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사도행전 9:1-43

<題目> 이방 선교를 위한 전기(轉機)


<序言>  

  본장에서는 사울의 회심 사건이 전개됩니다. 사울의 회심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에 머문 복음 전도 사역이 더 넓은 이방 세계로 확대되는 계기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본장 이후부터 마지막 장까지의 내용, 본서 이후에 연결되는 바울서신들의 내용의 시작점이 됩니다. 내용구조는 사울의 회심(1-9절), 아나니아의 안수(10-19절), 사울의 다메섹과 예루살렘 전도(20-36절), 베드로의 순회전도(32-43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사울의 회심 (1-9절)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울은 주의 제자들 곧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1절). 눈빛과 얼굴과 태도와 언행 뿐 아니라 심리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적대감이 가득했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에 대해 자긍심과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산헤드린 공회장인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했습니다 (2절). 산헤드린 공회는 로마로부터 사법권과 행정권을 인정권은 권한이 있었고 그 권한은 팔레스틴 내외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에게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자들로서 예그리스도인들을 혐오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사울도 그들과 같은 바리새인으로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적개심을 가진 자로서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체포해 오기 위해 대제사자에게 체포권을 부여 받은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핍박을 피해 다메섹까지 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연행해 오려는 것이었습니다. '다메섹'은 사마리아보다 더 북쪽에 있는 도시로서 예루살렘에서 약230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그 곳에는 예루살렘에서 핍박을 피해 간 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전도하여 입교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학자 요세프스에 의하면 A.D.66년 로마 네로황제의 박해 때 10,500명이 학살 당했다고 합니다.   

 

  사울이 대제사장에게 그리스도인 체포권을 받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둘러 비추었습니다 (3절). 이 '빛'은 큰 빛으로서 해보다 밝은 빛이었는데 사울과 및 동행하는 자들을 비추었습니다 (26:13). 사울은 그 빛을 보고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강렬한 초자연적인 빛에 반사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며 쓰러지듯이 엎드러진 것입니다. 아마 말을 타고 갔다면 말에서 떨어져 쓰러져 엎드러졌을 것입니다. 그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이 '주여 뉘시오니이까?' 묻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대답이 있었습니다 (4-5절).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것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6절). 이는 하나님이 복음 사역을 위해 사울을 택하였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강권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7절에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고 했습니다. 사울과 동행한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22:9에는 소리는 못 들었어도 빛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본문의 소리는 사울의 소리인 것 같고, 22:9의 소리는 주의 음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26:14에서 사울과 일행이 모두 엎드러졌다고 한 것을 보면 모두가 갑자기 나타난 빛을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행은 주의 말씀은 못 듣고 다만 사울이 '주여 뉘시오니까?" 하는 소리만 들은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울은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주를 만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고 그 사건을 목격하여 증언할 수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사울은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곳에서 3일 동안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8-9절).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것으로 인해 과거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상 체계에 대해 깊은 고뇌에 있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죽었다고 생각하는 예수가 부활했고 자신이 핍박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 동안 유대교적 사고로 예수를 이단이라 생각하고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핍박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던 것들에 대한 심각한 번민이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전혀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 변화됩니다. 사울은 어떤 면에서 보나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직업적으로는 군 지휘관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였고, 혈통적으로는 이스라엘 족속의 베냐민 지파였고, 문화적으로는 히브리인중에 히브리인이었고, 학문적으로는 사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했고, 종교적으로는 남다른 열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도가 지나쳤습니다. 당시에 자신이 신봉하는 율법적 신앙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그리스도교의 교회와 성도들을 증오하다 못해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1-2절, 행22:3-5, 갈1:13-14). 참으로 어떤 면으로 보나 변화를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자였습니다.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 하늘로부터 햇빛보다 강렬한 그리스도의 빛이 비췰 때 땅에 엎드러졌고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3-7절, 행26:3). 이 불가항력적인 체험을 한 후 그의 인생관과 가치관과 세계관이 완전히 바뀝니다. 과거에 자랑하던 것을 배설물처럼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기를 소원하고 내세의 상을 소망했습니다. 전에 교회와 성도를 핍박하던 자가 오히려 교회와 성도를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하며 낙심 중에 있는 그들을 위로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교만하던 자가 겸손하게 되었습니다 (빌3:7-14, 고후1:1-6, 딤전1:15). 이 변화의 역사는 신학이나 연조나 직분 등으로 경험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8:12).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몰랐고 그를 만나려고 애를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쓰시기 위해 강권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있는 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에게는 변화할 수 있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엡1:4).

 


       2. 아나니아의 안수 (10-19절)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해 예루살렘으로 압송하기 위해 대제사장에게 위임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가던 중 예수님의 빛과 음성을 체험하고 앞을 보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신념과 대치되는 경험을 한 것에 대해 깊은 고뇌로 3일 동안 금식을 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기도하고 있었고, 그러던 중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안수를 해 줄 것이라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 신앙 공동체에서 상당한 존중을 받고 있었던 경건한 아나니아에게 환상을 보이셔습니다. 그리고 '직가'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직가'(直街)는 길게 뻗은 거리로서 현재 '다르발 무스타킴'(Darbal Mustaqim)이라고 불려지는 곳입니다. 아나니아는 이미 사울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을 해하고 대제사장에게 권세를 받아 성도들을 결박하러 온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가 안수하라는 말씀을 하실 때 당황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에 대해 말씀하기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했고 주의 이름을 위해 얼마나 해(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알려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울을 선교를 위해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유대 외의 다른 나라 사람을 말하고 '임금'은 고위층 지도자들을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유대인을 말합니다. 바울은 다른 사도들이 유대인 선교를 집중적으로 했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많이 하게 됩니다 (10-16절).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아나니아는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고 성령 충만을 기도했습니다. 그럴 때에 사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다메섹에는 강이 침례를 받을 만한 강이 없었기 때문에 침례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울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17-19절). 그리고 다메섹에서 복음 을 전하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와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20-26절). 갈라디아서1:16-18에는 아라비아에 갔다가 다메섹으로 왔다고 했고 그 기간이 3년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누가가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에 돌아오기 까지를 간단히 기록했고 갈라디아서에서는 바울(사울)이 사도권을 변증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숫자를 기록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의 차이가 나타난 것입니다.

 

  일련의 상황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사용하기 위해 때가 되매 부르셨고 쓰임받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의도가 있을진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실 것을 기대하고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3. 사울의 다메섹과 예루살렘 전도 (20-31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오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후에 다메섹에 들어가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다메섹의 각 회당에 들어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고 전파했습니다.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은 사울은 사울의 회심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고 다메섹에 온 것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기 위한 것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은 부정적인 반응에 개의치 않고 더욱 힘을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굴복시키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본형 '슁케오'(συγχεω)는 '혼란케 하다'는 뜻입니다. 사울의 강한 증거는 유대인들을 혼란케 한 것입니다. 여러날 후에 유대인들은 사울을 배교자 혹은 배신자로 간주하고 죽이기를 공모하고 사울을 죽이기 위해 성문까지 지켰습니다. 그 사실을 감지한 사울의 제자들이 밤중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줄로 매달아 성에서 달아 내렸습니다. 이 제자들은 사울의 증거를 듣고 개종한 유대인들일 것입니다 (20-25절).

 

  사울이 다메섹에서 유대인들을 피해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26절). 갈라디아서1:17-18에 보면 사울(바울)이 다메섹에서 아라비아에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고 3년만에 게바(베드로)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울이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동안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다메섹에서 머문 기간, 아라바아에서 머문 기간, 다시 다메섹에 와서 머문 기간, 예루살렘으로 올 때까지 모두 합쳐서 3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라비아에서 3년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울은 제자들과 사귀기를 원했지만 그들은 사울이 예수님의 제자됨을 믿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것은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했다고는 하나 그 사건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 바나바가 사울을 사도들에게 데려가 사울의 회심과 다메섹에서의 전도 사건을 말하므로 제자들이 그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예루살렘을 함께 드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에 대해 배타적인 헬라파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 사실을 알고 사울을 가이사랴로 데리고 가 다소로 보냈습니다. 다소는 사울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울이 다소로 떠난 후 기독교에 대해 배타적인 유대인들과 기독교인 들 사이에 마찰이 없어졌고 기독교에 대한 적극적인 핍박도 없어졌습니다. 그로인해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을 찾고 든든해 졌으며 수적으로 점점 성장했습니다 (27-31절).

 

  사울이 회심한 후 다메섹에서 전도하다가 쫓겨나고 예루살렘에서 전도하다가 쫓겨났습니다. 그것은 그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아나니아에게 말한 내용대로 된 것입니다. 사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15-16절). 그 고난으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하지 못하고 이방으로 선교를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이방 사도로 부른 대로 되어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해 살 때 때로 고난이 옵니다 (딤후3:12). 그 때 실패라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목적을 바꾸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주께서 부르신 목적과 주께서 주신 사명을 붙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4. 베드로의 순회전도 (32-43절)  

 

  32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34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사울이 예루살렘에 있지 못하고 다소로 가 있을 때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이방 교회들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룻다'라는 곳에 갔는데 중풍병으로 8년이나 상위에 누워 있는 '애니아'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룻다'는 예루살렘 북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입니다. '애니아'는 '칭찬받는 자'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도하라'고 하자 그가 곧 일어났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룻다와 사론에 사는 많은 사람이 주께 돌아왔습니다. '사론'은 룻다 주변에 있는 평야지대입니다 (32-35절).

 

  그 때 '욥바'라는 곳에 '다비다'라는 여인이 죽었습니다. '욥바'는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약 55km 떨어진 해안도시인데 '룻다'와는 약17-18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다비다'는 히브리식 이름으로서 헬라식으로 번역하면 '도르가'였는데 그는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하던 자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당시에 베드로가 욥바에서 가까운 룻다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두 사람을 베드로에게 보내어 욥바로 빨리 오도록 간청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들과 함께 욥바로 와서 다락으로 가보니 과부들이 서서 울고 있었고 다비다가 자기들과 함께 있을 때 지어준 속옷과 겉옷을 내보였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죽은 다비다를 향해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뜨고 베드로 앞에 앉았습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와 과부들을 불러 그의 산 것을 보였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욥바의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여러날 동안 '시몬'이라는 피장이 집에서 거했습니다. 피장(皮匠)이는 짐승 가죽을 가공하는 피혁 가공업자입니다 (36-43절). 이 사건은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살인 것과 엘리사가 과부의 아들을 살린 상황과 비슷합니다 (막5:40, 왕하4:33)

 

  룻다의 애니아는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자였고 욥바의 다비다도 선행과 구제로 칭찬을 받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 믿음있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푼 것입니다 (약1:27). 또한 하나님은 그들을 매개로 주께서 베드로의 권위를 높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사건을 통해 예루살렘 주변에 있는 이방도시 곧 룻다와 욥바의 교회 공동체를 더욱 견고히 하고 그 곳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돌아오게 했습니다.

 

<結言>

  하나님은 구원 사역을 위해 복음 전도자들을 사용하시고 믿음 있는 자들을 이용해 확장시켜 나갑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육체의 질병이 치료되거나 심리적인 질병이 치료되거나 영적인 질병이 치료되기도 할 것입니다. 심지어 육체적으로 죽었거나 심리적으로 죽었거나 영적으로 죽은 자를 회생시키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의 관심을 끄는 자 되어 온전한 생활을 할 때 복음 전도와 교회 공동체는 더욱 견고해져 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