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마태복음11:1-30

<題目> 세례 요한과 예수님


<序言>

  11~12장은 이미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천국복음에 대한 반응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세례 요한, 갈릴리 여러 성읍들의 거민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예수님의 가족들의 반응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예수님에 대한 오해와 불신, 심지어는 핍박으로까지 이어집니다. 본 장의 내용구조는 세례 요한의 실족과 질문(1-3),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4-6),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7-12),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사역 변명(13-19), 회개하지 않은 고을들에 대한 경고(20-24), 예수님의 초청과 권면(25-30)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세례 요한의 실족과 질문 (1-3)

 

  1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선지자라 생각했습니다 (40:3, 1:29). 그래서 그는 유대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쳤습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 온 지방에서 자기들의 죄를 자복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물로 세례를 베풀라는 감동을 받고 죄를 회개한 자들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3:1-6, 1:33).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물로 세례를 베풀 때 성령님이 임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1:32-34).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오셨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임하였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3:16-17).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인 것을 알았고 자신이 그를 증거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이 거니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증언했습니다 (1:29,36). 예수님에 대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죄를 당당하기 위해 대속물로 오신 분이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기위해 다 예수님께로 간다는 말을 듣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3:30). 자기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증거하러 온 자이고 예수님이야말로 자기가 증거한 구원자이시니 자기에게 오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는 사람은 많아져야 하고 자기에게 오는 사람은 줄어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는 일을 커져야 하고 자기가 가는 일은 작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흥해하여야 하겠고앞에 헬라어 경에는 데이’(δει)가 있고 영어성경들에는 머스트’(must)가 있습니다. 이는 반드시...해야 한다’ ‘반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흥하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반드시 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과 자신이 하는 사역 목적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반드시 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역을 통해 자신이 잘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사역을 통해 예수님이 잘되기를 절대적으로 바란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으로부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는 평가를 받을 만한 믿음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11:11, 7:28).

 

  당시 유대 지역을 통치하던 분봉 왕 헤롯(Herod Antipas)은 자기 조카이자 이복동생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불륜을 맺었습니다. 그러다 자기의 본 아내(아라비아 왕 아레타스의 딸)를 버리고 그녀와 결혼까지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왕의 악행을 책망하고 헤롯왕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3:19-20). 유대 백성들도 그에 공감하고 동조했습니다. 헤롯왕은 통치행위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세례요한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사방이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인 사해 동쪽 마카이루스(Machaerus) 성에 감금을 했습니다 (Josephus).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혀있을 때 자기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이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해 보고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는 등의 일을 하고 다닌다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자기의 두 제자를 보내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11:3, 7:19).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약속한 구원자인지 아닌지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사실에 대해 회의를 품고 의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는 구약성경에서 약속한 구원자는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고 악인을 말씀으로 죽일 자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1:4-5). 예수님이 오시리라 예언된 구원자가 맞다면 하나님 백성을 압제하는 로마 황제를 심판하고 그 가운데서 유대 백성들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악행을 한 헤롯왕을 심판하고 의를 행하다가 투옥된 자신을 구해주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다못해 자기에게 면회를 와서 위로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고 있는 일을 들으니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의심하고 예수님께 오실 구원자가 맞느냐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왕정시대에 엘리야 선지자도 우상숭배로 타락한 북이스라엘의 아합왕과 백성을 하나님께 돌리려는 열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850명과 대결하여 승리했습니다. 그 때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그들을 숙청했습니다. 또한 엘리야가 3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비오기를 기도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무릎 사이로 얼굴을 넣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 모습을 아합왕도 보았습니다. 엘리야는 자신감에 넘쳐 아합왕의 병거 앞에서 이스르엘 성읍 앞까지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성읍 앞에서 멈추고 아합왕만 성읍으로 들어갔습니다.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 때문이었습니다. 이세벨이 그 모든 소식을 듣고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내가 내일 이맘 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왕상18:1-46). 엘리야는 자기가 처한 형편을 보고 자기 생명을 위해 광야로 도망했습니다. 광야로 하룻길을 가다가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죽기를 하나님께 죽기를 구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고 했습니다 (왕상19:4). 엘리야도 하나님 일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행했으나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들을 이세벨에게 죽임을 당했고 백성들은 침묵하고 아합은 돌이키지 않고 이세벨은 자기를 죽이려 하니 절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 일을 하고도 오히려 어려움에 빠지자 실족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선한 일을 해놓고도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실족합니다 (살후3:13). 그래서 예수님은 6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지만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씀을 지키고 사명을 감당하다가 어려움 일이 생기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현상적인 위로가 나타나지 않을 때도 믿음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있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4-6)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악귀에 고통당하는 자들을 고쳐주는 사역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7:21).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보낸 사람들로부터 세례 요한의 질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고 들은 대로 가서 세례 요한에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고 했습니다. 5절에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했습니다 (7:20-22). 이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구원자의 사역에 대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말씀입니다 (29:19, 42:7). 이사야35:5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라고 했고, 이사야61:1“~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미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도 인용한 말씀입니다 (4:18).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구원자에 대해 잘못 이해한 데서 실족한 것을 아시고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구원자의 사역을 그대로 행하고 있다고 답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자신의 사역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 구원자의 사역을 행하고 있는 것이라는 답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구원자로서 그가 예언한 구원자의 사역대로 치유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곧 그가 하고 있는 사역이 구원자인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하고 있는 사역 때문에 실족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실족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구원자에 대한 사역을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로서 행하시는 일은 정치적 구원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로마 황제를 심판하여 유대 백성을 식민생활에서 구하는 일이나 헤롯왕을 심판하고 의로운 세례 요한 같은 사람을 구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죄와 죽음과 악령의 속박에서 구하는 일입니다. 기독교 사역을 정치나 육체나 물질 사역으로 여기면 언제나 실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의 처한 형편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나름대로 의를 세우다가 투옥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평생 예수님을 증거했는데 정권에 대항하여 옳은 일을 하다가 투옥되었는데 예수님이 구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위로도 해주지 않고 전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열심으로 사역을 하다가 어려운 형편이 되면 실족하기 쉽습니다 (왕상19:10,15-16). 사람들은 선한 일을 하고도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실족하게 됩니다 (살후3:13).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언제든지 어려운 상황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 운동이 정치적인 혹은 기복적인 운동으로 잘못 이해했을 때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름대로 신앙생활과 사역을 하면서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이 개입해줄 것이라 생각하다가 회복이 되지 않을 때 시험에 듭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후서3:13에는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1:10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1:4).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 나라가 견고히 하려는 것이 아닙니까?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헌신적으로 사역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우리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우리가 인정받고 우리가 육신적으로 잘되기 위함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구원받아 성화를 이루고 사명을 감당하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영광을 누리기 위함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왜 우리를 택하여 구원하셨는지, 우리가 왜 신앙생활과 사역을 하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굳게 서야 합니다.

 


       3.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 (7-12)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①세례 요한은 여자가 나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의 죄를 지적하므로 인해 감옥에 갇혔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평생 예수님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인 것을 전하였고 예수님으로 인한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음을 전파했고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기 위해 헤롯의 죄를 지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예수님이 악한 헤롯과 헤로디아를 심판하지 않고 자기 사역만 한 것을 보고 실족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보고 듣는 것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곧 각 병자가 고침을 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들이 오실 메시야의 사역에 대해 예언한 바대로 행하고 있다고 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곧 예수님 자신이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을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2-6).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다음에 함께 하던 무리들에게 세레 요한에 대해 칭찬했습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의 질문을 전달하고 예수님이 답변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무리들이 세례 요한에 대해 오해할 소지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듣는 자들에게 3가지 질문을 통해 세례 요한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첫째는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였습니다. 둘째는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더냐?"였습니다. 셋째는 "선지자를 보러 나갔더냐?"였습니다 (7-10). 과거에 세례 요한이 유다 광야를 중심으로 사역을 했는데 그때 많은 사람들이 광야로 나가 요한의 메세지를 듣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요한에게 몰려든 것은 갈대를 보기 위함도 아니고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을 보기 위함도 아니고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500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하나님의 참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갈대를 보려고 했다면 강가로 가야 했고 부드러운 옷 입은 자를 보려면 왕궁으로 가야했을 텐데 광야로 간 것은 고대하던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곧 그들이 본대로 세례 요한은 쉽게 실족하는 사람도 아니고 부귀영화를 얻지 못해서 실족하는 사람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원하는 메세지를 전하는 참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또한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3:1). 하나님께서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신대로 예수님보다 앞서 보내기로 작정된 자이고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준비하는 일에 쓰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말라기 13절에 보면 말라기 선지자가 오리라고 예언한 엘리야가 곧 세례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4:5-6).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칭찬하되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 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고 했습니다 (11). 과거 구약시대에도 훌륭한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생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특히 도래할 하나님 나라와 메시야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와 같은 선지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들의 예언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 예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세례 요한은 그들과 달리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메시야가 임한 현장에서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곧 예수님을 보고 그가 선지자들이 예언해왔던 메시야라고 증언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자기보다 먼저 있던 자라고 했고 세상 죄를 담당하실 자라고 했고, 성령으로 세례를 줄 자라고 했고, 손에 키를 들고 심판하실 자라고 했고, 자신은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할 자라고 했고, 자기는 쇠하고 그만 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3:11-12, 1:29, 3:30). 그런 관점에서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모든 사람 중 가장 큰 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일시적으로 실족한 상황을 두고 세례 요한의 인격과 사역 전체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것을 경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한 번 실수한 것을 두고 그 동안 잘했던 부분까지 부정하고 심지어는 그 인격 자체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좋은 관계를 가지던 사람도 한 번 실수했을 때 단절하고 사역에서 한 번 실수했을 때 그 사람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을 보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 하신 모든 일을 부정하거나 그 사람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는 잘못한 것을 지적하여 일어서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세례 요한에 대해 바른 평가를 가지도록 했습니다. 사람들은 본인에게는 달콤한 말로 위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악평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우리가 본인 앞에서는 바른 말을 해주더라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잘한 일에 대해 말하고 인정해 주는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관점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②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 보다 크다고 했습니다.

 

  11절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했습니다. 과거 구약시대에도 훌륭한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생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특히 도래할 하나님 나라와 메시야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그들의 예언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 예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세례 요한은 그들과 달리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메시야가 임한 현장에서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곧 예수님을 보고 그가 선지자들이 예언해왔던 메시야라고 증언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자기보다 먼저 있던 자라고 했고, 세상 죄를 담당하실 자라고 했고, 성령님으로 세례를 줄 자라고 했고, 손에 키를 들고 심판하실 자라고 했고, 자신은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할 자라고 했고, 자기는 쇠하고 그만 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3:11-12, 1:29, 3:30). 세례 요한이 앞서 있었던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보다 나은 것은 사역에 대한 열정을 말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한 계시의 확실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했습니다. '천국'(the kingdom of heaven)'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를 말합니다. 죽어서 가는 하나님 나라이기도 하지만 복음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 영역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극히 작은 자'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한 신약의 모든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세례 요한이 구약의 모든 사람보다 큰 자이지만 신약시대의 하나님 나라에서는 제자들과 성도들이 더 큰 자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구약 선지자들보다 더 확실하게 증거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는 경험적으로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 그 사실들을 경험적으로 알고 이미 이루어진 예언들을 가지고 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세례 요한 보다 크다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전도에 대한 헌신적인 열정이 낫다는 의미라고 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진리에 대한 경험적 지식이 더 낫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내용은 계시의 점진성에 근거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점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계시'(啓示. αποκαλυφις)는 감추어졌던 비밀을 열어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비밀을 열어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 인간들에게 계시했습니다. 그 계시 방법에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일반계시(一般啓示)는 하나님 자신을 피조물 곧 자연 만물과 세상 역사와 인간 양심을 통해서 나타내는 계시입니다. 특별계시(特別啓示)는 초자연적 방법으로 나타내는 계시로서 이적과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계시입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임재의 표상들(그룹 사이에 임재, 불과 구름, 폭풍우, 세미한 소리 등)과 주의 사자(비의적 현상)와 음성과 우림과 둠밈과 제비와 꿈과 이상과 환상과 말씀(선지자적 계시)과 영감(성령의 조명)과 예수 그리스도(인격 계시) 등입니다. 그 중에 '말씀'이라는 계시 방법 중 기록된 말씀을 '성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계시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택한 백성을 구원하겠다는 뜻을 계시했습니다. 성경을 그와 같은 관점에서 보는 것을 '언약적 혹은 구속사적 관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계시는 시대가 흐름에 따라 더욱 분명하게 주어집니다. 그것이 '계시의 점진성'입니다.

 

  복음에 대한 계시는 창세시대에도 주어졌고 족장시대도 주어졌고 율법시대에도 주어졌고 선지시대에도 주어졌고 사도시대에도 주어졌습니다. 아담에게 주신 계시는 희미하게 나타났습니다 (3:13,21).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적 축복에는 조금 더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12:1, 22:15-18). 모세에게 주신 율법과 제사에는 더욱 더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여러 선지자들에게 주신 예언에는 더욱 더 확실하게 나타났습니다. 세례 요한 때에는 예수님이 직접 오시므로 더욱 확실하게 증거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강림을 경험하므로 더욱 확실하게 증명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님으로 인한 교회 확장을 경험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진리를 더욱 분명하고도 확장된 지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시대의 개혁자들은 그보다 더 폭넓은 진리 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신학자와 목회자와 성도들은 그들보다 더더욱 폭넓은 진리 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죤 칼빈(John Calvin)은 주석을 쓰면서 요한계시록을 3장 이후는 강해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목회자들은 쉽게 강해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행복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구속사적인 모든 진리가 확연하게 드러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생각해 보아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그만큼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많이 준 자들에게는 많이 원한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성령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말씀을 많이 깨달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 확장에 더욱 헌신적으로 충성해야 합니다.

 

   ③천국은 세례 요한 때부터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했습니다.

 

  12절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는 세례 요한이 활동한 때부터 예수님이 활동하고 있는 당시까지를 말합니다. 이때는 신약의 복음시대가 시작된 때를 의미합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성경에서 예표한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을 전하므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을 전한 선지자였기 때문에 세례 요한 때부터 복음시대가 열린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누가복음16:16에서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모세오경을 가리키고 선지자는 모세오경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구약성경을 카리킵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는바 구약의 율법시대를 의미합니다. ‘요한의 때까지요라는 말은 세례 요한의 때까지 라는 말로서 세례 요한 때까지 구약의 율법시대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세례 요한은 복음시대가 도래할 것을 전했지만 누가는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기 이전까지는 구약의 율법시대로 본 것입니다. ‘그 후부터는은 세례 요한의 활동 이후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때부터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때부터는 신약의 복음시대라는 것입니다. 마태는 세례 요한의 때를 신약 복음시대의 시작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세례 요한이 신약 복음시대에 관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 메시지를 전한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 반해 누가는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을 신약 복음시대로 보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전도 활동을 시작한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천국'은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를 의미하는 말로서 복음으로 인한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영역을 말합니다 (12:28, 11:20). '침노(侵擄)를 당하나니'에 해당하는 비아제타이(βιαζεται)는 수동태입니다. 천국은 빼앗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믿음 있는 사람들을 수용하는 성향을 가진 것입니다. '빼앗느니라'에 해당하는 알파주신(αρπαζουσιν)은 마치 야수나 거친 도적들이 무엇을 취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움켜잡는 것을 말합니다. 전투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병행구절인 누가복음16:16에 보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시대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한다는 것입니다. 침입한다는 것은 복음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의 역동성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때부터는 하나님의 나라 일원으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복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복음으로 통치하는 나라로서 구약시대 때처럼 율법으로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라 복음의 은혜로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믿음을 가진 자가 침입하여 들어가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도 침노하는 자가 빼앗지만 지상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도 침노하는 자가 빼앗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 결사적인 믿음을 가지고 들어가는 자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지위와 권세와 축복을 얻으려면 그에 대한 목적과 목표와 소원을 가지고 그것을 얻기 위해 믿음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허락한 것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소원을 두고 일하십니다 (2:13). 그리고 중요한 것이 실제로 그것을 얻기 위해 믿음으로 실행해야 합니다. 행한 것만이 자기 것으로 얻을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2:17-18).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시고 그 땅을 좌우로 밟는 것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창세기13:14-17"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한 땅을 바라보고 행하는 만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도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1:3-4"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 전체를 주시겠다고 했으나 그 땅을 발로 밟는 곳만 얻게 된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기적의 주인공들도 예수 그리스도가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자신들의 고통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는 동시에 누구도 흉내 내기 힘든 믿음의 열정을 가지고 그분에게 나아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은혜는 소원대로 되는 것이고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15:28, 9:29).

 

 

        4.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사역 변명 (13-19)

 

  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구약시대는 세례 요한까지입니다. 신약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부터입니다. '선지자와 및 율법'은 구약성경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은 전체적으로 메시아의 임함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언했고 그 직전에 엘리야를 보내주신다고 예언했습니다 (3:1, 4:5). 그래서 유대인들은 대부분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약 500년 가까이 엘리야를 기다렸습니다. 세례 요한이 바로 오리라 예언된 엘리야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심정을 가진 자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구원자(메시아,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리라 예언된 메시아인 것을 즐겁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5절에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으로서 복음의 영적인 진리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특히 들을지어다는 단순히 들으라는 말이 아니라 주의하여 듣고 깨달으라는 의미입니다. 16절에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라고 했습니다. ‘세대는 한 시대의 사람들을 말하는 데 여기에서 이 세대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 동시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를 합당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대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율법교사들)처럼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거절하여 회개하지도 않고 예수님의 메시지를 거절하여 믿음을 가지지도 않는 자들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7:31-32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세대 사람들에 대해 '장터의 아이들'로 비유했습니다. 16-17절에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고 했습니다. ‘장터에 해당하는 아고라’(αγορα)장터’ ‘광장’ ‘한길등의 뜻이 있는 단어입니다. 그곳은 넓은 광장으로서 공적인 회합 장소로 사용되었는데 여러 모임들이 있었습니다. 재판이 열리기도하고 토론을 하기도 하고 상거래행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19:38, 17:17, 17:5). 아이들은 그곳에서 어른들의 모임이 없을 때 놀이를 하면서 놀았던 것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슬피 울어도는 당시 어른들의 결혼식과 장례식 풍습을 흉내 내면서 놀이를 한 것을 가리킵니다. 당시 어른들은 결혼식 때에는 피리를 불면서 춤을 추면서 즐거워했고, 장례식 때에는 애곡하면서 가슴을 치며 슬퍼했습니다. 아이들은 그것을 흉내 낸 놀이를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이들 놀이에서 피리를 불면 당연히 춤을 추어야하고 애곡을 하면 가슴을 쳐야했습니다.

 

  당시 장터에서 아무런 상거래 행위가 없는 평일에 아이들이 어른들의 결혼식과 장례식을 빙자한 놀이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장터에 모여 양편으로 나누고 한 편에 선 아이들이 어떤 흉내를 내면 다른 편에 선 아이들이 그 흉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행동으로 맞추는 놀이였습니다. 한 편에 선 아이들이 피리를 불면 다른 편에 선 아이들은 그 흉내가 결혼식 흉내인 줄 알고 그 피리 부는 곡조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했습니다. 또 한 편에 선 아이들이 애곡을 하면 장례식 흉내인 줄 알고 그 곡소리에 맞추어 슬피 울면서 가슴을 쳐야했습니다. 그렇게 상대편의 흉내에 맞는 행동을 하면 놀이는 더욱 재미있어지고 흥이 났습니다. 하지만 상대편의 흉내에 반응을 하지 않거나 흉내에 맞지 않는 다른 행동을 했을 경우에는 재미가 없어지고 흥이 다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이 세례 요한의 회개 메시지에도 합당한 반응을 하지 않고 예수님의 구원 메시지에도 합당한 반응을 하지 않은데 대해 책망한 내용입니다 (7:30). 세례 요한의 회개촉구 메시지에 회개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 메시지에 기뻐하는 감격도 없었습니다. 그 메시지를 무시하거나 이해하지 못해서 그 메시지의 요구와 전혀 다른 반응을 했습니다. 그 메시지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관심하고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비난하고 정죄하고 대적했습니다. 예레미야25:4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끊임없이 보내셨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죄에 대한 회개와 구원에 대한 감격이 있어야합니다. 요한계시록3: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당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메시지에 청종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금욕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벌꿀)을 먹고 살았습니다 (3:4 해석 참조). 나실인의 규례를 지키기 위해 포도주도 먹지 않았습니다 (1:15, 7:33).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설교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아예 반응을 나타내지 않거나 귀신들렸다고 정죄했습니다 (18). 가장 모욕적인 비난을 한 것입니다. 회개하고 바로 설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치 장례식에서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과 같은 반응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이 사역을 하실 때는 세례 요한과 반대의 행위를 많이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일상생활을 같이하면서 사람들과 식사를 같이하며 포도주도 마셨습니다. 심지어는 사람들이 부정하게 생각했던 병자들과 같이하고 죄인으로 생각했던 세리나 창녀들과 같이하고 천하게 생각했던 가난한 무리들과 같이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대로 구원자(메시아, 그리스도)로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역에 긍정적으로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로 정죄했습니다 (19). 마치 아이들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19). '지혜'는 사전적으로 보면 지식을 사용하여 사건을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지혜를 의인화시켜서 표현한 경우들이 많이 있는데 예수님이 그런 방법을 사용한 것이라면 이 지혜는 예수님 자신을 염두에 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전하는 메세지는 하나님 뜻대로 전하는 메시지였고 그들의 사역은 하나님의 뜻대로 한 사역이었고 삶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인정을 받게 될 것이고 그 결과가 이루어지므로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누가복음7:35에서 "지혜는 자기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말씀한 것처럼,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메시지와 사역과 삶은 그들의 메시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옳다는 것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 의해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실한 복음 사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메시지에 무관심하고 오히려 대적했을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 해석과 적용을 가장 정통으로 생각하여 자기들의 해석과 전통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모두 죄인 취급을 한 자들입니다. 바리새파 중에서도 서기관들은 율법학자들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율법 해석과 적용을 절대화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가장 의로운 자들이라 생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바로 자신들이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그 교만이 하나님의 주신 메시지를 거부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대적하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자기를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중심주의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 주요인입니다. 자기가 가장 옳고 자기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인 에고이즘(egoism)이 하나님의 은혜에 긍정적으로 반응하지 못하게 합니다. 자기의 생각, 지식, 논리, 경험, 욕망, 계획을 최우선으로 고집하는 교만과 완고와 고집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우상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성령님으로 하신 말씀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소아시아에 있는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해 요한계시록3:15-16에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했습니다.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는 것은 요한계시록3:19에 보면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한 것을 보면 회개하는 것과 열심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죄에 대해 회개하지도 않고 신앙에 대해 열심을 내지도 않고 미지근하면 주께서 역겹게 생각하여 내치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3:10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했습니다 (3:9). 주께 버림당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게 반응해야합니다

 

 

       5. 회개하지 않은 고을들에 대한 경고 (20-24)

 

  예수님은 자신이 구원자(메시아, 그리스도)임을 나타내기 위해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이적을 베푼 도시들이 그에 합당한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도시들에 대해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했습니다 (21-22). ‘고라신’(Chorazin)벳새다’(Bethsaida)는 갈릴리 지방 갈릴리 바다(호수) 북동쪽 근처에 위치한 성읍들입니다. 그곳들은 예수님이 가장 많은 권능을 행한 곳으로서 (11:20), 특히 벳새다는 오병이어를 기적을 일으킨 곳이기도 합니다 (9:10-17). ‘두로’(Tyre)시돈’(Sidon)은 갈릴리 지방 북방 지중해변의 오래된 베니게(페니키아) 항구도시입니다. 이교도의 번영과 향락과 우상숭배의 도시로서 하나님을 거역하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도시들입니다 (23, 26-28). 베옷을 입고 재에 않는 행동은 극한 슬픔이나 애도의 행동으로서 여기에서는 절실한 회개의 행동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고라신과 벳새다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는 말은 고라신과 벳새다가 당할 심판의 중함을 경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23-24). ‘가버나움’(Capernaum)은 갈릴리 지방 갈릴리 바다(호수) 바로 위에 있는 성읍입니다. 그곳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등이 선택된 곳입니다 (5:10). 예수님의 본 동네라 불려질 정도로 (9:1) 예수님이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로 삼았던 곳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이적을 행하고 교훈을 베푼 곳입니다 (4:23, 31-37, 7:1-10). ‘음부’(αδης)는 무덤, 지하, 지옥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가버나움은 어떤 도시들보다 예수님의 권능을 많이 목격하고 영예를 누린 도시였습니다. 그로인해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외적 조건들 때문에 하늘(천국)까지 높아지려 하지만 실상은 지하(지옥)까지 낮아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소돔’(Sodom)은 고모라(Gomorrha)와 함께 아브라함 시대에 염해 동편에 있던 죄악이 관영한 도시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도시들입니다 (19:1-28). 가버나움은 어떤 도시보다도 예수님의 권능을 많이 보고 교훈을 많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받을 심판이 무거울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전도 사역을 대부분 갈릴리 지방에서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부터 구원한다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방인의 도시에서부터 사역을 하지 않고 유대인의 도시들에서부터 사역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면서도 유대인에게서부터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10:6).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이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거역하므로 심판받아 멸망한 이방도시 두로와 시돈과 소돔에서 그런 은혜를 베풀었다면 그곳 사람들은 벌써 회개했으리라는 안타까움을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도시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사람들이 받은 심판이 그들보다 중할 것을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선택을 받은 유대인들로서 예수님이 친히 권능과 교훈을 보이신 대상들이 은혜에 합당한 반응을 하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이방인들보다 하나님 앞에서 받을 심판이 더욱 클 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실제로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은 후에 로마와 유대의 전쟁으로 인해 초토화되고 맙니다. 그곳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도 많은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이 준 자에게 많은 것을 원하십니다 (12:47-48). 알고도 행하지 않은 자는 알지 못하고 행하지 않은 자보다 책망을 많이 받습니다. 누가복음12:47"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라고 했고, 야고보서4:17에는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많이 주실 때는 그 사람에게 원하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은 특별한 은혜를 받고도 그 받은 대로 합당하게 행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소홀히 여긴 자이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통해 하실 일까지 막는 자이므로 하나님의 책망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6. 예수님의 초청과 권면 (25-30)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①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기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천지의 주재로서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25-26). 하나님은 천지(天地)의 주재(主宰)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권(主權)을 가지신 분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통해 자기와 자기의 일을 나타내려는 계시(啓示)와 관련된 주권을 가지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기적과 말씀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곧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임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한 지역인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소수는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은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이며 받아들인 자들은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은 예수님의 이적 행함과 말씀의 가르침을 경험할 때에 교만한 자들처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긴 나머지 예수님의 이적 행함과 말씀의 가르침을 거부한 것입니다. 받아들인 자들은 예수님의 이적 행함과 말씀의 가르침을 경험할 때에 순박한 자들처럼 자신들의 무지와 무능을 깨닫고 예수님의 이적 행함과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수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자신의 뜻을 인간들에게 계시(啓示. αποκαλυφις)하는 방법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일반계시(一般啓示)는 하나님 자신을 피조물을 통해서 나타내시는 계시입니다. 곧 자연 만물과 세상 역사와 인간 양심을 통해서 나타내는 계시입니다. 특별계시(特別啓示)는 특별한 방법 곧 초자연 방법으로 나타내는 계시입니다. 곧 이적과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계시입니다. 그 중에 최고의 계시 방법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것을 인격계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적 행함과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자기의 뜻을 나타냈습니다. 예수님이 그 행위를 행하실 때에 필연적으로 두 형태가 나타납니다. 자기들의 지혜로 생각하여 거부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반대로 자신들의 무지를 깨달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들이 생겨납니다. 예수님은 거부한 자들에 대해 심판과 멸망을 경고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청종하는 자들에게는 축복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거부하거나 혹은 수용하는 결과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로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뜻을 행하려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것인데 하나님의 뜻은 택한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1:21, 6:38-39, 1:4). 요한복음6:37,65"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고 했고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 원리는 오늘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미 선택했습니다. 에베소서1:4-6"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메세지가 전달될 때 선택받은 자들은 성령께서 감동시킵니다. 그래서 자기의 무지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10:9, 고전12:3). 그러나 택함 받지 않은 자들은 성령이 감동시키지 않으므로 자신들의 지혜로 판단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표적이나 지혜를 구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방법으로 구원하려는 것을 미련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1:21-24"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을 얻게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영원한 가치를 붙들고 살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받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시는 원리를 붙들고 소망 중에 인내하고 연단을 이루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벧후1:10).

 

   ②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다 오라고 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27). 앞에서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라고 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 권세를 예수님에게 주셨습니다. 특히 계시의 관점에서 자신의 본질적 존재와 성품과 사역을 예수님께 나타내셨습니다. 그런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히브리 관념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형상을 가진 자이고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은 자이고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질적 존재와 성품을 가지신 분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이고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풍성한 은혜와 복을 가진 자입니다 (28:18, 10:30, 14:9, 16,1:15).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했습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는 스스로 일을 계속하므로 지친 상태(κοπιωντες-능동태) 와 다른 사람에 의해 지워진 속박으로 인하여 지쳐 있는 상태(πεφορτισμενοι-수동태) 모두를 의미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삶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경제적인 멍에가 있었습니다. 특히 서민들은 물질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당시에 주님은 두 렙돈을 바친 과부에 대해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체를 바친 자라고 칭찬했습니다 (12:42-44). '렙돈'(λεπτον)은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는 가장 작은 액수의 유대 동전입니다. 로마 동전으로는 2분의1 고드란트에 해당합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의 '128분의 1'에 해당합니다. 또 예수님이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실 때 아이가 바친 도시락 내용을 보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14:14-21, 6:9-13). 이 물고기는 상품가치가 있는 물고기가 아닙니다. 어부가 놓아주자니 아깝고 잡아 팔자니 너무 작은 물고기로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호숫가에 던져 놓는 작은 물고기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6:10에서는 익투스(ιχθυς)를 사용하지 않고 옵사리온(οψαριον)을 사용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비유로 드신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보면 나사로는 부자 집 대문에서 구걸을 했습니다 (16:20-21). 당시에 곳곳마다 병자들이 모여 살았고 (8:22, 5:1-5),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9:27, 1:29-31, 40-45, 17:11-19). 사도들이 사역을 할 때는 성전 문 앞에도 구걸하는 병인들이 있었습니다 (3:1-10).

 

  둘째, 정치적인 멍에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정치적인 압박 속에서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 압박은 핍박과 박해로 이어졌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고 순교까지 당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 정권의 죄를 지적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결국 왕비 헤로디아의 간계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14:1-12). 예수님도 로마 총독 빌라도 정권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27:11-31). 사도들도 갖은 핍박을 다 당하고 마침내 처참하게 순교당했습니다 (4:15-18, 12:1-6, 16:19-26, 고후11:24-25). 초대교회 성도들의 대부분이 화형과 수형으로 순교를 당했으며 카타콤 생활을 하다가 죽어갔습니다 (7:54-60, 8:1-3, 11:33-40).

 

  셋째, 종교적인 멍에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교는 말로 다할 수 없이 부패해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교는 의식주의와 탐욕주의와 권위주의로 타락해 있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었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고 질문했습니다 (15:1-2). 얼마나 의식주의로 기울어졌는지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이나 유대교의 대표적 상징인 성전에 들어가 짐승 파는 자와 돈 바꾸어 주는 자들을 채찍으로 내어 쫓았습니다 (2:14-17, 21:12-13). 그것은 당시 유대 종교가 율법으로 얽어매고 제사를 빙자하여 돈을 벌고자 하는 탐욕을 채우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면서 소경된 자가 예수님께 고침받았을 때 고침받은 자가 예수님이 고쳤다고 증언한 것 때문에 출교했습니다 (9:1-34). 자신들의 권위가 상실될 것만 염려하지 진정으로 고통받는 자를 위로해 주지 못한 증거입니다. 유대교는 구원과 영생과 안식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율법의 의식과 의문으로 얽어매어 무거운 짐이 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수고와 무거운 짐으로 인하여 피곤하고 고통스러워하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주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당시 사람들만 가진 고통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가진 인생고(人生苦)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얻었고 영생을 보장받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모든 인생고의 문제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공하는 하나님의 모든 풍성하신 은혜로 평안과 기쁨을 얻어야 합니다.

 

   ③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의 멍에를 메고 자신에게 배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29).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라고 했습니다. '마음'(καρδια)는 생물학적으로 심장을 말하나 히브리적 관념에서는 전 인격의 핵심적 좌소로 이해됩니다. 이는 결국 예수님의 본질적 품성을 언급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품성이 도덕적으로 온순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한 모습이나 어머니를 경계한 모습이나 성전을 청결케 한 사건 등을 보면 결코 외부적으로 온유하거나 겸손한 자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12:34, 2:4, 13-16). 예수님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은 하나님과 관계에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속사역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데 있어서 자기 뜻대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성품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성육신(成肉身)한 것은 겸손 그 자체였습니다. 빌립보서2:5-8"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내용은 그의 온유함을 잘 보여 줍니다. 마태복음26:39"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크게 생각하는 인생의 목적과 가치와 만족은 하나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4: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 대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로서 자신의 멍에를 메고 자신에게 배우면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멍에'는 짐승에게 다른 도구를 끌게 하거나 짐을 지우기 위해 씌우는 도구입니다. 당시 팔레스틴에서 노역자나 짐승에게 멍에를 씌울 때는 항상 둘을 짝지어 메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멍에는 예수님과 함께 멘다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에 대한 멍에를 메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도 그 멍에를 함께 멜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이 주신 만족을 얻음 같이 제자들도 하나님이 주신 만족함에 참여하여 마음(ψυχη)이 참 안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구하는 멍에는 유대 사회와 종교가 지운 멍에처럼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멍에는 메기가 쉽고 그 짐은 가벼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30). 그 이유는 예수님이 지운 멍에는 그에 합당한 구원적 은혜가 확실히 보장되기 때문이고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가 확인되기 때문이고 예수님이 항상 함께 해주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28:20, 14:16).

            

<結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한 분입니다 (10:30, 14:9).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1:15).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28:18).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분이고 (14:6),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복을 제공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가야 하고 그의 길을 가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