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経> 마태복음16:1-39
<題目> 메시아의 자기 공개
<序言>
16장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self-revelation)를 공개적으로 하는 결정적 전환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전까지는 자신이 구약성경에 약속된 다윗 왕권의 계승자로서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 됨을 은익하거나 암시적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내용구조는 표적에 관한 논쟁(1-4절),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5-12절), 베드로의 신앙고백(13-20절), 수난 예고와 베드로 질책(21-23절), 제자들에 대한 각오 촉구(24-26절), 재림 예고(27-28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표적에 관한 논쟁 (1-4절)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1절).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 체계를 고집한 채 예수님을 음해하려는 저의를 가지고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지상에서 연출되는 각종 이적들은 사탄과 그 수하에 있는 자들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오직 하늘로서 오는 이적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를테면 모세 때의 만나 사건 (출16장, 요6:32), 여호수아 때의 해를 멈춘 사건 (수10:12-14), 엘리야 때의 갈멜산 사건 (왕상18:30-40) 같은 초자연적인 하늘의 기사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곧 그들이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병 고침 등의 표적 행하신 것으로는 하나님이 행하신 것으로 인정할 수 없으니 하늘의 특별한 표적을 보여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책망했습니다 (2-3절). 당시 사람들은 하늘의 상태를 보고 날씨를 추측했습니다.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다음 날 아침이 맑고 아침에 하늘이 붉으면 다음날 아침이 폭풍우 치는 궂은 날씨가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연의 제 현상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시대적인 비밀한 뜻을 여러 표적(signs)들을 통해 나타내 보이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긴박한 메세지 선포나 (막:15) 유대 전반에 걸친 메시야 도래의 기대감 고조나 (눅2:26, 38) 예수님이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예언을 이루는 표적들을 행하신 것들은 (12:8, 32, 13:37, 24:30, 눅17:22-35) 당시 하나님의 시대적 표적을 보이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시고 그들을 떠났습니다. 악하고 음란하다는 말은 개인적 성향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적하는 당시 사람들에 대한 마음과 행동을 반복적으로 책망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자체가 잘못이라는 의미보다는 표적을 보여주어도 하나님의 의도대로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 표적을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을 책망한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 보일 것이 없다는 말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3일 동안 있다가 나온 것 같이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에 죽어서 3일 만에 부활할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하늘로서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 곧 구약성경에 예언된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메시야인 가장 확실한 표적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죽으신 사건과 의로 말미암아 3일 만에 다시 살아난 것이 구원자인 확실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표적의 내용은 질문하는 자들에 대해 표적을 보여 준 것도 아니고 안 보여 준 것도 아닙니다. 이 표적의 내용은 미래에 속한 것이므로 현상적으로는 보여주지 않은 것이고 내용적으로는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현상적 표적을 보이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악한 목적을 알고 계시므로 그들의 비신앙적인 욕구를 채워주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 형태가 예수께서 그리스도인 것을 아는 진정한 많은 표적들을 경험하고도 현상적인 표적들만 구하는 모순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2.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 (5-12절)
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참된 표적이 무엇인지 말씀하시고 제자들과 바다 건너편으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듣고 서로 의논하여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고 오병이어(五餠二魚)로 5,000명 이상을 먹이고도 12바구니 남은 것과 칠병이어(七餠二魚)로 4,000명 이상을 먹이고도 7광주리나 남음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책망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떡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임을 이야기하자 제자들이 그때에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5-12절). 제자들의 깨닫지 못함과 믿음 없음이 드러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가진 그릇된 교훈이 누룩처럼 온 덩이를 부패하게 할 교훈이니 조심해야한다는 의미로 누룩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수중에 배 안에 있는 오래된 떡 한 덩이 밖에 없었으므로 떡을 가져오지 않은 것에 대한 질책으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령한 교훈을 하였는데 제자들은 현상적인 문제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이적을 일으킨 사건을 경험하고도 아직까지 떡을 가져오지 못한 것으로 근심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깨닫기 위해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고 믿음을 가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히11:6).
한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지시키고 싶은 부분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누룩'은 음식에 넣어 음식을 부풀게 하는 데 사용하는 재료로서 성경은 자주 적은 누룩이 온 가루를 발효시키는 성격이 있다는 것을 활용하여 악한 전염성을 가진 교훈에 대한 비유로 사용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세칙까지 만들어 지키는 자들이며 장로들의 유전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이며 율법적 행위로 의로워진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율법주의이며 전통주의이며 의식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사두개인'은 모세오경 외에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부활과 영생과 사후 세계와 귀신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현실주의, 이성주의, 자유주의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22:18-19에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의미로 본다면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더하는 자들이고 사두개인들은 제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율법주의와 세대주의와 근본주의 교훈을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자유주의와 이성주의와 합리주의 교훈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라고 말하지만 한쪽으로 치우친 자들입니다.
3. 베드로의 신앙고백 (13-20절)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13절). 예수님은 인자인데 사람들은 어떻게 말하더냐는 질문입니다. '인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메시야적 신분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인자'(人子)는 직역하면 '그 사람의 아들'(τον υιον του ανθρωου; the Son of man)입니다. '그 사람의 아들'은 구약성경에서 오시리라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에 대한 관용적 표현입니다 (창28:10-14, 삼하7:12-14, 겔1:26-28, 단7:13-14). 구원자가 창세기28:10-14의 야곱의 사닥다리 꿈에서는 '사람의 형상을 가진 이'로 나타나고, 사무엘하7:12-14의 나단 선지자의 다윗에 관한 신탁에서는 '사람의 아들'로 나타나고, 에스겔1:26-28의 에스겔이 본 전차(메르카바) 환상에서 '사람의 모양을 한 형상'으로 나타나고, 다니엘7:13-14의 다니엘이 본 네 짐승 환상에서 '인자 같은 이'로 나타난다. '인자 같은 이'에 해당하는 '케바르 에나쉬'(כבר אנש)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one like the Son of man)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아들'을 오실 구원자에 대한 관용적 표현으로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자신이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인자'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그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임을 나타냈습니다. 뒤에 베드로의 대답은 그에 대한 응답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를 구약에서 약속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 알지 못하고 과거에 훌륭했던 선지자 중 한 사람이 살아난 자라고만 생각한 것입니다 (눅9:19).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사람들이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혹은 선지자 중 하나라고 말한다고 했습니다 (14절). 제자들의 대답은 헤롯왕이 들었던 소문과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막6:14-16, 눅9:7-8). 사람들은 예수님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으나 특별한 선지자 이상의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호수를 잔잔하게 하고 오병이어로 5,000명 이상을 먹이신 기적을 행한 것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약속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임을 계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적을 보고 들으면서도 그 기적들을 통해 나타낸 표적성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식보다 제자들의 인식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15절). 그 때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16절). 베드로에게는 시몬이라는 이름도 있었습니다. '시몬'은 히브리어의 본명이고 '게바'는 아람어식 이름이고 '베드로'는 헬라식 이름입니다. 그의 대답은 예수님을 흡족하게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표식으로 사용하는 물고기 모양 안에 쓰여 있는 '이키두스'(ΙΧΘΥΣ)는 이 고백을 정리한 이니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ο υιος του Θεου)은 하나님이 보낸 자이며 하나님을 닮은 자이며 하나님과 동등 된 자로서 본질상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Χριστος)는 히브리어 ‘메시야’(משיח)에 해당하는 말로서 문자적으로는 ‘기름부음 받은 자’이지만 의미상으로는 하나님이 보내주시기로 약속한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는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직접 선택하여 사명을 감당하게 했던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점차 하나님이 미래에 보내주실 구원자라는 의미의 관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그리스도라고 한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약속한 구원자라는 의미이며 부가적으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적인 사명을 가진 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과 구원자인 것을 믿는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인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창1:26, 잠8:30, 요1:1-3, 골1:15-17, 빌2:6, 요8:58, 17:5 등). 우리는 일신론(一神論) 가운데 하나인 양자론(養子論, Adoptionism)을 인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그가 구원자인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창3:15, 15:4-5, 28:12, 민24:17, 삼하7:12-13, 사11:1, 겔1:26, 단7:13, 벧전2:24, 행4:12 등).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합당한 고백을 한 베드로를 칭찬해주었습니다.
①베드로에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17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했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에서 ‘바요나’는 히브리어 ‘바르이오나’(בר יונה)를 음역한 헬라어 ‘바르이오나’(Βαριωνα)로서, ‘바르’(Βαρ)는 ‘아들’이라는 뜻이며 ‘이오나’(ιωνα)는 히브리어 ‘요하난’(יוחנן)의 축소형입니다. 곧 ‘바요나’는 ‘요하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시몬’(Σιμων)은 베드로의 본명입니다. ‘복’(μακαριος)은 ‘복’ ‘행복’의 의미입니다. 그가 복이 있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 알게 한 이가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혈육’에 해당하는 ‘싸륵스 카이 아히마’(σαρξ και αιμα)는 문자적으로 ‘육과 피’입니다. ‘혈육’은 유대인들이 죽어야할 존재로서의 인간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한 표현입니다. 그런 점에서 ‘혈육’은 자연인으로서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의 본성적인 지혜와 지식과 재능 등을 의미합니다 (고전15:50, 갈1:16, 엡6:12, 히2:14). 베드로가 예수님의 본질적인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베드로가 본성적으로 가진 지혜나 지식이나 재능이나 노력으로 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계시하여 알게 된 것이고 하나님이 믿게 하여 믿게 된 것입니다. 곧 베드로의 고백은 인간 스스로의 지혜나 지식이나 재능이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계시의 은혜로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타락한 죄인으로서는 스스로 알 수 없는 복음 진리를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고 고백하게 되었으므로 복을 받은 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인식과 믿음과 고백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며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②베드로의 이름을 새로 부여해 주었습니다.
18절에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이름은 원래 ‘시몬’이었는데 이젠 ‘베드로’라는 것입니다. ‘베드로’(Πετρος)는 ‘돌’ ‘바위’ ‘반석’ 등의 뜻입니다. 아람어의 ‘게바’(κηφας)에 해당하는 뜻입니다 (요1:42, 고전15:5, 갈1:18). 예수님은 이 반석 위에 예수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는 예수님이 교회의 주관자이며 예수님이 교회를 건설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소유이며 예수님이 세우십니다. ‘교회’에 해당하는 ‘에클레시아’(εκκλησια)는 문자적으로 ‘불러냄’이라는 뜻인데 세상에서 부름받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곧 교회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이 일정한 곳에 모여 예배하며 교제하며 봉사하는 유기적인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교회는 하나님의 창세전부터 계획한 것으로서 (엡1:3-6) 신약시대의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행2:2-4, 4:32). 구약시대의 언약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신약시대에 시작될 교회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행7:38). 예수님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했습니다. 이 의미는 ‘이 반석’(ταυτη τη πετρα)을 무엇으로 보느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첫째, 베드로로 볼 경우 베드로를 통해 교회를 세워 나간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는 이후에 베드로가 초대교회를 이루어 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행1-12장). 예수님은 어느 때나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 교회를 이루어 갑니다 (엡2:20). 둘째, 베드로가 대답한 신앙고백으로 볼 경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는 진리(복음) 위에 교회를 세워 나간다는 의미가 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음부’는 히브리어 ‘스올’(שאול)과 같은 의미를 가진 ‘하데스’(αδης)인데 ‘하데스’는 무덤, 죽음, 지옥 등으로 해석됩니다. ‘권세’는 ‘퓔레’(πυλη)로서 입구, 문, 대문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음부의 권세’는 기본적으로 ‘죽음의 문’이라 할 수 있고 그것은 멸망의 세력에 대한 표현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탄과 죄와 죽음의 모든 세력과 힘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첫째, 반석으로 볼 경우 베드로를 이기지 못하거나 베드로가 고백한 진리(복음)을 이기지 못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통해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해 베드로를 지켜주기 때문에 악의 세력이나 힘이 넘어뜨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일5:18). 또한 진리(복음)는 본질적으로 어떤 세력이나 힘에 의해서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로 볼 경우 교회를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예수님은 사탄과 죄와 죽음의 세력을 이겼습니다. 그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의 주인시고 교회를 통치합니다. 그 예수님의 교회는 악의 세력과 힘이 결코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교회는 역사 이래로 수많은 박해 속에서도 계속 성장했고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것입니다.
③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준다고 했습니다.
19절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천국 열쇠’는 나라 왕이 국고 청지기에게 준 전권에 비유한 표현입니다. ‘천국’(της βασιλειας των ουρανων)은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열쇠’는 권세와 권위와 권한과 특권을 가리킵니다. 곧 천국 열쇠를 준다는 말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세워 나가는 데에 필요한 권세와 권위와 권한과 특권을 위임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베드로와 같은 사도들을 비롯하여 하나님 나라인 교회의 모든 일꾼들에게 그 같은 권위를 부여한다는 의미로 확대 해석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도적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세워 나가기 위해 세운 제도에도 그 권위를 부여한다는 의미까지 포함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권위를 위해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예수님이 세운 교회 일꾼들이 매면 예수님이 매이게 하고 그들이 풀면 예수님도 풀어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예수님이 세운 교회 일꾼들이 교회를 위해 권위를 바로 사용하여 치리하거나 해벌하면 예수님께서도 비준하여 그대로 시행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 특권은 로마 카톨릭이 주장하는 것처럼 교황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사역을 위해 택함과 부름을 받은 모든 사역자들에게 주어진 권한입니다 (계2~3장).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님께 소명을 받는 일꾼들은 예수님이 주신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담대히 사역을 해나가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주신 권세가 치리를 시행하게 한다는 점을 두렵게 여겨 신중히 행해야 하며 또한 저주보다는 축복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본 내용을 더 확대하면 복음전도사역의 주역인 모든 성도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벧전2:9). 그런 측면에서는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나가는 성도는 예수님이 지켜주실 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권세를 주셨음을 믿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했습니다 (20절). 예수님은 자신이 핍박을 받아 대속의 죽음을 죽을 때를 알고 있습니다. 그 전에 해야 할 사역들이 있기 때문에 그 사역을 다 하고 나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려 합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을 구약성경에 약속된 그리스도인 것으로 소문이 나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서기관(율법사)들을 파견한 예루살렘 공회로부터 바로 체포될 것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도록 엄히 경고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베드로의 대답에 대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씀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실을 알리지 않도록 경계한 것은 그 대답이 정확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4. 수난 예고와 베드로 질책 (21-23절)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제자들에게 수난받으실 것에 대해 예고하셨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인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21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가르친 것입니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율법사)들’은 당시 유대교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공회의 구성원을 말합니다. '산헤드린'(סנדרין, συνεδριον)은 '함께'와 '좌석'의 합성어입니다. 공회원은 의장 1명(대제사장1)과 의원 70명(제사장24, 서기관22, 장로24)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공회는 당시 중요 사안에 대한 회의의 의결을 하는 곳으로서 주로 율법 해석 문제를 다루고 율법에 의한 재판을 주관하고 성전에 대한 운영과 치안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행정권은 물론 사법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장로들'은 일반 평민출신으로서 회원이 된 사람들을 말하고, '대제사장들'은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와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를 말하고,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율법학자(teachers of the law)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최고의 법정의결기관인 산헤드린(Sanhedrin) 공회의 계획과 조사와 판결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실제로 로마 총독 빌라도의 사형 선고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결국 모든 것을 산헤드린 공회에서 모의하고 계략을 꾸민 것입니다. 예수님은 버림을 받고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고 제 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인자’로서 행해야 할 대속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1:23). 그래서 자기 백성들의 죄 값을 담당하기 위해 죽으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백성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사53:5, 벧전2:24).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구원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간하며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고 했습니다 (22절). 마가복음8:32에는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고 했다고 했습니다. '하시니'에 해당하는 '엘랄레이'(ελαλει)는 미완료형입니다. 예수님이 반드시 수난 당해야 할 것에 대해 계속 반복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로 고백한 제자이지만 (16절)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말씀을 듣고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로 한 말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이 구원자인 것을 믿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예수님께서 고난의 종으로 오신 것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사53장).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뜻을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걱정해서 한 말이지만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생각하지 못하고 인간의 감정에 치우쳐 사탄이 원하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한 것입니다. '항변하매'에 해당하는 기본형 '에피티마오'(επιτιμαω)는 '비난하다' '책망하다' '훈계하다' '꾸짖다' '따지다' '금하다' 등의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거듭되는 수난 예고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께 다가가 붙들고 옆으로 가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험악하게 몰아붙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런 행동을 보인 것은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안위를 걱정해서일 수 있습니다. 둘째, 메시야관에 대한 오해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인 것을 믿고 정확하게 고백했지만 (16절). 그가 생각하는 구원자는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메세야관처럼 정치적인 메시야였습니다. 그것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21-24, 막9:34, 10:35-37).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번영시킬 메시야로 생각한 것입니다. 고난을 받다가 죽는 약한 메시야는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런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붙잡혀 죽어서는 안 된다고 항변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항변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단호했습니다. 23에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8:33에는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잘못을 베드로에게만 꾸짖은 것이 아니라 제자들 전체를 향해 꾸짖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안위를 생각해서 항변했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해서 항변했든지 베드로의 생각과 항변은 사탄이 좋아하는 생각과 행동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생각과 행동은 사탄에게 이용된 도구였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메시야관을 정확히 바로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방해하려 합니다. 베드로가 거기에 이용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의 도구로 이용당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꾸짖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탄이 원하는 말을 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부여한 대속 사역을 의미하고, '사람의 일'은 사람의 안위와 성공에 관한 일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가 대속의 죽음을 당해야 할 것을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사52:13~53:12).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위해서 한 말이겠지만 시각이 하나님의 뜻에 입각한 시각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에 입각한 시각을 가졌기 때문에 결국 사탄이 좋아하는 말을 하고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구원사적 뜻이 이루어시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6:10에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고 했습니다.
5. 제자들에 대한 각오 촉구 (24-26절)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24절). 예수님은 앞서 핍박과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어야 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뿐 아니라 제자들도 핍박과 고난을 받게 될 것을 예상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자신이 가르친 삶을 순종하는 참 제자가 되기 위한 자세와 각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제자도를 가르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신 길을 가려는 것 곧 예수님이 사신 삶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고 정하고 행하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구원자로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어야 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아 죽는 것은 그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하나님이 보낸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26:39,42, 눅22:22, 벧전2:22-24). 예수님의 제자된 길을 가려면 그의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를 따르려면 2가지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첫째,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정이란 하나님 뜻을 따르기 위해 자기 욕망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를 위하는 삶과 자기중심의 삶을 포기하는 것 곧 자기 목적, 목표, 소원, 주장, 고집, 자랑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옛 사람'인 육체의 소욕 곧 부패한 죄성을 복종시켜야 합니다 (엡4:22, 갈5:7, 요일2:16). 일평생 원수가 자기입니다. 자기를 쳐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죽어져야 합니다. 자기는 무(無)요 공(空)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와 세상은 간 곳이 없어져야 합니다. 주를 따라가지 못한 이유는 아직도 자기가 살아서 자기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9:27, 갈5:24, 민12:3, 마11:29).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0:38에도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당시 로마의 사형집행 방식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당시 십자가형은 자신이 형틀을 지고 형장까지 가야 했으며 그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는 형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가장 처절한 고난과 죽음의 상징입니다.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살았던 당시 유대인들은 당시 독립운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의미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곧 고난의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인 대속 사역을 이루기 위해 필연적으로 맞는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기 십자가란 자기에게 오는 고난을 말하는데 인생으로서 누구나 경험하는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예수 믿는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 계명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감당하다가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요18:11, 마26:39, 빌2:8).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고 하면 당연히 고난이 따릅니다 (딤후3:12).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맡긴 구속사적 사명을 감당하려 하면 필연적으로 고난과 죽음이 올 것인데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고난의 죽음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제자된 우리도 하나님 뜻대로 살려하면 사탄이 대적하고 부패한 죄성이 대항하고 세상 구조와 원리와 가치가 거스리기 때문에 고난이 따르게 됩니다. 그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고난을 감수하면서라도 그 길을 선택하여 가는 삶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1:7, 벧전4:13, 빌3:10). 사람들을 주를 따르므로 영광을 얻기를 원하나 고난은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20:21-23). 그러나 주님을 따르기 위해 필연적으로 오는 고난을 감당할 수 있어야 주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날마다 주님을 따르려는 각오와 주님을 따를 때 고난이 오더라도 견뎌야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일시적이 아니라 지속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고전15:31, 엡4:13).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25절). 마가복음8:35에는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예수님과 복음을 저버리면 영원한 가치를 잃게 되고,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육체의 목숨을 아끼지 않으면 영원한 가치를 얻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망과 영욕과 평안과 성공을 위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한 고난의 길을 가지 않으면 부활의 영광과 내세의 상을 잃게 되고,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고난의 길을 가는 자는 부활의 영광과 내세의 상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26절, 마16:17-28, 막8:38). 그러므로 주의 제자가 되려면 세상 것보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눅14:25-27). 과거에 공산당은 3가지 각오를 했다고 합니다. 굶어죽을 각오, 맞아죽을 각오, 얼어죽을 각오를 했다고 합니다. 제자가 넘어야 할 3가지 선은 물질선과 인정선과 생명선입니다. 제자는 순교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며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고 했습니다 (26절, 막8:36-37). 온 천하 곧 세상의 모든 것을 얻는다 해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과도 바꾸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온 천하’는 상대적이고도 일시적인 가치를 의미하고 ‘제 목숨’은 절대적이고도 영원한 가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있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와 목적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믿는 믿음을 지키고 계명의 말씀을 지키고 맡은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오는 필연적인 고난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내세의 영광과 칭찬과 상급을 얻는 것입니다 (빌1:20-21, 행20:24, 빌3:10-11, 고전9:25, 딤후4:8). 그러므로 재물과 건강과 성공과 권력과 명예 등을 얻기 위해 예수님 따르는 길을 포기하므로 영이 사는 길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일과 내세의 상급을 얻어 누리는 영원한 가치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6. 재림 예고 (27-28절)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앞에서 십자가 고난을 당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제자들에게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참된 제자의 길을 걷는 자에게 따르는 수고와 고난에 대해 상으로 갚아주실 것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겠으나 하나님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왕권을 가지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는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27-28절).
누구든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면 예수님도 예수님과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26절). 마가복음8:38에는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했습니다 (눅9:26). 세상에서 예수님과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예수님도 재림하실 때에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세상에서 자기의 물질이나 건강이나 성공이나 영광이나 목숨을 위해 예수 믿는 믿음을 버리거나 계명의 말씀을 버리거나 복음 전도사역을 버리는 자를 말합니다. 그런 자는 예수님께서도 재림하실 때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그를 부끄러워 한다는 것입니다. 10:32-33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고 했습니다 (눅12:8-9).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복음을 부인하면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부인하고, 이 세상에서 복음을 시인하면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시인한다는 것입니다 (계3:5). 예수님이 부인하면 하나님의 질책과 책망이 얼마나 클 것이며 예수님이 시인하면 하나님의 위로와 칭찬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영원히 예수님께 부인당해 하나님께 수치를 당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잃은 것이고, 영원히 예수님께 인정받아 하나님께 상을 얻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시면 다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5:10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22:12에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사명을 감당하기 힘들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가야 합니다. 로마서8:18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7:17에는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20:4에는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에 대한 믿음과 계명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고난이 올 때에 주께서 주실 위로와 상급과 영광을 생각하고 인내로 견디는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계13:10, 14:12, 롬8:17).
28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9:1에는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눅9:27). 앞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겠으나 하나님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왕권을 가지고 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는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상황을 죽기 전에 볼 제자들도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왕권을 가지고 오시는 때는 일차적으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오순절 성령을 통해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행사하실 것을 가리킵니다. 성령님이 임한 후 제자들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므로 로마 전역에까지 복음화되고 이방인에게까지 그리스도의 권세가 지배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는 말씀은 그 때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를 암시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고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할 것입니다.
<結言>
주님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기 위해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야했고 주를 따르는 주의 참 제자는 마땅히 고난과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현세 기복주의로만 기울어지는 이때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주에 대한 믿음과 계명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고난이 올 때에 주께서 주실 위로와 상급과 영광을 생각하고 인내로 견디는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계13:10, 14:12, 롬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