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마태복음15:1-39
<題目>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序言>
15장은 14장과 그 내용과 구성과 주제가 비슷합니다. 예수님의 자기계시와 활동이 점점 활발하게 이르고 그에 따라 핍박하려는 무리들이 점점 핍박을 가하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14장은 핍박의 기세를 다소 간접적으로 나타낸 반면 15장은 직접적이고도 노골적으로 나타냅니다. 내용의 구조는 장로 유전에 대한 논쟁(1-9절), 참된 정결에 대한 가르침(12-20절), 가나안 여인의 치유(21-28절), 칠병이어의 기적(29-39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장로 유전에 대한 논쟁 (1-9절)
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을 하실 때 예루살렘으로부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내려왔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공회에서 파견된 조사단으로서 전국적으로 영향을 미친 예수님의 활동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병 고침과 기적 행함과 가르침 등의 활동에 대해 조사하고 예수님을 모해할 구실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고 힐문했습니다 (1-2절). 장로들의 유전에는 떡을 먹을 때에 손을 씻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탈무드의 내용을 담고 있는 야다임(Yadaim)이라는 소책자에는 정결의식을 위한 물의 양까지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한 그릇의 물로 한쪽 손에 붓는다면 그의 손은 정결하고, 만일 한 그릇의 물을 두 손에 붓는다면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장로'(長老)는 율법에 능한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키고 '유전'(遺傳)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행위에 관한 법들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생활을 하면서 율법의 세칙을 필요로 했고 율법해석에 공적인 인정을 받은 랍비들은 율법해석을 통해 생활규범을 만들었고 그 규범들은 구전으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특히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율법연구와 율법을 구체적으로 행하려는 노력이 있게 되면서 율법에 언급되지 않은 율법적 생활규범을 더욱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이 고대의 전승 자료들을 집대성하여 생활규칙들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탈무드(Talmud)입니다. 탈무드는 입으로 전해 내려온 것을 정리한 것이므로 폅집자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 그 가운데 현재 바벨론 탈무드와 예루살렘 탈무드가 유명합니다. 탈무드는 내용상 율법의 세부규정을 담은 미쉬나(Mishnah)와 그 율법의 세부 규정을 해석한 게마라(Gemarah)가 있습니다. 그들이 생활의 전반에 걸쳐 율법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적용하려는 노력은 좋은 의도에서 시작되었을지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율법보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규범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율법의 정신과 목적은 무시된채 율법의 세부 규범과 율법 해석에 따라 정해진 규칙들을 행위로만 지키려 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곧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과 사랑은 버리고 외부적으로 율법적 규칙들을 지키므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하는 위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오히려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려다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다고 책망했습니다 (3절). 예로 출애굽기20:12, 21:17의 내용을 들고 있습니다. 그 율법(계명)에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고 부모를 훼방하는 자는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고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면 부모에게 드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4-6절). 곧 잘못된 유전으로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므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율법(계명)을 어긴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7:11에는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고르반'은 히브리어로서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후대에 오면서 하나님께 맹세한 것은 부모를 부양에 필요한 것이라 해도 절대 취하할 수 없다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심지어 부모의 부양에 사용해야 할 것을 자기가 취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럼으로서 유전으로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인륜의 첫째되는 계명을 어기고 (엡6:2), 또한 하나님께 범죄하게 된 것입니다. 곧 유전으로 하나님 말씀을 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6절).
예수님은 그들이 유전으로 하나님 말씀을 폐하는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29:13에서 예언한대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는 말씀대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8-9절). 유대인들은 사람의 계명인 전통적 유전을 생활규범으로 사용하니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처럼 하나 그 속마음은 하나님을 바로 섬길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과 정신을 떠나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는데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수단들을 자기 욕망을 채우는데 이용하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누구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 참된 정결에 대한 가르침 (10-20절)
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12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14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15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예루살렘 산헤드린공회에서 보냄 받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것은 장로들의 유전을 따르지 않는 것을 빌미삼아 예수님을 정죄할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장로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고 책망했습니다 (1-9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듣고 분노했습니다. 율법에 대해 예수님의 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는 데서 나온 행동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의 분노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마음이 상한 사실을 아뢴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고 했습니다 (13-14절). 이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가라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3:24-30, 37-43). 하나님이 심지않은 가라지와 같은 것들은 모두 마지막 때에 뽑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우지 않은 사람과 하나님 뜻에 맞지 않은 가르침을 가진 자들은 심판 때에 버림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보아도 알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바른 진리를 가르쳐 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영적 맹인입니다. 맹인이 인도하는 사람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길을 가다가 구덩이에 빠지게 되고 맹인이 또 다른 맹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됩니다. 영적 맹인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은 마지막 때에 지옥 불에 던져져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그들에 대해 그냥 두라고 한 것입니다. 사랑의 행동이 아니라 유기(遺棄)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비참한 결국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아직 유대적 전통의 의식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정죄하고 그들이 주장하는 장로의 유전을 비판하므로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라고 간하였고, 예수님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고 책망했습니다 (15-16절). 그리고는 앞에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논쟁했던 내용에 대해 결론적으로 말씀했습니다.
그 내용은 사람이 입으로 들어간 것이 더럽게 되는 것이 아니고 입에서 나오는 것 곧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씻지 않는 손으로 음식을 먹으므로 하나님 앞에 더럽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적질, 거짓 증거, 훼방 같은 죄성이 더럽게 한다고 했습니다 (17-20절). 예수님이 열거한 마음속의 부패한 성질은 대부분 계명과 관련된 단어들입니다. 마가복음7:21-23에서는 더 많은 단어들을 열거했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도 역시 계명들과 관련된 단어들로서 사람들이 율법의 세칙인 장로의 유전을 잘 지키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킨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속에는 악한 생각이 가득하므로 오히려 계명을 범한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 앞에 정결하기 위해 떡을 먹을 때 손을 씻는 데 열중하지만 마음속은 더러운 생각으로 가득하여 더욱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외부적으로 성경말씀을 작은 부분까지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외부적으로만 지키고 속에 있는 부패한 성품을 정결케 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정결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더러운 것이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오므로 자신을 더럽히고 다른 사람과 관계가 파괴되고 하나님 앞에 버림받게 됩니다 (약3:3-6).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예레미야17:9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지킬 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잠언4:23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강한 자입니다. 잠언16:32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처럼 날마다 자기와 더불어 싸우는 싸움을 해야 하며 날마다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히12:4, 고전15:31, 9:27). 마음속의 악한 생각과 싸워 이기려면 우리의 의지와 결심으로 만은 부족합니다. 성령님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갈라디아5:16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πνευματι περιπατειτε)는 말은 '성령님 안에서 행하라' '성령님 곁에서 행하라' '성령님 곁에서 살라' 등의 의미일 것입니다 (Walk in the Spirit -KJV, walk by the Spirit -NASB, live by the Spirit -NIV).
3. 가나안 여인의 치유 (21-28절)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께서 유대 지도자들의 핍박을 피해 이방 땅인 두로와 시돈 지방을 거쳐 데가볼리 지역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을 고치신 사건은 그러한 기간에 일으킨 사건입니다. 이전에도 이방 사람을 고치신 일들이 있었지만 (4:24,25, 8:5-13) 모두 유대 땅 내에서 일으킨 일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직접 이방 땅으로 가서 고치신 기록은 본 사건이 처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어가셨을 때 한 가나안 여인이 나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고 소리질렀습니다. 예수님은 한 말씀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안타까워서 예수님께 청하여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예수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또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모습을 보고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시고 소원대로 되라고 했습니다 그 시로 여인의 딸이 나았습니다. 그는 실로 믿음이 있는 자였습니다.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으로 부른 믿음, 자신이 주의 긍휼을 입어야 할 자인 줄 아는 믿음, 주께 간절히 간구하는 믿음,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문제를 해결받았습니다.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시돈 지역에 한 가나안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딸은 흉악한 귀신이 들려 치명적인 질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딸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딸의 병을 나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구약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고 예언된 구원자'라고 주장하면서 구약에서 '오실 구원자가 행하리라고 예언된 사역들'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죽을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생각했습니다. 그분이라면 딸을 고칠 수 있을 텐데... 그런데 마침 그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들어오셔서 어느 집에 와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인은 그 집으로 갔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제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여인은 큰소리를 질렀습니다. "주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제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려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모른체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빨리 어떤 조치를 취해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예수님 아까부터 저 여자가 뒤에서 소리지르고 있습니다. 그 여자를 빨리 돌려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 밖의 말씀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기 위해서 왔지 다른 사람들을 돌보러 온 것이 아니야~" 그 말을 들은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이 자기 청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다급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간청했습니다. "주님~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매몰차게 거절했습니다. "어떻게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던져 줄 수 있겠느냐~"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야 할 은혜를 어찌 이방인에게 줄 수 있겠느냐는 의미겠지요. 여자는 졸지에 개 취급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무시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딸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여기서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 주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개들도 주인의 자녀들이 먹고 흘린 떡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줄 은혜의 부스러기 은혜라도 좀 주십시오~" 예수님은 그의 간절한 믿음을 보고 대답했습니다. "이보시오~ 당신 믿음이 참으로 크네요~ 당신 소원대로 될 것입니다~ 이제 돌아가시오~ 당신의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습니다" 여인은 그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딸이 침상에 누워 있는데 귀신이 나가고 멀쩡한 정신으로 누워있는 것입니다. 병이 나은 것입니다. 여인은 자신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마15:21-28 막7:24-30).
문제 해결의 열쇠는 믿음이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종교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에서 제외된 완전한 이방인이었습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가나안 여자'라고 했고, 병행구절 마가복음7:26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 여호수아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가나안 족속 가운데 북쪽으로 쫓겨 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후손들이 수로보니게에 살았습니다. '수로보니게'(Συροφονισα)는 헬라어의 음역인데 영어로는 시로페니키안(Syrophenician)입니다. 시로페니키안은 시리아와 베니게의 합성어입니다. 시리아 지방에 속한 뵈니게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에 히브리어를 쓰지 않고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인, 수로보니게인, 헬라인 모두 맞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완전한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 언약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기적적인 은혜를 받게 되었을까요. 우선 인내를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 여자가 큰 소리를 지르니 더 이상 방해하지 못하도록 빨리 돌려보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는 유대인에게 은혜를 베풀러 온 것이지 이방인에게 은혜를 베풀러 온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녀같은 유대인에게 베풀 은혜를 개같은 이방인에게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인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수치심과 모멸감과 모욕감을 느낄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훼손된 자존심에 개의치 않고 계속 예수님께 은혜를 구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자신의 문제가 너무 절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모욕감보다는 자신의 딸이 병들어 죽게 되므로 인해서 느끼는 고통이 더 컸고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절박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절박한 상황에 있는 자라고 해서 누구나 계속 문제 해결을 위해 구하지는 않습니다. 문제 해결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면 누구나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희망을 가지고 계속 예수님께 구한 것은 예수님이 고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7:12-13에 보면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구원자를 보내주실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사11:1-10). 이사야61:1에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한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4:18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로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할 자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7:22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로서 맹인을 보게 하고 절름발이를 걷게 하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귀먹은 자를 듣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바로 그가 구약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리라 예언된 그 구원자인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 믿음이 예수님께 인정받았고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 구원자인 것을 이 이방 땅에서 다시 한 번 선포하기 위해 그 믿음을 가진 여인을 확인하고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절박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빚 문제나 생활고 문제일 수도 있고, 육체적인 질병 문제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불안 문제일 수도 있고, 영적인 죄 문제나 악령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긍휼과 은혜없이는 살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인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약속한 구원자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가 우리의 고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고 십자가에서 고통의 대상들의 권세를 깨트리셨고 현재에도 성령님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여 고통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참게 만들고 계속, 구하게 하고, 문제를 해결받게 하고, 소원대로 되게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문제를 직시해야 합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신의 상태를 절박하게 느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갔을 때 가나안(수로보니게) 여자 하나가 나아와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고 소리질렀습니다 (21-22절). 이 여자의 딸은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28절). 이 여인의 가정도 행복한 가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딸에게 심각한 질병이 찾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딸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딸의 죽음을 맞게 되리라는 인식이 들어오면서 견딜 수 없는 심각한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런 상황에서도 이 문제를 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문제에 대한 고통을 수용했습니다. 그 문제의 상황을 직시했습니다. 그 문제의 원인을 알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적극적인 노력을 했습니다. 누가복음18:1-8에 보면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교훈으로 원한있는 과부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그 과부는 원수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는 그 상황을 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체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에 대한 원한을 가졌습니다. 그 원한이 그 도시의 재판관이 불의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매일 부르짖게 하였고 재판관은 괴로워서라도 그 원한을 풀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 해결의 시발점입니다. 우리에게도 절박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물질적인 궁핍 문제일수도 있고 육체적인 질병 문제일수도 있고, 정신적인 죄성 문제일수도 있고, 영적인 악령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문제이든지 그 문제로 인한 상황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문제로 야기된 고통을 피하려 하면 안 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체념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둘째는 주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만이 해결 가능한 자인 줄 알았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의 병은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마지막 기대를 가졌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왕통을 통해 오신다는 예언과 그가 오시면 모든 죽음과 질병과 가난 등 모든 고난으로부터 자유케 하신다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전승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11:1-10, 61:1-3).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는 사역을 보고 그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라고 생각했습니다 (마12:23). 그런데 가나안 여인이 그 소문을 들었습니다 (막7:25). 그 여인은 그 소문을 믿었고 그 소문의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지막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에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인 것으로 믿고 그에게 최후의 소망을 가진 것입니다. 마태복음20:29-34에 보면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 두 맹인이 길에 앉았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그 소리를 듣고 머물러 서서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만져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된 예언대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고 그에게 소망을 둔 자가 받는 은혜입니다. 멧돼지는 도토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나오는 줄 압니다. 그래서 땅만 계속해서 팝니다. 그러다가 나무가 쓰러져 나무에 갈려 죽을 때도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만 해결하려는 자의 결국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왔음에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한 나병환자처럼 "주여 원하시면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백부장처럼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8:1-10).
셋째는 끝까지 간구해야 합니다. 가나안 여인은 계속 거절당해도 적극적으로 따라가며 간구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고 부르짖었습니다 (22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해 무시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가서 여자가 소리를 지르니 빨리 보내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냥 돌려보내든지 원하는 것을 주어서 보내든지 귀찮아서 빨리 쫓으려는 심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을 위해 오셨지 이방인(가나안인)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오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귓속말로 한 것인데 예수님은 그와 아무 상관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인은 그 말을 듣고도 절을 하면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하며 애원했습니다. 여기에서 '도우소서'라는 말은 보에데이(βοηθει)는 '달리다'(βοη)와 '부르짖음'(θει)의 합성어로서 절박한 요청을 의미합니다. 여인은 절을 연거푸 하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다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그 말도 자녀와 같은 유대인에게 주어야 할 것을 개와 같은 이방인에게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인은 그런 말을 듣고도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했습니다. 팔레스틴에서 아이들이 빵을 찢어 먹을 때 떨어진 부스러기를 개들이 먹곤 했는데 그와 같은 부스러기 은혜라도 달라는 절규입니다. 누가복음11:5-8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의 모본으로 '주기도문'을 알려 주신 다음 기도를 어떤 심정으로 해야 할지 알려주기 위해 이런 비유를 베풀었습니다. 사람이 있었는데 밤중에 친구가 여행 중에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친구 집에 가서 사정을 말하면서 떡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는 이미 식구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 친구는 친구의 강청하는 소리를 듣고 떡을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마치면서 "비록 벗 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소망을 가지고 기도한다고 해도 많은 방해 요소가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주님이 응답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앞서 따르는 자들이 무시를 합니다. 때론 우리가 신뢰하고 부르짖는 대상인 주님께서도 그 어떤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 것 같아 수치감과 모욕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부르짖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속히 응답하지 않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주권적 표현으로 바꾼다면 주께서 우리 속에 믿음을 더욱 일으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어떤 방해 세력이 있어도 응답되지 않는 것 같아도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가나안 여인은 결국 예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칭찬하시면서 "네 소원대로 되리라"하므로 딸의 병이 나았습니다 (28절). 병을 일으켰던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막7:29-30). 결국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마8:13, 9:22, 27-30).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입니다. 마태복음7:7-11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눅 11:9-13).
4. 칠병이어의 기적 (29-39절)
2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31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33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35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39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
예수님께서 두로에서 가나안 여인의 딸을 치유하시고 두로에서 나와 북쪽에 있는 시돈으로 가신 다음에 다시 데가볼리를 통과하여 갈릴리 호숫가의 한 산에 이르렀습니다 (막7:31). 이 곳은 아직 유대 땅이 아니라 이방 땅에 속합니다. 그곳에 나아온 큰 무리가 모였습니다. 여자와 어린 아이 외에 4,000명 가량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절뚝발이, 불구자, 맹인, 벙어리 등을 치유했습니다. 그 모습을 경험한 이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모인 무리가 사흘이나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이 여행 중에 먹을 음식을 가져오긴 했겠지만 음식이 바닥이 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돌아가다가 기진하여 쓰러질까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진 것을 묻고 떡 7개와 작은 물고기 2마리가 있다고 하자 그것으로 축사하여 4,000명 이상을 먹였습니다. 먹고 남은 것을 거두니 7광주리에 찼습니다. 우리는 이 이적은 칠병이어(七餠二魚)의 이적이라고 합니다.
14:13-21에 나온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이적과 본문에 나오는 칠병이어(七餠二魚)의 이적은 거의 흡사한 내용입니다. 공통점이 많지만 분명히 다른 사건입니다. 여러 차이점 중에 가장 특이한 차이점은 오병이어 이적은 유대 땅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일으킨 이적이지만 칠병이어 이적은 이방 땅에서 이방인을 대상으로 일으킨 이적이라는 겁니다. 이방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사역을 경험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31절). 주께서 그들을 귀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오병이어 이적은 무리들의 필요를 제자들의 요구에 의해 일으킨 이적이지만 칠병이어 이적은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이적입니다. 사흘 동안이나 함께 있은 연고로 그들을 돌려보낼 때에 지쳐 쓰러질까 염려하여 먹여서 보내려고 일으킨 이적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세심하게 배려한 모습입니다 (32절). 실제로 국가적 축제에 예루살렘으로 모일 때 상당수의 사람들이 지쳐 기진하거나 객사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방인들의 각종 질병을 고치고 칠병이어의 이적으로 4,000명 이상을 먹이신 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신 것입니다 (사9:1-2, 35:5-6). 그리고 자신이 하늘로서 온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서 참 생명과 부요를 주는 자임을 계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6:48,35). 부가적으로 자기 백성들의 어려움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필요를 채우시며 넘치게 하시는 분임을 교훈해 주기도 합니다. 후히 되어 흔들어 넘치도록 주시는 분입니다 (눅6:38). 능히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해주시는 분입니다 (엡3:20).
<結言>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의 핍박이 고조되어가므로 그들을 피해 이방 땅으로 나가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아직 붙잡혀야 할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방까지 확대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이방 땅에서 자기를 계시하므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역사가 일어난 것을 보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