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마태복음12:1-50

<題目> 바리새인들의 메시아 배척

 

<序言>

  11~12장은 천국복음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반응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11장 마지막 부분에서 다룬 것처럼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일반인들에게 율법적으로 무거운 멍에를 씌웠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가벼운 멍에를 메게 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 사이에는 충돌이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12장에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비난과 대적 행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비난에 대해 논쟁하면서 자신의 메시야 됨을 선언하는 계기로 활용하게 됩니다. 본장의 내용구조는 안식일의 노동에 대한 논쟁(1-8), 안식일의 치유에 대한 논쟁(9-13), 바리새인들의 모의와 예수님의 은익(14-21), 귀신 축사에 대한 논쟁(22-29),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정죄(30-37), 표적에 대한 예수님의 제시(38-40), 당시 세대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41-45), 가족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46-50)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안식일의 노동에 대한 논쟁 (1-8)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복음전도 사역을 하기 위해 밀밭 사이를 지날 때에 제자들이 시장하여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누가복음6:1에 보면 손으로 비비 먹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주시하다가 기회를 잡고 예수님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고 지적을 한 것입니다 (1-2). 안식일에 예수님이 사역을 위해 밀밭 사이로 지나실 때 제자들이 앞서가며 길의 장애들을 정리하면서 나아갔습니다 (2:23). 그러나 시장한 터라 밀 이삭을 잘라 비벼먹은 것입니다. 그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정죄한 것입니다.율법에는 안식일에 일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20:8-11, 5:12-15). 출애굽기20:10에 보면 안식일에는 그 누구라도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고, 출애굽기34:21에는 안식일에는 밭을 갈 때나 곡식을 거둘 때라 해도 쉬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준수를 위해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분에 세부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구전 율법 미쉬나(Mishnah)에 보면 안식일에 금지해야 할 사항을 39개나 제시하고 있는데 그 세 번째는 곡식 수확 행위에 관한 것입니다 (M. Sabbath7:2). 안식일에 추수나 타작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근거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에 대해 안식일을 어긴 것으로 보았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른 것과 비벼서 먹은 것을 안식일에 추수와 타작을 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긴 죄로 간주한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에 안식일에는 노동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으나 남의 곡식밭에서 낫을 대지 않고 손으로 이삭을 따는 것은 허락이 되었습니다 (23:25). 남의 곡식밭에 있는 곡식이라도 배가 고파서 곡식 이삭을 먹는 것은 허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힐문에 대해 다윗이 성전의 진설병을 먹은 사실과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에 일을 한 사실을 들어 대답했습니다 (3-5). 이는 사무엘상21:1-6에 나온 사건을 말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사울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밤에 군사들을 보내어 집이 포위되었을 때 창문으로 줄을 달아 도망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가 있는 라마나욧으로 도망했는데 사울왕이 그곳에도 군사를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다윗이 그곳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을 만나 사울왕의 의도를 알고자 했습니다. 요나단으로부터 사울왕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성막이 있고 제사장들이 사는 놉으로 도망했습니다. 다윗은 함께 한 자들을 다른 곳으로 오게 하고 혼자서 성막에 있는 대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먹을 것을 요청했습니다. 아히멜렉은 자기에서 떡이 없어서 성막에서 물려 나온 진설병을 주었습니다. '진설병'(陳設餠)은 성막의 성소에 차려놓은 떡을 말합니다. 성막의 성소에는 진설병상에 진설병이 2줄로 6개씩 모두 12개를 진설해 놓았습니다. 그 진설병은 제사장이 매 안식일마다 새 것으로 갈고 물려 나온 것은 제사장들이 거룩한 곳에서 먹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25:30, 35:13, 39:36, 40:23, 24:8-9). 그런데 대제사장 아히멜렉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다윗에게 먹도록 내어 주었고 다윗은 그것을 먹기 위해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일에 대해 구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정죄받지 않았습니다. 아히멜렉은 율법의 규례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규례를 어기면서 다윗에게 진설병을 내어준 것이고 하나님은 그에 대해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성소의 진설병을 일반인이 먹어서는 안 되지만 위급한 상황에서 생명을 위해 먹는 것은 용인되었다는 것입니다. 6절에서는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성전 규례는 모두 오실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입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이 최종적으로 목적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고 했습니다 (8). '인자'(人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직역하면 '그 사람의 아들'(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 -GTS,GNT, the Son of man -KJV)로서 구약성경에서 (삼상7:12-14, 1:26-28, 7:13-14) 오시리라고 예언된 '인자 같은 이'(케바르 에나쉬; כבר אנש)를 말하는 바, 구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구원자)에 대한 관용적 표현입니다. ‘주인’(κυριος)master가 아니라 Lord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오직 예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 제도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만드신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기념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0:21). 하나님이 6일 동안 세상을 만드시고 7일째에 안식하셨습니다. 그 안식일은 계획하신 대로 완성하신 기쁨을 누리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도 그 안식을 느끼게 하기 위해 안식일을 만드셨습니다. 그 안식은 육체적인 쉼을 뛰어 넘어 6일 동안 최선을 다해 일한 것에 대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5:15).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살면서 후반기에는 억압과 학대를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내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주권적인 나라를 세우게 했습니다. 안식일을 주신 것은 그 구원으로 인한 기쁨과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 주실 것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4:9-10).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죄와 죽음과 내세 형벌에 놓인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의 안식을 누리게 하실 것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안식일 규례를 주신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이 주실 진정한 안식을 바라보게 하는 데 있었고, 그 안식은 신약시대에 보내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죽음과 지옥에 대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안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실 안식에 대해 안식일은 그림자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실재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목적이며 실재이며 주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에 참여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참된 안식을 주시기 위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약성경에서부터 약속한 인자 곧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죄와 사망과 내세 형벌에서 구원받은 기쁨, 고난과 고통과 근심과 슬픔으로 잠시도 쉴 수 없는 인생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소망하는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실재로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 완전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도 예수님이 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깨달을수록 그 안식을 많이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예수님께 진리의 말씀을 배워 안식일이 지시하는 참된 안식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이 지시하는 참된 안식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한 채 안식일의 외부적 규례와 유전적 조항에 얽매여 제자들을 정죄한 것입니다. 안식에 대해서는 조금도 모르는 자들이 안식에 참여하는 자들을 정죄한 것입니다. 곧 진정한 의미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을 정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암시적으로 책망한 것입니다.

 

  같은 사건인 마가복음2:27에는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안식일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시는 안식에 참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점에서 안식일은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에는 참여하지 못하면서 사람들을 안식일 규례로 그것도 오해한 규례로 얽어매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7절에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했습니다 (9:13). 이는 구약성경 호세아6:6 말씀의 인용입니다. 이는 제사를 부정하는 말씀이 아니고 바른 제사를 원한다는 말씀입니다. 호세아 선지자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자비한 성품을 깨달아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배푼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포학을 행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제사는 열심히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그런 형식적이고도 가증스런 제사가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아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면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당시 선지자가 유대인들을 책망하려는 것은 포악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는 것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자신을 책잡으려고 제자들을 정죄한 것을 책망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에 대해 긍휼을 베풀지도 않으면서 자신들은 열심히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그 결과들로부터 구원해 주신 기쁨, 천국에 가서 영생복락을 누릴 것을 바라보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죄악된 세상에서 잠시도 평안할 수 없으나 그 기쁨과 소망으로 평안을 얻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그것들을 누려야 합니다. 외부적 규례들은 그 안식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안식일과 그 규례들은 우리의 안식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식은 알지도 못한 채 규례에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규례의 관점에서 다른 사람을 평가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안식일 문제뿐 아니라 모든 신앙생활에서 형식주의에 빠져 다른 사람을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다른 사람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율법적 규례에 대해 정신과 목적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형식과 방법을 지키는 것도 그 정신과 목적을 위함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이 정신과 목적을 근거하면 형식과 방법은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때로 형식과 방법이 정신과 목적을 견고히 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정신과 목적을 더 중요하게 여기되 정신과 목적을 견고히 하기 위해 형식과 방법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23:23). 하지만 형식과 방법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2. 안식일의 치유에 대한 논쟁 (9-13)

 

  9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10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니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송사하려고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9-10). '한쪽 손 마른 사람'은 피의 순환이 잘 되지 않아 손의 근육 기능을 상실한 자를 말합니다. 누가복음6:6에 의하면 그 손은 오른 손이었고 제롬(Jerome)에 의하면 손으로 벌어먹는 석공이었다고 합니다. '회당'(συναγωγη)은 유대인들이 예배를 위해 모이는 건물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기에 성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함께 모여서 기도하며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 필요했습니다. 그 필요에 의해 모이기 시작한 것이 회당의 기원입니다. 이 회당은 유대교를 오랫동안 존속시켜준 제도가 되었습니다. 당시 의식은 오늘날 예배의식과 비슷하게 기도와 찬양과 성경봉독과 설교 등의 순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때 설교는 랍비(Rabbi)나 그에 준하는 자격을 갖춘 사람에 의해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자주 그 회당을 복음전도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안식일마다 예배를 위해 그곳에 모였고 그곳에서 설교를 할 경우 율법 강론을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소할 명분을 찾아 정식 재판에 회부할 기회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송사할 거리를 찾고 있다가 안식일에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을 데려다가 놓고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든지 빠져나가기 힘든 질문이었습니다. 만일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다고 말하면 안식일 규정을 어긴 것이라고 비방할 것이고, 만일 병을 고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말하면 앞에서 자신이 말했던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스스로 외면했다고 비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7).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11-12). 당시에 안식일 지키는 규례에 대한 논쟁이 많이 있었습니다. 유전(Mishnah)에는 안식일에 사람의 병을 고치지 말되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는 치료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안식일에 동물이 구덩이에 빠졌을 경우에 그 동물이 구덩이에서 안식일을 잘 지낼 수 있도록 음식물을 넣어 주고 다음날 건져내되 만일 동물의 목숨이 위험할 경우에는 사람이 직접 동물을 끌어내도록 했습니다. 쿰란 공동체의 규율에는 안식일에 동물이 구덩이에 빠졌으면 동물이 스스로 나올 수 있도록 널판지를 넣어주도록 했습니다. 어찌되었든 율법은 물론이거니와 유대인들의 유전들에서도 비록 안식일이라도 생명을 살리는 일에 대해서는 금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동물인 양보다도 사람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의 병을 고치는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쪽 손 마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게 하므로 성하게 해 주셨습니다 (13).

 

  구약시대에 안식일의 목적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기념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 내신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미래에 주실 참 안식에 참여하게 될 것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곧 율법에서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하기 위함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에 참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규례 보다 큰 목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소극적인 내용보다 적극적인 내용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 안식일에 관한 제언


   1. 안식일의 어의

  안식일(安息日)은 일을 그치고 쉬는 날을 말합니다 (31:14-17, 23:3).


   2. 안식일의 시기

  구약시대의 안식일은 제 7일인 토요일이었습니다 (31:15). 정확히 말하면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였습니다.

  

   3. 안식일의 규례

  ⓛ아무 노동도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안식일에는 본인뿐 아니라 아들이나 딸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육축이나 집 안에 거하는 객(손님)이라도 누구든지 어떤 일도 하지 말고 쉬라고 했습니다 (20:8-11, 23:3, 5:12-14). 이는 생업을 위한 일을 그치라는 말입니다. 그날에는 상거래도 하지 말라고 했고 (10:31, 13:15-21). 심지어는 자기를 위한 목적의 여행이나 오락이나 사사로운 말도 그치라고 했습니다 (58:13-14).

  ②제사와 예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28:9-10). 매주(每週) 안식일에는 번제로 일년 된 흠없는 숫양 둘, 소제로 고운가루 에바 10분의 2와 기름, 전제로 포도주를 제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 제물은 매일드리는 상번제 이외에 드리는 제물입니다. 안식일에는 특별한 양과 가루와 기름과 포도주를 드려야 했습니다. 안식일에는 매일 드리는 상번제 보다 2배의 예물을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곧 제사를 드리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③선한 일을 해야 했습니다 (12:10-13, 6:6-10).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양이 구덩이에 빠져 있으면 건져야 하고 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고쳐야한다고 했습니다. 고치고 살리는 일은 선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에는 선한 일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4. 안식일의 목적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기념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0:11, 31;17). 하나님이 6일 동안 세상을 만드시고 7일째에 안식하셨습니다 (2:3). 그 안식일은 계획하신 대로 완성하신 기쁨을 누리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도 그 안식을 느끼게 하기 위해 안식일을 만드셨습니다. 그 안식은 육체적인 쉼을 뛰어넘어 6일 동안 최선을 다해 일한 것에 대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②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5:15).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살면서 후반기에는 억압과 학대를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내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주권적인 나라를 세우게 했습니다. 안식일을 주신 것은 그 구원으로 인한 기쁨과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③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 주실 것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4:9-10).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죄와 죽음과 내세 형벌에 놓인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의 안식을 누리게 하실 것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안식일 규례를 주신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이 주실 진정한 안식을 바라보게 하는 데 있었고, 그 안식은 신약시대에 보내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죽음과 지옥에 대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안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실 안식에 대해 안식일은 그림자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실재인 것입니다 (2:16-17).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목적이며 실재이며 주인인 것입니다 (12:8, 6:5).

  ④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0:20).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일에만 몰두하다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생활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곧 하나님 백성으로서 성별된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동산 중앙에 산악과를 만들어 놓으신 이유와도 같습니다.

 

   5. 안식일 지킨 자에게 약속된 복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했습니다 (15:32-26, 31:15).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죽임 당하고 총회에서 끊어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백성에게 주실 언약적 축복에서 제외 된다는 뜻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을 범하므로 바벨론에 포로 잡혀갔습니다 (13:18, 23:38).

  그러나 안식일을 잘 지키는 자에게는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사야58:14에 보면 즐거움을 얻고, 땅의 높은 곳에 올려 주고, 야곱의 업()으로 지켜 준다고 했습니다 (32:9-14참조).

 

   6.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이유

  구약의 안식일(安息日)은 일주일 중 일곱째 날인 토요일이었습니다 (31:15). 신약시대의 기독교는 일주일 중 첫째날인 주일(主日)을 지킵니다. '제 칠일 안식일 재림교'(안식교)'하나님의 교회'(안상홍 증인회) 같은 교단에서는 지금도 토요일인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출애굽기31:13, 16-17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표징이 되게 하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대대로 지키게 한 안식일을 A.D.321에 로마 황제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면서 주일을 지키도록 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주일로 바꾼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성경의 약속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안식일은 진정한 안식을 주지 못하므로 폐하고 다른 날을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호세아2:11"내가 그의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라고 했고, 히브리서7:18-19"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고 했고, 히브리서4:7-10"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께 남아있도다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하나님의 안식에 온전히 참여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안식일이 예표하는 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주시므로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②삼위 하나님이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성 삼위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일로 친히 옮겨 주셨다는 것을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이 금요일에 죽으셨다가 일요일(주일)에 부활하셨습니다 (28:1-6). 안식일이 지시하는 목적이며 실제이며 주인이신 예수님이 진정한 안식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 대속을 이루시고 주일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12:8, 6:5, 2:16-17). 그리고 성령님이 주일에 강림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성령님께서 오순절에 강림하셨습니다 (2:1). 오순절은 유월절부터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유월절 다음날부터 계산하면 49일째 되는 날입니다. 유월절은 안식일이고 그 다음날은 주일이므로 유월절로부터 50일째되는 날 곧 유월절 다음날로부터 49일째 되는 날은 주일입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 주일에 계시를 주셨습니다 (1:10).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미래의 완전한 안식(천국)에 대한 계시를 주일(주의 날)에 주신 것입니다.

  ③사도들이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 제자였던 초대교회 사도들도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를 느끼고 안식 후 첫 날 곧 주일에 모여 예배했습니다. 사도들이 안식 후 첫 날 곧 주일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20:19-20), 안식 후 첫날에 모여 떡을 떼며 예배를 했고 (20:7), 안식 후 첫날 모여 예배하면서 연보(헌금)을 했습니다 (고전16:2). 사도들이 때때로 안식일에 성전에 들어간 것은 안식일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전통에 의해 안식일에 회당에 모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성전에 자주 들어가셨던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④교부들도 사도들의 모범을 따랐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을 사도라고 하는데 사도들의 제자들을 속사도라 하고 속사도의 제자들을 교부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의 제자들이었던 교부들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켰습니다. 교부시대부터 A.D.325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책 'The Ante-Nicence Fathers'에는 교부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켰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1세기 말경 안디옥교회 익나티우스(Ignatius)도 주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2세기 후반 고린도교회 감독이었던 디오니시우스(Dionysius)도 주일을 지켰다고 했고, 3세기초 신학자 터툴리안(Tertullian)도 당시 주일을 지키기 위해 주일에 일상적인 일을 중단한 크리스찬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4세기 초 321년에 로마 콘스탄틴(Constantine)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고 주일을 지키는 것을 돕기 위해 일요일을 공식적인 휴일로 선포했고, 그것이 지금까지 일요일을 공휴일로 하는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성경이 문구적으로 안식일을 주일로 옮겼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성경 전체 사상이 안식일을 주일로 옮겼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진술한 것처럼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과 섭리를 보면 안식일이 아닌 주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7. 주일을 지키는 방법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2:42,46, 20:7, 4:23-24, 12:1). 구약시대에 안식일을 주신 구속사적 목적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진정한 안식을 주실 것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에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하시므로 우리에게 죄와 죽음과 내세 형벌에서 면해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그 사실이 믿어지게 하고 효과있게 적용시켜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완전하고도 영원한 안식을 보장해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찬양과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또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진 구원적 목적과 계획,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섭리,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원리 등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삶의 목적과 목표와 가치와 방식이 변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다는 소망과 기쁨이 가득하게 해야 합니다. 예배는 교회의 가장 첫째 되는 사명이며 주일에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사역입니다.

  ②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12:10-12, 6:6-10, 5:1-10, 9:1-14). 예수님은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져주는 일이나 병으로 고통받는 자를 고쳐주는 일은 선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도 그 선한 일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영업목적이 아닌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하고 심방하고 전도하고 구제하고 교제하고 봉사하는 일도 모두 사람을 살리는 선한 일입니다 (4:16, 13:42, 16:13, 20:7).

  ③육체의 일을 절제해야 합니다 (23:23). 예수님은 서기관(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하는 것을 책망하면서 십일조를 예를 들어 율법의 중요한 목적과 정신은 버리고 율법의 외부적 조항을 지키는 데에는 철저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목적과 정신도 행하고 외부적 규례도 버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목적이 제일 중요하지만 그 목적을 온전케 하기 위해 방법도 필요합니다. 주일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목적에서 멀어지게 하는 행위는 금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구약시대의 안식일에는 생업을 위한 노동이나 상거래 행위나 오락이나 여행 등을 금했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을 온전히 지키게 하기 위한 실천적인 규례였습니다. 신약시대에 주일을 구약시대의 안식일처럼 지키지는 않을지라도 그 정신은 유지해야 하며 그 원리는 적용해야 합니다. 곡식의 알맹이가 곡식의 껍질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알맹이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 껍질이 필요합니다. 주일을 온전히 지키려는 목적을 위해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나름대로 규례를 정해놓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구약시대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표징이었습니다 (31:13,16-17). 신약시대의 초대교회 때 주일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 곧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증거였습니다.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께 속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요 하나님의 자녀된 자요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은 자요 그리스도께 속한 자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려는 모든 약속 있는 축복을 받기로 결정된 자라는 증표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증거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증거입니다.


 

       3. 바리새인들의 모의와 예수님의 은익 (14-21)

 

  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앞서 안식일에 대한 논쟁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아울러 자신을 성전보다 큰 자라고 하고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자신이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임을 간접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언행에 분노를 일으키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조차도 원치 않고 회당에서 나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 것인지에 대해 의논했습니다 (14).

 

  예수님은 그런 분위기를 느끼고 다른 곳으로 떠났습니다. 역시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계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한 말씀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42:1-4). 18-21절에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로서 성령님으로 사역을 하게 되고, 사역을 할 때에 다투거나 요란하거나 떠들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은밀하게 하게 되고, 소망없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되 구속을 완성할 때까지 하게 되고, 구속을 이룬 후 열방이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태가 이사야 글을 인용한 주목적은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말한 이유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이사야 선지자가 오실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가의 사역이 은밀하게 이루어질 것을 예언했다는 사실을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고 하신 것을 '그리스도의 은익사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활 때까지 드러내지 말라고 하신 것은 (9:9), 첫째는 일반인들의 오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오해하여 임금으로 삼으려 하게 될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둘째는 대적자들의 분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싫어하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기 때문에 그 세력이 구체적인 힘을 얻어 실행하는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셋째는 구속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반인들이 임금 삼으려 하는 것이 대중화되고 대적자들이 그것을 빌미로 정치적인 죄목을 씌우게 되면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가 되기 전에는 크게 드러 내놓지 않고 조용히 사역을 하려 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면서 비방하는 자들이나 대적자들이 방해를 할 때에도 그들과 대적하여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있는 곳을 떠나 조용히 사역을 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4. 귀신 축사에 대한 논쟁 (22-29)

 

  22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4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25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27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22). 귀신을 쫓아내므로 병이 낫게 된 기적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령님으로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시는 메시야적 표적을 보이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표적을 보는 무리의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 반응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보는 반응이었습니다 (23). 구약성경에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 메시야가 올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삼하7:12-16, 11:1). 유대인들은 그와 같은 예언들 때문에 다윗같은 유대의 왕이 일어나 다윗 왕국을 재건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표적을 보면서 혹시 예수님이 그 오리라고 기대하던 '다윗의 자손'이 아닌가 생각한 것입니다.

 

  두 번째 반응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반응이었습니다 (24).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습니다. '바알세불'(Βεελζεβουλ)은 간혹 '바알세붑'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집의 주라는 뜻입니다. 이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바알을 가리켜 사용한 말인데 유대교에서는 귀신들의 우두머리인 사탄의 별명으로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귀신들렸다고도 했는데 (3:30, 8:48), 이번에는 사탄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한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나라와 동네와 집을 예로 들어 원리적으로 공동체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서로 분쟁하여 쫓아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만일 사탄이 귀신을 쫓아낸 것이라면 악령의 나라가 설 수 없으므로 사탄이 귀신을 쫓아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사탄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아낸 것이라면 '너희 아들들'로 표현한 유대의 다른 사역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사탄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 낸 것이라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탄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이 아니고 성령님으로 쫓아낸 것일진대 그들이 재판관이 되어 증명해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 권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었으니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통치가 세력을 확장하고 그만큼 사탄의 세력이 패하여 물러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님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은 성령님으로 악령의 권세를 결박하여 물리치므로 악령의 지배 영역을 하나님의 나라에 편입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넓혀가야 합니다. 사탄과 마귀와 귀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영역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세를 사용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16:17-18). 하나님 나라는 빼앗는 자의 것입니다. 악령의 세력을 물리치고 빼앗은 만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영역으로 변합니다 (6:7).

 

 

       5.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정죄 (30-37)

 

  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33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앞에서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으로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시는 메시야적 표적을 보이신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을 보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 곧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습니다 (22-29). 예수님은 그들을 정죄하고 책망했습니다.

 

   ①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자들은 반대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30).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들에 대해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어 치유하므로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일을 방해하고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 의심하고 흩어지게 하려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는 마가의 증언과 모순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9:39-40에 보면 제자 가운데 요한이 예수님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그룹에 속하지 않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했는데 그 입장이 타당한지 묻는 것입니다. 곧 자기들이 모르는 낯선 사람이 예수님의 권위로 치유사역을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신지 묻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이 주시는 권능으로 사역을 한 자에 대해 자기들에게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금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권능을 받아 많은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병을 고쳤으나 (6:7,12-13) 얼마 전 변화 산 아래서는 귀신들려 간질병 증세를 보이는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9:17-18). 그런 경험이 있는 가운데 자신들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치유사역을 하자 시기심과 질투심이 일어난 것입니다. 제자들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치유사역을 하는 것을 막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행하고 즉시 비방할 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치유 사역을 모방했겠지만 어찌 되었든 그는 예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치유 사역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금방 예수님을 욕하거나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반대하지 않는 자는 위하는 자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 이름으로 사역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고 그의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가의 증언은 본문의 내용과 모순이 되는 것처럼 여겨지나 본문의 내용과는 다른 상황에서 한 말로서 다른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상황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축귀사역을 바알세불(사탄의 별명)을 힘입어 한다고 하는 상황에서 사탄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님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령님과 귀신을 공존할 수 없고 사탄과 귀신은 공존하기 때문에 귀신을 쫓겨 간다면 그것은 사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님에 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성령님의 역사가 아닌 것은 모두 사탄의 역사이고 그와 같이 하나님의 성령님을 힘입어 축귀 사역을 하는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협력하지 않는 자로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라는 것을 천명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역을 하는 자는 같은 그룹에 속해있지 않을지라도 예수님의 사역에 도움을 주는 자로서 예수님 편이라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②성령님을 훼방한 죄는 사함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31-32).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를 성령의 힘으로 쫓아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낸다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하신 일을 부정한 행위입니다. 더 나아가 성령께서 하시려는 일을 방해한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님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성령님의 독특한 사역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발출하신 분으로서 창조사역과 구속사역과 심판사역이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신 분입니다. 특히 구속사역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로서 사역을 완수하도록 섭리하시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역사하고 죄를 회개하게 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고 의롭다 함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영이 거듭나게 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역사를 거부하고 성령의 일을 훼방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회개하고 거듭날 가능성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성령님의 하신 일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거스리는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되는 모든 구원적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짐짓 범한 죄, 사망에 이르는 죄와 상통하는 죄입니다 (15:30, 6:4-6, 10:26-32, 요일5:16). 히브리서10:26-27"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5:16에는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고 했습니다. 고의적이고도 의식적으로 성령님을 훼방하는 자는 회개할 수조차도 없기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를 비롯한 모든 구원적 은혜는 성령님의 역사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존중하고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을 협력해야 합니다 (살전5:19).

 

   ③실과가 좋으면 나무도 좋다고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33).

 

  "나무도 좋고 실과(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33).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므로 병자를 고친 사건을 인정하면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령님으로 쫓아낸다는 사실을 부정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반응이 마치 실과는 좋다고 하면서 나무는 나쁘다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나무가 좋으면 실과도 좋고 실과가 좋으면 나무도 좋은 것입니다. 또 나무가 나쁘면 실과도 나쁘고 실과가 나쁘면 나무도 나쁜 것입니다. 그러니 나무와 실과가 둘 다 좋다고 하거나 둘 다 나쁘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실과는 인정하면서도 나무는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행위를 인정한다면 생각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과를 인정한다면 원인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상을 인정한다면 본질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한 현상을 보이신 것은 그 본질도 선한 것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는 사역을 한 것은 하나님의 성령님으로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④사람은 마음속에 쌓은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했습니다 (34-37).


  예수님은 나무와 실과의 관계를 예를 들어 자신이 행한 행위가 본질적으로 선한 것임을 증명했습니다. 이제 그 예의 원리를 바리새인들에게 적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했습니다 (34-35).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행위를 비난하고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훼방한 행동은 그 마음에 가득히 있는 것이 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곧 나무가 악하기 때문에 실과(열매)도 악하다는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사탄을 따르는 자들로서 사탄의 본성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탄의 생각이 주장하므로 사탄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반드시 심판 날에 심문을 받을 것이고 그 말과 행동에 의해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36-37).

 

  누구든지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 말과 행동을 결정합니다. 속에 악을 쌓은 사람은 악이 나오고 선을 쌓은 사람은 선이 나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17:9).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라고 했습니다 (7:22-23). 그래서 잠언 기자는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잠언4:23).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자고 했습니다 (16:32). 말과 행동을 제어하려면 그 마음속의 생각을 제어해야 합니다. 삶의 태도와 방식이 변하려면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선한 신념과 가치를 가진 사람이 선한 생애를 살아가게 됩니다.

 

 

       6. 표적에 대한 예수님의 제시 (38-40)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유대인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율법사) 중 몇 사람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주기를 원했습니다 (38). 사전적 의미로 볼 때 '이적' '기적' '기사' 등이 자연원리를 초월한 기이한 일을 말한다면 '표적'(表蹟, σημειον, sign)은 그것들을 통해 나타내는 상징성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동안 자신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임을 계시하기 위해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는 등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율법교사)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 기적들이 가진 표적성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사탄의 힘을 빌려 기적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행한 일을 보고 예수님이 구원자인 것을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책망한 것입니다. ‘악하고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대적한 것과 관련한 지적이며, ‘음란한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시는 일을 방해한 것과 관련하여 비유적으로 부부관계에서 타락한 상태와 같이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의미로 지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펴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39-40). 누가복음11:29-30에는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고 했습니다. ‘인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는 직역하면 '그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로서, 다니엘7:13-14에 있는 '인자 같은 이'(one like the Son of man)에 해당하는 '케바르 에나쉬'(כבר אנש)를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28:10-14, 삼하7:12-14, 1:26-28). 인자는 예수님 자신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임을 선언하기 위해 자주 사용한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인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임을 설명 혹은 선언하는데 있어서 요나 사건을 인용한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the sign of Jonah)은 요나가 나타낸 어떤 이적에 대한 표적성이라기보다는 요나와 요나의 경험이 표적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였던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3일 만에 나와 앗수르(Assyria) 제국의 수도 니느웨(Nineveh)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므로 그들을 회개하게 했습니다 (1-2). 요나와 요나의 경험은 오실 구원자에 대한 표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구원자로서 구원할 자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므로 그들을 구원할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아들 구원자임을 증거하는 가장 뚜렷한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임은 예수님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으로 시작하여 그의 기적적 사역들에서 증거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는 그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로 그를 믿는 자에게 구원과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그 중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율법사)들은 구약성경의 내용을 보면서도 그 내용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지 못했고 세속적 혹은 정치적인 관점에서 이해를 했습니다. 그로인해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대적한 것입니다. 자신들 입장에서는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이단들도 그와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1,980년대에 극단적인 진보 목회자들과 2,010년대 이후에 극단적인 보수 목회자들의 시각도 그와 같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7. 당시 세대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 (41-45)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예수님은 당시 세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했습니다 (39).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과 남방 여왕이 일어나 정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41-42). 앗수르(Assyria)의 수도였던 니느웨는 극도로 타락한 도시였으나 요나 선지자의 멸망에 대한 메세지를 듣고 회개하였습니다 (3:1-10). 남방여왕은 스바여왕이었는데 요세프스에 의하면 이디오피아 여왕이라고 합니다. ‘니느웨’(Nineveh)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로서 극도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전했을 때 모두 회개했습니다 (3:5-10).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듣고 회개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 유대인들은 요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 메시지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님 때 당시 유대인들을 정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남방 여왕은 스바의 여왕을 가리키는데 사학자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에디오피아의 여왕이라고 합니다. 스바 여왕은 이스라엘 솔로몬왕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 2,000km나 되는 예루살렘에 왔다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돌아갔습니다 (왕상10:1-13). 그녀는 이방나라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먼 곳까지 와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목격하고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 당시 유대인들은 솔로몬보다 더 큰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도 무반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 때에 스바 여왕이 정죄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 당시 때에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율법사)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나타낸 일과 교훈에 대해 무반응했는지를 알게 합니다. 예수님은 당시 세대를 동무들이 시장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것과 같다고 책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사역을 하셨던 벳새다와 고라신과 가버나움에 대해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과 소돔이 더 견디기 쉬우리라고 하셨습니다 (11:16-24).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무관심과 무반응을 넘어 대적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으로부터 준엄한 심판에 대한 경고를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당시 세대를 악한 귀신들이 주장하는 사람에 비했습니다 (43-45).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한 집에서 살다가 그 집을 나갔습니다. 그 후에 물 없는 곳 곧 광야와 사막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쉬기를 구했지만 마땅히 쉴 곳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자기 집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그 집으로 갔습니다. 그 집에 가보니 마침 그 집은 살고 있는 사람이 없었고 뿐만 아니라 무너진 곳이 수리되었고 지저분한 곳이 깨끗하게 소제되어 있었습니다. 그 더러운 귀신은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그 집은 전에 더러운 귀신 하나가 살던 때보다 더욱 황폐해졌습니다 (11:24-26). 이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보면 실제로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이 나간 다음에 그 사람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면 다시 들어오되 더 악한 귀신이 더 많이 들어와 지배하게 되므로 더욱 악하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세대와 관련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이전보다 더욱 악하게 되었음을 지적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떠나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러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한 이후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회개운동이 일어나 이스라엘인들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 말씀에 바로 섰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이스라엘인들이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율법과 의식과 의문에 사로잡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시려는 구속사역을 더욱 방해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보다 더욱 악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했다는 말은 당시 귀신이 사막이나 광야에 산다는 통속적인 생각을 인용한 말씀일 것입니다 (7:33). 물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입니다. 사막은 물이 없어 사람이 살아갈 수가 없는 곳입니다. 천국에는 생명강수가 흘러 흡족하게 얻을 수 있고 지옥에는 물 한 방울도 얻을 수 없어 고통하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22:1-2, 16:24).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한 자에게는 성령님이 내주하여 말씀을 깨달게 하고 그로 인하여 기뻐하게 합니다. 요한복음7:37-39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성령님을 모시지 않는 곳에는 하나님 말씀을 얻을 수 없어서 영적으로 곤고함을 당하는 곳입니다. 평안과 안식과 기쁨과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귀신은 그런 곳에 거하기를 좋아합니다. 귀신이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다는 말은 귀신이 전에 들어가 있었던 사람에게 주인이 없음을 확인한 것을 말합니다. 곧 귀신들렸던 사람이 귀신이 나간 다음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므로 그를 주관하는 자가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성령님이 내주하셔서 하나님 말씀으로 다스려야 하는데 성령님이 계시지 않고 말씀이 세력을 얻지 못하니 주인 없는 빈 집이나 마찬가지 상태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했다는 말은 동료 귀신들을 더 데리고 들어갔음을 말합니다 (8:2).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된다는 말은 나갔던 귀신이 7귀신을 데려와 주관하니 귀신들린 사람의 상태가 더욱 심해진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는 것이 중요하고 성령님을 모시는 것이 중요하고 하나님 말씀이 지배세력이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가정과 민족적으로도 확대하여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8. 가족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 (46-50)

 

  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마가복음3:31-35과 누가복음8:19-21에도 나온 내용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 가버나움의 베드로 집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이 되어서 예수님을 데려가기 위해 가버나움까지 왔습니다 (3: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도착하여 예수님이 계시는 베드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을 중심으로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둘러 앉아있었고 문 앞까지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문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있던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그 사정을 듣고 예수님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46-47). 마가복음3:32에는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마리아였고, 동생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였고,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여동생들도 있었습니다. 13:55-56"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고 했습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마리아의 거룩성을 부여하기 위해 마리아가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낳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성모무후회태설). 그들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들은 요셉의 전처(前妻)가 낳은 아들들로서 이복 형제들이거나 마리아와 같은 이름을 가진 여동생이 낳은 아들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주장들은 기본적으로 성경의 기록에 위배됩니다. 또한 요셉의 전처가 낳은 아들들이라면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을 잇는 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 되고, 또한 마리아의 여동생이 낳은 아들들이라면 두 자매가 같은 이름을 가졌다는 말이 되는데 상식적으로 가능성이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사실 이상의 거룩성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비성경적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외에 또 다른 자녀들을 낳았다고 해서 예수님의 거룩성이 훼손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성령님에 의해 낳았고 다른 자녀들은 요셉과의 관계를 통해 낳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유대인의 사고로 보면 예수님은 당장에 어머니의 부름에 응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했습니다 (50).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부모를 거부하거나 가족관계를 등한시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죽이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바리새인들이 고르반 사상으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에 대해 책망하셨습니다 (7:9-13, 20:12,17).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오열하는 어머니를 가장 신뢰했던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19:26-27). 예수님의 의도는 인륜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관계를 나타내는 현장의 기회를 통해 영적인 교훈을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9). 곧 하나님 나라 공동체 일원의 자격과 일체성을 말씀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5:5).

 

  예수님은 가족들이 찾아와 뵙기를 청한다는 말을 듣고 말하는 자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고 했고 누가는 이를 생략했습니다 (12:48, 3:33). 마태는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며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고 했고, 마가는 예수님이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고 했습니다 (12:49, 3:34). 이로 보건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제자들이 중심이 된 무리들을 가족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하는 12제자도 있었고 자신들의 소유로 사역을 섬기는 여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8:1-3).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혈통적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예수님을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로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통해 이룹니다 (2:28-29). 그러므로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는 한 권속인 것입니다 (2:19, 6:10).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태생과 혈통이 이스라엘인이 아니라도 믿음으로 예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본성과 신분과 행위가 어떠할지라도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연약하여 넘어질 때에라도 여전히 우리를 형제로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있던 자들을 향해 말씀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했고, 마가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했고, 누가는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12:50, 3:35, 8:21). 예수님의 가족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 곧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7:21, 6:29,39-40).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가르치는 말씀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신 명령을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시는 일에 온전히 헌신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예수님과 같은 목적과 같은 가치와 같은 정신과 같은 헌신을 하는 자입니다 (5:17, 4:24, 17:4).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그런 자들을 통해 세워지고 견고해지고 확장되는 것입니다.

 

<結言>

  당시 종교적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역을 방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을 오히려 자신이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임을 증명하고 선언하는데 역으로 활용하였습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의 방해는 예수님의 메시야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역할만 하고 말았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목적만 이루어 놓고 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