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마태복음19:1-30
<題目> 천국 시민의 조건
<序言>
18장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신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19장과 20장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여기저기를 순회하시면서 베푸신 교훈과 행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청년과 제자들과 주고받는 대화를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하는 대상자들의 질문은 스스로 영적 무지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했고 예수님은 그 질문들을 이용하여 본질적인 진리를 드러내셨습니다. 본장의 내용구조는 결혼에 대한 교훈(1-6절), 이혼에 대한 교훈(7-9절), 독신에 대한 교훈(10-12절), 어린 아이들을 통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교훈(13-15절), 부자 청년의 영생에 관한 질문에 대한 대답(16-22절), 부자와 천국의 관계에 대한 교훈(23-26절), 헌신과 상급에 대한 교훈(27-30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결혼에 대한 교훈 (1-6절)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2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의 가버나움 떠나 사마리아 지방을 우회하여 유대 지방의 경계인 베레아(Perea)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그 곳에도 무리가 모여들었고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1절). 그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와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냐고 물었습니다 (1-3절). 이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에 대해 책잡기 위해 파견된 자들일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이혼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말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산상수훈에서 그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마5:31-32). 그래서 예수님이 이혼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대답을 할 것으로 예상하고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 한 것입니다. 만일 이혼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대답하면 모세의 율법에 이혼을 허락한 내용과 상충되어 율법을 부정하는 자로 정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24:1).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하는 호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혼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할 경우 당시 분봉 왕 헤롯 안디바스의 심경을 건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헤롯 안디바스(Herod Antipas)는 아내와 이혼하고 이복동생 헤롯 빌립(Herod PhilpⅠ)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했는데 세례 요한이 그 일의 옳지 못함을 비판하자 세례 요한을 처형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14:1-12, 막6:14-18).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대해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했습니다 (4-6절).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하시지 않고 창조원리를 통해 결혼의 정신을 일깨우시는 말씀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가질 수 있는 교훈은 많이 있습니다. 첫째, 결혼은 하나님이 내신 제도라는 것입니다 (창2:18,24). 남녀가 한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원리이고 가장 축복된 단위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잠2:17). 둘째, 이혼은 근본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보면 이혼을 할 수 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배우자가 간음한 경우 (마19:7~9), 믿지 않는 배우자가 신앙문제로 이혼을 요구할 경우 (고전7:12~16), 전쟁이나 천재지변 등으로 합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경우 등이 있습니다 (렘29:4~7). 셋째, 배우자는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번 한 결혼을 하나님이 허락한 결혼인 줄 알고 이혼하지 않으려면 결혼할 때부터 신중해야 합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처럼 그냥 좋으면 동거하고 싫으면 헤어지고 하는 식으로 만나서는 안 됩니다. 넷째, 결혼은 독립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한다는 것은 부모를 떠난다는 것이 전제됩니다. 육체적으로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자립해야 가정이 건강하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가 독립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2. 이혼에 대한 교훈 (7-12절)
7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예수님은 앞서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들어 이혼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답변에 대해 다시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이는 신명기24:1-4을 근거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에 대해 모세가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고 한 것은 본질적으로 이혼을 허락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허락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버리고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7-9절).
본래 하나님은 남녀가 부모를 떠나 결혼하고 이혼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사람의 심성이 워낙 완악하여 남편이 아내를 미워할 경우 힘있는 남편은 다른 여자와 음행을 하고 아내를 물질적, 육체적, 정신적으로 심한 학대를 했습니다. 심지어 누명을 씌워 죽이려 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경우에 아내는 정상정인 가정생활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남자의 아내로서 사회적인 통념 때문에 다른 남자에게 시집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강제로 아내를 쫓아내는 경우에는 아내들이 타락의 길로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최악의 상황들 곧 더 큰 죄행을 막기 위해 합법적으로 이혼증서를 써주어서 자유를 주고 아내도 합법적으로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새로운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때 써주는 이혼증서란 자기의 아내가 어떤 사람과도 결혼할 수 있는 자유의 몸이라는 내용이 들어있었습니다. 곧 모세의 율법이 이혼증서를 주어서 보내라고 한 것은 이혼을 정당화하는 법이 아니라 사람들의 완악함으로 인해 더 큰 죄들을 짓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첫째는 남편들이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서 방종하고 아내를 학대하고 아내를 버리는 경우를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는 남편의 잘못으로 학대받는 것을 막고 혹 아내 자신이 간음하여 버림받았을 지라도 사회적으로 받을 형벌과 각종 불이익로부터 보호하므로 살길을 열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특히 이혼증서를 써 주어서 내어 보내라는 내용이 들어있는 내용은 신명기 24장의 내용이었습니다. 신명기는 대부분의 규례가 사회적인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에게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두 번째의 의미는 더욱 부각됩니다.
그러므로 이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고전7:10-11). 배우자가 간음을 했을 경우엔 이혼할 수 있지만 그것도 용서할 수 있으면 이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용서되지 않는다면 학대하지 말고 합법적으로 이혼을 해주어서 정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이혼을 자기의 죄를 감추거나 죄를 짓는 기회로 여겨서 안 됩니다. 성경에 이혼이 허락된 경우가 세 가지입니다. 배우자가 간음한 경우 (마19:7-9), 믿지 않는 배우자가 신앙문제로 이혼을 요구할 경우 (고전7:12-16), 전쟁이나 천재지변 등으로 합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경우 등이 있습니다 (렘29:4-7). 그 외에도 그에 준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결혼생활이 불가능할 상황이라면 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그것 자체가 이혼을 근본적 허락하기보다는 더 큰 죄를 막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고 그런 경우에라도 긍휼을 베푸는 쪽을 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한 심성을 감안하여 주신 말씀들을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허락하신 것으로 오해하고 있지는 않는지, 또한 그 말씀들을 오히려 우리의 죄성과 잘못을 감추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지 않는지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3. 독신에 대한 교훈 (10-12절)
10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12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예수님은 앞서 바리새인들의 이혼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근본적으로 간음한 연고 외에는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은 근본적으로 이혼할 수 없다는 가르침과 음행한 경우에만 이혼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듣고 축첩제도가 성행한 당시에 거의 불가능한 가르침으로 여긴 듯 합니다. 그래서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고 했습니다 (10절). 그렇게 까다로운 가르침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편이 더 낫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 수 있는 것은 타고난 고자만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고자는 태어날 때부터 고자가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스스로 고자된 자도 있는데 혼자 사는 것은 감당할 수 있는 사람만 하라고 했습니다 (11-12절).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성불구자나 성욕결핍자로 태어난 경우가 있습니다. 또 왕실에서 수종드는 내시 같이 사람이 고의로 고자를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오리겐이나 바울처럼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독신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라고 했습니다 (고전7:7). 바울 자신은 혼자 살았으나 실제적인 고자이든 하나님이 혼자 살 수 있는 은사를 주신 경우 외에는 혼자 지내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7:9에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독신생활을 더 거룩하게 보거나 권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19:12, 딤전4:3). 그러나 바울은 말세를 당하여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고전7:26-27). 그것은 믿음생활에 방해받을 뿐 아니라 많은 고난이 있겠기 때문입니다. (고전7:28). 장가간 자는 어찌하면 아내를 기쁘게 할까 염려하고 아내는 어찌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까 염려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주를 위한 염려를 하지 않고 세상 염려를 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고전7:32-35). 그래서 자기도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혼자 살았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자나 과부된 자는 정욕이 불타 범죄할 정도가 아니라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혼자 사는 것도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그렇게 말한 의도는 결혼이나 가정생활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사역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서로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고린도전서7:29-31에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한 자이든 이혼한 자이든 주께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7:23-24에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 했습니다. 그 원리는 마치 말세에 자녀를 둔 자는 환난을 겪게 될 것이지만 자녀를 낳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에게 얽매이지 않아야 함과 같은 것입니다 (마24:19).
4. 어린 아이들을 통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교훈 (13-15절)
13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15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안수기도를 받게하려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아왔습니다 (13절). 유대인들은 갓난아기들을 랍비에게 데려가 축복을 받게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Chrysostom). 사람들은 그런 관습에 의해 자기 아이들을 예수님이 축복해 주기를 바라고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어린 아이'에 해당하는 '파이디온'(παιδιον)은 7세 미만의 어린 아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18:15에는 '어린 아기'로 번역한 ‘브레포스’(βρεφος)로 기록했는데 이는 젖 먹는 아기를 가리킵니다. 그런 점을 보면 어린 아이들과 심지어는 갓난아이들까지 데리고 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어린 아기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 제자들은 그 부모들을 꾸짖었습니다. ‘꾸짖거늘’에 해당하는 원형 ‘에피티마오’(επιτιμαω)는 ‘책망하다’ ‘비난하다’ ‘금하다’ 등의 뜻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실 때 부모들이 어린 아기들을 데려오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중단시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린 아기들이 예수님께 안수기도를 받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고 그런 하찮은 일로 예수님이 설교하는 일을 방해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책망하며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금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들이 나아오는 것을 허락하고 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그런 자들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14절). '천국'(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은 직역하면 '하늘 나라'인데, 병행구절 마가복음10:14와 누가복음18:16에서는 '하나님 나라'(η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현재 지상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과 그 유기적 공동체의 모든 영역을 말합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왕으로서 하나님 말씀으로 통치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자’(τοιουτων)는 ‘이와 같은 자’를 말합니다. 곧 하나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은 성격 혹은 특성을 가진 자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병행구절인 마가복음10:15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했고, 누가복음18:17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으로서 어린 아이 같이 받아들이는 자들이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린 아이의 특성 가운데 긍정적인 특성을 비유하여 교훈을 가르친 것입니다. 마태복음18:44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라고 했는데 이는 어린 아이의 낮은 신분과 위치를 강조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어린 아이의 받아들이는 특성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린 아이가 들어간다는 말이 아니라 어린 아이 같이 하나님 나라를 순수하게 곧장 받아들이는 자들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받들지'와 '받아들이지'에 해당하는 기본형 ‘데코마이’(δεχομαι)는 ‘받다’ ‘취하다’ ‘영접하다’ 등의 뜻입니다. 어린 아이의 특성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의 하나는 순수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어린 아이는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이고 주는대로 받아들이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를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고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구약성경에서 약속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 믿는 자에게는 성령님의 내주와 하나님 말씀의 내주로 하나님이 통치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는 거듭나고 성령님과 말씀이 지배하여 하나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거듭난 사람들의 유기적 공동체에 확대됩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온 세계로 확장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그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참여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그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인하고 대적하고 모해했습니다. 하지만 이 현장에 오는 나아오는 어린 아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가 주시는 은혜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의 표상이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특성 가운데 본문의 상황과 연관시킬 수 있는 특성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먹을 것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배고프면 어른처럼 참지 못하고 상황도 생각지 않고 보채고 웁니다. 둘째는 가르친 대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궁금하여 알고자 하는 욕망이 많을 때이고 또 가르쳐 주면 비판의식을 갖지 않고 그대로 믿는 성향이 있습니다. 셋째는 시킨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부모나 선생님이 시키면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하려고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넷째는 따라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부모나 어른들이나 연예인들을 모방하기를 좋아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교훈과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사모함도 없었고 믿음이 없었고 순종함도 없었고 모방함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제자된 우리에게 요구되는 성품은 사모, 믿음, 순종, 모방일 것입니다. 주의 은혜를 사모하고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고 모방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5. 부자 청년의 영생에 관한 질문에 대한 대답 (16-22절)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어떤 사람에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했습니다. 그는 재물이 많은 청년이었으며 (22절), 관리였습니다 (눅18:18). 이 관리는 정확히 어떤 관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로마 정부에 의해 임명된 정부 관리일 수도 있고, 산헤드린 공회 회원일 수도 있고, 회당을 맡아 보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였습니다 (16절). ‘영생’(ζωη αιωνιος)은 문자적으로 ‘영원한 생명’으로서 죽음을 극복한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죽어도 부활하여 천국에 가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영생(永生)은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 믿어서 얻어지는 은혜입니다 (요3:5,16, 마16:16-17, 요11:25). 요한복음3:5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했고 (마16:16-17), 요한복음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고, 요한복음11:25-26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했습니다. 이 영생은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3:28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했습니다 (롬10:10). 그런데 이 관리는 영생에 대해 그렇게 알고 있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얻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영생의 조건을 선행으로 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것을 확실히 확인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청년이 예수님에 대해 ‘선한 선생님’이라고 호칭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 답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존경하여 높이기 위해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겠지만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선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한 데 대해 거부하고 선한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선하지 않다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 그가 예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도덕적 기준으로 예수님을 선하다 하는 것을 아시고 선의 의미를 절대적인 의미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선한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지만 성부 하나님의 권위를 높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17절). 계명(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생의 조건으로 율법준수를 제시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영생을 얻는 조건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행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관리는 계명(율법)을 지켜야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율법준수에 자신만만하여 그것을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곧 관리는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자신은 계명(율법)을 다 지키기 때문에 영생을 얻을 자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어서 영생에 관한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생각과 의도를 아시고 그의 허영을 드러내기 위해 계명(율법)을 다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곧 ‘네가 계명(율법)을 다 지키므로 영생을 얻을 것이라 자부하고 그것을 드러내려 하는데 그럼 네가 정말로 계명(율법)을 다 지킨다는 말이냐?’의 의미로 계명(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어느 계명이오니이까?"였습니다 (18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시자 청년은 어떤 계명을 지켜야 하는 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어지는 대화 내용으로 보아 부자 청년은 십계명을 지키는 자였습니다. 부자 청년은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계명이 있는가 생각하여 그런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십계명 외에도 많은 율법적 계명을 만들어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는 대답을 했습니다 (18-19절). 이는 십계명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출20:12-16, 신5:16-21). 1-4계명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의무에 관한 1-4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의무에 관한 5-10계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강령으로 이웃 사랑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중 1~4계명은 하나님에 관한 계명이고 5~10계명은 사람에 관한 계명이라 할 수 있는데 사람에 관한 계명은 '이웃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영생을 얻는 조건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행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자 청년은 율법(계명)을 지켜야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율법준수에 자신 만만하여 그것을 인정받고 싶어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고 그의 허영을 드러내기 위해 계명(율법)을 다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리이까?"였습니다 (20절). 부자 청년은 계명(율법)을 다 지키는 일에 자신 만만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녀들이 5~6세가 되면 율법 공부를 시키고 그 율법을 준수하게 했습니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그는 실제로 어려서부터 율법에 대해 배웠을 것이고 비록 외부적으로 습관적으로나마 지켰을 것입니다. 그는 율법을 피상적으로 지킨 것 때문에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21절). 누가복음18:22에는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막10:21). 마태복음19:21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율법(계명) 준수에 온전하고자 한다면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또하나의 지켜야 할 계명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가 지켰다고 자신 만만해 하는 것이 습관적 혹은 형식적인 것이라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5~10계명의 중심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8-19절에서는 5~10계명을 말씀하시면서 끝에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는 말씀을 추가했습니다. 그가 계명(율법)을 바로 준수하려 한다면 계명(율법)을 주신 목적과 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증거로 나타나는 행위는 무엇이라 규정하기 힘들지만 이 관리는 큰 부자였기 때문에 자기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큰 부자이면서도 재물을 나누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계명(율법)을 다 지킨다고 자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그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그보다 가치있는 상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서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21절). 예수님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준 다음에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통해 영생을 얻게된다는 사실을 반영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사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것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12제자들처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가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관리가 맨 먼저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을지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그에 대한 대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계명(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과정에 속한 질문이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결론에 속한 대답인 것입니다. 곧 영생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진짜 대답인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을 버릴 수 없어서 근심하며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22절). 마가복음10:22에는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따르라고 하자 이 관리는 재물이 많은 큰 부자였으므로 근심하며 슬픈 기색을 띠고 가버린 것입니다. 이 관리는 물질에 대해 이웃을 사랑하는 것 곧 계명(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보다 사랑했고 예수님을 따른 것보다 사랑했고 영생을 얻는 것보다 사랑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소유에 대한 포기는 그가 계명을 온전히 지키고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은 다음에는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4:19-20에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라고 했습니다 (막1:18).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것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은 증거이며 구원과 영생을 확신한 증거이며 예수님께 인생을 맡긴 증거인 것입니다.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할 수 없다면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목적에 합당한 결실을 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8:14에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려면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우상이 되어있으면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mammonism). 골로새서3:5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했습니다 (약1:15, 요일2:16).
우리에게는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본문에 나오는 관리에게 있어서는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18:22). 누가복음3:10-14에는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막10:29-30).
6. 부자와 천국의 관계에 대한 교훈 (23-26절)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을 '계명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부자 청년은 계명을 다 지키는데 무엇이 부족하느냐고 재차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되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의 행동과 관련하여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격언구를 사용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놀라 구원 얻을 사람이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23-26절).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엡2:8).
‘낙타’와 ‘바늘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문자 그대로 ‘낙타’와 ‘바늘귀’로 보는 견해입니다 (Lange). 이 경우 짐승인 낙타가 바느질하는 바늘귀로 들어가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무엇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유대인들의 특징적인 과장법으로 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낙타’와 ‘좁은 문’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Barclay). 성곽이 있는 도시는 한 성문에 2개의 문이 있는데 그중 큰 문은 낮에 사람이나 짐 수레 등이 다니는 곳이며 작은 문은 밤에 사용하는 문으로서 사람이 서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문이었고 그 문은 흔히 '바늘귀 문'으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낙타처럼 큰 짐승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밧줄’과 ‘바늘귀’로 보는 견해입니다 (Calvin). ‘밧줄’에 해당하는 ‘카밀로스’(καμιλος)를 ‘낙타’를 의미하는 ‘카멜로스’(καμηλος)오 혼동하여 오기된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이 경우 선박용처럼 굵은 밧줄이 바늘귀에 꿰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 가지 이론 중 어느 것을 채택하든지 본문의 뜻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가능성이 힘든 것에 대한 표현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그처럼 어렵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그토록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힘든 것은 그 재물이 자기의 우상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mammonism). 부자는 재물을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과 영생을 얻는 일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 예수님을 믿어 구원과 영생을 얻는 일을 거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자는 재물을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님의 은혜와 말씀의 은혜보다도 중요하게 여겨 그것을 거절하기 쉽습니다. 앞서 나온 부자 관리처럼 그 같은 부자는 재물에 대한 욕심 곧 소유욕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포기했습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은 그것을 얻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두고 그것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그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재물을 삶의 가장 우선 순위에 두기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을 거절할 수도 있고 성령님의 은혜와 말씀의 은혜도 거절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내세의 천국에도 가기 힘들고 지상의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기도 힘듭니다.
하지만 부자가 되는 것 자체를 죄악시해서는 안 됩니다. 부(富)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부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복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시112:3). 부자 가운데는 그 재물로 인해 은혜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받아 쓰임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삭개오나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도 부자였습니다 (눅19:9, 마27:57, 요19:39). 부나 재물 자체가 죄가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 죄입니다. 디모데전서6:10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과 욕망이 너무 클 경우 예수님을 믿거나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 방해가 됩니다. 그것에 지나치게 집착할 경우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받을 수 없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온전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야고보서1:14-15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실제 부자라도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으면 은혜를 받을 수 있고 가난하더라도 재물에 대한 욕심이 강하면 은혜를 받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제자된 자는 항상 자족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빌4:11). 빌립보서4:11-12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습니다.
7. 헌신과 상급에 대한 교훈 (27-30절)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앞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부자 관리의 대화를 지켜보았습니다. 부자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묻자 예수님이 그에게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예수님 자신 따르라고 했습니다. 부자 관리는 근심하면서 돌아 가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자기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니 영생도 얻을 것이고 그 외에 더 많은 상을 얻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예수님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27절). 실제로 제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4:22, 막1:18,20, 2:14, 눅5:11,28). 그들은 자신들이 부자 관리와는 달리 예수님의 요구대로 행한 자들로서 영생을 얻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더 많은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은근히 자신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예수님께 그 같은 질문을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했습니다 (28절).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다는 사실이 전제된 표현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인 것을 믿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자는 예수님이 하늘 나라에 올라 모든 사람을 심판할 때 함께 심판의 자리에 참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주를 따른 자가 천국에 들어가고 예수님이 심판의 주체가 될 때에 그 권위에 참여할 것것을 가리킵니다. 심판의 주체는 주님만이 될 수 있고 제자들이 심판한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심판 사역에 참여하여 보좌하고 대행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했습니다 (29절). 마가복음10:30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19:29-30에는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복음을 위해’는 동일한 다른 표현들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이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는 지상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자입니다. ‘부모형제나 아내나 집이나 전토(田土)’를 버린다는 것은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데 일부러 포기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데 있어서 불가불 포기해야 할 때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박해’를 받는다는 것도 일부러 핍박을 받는 것을 자초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므로 인하여 피할 수 없는 핍박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일부러 모든 혈연관계를 끊고 가진 재산을 다 버리고 일부러 핍박을 자초해야 한다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데 있어서 그런 것들이 장애가 될 경우에 그것들을 잃지 않으려 하거나 그것을 받지 않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각오하고 수용하고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얻고 또 손해 본 것에 비교할 수 없는 상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여러 배 혹은 백배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러 배’ ‘백 배’는 대가를 비교할 수 없이 많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그것 자체가 풍요롭게 된다는 의미도 있고 그것들 이상의 위로와 가치를 얻는다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원리이고, 특수한 경우에는 이 세상에서는 육체적 물질적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경험을 하므로 그것들을 얻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내적 위로와 기쁨을 얻게 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핍박을 받는 자는 내세와 금세에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명을 감당하려 할 때 고난도 옵니다. 디모데후서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은 하늘나라에서 받은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로마서8:18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받는 위로도 비교할 수 없이 큽니다. 고린도후서1:5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30절). 주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라도 주를 따른 자들은 주께서 심판의 주체로 나타나실 때에 심판에 참여할 것입니다. 또 주를 위해 희생한 것에 비하면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위로와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도 있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도 있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놀랄 일이 많을 것입니다. 천국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천국에 와있고, 천국에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오지 않은 것에 놀랄 것입니다. 또 천국에서 작은 자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큰 자가 되어 있고 천국에서 큰 자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작은 자가 된 것에 놀랄 것입니다. 곧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관념에서 생각하던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결론적 선언은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유대인 관점입니다. 예수님이 1절에서부터 변론해온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한 말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10:31과 누가복음13:24-30에 보면 먼저 된 자는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자이고 나중 된 자는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자로 암시되고 있습니다.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반대로 그들이 하나님 나라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방인 특히 세리나 창기 같은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을 암시합니다. 둘째는 제자들 관점입니다. 예수님이 23절부터 대화해온 제자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항상 주의 나라가 임하면 누가 큰 자가 될 것인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서 12보좌에 앉아 예수님과 함께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심판할 권세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는 자는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 마음 속에는 당연히 누가 권세와 상급에 있어서 더 앞 설 것인지, 혹은 어떻게 해야 앞선 자가 될 수 있는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당연한 의문을 미리 아시고 결론을 내렸을 수 있습니다. 바로 다음에 나온 20:1-16의 비유를 보면 두 번째 의미가 더 옳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結言>
세상의 관념과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다릅니다. 세상에서 먼저 된 자가 마지막 때에 나중 될 수도 있고 세상에서 나중 된 자가 마지막 때에 먼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만족과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성경 말씀대로 살려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먼저 믿은 자가 나중 될 수도 있고 나중 믿은 자가 먼저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게 된 시기에 개의치 말고 현재에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정신입니다. 그 의미는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잘 나타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