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사도행전 15:1-41
<題目> 예루살렘 공의회
<序言>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교회로 돌아와 이방선교의 놀라운 성과를 보고했다. 그런데 2차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신자들과 할례에 관한 논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로 가서 사도들을 만나고 공회에 참여합니다. 거기에서 많은 논쟁 끝에 예루살렘 공회에서 이방인도 믿음으로 구원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믿는 자는 할례를 받지 않아도 구원을 받게 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냅니다. 내용구조는 바울과 바나바의 공회 참석(1-5절), 베드로의 발언(6-11절), 야고보의 발언(12-21절), 예루살렘 공회의 결의(22-35절),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36-41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바울과 바나바의 공회 참석 (1-5절)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교회로 돌아와 있을 때 유대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있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을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일행은 안디옥교회의 전송을 받아 베니게와 사마리아를 다니면서 교회를 굳게 했습니다. 베니게와 사마리아는 스데반의 순교로 흩어졌던 빌립같은 예루살렘 그리스도인에 의해 이미 교회가 세워진 곳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굳게 하면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예루살렘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의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통해 행하신 일들을 보고했습니다. 그 때 바리새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1-5절). 이 일로 인해 많은 의논과 변론이 있었습니다 (6-7절).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할례를 받은 자만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에 참여한다고 여겼습니다. '할례'(割禮)는 남자 아이의 양피를 난지 8일만에 돌칼로 베는 의식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된 표요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한 표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런 의식이 남아 있어서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구원이 유대인에게만 있다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또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방인들도 마땅히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의식과 교훈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했습니다. 첫째는 교리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복음은 예수를 구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以信得救)는 것인데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의미로서 복음의 정체성을 깨트리는 것이었습니다. 안디옥교회의 교리적 정체성을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선교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할례를 받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외과수술에 해당할 뿐 아니라 음란하게 생각하는 할례 의식을 꺼렸습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회당에 모여든 자들 가운데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일컬어지는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면서도 기독교로 개종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들에게 할례는 너무 무거운 멍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바울의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가 '행위로 구원 얻는다'는 야고보의 이행칭의(以信稱義) 사상을 오해하여 부정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와 야고보의 이행칭의 교훈은 전혀 상반된 내용이 아니라 서로 조화되며 보충되는 내용입니다.
※ '이신칭의와 이행칭의'에 대한 이해
a. 서언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빌립보서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말하고 있습니다 (롬3:28, 갈2:16, 빌3:9). 야고보서에서는 '사람이 믿음으로가 아니라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행칭의(以信稱義)를 말하고 있습니다 (약2:24). 이 모순 되는 듯한 바울서신과 야고보서의 내용을 상호 이해의 필요가 있습니다.
b. 바울의 이신칭의 (以信稱義)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공식은 바울서신 중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빌립보서에만 나타납니다. 이 공식은 항상 유대교의 특권의식과 논쟁하는 상황에서 나타납니다. 바울이 '일반적인 행위'가 아닌 '율법의 행위'를 거부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는 의를 획득하기 위한 통로로 간주되었던 율법을 거부하고 믿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신칭의론은 이방인 개종자들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한 약속에 진정한 상속자들이 될 수 있다는 권리를 옹호하려는 독특하고도 제한된 목적을 위해 창출되었습니다. 이방인 개종자들의 권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기초되어 있습니다. 그 이신칭의론이 상실될 뻔했던 이방인 크리스천의 권익이 보호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의 권익이란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충분한 상속자들이 도리 수 있다는 권리를 말합니다.
c. 야고보의 이행칭의 (以行稱義)
야고보가 말한 '행위'는 주로 '일반 행위'를 말합니다. 일반 행위와 관련된 행위는 1:4와 2:14을 포함하여 11번 사용됩니다.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위가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의 양식조차 없는데 너희 중에 누가 그들에게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라' 하고 말하면서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행위'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일반적인 행위'를 뜻합니다. 그것은 '율법'이라는 용어 자체가 전혀 사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는 율법의 행위를 말하기 보다는 단지 기독교적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야고보의 선언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나라에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마7:21)"고 한 예수님의 선언과 내용이 일치합니다. 야고보서2:24에 "사람이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한 이 행위 역시 율법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2:24이 아브라함의 행위를 강조하는 구절(2,21)의 결론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행위'는 율법의 행위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의 인물입니다.
d. 결언
바울의 사상과 야고보의 사상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용어의 다른 사용법을 통해 각기 다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사상과 야고보의 사상의 경우는 양자 택일할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주로 '(기독교적) 믿음'을 옹호하고 '(유대교적)행위'를 비판하는 반면, 야고보는 주로 '(유대교적) 믿음'을 비판하고 '(기독교적) 행위'를 옹호한 것입니다.
2. 베드로의 발언 (6-11절)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베드로와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서 몇 사람을 대동하고 할례문제로 예루살렘교회에 올라와 사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할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회가 모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진 사실을 보고 했고 바리새파 출신 유대인들은 이방인에게도 할례를 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곳에서 열띤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일어나 이방인에게 멍에를 메지 않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발언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선택하여 복음을 전하게 했는데 이방인에게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성령을 주어 깨끗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방인도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은 줄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개종의 조건으로 할례를 요구하는 것은 유대인 조상들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 멍에를 목에 두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6-11절).
베드로는 유대인 출신 사도로서 유대인들과 같이 이방인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개방적이지 못했습니다 (갈2:11-14). 그런데 기도 중에 하나님이 보여 주신 환상과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통해 가이사랴의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영접하고 고넬료 집에 갔습니다. 고넬료 집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고넬료가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환상을 이야기 하고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였다고 했습니다. 베들로는 그들에게 말씀을 전했고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 현상은 유대인 출신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경험한 것과 동일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고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0:1-48).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께서 이방에서 행하신 일들을 보고 받으면서 바울의 주장에 동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구원을 베푸시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그들이 구원을 구원을 받아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멍에를 베우지 말아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멍에'(ζυγοs)는 소가 일을 할 수 있도록 목에 메우는 도구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요구하는 할례를 비롯하여 모든 율법을 멍에에 비유한 것입니다. 율법은 유대인 조상들도 지키지 온전히 지키지 못하여 예수님이 오셔서 완성하고 구원을 베푸셨는데 이방인에게 그런 멍에를 메우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성령을 받으면 유대인과 한 형제가 된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2:29에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10:12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12:13에는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했고, 갈라디아서3:28-29에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인종, 민족, 국민, 성, 위치에 있는 자이든지 개방적인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께서 이미 받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한 공동체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린도전서1:24-25에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복음을 받은 자들에게 주께서 역사하셔서 사용하십니다.
3. 야고보의 발언 (12-21절)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예루살렘 공회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할 때 바리새파 유대인들은 이방인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일어나 이방인에게 할례의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발언에 공회 참석자들은 어느 정도 설득되어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어서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 중에 일어난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를 고했고 이어서 야고보가 발언을 했습니다 (12-13절). 성경에 자주 나오는 야고보는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요한의 형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주의 동생 야고보가 있었는데 본문에 발언한 야고보는 주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이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였으며 공회의 의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의 발언을 받아들여 정리하는 차원에서 발언을 했습니다.
야고보는 우선 베드로가 말한 것을 시므온이 이미 하나님께서 이방인 가운데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권고하신 일을 고했다고 했습니다. '시므온'은 베드로의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이어서 야고보는 이방인이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다 (암9:11-12). 야고보는 아모스 선지자가 한 말이 베드로를 통해 이방인이 돌아오게 한 고넬료 사건으로 성취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할례의 멍에를 염두에 둔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하는 것이 가하다고 했습니다. 그 규례를 안식일에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칠 때에 가르치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14-21절).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는 이방인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도록 결정한 동시에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는 멀리하도록 하기로 결정합니다.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도록 결정한 것이 바울과 바나바의 일행의 주장이 받아들여 졌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자존심을 유지시켜주기 위해 네 가지를 정하여 이방인이 지켜야 할 것을 규례로 정한 것 같습니다. 28-29절에서는 성령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는 이방인들이 무의식 가운데 습관적으로 범하는 죄로서 개종한 다음에도 습관에 의해 아무 거부감없이 범할 수 있는 죄들이었습니다. ①우상의 더러운 것입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은 우상의 제물을 말합니다 (29절). 이는 우상숭배에 사용된 음식으로서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을 철저히 막기 위한 결정입니다. ②음행입니다. 우상숭배과 관련하여 성행한 음행으로서(주술유감) 이 음행의 습관 때문에 개종한 후에도 도덕적 개념이 흐려져 계명을 범할 수 있기 때문에 철저히 금한 것입니다. ③목매어 죽인 것입니다. 짐승을 목매어 죽여서 먹는 행위는 잔인할 뿐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피에 대한 경각심이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금한 것입니다. ④피입니다. 짐승의 피채 먹는 행위는 피가 상징하는 생명의 귀중성을 상실하게 하기 때문에 금한 것입니다 (레17:11). 그래서 피채 먹는 행위는 구약시대 때부터 금했던 규례입니다 (창9:4, 레17:14, 신12:16,23). 오늘날에도 예수 믿기 전에 행하던 습관적인 죄는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쉽게 범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생활을 하면서 전에 행하던 옳지 못한 습관들을 규례화 하여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그럴 때에 개인의 영적 생활이 증진되고 공동체의 거룩성이 유지됩니다.
4. 예루살렘 공회의 결의 (22-35절)
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25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26 (25절과 같음)
27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30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1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3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34 (없음)
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예루살렘 공회가 모인 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올라와 할례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에 할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수일 동안 토론이 있은 후 이방인이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 요구했던 할례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은 멀리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이 네가지 규례는 이방인들이 습관적으로 범하는 것들로서 개종한 다음에도 범하기 쉬운 규례들로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규례들이었습니다. 개종의 조건에 할례의 무거운 멍에를 벗겨 준 대신 이 네 규례는 연속적인 죄행과 관련이 있으므로 금하게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공회에서는 유다와 실라를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고 그들에게 공회의 결정을 전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 교회 형제들에게 문안하고 위로하고 공회의 결정을 전달했습니다. 이방교회 성도들은 예루살렘 공회의 문안과 위로와 결정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28-29절의 네가지 규례에 대한 말씀은 이렇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입니다. ①우상의 제물입니다. 우상의 제물은 다른 신약성경에서도 금하고 있습니다. 본문 사도행전15:28-29에서 사도들이 성령의 후원을 받아 결정한 것이고, 고린도전서8:7-13에서는 믿음이 약한 자들이 믿기 전에 습관이 있어서 우상의 제물인 줄 알면서도 먹게 되면 양심이 더럽혀지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했고, 고린도전서10:18-22에서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은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이 되고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했고, 요한계시록2:14,20에서는 이단의 교훈이기 때문에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디모데전서4:4-5 금욕주의에 대한 말씀이고 로마서14:1-3의 말씀은 구약에서 금한 음식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설사 우상의 제물에 관한 말씀이라 해도 바울의 의도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교리화할 수 없는 아디아포라 문제에 대해 교회의 성숙을 위해 믿음이 있는 자가 믿음이 약한 자를 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②피입니다. 짐승의 피채 먹는 행위는 피가 상징하는 생명의 귀중성을 상실하게 하기 때문에 금한 것입니다 (레17:11). 그래서 피채 먹는 행위는 구약시대 때부터 금했던 규례입니다 (창9:4, 레17:14, 신12:16,23).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성을 가지고 있는 구약 의식과 구별해야 하기 때문이도 합니다. 신약시대에도 피채 마시는 일이나 피 자체로 음식을 즐기는 것은 절제 해야 합니다. ③목매어 죽인 것입니다. 짐승을 목매어 죽여서 먹는 행위는 잔인할 뿐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피에 대한 경각심이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금한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도 약용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목매어 죽이는 음식을 즐기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④음행입니다. 우상숭배과 관련하여 성행한 음행으로서(주술유감) 이 음행의 습관 때문에 개종한 후에도 도덕적 개념이 흐려져 계명을 범할 수 있기 때문에 철저히 금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우상숭배는 항상 음행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신약시대에도 우상숭배와 관련된 성적 의식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타락의 풍조인 성적인 의식과 행위를 경계해야 합니다.
5.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 (36-41절)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바울은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과 안디옥 교회의 성장에 고무되어 2차 전도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바울은 바나바에게 이미 주의 말씀을 전했던 각 성을 형제들이 어떠한지 방문하자고 제안했습니다 (36절). 그 의미를 보면 1차 전도여행지인 구브로 지역을 다시 돌아보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 사항을 전하기 위해 수리아와 길리기아도 돌아보자는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23절).
그러나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자고 하고 바울은 마가 요한이 1차 전도여행 중 밤빌리아에서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않은 자이기 때문에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어 결별하게 됩니다. 결국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배를 타고 구브로로 갔습니다.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가 교회들을 굳게 했습니다 (37-41절). 바나바가 간 구브로는 1차 전도여행지로서 바나바의 고향이기고 합니다. 바울이 간 수리아와 길리기아는 예루살렘 공회의 수신지로서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 원인은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마가'는 로마식 이름이고, '요한'은 유대식 이름입니다. '바울'이 로마식 이름이고, '사울'이 유대식 이름인 것과 같습니다.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생질이었고 (골4:10), 예수님 승천 직후 제자들이 모여 기도한 마가 요한의 다락방과 관련이 있는 것 같고 (1:13), 베드로가 예루살렘의 감옥에 갇혔을 때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한 마가 요한의 어머니 아리아 집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12:12). 그는 바울과 바나바의 보조 사역자로 1차 전도여행에 참여했습니다 (13:5). 그러다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13:13). 그 일로 인해서 2차 전도여행에서는 동행시킬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두고 바울과 바나바가 결별하게 됩니다. 마가 요한은 후에 바울의 수종자가 되고(딤후4:11) 마가복음을 기록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중 누가 옳은지 알 수 없습니다. 당시 안디옥 교회와 본문을 기록한 누가의 관점은 바울 쪽이 옳다고 생각한 듯 합니다. 결별하여 여행을 떠나는 데 바나바는 그냥 화가 나서 떠나는 듯한 인상을 가지게 하고 바울은 교회의 축복을 받으며 떠난 듯한 인상을 가지게 합니다 (39-41절). 바울은 1차 전도여행에서 포기했던 마가 요한이 또 2차 전도 여행에서 포기할 염려를 하고 선교 사역에 차질이 없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사실 사역에서 도중에 배반하는 경우엔 심리적으로 함께 시작하지 않은 만 못할 때가 많습니다. 바나바 입장에서는 마가 요한이 자기 생질이기도 하기 때문에 책임 의식을 가지고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고자 한 것 같습니다. 어떤 땐 사역보다도 사람을 살리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기도 합니다. 선교 사역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바울의 판단이 옳을 것이고 사람 세우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바나바가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바나바가 단순히 자신의 생질이기 때문에 혈연적 애착심 때문에 인정으로 기울어진 것이라면 매우 잘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리 문제가 아니지만 서로 사역관이 달라서 합의에 이를 수 없을 때는 나누어져서 사역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서로 다투고 싸우는 것 보다는 서로 나누어져서 자신이 깨달은 방법으로 일하는 것이 좋습니다.
<結言>
15정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은 유대교회와 이방교회의 갈등을 없애고 하나가 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 전도 사역을 인준해주고 전도사역이 더욱 확대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가 2차 전도여행에서 마가 요한의 문제로 결별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고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나뉘지 않았다면 가장 좋겠으나 관점이 달라서 어려움을 당할 경우라면 서로 다투지 말고 나누어져서 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사역이 잘되겠는지 생각하여 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