생각하게 하는 지침입니다 (고전9:14, 갈6:6, 딤전5:18). 바울은 복음전도자가 복음을 받은 자들로부터 필요를 채워야 하는 근거를 여러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첫째, 일꾼이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모세의 율법에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성전제도에서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나오는 헌물들을 취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넷째, 주님이 복음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고전9:7-14).
⑤합당한 자를 찾아 머물라고 했습니다 (11-13절).
어느 성읍이나 촌락에 들어가든지 복음을 받아들이고 전도자를 영접하는 자가 있으면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의 평안(ειρηνη)을 빌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빈 평안이 그 집에 임하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혹시 그 집이 빈 복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으면 빈 사람에게 돌아가게 한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여 복음전도 사역을 위해 사역자들을 돕고자 하는 사람이 나오면 그 집에서 유숙하면서 복음전도 사역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 집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해서 쉽게 그 집을 떠나 여기 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사역을 위해 그 집을 떠나야 할 때까지 그 집을 떠나지 말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라고 한 것은 그 집이 평안해야 전도사역에 어려움을 겪지 않기 때문이며 또 한 편으로는 하나님이 그 집에 평안을 주기기를 원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복음전도자를 영접한 것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고 복음전도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40-42절에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⑥영접하지 않는 곳에서는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14-15절).
전도자를 영접하지도 않고 전하는 말을 듣지도 않는 곳에서는 미련을 갖지 말고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는 것은 그들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는 의미가 있으며 그 심판에 대한 책임을 그들이 담당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지역에서 복음전도 사역을 하는 중에 유대인들이 쫓아내자 그들을 향해 발의 티끌을 떨쳐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행13:50-51). 복음전도자는 복음전도 사역을 할 때 배척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배척을 받을 때에 그들에 대해 미련을 가지고 인본주의적인 방법으로 모면하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전도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고 해서 낙심할 것이 아니라 배척하는 자들을 과감하게 떠나 복음전도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15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했습니다. 복음전도자를 영접하지 않는 것은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아브라함 시대에 죄악이 관영한 도시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도시들이었습니다 (창19:1-28). ‘견디기 쉬우리라’는 표현은 심판의 강약을 말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심판의 확실성과 준엄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한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인 것입니다.
3. 전도자의 자세에 대한 당부 (16-23절)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7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18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 보낼 때에 제자들을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16절). 누가복음10:3에도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고 했습니다. '이리'(λυκος, wolf)는 늑대라고도 합니다. 이리(늑대)는 낮에도 활동하지만 야행성입니다. 꿩 같은 조류도 잡아먹고, 쥐부터 양이나 사슴 같은 포유류도 잡아먹고, 때로 민가에 내려와 가축을 잡아먹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가족단위로 생활을 하지만 때로 여러 가족이 모여 큰 떼를 이룹니다. 시각 후각 청각이 발달하여 무리간 소통을 합니다. 무리를 모아야할 때는 길게 울부짖는 소리로 10km 떨어진 개체와도 소통합니다. 먹이를 찾을 때 후각으로 2km 밖에 있는 것의 냄새를 맡기도 하고 먹이를 찾아 사냥을 할 때는 시속 70km 속도를 내기도 하고 20분 동안 추격할 수도 있습니다. 짐승의 뼈를 부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이를 가지고 있어 먹이를 포학하게 찢습니다. 그래서 ‘이리’(늑대)는 강하고 포학하고 잔인하고 악한 사람을 비유할 때 많이 사용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교과서에 북한을 묘사하는 그림을 보면 헐벗은 양민을 학대한 공산당을 묘사하면서 인민군복에다 붉은 완장을 찼는데 머리가 늑대였습니다. ‘양’(προβατον, sheep)은 초식동물로서 풀이나 콩과 식물을 먹고 살며 사람들이 고기나 털을 얻기 위해 기르는 가축입니다. 초원에서 떼를 지어 풀을 뜯는데 포식자의 공격을 거의 피하지 못합니다. 성질이 온순하고 겁이 많습니다. 그래서 ‘양’은 온순하고 착한 사람에 대한 비유로 많이 사용합니다. ‘이리’는 강하고 포악하고 잔인한 악한 대상에 대한 비유입니다. ‘양’은 약하고 온순하고 선한 대상에 대한 비유입니다. 요한복음10:12에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고 했고, 사도행전20:29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양이 이리 가운데 보내지면 양은 잡혀 먹힐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전도 사역을 위해 제자들을 보내면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한 것은 제자들이 스스로 상황 대처에 어려움을 겪을 것을 염두에 두신 말씀이며 사역을 할 때 많은 거절과 대적과 핍박 위협을 당해 고난과 시련 당할 것을 염두에 둔 말씀입니다. 전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온순한 성품을 가진 제자들을 잔인하게 핍박할 대적자들이 있는 곳으로 보낸 것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을 염려하는 동시에 제자들에게 결연한 각오와 준비를 해야 할 것을 주지시켜 주기 위함입니다.
①뱀같이 지혜로우라고 했습니다.
‘뱀’(οφις, serpent, snake)은 개구리나 쥐 등을 잡아먹는 파충류입니다. 보기에 징그러워 혐오감을 주는 것이 특징입니다. 독사의 경우 앞니 두 개에서 독이 뿜어져 나오는데 독사에 물리면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한 해에 전 세계에서 독사에 물린 사람이 100만 명 정도이며 그중에 3~4만 명은 죽습니다. 주로 의료시설이 부족한 아프리카나 아시아 지역에서 죽습니다. 그러고 보면 뱀은 징그러움이나 공격성이나 치명성에 관한 비유가 적절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지혜 있는 동물로 비유했습니다. ‘지식’을 사물에 대해 인지하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지혜’(φρονιμος, wise, shrewd)는 지식을 이용하여 문제를 물어가는 능력 혹은 일을 성취해 나가는 능력을 말합니다. 지혜는 이해력, 통찰력, 판단력, 신중함 등이 뛰어나 문제를 잘 해결해 나가고 일을 잘 이루어나가는 슬기로움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뱀을 지혜로운 동물로 묘사한 것에 대한 근거는 에덴동산에서 활동했던 뱀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고후11:3). 창세기3:1에 “그런데 뱀이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고 했습니다. ‘간교한’에 해당하는 ‘아롬’(ערום)은 간사한, 교활한, 영악한 등의 부정적인 뜻입니다 (subtil-KJV, crafty-NASB,NIV). 긍정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예민한, 섬세한, 세밀한, 치밀한, 영리한, 지혜로운 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활동했던 뱀은 교활했습니다. 지혜로웠습니다.
창세기3:1-6에 보면 그 지혜로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세 때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그곳에 남자(아담)을 만드시고 남자(아담)와 언약을 맺었습니다. 남자(아담)는 자기의 모든 후손을 대표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아담)와 그 후손에게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고 남자(아담)는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언약서를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열매로 선정했습니다. 그 열매는 보기만 해도 따먹고 싶을 정도로 탐스러운 열매인데 그것을 보고도 따먹지 않으면 언약을 계속 지키는 것이고 만일 따먹으면 언약을 파기하는 것으로 알기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동산의 각종 나무 열매는 임의로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창2:16-17). 그리고는 하나님이 남자(아담)에게 여자(하와)를 만들어 아내로 주었습니다. 여자(하와)는 남편(아담)을 통해 하나님이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먹지 말 것이며 만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악령의 우두머리 사탄이 아담으로 하여금 이 언약을 깨트리게 하려고 뱀을 활용했습니다. 뱀은 사탄의 지시와 사주를 받아 남자(아담)로 하여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게 하려고 여자(하와)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더냐”고 물었습니다. 여자(하와)는 “동산 나무의 열매는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열매는 하나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먹는 날에는 죽을까 하노라”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뱀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고 했습니다. 여자(하와)가 그 나무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 열매를 따먹고 남자(아담)에게도 주었고 남자(아담)도 그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남자(아담)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파기되어 그와 그 후손이 죽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뱀의 계획과 실행에서 얼마나 치밀하고 영리하고 지혜로운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뱀은 인간인 여자(하와)를 넘어뜨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인 여자(하와)와 대화를 하는 말의 능력을 가졌고, 여자(하와)의 심리를 파악하는 통찰력을 가졌고, 여자가(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으므로 남자(아담)도 먹게 하는 지혜를 나타냈습니다. 뱀은 자신보다 훨씬 지혜로운 인간을 넘어뜨렸습니다 (2:19). 자신의 지혜로는 도저히 인간의 지혜를 능가할 수 없는 존재인 데도 불구하고 인간을 넘어뜨린 것입니다. 그 비결은 인간보다 지혜로운 사탄의 지혜를 받아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자기가 가진 지혜로는 인간을 당할 수 없으나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사탄의 지혜를 이용하여 인간을 넘어뜨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복음전도 사역을 보낼 때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했습니다. 양이 이리에게 가면 잡혀 먹힐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약한 제자들이 강한 세상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가지라고 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뱀은 지혜로 넘어뜨릴 수 없는 인간을 넘어뜨렸다는 것입니다. 뱀이 그런 지혜를 갖게 된 비결은 사탄의 지혜를 빌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기들보다 지혜로운 세상 사람들보다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기들보다 지혜로운 세상 사람들을 능가하는 지혜를 가지려면 뱀이 사탄의 지혜로 한 것같이 하나님의 지혜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보다 지혜로운 대적자들을 능가하려면 자기 지혜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지혜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인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힘듭니다. 더욱이 예수 믿는 믿음을 양보하지 않고 하나님이 맡긴 복음전도 사명을 감당하며 살려하면 힘이 듭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일에 관한한 그리스도인들보다 지혜롭습니다. 누가복음16:8에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사명을 감당하려면 그들보다 지혜로워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로 사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3:15에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시편19:7에는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라고 했고, 시편119:98에는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이 지혜로 사는 것입니다. 지혜로워지는 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길이며 세상 사람을 이기는 길이며 사탄을 이기는 길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살려는 믿음을 가지면 성령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본절에 이어지는 17-20절에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제자들을 대적자들에게 넘겨져 심문을 받도록 허락한 것은 하나님이 그 심문을 통해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복음이 증거되게 하려는 의도라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성령님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게 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2:27에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누구에게든지 성령님이 내주하여 있습니다. 그 성령께서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셔서 말씀대로 분별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앙양심에 귀를 기울이면 성령께서 양심을 통해 깨닫게 해 주십니다.
②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했습니다.
비둘기는 순결하고 순전하고 순수한 동물의 상징입니다. 복음 전도자들이 대적자들의 간교함에 붙잡히지 않으려면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순결함도 겸해야 합니다. 항상 솔직하고 진실하려고 해야 합니다. 순수함과 진실함으로 일관해야 대적자들에게 속지 않게 되고 핍박에 굴하지 않게 됩니다. 에베소서5:9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③사람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공회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채찍질하기도 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인하여 총독과 임금 앞에 끌려가기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과 이방인에게 예수님의 복음이 증거가 되기 위해 허락된 경우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함에도 불구하고 붙잡혀 심문을 당한다면 복음이 그들에게 증거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붙잡혀 심문 당할 때 어부출신인 제자들로서는 고위층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성령께서 마음을 감동시켜 말할 것을 알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16-20절). 하나님이 제자들을 대적자들에게 넘겨져 심문을 받도록 허락한 것은 하나님이 그 심문을 통해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복음이 증거되게 하려는 의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과정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성령님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게 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는 핍박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비단 모르는 사람들부터만 핍박하는 주체들에게 넘겨지는 것이 아니라 혈연적인 사람들로부터도 넘김을 당하여 가장 뼈아픈 배반감을 경험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때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예수님을 싫어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싫어하여 핍박할 것이라는 겁니다. 심지어는 형제가 형제를,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죽는데 내어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21-22절). 예수님의 복음을 인하여 핍박받을 것을 각오하고 인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근거는 미가서7:5-7의 예언인데 거기에 보면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 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의지하고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 이 동네에서 핍박하면 저 동네로 피하라고 했습니다. 14-15절에서 영접하지 않는 곳에서는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고 나오라고 했었습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 집착하여 머무르지 말고 다른 곳으로 옮겨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기 전에 주께서 오실 것이라고 겁니다 (23절). 멸망할 자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다른 곳에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전도자의 각오에 대한 당부 (24-39절)
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26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①비방 받을 각오를 하라고 했습니다.
제자가 선생보다 종이 상전보다 높지 못한다는 것은 당시 유행하던 속담일 것입니다. 제자가 아무리 지식이 늘어나도 선생과 같이 될 수 없고 여전히 선생의 제자인 것입니다. 종이 아무리 많아져도 주인과 같이 될 수 없고 여전히 그 주인의 종입니다. 그러니 만일 제자가 선생과 같고 종이 상전같이 되면 가장 흡족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위치에 있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받는 핍박을 받는다면 예수님과 같이 된 것이니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24-25절).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낼 때 사람들은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낸다고 비난했습니다. '바알세불'은 '귀신의 왕'이라는 뜻으로 사탄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12:24-27, 막3:22-26, 눅11:18-19). 바알세불은 구약의 '바알세붑'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바알세붑'은 '파리의 대왕' '똥의 대왕'이라는 의미입니다 (왕하1:1-6). 예수님이 사역을 하실 때 이처럼 모욕적인 비난을 받았는데 제자들이 사역을 할 때도 그와 같은 비난을 받을 것을 전제하고 그렇게 된다면 선생인 예수님이 받는 대접을 받는 것이므로 만족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수 없기 때이라고 했습니다 (26절). 하나님은 인간의 은밀한 것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죄도 드러내시고 의도 드러내십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비난을 받아도 하나님께서 지켜보십니다. 그래서 비난 자들의 불의를 드러내고 전도자들의 무죄함과 의로움을 드러내십니다. 그러기에 비난에 집착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27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진리를 은밀하게 교훈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구속계획에 따라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는 붙잡히지 않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복음 사역을 공개적으로 해야한다고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제자를 부리기 위해 개인적으로 전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당시 안식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회당 관리자가 높은 집의 지붕에 올라가 나팔을 불었듯이 대중 전도를 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②위협받을 각오를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복음 전도사역을 할 때에 비방을 받을 뿐 아니라 위협을 당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28절). 사람은 육체를 죽일 수는 있으나 영혼은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을 지옥에 보내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심판받게 될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지 말라고 위협하는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행4:19-20).
사람이 비록 육체는 죽일 수 있지만 그것마저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육체적 생명이라도 해할 수 없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29절). '한 앗사리온’(ασσαριον)은 로마의 화폐 단위로서 장정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과 비교할 때 그것의 16분의 1에 해당한 금액이기 때문에 아주 작은 푼돈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참새는 사람들 보기에 그 가치에 있어서 아주 미미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참새들이 땅에 떨어져 팔리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참새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허락 없이 죽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된 분이라고 했습니다 (30절). 하나님은 제자들의 머리털까지 세시고 계시는 것처럼 제자들을 돌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참새보다 귀한 사람일 뿐 아니라 특별히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이 있는 자들인데 하나님이 친히 돌보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지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으니 죽이려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과 자기의 목적을 위해 부른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면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저를 시인한다고 했고 만일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면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저를 부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32-33절). 만일 위협이나 핍박이나 박해하는 사람 앞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임을 인정하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심판장에서 그의 행위를 인정하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임을 부인하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심판장에서 그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 예수님을 시인하거나 부인한다는 말 가운데는 삶에서 예수님을 나타내는 삶을 사는 것과 예수님을 부정하는 삶을 사는 것을 포함하는 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종말론적 의미가 아닌 현재의 의미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물질적 손해나 육체적 고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이 주신 계명과 예수님이 맡긴 사명을 감당하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앞에서 변호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일2:1, 롬8:26,34). 하지만 그런 것들 때문에 그것들을 저버린다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앞에서 변호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③버림받을 각오를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딸과 어머니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했습니다 (34-36절).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 사회의 배경과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게 된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화평'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일반 인사 때에도 습관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화평'은 히브리어로 '샬롬'(שלום)입니다. 헬라어로는 '에이레네'(ειρηνη)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적 축복의 용어인 그 용어를 사용할 때 영적인 부분뿐 아니라 세속적인 부분에도 습관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오시면 육체적으로 평화와 화목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복음전도 사역을 보내면서 그와 같은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될 것을 주의시킨 것입니다. 사역을 하다가 비방과 위협과 핍박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핍박받을 각오를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가족에게도 버림받을 것을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21절에는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 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차원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자기를 계시하실 때 필연적으로 예수님을 구원자 (메시아,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이 나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가진 종교관을 흔드는 것으로 여기고 예수님을 비난하고 핍박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원수로 여겨서 가른 것이 아니고 그들이 스스로 원수로 여기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복음 을 전할 때에도 필연적으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갈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들은 제자들을 비난하고 위협하고 핍박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가족들이라도 핍박하는 일에 동참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전도 사역을 할 때 당연히 반대하는 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을 것을, 심지어 가족들로부터도 버림받는 일이 있을 수 있으므로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전도 사역을 하는 자들이 가족과 원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원수로 여길 것을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들이나 딸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께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37절). 그들을 더 사랑하게 되면 그들과 화목하기 위해 복음전도 사역을 포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전도자는 누구보다도 가족을 더 사랑해야 하지만 그들을 이용하여 방해하는 사탄의 역사에 속지 않아야 하고 그들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이 맡기 사명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머니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방해하려고 한 사단의 간계를 파악하고 속지 않았습니다 (요2:4).
예수님은 또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38절). 예수님을 따를 때에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따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당시 십자가는 로마 형틀로서 십자가형을 판결받은 자는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자기가 지고 형장까지 가게 했습니다. 복음전도 사역을 하다가 핍박을 받을 수 있는데 끝까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복음전도 사역을 할 때에 오는 핍박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핍박이 두려워 자기 목숨을 건지려고 믿음과 사명을 저버린다고 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믿음과 사명을 감당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39절).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키고 사명을 감당할 때에 사람들로부터 비방과 위협과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1:29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14:22에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33절). 주님은 버가모교회에 대해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계2:13). 주님은 사도 요한에게 짐승에게 경배하지도 않고 그의 표를 받지도 않은 자 144,000명이 승리하여 시온산에 선 것을 보이시면서 그들에 대해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계14:12).
5. 전도자의 권위 부여 (40-42절)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41절).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또 선지자 이름으로 선지자를 대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고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고 제자 이름으로 소자 중 한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41-42절). '선지자'는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전하는 가리키고, '의인'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깨달아 실천하는 자를 가리키고, '제자'는 예수님이 복음전도를 위해 부름받은 자를 가리킵니다. '소자'(小子)는 본래 미천하고 하찮은 자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선지자와 의인과 제자를 통틀어 한 말일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은 세상에서 소외와 무시와 핍박을 받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으로'는 아람어에서 "~때문에"로 해석되기도 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Moffatt). 그렇게 본다면 '선지자 이름으로'를 '선자자이기 때문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나 의인이나 제자의 사역과 사명과 직책을 보고 그들을 보낸 하나님의 일과 뜻을 돕는 생각에서 그들을 돕는다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맡긴 일에 동참하는 것이므로 그들이 누릴 상에 함께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냉수 한 사발을 대접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의 수고를 덜어드린 행위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억하시고 상으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권위를 부여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복음전도 사역을 하는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자로 여기고, 제자들의 사역을 돕는 자를 예수님의 일을 돕는 자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들은 자신들을 영접하여 돕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선언할 수 있는 것이고 자신들을 영접하지 않거나 대적하는 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10~15절에서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했습니다.
<結言>
오늘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에게 복음전도 사명을 주셨습니다 (마28:20, 행1:8).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한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를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핍박이 있을 것을 염두에 두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복음전도자에게 주신 권세와 권위를 생각하여 담대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