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마태복음18:1-35

<題目> 천국 시민의 윤리관

 

<序言>

  18장은 천국시민의 윤리관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장은 크게 두 단원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소자를 실족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고, 두 번째는 죄인을 권징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한 사람이라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인 동시에 공동체 내의 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낮아짐에 대한 교훈(1-4), 소자 실족에 대한 교훈(5-9), 잃어버린 양 비유(10-14), 권면에 대한 교훈(15-20), 용서에 대한 교훈과 비유(21-35)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낮아짐에 대한 교훈 (1-4)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사역을 하시고 당시 전도사역의 근거지였던 가버나움으로 돌아왔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동쪽 지방에 있는 갈릴리 바다(호수) 바로 위에 위치한 마을로서, 베드로의 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집을 갈릴리 지방을 전도의 근거지로 사용했습니다. 돌아오는 중에 예수님이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했습니다 (17:22).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정치적인 왕이 될 것으로 오해를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따라다닌 자기들도 권력을 차지할 것인데 서열대로 차지할 것으로 생각하여 서로 누가 더 높은 서열에 있는지 논쟁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두 번째 수난예고를 했을 때에도 서열 다툼을 하지만 세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실 때도 서열 다툼을 하게 됩니다 (20:20-28, 10:35-45). 그래서 오는 내내 누가 큰 자인지 논쟁을 벌였습니다 (9:33-34). 예수님이 제자들이 누가 큰 자인지 논쟁을 한다는 것을 아시고 가버나움에 도착하여 집에서 휴식할 때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9:46-47).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무엇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잠잠했습니다 (9:33-34). 그러다 제자들이 결국 말을 꺼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인지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가운데 세우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했습니다 (18:1-4).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고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천국에서 큰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어린 아이 같은 자가 들어가고 어린 아이 같은 자가 큰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天國)은 문자적으로 '하늘 나라'(η βασιλεια τον ουρανων, the kingdom of heaven)입니다. 이 하늘 나라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경험하는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천국'이라는 용어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하나님 나라'(η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the kingdom of God)로 대치되어 나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에서 말한 '천국'은 의미상으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모든 영역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지배 원리가 된 유기적 공동체를 말합니다. 일차적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이차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유기적 공동체를 말합니다. 그 하나님 나라에는 어린 아이 같은 자가 들어가고 큰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에 일원은 어린 아이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공관복음에 하나님 나라는 어린 아이 같아야 한다는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구절들을 해석할 때 어린 아이들에게 있는 특성들을 빗대어 적용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 나오는 내용들을 정리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18:3-4은 어린 아이가 신분과 지위에 있어서 낮은 위치에 있음을 강조한 내용이고, 마태복음19:4과 마가복음10:14-15과 누가복음18:16-17은 어린 아이의 성품에서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수용적인 특성이 있음을 강조한 내용입니다.


  우선 본문인 마태복음18:3-4에는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린 아이의 신분과 지위에 관련된 낮은 위치를 강조한 내용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바로 앞 내용을 보면 예수님 일행이 가버나움에 도착했을 때 성전세를 거두는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왜 성전세를 내지 않는지 물었습니다.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씀을 드리니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왕들이 누구에게 세금을 걷느냐고 물었습니다. 왕자들에게인지 국민들에게인지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당연히 국민들에게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다면 왕자들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17:24-26).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정치적인 왕 위에 오르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자기들을 마땅히 왕자와 같은 높은 위치에 오르게 해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이 이루려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런 왕자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되려는 사람은 필요 없고 이런 아이 같은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어린 아이는 여자와 함께 사람 수에도 치지 않았습니다. 로마인들도 어린 아이와 여자는 가장의 재산 목록으로 여겼습니다. 곧 어린 아이는 평민 축에도 들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가장에게 예속되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연약하여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신분과 지위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린 아이 같아야 한다는 말은 신분과 지위에 있어서 왕자 같이 가장 높은 위치에 있지 않고 평민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아린 아이 같이 되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루려는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처럼 높은 자리 곧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리 곧 섬기는 위치에 있는 자가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음 장 마태복음19:14에서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어린 아이의 어떤 점이 강조되었는지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병행구절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어린 아이의 성격과 관련된 특성을 강조한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10:14-15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는 어린 아이의 받드는 특성을 강조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받들지로 번역된 기본형 ‘‘데코마이’(δεχομαι)받다’ ‘취하다’ ‘영접하다등의 뜻입니다. 어린 아이의 특성 중 받아들이는 면이 강조된 것입니다. 누가복음18:16-17에도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받아들이지로 번역된 기본형도 데코마이’(δεχομαι)로서 어린 아이의 특성 가운데 받아들이는 면을 강조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특성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의 하나는 순수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어린 아이는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이고 주는 대로 받아들이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를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그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인하고 대적하고 오해했습니다. 하지만 이 현장에 나아오는 어린 아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가 주시는 은혜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본문에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섬기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가복음9:35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식사자리에서 주인공과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안쪽에 앉고 가장 천한 사람이 맨 끝자리에 앉습니다. 끝에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해야 했니다. 끝에 있는 위치 혹은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섬기는 자입니다. ‘섬기는 자에 해당하는 디아코노스’(διακονος)시중드는 사람’(servant)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 나라에서 섬기는 자는 다른 일원을 시중드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와 같이 낮아지라는 것은 섬기는 자가 되라는 적극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섬기는 정신에는 배려와 희생과 공동체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배려는 방법에 있어서 자기중심이 아닌 대상 중심으로 섬겨야 함을 말합니다. 희생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양보하며 섬겨야 함을 말합니다. 공동체의식은 한 개인의 유익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위해 섬겨야 함을 말합니다.

 

  미국 애리조나주에 한 시골 마을에 작은 미용실이 있었습니다. 어느 땐가 갑자기 많은 손님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몰려드는 손님들마다 한결같이 삭발을 요구했습니다. 미용사는 사연이 궁금했습니다. 알아보니 그들은 그 마을에 50여명이 참석하는 작은 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그 교회에는 교인들로부터 사랑을 받던 한 어린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백혈병이 들어 함암치료를 받게 되었고 그 후로 교회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목사님과 몇 성도들이 심방을 갔습니다. 항암치료 때문에 머리가 빠져서 창피하여 교회를 못 나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돌아와 의논한 끝에 모두 머리를 깎기로 했습니다. 목사님이 아이의 어머니에게 부탁하여 주일에 아이를 꼭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미용사는 그 사연을 듣고 방송국에 연락을 해 사연을 알려 주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는 방송국에서 리포터가 나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설득하여 모자를 씌워 데리고 왔습니다. 어머니와 아이가 교회 문을 연 순간 50여명이 모두 까까머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랬습니다. 아이는 모자를 망설이다가 모자를 벗었습니다. 중계를 하던 리포터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나는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언젠가 내가 교회를 나간다면 이런 교회에 나가고 싶습니다방송을 보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이것이 배려와 희생과 공동체의식의 결정판입니다. 교회와 가정에서 그런 섬김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테레샤 수녀가 미국 국회를 방문하여 연설할 때가 있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대부분 연설을 들을 때 박수를 자주 칩니다. 연설 도중에도 치고 끝났을 때도 칩니다. 그런데 테레사 수녀가 연설을 마칠 때 그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았습니다. 침묵만 감돌았습니다. 연설에 너무 감동되어 박수를 칠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섬길 줄 아는 사람만이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우리가 교회와 가정에서 섬기지 않고는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줌으로서 모범을 보이시고 (13:4-14), 우리에게 자기 몸을 대속물로 내어줌으로서 섬김의 최고 가치를 보여주셨습니다 (20:28). 마태복음20: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로인하여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2. 소자 실족에 대한 교훈 (5-9)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했습니다 (5, 9:37, 9:48). 누가복음9:48에 보면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고 했습니다. ‘내 이름으로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존재와 인격으로의 뜻으로서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 종속된 사람으로서 사역의 근거가 예수님을 순종하기 위함이어야 하고, 목적이 예수님을 위하기 위함이어야 함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그를 보낸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어린 아이는 낮아져서 섬기는 자를 가리킵니다 (4). 그런 자는 예수님 곧 하나님이 보낸 자이니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런 자들을 받아주고 인정해주고 높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이 인정해 주시고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고 했습니다 (10:32, 12:8, 3:5). 마태복음10:40-42"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했습니다.

 

  반대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6-7, 9:42, 17:1-2). ‘실족하게 하면에 해당하는 원형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ιζω)걸려 넘어지다’ ‘함정에 들다’ ‘죄에 삐지다등의 뜻으로서, 고의적으로 죄를 짓게 하거나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믿는 무리 가운데 어린 아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린 아이를 소제로 말씀하신 것은 신앙 공동체에서 가장 가치가 없어 보이는 자들에 대한 상징으로 한 말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자맷돌’(μυλος ονικος)은 여인들이 손으로 돌리는 작은 맷돌이 아니라 당시 방앗간에서 당나귀로 끌게 하여 돌아가게 하는 대형 회전 맷돌을 가리킵니다. 연자 맷돌에 목을 매달아 깊은 바다에 던지는 것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극악무도한 죄인에게 내렸던 사형방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자는 연자 맷돌이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고 하신 것은 비록 하찮게 보이는 자에게라도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은 극악무도한 범죄자보다 큰 죄를 지은 자로서 차라리 극한 형벌로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엄한 질책이 있을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는 무엇인가를 강조하기 위해 과장법을 사용한 내용이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내용은 아닙니다. 범죄하게 하는 지체를 찍어 내어버리라는 것은 범죄케 하는 요인을 제거하라는 단호한 표현입니다. 손이나 발이나 눈 같은 지체가 범죄하게 한다고 해서 그것들을 실제로 잘라 버리라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유대교적 의식은 범죄의 원인인 충동이나 욕망이 손이나 발 같은 지체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통념을 이용하여 범죄의 원인이 외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을 뿐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있는 욕망인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곧 자신이 범죄하면 근본적으로 자기 마음속에 있는 욕망을 제어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범죄의 원인인 자기 마음속에 있는 욕망을 철저히 회개하고 제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할 때 영생에 들어가고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지체를 찍어 버리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영생과 지옥에 관한 말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범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영생에 들어가고 범죄한다고 해서 지옥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택자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셨기 때문에 그의 대속을 믿는 자는 하나님 법정에서 죄가 없어진 것으로 인정받아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고, 그의 대속을 믿지 않는 자는 죄가 그대로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 지옥에서 영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영생'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에 대한 상징으로 보고, '지옥'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고 버림받는 것에 대한 상징으로 보아야 합니다. 마음속에서부터 죄의 욕망을 철저히 제거하여 단절하는 자는 마치 천국에서 영생을 얻는 것처럼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모든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죄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여 계속적으로 죄를 짓는 자는 마치 지옥에서 꺼지지 않는 뜨거운 불 가운데서 고통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께 버림받아 하나님 나라의 은혜에서 제외되어 번민과 불안과 공포 가운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범죄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서 단절되어 결핍과 불만과 번민과 불안과 공포의 고통 가운데 있게 된다는 것을 알고, 마음속에서부터 죄의 욕망을 단호히 제거해 나가야 합니다 (17:9, 7:21-23, 4:23).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님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5: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님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할 때 그 인도를 받아 철저히 회개하고 옳은 것을 따라야 합니다.

 

 

       3. 잃어버린 양 비유 (10-14)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 (없음)

 

  예수님은 소자 중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자는 연자 맷돌을 메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본절에서는 소자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뵈옵는다는 것입니다 (10). 하나님은 보좌에서 수종드는 천사를 자기 백성들을 돕도록 보내셨습니다. 히브리서1:14"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라고 했습니다 (벧전1:12).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천사를 통해서라도 성화를 이루고 사명을 감당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믿는 자 혹은 주님의 제자의 길을 가는 자가 세상에서는 하찮게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귀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15:4-7에도 나오는 비유입니다. 본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100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중의 1마리가 길을 잃었습니다. 주인은 양 99마리를 산에 두고 길을 잃은 그 1마리를 찾았습니다. 그는 그 잃었던 양 1마리를 찾게 되자 길을 잃지 않은 양 99마리보다 더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이와 같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12-14).

 

  12절에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병행구절인 누가복음15:4에는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장 주인일 것입니다. 그는 양 100마리를 길렀습니다. 당시 목축은 300마리 정도는 되어야 큰 규모였고 100마리 정도는 소규모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본문의 목장 주인은 소규모 목축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목동들을 두지도 않고 자신이 직접 목자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사회에서 양은 생계수단이었으며 주된 재산이었으며 종교생활에 필수요소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자는 양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소규모로 양을 기르는 경우에는 더욱 소중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삼하12:3). 그런데 양은 심한 근시이기 때문에 무리에게서 떨어지기 쉽고 무리에서 조금만 떨어져있어도 길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그래서 무리에서 떨어진 양은 맹수들에게 잡아먹히기도 하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웅덩이에 빠지기도 합니다. 양은 그런 상황에 빠지면 홀로 벗어날 능력이 없습니다.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당시 유대지역의 목초지는 팔레스틴 남북을 잇는 중앙고원 지대로서 해발 500m나 되는 고지였습니다. 목자들은 양을 그런 높은 산이나 들의 목초지에서 풀을 먹였습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목자는 양 떼를 우리로 몰아넣게 되는데 그때는 막대기 아래로 들어가게 하면서 수를 양의 수를 세었습니다. 양떼가 소규모인 경우 그 이름까지 지어서 부르기도 했을 것입니다 (10:3). 그때 만일 양이 1마리라도 없어진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양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목자는 양의 특성을 잘 압니다. 잠시라도 보살핌이 없으면 위험에 빠진다는 것을 압니다. 잃은 양을 그대로 두면 길을 헤매다가 구덩이에 빠질 수도 있고 낭떠러지에 떨어질 수도 있고 맹수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꼭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그 양이 얼마나 목마르며 배고프며 지치며 부르짖을지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서 우리에 99마리를 그대로 두고 잃어버린 1마리를 찾기 위해 나설 것입니다. 우리에 둔 99마리는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99마리는 안전한 곳에 있으니 홀로 죽음의 위험 가운데 처해 있을지도 모르는 그 1마리를 찾기 위해 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가 건강한 자식보다 병약한 자식에게 더 보살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목자는 자신이 힘들 것을 전혀 생각지 않고 그 1마리를 찾을 때까지 온 지역을 찾아다닐 것입니다 (10:11). 경제적인 재산 가치 때문이 아니라 자식처럼 키운 양에 대한 관심과 애정 때문일 것입니다.

 

  13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15:5-6에는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1마리의 양을 찾아 산으로 들로 헤맬 것입니다. 그러다 만일 그 양을 발견하게 되면 너무 기뻐할 것입니다. 양의 더러워졌음직한 상태는 생각도 하지 않고 너무 기뻐서 어깨에 메고 돌아올 것입니다. 자기의 수고와 희생을 생각지 않고 양을 찾았다는 자체로 즐거워할 것입니다. 아마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싶을 정도의 행복감을 느낄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집에 돌아온 그는 자기의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을 공동체와 나누기 위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즐기자고 했습니다. 기쁨을 함께 걱정했던 친구들과 이웃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잔치를 베푼 것입니다. 그 목자가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를 나타내는 행동인 것입니다.

 

  14절에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소자에 해당하는 미크로스’(μικρος)가장 작은이라는 뜻으로 양이나 수나 키나 연령이 작은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지위나 세력이 작은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가장 미약한 자에 대해 사용한 말일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선택한 자로서 예수님을 영접하여 따르는 자들 중 신앙적으로 가장 연약한 자를 암시할 것입니다. ‘잃는에 해당하는 아폴뤼미’(απολλυμι)잃다’ ‘멸망하다는 뜻으로 여기에서는 영원한 구원을 상실하게 되는 것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하여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으므로 구원을 얻게 된 자가 한 사람도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도 영원한 구원에서 떨어져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곧 하나님이 선택하여 예수님을 믿는 자중에 아무리 신앙이 연약한 자라도, 그런 1사람이라도 결코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기 자녀에 대해 가진 심정이 어떠하며 자기 자녀가 멸망 길로 갈 때에 그를 돌이키게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 분인지 잘 나타내 보여줍니다. 동시에 성도들이 그런 성도에 대해 어떤 심정을 가지며 어떻게 섬겨야 할지를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본 비유에는 어떤 사람으로 소개된 목장 주인 혹은 목자는 예수님 자신을 염두에 둔 설정 인물입니다. ‘양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그중에 1마리 양은 영원한 구원을 얻기에 불안한 신앙을 보이는 자들 곧 신앙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들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도 한 사람이라도 결단코 잃지 않고 부르시는 분입니다. 그가 종교 기득권에서 소외된 죄인이라도 말입니다 (12:11, 19:10, 6:39). 그것은 하나님이 성도에 대해 가지신 심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도 성도 한 사람이라도 잃지 않고 찾으시는 분입니다. 아모스9:9보라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서 체질하기를 체로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햇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성도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결코 잊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스바냐3:17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사야49:15-16에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셨고 목적을 가지셨고 구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코 잃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연약한 성도나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섬겨야 합니다 (12:3, 15:1).


 

       4. 권면에 대한 교훈 (15-20)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형제가 교회에서 죄를 범했을 때에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한 말씀이지만 미래에 생길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당시에 교회가 없었으나 제자들로 인하여 생긴 신앙 공동체와 미래에 생길 교회에서 범죄한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형제'란 위에서 신앙 공동체의 일원을 말합니다.

 

  첫째, 개인이 상대하여 권고하라고 했습니다 (15). 한 사람이 권면하여 들으면 실족한 한 생명을 건지는 것입니다. 둘째, 두세 사람이 증참하여 권고하라고 했습니다 (16). 후에 교회 재판에서 증인이 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권면을 힘있게 하여 돌아서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셋째, 교회적으로 권고하라고 했습니다 (17).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했습니다. 당시 이방인과 세리는 하나님의 공동체적 언약의 축복에서 제외된 자들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권면도 듣지 않으면 치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 소극적으로는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함이지만 적극적인 목적은 공적인 치리를 통해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여 돌아오게 하는데 있습니다. 교회의 치리권은 주님이 주신 권세로서 효과적으로 시행됩니다. 주께서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18).

 

  주께서 교회에 주신 권위는 대단합니다. 두세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주께서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20).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서 주께서 성령님으로 친히 운행하십니다. 주님은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촛대 사이로 다니신다고 했습니다 (1:20, 2:1). 또한 두 사람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합심하여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이루어지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19). 한 사람이 기도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기도하는 것, 공동체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이루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개인 기도의 무용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중요성과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주께서 교회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공동체가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교회의 권위를 위해 들어 주십니다. 특히 범죄자와 권고자가 함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로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속히 들어주실 것입니다.

   

 

       5. 용서에 대한 교훈과 비유 (21-35)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예수님이 범죄한 형제에 대해 권면과 징계를 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 다음에 베드로는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할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21).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는 3회까지만 하고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쳤습니다 (Joma 86b). 랍비였던 요세 벤 예후다(Jose ben Jehuda)사람이 한 번 과실을 범하면 용서된다. 두 번 과실을 범하면 용서된다. 세 번 과실을 범하면 용서된다. 그러나 네 번째에는 용서되지 아니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3번을 용서해 주는 것이 최선의 기준이라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보다 더욱 관대하게 7번이나 용서하면 충분하지 않겠냐는 의미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 일곱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했습니다 (22). ‘7번씩 707×70=490번으로 보는 학자들고 있고 (Erasmus, Jerome, Alford, Grotius), 70인역(LXX)에 의한 창세기4:24에 니오는 라멕에 관련된 77배의 형벌과 연관지어 7+70=77번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Augustine, Ewald, Origen, Bengel). 어떤 것이 옳든지 횟수에 상관없이 무한히 용서할 것을 강조하는 문학적 표현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7’수를 사용하여 7번씩 70번을 용서해주라고 했습니다. ‘7’수는 완전무한의 의미를 가진 수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하게 곧 무제한적으로 용서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한편 누가복음17:4에는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용서를 하는데 있어서 회개가 전제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23절에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천국’(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ον)은 문자적으로 하늘나라를 말하지만 의미상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4:17).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는 이른바 빚진 자’(무자비한 종) 비유로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는 앞서 예수님이 7번씩 70번을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고 그와 관련된 내용을 이야기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임금이 빚에 대한 결산을 하려했습니다. 그리고는 10,000달란트를 빚진 자를 어전으로 불러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빚을 갚을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몸과 아내와 자식과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갚으라고 했습니다. 빚진 자는 임금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앞으로 갚겠으니 제발 좀 참아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임금은 그를 불쌍히 여겨 놓아주며 빚을 모두 탕감(蕩減)해 주었습니다. 그 많은 빚을 모두 면제해준 것입니다. 그 종은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왕궁을 떠났습니다. 그러다 길에서 자기에게 100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그 동료를 붙들어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동료는 엎드려 반드시 갚을테니 제발 좀 참아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하지만 그 종은 동료를 용서하지 않고 빚을 갚으라고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다른 동료들이 그 상황을 보고 딱하게 여겨 임금에게 가서 그 사실을 다 보고했습니다. 임금은 그 보고를 듣고 심히 노했습니다. 그래서 그 종을 불러다가 심히 책망했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종이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에 넘겼습니다.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23-34).

 

  ‘임금’(βασιλευς)은 절대 왕권을 가진 군주를 가리킵니다. ‘주인’(κυριος)도 이 임금을 가리킵니다. ‘에 해당하는 둘로스’(δουλος)’ ‘묶인 사람이라는 뜻인데, 여기에서 종들은 왕의 영토 중 일부를 다스리고 그곳에서 나오는 수입을 왕에게 상납해야 하는 지방 총독이나 봉건 영주들일 것입니다 (Herodotus). 그것은 임금에게 빚진 금액이 개인으로서는 질 수 없는 빚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은 개인적으로 빌린 돈이 아니라 상납하지 못한 세금일 것입니다. 그래서 임금에게 10,000달란트를 빚진 자는 상납해야할 것을 상납하지 않고 숨겨왔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임금이 결산을 하기 위해 그 일을 담당하는 자들을 통해 조사할 때 그들에게 발각되어 임금에게 보고된 것일 것입니다.

 

  임금에게 불려간 10,000달란트를 빚진 자는 그 것을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25). ‘달란트’(ταλαντον)데나리온’(δηναριον)은 로마의 화폐단위입니다. ‘10,000달란트는 금 10,000달란트를 말합니다. 10,000달란트는 셀 수 없이 많은 액수입니다. 당시 유대 전역에서 거두어들인 1년 세금이 800달란트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Josephus). 1,000달란트도 안된 것입니다. 곧 금 10,000달란트는 유대 전역에서 거둬들인 1년 세금의 10배가 넘는 액수인 것입니다. 1달란트는 34kg인데 우리가 아는 금궤(gold bar) 34개로서 골드바 1개를 20,000,000(2천만원)으로 환산한다면 골드바 34개는 약 7,00,000,000(7억원)으로서 10,000달란트는 약 7,000,000,000,000(7조원) 정도나 되는 것입니다.

 

  임금은 10,000달란트를 빚진 자에 대해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했습니다 (25). 실은 10,000달란트 빚은 자기와 자기 가족 모두를 노예로 팔지라도 갚을 수 없는 금액이었습니다. 당시 노예의 값은 많아야 약 1달란트였고 대부분은 10분의1 달란트 정도밖에 안 되었다고 합니다. 그 빚은 가족을 모두 노예로 팔더라도 갚을 수 없는 금액이지만 설사 갚을 수 있는 금액이라 하더라도 가족을 모두 노예로 파는 일은 있을 수 없는 끔찍한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10,000달란트를 빚진 자는 임금에게 엎드려 절하며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고 했습니다 (26). ‘절하며에 해당하는 프로세퀴네이’(πρσεκυνει)는 시제가 미완료형으로서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절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마땅히 상납해야 할 세금을 착복했으니 임금의 분노가 극에 달해 당장 투옥시키거나 사형시킬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처절하게 빈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임금은 그가 비는 모습을 보고 너무 불쌍하게 보여 측은지심으로 그를 석방시켜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0,000달란트의 빚을 모두 탕감해주었습니다 (27).

 

  그런데 반전된 행동이 나옵니다. 10,000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자가 석방된 이후에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을 진 동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28). ‘데나리온’(δηναριον)도 로마의 화폐단위입니다. ‘100데나리온은 장정이 100일 동안 일해서 얻을 수 있는 품삯에 해당하니, 하루 품삯을 100,000(10만원)으로 환산한다면 10,000,000(1,000만원)밖에 안 되는 금액입니다. 10,000달란트에 비해 700,000(70)분의1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10,000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는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자 그를 붙들어 목을 잡고 빚을 갚이라고 했습니다 (28). ‘목을 잡고에 해당하는 에프니게오’(επνιγεω)목을 조이다’ ‘숨막히게 하다’ ‘질식시키다의 뜻을 가진 프니고’(πνιγω)의 미완료형으로서, 계속적으로 목을 조른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탕감을 받은 빚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는 적은 빚은 자기에게 무자비하게 폭행을 하면서 빚을 갚으라고 협박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100데나리온을 빚진 자는 엎드려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고 간구했습니다 (29). ‘간구하여에 해당하는 파레카레이’(παρεκαλει)도 미완료형으로서 계속적으로 애원하듯이 청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00데나리온은 100(3개월) 정도만 일해서 모으면 갚을 수 있는 금액이기 때문에 반드시 갚을 것이니 참아달라고 한 애원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00달란트를 탕감받은 자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빚을 당장 갚도록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30). 고대사회에서는 채무로 인해 사람을 투옥시키는 일이 흔했습니다 (Deissmann). 그렇다하더라도 그까짓 빚 때문에 기간연장 요구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구속시켜버린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행위입니다.

 

  그 모습을 본 그 동료들이 몹시 딱하게 여겨 자기들의 주인인 임금에게 가서 그 일을 알렸습니다 (31). ‘딱하게 여겨에 해당하는 기본형 뤼페오’(λυπεω)고통하다’ ‘슬퍼하다’ ‘근심하다등의 뜻입니다. 동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너무 아팠던 것입니다. 그래서 임금께 가서 그 사실을 상세하게 보고를 한 것입니다. 무자비한 채권자의 죄악에 대한 고발인 것입니다. 그 보고를 들은 임금은 10,000달란트 탕감받았던 자를 다시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악한 종이라고 하면서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고 엄한 책망을 했습니다 (32-33). 그리고는 노하여 그에게 다시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에게 넘겼습니다 (34). ‘옥졸에 해당하는 바사니스테스’(βασανιστης)는 간수를 가리키는 데스모퓌라크스’(δεσμοφυλαξ)와 달리 고통을 가하는 고문자를 가리킵니다 (the tormentors KJV, the torturers NKJV). 그로인해 10,000달란트 탕감받았던 자는 큰 형벌 가운데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임금은 하나님을, ‘10,000달란트 빚진 자는 하나님을 용서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100데나리온 빚진 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용서해야 할 대상들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본질상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살아가면서도 많은 죄를 짓습니다. 그 죄 때문에 죽게 되고 지옥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의 죄 값으로 죽게 하여 우리의 죄를 다 담당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는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아 죄사(罪赦)과 칭의(稱義)를 얻었고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예수님에게 담당시켰을 때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라도 죽게 할 정도의 큰 죄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그 형벌로 지옥형벌을 받게 될 큰 죄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겨 그 큰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103:12, 1:18). 에베소서2:4-5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잘못한 죄는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우리는 당연히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를 힘서야 합니다. 에베소서4:32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3:13). 야고보2:13에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마치고 35절에 보면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릴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6:14-15절에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형제를 용서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릴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하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11:4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고 했습니다 (6:12-13).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를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을 용서애줄 때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에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 받은 긍휼을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과 도움을 구하는 간구에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많은 잘못을 하고 많은 위경에 빠지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 것입니다. 마태복음5:7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24장과 26장에는 다윗이 사울왕에 긍휼을 베풀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사건들이 나옵니다. 다윗이 왕되기 전에 사울왕이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었습니다. 다윗이 그와 함께한 이들과 함께 엔게디 황무지의 굴 깊은 곳에 숨어있을 때였습니다. 사울왕은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군사들을 이끌고 다윗을 추격해왔다가 그 굴에 들어와 잠이 들었습니다. 다윗의 신복들은 하나님이 원수를 붙이신 때가 이 때라고 하면서 사울왕을 죽이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사울왕의 겉옷자락만 가만히 베었습니다. 죽일 수도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기름부은 왕의 옷자락을 베었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찔려 신복들에게 기름부은 자를 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금하셨으니 사울왕을 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삼상24:1-7).

 

  그리고 그와 비슷한 일이 또 있었습니다.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을 때 사울왕은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군사 3,000명을 이끌고 엔게디 황무지 앞 하길라 산 길가에 진을 쳤습니다. 다윗이 밤에 아비새를 데리고 사울왕의 진으로 잠입했습니다. 사울왕과 그의 군사들은 잠에 들어있었습니다. 아비새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원수를 붙이신 때이니 그를 창으로 찔러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아비새에게 사울왕은 하나님이 기름부어 왕을 세운 자이니 죽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왕의 머리곁에 있던 창과 물병만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죽일 수 있었으나 죽이지 않았다는 표만 남기고 행동이었습니다 (삼상26:1-12). 다윗은 평생 자신을 죽이려 한 사울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은 기름부은 자를 해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울왕에게 긍휼을 베푼 것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긍휼 베풀어주실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무엘상26:24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結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개인적인 마음 자세와 공동체적인 원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항상 겸손하기를 힘써야 하고 다른 사람의 죄가 드러날 경우 근실한 마음으로 권면하되 정죄하기보다는 살리려는데 역점을 두어야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이는 데 있지 않고 살리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용서와 사랑으로 세워져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