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経> 마태복음17:1-27

<題目> 예수의 영화로운 변형


<序言>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워 옴에 따라 자신을 고난받는 메시야로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본장에서는 변화산 변형을 통해 자기의 수난이 패배가 아니라 부활하므로 궁극적 승리자가 될 것임을 계시하였습니다. 그것은 율법서와 예언서 곧 모든 구약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바임을 나타내게 됩니다. 내용구조는 변화산에서의 변모(1-13), 귀신 들린 아이 치유(14-21), 두 번째 수난 예고(22-23), 성전세 납부(24-27)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변화산에서의 변모 (1-13)

 

  앞에서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임을 베드로를 통해 증거하셨고 그 구원자로서 대속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본 단락에서는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모한 모습을 친히 보이시므로 현시적으로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변화산의 변모 기사는 본서 마태복음17:1-13뿐 아니라 마가복음9:2-13과 누가복음9:28-36과 베드로후서1:17-18에도 나와 있습니다.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예수님께서 제자들 곧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 수난 당해야 할 것과 제자들도 고난당할 각오를 해야 할 것에게 대해 말씀하시고난 후 6일 후에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6일 후에 산에 올라갔다고 했는데 (1, 9:2), 누가는 8일쯤 되어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9:28).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후 8일쯤 되어 산에 올라가셨는데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날과 산에서 변화한 날을 제하고 누가는 그 날들을 합쳐서 보고한 것 같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3제자를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는데, 예수님이 3제자를 변형될 모습에 대한 증인으로 삼기 위해 데리고 갔습니다 (17:6, 고후13:1). 그들은 제자들 중에서 핵심적 인물로서 (10:2)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3제자만 데리고 갔습니다 (8:51, 5:37, 26:37, 14:33). 예수님이 3제자를 데리고 올라간 산이 어느 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대화 내용이 본서16:13-28과 마가복음8:27-38과 누가복음9:18-27에 나오는데 마태와 마가는 그곳이 가이사랴의 빌립보라는 지명임을 언급했습니다. 그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 해발 2,850m인 헤르몬(Hermon) 산으로 추측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Dalman, Carr, Cranfield, Johnson). 그럼에도 그 산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으므로 예수님이 변화된 곳이라고 해서 변화산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누가는 3제자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9:28). 예수님은 기도하시기 위해 자주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화했습니다.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2). 마가복음9:2-3에는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고 했습니다 (9:29). 예수님의 얼굴이 변형되고 옷이 희어지고 광채가 났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천상적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수난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게 되지만 다시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시고 다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재림하실 것을 예표적으로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제자들이 보니 변형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하고 계셨습니다 (3). 예수님이 변형되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율법서를 기록한 자이며 엘리야는 예언서를 기록한 자로서 그들은 오실 구원자에 대해 예언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대화를 하신 것은 자신이 바로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예언한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라는 사실, 곧 구약성경들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임을 명백히 계시하는 장면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광중에 나타난 그들에게 자신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했습니다 (9:31). 그들과 예수님과의 대화는 누가만 보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가 예언한 구원자로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예루살렘에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고 했습니다 (4). 누가는 3제자가 깊이 졸다가 예수님이 변형하여 대화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와 같은 말을 하고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했습니다 (9:32-33).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자신이 구원자로서 예루살렘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어야 할 것을 생각하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런 점을 생각지 못하고 피곤하여 골아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예수님의 변형하여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상황에서 화들짝 깬 것입니다. 그 상황을 접한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고 한 것입니다. 자신이 한 말이 무슨 말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한 말이었습니다. 마가복음9:6에는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고 했습니다. '몹시 무서워'에 해당하는 'ž포보이'(εκφοβοι)'놀라는' '두려운' '무서운' 등의 뜻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제 정신을 잃고 놀라는 모습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졸다가 깨어서 특이한 광경을 보고는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엉겁결에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수난과 죽음을 당할 것, 자기들도 수난을 당해야 할 것에 대한 말씀을 들어서 걱정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영광스런 모습과 이상적인 하나님 나라 임재를 목격하니 고난을 당하지 않고 바로 영광에 참여한다는 것이 마냥 좋아서 그런 말을 한 것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일시적으로 나타난 황홀한 상황이 지속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자기계시를 위한 일시적 상황임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여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한 바른 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을 모세와 엘리야와 동등한 분으로 파악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라)면 구약성경에서 구원자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온다고 한 예언대로 엘리야가 와야 하는데 자신들이 생각할 땐 아직 죽은 엘리야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하는데 대해 의심했습니다 (9-13). 제자들도 예수께서 구원자로 고백했지만 무의식 가운데는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듯이 예수님을 모세와 엘리야같은 선지자 정도로 생각하는 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둘째, 구속사역을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곳에서 있어야만 하는 분이 아니라 구속사역을 행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가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수난을 당해야 할 것을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의 모든 선지자들이 예언한 오실 구원자로 생각하면서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고난의 종으로서 그 사역을 행하실 것에 대해 이해가 부족했었던 것 같습니다. 셋째, 자신들의 사역을 잊었습니다. 산 아래에는 고통과 갈등으로 부르짖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역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고 약한 자를 온전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산 아래는 그런 대상들이 고통하고 갈등하고 있는데 그 사명을 망각한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가 은혜받은 것으로 만족하고 사역을 위해 헌신하지 않으려는 의식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5절에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고 했습니다 (5).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 말을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모세와 엘리야를 덮었고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제자들은 무서워했습니다. 그때 구름 가운데서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9:34-35).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입니다 (16:10,16, 19:9, 24:15-18). 구름 속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임을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그를 순종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임을 계시하고, 그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광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실 것을 계시하려는 것이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음성이 발하는 현상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심히 두려워 하니 예수님이 그들에게 손을 대며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고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6-8).

 

  변화산 사건은 죽음 후 부활과 재림에 대한 현시입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화하기 전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16:21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고 했고, 16:27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여 죄와 죽음과 내세 형벌에서 구원하기 위해 수난을 받아 십자가에 죽게 될 것을 가르치고, 죽은 후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 자시 재림하게 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곧 수난과 죽음에 대해, 부활과 재림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실제로 보여주기 위해 변화산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곧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화된 광경을 보여 주신 것은 예수님이 죽으신 후 부활하여 재림하실 것에 대한 현시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현시의 광경에서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산을 내려가지 말고 아예 산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살자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베드로에게 예수님께 고난의 죽음을 당하지 않고 부활의 영광과 재림의 영광만 있으면 좋겠다는 심리가 작용한 것입니다. 변화산에 올라가기 전에 예수님이 고난을 받아 죽어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16:22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고 했습니다 (8:32). 변화산에서 내려올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마태복10절에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하나이까고 했습니다 (9:11). 율법사들이 말하기를 구원자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말라기4:5-6"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고 한 말씀을 근거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 전에 세례 요한을 보내주시겠다는 예언입니다. 제자들이 그 질문을 한 의도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이해가 안가서 돌려서 질문을 한 것입니다. 구원자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백성들의 마음을 돌리겠다고 했는데 왜 백성들이 구원자를 핍박하여 죽이냐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이 구원자이면 왜 고난을 받아 죽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이 고난의 죽음 없이 바로 부활과 재림의 영광을 얻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부활의 영광만 원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고난의 죽음을 맞지 않고 바로 부활과 재림의 영광을 얻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진 것은 예수님에 대한 마음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마음도 작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화하시기 직전에 자신이 고난받아 죽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부활하실 것과 재림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도 16:24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했고 (9:23), 누가복음9:26에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했습니다. 제자들도 고난을 당해야 하고 그래야 주님 오실 때 영광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이 부활과 재림의 현시를 경험하면서 그곳에 집을 짓고 살자고 한 것은, 예수님이 고난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 아니라 자신도 고난을 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고난을 받아야 하고 제자들도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려면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광을 얻기만 원하고 고난받기는 싫어합니다. 그러나 고난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항상 고난이 따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참으면 유익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2:19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고 했습니다. 하지만 선을 행하므로 고난을 받으면서 참으면 더욱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2:20“~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려하면 고난이 따릅니다. 디모데후서3:12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믿음을 지키고 계명의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이 맡긴 사명을 감당하려 하면 고난이 따릅니다. 사탄이 대적하고 부패한 죄성이 대항하고 세상 구조와 원리와 가치가 거스리기 때문에 고난이 따르게 됩니다. 그 고난을 참을 때 영광도 큽니다. 베드로전서4:13"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고, 로마서8: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7:17에는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고 했습니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9). 누가는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아무에게도 이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9:36). 예수님이 지금까지 기적들을 일으킨 다음에 마다 말씀해왔듯이 아직 수난 당해야 할 때가 아니므로 자신이 구원자인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했을 것입니다. 부활 후에 증거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17:6, 고후13:1). 그래서 제자들은 그 사건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사건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은 산에서 내려올 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마태복음17:9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9:9). 그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마가복음9:10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산상변화 사건에 대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침묵하라는 명을 받고는 그 말씀을 마음에 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해 서로 이상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믿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10, 9:11). '서기관'(γραμματευς)'기록자'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엔 랍비들 밑에서 연구기간을 거친 후 안수를 받은 자들로서,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율법교사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서기관들이 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하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질문하지 못하고 대신 엘리야와 관계되는 종말론에 대해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서기관들이 가르치는 종말론의 내용은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말라기4:5-6"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18:15, 3:1). 그래서 서기관들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가 오려면 그 전에 먼저 엘리야가 먼저 와서 회개와 회복 사역을 해야 하는데 엘리야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구원자인 것을 믿지만 왜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오는 것은 구원자가 오기 전에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여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백성들을 회개시킨다면 어떻게 백성들이 구원자를 거부하여 죽이기까지 하겠느냐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 의문 때문에 직접적으로는 질문하지 못하고 서기관들의 주장을 이용하여 엘리야와 관련된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이미 왔으니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그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이 세례 요한을 가리켜 한 말씀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11-13). 마가복음9:12-13에는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말은 맞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구원자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와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개로 회복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와서 백성들을 회복시킨다고 해서 구원자가 고난의 죽음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구원자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와서 백성들을 회복시킬 것도 기록되어 있지만 구원자가 고난을 받아 죽게 될 것도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52:13~53:12).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할 것을 알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8:31, 22:22).

 

  예수님이 엘리야가 이미 왔다고 한 것은 세례 요한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사가랴에게 세례 요한이 태어날 것을 고지해 주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누가복음1:17에 보면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했습니다. 구약의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이세벨에 의해 박해를 받았습니다 (왕상19:1-10). 신약시대에 엘리야 역할을 했던 세례 요한도 헤롯왕과 헤로디아의 박해로 순교를 당했습니다 (6:17-29). 헤롯왕(Herod Antipas)이 자기 아내를 버리고 이복동생 빌립(Herod Philp)의 아내를 유혹하여 결혼을 했을 때 세례 요한은 그 잘못을 계속 지적했습니다. 이에 헤롯왕은 헤로디아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세례 요한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다 생일날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를 통해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하게 해서 세례 요한이 참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회개 촉구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헤롯왕은 오히려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 운동을 했으나 그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회복 운동을 했으나 유대인들이 그도 죽였을 뿐 아니라 구원자도 죽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한 것은 이런 대답을 제자들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엘리야가 와서 백성들을 회복시키면 구원자를 죽이지 않을 것인데 왜 예수님은 자신이 구원자라 하면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인 것을 믿었습니다 (16:16, 8:29, 9:20, 11:27).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면 반드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여 고난의 죽음을 당해야 하는데 (52:13~53:12),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를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8:31-34).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면 영광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영광을 위해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제자들도 그 길을 가야 했습니다 (8:34,38). 우리도 영광을 얻기 위해서 고난도 있을 것을 받아들이고 준비해야 합니다. 로마서8: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했고, 빌립보서1:29"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고, 베드로전서4:13"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고, 로마서8: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고 했습니다 (벧전5:8-9, 딤후3:12, 119:67,71, 벧전4:1-2, 벧전3:17, 11:24-26, 3:10-11).

 

 

       2. 귀신 들린 아이 치유 (14-21)

 

  예수님이 변화산 아래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셨습니다. 이 기사는 본서 마태복음17:14-21뿐 아니라 마가복음9:14-18과 누가복음9:37-45에도 보고된 내용입니다.

 

  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21 (없음)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갈 때 9명의 제자들을 산 아래 마을에 있게 하고 3명의 제자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변화산에서 내려오니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맞았습니다 (9:37). 변화산 아래 마을에 있던 9명의 제자들이 무리들에게 둘러 싸여 서기관들과 변론을 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오자 무리들이 예수님께 달려와 문안했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변론하는지 물었습니다 (9:14-16). 어떤 사람이 귀신들인 외아들을 예수님께 고침받게 하려고 데려온 모양인데 산에 올라가 안 계셨고 마침 9명의 제자들이 마을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한 것입니다 (16, 9:40). 하지만 제자들은 고쳐주지 못했고 그로 인하여 서기관들과 논쟁이 붙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산헤드린공회의 율법교사들로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함에서 약점을 찾기 위해 감시하며 논쟁을 일삼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려는 행위를 한 것과 결국 치유하지 못한 것에 대해 공격을 했을 것이고 제자들은 그에 대해 대항하면서 논쟁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자 무리가 맞아 문안했고 예수님은 무슨 논쟁을 하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해 주지 못한 일 곧 자신들의 무능력으로 논쟁이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선뜻 대답을 못했을 것입니다.

 

  15-16절에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9:17-18에는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9:38-40에는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소리 질러 이르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외아들은 귀신이 들려서 간질병 증세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자주 경련을 일으켜 이를 갈고 거품을 물고 파리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 발작하여 부르짖기도 하며 불에 넘어지기도 하고 물에 넘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부탁했으나 제자들이 고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불쌍히 여겨 고쳐달라고 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받았었습니다 (10:1, 9:1).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 경험이 많이 있었습니다 (6:13, 9:6). 그런데도 이번에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고 간질병을 고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의 귀신들린 병세를 말하면서 제자들에게 부탁했으나 제자들이 고치지 못했다는 말을 들은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하고 귀신들린 아들을 데라고 오라고 했습니다 (17). 이 말씀은 기본적으로 제자들에게 한 말일 것이고 나아가 서기관들과 모인 무리들과 당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에 해당하는 '아피스토스'(απιστος)믿지 않는’ ‘믿음이 없는의 뜻으로서 믿음이 부족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아예 없는 상태를 말하는 바, 아예 믿지 않는 불신앙을 질책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패역한에 해당하는 기본형 디아스트레포’(διαστρεφω)왜곡하다’ ‘부패하다뜻으로서 타락한 실상을 질책하는 표현입니다. 아버지와 아이의 문제를 해결해 주려는 의도는 가졌으나 결국 귀신을 쫓아내지 주지 못한 제자들, 아버지와 아이의 고통에는 안중에도 없이 제자들의 노력이 자기들의 주장과 다르다고 해서 경멸하며 제자들의 실패를 정죄하며 제자들의 실패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피력하는 제사장들,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와 제자들의 노력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며 제자들과 서기관들의 변론을 구경삼아 보는 무리들에게 적합한 책망입니다.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라고 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 얼마 안 있으면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격한 감정의 표현입니다. 제자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오랫동안 함께 하며 인내하며 훈련시켜야 믿음 있는 자가 될지 한탄하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무리들에 대해서는 그들에 대한 의무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그들의 상태가 한심하다는 것을 한탄한 것입니다.‘네 아들을 이리로 데려오라'는 말씀은 귀신들린 아들을 데려오라는 말인데 그 아들의 아버지에게 한 말인지 제자들에게 한 말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치유와 회복 사역을 하지 않고 싶은 상황이었으나 그 아이를 고쳐주기 위해 데려오라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그 아버지와 아들이 당한 고통에 동정하시고 그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위해 데려오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았다고 했습니다 (18). 마가복음9:20에는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9:42-43에는 "올 때에 귀신이 그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시니,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그들이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아이를 데려올 때부터 발작이 일어나게 하여 예수님 앞에 데려왔을 때는 아예 땅에 엎드려 구르며 거품을 흘렸던 것 같습니다.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자신을 추방할 것을 두려워하여 발악을 한 것입니다. 마가복음9:21-27에 보면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보고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귀신이 들렸습니다. 말도 하지 못했고 듣지도 못했습니다. 때로 간질병 증세를 나타내 경련을 일으켜 쓰러져 발작을 하고 입에 거품을 흘리고 얼굴이 파리해졌습니다. 어떤 때는 불에 넘어지기도 하고 물에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큰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 근처 마을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께 가면 아들을 고칠 수 있을까 하여 변화산 아래 마을로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계시고 예수님의 제자들만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사정을 말하고 아들에게서 귀신을 쫓아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 병을 고쳐주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치유사역을 방해하려 와 있던 서기관(예루살렘에서 파견된 바리새인 율법사)들이 제자들을 공격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을 근거로 하나님이 원하는 사역이 아니라고 비난했습니다. 제자들과 서기관들 사이에 변론이 지속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문안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 때문에 서기관들과 변론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무능함으로 변론이 일어났기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자기 외아들의 상태를 말하면서 제자들이 귀신을 좇아내지 못하더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하면서 아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아이를 데려오자 아이가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고 하면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소리 질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했습니다. 예수님이 아이를 향해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며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했습니다.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에게서 나갔고 아이는 죽은 자처럼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아버지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고통의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온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은 모두 예수님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인 것을 계시하기 위해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계시를 위해 기적을 일으킬 때는 언제나 그에 합당한 상황과 그에 합당한 대상을 만났을 때 일으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대상의 믿음을 보고 기적을 일으킨 사실을 자세히 기록합니다. 본문 내용도 그런 점을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는 외아들이 귀신들려 병으로 고통을 당할 때 자신에게도 큰 고통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그런 질병을 고칠 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체념하지 않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분이라면 고쳐주실 수 있을 것이란 생각으로 예수님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자 예수님 제자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제자들이 고치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오자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이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느냐고 묻자 마가복음9:21-22“~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이 고쳐주실 능력이 있다면 자기의 상황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들을 고쳐주기를 얼마나 열망하는지가 묻어나는 간청입니다. 예수님이 마가복음9:23절에 보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고쳐줄 능력이 있는데 간청하는 당사자가 예수님에 대해 고쳐줄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고쳐주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못 고쳐 주는 것이 아니라 대상자가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간청의 당사자인 아버지가 예수님이 고쳐주실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떤 것이라도 고쳐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향에서는 사람들이 믿지 않기 때문에 능력을 행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13:58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6:5). 예수님이 고쳐 줄 능력이 있지만 대상자들이 믿지 않으면 고쳐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간청의 당사자인 아버지가 믿어야 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크게 소리를 질러 외쳤습니다. 마가복음9:24절에 보면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고쳐줄 능력이 있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예수님이 보시기에 믿음이 없어 보인다면 믿음이 있도록 도와 달라는 호소입니다. ‘믿음 없는 것을에 해당하는 아피스티아’(απιστια)는 믿음이 작거나 약하거나 부족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믿음이 없는 불신앙(unbelief)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자신에게 믿음이 없음을 인정하면서 예수임이 믿음이 생기도록 도와주셔서라도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들을 고쳐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그 간절한 열망을 보고 의지가 이끌려 불쌍히 여겨 아들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변화산 아래 마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9:1-13). 예수님이 9제자를 마을에 남겨 주고 3제자(베드로, 야고보, 요한)를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변화산에서 기도하다가 제자들이 보니 예수님의 얼굴과 옷이 흰 광채가 나는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이미 천국 간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너무 황홀하여 그 곳에 초막 셋을 짓고 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변화산 아래로 내려오니 그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한 아들이 귀신들려 병으로 고통을 겪었고 그의 아버지도 함께 고통을 겪었습니다. 제자들과 서기관들은 그 고통을 겪고 있는 부자를 두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무리들은 그것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변화산 위는 천국의 모형이라면 산 아래 마을은 이 세상의 모형입니다 (Augustine). 이탈리아 화가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1)는 변화산 위와 산 변화산 아래 마을의 상황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갈 천국은 환상적인 곳이지만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어디나 고통과 갈등과 혼란과 다툼이 혼재된 곳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는 악령의 지배를 받고,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가족의 일원이 고통을 당하므로 온 가족이 고통을 당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의 문제를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하고, 누가 옳은지에 대한 변론과 다툼만 있고, 구경거리로 여깁니다. 물론 모든 고통이 악령으로 인해서 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악령으로 인해서 오는 것도 있지만 자연현상으로 올 수도 있고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우리는 질병을 비롯한 많은 삶의 문제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체념하거나 포기해버리기 쉽습니다. 특히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겪으면서 그 문제를 한 번도 극복해보지 못했습니다. 그 학습된 경험 때문에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닥치면 노력도 안 해보고 체념하고 포기해버립니다. 그러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들의 아버지처럼 열정을 가지고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 (Martin E. P. Seligman)은 개들을 통해 무기력한 태도에 대한 실험을 했습니다. 개들을 묶어두고 특정한 소리를 들려주고 곧바로 충격을 가했습니다. 개들은 짖고 뛰고 발버둥 쳤습니다. 그런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그런 다음 2개의 방으로 된 학습상자를 만들었습니다. 한쪽 방에서 다른 쪽 방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개들 중 1마리를 학습상자에 넣고 특정한 소리를 들려 주었습니다. 개의 반응은 놀라웠습니다. 개는 다른 방으로 건너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너가지 않고 바닥에 드러누워 낑낑대기만 했습니다. 심지어 충격을 가해도 다른 방으로 건너가지 않고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개들도 동일하게 시험해 보았더니 개들 가운데 무려 가 동일하게 다른 다른 방으로 건너가지 않고 피하지 않았습니다. 개들은 반복 경험을 통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무력해져 피하기를 포기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고통의 상황에 있을 때마다 해결하지 못한 경험 때문에 아예 포기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보좌를 내놓으시고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우리를 죄와 죽음과 내세형벌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오르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요한일서2:1“~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라고 했습니다. 또한 우리 가운데 성령님을 보내주어 우리를 돕게 하셨습니다. 로마서8: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한 능력이 있으시고 우리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울고만 있지 말고 그 분이 개입하시면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옵소서하고 구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어서 안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셔서 해결해 주옵소서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구했지만 아직까지 해결해 주시지 않았어도 계속 열정을 가지고 구해야 합니다. 요한일서5:14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했습니다.

 

  한편 누구의 집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예수님이 치유 기적을 행한 다음에 무리들을 떠나 어느 집으로 가셨고 제자들은 조용히 물었습니다 (9:28). 제자들이 예수님께 조용히 나아와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했나이까라고 물었고,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리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19-20). '믿음이 작은'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스테판본(GTS)에는 아피스티아’(απιστια)로 나와 있는데 '믿음이 없는'의 뜻이고, 네슬-알렌드본(GNT)에는 올리고피스토스’(ολιγοπιστος)로 나와 있는데 '믿음이 작은' '믿음이 적은' '믿음이 약한'의 의미입니다. 영어성경 KJV에서는 '믿음이 없는'의 의미로 번역했고 (unbelief), NASB, NIV에서는 '믿음이 작은'의 의미로 번역했습니다 (littleness faith, little faith). 우리 개역성경에서는 후자의 의미를 따른 것입니다. 하지만 전자의 의미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 이야기에서 아이의 아버지가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더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책망했는데 (17) 그 책망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고'에 해당하는 '아피스토스'(απιστος)믿지 않는’ ‘믿음이 없는의 뜻으로서 믿음이 부족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아예 없는 상태를 말하는 바, 아예 믿지 않는 불신앙을 질책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예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에 대해서 말하면서 믿음의 크기나 분량을 말하지 않고 믿음의 존재 자체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본질적으로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 일을 하지 못했다고 한 것입니다. 20절에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그 일을 행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입니다. '겨자'는 팔레스틴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채소 가운데 하나인데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유채와 비슷합니다. 봄에 씨를 뿌리면 잎이 나오고 줄기가 나와 노란 꽃을 피우고 씨가 맺어 그 씨로 기름을 짜서 사용하는 채소입니다. 그런데 그 씨는 아주 작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유채 씨나 무 씨만한 씨입니다. 그 씨는 아주 작지만 살아있는 씨는 뿌리면 자라서 약 1~2m 정도 자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는 생명력 있는 믿음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볼 때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작은 것이 아니라 믿음 자체가 없었는데 그 믿음은 바로 생명력 있는 믿음을 말한 것입니다. 생명력 있는 믿음이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있으면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20절에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산을 향해 명령해도 산이 옮겨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실제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생명력 있는 믿음이 있다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는 것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는 일은 옮길 수 없는 산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옮길 수 없는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은 사람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와 극복할 수 없는 난관 등을 함축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안 될 것 같은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1:21에는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17:6에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고 했습니다. 뽑을 수 없는 것을 뽑고 심을 수 없는 곳에 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9:23에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넘을 수 없는 난관들이 있습니다. 이룰 수 없는 비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해결할 수 있고 넘을 수 있고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환경의 열악함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할 특권인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명령해야 합니다. 18:18"~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9:28-29에 보면 집에 들어가니 제자들이 조용히 묻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했고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원인에 대해 마태복음에서는 믿음이 작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마가복음에서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마태와 마가가 전혀 다른 내용을 기록한 것 같으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맥을 가진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0:1"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했고, 마가복음6:7에도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권능'은 능력(δυναμις)이 아니라 권세나 특권(εξουσια)을 의미합니다. 곧 제자들 자신들에게 있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한 능력을 사용할 권세를 의미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이 자기들이 소유한 능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을 행해 주셔야한다는 것을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능력을 행해 주시기를 구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기들이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진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마가복음6:13"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9:6에도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기도를 했더라면 사역의 목적과 사역의 권능에 대해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능력으로 고쳐서 자신들의 능력을 나타내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하지 않고 자기들을 위해 하려한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들의 의지와 노력과 힘과 능력으로 하려다가 실패한 것입니다. 변화산에 올라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도 곤하여 잠이 들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주의 구속사역을 생각지 못하고 초막 셋을 짓고 거기서 살자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합당하지 못한 말을 했었습니다 (9:32).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도 피곤하여 잠을 자게 되고 베드로가 주의 구속사역을 생각지 못하므로 말고의 귀를 베는 잘못을 하게 됩니다 (26:43). 제자들이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지 못하고 존 것은 사역으로 피곤했기 때문입니다. 사역을 하기 전에 그리고 사역을 하고 나서 기도를 해야 하는데 사역에 너무 분주했기 때문에 기도하지 못하고 존 것입니다. 사탄을 사역을 하지 못하도록 역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역에 성공하면 사역에 빠져 지쳐서 기도하지 못하도록 역사합니다. 애굽의 바로왕도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력을 빼앗기 위해 정한 짚도 주지 않고 벽돌을 구워 국고성을 쌓게 했습니다 (1:11,14). 우리가 사탄의 역사를 이기려면 기도해야 하고 기도하려면 사역 자체에 매몰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역을 잘해놓고도 넘어지게 됩니다.

 

 

       3. 두 번째 수난 예고 (22-23)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예수님은 변화산 아래서 귀신들려 간질 증세를 보이는 아이를 고치시고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갈릴리 지역을 통과했는데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9:30-31). 예수님은 갈릴리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제자들을 계속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그 내용의 핵심은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3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22-23).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를 공식적으로 하신 것은 16:21절에서 한 이후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가룟 유다에게 배반당한다는 의미일 것이고, 넓게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당한다는 의미일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악인들에게 붙인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내어 주는 것은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므로 계획하신 구속사역을 이루게 하기 위함입니다.

 

  '인자'(人子)'그 사람의 아들'(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 ; the Son of man)로서, 구약성경 다니엘7:13-14(1:26-28)에서 예언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כבר אנש; one like the Son of man)인 구원자(메시야)에 대한 관용적 표현입니다. '넘겨진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구속되어 법정에 남겨진다는 말이지만 하나님이 구속사적 목적을 위해 악인들의 손에 넘겨주는 것을 허락한다는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자'로서 넘겨져 고난의 죽음을 당해야 할 것과 부활해야 할 것에 대해 가르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듣고 매우 근심했습니다 (23). 누가복음9:45에는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아 죽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인 것을 믿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현세적 혹은 정치적 메시야로 알았지만 그런 임금이 될 분이 붙잡혀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16:13-23, 8:28-32). 더욱이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한 것을 보았고 아이에게 귀신을 쫓아내어 간질병을 고쳐준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런 신적 권위를 가진 분이 붙잡혀 죽는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17:1-21, 9:28-45). 누가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숨기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숨기신 이유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아직 대속의 때가 안 되었는데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핍박의 때가 빨리 오겠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면서도 묻지도 못하고 근심하며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의 엄숙한 분위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겠으나 전에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에 대해 예고하셨을 때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항변하다가 심한 책망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16:21-23, 8:31-33).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으나 예수님께 묻지도 못하고 자기들끼리 어리석은 논쟁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후 부활한 다음에야 이 말씀을 기억하고 알게 됩니다 (24:6).

 

 

       4. 성전세 납부 (24-27)

 

  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5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이 이르렀을 때 반 세겔을 받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는 왜 반 세겔을 내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24). '반 세겔''두 드리크마'로서 헬라인들의 이틀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이 반 세겔은 로마 정부에 바치는 인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성전 관리를 위해 거두는 성전세를 말합니다. 당연히 반 세겔 거두는 자들도 로마 관리인 세리가 아니라 유대인 자체적으로 세운 성전세 관리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시내산 아래서 인구조사를 한 직후에 20세 이상 남자들에게 속전(贖錢)을 내게 했습니다 (30:11-16). 그때는 1/4세겔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후에는 1/3세겔로 조정했고 예수님 당시에는 1/2세겔이었습니다.


  성전세를 거두는 사람들의 힐문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의중도 알아보지 않고 성급하게 예수님께서 낼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고 했습니다 (25-26). 곧 나라의 주인인 통치권자의 자녀들에게는 세금이 면제되듯이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에게는 성전세를 낼 의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성전세를 내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고 했습니다 (27).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금을 낼 의무가 없지만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 내도록 했습니다. 만일 성전세를 내지 않으면 예수님이 율법을 파괴하고 성전을 무시한다는 생각을 하여 예수님이 제시하는 복음과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기 때문에 내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하나님 앞에 양심적으로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이 있지만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진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면 호의적인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편을 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옳으나 공동체 사회에 비상식과 비윤리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면 교회와 기독교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됩니다. 선교적 입장에서 보면 그런 부정적 이미지는 복음전도에 막대한 장애요소입니다. 사역에 있어서도 진리문제가 아니면 고집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結言>

  본장에서 예수님은 변화산 변형과 귀신들린 아이 치유와 수난 예고와 성전세 변론 등을 통해 자신과 자신이 이룰 구속사역을 계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신앙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참으로 주를 위한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느냐에 있지 않고 주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