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마태복음20:1-34

<題目> 천국 실상에 대한 교훈

 

<序言>

  예수님의 메시지 핵심은 천국이었습니다. 20장에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되어짐을 가르치고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재차 천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관심사는 세속적인 데 머무르고 있게 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부단히 가르치신 것은 성령님의 조명이 있을 때 기억나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16:4). 본장의 내용은 포도원 품꾼 비유(1-16), 세 번째 수난 예고(17-19), 야고보와 요한의 야심(20-28), 두 맹인의 신앙(29-34)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포도원 품꾼 비유 (1-16)

 

  19장 후반부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이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나를 좇는 너희도 12보좌에 앉아 12지파를 심판하리라~ 내 이름을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질문 의도를 파악한 주님은 이어서 "그러나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으리라"고 했습니다 (19:27-30). 그리고 그러므로’ ‘왜냐하면의 뜻을 가진 가르’(γαρ)라는 접속사로 시작하여 본 포도원 품꾼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1-15절에서 포도원 품꾼에 대한 비유를 한 다음 16절에서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했습니다. 곧 포도원 품꾼 이야기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는 예를 말하려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 된 자가 어떻게 먼저 될 수 있는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이 천국에 대해 이른바 포도원 품꾼비유로 설명했습니다.‘천국’(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ον)은 문자적으로 하늘나라를 말하지만 의미상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4:17). 곧 천국은 복음으로 이루어진 영적인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포도원을 경영하는 한 집 주인이 추수할 때에 일손이 모자라 품꾼을 구하기 위해 이른 아침에 장터에 나갔습니다. 이른 아침에 만난 품꾼들에게 하루 품삯으로 1데나리온씩을 주겠다고 하고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제 3시에 나가보았더니 장터에 놀고 있는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품삯을 상당하게 줄 것이니 포도원에 들어가고 하고는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제 6시와 제 9시에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제 11시에 나가보니 아직도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서 있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하루가 다 지나 날이 저물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 11시에 온 자들이 먼저 1데나리온씩 주었습니다. 그것을 본 먼저 온 자들이 자기들은 그보다 더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1데나리온씩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1데나리온씩을 받고는 포도원 주인을 원망했습니다.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은 1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그들에게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자기들과 같이 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그 중 한 사람에게 대답했습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했습니다 (1-16).

 

  포도원은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거의 전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포도원은 감람원과 함께 생활의 터전이었습니다. 당시 포도원은 주로 9월 말에 추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추수 때가 되면 일손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추수 때가 지나면 우기가 시작되므로 장마철이 오기 전에 다 수확을 하지 못하면 1년 농사를 망치기 때문에 속히 추수를 마쳐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추수기에는 많은 일손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집 주인)은 품꾼들을 데려오기 위해 이른 아침에 장터에 나갔습니다. ‘장터’(αγορα)는 집회 장소로 쓰이는 광장(forum)이나 상거래를 하는 장터를 말합니다. 그곳에서는 인력시장이 개설되어 품꾼을 고용하는 장소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나가 1데나리온을 약속하고 품꾼들을 데려왔고, 3, 6, 9, 11시에도 나가서 품꾼들을 데려왔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마도 추수가 급했기 때문에 하루 종일 일하지 않더라도 몇 시간만이라도 일할 품꾼들을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품꾼은 대가를 받고 일을 해주는 사람으로 오늘날 일용직에 해당합니다. ‘이른 아침은 당시 0시로서 오늘날 오전 6시 경을 가리키고, 다른 시간들도 오늘날 시간으로 이해하려면 그 시간에 6시간을 더하면 됩니다. 유대인들은 본래 하루를 일몰에서 일출까지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A.D.1세기를 전후로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기 시작하면서 로마에서 사용하는 24시간제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일몰이 시작되는 저녁 6시를 0시로, 일출이 시작되는 아침 6시를 12시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일몰부터 24등분을 하므로 전통적인 유대식과 로마식을 혼합한 시간 개념을 만들어 사용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보다 6시간 앞선 시간 개념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으로 이해하려면 그 시간에 6시간을 더해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 본문에 나오는 시간 이른 아침은 오전 6시로, ‘3는 오전 9시로, ‘6는 정오 12시로, ‘9는 오후 3시로, ‘11는 오후 5시로 이해하면 됩니다. ‘데나리온’(δηναριον)은 로마의 화폐인데 1데나리온은 당시 일꾼 한사람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1데나리온은 당시 여인숙의 숙박비가 20분의1 데나리온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적은 금액은 아닙니다.

 

  날이 저물어 오후 6시가 되자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품꾼들을 불러 품삯을 주게 했습니다 (8). ‘청지기’(επιτροπος)는 주인의 권위를 위임받아 집의 재산과 일을 관리하는 관리자 곧 지배인을 가리킵니다. 하루 일을 마친 이 때 품꾼들에게 품삯을 지불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율법에는 품삯을 당일 일몰 전에 지불하도록 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19:14, 24:15).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에게 품삯을 주라고 할 때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명령을 따라 청지기는 품군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자들에게 1데나리온씩 주었습니다. 다른 품꾼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자기들은 더 많은 품삯을 받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청지기는 다른 모든 품꾼들에게도 1데나리온씩 주었습니다. 그들은 1데나리온씩 받은 후 포도원 주인을 원망했습니다 (11). ‘원망하여’(εγογγυζον)의 시제가 미완료형인 것으로 보아 그들은 계속해서 불평을 한 것입니다. 자기들은 일찍 와서 종일 일하되 더위를 견디면서 수고했다는 것입니다. 9월에는 식물들까지 말라버리게 하는 작열하는 태양과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으로 인하여 그들은 고통스럽게 일했을 것입니다 (27:21, 4:8, 12:1). 그런데 맨 나중에 들어와 1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자들과 품삯을 동일하게 주었고 더욱이 그들을 더 앞세웠다는 것입니다 (12). 포도원 주인의 행위가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당시에는 통상적으로 품삯을 시간제로 지불했다고 하니 그들의 불평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그 중 한 사람에게 대답했습니다.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먼저 온 들어온 자에게 1데나리온을 약속해서 1데나리온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약속한 품삯을 지불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1데나리온은 주는 것은 자기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1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자기 권한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자기 것으로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은 당여하다는 것입니다. 나중 들어온 자들에게 일한 것에 비해 더 준 것은 그들에게 선을 베푼 것인데 그것을 도리어 악하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13-15). 곧 먼저 들어온 자들에게 1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약속한 대로 준 것이니 계약대로 정당하게 행한 것이고 나중 들어온 자들에게도 1데나리온을 준 것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기 때문에 불공평한 처사가 아니라 도리어 선을 베푼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기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16). 그렇게 되기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가장 늦게 들어온 자들을 가장 인정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아마 포도원 주인이 품꾼을 인정해주는 기준은 일한 시간이 아니라 일하는 태도 곧 충성도가 아니었겠는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첫째, 포도원에서 일하기를 간절히 소원했을 것입니다. 포도원에 맨 나중에 들어간 자는 제 11시에 들어간 자입니다. 이 사람들은 아침 일찍 6시에 포럼에 가서 품꾼으로 써주기를 바라면서 서 있었습니다. 일꾼이 보통 1시간이 지나도 고용되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오후 5시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추측하건데 그는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적 상황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노동을 나온 것 보면 가난한 집이었을 것이고, 하루 벌어서 하루 연명하는 가정이었을 것입니다. 당일에 양식을 가져가야 식구들이 먹고 살게 되기 때문에 양식을 얻기 위해 반드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은 시간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었지만 1시간만이라도 일하려고 발을 동동 구르며 포럼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 주인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일을 했을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럼에서 아침부터 품꾼들을 선택하면서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하거나 상당하게 주리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후 5시에 들어간 품꾼에게는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5시에 들어온 품꾼들은 자기를 써 준 사람이 너무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포도원에 들어가 주인의 은혜에 감사해서 어떤 조건도 묻지 않고 따라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는 아침 6경에 포럼에 나와 있었으나 누구도 고용해가지 않았습니다. 고용주들이 일을 잘할 수 있는 건강한 사람부터 고용해갔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상했을 것입니다. 오전 9, 12, 오후 3시가 지나도록 자신은 고용 대상에서 제외되는 상황을 접하면서 자존감이 완전히 깨어졌을 것입니다. 그대로 집에 돌아가면 집안 식구들의 실망하는 눈초리와 상관없이 스스로 열등감과 분노가 일어나 견딜 수 없었을 것 것입니다. 어쩌면 아예 집에 들어가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후 5시에 자신을 고용해주는 포도원 주인이 있었으니,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자신을 인정해주었으니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아마 일할 때도 궂은 일을 다 했을 것입니다.

 

  셋째, 주인의 은혜를 보답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일을 했을 것입니다. 포도원에 1시간 남겨놓고 오후 5시에 들어온 자들은 주인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일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이 1시간 밖에 남지 않았기에 갖은 힘을 다해 일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시간만 채우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했겠지만 이 사람들은 일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줄 알고 그 시간 안에 은혜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을 했을 것입니다.

 

  사실 본문 비유에서 초점은 얼른 보면 품꾼들의 행동에 맞추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포도원 주인의 주권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추수가 급하여 이른 아침에 포럼에 나가 품꾼을 구했고 9, 12, 3, 5시에도 품꾼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모두 품꾼으로 채용했습니다. 그리고 일을 마치자 5시에 들어온 자들부터 품삯을 주되 모두에게 1데나리온씩을 주었습니다. 일찍 들어온 자들이 불평하자 14-15절에 보면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의 주권이 강조된 것입니다.

 

  본문의 비유에서 포도원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는 그 하나님 나라에 속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청지기는 예수님을 상징하고, ‘장터는 세상을 상징하고, ‘품꾼은 성도들을 상징하고, ‘데나리온은 구원과 영생을 상징하고, ‘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상징합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전도를 비롯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한 많은 사역들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6)3’(9)6’(12)9’(3)11’(5) 등의 각 시간들은 역사의 각 시대에 대한 상징이라 할 수도 있고, 각 개인의 때에 대한 상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제 11시에 들어온 자는 시대적으로 마지막 때로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세상 마지막까지를 가리키고 (Vitringa, Gregory), 개인적으로 인생에서 마지막 때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Augustine). ‘날이 저물어 품삯을 줄 때는 최후심판 때를 상징합니다 (Bengel).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성도들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사역을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 가운데는 시대적으로 일찍 들어온 자들도 있고 늦게 들어온 자도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최종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그때에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모든 성도들은 언제 들어왔든지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늦게 들어온 자처럼 충성스럽게 사역을 한 자들은 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3:14-15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 했고, 고린도후서5:10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고, 요한계시록22:12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비유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을 통해 하나님이 성도를 향해 가진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품꾼을 채용할 때 하인들에게 시키지 않고 본인이 직접 이른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지 나가 품꾼들을 찾았습니다. 심지어 일할 시간이 1시간밖에 남지 않은 오후 5시에도 직접 포럼에 나가 품꾼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권적으로 품꾼들을 택하여 불렀습니다. 오후 5시에 만난 품꾼들도 불러 포도원에서 일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들은 누가 품꾼으로 써주는 이가 없어서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기를 포기해야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당시 하루 벌어서 생활을 하던 품꾼들로서는 가족들에게 위신이 서지 않아 집에도 들어가기 힘들었던 자들이었을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자신은 아무데도 쓸데없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자존감이 상해 자포자기에 이를 자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그들을 인정하여 포도원에 들어와 일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일을 마친 후에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충성도를 보고 다른 사람들보다 앞세워주었습니다. 그들은 포도원 주인이 1데나리온을 준 것과 가장 앞서 인정해준 사실 때문에 자존감이 생기고 가장 행복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대적으로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은 종말에 주권적으로 우리를 택하여 불러주셨습니다 (1:5). 그래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습니다. 개인적으로 나이가 다 들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아무도 인정해지 않는 그야말로 세상에서 아무 쓸모없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자포자기를 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해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되게 해주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고전1:27-28). 전도와 선교로 시작해서 음식을 하며 차량운행을 하며 청소를 하는 등 여러 사역을 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9:37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고 했습니다 (6:8). 하나님이 택하여 불러주시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해주시고 구원과 영생을 보장해주시고 하찮은 봉사라도 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느끼면서 하나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제 최후심판 때 상을 얻을 기회까지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사역에 헌신해야 합니다. 작열하는 태양과 뜨거운 바람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1시간 밖에 남지 않은 자의 심정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15:58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일할 시간이 없습니다. 사명 감당할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 시간도 없습니다. 주께서 도적같이, 해산하는 여인에게 고통이 임한 것처럼 임한다고 했습니다 (13:35, 살전5:2-3, 벧후3:10, 4:7). 개인적으로도 언제 임종을 맞게 될지 모릅니다. 요즘 늙은 사람, 젊은 사람, 어린 사람 할 것 없이 쓰러집니다. 질병과 사고로 수없이 숨집니다 (고전7:31, 대상29:15, 4:14, 벧전1:24, 12:16-21). 우리가 꼭 죽지 않는다고 해도 물질이나 육체나 지력이나 여러 환경이 일하지 못하도록 할 때가 곧 옵니다. 특히 그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 하더라도 말씀의 은혜와 성령님의 감동이 없으면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죽음 후에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습니다 (9:27). 그땐 충성도에 따라 상을 얻게 됩니다 (고전3:14-15, 벧전4:27, 9:10, 딤후4:7-8). 그러므로 주님이 오시기 전, 우리가 죽기 전, 우리가 일할 수 없을 상황이 오기 전에 헌신해야 합니다. 아직 살아 있을 때, 일할 수 있을 때, 예수님께서 함께 동행할 때, 성령님의 감동이 느껴질 때, 말씀이 깨달아질 때 신앙생활에 매진해야 하며 사역적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9:4, 8:1, 24:30-34, 26:13-15). 

 

 

       2. 세 번째 수난 예고 (17-19)


  16:21, 17:22-23에 이은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입니다세 번째 예고는 전보다 훨씬 구체적입니다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마치고 사마리아 지방을 돌아 유대 지방 베레아를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습니다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유월절에 맞추어 올라가 대속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마가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님이 제자들 앞서 가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놀라고 따르는 무리들이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10:32). 그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유월절에 친히 대속 제물이 되고자하는 목적을 향해 가는 단호한 의지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12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셨다고 했습니다 (17). 누가복음19:31에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한 말씀들 중에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의 대속을 위한 고난과 죽음이 시편9:19, 22:15, 이사야53:9, 스가랴12:10 등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대속을 위한 고난과 죽음을 당하는 것은 바로 그 말씀대로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자는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를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었는데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용어입니다. '인자'(人子)'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그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로서, 다니엘7:13-14'인자같은 이'케바르 에나쉬’(כבר אנש)를 말하는 관용적 용어입니다. '인자'는 예수님 자신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임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28:10-14, 삼하7:12-14, 1:26-28, 7:13-14). 예수님은 자신이 그 구원자로서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대로 고난받아 죽어야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52:13-53:12).


  예수님은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고 했습니다 (18-19). ‘인자는 앞서 언급한대로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를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었는데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용어입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고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넘기고 이방인들이 조롱과 능욕과 침 뱉음과 채찍질을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로 구성된 (15:1) 유대교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를 말합니다. '산헤드린'(סנדרין, συνεδριον, Sanhedrin)'함께''좌석'의 합성어입니다. 기원에 대한 분명한 자료가 없지만 유대의 전통에 의하면 모세가 구성한 70인 장로회에 기원을 두고 있고 (11:16-24)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에스라가 재조직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까지 계속 활동을 했습니다. 공회원은 의장 1(대제사장)과 의원 70(제사장24, 서기관22, 장로24)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공회는 당시 중요 사안에 대한 회의의 의결을 하는 곳으로서 유대교의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주로 율법 해석 문제를 다루고 율법에 의한 재판을 주관하고 성전에 대한 운영 및 치안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행정권은 물론 사법권까지 가지고 행사하는 막강한 공기관이었습니다. 모세 때나 에스라 때에는 좋은 역할을 했지만 예수님 때에는 심히 부패하고 타락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로마 제국의 유다 총독인 빌라도 정권을 말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죽이도록 내어주고 군병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됩니다. 예수님이 당할 고난과 죽음은 육체적 심리적 영적으로 가장 큰 고통입니다. 예수님이 그처럼 고난과 죽음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게 됩니다. 그것은 택함받은 백성들의 죄가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이심을 믿는 자는 법정적으로 죄 용서를 받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53: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고 했고, 베드로전서2: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며 신앙의 근거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고난과 죽음의 길을 향해 마주 걸어가셨습니다. 모든 삶과 사역이 그 길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가 가야 할 길을 향해서만 가는 분이었습니다 (22:22, 4:34). 우리도 제자로서 예수님께 받은 사명이 우리 인생의 목적과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한편 제자들은 그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마태는 생략했지만 누가복음18:34에는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이 세 번째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된 메시야관과 신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를 다분히 육체적 정치적인 왕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는 유대의 왕이 되고 유대를 다윗 왕 때의 번영한 국가로 재건할 자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대의 왕이 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기들은 어떤 자리에 오를 것이며 어떤 상을 얻게 될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다투기도 하고 예수님께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의식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할 것이라는 예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그 말씀이 감취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야인 것을 드러내야할 때가 되기 전까지는 감추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도 깨닫게 해야 할 때가 되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도 말씀하셨던 것은 제자들이 깨달아야 할 때에 기억나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16:4, 14:72, 24:6).

 


       3. 야고보와 요한의 야심 (20-28)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①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큰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시고 무엇을 구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했습니다 (20-21). '세베대의 아들'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로서 살로메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간입니다 (27:56, 15:40, 13:25). 예수님께는 이모가 되는 관계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리라 약속한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인 것을 믿었지만 육적인 유대인의 왕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다윗과 같은 혹은 다윗을 능가한 왕으로서 유다를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독립시키고 다윗왕 때의 전성기를 누리게 할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유다의 왕이 되면 자신들을 등극 공신으로 여기고 권세를 부여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는 직접 예수님께 주의 나라가 임하면 자기들을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10:35-37). 야고보와 요한의 생각을 능히 알고 있고 또 그들과 생각이 같은 그들의 어머니도 나서서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20-21). 아마 자신이 예수님의 이모가 되기 때문에 더 잘 들어주리라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19:25).

 

  마가복음10:35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어머니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함께 청탁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듣고도 예수님에 대해 여전히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4절에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라고 했고, 마가복음10:41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라고 했습니다. 자기들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야고보와 요한이 친척관계를 이용하여 높은 자리에 앉게 해달라는 청탁을 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난 것입니다. 그들은 여태껏 누가 큰 자인지 다투어 왔습니다 (18:1-4).

 

  그러고 보면 살로메, 야고보와 요한, 다른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이 정치적인 왕이 되고 정치적인 나라를 세울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그 나라가 세워지면 자기들도 높은 자리에 앉게 해줄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의 제자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역에 열심을 가지기 것보다 구원사적 이해를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기도하실 때에 요한복음17: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했습니다.

 

   ② 예수님은 자기의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서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22). ''은 예수님께서 당해야 할 고난을 상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26:39, 18:11).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하는 고난도 함께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높은 자리에 앉게 해달라는 것은 고난도 당하게 해달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것을 모르고 높은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 의미도 알지 못해 예수님이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니 할 수 있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 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23).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예수님이 당하는 고난을 당한다면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한 자들은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에 대한 예언적 의미가 담겨있기도 한 말씀입니다. 야고보는 12사도 중 최초로 순교당했고, 요한은 일평생 유배생활로 극한 핍박 속에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어떤 이는 요한이 순교 당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16:24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1:29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가 되려면 순교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 외부적으로 순교를 당하든 당하지 않든 내적으로 순교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③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이 높아지려는 마음을 가진 것을 보고 제자들을 불러다가 교훈하였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권세를 부리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가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목숨을 많은 사람에게 대속물로 주기위해 왔다는 것입니다 (24-28). ‘인자는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예수님이 자신에게 적용하고 있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인자'(人子)'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그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로서, 다니엘7:13-14'인자같은 이'케바르 에나쉬’(כבר אנש)를 말하는 관용적 용어입니다. '인자'는 예수님 자신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임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28:10-14, 삼하7:12-14, 1:26-28, 7:13-14). '대속물'(代贖物)에 해당하는 '뤼트론'(λυτρον)'속전'을 말하는바 노예를 풀어주기 위해 지불하는 몸값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로서 자기 백성들을 죄와 죽음과 지옥형벌에서 구원하기 위해 대신 죽어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곧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26-27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인정받아 높아지려면 종의 위치에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 해당하는 둘로스’(δουλος)는 종(하인, 노예)을 말합니다 (servant KJV, slave -NASV, NIV). 섬기는 자에 해당하는 디아코노스’(διακονος)는 시중드는 사람을 말합니다. 식탁이나 천한 일에 시중을 드는 사람을 말합니다 (minister KJV, servant -NASV, NIV). 오늘날 목사도 이에 속한 자입니다 (minister, pastor, reverend).

 

  예수님 자신도 섬기는 자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오셔서 친히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첫째, 낮아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2:6-8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된 분으로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비하의 몸으로 오신 것은 극히 낮아진 것입니다. 둘째, 대속물이 되어 주심에서 볼 수 있습니다. 28절에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대속물은 어떤 사람의 저당 잡힌 토지를 되찾아주거나 어떤 사람의 노예 신분을 벗게 해주기 위해 지불하는 돈을 의미합니다. 또는 심각한 죄를 지어 사형을 받아 죽게 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어주는 짐승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선택한 자들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대신 죽어주셔서 친히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2:8). 셋째, 발을 씻어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13:4-5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중에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어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세족식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 선생님으로서 제자의 발을 씻어준 것입니다 (13:13). 제자들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낸 자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 하나님의 사명을 가진 자로, 하나님이 영광 받을 목적이 있는 자로 여기고 존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무가치하게 여기며 무시하는 이방인과 여자와 어린아이와 죄인과 병자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목적을 가진 자들로 여겨 존대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녀에 대해 인격을 존중해야 함에 대해 말했습니다. 에베소서6:4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은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인격을 존중하라는 의미입니다. ‘섬기다는 말 자체가 사전적으로 공경하여 받들어 모시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섬기는 자로 모범을 보여주신 정신은 낮아짐과 희생과 존중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모범을 정신으로 하여 섬기는 실천을 해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섬기는 자의 실천에 있어서 염두에 두어야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첫째, 자기책임 의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권리만 주장하지 말고 자기에게 해당하는 의무에 관한 책임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생활에 있어서 자신의 필요는 자신이 벌어서 생활을 해야 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자신이 해야 합니다. 그것이 다른 구성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공동체에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됩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부분은 감당하지 않고 다른 구성원이나 공동체의 도움을 받으려는 것은 섬기는 자세가 아닙니다. 둘째, 배려하는 의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배려는 대상자를 이해하고 대상자의 기호와 방법에 맞추어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기 주장만 하고 자기 방식대로 대하는 것은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섬긴다는 말을 영어성경에서는 써브’(serve)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NASV, NIV). 그 배려가 로버트 그린리프(Robert K. Greenleaf)가 말한 섬기는 리더쉽’(servent leadership)의 핵심이고,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예수 이름으로라는 책에서 말한 함께 한다는 의미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동성애자라는 말이 있지만 그가 주장한 의미 자체는 옳은 것임). 셋째, 공동체 의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의 문제만 해결하고 자기 혼자만 잘되고 자기 혼자만 행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잘되게 하려해야 합니다. 모든 이해와 판단과 결정에 있어서 공동체 전체에 대한 관점에서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공동체에서 주인이 되어 주장하는 자가 되지 말고, 종이 되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낮아지고 희생하고 존중하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실천적으로 자기 책임을 다하고 구성원을 배려하고 자기 개인이 아닌 공동체 전체를 위하는 의식으로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빛과 소금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5:13-14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택하여 부르신 목적입니다. 베드로전서2:9“~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공동체에서 섬기는 자가 되므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신 목적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4. 두 맹인의 신앙 (29-34)

 

  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랐다고 했습니다 (29). 누가복음18:35에는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사마리아 지방을 둘러 요단강 동쪽 베레아에서 방향을 돌려 요단강 서쪽 유대 지방 여리고에 이르러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로 들어가셨습니다. '여리고'(Jericho)는 요단강에서 서쪽으로 8km 정도에 유치해 있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예루살렘은 약 24km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여리고는 당시 구여리고와 신여리고로 분리되어 있었고 당시에는 구여리고가 거의 황폐화되어 있었고 신여리고가 발전해 가고 있었습니다. 신여리고는 헤롯왕이 건설했고 헤롯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또한 종려나무가 많은 오아시스 땅이어서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 일행은 그 구여리고에서 신여리고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가기위해 여리고를 지날 때에 맹인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질렀습니다 (30). 마가복음10:46에는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고 했습니다. 아마 두 맹인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맹인이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부르짖은 것 같습니다. ‘바디매오’(Bartimaeus)는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점으로 보아 바디매오의 아버지와 바디매오는 여리고에서 이미 잘 알려진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맹인이었기 때문에 당시 사회적 배경으로 보아 정상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을 것이고 심지어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아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며 살았기 때문에 거지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당시 거지들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도시의 도로변에서 구걸을 하곤 했습니다. 바디매오도 구걸을 하기 위해 여리고 도로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치병 기적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자신도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고자 하는 소원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많은 순례 행렬의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지 물었고 예수님이 지나간다고 하자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맹인의 물음에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했으나 그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하면서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오실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에 대한 관용적 표현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구원자가 다윗의 자손(후손)으로 오실 것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사무엘하7:12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고 했고, 이사야11:1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고 했습니다 (11:10, 15:12). 그래서 맹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 것은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가 구약성경에서 약속한 구원자인 것을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뿐만 아니라 메시야 사역에 대해 이사야61:1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맹인이 예수님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친 것은 예수님이 고칠 수 없는 자기의 눈도 뜨게 할 수 있을 줄로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날 것을 소망하다가 그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는 자기를 긍휼히 여겨달라고 외친 것입니다.

 

  맹인이 예수님께 부르짖자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맹인은 더욱 소리질러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습니다 (31). 사람들은 거지 맹인이 예수님을 그렇게 부르며 치병을 요구하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하지 못해'하는 식으로 매정하게 질타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나아올 때도 보잘 것 없는 아이들이라 생각하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았는데, 여기에서도 사람들이 거지 맹인을 하찮은 존재로 여기고 예수님을 부르짖는 것을 막은 것입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사람들의 꾸짖음에 구하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그가 소리 질러 이르되'에 해당하는 'ž크라존'(εκραζον)이 미완료인 것을 보아 계속 크게 소리 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눈을 뜨기를 원한다고 대답했습니다 (32-33). 예수님이 대속 사역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빠른 걸음으로 앞서 가시고 있었습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놀라고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마가복음10:32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고 했습니다. 대속 사역을 위해 결연한 모습으로 가던 예수님이 맹인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멈춰 서서 그를 부르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맹인에게 예수님이 부르니 안심하고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10:49). 그러자 그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마가복음10:50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고 했습니다. 맹인은 밤낮의 기온차 때문에 외투를 밤에는 침구로 쓰다가 낮에는 걸치고 있었을 텐데 너무 기뻐서 외투를 걷어치우고 뛰쳐 나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불러주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가 눈을 고쳐 주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지만 다시 한 번 물은 것입니다. 맹인에 대한 깊은 관심의 표시인 것입니다. 맹인은 보기를 원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절실한 필요를 구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앞을 보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맹인을 불쌍히 여겨 그들의 눈을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눈을 만지자 그들이 곧 보게 되었고 그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34). 누가복음18:42-43에는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선언하고 그의 눈을 만져주시니 그가 눈을 떠 낫게 된 것입니다. 그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외치는 것을 보고 그의 믿음을 확인하여 구원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고 (삼하7:12, 9:6-7, 11:10), 예수님이 구원자로서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61:1, 4:18), 그에게 구원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입니다. 맹인은 예수님 구원 선언과 치유를 받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맹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인 것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그는 구원 선언과 치유 경험을 통해 가장 중요한 가치를 깨닫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온전한 치유와 변화를 보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린 것입니다.


  맹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병을 고침 받았고 삶의 고통 문제를 해결 받았고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맹인의 믿음을 잘 보여줍니다. 첫째,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인 것을 믿었습니다. 구약시대부터 선지자들을 통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고 약속하신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인 것을 믿은 것입니다 (삼하7:12, 9:6-7, 11:10).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라면 구약에 표현된 메시야 사역을 행할 것이고 메시야 사역을 하는 자라면 당연히 자신들의 눈도 뜨게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61:1, 4:18). 둘째, 예수님 만나는 것을 주변 환경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은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만나려고 자기들 앞으로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곧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꾸짖어 잠잠하게 하였으나 더욱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셋째, 예수님이 물을 때 소원을 아뢰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자 눈을 뜨기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물어본 이유는 몰라서라기보다는 낫고자 하는 열의를 강하게 하고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확고히 하고 나은 다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물음에 지체없이 자신들의 고통의 문제이자 소원인 눈 뜨는 것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일하시며 무엇을 구하면 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바른 소원을 가지고 환경에 구애받지 말고 구해야 합니다. 빌립보서2: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고 했고, 요한일서5:14"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베드로후서1:3-9에 보면 영적인 가치를 보지 못하는 자는 맹인이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눈을 떠 진정한 가치를 보아야 합니다. 영원히 남아있을 가치를 보아야합니다.

   

<結言>

  예수님은 갈릴리에서부터 일관되게 구약에서 예언한 구원자로서 대속사역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 일념에도 불구하고 가는 과정에서 소외받는 어린 아이들과 거지 맹인을 제자들과 무리들과는 달리 거절하지 않고 친히 길을 멈추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는 로마에서 박해로 고통 받으며 주의 위로를 의심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신을 주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날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에 대해서도 외면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