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마태복음27:1-66

<題目>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序言>

  앞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대제사장 가야바 집에서 심문받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본 장에서는 가룟 유다의 자살 사건을 언급한 후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을 받고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십자가 사건을 다루는 데 있어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점을 증명하려 하며 한결같이 구약성경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내용구조는 가룟 유다의 자살(1-10), 빌라도의 심문(11-26),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27-44),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45-50), 예수님의 죽음에 동반된 표적(51-53), 예수님의 죽음의 증인들(54-56), 예수님의 장사지냄(57-61), 예수님의 무덤 경비(62-66)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가룟 유다의 자살 (1-10)

 

  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산헤드린공회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 모여 밤새 예수님을 심문하고 사형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1). 빌라도(Pilate)는 로마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로부터 총독으로 임명되어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매를 다스린 제 5대 총독이었습니다 (A.D.26-36). 그의 관저는 가이사랴에 있었으나 유대인들의 큰 절기에는 많은 군중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어 소요를 일으킬 수 있었으므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그가 머문 곳은 헤롯 궁정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안토니오 요새였을 것입니다. 유대교 최고의결기관이었던 산헤드린공회는 사형 판결을 내렸지만 사형 집행권은 없었습니다. 반면에 로마 총독은 로마 황제의 재가 없이도 관할 지역민에 대한 사형 집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산헤드린공회는 사형 집행권이 있는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재판을 요구한 것입니다. 누가복음23:8-11에 보면 빌라도는 산헤드린공회의 고소로 예수님을 인계받아 심문을 한 후 예수님의 출신지인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 헤롯 안디바에게 넘깁니다. 하지만 헤롯은 그 사건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예수님을 다시 빌라도에게 인계하게 되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다시 인계받아 심문을 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프스(Josephus)에 의하면 유대 관리를 싫어하고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는 지배자였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구별된 돈을 훔쳐 수도 가설비로 유용하므로 예루살렘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그때 군대를 파견하여 양민을 학살했다고 합니다. 그는 또 예루살렘을 더럽힌 적도 있다고 합니다 (13:1).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사형 판결을 받아 빌라도에게 넘겨지자 스스로 뉘우쳐 은 30을 공회원들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갖다 주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공회원들이 은 30을 받지 않자 성소에 던져 넣고 갔습니다 (3-5).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잡아 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예수님의 사형 판결을 보고 아무 죄도 없는 스승을 죽게 한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중압감에서 벗어나가 위해 은 30세겔을 다시 갖다 준 것입니다. 그러나 공회원들은 '그것은 너의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공회원들은 가룟 유다의 심정 변화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목적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공회원들이 돈을 받지 않자 필사적으로 절망감을 극복하려고 은 30세겔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열린 성전문에 던져 넣고 도망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공회원들이 돈을 받지 않자 성소에 던져 넣고 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5). 사도행전에서는 가룟 유다가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튀어나와 죽었다고 했습니다 (1:18). 가룟 유다가 가파른 언덕 위에 올라가 나뭇가지에 목을 매었으나 가지가 부러져서 날카로운 바위에 떨어지므로 창자가 터져 죽어간 것 같습니다. 한편 대제사장들은 가룟 유다가 성소에 던진 은 30세겔을 거두었습니다. 그것은 피 값이기 때문에 성전고에 넣어두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의논한 후 토기장이 밭을 사서 나그네 묘지로 삼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밭을 피 밭이라고 했습니다 (6-8). 그들은 사람을 피 흘린 값으로 얻은 돈은 하나님이 받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23:18) 토기장이의 쓰지 않는 밭을 사서 다른 지방에서 사는 유대인이나 개종한 이방인이 예루살렘에 왔다가 죽었을 경우에 그들을 묻어 줄 묘지로 사용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피 값으로 산 밭이기 때문인지 가룟 유다가 묻인 곳이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그곳을 피밭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피 밭은 가룟 유다가 죽은 곳일 수도 있고 가룟 유다가 다른 곳에서 죽었으나 공회원들이 가룟 유다의 시체를 그곳에 옮겨 묻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이런 사건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9-10, 18:7-9, 11:12-13).

 

   ※ 자살의 윤리성

  자살(自殺)은 자기 생명을 스스로 끊는 행위로서 자신이 자신을 살해한 행위입니다. 자살에는 목적과 관련하여 여러 유형들이 있겠으나 어떤 유형들이든 자기를 살해한 살인죄에 해당합니다. 이는 십계명중 6계명에서 말한 살인죄에 해당합니다. 자살죄(自殺罪)는 타살죄(他殺罪)와 비교할 때 윤리적으로 볼 때는 다 나은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격 면에서 하나님께 속한 생명을 파괴한 살인죄로서 동일하지만 결과 면에서는 더 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타살죄는 회개할 기회가 있지만 자살죄는 회개할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타살 뿐 아니라 자살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생명을 귀히 여겨야합니다. 생명은 자신의 것이라 할지라도 자기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 자살과 구원과의 관계

  자살에 대해 생각할 때에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살을 구원문제와 관련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중세시대 기독교에서는 자살은 사탄에 의해서 한 것이고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자살한 자에 대해서는 장례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 시체를 해하여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많은 교회들에서 자살하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자살했을 때 논란이 생기고 그 장례식을 목사가 해주어야 하는지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은 구약성경에서 사울, 신약성경에서 가룟 유다를 근거로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이해와 신학적 이해가 부족한 데서 나온 이론입니다.

  가룟 유다는 본래부터 택함 받지 못한 자로서 구원받지 못한 자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자가 자살했다고 해서 자살한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라는 명제를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가룟 유다가 죽음의 방편을 자살로 선택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사울에 대해서는 구원의 여부를 논하는 자체가 위험한 일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죽이려 하고 제사장들을 죽이고 악신이 들렸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한 자라고 단언하는 일은 위험합니다. 사울도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운 왕이고 성령님에 감동되어 예언까지 한 사람이었습니다. 거듭난 사람도 얼마든지 거듭나지 못한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거듭난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 곧 천국과 지옥에 가는 문제는 믿음에 속한 문제입니다. 자살 문제는 살인하지 말라(6계명)는 계명을 어기는 행위에 속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특히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득구(以信得救)의 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살은 타살에 비해 죄를 회개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자살보다 조심해야 할 죄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게 죄의 경중을 논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동일하게 생명을 멸한 살인죄인 것입니다. 이미 예수를 구주로 믿고 거듭난 자가 계명을 어기고 계명을 어긴 죄를 회개하지 못했다고 해서 한번 얻은 구원이 취소되거나 상실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실 때는 원죄(정죄, 유전죄)와 본죄(자범죄, 요구죄) 곧 모든 죄를 짊어지고 그 죄 값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택함 받은 자의 모든 죄 값을 십자가 죽음으로 치르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죄가 없는 것으로 인정받아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과 칭의와 중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은 살아가면서 자범죄를 짓거나 회개하지 않았다고 해서 상실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이 그 죄 값을 다 치렀기 때문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자에게 있어서 회개하라고 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죄를 용서받아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은 것을 확인하고 감격하고 감사하는 은혜의 수단으로 하는 것입니다. 결코 믿는 자가 범죄하고 회개하지 못했다고 해서 구원이 상실되거나 지옥가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적으로 지은 죄를 회개하지 못하는 경우는 자살한 경우가 아니라도 많이 있습니다. 지은 죄를 회개하기 전에 사고당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시간적 여유가 있을지라도 자살 외에도 의지적으로 회개하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떤 죄에 대해 회개하기 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고 믿음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코 행위가 구원의 조건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2. 빌라도의 심문 (11-26)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산헤드린공회원들이 대제사장 가야바 관정에서 심문하고 사형을 판결했습니다. 그들이 사형 판결을 내린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죄였습니다. 종교적인 죄목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라 할뿐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우편에 설 것이고 다시 구름 타고 올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6:63-65). 그러나 그들이 사형 판결은 내렸으나 사형 집행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형 집행권이 있는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들은 총독 빌라도가 사형 언도를 내릴 수 있도록 정치적 죄목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누가복음23:2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내용은 3가지였습니다. 첫째, 유대인을 선동하여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 둘째, 로마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셋째, 자칭 왕이라 떠들어 대고 있다. 지난밤에 산헤드린공회에서는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사형에 처해야한다고 결정했는데 로마총독 빌라도에게는 국가 반란죄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고발을 한 것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식민지 국가의 종교에 대해서는 관대하여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허용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식민지 질서에 도전하는 정치적 행동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을 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은 빌라도로부터 산헤드린공회에서 지목한 신성 모독죄로는 사형을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사형을 이끌어낼 수 있는 정치적 반란죄로 고발을 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의 고발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은 유대인들의 왕이 되어 로마제국에서 독립하려는 것이냐는 의도의 물음입니다. 예수님은 그렇다 내가 유대인의 왕이다고 대답하지 않고 네 말이 옳도다고 대답했습니다 (11-12). 예수님께서 붙잡히신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속사역을 이루기 위함이기 때문에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했습니다. 물론 빌라도는 정치적인 왕으로 이해하고 물었겠으나 예수님은 구속사적인 왕이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사실 빌라도의 질문의 의도로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 아니고 예수님의 의도로 보면 유대인의 왕이 틀림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왕은 아니고 영적인 왕이었습니다. 요한복음18:36-37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18:33-37). 빌라도는 예수님의 대답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적어도 예수님이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그들이 고발하는 일에 대한 죄를 찾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23:14). 그러자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장로들이 여러 가지로 고소를 한 것입니다. 객관적인 고발 증거가 없자 갖가지 비방과 중상과 모략으로 집요하게 고소를 한 것입니다. 빌라도가 또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고 물었으나 예수님은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않았고 그에 대해 빌라도는 놀랍게 여겼습니다 (13-14). 산헤드린공회원들이 악의에 찬 고발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예수님께 자신을 변호하라고 기회를 주었습니다. 아마도 수많은 악의적 고발에도 불구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을 보고 무언가 범상치 않게 생각하여 그런 기회를 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않았고 빌라도는 놀랍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악의에 찬 고소에도 불구하고 이미 하나님의 뜻을 따라 대속의 죽음을 작정했기 때문에 더 이상 변호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모습에 빌라도는 신비적 경이를 느낀 것 같습니다.

 

  당시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한 명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무리 앞에 바라바라는 죄수와 예수님을 세우고 둘 중 누구를 놓아줄 것인지 물었습니다. 이렇게 물어본 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시기하여 예수님을 넘겨준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15-18). '바라바'(Barabbas)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에서 반란죄와 살인죄로 투옥된 사람입니다. 그는 유대교의 젤롯파(열심당)에 속한 자로서 로마제국의 유대 지역 점령에 대항하여 일어난 반란의 주모자로 추측됩니다. 유대인들에게 그런 바라바는 민족적 영웅으로 알려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산헤드린공회의 사주를 받은 무리들이 빌라도에게 나아가 전례대로 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 전례는 명절에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것이었습니다. 명절은 유월절을 말합니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입니다. 유월절에는 로마총독이 식민지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회유방법으로 백성들이 지명하는 죄수 한 명을 석방시켜 주었는데 그것은 거의 관례화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리 앞에 바라바와 예수님을 세우고 둘 중 누구를 놓아줄 것인지 물었습니다. 빌라도는 무리들이 당연히 예수님을 놓아 주기를 원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는 아무 죄가 없고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산헤드린공회원들이 예수님의 영향력에 시기하여 자기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고소를 한 것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을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고 했습니다 (19). 빌라도의 아내가 초자연적인 꿈을 꾸고는 예수님이 전혀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로 인하여 상당한 고통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그에 관한 말을 듣고 있을 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리들에게 바라바를 달라고 하게 했습니다 (20). 유대 군중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이 신성모독죄를 지었다고 하면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바라바가 일반 범죄인이라기보다는 젤롯당(Zealot)에 속한 자로서 혁명운동을 하다가 잡힌 죄수로 여겨지는데 그렇다면 그 점을 부각시켰다면 그를 살려야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로마총독인 빌라도 말을 듣는 것보다는 유대 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듣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을 때 그들은 "바라바로소이다"고 소리질렀습니다 (21). 아마 빌라도는 내심 죄없는 예수님을 놓아주기를 원했을 것이고 유대 군중들도 당연히 예수님을 놓아달라고 할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리들은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고 무리들은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빌라도가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하자 더욱 소리질러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고 했습니다 (23). 빌라도가 보기에 무리들의 요구는 만일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민란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만일 민란이 일어나면 로마총독으로서 정치적 생명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느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말이 아무 효력이 없고 오히려 민요가 일어날 요소가 보이자 손을 씻으며 자기는 예수님에 대한 피에 대해 무죄하다고 했고 무리에게 담당하라고 했습니다. 무리들은 그 피를 자가들과 자기 자신들에게 돌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하여 십자가에 못 박도록 군병들에게 내어주었습니다 (24-26). 누가복음23:13-23에 보면 빌라도에 의해 예수님이 죄가 없는 사실이 3번 확인되고 (23:4, 14. 22), 그에 반해 군중들의 사형 요구는 3번 나옵니다 (23:18, 21, 23).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고도 군중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만 것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었습니다. 보통 최고형의 언도가 내려지면 처형 직전에 매질을 했는데 그 매질 자체가 독자적인 형벌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의 채찍질은 잔인했습니다. 채찍은 서부영화에서 볼 수 있는 긴 채찍이 아닙니다. 나무 손잡이에 짧은 가죽이나 노끈을 연결되어 있고 그 가죽이나 노끈 끝에 뼈나 납 같은 쇳조각이 달려 있었습니다. 율법에는 매질을 40대 이하로 제한되어 있었으나 (25:3), 로마인들은 횟수에 규정을 두지 않았습니다. 채찍 집행 언도를 받은 죄수는 일단 옷을 다 벗기고 무릎을 꿇린 다음 머리 위로 손을 올려 손목을 쇠사슬로 묶었습니다. 그리고 기둥 쪽으로 얼굴을 향하게 하여 그 기둥에 단단히 묶었습니다. 허벅지와 발목은 밧줄이나 쇠사슬로 고정시켰습니다. 그리고 힘센 군인 여럿이서 한쪽 목과 어깨로부터 시작하여 빠짐없이 쳐 내려갔습니다. 어깨에서 시작하여 흉곽, 허리,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까지 치고 나면 다른 편의 목부터 다시 쳐 내려갔습니다. 이 형벌은 등이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살이 너덜거리고 피가 범벅이 되어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C. Truman Davis). 만일 죄수가 등 전체를 맞을 때까지 견딜 수 있게 되면 몸을 뒤집어 앞부분까지 맞게 되며 때리는 방식은 등과 같았습니다. 앞부분을 맞는 동안에는 내장이 몸 밖으로 나오는 일들도 많았습니다. 갈릴리 출신의 몇 사람도 이 태장형에 의해 내장이 터져 나와 노출될 때까지 매질을 당한 일이 있으며 (Josephus), 한 선지자는 뼈가 나올 때까지 매질을 당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Albinus). 뿐만 아니라 이 태장형을 치른 죄수는 채찍질이 끝나면 혼절하거나 사망하는 경우가 흔했다고 합니다 (C. Schneider). 요한복음19:4-16에 보면 빌라도가 채찍질을 당해 비참한 모습을 한 예수님을 무리 앞에 데리고 와 보라 이 사람이로다고 하면서 동정심에 호소하지만 무리는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비아돌로로사 거리를 갔습니다. 그러나 가다가 쓰러지고 결국 십자가를 더 이상 지지 못하고 구레네 시몬이 대신 졌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십자가형은 죄인을 십자가에 손과 발을 묶고 손과 발에 못을 박아 세워두어 고통 가운데 죽게 하는 형입니다. 그 십자가형은 반역죄를 지은 자나 흉악죄를 지은 자들에게만 사용한 형벌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시기하여 죽이려 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내로부터 예수님은 옳은 자이니 죽이면 안 된다는 조언도 들었습니다 (19). 그는 계속적으로 예수님을 석방시켜 주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총독의 고유한 권한으로 예수님을 석방할 수도 있었습니다. 요한복음19:10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요구를 하는 군중들의 민란을 두려워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내어 주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내줄 때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고 했습니다 (24-25). 그렇지만 그 책임은 면할 길이 없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빌라도는 자살을 했거나 황제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Suhuler). 뿐만 아니라 사도신경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으로 기록되어 전 세대에 그의 죄가 공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을 비롯한 산헤드린공회원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세상 정권에 넘기고 군중을 선동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습니다. 그들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인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은 A.D.70년에 비참한 학살을 당하고 그 후 2,000여 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끊임없이 방랑했고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수백 만 명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목적 때문에 양심을 어기고 주님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빌라도의 판결 사건에서 몇 가지 드러나는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무죄하나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증거하고 다른 죄에 대해서는 침묵하셨다는 것입니다. 담대히 증거해야할 것이 있고 침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둘째는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는 줄 알았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시기하여 고소한 줄 알면서도 유다 백성들의 민란이 두려워 예수님을 죽는데 내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옳은 줄 알면서도 다른 압력에 의해 양보하는 것은 정의로운 지도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죽일 마음이 없었다고 해서 그가 잘못된 판결을 내린 데 대해 책임을 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셋째는 무리들은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킬 때나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는 좋아했겠으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미혹을 받아 빌라도조차도 죄 없다고 생각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소리질렀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유대 관리를 싫어하고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구별된 돈을 유용하고 예루살렘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 군대를 파견하여 양민을 학살한 잔인한 지도자입니다. 그런 그까지도 때려서 놓아주려고 한 예수님을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입니다 (23:16). 우매한 백성들입니다. 우매한 백성들은 거짓 지도자들에게 잘 속고 자기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면 협력합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27-44)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① 예수님은 갖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27-44).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받은 군병들이 예수님을 관정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옷을 벗기고 홍포(왕의 의복 상징)를 입히고 가시 면류관(왕의 면류관 상징)을 씌우고 갈대(왕의 홀 상징)를 오른손에 들려주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희롱했습니다. 그리고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쳤습니다. 그렇게 희롱을 다 한 다음에 홍포를 벗기고 전에 입었던 옷을 다시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나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힐 장소인 골고다에까지 가게 했습니다. 지금도 그 길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길(비아돌로로사-Via Dolorossa)이 있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이 가다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십자에 못 박히기 전에 죽으면 안 되겠기 때문에 구경하러 서 있던 구레네 시몬으로 하여금 대신 지고 가게 했습니다. ‘골고다라는 곳에 이르러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두 강도당시 최고형인 십자가형을 받은 것으로 봐서 살인을 서슴치 않는 흉악범이었을 것입니다. ‘골고다’(Γολγοθα)는 히브리어(아람어)의 헬라어 음역으로서 라틴어로는 갈보리’(Calvary)라고 합니다. 그 뜻은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그곳을 그렇게 부른 것은 그곳이 해골 모양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Calvin, Bengel, Plummer). 그곳은 로마군의 공식적인 처형장이었고 예루살렘성 밖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두 행악자와 같이 끌려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예수님이 행악자와 동일한 취급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53:9,12).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 패가 있었습니다. 쓸개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맛보고 마시지 않았습니다. 군병들은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지켰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고 욕했습니다. 예수님의 옆에 못 박힌 강도들도 욕했습니다 (27-44).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옆에 못 박힌 한 강도가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했습니다 (23:39). 결국 군병들과 지나가던 사람들과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강도가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한 것입니다.

 

   ②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졌습니다 (32).

 

  십자가형 판결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못 박힐 무거운 횡목(patibulum, 형틀)을 처형 장소까지 지고 가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 형틀은 무게가 약 20kg정도 된다고 하는데 보통은 죄수의 등에 끈으로 묶여졌습니다. 예수님도 빌라도 관정에서부터 그 형틀을 지고 갔습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성문이 있는 곳까지의 약 1.5km 정도 되는 길을 라틴어로 슬픔의 길이란 뜻의 비아돌로로사(Via Dolorosa)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형틀인 가로대를 지고 그 길을 갔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전날 밤부터 심문을 받았고 채찍질에 맞아 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습니다 (14:53~15:15). 거칠고 무거운 나무통은 찢어진 어깨를 짓눌렀을 것입니다. 탈진할 정도로 지친 상태에서 고통스런 통나무를 지고 가는 것은 무리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다가 자주 쓰러졌습니다. 예수님을 끌고 가던 군병들은 사형수를 사형장까지 데려가야 하는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형장에 가기도 전에 죽을 것을 염려했을 것입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군병들이 그를 붙잡아 예수님이 지던 십자가 가로대를 억지로 그에게 지우고 함께 가게 했습니다.


  시몬(Simon)은 구레네 사람이었습니다. 구레네(Cyrene)는 북아프리카 이집트의 서북쪽에 위치한 항구도시로서 지중해에서 15km 떨어진 고원지대입니다. 오늘날의 리비아 수도인 트리폴리(Tripoli)입니다. 당시에는 구레나이가(Cyrenaica)라는 수도로서 헬라 문화가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그곳에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헬라어로서 '흩어진 자'라는 뜻입니다. 디아스포라는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이스라엘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자들을 말합니다. 시몬도 구레네에서 살고 있던 그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습니다. 시몬은 유대인으로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유다 예루살렘으로 먼 길을 왔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비아돌로로사에 어떤 행렬이 있었고 그 행렬을 보기 위해 모여든 군중들이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시몬도 군중들 틈으로 들어가 그 행렬을 구경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죄인의 모습으로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 된 채로 십자가를 지고 로마군병들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가 가다가 기진맥진하여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가다가 다시 쓰러지곤 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를 재촉하던 로마 군병들이 그가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자기를 끌어다가 그 십자가를 대신 지고가게 했습니다. 시몬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로마군병들의 강압에 의해 남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된 것입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시몬은 남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먼 길을 가면서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도대체 누구인지, 왜 사형을 받았는지, 왜 십자가를 지고 가는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서 자신이 지고 온 십자가 형틀에 그 십자가 주인이 못 박혀 매달리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 패가 붙여진 것도 보았을 것입니다. 시몬은 그 죄 패를 보고 구약성경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예언된 유대인의 왕 곧 구원자(메세야, 그리스도)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좌우에 함께 매달린 두 강도의 대화를 보면서 그가 죄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시몬은 그 사건 이후에 자신이 대신 져준 십자가의 주인이 다시 부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시몬은 자신이 줄곧 생각해 왔던 그분이 구약성경에서 오시리라 약속된 구원자인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그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었습니다. 정확히 어떤 시점에 믿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갈 때 믿었는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믿었는지, 부활한 다음에 믿었는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그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 믿어 구원을 받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시몬은 가정의 복을 받았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고 그의 아내와 아들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도왔고 초대교회가 세워지는데 지대한 역할을 다했습니다. 마가복음15:21"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했습니다. 시몬의 아들이 루포인 것입니다. 로마서16:13"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고 했습니다. 루포는 구레네 시몬의 아들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구레네 시몬의 아내입니다. 바울이 구레네 시몬의 아내와 그 아들을 주 안에서 택함을 입은 자라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이 예수를 믿은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시몬의 아내를 자기 어머니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시몬의 아내가 예수를 믿었을 뿐 아니라 바울의 사역을 열심히 도왔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시몬의 가정은 모두 예수를 믿어 신앙생활을 잘했고 초대교회에 성장을 위해 헌신한 가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다른 지역에 선교를 다니면서도 그 가정을 기억했고 교인들에게 그들을 알아주라고 한 것을 보면 사도의 축복을 받은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몬은 알지 못하고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지만 자기와 자기 가정이 신앙적은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기를 원해서입니다. 로마서8: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1:29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복음전도를 하려 하면,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 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려면, 사명을 감당하려면 고난이 따릅니다. 수고와 손해와 모욕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하더라도 하는 과정에서 가치를 느끼게 되고 결과적으로 자기와 자기 가정이 인정받고 복을 받게 됩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져도 복을 받는데 의지를 가지고 헌신을 결단한다면 더욱 큰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3:14"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③ 여인들이 울면서 따랐습니다 (23:27-31).

 

  마태복음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그를 위해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따르는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23:27-31). 예수님 자신을 위해 우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작정된 대로 가는 것이고 구속사역은 대성공을 가져오겠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는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2:22, 24:27). 그들이 예수님을 위해 통곡하는 것보다 더 울어야 할 대상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세대를 인하여 울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되신 분이 인류의 죄 값을 치르므로 죄와 죽음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1:21). 그러나 당시 세대는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 그를 거절했습니다. 유대인들조차 거부했습니다 (23:13-25). 참 생명을 주기위해 온 예수님을 처절한 고난과 죽음에 넘기웠습니다 (1:10-11). 그들이 그 죄 값으로 당할 형벌은 참으로 컸습니다 (24:21).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은 구주를 알아보지 못한 무지한 세대를 향하여 울었어야 했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죽인 죄로 인하여 당할 환난 때문에 울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도 구주이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은 세대와 그들이 받을 형벌을 생각하고 우신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우신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을 바라볼 때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배척하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 결과로 대적이 예루살렘성을 둘러싸고 토성을 쌓아 공격하고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도록 성전을 파괴하고 거민들과 그 자녀들을 땅에 메어쳐 죽일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고 하면서 우셨습니다 (19:41-45). 하나님의 일에 대해 무감각한 이 세대를 두고 애통해 했어야 합니다 (11:16-17, 12:41-42).

 

  둘째, 자녀들을 인하여 울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세대가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인 죄 때문에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환난은 마치 마른 나무에 불을 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23:31, 26:24). 환난을 당할 때 예루살렘 거민이 당할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특히 어린 자녀들이 죄 없이 고통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태하지 못하고 해산하지 못하고 젖먹이지 못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까지 했습니다 (23:29). 마태복음24:19에는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고 했습니다. 그 예언은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예루살렘 거민들은 주후 70년 로마제국의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 아이를 잉태한 자는 배를 찔러 죽였고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자는 아이를 빼앗을 메어쳐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당할 환난과 자녀로 인하여 가중될 고통을 인하여 울어야했습니다.


  셋째, 자신을 인하여 울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세대가 환난을 당할 때 자녀가 고난을 겪으므로 부모 자신들이 겪을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그 고통을 극복할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이 망하고 성전이 불타고 많은 사람이 죽고 자녀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할 것을 예언했으나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24:15-20, 9:4-42). 그래서 로마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할 때 어린 아이들 때문에 도망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학살당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큰 환난을 당해도 본인이 믿음이 있다면 환난의 고통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9:23, 4:13, 삼상17:45).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는 믿음이 있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8:26, 17:20, 21:21). 그러나 환난을 극복할 만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 울어야했습니다.

 

   ④ 예수님 좌우편에 강도가 있습니다 (38, 44, 23:39-42).

 

  38절에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고 했고, 44절에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고 했습니다. ‘강도에 해당하는 레스테스’(ληστης)는 강도, 산적, 도둑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폭력으로 타인의 재산을 빼앗거나 훔치는 자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만큼의 죄인은 아닙니다. 당시 유대교 젤롯파(Zealots, 열심당)는 구약성경에 약속된 구원자에 대해 유대나라를 로마제국에서 해방시켜 번영한 나라로 세울 정치적 왕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그 구원운동을 위해서는 폭력도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구원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로마 정권에 저항했습니다. 반란과 폭동을 주도하며 살인이나 폭력이나 파괴를 일삼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을 강도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자들은 바라바와 함께 반란을 주도하다가 체포된 자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반역과 관련된 정치범이 아니고는 그런 극형까지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죄목도 정치적인 반란죄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한편 강도는 예수님이 자기들의 반란을 주도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강도에게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한 것일 것입니다 (23:41). 그 강도는 결국 예수님을 구약에서 약속한 구원자임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23:39-4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좌우편에 두 강도도 못 박혔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한편에 있던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면서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 있던 강도는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감옥 창살을 통해 밖을 보았다. 한 사람은 진흙을 다른 한 사람은 별들을 보았다"는 시처럼, 예수님의 좌우편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들도 똑같은 상황에서 한 강도는 예수님을 원망하다가 구원받지 못했고 다른 한 강도는 회개와 믿음을 통해 구원을 보장받았습니다 (23:43).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영생과 천국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옳게 말한 이 강도의 신앙은 모범적인 신앙입니다.

 

  첫째,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한편 강도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못하고 백성들과 공회원들과 군병들처럼 예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이 강도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현재 십자가 징벌을 주신 이도 하나님인 줄 알뿐더러 사후에 심판하실 분도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과거의 자기 범행을 생각했습니다. 사후에 갈 곳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우리 또한 현재 당하는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징벌로 생각하고 사후에 그분이 내리실 심판이 준엄할 것을 생각하여 회개해야 합니다. 키에르케코르(Kierkegaard)"죄를 짓는 것이 죄가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한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습니다. 이 강도는 자신은 죄가 있어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게 되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는 의로운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죄가 없는 예수님이 고난당하는 것을 보고 자신은 당연히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여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비방하는 무리를 향해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하신 것을 보고 그 분이 자기의 죄 문제도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그분을 그리스도로 믿는 증거입니다. 우리도 고통 중에 있을 때마다 죄가 없으나 (4:15, 요일3:5)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53:5-6)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증거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고난에 봉착하면 오히려 하나님이 멀어지고 사명을 잃어버립니다. 이 강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께 영혼을 의탁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물론 예수님 제자들까지도 하나님 나라를 지상의 정치적 국가로 인식했습니다 (20:20-21). 그러나 이 강도는 그의 나라를 천상의 낙원으로 인식하였고 (21:4) 예수님을 통해서만 그곳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께 사후의 문제를 부탁하였습니다. 우리도 사후의 영혼 문제 뿐 아니라 죄 문제와 신앙 문제와 심지어는 생활의 모든 문제까지도 그분에게 맡겨야 합니다.

 

  누구든지 환난과 핍박과 고난과 실패와 병약과 가난과 여러 삶의 애환 등 우리 몫에 태인 십자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십자가 고통을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다가 안 될 때에 하나님과 환경을 원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편 강도처럼 그 고난 가운데서도 오히려 주님을 발견하고 그분에게 문제를 맡기므로 영적 기쁨을 얻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4.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45-50)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후 제 6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9시까지 계속되었고 제 9시에 말씀을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45-46, 50). 마가복음15:25에는 때가 제 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라고 했고, 마가복음15:33-34에는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라고 했습니다. 곧 예수님이 제 3시에 십자가에 못 박혔고, 6시에 온 땅에 어둠이 임했고, 9시에 운명을 하신 것입니다. 당시 시간에 6시간을 더하면 오늘날 시간이 됩니다. 그렇다면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 정오 12시에 어둠이 임하고 오후 3시에 운명을 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한 것입니다. ‘온 땅은 유대 땅을 말합니다. 이는 자연과 관련된 현상인지 아니면 초자연적 현상인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일식현상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당시는 유월절로서 그때에는 만월이기 때문에 일식이 일어날 수 없는 때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전우주적인 슬픔과 종말적 심판에 대한 전조적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8:22, 벧후3:10-12).

 

  제 9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46).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6시간 동안 7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를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 합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는 내 어머니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 '내 영혼을 받으소서'입니다 (23:34, 19:27, 27;46, 19:28, 19:30, 23:46). 이 가상칠언을 순서대로 기억하기 위해서 '용낙모기갈성혼'(容樂母棄渴成魂)으로 외우면 좋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4번째 하신 말씀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에 대해 마태는 Ελι Ελι λαμα σαβαχθανι라고 기록했고 (27:46), 마가는 Ελωι Ελωι λαμα σαβαχθανι라고 기록했습니다 (15:34). ‘엘리를 마태는 Ελι’(엘리)로 기록하고 마가는 Ελωι’(엘로이)로 기록했습니다. ‘Ελι’(엘리)는 히브리어 אלי’(엘리; 나의 하나님)을 헬라어로 음역(音譯)한 것이고, ‘Ελωι’(엘로이)는 아람어 אלחי’(엘로히; 나의 하나님)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입니다. 마태는 독자가 히브리어를 잘 아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히브리어를 음역한 것이고, 마가는 독자가 히브리어를 잘 모르는 로마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당시 통용어였던 아람어를 음역한 것입니다. 마가는 히브리어에 생소한 독자들을 위해 아람어를 음역한 것이지만 거기에다 아람어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는 주를 달아주었습니다. 독자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λαμα σαβαχθανι’(라마 사박다니)는 동일하게 사용했는데 아람어를 음역한 것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택한 백성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그들의 죄 값으로 대신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 고통은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극한 고통이었습니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이 극에 달했을 것이지만 영적으로도 극한 고독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대신 짊어진 죄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단절된 것 같은 절망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마치 성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린 것 같은 좌절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절규한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소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22:1 인용입니다. 시편 22편은 다윗이 경험을 통해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고난을 예언한 내용입니다 (시편22:1,16,18,22,23,27). 예수님은 그 말씀들이 십자가에서 자신에게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대표적으로 시편22:1을 인용하여 외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에 해당하는 시편 22편의 후반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내용은 고난 후에 열방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내용입니다 (시편22:22-23,27).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택한 백성들의 죄 값으로 고난의 죽음을 당하지만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께서 돌아와 구원을 얻게 될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계획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외침은 고통에 대한 원망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인류의 연약성 체휼에 대한 절규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은 시편 22:1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한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는 다윗이 사울왕에게 쫓겨 다니며 하나님이 영원히 자기를 버린 것 같은 고독과 절망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는 절규였습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비웃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삐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 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 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내 겉옷을 나무며 제비 뽑나이다."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22:6-18).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고난 속에서 연단시키셨습니다. 그러면서 오실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약의 완성적 성취를 예언하는데 활용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통 가운데서 다윗이 느꼈던 심정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원망의 의미가 아니라 극한 고통 속에서 느끼는 고독감과 절망감에 대한 절규인 것입니다 (22:44). 예수님은 다윗의 고난 뿐 아니라 우리의 연약성을 친히 체휼하셨습니다. 히브리서4: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적 한계 속에서 우리가 당해야 할 고난을 다 당하신 것입니다. 때로 졸기고 하고 피곤해 하기도 하고 주리기도 하고 목말라하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십자가 고통을 경험하고 마침내 죽기 까지 했습니다 (4:2, 8:24,21 :18,26:37-38, 4:6, 11:35, 19:28, 고전15:3). 그것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벧전2:24). 이것이 주님의 비하하신 모습입니다 (2:6-8). 주님은 우리가 현재에 당하고 있는 고난의 아픔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취에 대한 경탄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시편22:1의 인용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시편22:1,16,18,22,23,27 등의 말씀이 십자가에서 겪을 자신의 영적 번뇌를 미리 표현해 놓은 것으로 보고 대표적인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곧 자신에 대한 구속사적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고 있는 것에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예수님의 대속적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택한 백성들의 죄를 없이하고 구원하려는 계획을 가지시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 곧 모세와 다윗과 이사야와 다니엘 등을 통해 계시해주었습니다 (시편22, 이사야53, 다니엘7). 사도행전3:18에는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계시된 예언들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14:49,19:24,28, 24:26-27, 고전15:3-4)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속계획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 감격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경험들 속에서 십자가 고통 이후에 구속 사역이 완성될 것을 확신하고 감사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주의 고난을 예언한 다음에 그로 인하여 열방이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했기 때문입니다. 시편22:22-23,27"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셋째, 예수님 자신의 구주됨을 선포하는 선언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시편 22:1의 인용으로서, 시편 22편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상에 대한 대표구절입니다 (53:1-10, 7:13-14). 예수님이 이 말씀을 음역 그대로 인용하신 것은, 구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 구주가 자신이며 그것이 십자가 대속사건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은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에 관련하여 선언한 메세지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한 내용과 십자가상에서의 또 다른 고백과 제자들의 설교 등에서 확인되기도 합니다 (3:14-15, 12:32-33, 17:1-3, 24:25-27, 2:25-36, 3:18-22).

 

  어둠속에서 예수님이 엘리 엘리~” 외치자 곁에 있던 한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구약시대에 선지자였던 엘리야를 부른다고 오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군병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측되는 한 사람이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했습니다. ‘해면은 바다 생물의 뼈대 같은 것에서 추출한 스펀지 같은 것으로서 물기를 다량 흡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 포도주는 로마군병들이 신 포도주와 계란과 물 등을 섞어 가지고 다녔던 음료수 포스카(posca)였을 것입니다. 이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한 해면을 갈대에 달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올려서 마시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엘리야를 부른 줄 알고 생명을 연장시켜서 엘리야가 와서 구해주는지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구약의 선지자 엘리야가 죽지 않고 승천한 것을 근거하여 (왕하2:9-12) 엘리야가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찾아와 구해준다는 사상이 만연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가상칠언 (架上七言)

 

   ①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23:34)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멸시와 조롱과 희롱과 능욕을 하는 자들을 향해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자들인데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예수님의 구속의 효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가르친 만달란트 빚진 자와 용서에 관한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답변들에서 잘 확인됩니다 (18:21-35, 5;23-26, 47-48). 그것을 생각하여 우리에게 범죄한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합니다 .

 

   ②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23:43)

  예수님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한 강도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는 신앙을 나타내자, 구원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통 중에서도 죄를 고백하는 자를 인도해주셨습니다. 아무리 강도같은 사람이라 해도 예수님이 구원자인 것을 믿고 죄를 고백하는 자에게는 죄 사함과 구원을 받게 됩니다. 주홍같이 붉은 죄라도 흰 눈같이, 진홍같이 붉은 죄라도 양털같이 희게 씻어주십니다 (1;18).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죄과를 도말해주십니다 (103:12, 43:25). 그것은 구약의 속죄일에 속죄제사로 드린 두 염소 중 아사셀 염소가 갖는 구속사적 의미가 확인시켜 줍니다 (16:7-10).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길이요 진리요 생명 이라 했고, 양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14:6, 10:7).

 

   ③ 보라 네 어머니라 (19:27)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요한은 그때로부터 마리아를 자신의 집에 모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천륜을 성취한 동시에 인륜도 성취한 것입니다. 인륜에 대한 첫째 계명은 부모공경입니다. 부모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려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것도 잘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행할 것을 하나님께 했다고 핑계하는 고르반 사상에 대해 책망하셨습니다 (7:11). 그래서 바울은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되 조건 없이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6;1-3). 환난 때에 부모나 형제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자보다 악한 것입니다 (딤전5:8).

 

   ④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27:4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입니다. 이는 시편22:1의 인용으로서, ‘엘리 엘리는 히브리어 음역(音譯,transliteration)이고 라마 사박다니는 순수 아람어 음역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죄 값으로 죽으면서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관계를 끊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죄 값으로 버림받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원망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속사역이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하면서 계획하신 구속사역이 완성할 것을 바라보는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이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 오실 구원자에 대해 예언한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표적인 구절을 본다면 시편22:1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 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했고, 16절에는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고 했고, 27절에는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들이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두고 한 말로 알고, 그 말씀들이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죽음 이후에 가져올 구원성취를 선언한 것입니다. 우리도 여러 역경 중에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하면서 미래에 대한 확신과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합니다.

 

   ⑤ 내가 목마르다 (19:28)

  이 말씀은 시편19:21, 69:3의 인용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렸기 때문에 목이 말랐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좀더 깊은 의미에서는 구약성경의 예언을 생각하면서, 그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 말씀을 성취하려고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통을 덜 수 있도록 쓸개 탄 포도주 (마취제)를 거부하고 온전하고 고통과 목마름으로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27:34). 그리고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7:38). 우리도 역경 중에서도 희생과 헌신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합니다.

 

   ⑥ 다 이루었다 (19:30)

  예수님은 비하(卑下)의 생애와 십자가 죽음을 통해 모든 성경을 성취하였다는 선포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말씀을 성취하였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모든 구속사역을 완전히 성취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도성인신(道成人身)하신 목적이 완성되는 사건이었습니다 (1;1,14, 2:6-10). 예수님의 생애는 온전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목표하고 있었습니다 (4:34, 26:39). 우리도 예수님이 권면하신 것처럼 썩지 아니할 양식,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가장 큰 가치와 목적으로 삼아야합니다 (6:25, 6:31-33)

 

   ⑦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23:46)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모두 성취하고 마지막으로 영혼을 부탁했습니다. 이는 영적 만족과 신뢰의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속계획을 위해 예수님 자신에 대해 택하신 모든 방편에 대한 만족이자, 승귀(昇歸)와 택자 구원에 대한 신뢰입니다 (7:33, 17:1-26).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신뢰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고 우리를 높이실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의탁해야합니다. 모든 결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벧전5:7).

 

  한편 요한복음19:30에 보면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고 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선언은 하나님의 뜻 곧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인 구속사역을 다 이루었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구속사역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첫째, 우리의 죄를 없애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언약은 하나님은 아담과 그 후손을 하나님 백성으로 삼고 아담과 그 후손은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약속입니다. 하지만 아담이 언약을 깨뜨리고 범죄하므로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도 범죄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것을 대표원리라고 합니다. 아담은 죄인이라는 선고를 받았고 죄성이 생겨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도 죄인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태어나고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정죄(죄책)와 유전죄(오염)라고 합니다. 이사야53: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이 찢기고 뼈가 부스러진 것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허물에 해당하는 페솨’(פשע)범죄, ‘죄악에 해당하는 아온’(עון)사악함을 의미합니다. 허물은 죄를 강조한 말로서 정죄를 가리키고, 죄악은 죄성을 강조한 말로서 유전죄를 가리킵니다. 그 정죄와 유전죄를 원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미 본질적으로 부패하여 스스로는 원죄를 없앨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가 구원하기로 선택한 자들을 사랑하여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선택한 자들의 죄를 없애주어 의롭게 하시려고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죄가 없으신 의로운 예수님을 보내어 선택한 자들의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법대로 죄에 대한 형벌은 죽음입니다. 로마서6:23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택함 받은 자들의 죄 값을 대신 지고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로인해 택함 받은 모든 자들의 죄가 없어지고 의롭게 되게 했습니다. 이것을 대리적 속죄라고 합니다. 요한일서3:5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6:7). 그 은혜는 택함 받은 자들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을 때에 적용됩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을 뿐 아니라 대속을 믿을 때 개인적으로 죄가 없어지고 의롭게 됩니다. 그것을 대속과 칭의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셔서 죽으신 이유입니다.

 

  둘째,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여 언약을 맺었다고 했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은 아담과 그 후손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아담과 그 후손은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가조항은 만약 언약을 어겼을 경우 형벌로 죽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언약을 어겼기 때문에 그 후손인 모든 인류도 언약을 어긴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 후손인 모든 인류는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대표원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로마서5:12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죽게 되고 지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원하기로 선택한 자들을 그렇게 내버려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의 형벌을 대신 받게 하여 선택한 자들이 다시 살고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살게 하려 작정했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어 선택한 자들의 죄 값을 대신 담당하여 다시 살게 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뜻대로 택함 받은 자들의 죄를 담당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을 때 개인적으로 적용됩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을 뿐 아니라 그의 대속을 믿을 때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어 다시 살게 됩니다. 베드로전서2: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2:1). 그러므로 그 사람은 다시 살고 천국에 가서 영생복락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셔서 죽으신 이유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임을 믿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대속하신 사실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격적인 영접을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11:25-26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는 자는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 사함을 얻고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죽어도 다시 살고 천국에 가서 영원히 복락을 누리도록 결정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평생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제 어떻게 보답해야겠습니까? 빌립보서1:29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8:17). 베드로전서2:21에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예수 믿는 믿음을 양보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철저히 지키고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감당하려 해야합니다 (딤후3:12). 그것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3:10, 1:24, 고후11:24-27, 벧전4:13, 1:9).

 

 

       5. 예수님의 죽음에 동반된 표적 (51-53)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이 크게 소리를 지르시고 영혼(πνεμα)이 떠났습니다 (50).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의 몸이 일어나 무덤에서 나왔고 그들이 거룩한 성(예루살렘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보였습니다 (51-53).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그를 믿는 자들이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성전(ιερον)은 뜰과 성소(ναος)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성소는 성소(the Holy Place)와 지성소(the most Holy Place) 2개의 방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의 사이는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이 휘장은 흰색 베실에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 형상이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각목에 금으로 입힌 4기둥의 갈고리에 늘어뜨려져 있었습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이 휘장은 4지폭의 두께로서, 10필로 양쪽에서 동시에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는 휘장이라고 합니다. 지성소에는 법궤와 속죄소와 그룹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이 휘장을 드리운 것은 성소 뒤에 있는 지성소를 가리기 위함이며 누구든지 지성소에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습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1년에 1번 대속죄일에 짐승의 속죄피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 외에는 누구든지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9:7, 16:2).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19:24). 그래서 지성소 안에도 그룹 천사의 형상이 있었고 지성소 천장에도 그룹 천사가 수놓아져 있었지만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에도 그룹 천사가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그룹천사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수호하는 직무를 가진 천사입니다 (26:31).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이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죄인들이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상징한 사건입니다 (9:11-12).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이 찢기므로 그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10:19-20). 에베소서3:12"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무덤에 있던 죽은 자들이 일어난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를 믿는 자들이 부활하게 될 것을 알려주는 표본적 사건입니다. 이때 살아난 자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마 살았을 때에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를 대망한 자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들이 비록 영원히 살 수 있는 신령한 영체로 부활한 것이 아니고 회생한 부활이었겠지만 그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이 성도의 부활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표징인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후에 다시 부활하시고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가 재림하실 때에는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15:51-52"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4:16-17에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이 사죄와 칭의를 얻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고 그가 다시 오실 때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을 감사해야합니다.

 

 

       6. 예수님의 죽음의 증인들 (54-56)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렸습니다 (53). 예수님을 지키던 로마 군대의 백부장과 군사들이 그 광경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 했습니다 (54).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표적들을 보고 종교적 두려움을 느꼈고 예수님이 참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백부장은 로마 군대의 100명의 군사를 거느린 로마 장교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책임진 자로서 예수님이 수난당하여 죽으시기까지 전 과정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행동을 다 보았을 것이고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온 땅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리고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27:51-54). 그런 상황을 접하면서 백부장은 예수님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백부장은 후에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이방 기독교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고 갑바도기아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Wendling).

 

  한편 예수님의 운명을 갈릴리에서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55). 이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실 때 자기들의 소유로 섬기던 자들입니다 (8:2-3).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곳까지 따라왔으나 군병들에 의해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56).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나간 여인입니다 (16:9, 8:2).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제자 중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곧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입니다. 알패오는 글로바와 동일인일 것입니다 (15:40, 19:25).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입니다. 이는 살로메와 같은 이름인 것 같고 예수님의 이모입니다 (15:40, 19:25). 요한복음19:25에는 그 모친 마리아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 유대사회의 인습으로 볼 때 천한 부류였습니다. 유대사회에서는 '갈릴리'를 천한 지방으로 여겨왔고 '여자'는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로 여겨 어린 아이들과 함께 수()에 넣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믿고 그와 그 제자들을 따르며 복음전도 사역을 도왔습니다. 자기들의 소유를 사용하여 섬겼습니다 (8:2). 그러다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상경하자 함께 올라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소에까지 따라왔습니다. 실로 제자들도 다 도망하고 베드로까지 부인하는 마당에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온 것입니다 (26:57, 69-75). 그들은 예수님이 장사된 뒤에도 예수님의 무덤에 가장 먼저 찾아갔고 예수님의 부활체를 가장 먼저 보고 제자들에게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사가들에 의하면 초대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자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출신성분을 생각지 말고 주의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정탐꾼을 도운 라합을 기억해야 합니다. 선지자를 도운 사르밧 과부를 기억해야 합니다. 여선지자 미리암과 드보라를 기억해야 합니다. 빌립보교회를 세운 루디아나 교회의 기둥 역할을 했던 많은 여인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여자라도 사용하십니다 (고전1:27-29). 상황에 얽매이지 말고 주를 헌신적으로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7. 예수님의 장사지냄 (57-61)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예수님이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그날 저녁 때 즈음에 아리마대 요셉이 총독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부자이며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57). 예수님을 장사지낸 요셉에 대한 보고입니다. 첫째, 아리마대 사람입니다 (53:51). ‘아리마대’(Αριμαθαιας)는 구약시대의 라마다임(רמתים)으로서 (삼상1:1)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30km정도 떨어져있는 지금의 렌티스(Rentis)로 추정됩니다. 둘째,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53:50). '산헤드린(Sanhedrin) 공회'는 대제사장 1인을 의장으로 하고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70명이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유대교의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24:20, 4:5, 13:27).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빌라도 법정에 넘겨 십자가에 목 박아 죽이도록 한 주체입니다. 셋째, 공회의 결의에 찬성하지 않은 자였습니다 (53:51).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으면서도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데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22:66-71). 넷째,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53:50). 매사에 선하고 의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섯째, 존경받는 공회원이었습니다 (15:43). 덕망이 있어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여섯째, 부자였습니다 (27:57). 상류층으로서 사회적 지위가 있는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일곱째,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27:57). 공회원이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공회원 가운데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진리를 배운 니고데모도 있었습니다 (3:1) 여덟째,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53:51, 15:43). 공회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기다리는 경건한 자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원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로서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할 때 심적 고통이 컸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적극적으로 따라다니면서 배웠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배반하거나 십자가 처형장까지 따라가지 못하거나 예수님이 운명하신 다음에 다 떠났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냈습니다.

 

  마가복음15:43에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 전날 곧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 오후 3시에 죽었습니다. 그날 저물었을 때 아리마대 요셉이 당돌히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당돌히에 해당하는 기본형 톨마오’(τολμαω)위험을 무릅쓰다’ ‘용기를 내다’ ‘대담하다등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빌라도는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려한 장본인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로마인들은 가족이나 친척이 시체를 요구하면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지만 반란죄 같은 반국가적 정치범에 대해서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도망했고 요한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현장에 있었지만 충격 때문인지 시체를 요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공회원이었던 자신이 용기를 내어 담대히 빌라도에게 예수님 시체를 요구한 것입니다.


  마가복음15:44-45에는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하자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보통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린 자를 그대로 두면 2~3일 정도 가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벌써 죽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날은 안식일 전날(금요일) 오전 9시이고 그날 오후 3시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시체를 내어달라는 청원을 할 때는 그날 저물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이후 10여 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십자가형을 책임진 백부장을 불러서 예수님이 이미 죽은 것이 확실한지 확인을 한 다음에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도록 허락을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반란죄(역모죄)의 죄목으로 십자가형을 내렸지만 실제로는 그런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죽어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반란죄로 고소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의 사주와 선동을 받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는 바람에 민란이 날까 두려워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반란죄로 십자가형을 당한 사람은 시체를 내어주지 않았으나 빌라도는 예수님이 반란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 시체를 내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아무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십자가형을 내린 죄책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시체를 내어주므로 약간의 마음의 위로를 받으려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의 주장 가운데 가사설(假死說)이 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가 백부장에게 예수님이 죽은 지 이미 오래된 것인지를 확인하고 예수님의 시체를 내어주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확실히 죽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거입니다. 요한복음19:31-34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날은 안식일 전 날이었기 때문에 다음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시체들이 안식일까지 있게 하지 않으려고 다리를 꺾어 시체를 빨리 처리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다리를 꺾는 것은 일찍 죽게 하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그래서 군인이 예수님 옆 강도들의 다리를 꺾고 예수님의 다리를 꺾으려 하자 예수님이 이미 죽어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다리는 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확인된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시체를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세마포로 싸서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았습니다 (59-60, 15:46). 요셉은 십자가에서 못을 빼고 시체를 세마포로 싸서 내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체가 피로 물들었을 것이기 때문에 물로 깨끗이 닦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체에 기름을 발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체를 깨끗한 세마포로 감쌌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체를 침상에 옮겨 무덤으로 옮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체를 무덤에 안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 입구를 돌을 굴려 막았을 것입니다. 그 모든 일에는 제자 요한, 여인들, 자신의 하인들, 군병들 등이 도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세마포’(σινδων)는 마()로 짠 고급 베로서 수의(壽衣)로 많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바위 속에 판 무덤이란 바위를 채석기로 깨뜨려 파서 동굴처럼 만든 무덤을 말합니다.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라는 말은 무덤 입구를 큰 돌로 막아두는 것을 말합니다. 입구를 돌로 막는 것은 시체를 야생 짐승이나 도굴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돌은 깎아 만든 원반형이었는지 단순히 큰 바윗돌이었는지는 알 수 없고 돌을 용이하게 굴려 막기 위해 입구 앞 바닥에 홈을 팠는지 단순이 입구 앞을 경사지게 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이 무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곳에 있는 동산 안에 있었는데 한 번도 사용한 적인 없는 새 무덤이었습니다. 요한복음19:41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무덤은 요셉 자신이 쓰려고 만들어 놓은 무덤이었습니다. 60절에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라고 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공회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시체가 방치되지 않도록 빌라도에게 담대히 내어줄 것을 요구했고 장례를 치러드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위해 만들어놓거나 매입해놓았을 새 무덤을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53:9). 우리가 직업적 환경을 핑계한 것에 일침을 가하는 기사입니다.

 

  한편 요한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장례를 치룰 때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수 있도록 몰약과 침향을 섞은 향품을 백 리트라쯤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19:39-40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고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에 속하는 율법사(서기관)로서 그 위치를 보나 아리마대 요셉과의 친분으로 볼 때 그도 아리마대 요셉처럼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을 것입니다 (3:1). 그는 전에 밤중에 은밀히 예수님을 찾아와 거듭남에 대해 들었던 사람입니다 (3:1-21). 그는 바리새인들의 독단적인 판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7:50-51). 그러다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하려는 것을 알고 그에게 몰약과 침향을 섞은 향품을 가져온 것입니다. 몰약은 시체를 염할 때 방부제로, 침향은 방취제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니고데모가 가져온 향품의 양은 100리트라였습니다. ‘리트라’(λιτρα)는 원어의 음역으로서 무게단위(pound)에 해당합니다. ‘100리트라를 개역성경에서는‘100으로 번역했었습니다. 100근이면 약 35kg에 해당합니다. 그 정도의 양은 당시 풍습에 의하면 왕족의 장례에 해당하는 많은 양이라고 합니다 (대하16:14). 요한복음12:3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은 향유를 순전한 나드 1(λιτρα)을 부었는데 그것을 가룟 유다가 300데나리온에 해당된다고 했습니다. 포도원 품군 이야기에서 보면 1데나리온(δηναριον)이 일꾼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300데나리온은 일꾼의 300(1)의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래서 1리트라가 1년 품삯에 해당한다면 100리트라는 100년 품삯에 해당하는 액수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큰 헌신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부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무덤에 안장하고 입구를 큰 돌로 막아 두었는데 그 곳을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해 앉았다고 했습니다 (61). 마가복음15:47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23:55-56에는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살로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등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도 멀리서 지켜보았었는데 예수님의 시체를 매장하는 곳에도 와서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무덤에 장사지낼 때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속 따라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둔 무덤을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발라드리고 무덤을 돌보기 위해 무덤의 위치를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계명에 따라 향품을 살 수 없었으므로 안식일 지난 뒤에 예수님께 발라줄 향품을 사서 준비했습니다 (16:1).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 위치를 정확히 파악했다는 것은 다음날 예수님이 부활했을 때 여인들이 다른 무덤을 찾아갔을 수도 있었다는 착오설(着誤說)을 반박하는 기사입니다.

 

 

       8. 예수님의 무덤 경비 (62-66)

 

  62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65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예비일 다음날 곧 안식일(토요일)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모여 빌라도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분부하여 무덤을 사흘동안 지키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했으므로 그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는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면 유혹이 전보다 더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허락을 했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파수꾼들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 (62-65). 돌을 인봉(印封)했다는 것은 무덤 입구에 큰 돌을 굴려 막은 다음 밧줄로 돌과 무덤 출구 양쪽 벽에 동여매고 밧줄의 중심부에 그리고 돌과 무덤 사이에 얽혀있는 밧줄에 초나 흙으로 밀봉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누구도 들어갈 수 없도록 밀봉했고 군사들이 지켰습니다. 그러나 28장에 보면 안식 후 첫날 곧 주일에 큰 지진이 나고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돌 위에 앉았습니다. 그 천사의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었습니다. 그런 광경을 본 파수꾼들은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8:1-4). 파수꾼들은 대제사장에게로 가서 되어진 일을 고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의논하고 파수꾼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밤에 잠든 사이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둑질해 갔다고 말하게 했습니다. 파수꾼들은 그 가르친 대로 했고 그 말이 오늘날 곧 마태복음을 기록하던 때까지 (A.D. 70년 전후)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졌다고 했습니다.

 

<結言>

  본장에서 예수님이 수난 당하시고 죽으신 배경과 관련하여 볼 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장로들의 간악한 계교를 볼 수 있습니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어서 맞지 않는 종파였으나 예수님을 죽이는 데는 하나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종교 지도자들과 세속 나라의 지도자가 연합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23:12"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고 했습니다. 종말에도 사탄()이 교회와 성도를 핍박하기 위해 세상 정권(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타락한 기독교 지도자(땅에서 나온 짐승)를 이용한다고 했습니다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