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빌립보서1:1-30
<題目> 복음에 합당한 생활
<序言>
바울은 A.D.61-63년에 로마 옥중(獄中)있을 때 2차 전도여행 중에 개척한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유럽의 관문 마게도냐로 건너가 처음으로 세운 교회입니다 (행16:6-12). 자주 장사 루디아로 시작된 그 교회는 바울의 선교사역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행16:13-15,40). 바울도 그 교회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교회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하고,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준 것을 감사하고, 교인들 간의 불화를 훈계하고, 유대주의자들의 교훈에 대한 경계를 권면하기 위해 편지를 썼습니다. 빌립보서는 그런 바울의 빌립보교회에 대한 애틋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중에 1장은 그 편지의 서두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교회를 사랑하는 바울의 심정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1장의 내용구조는 빌립보교회에 대한 인사(1-2절)와 빌립보교회에 대한 감사(3-8절)와 빌립보교회를 위한 기도(9-11절)와 바울의 상황보고와 결의(12-18절)와 바울의 간절한 소망(19-26절)과 빌립보교회를 향한 권면(27-30절)으로 되어있습니다.
<本論>
1. 빌립보교회에 대한 인사 (1-2절)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장 1~2절은 헬라의 정형화된 편지 서문 형식(prescript)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헬라의 정형화된 편지 서문 형식은 발신자가 수신자에게 기쁨을 빈다는 형식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정형화된 형식에 자기들의 신앙정신을 추가한 형태로 사용했습니다 (단4:1, 겔7:12). 바울은 그러한 양식을 기독교적 신앙과 정신으로 확대하여 사용한 것입니다.
① 발신자는 사도 바울과 디모데입니다 (1절).
1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보내는 자신에 대해 소개할 때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형제 소스데네를 공동발신인으로 함께 쓰고,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실라를 공동 발신인으로 하고, 빌립보서에서는 디모데를 공동 발신인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볼 때 디모데는 나이로 보면 자기 아들 같은 사람이고, 사역으로 보면 조사(助師)로서 오늘날 교회에서 부교역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바울이 동역자를 진정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겸손한 면모이기도 하지만 진실 됨을 보여주는 면모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사역 문화와는 사뭇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동역자간의 신뢰가 구축되어야합니다. 어떤 분야의 사역이든 서로 존중하고 합의하고 배려하고 희생하는 정신을 가져야 사역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자주 나오는 '주의 종'이라는 관용적 표현은 모세나 여호수아나 다윗이나 엘리야 같이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핵심적 리더역할을 하는 자를 의미할 것입니다. 곧 주의 일을 하는 자로서의 권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임을 인식하면서도 예수님께 절대복종하는 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을 ‘예수의 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종’(δουλος)은 당시 헬라나 로마 문화에서는 비하의 단어입니다. '하인'의 개념이 아니라 '노예'의 개념입니다. 이는 자기에게 의사결정권이 전혀 없는 주인의 뜻에 완전히 복종해야하는 노예에 해당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삶의 자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예속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미국 훌러신학교 신약학 교수인 김세윤 박사는 한국교회들에서 목사를 '주의 종님'이라고 부르는 말은 하나의 한국말에 대한 폭력이라고 했습니다. '종'과 '님'은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사용하는 '주의 종'의 개념은 주의 일을 맡은 자로서 권위만 나타내는 용어로 굳어져 있습니다. 목회자들 스스로 '주의 종'이라고 하는 데에는 권위만 내세우고 낮아지지 않으려는 의식의 강한 것 같습니다. '사모'라는 용어도 하나의 직책처럼 굳어져 버렸습니다. 스스로 '사모'라고 하거나 목회자가 자기 아내를 '사모'라고 하는 것도 권위 의식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모'는 남이 스승처럼 존경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부인을 높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맡은 자로서 종'(δουλος)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높임을 받으려는 데 사용하지 말고 낮아져 섬기려는 데 사용해야겠습니다. 종의 자세는 이렇습니다. 첫째, 자기 것이 없습니다. 종은 자기 자신도 주인의 소유이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도 주인의 소유입니다. 자신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자기 소유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둘째,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종은 자기 뜻대로 결정하거나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주인의 뜻대로 주인의 명령에 절대 순종해야합니다. 셋째, 자기를 위해 살지 않습니다. 종은 자기를 위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직 주인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주인에게 복종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고전4: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고 산 노예입니다. 주님의 소유입니다. 전적으로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하며 전적으로 주님께 헌신해야합니다.
② 수신자는 빌립보교회 성도와 감독과 집사입니다 (1절).
1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성도'(聖徒, αγιοις, saints)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오스'(αγιοις)는 ‘거룩한 자’라는 뜻입니다 (눅1:35,72). 이는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카도쉬'(קדש)에서 온 말입니다. 이는 ‘구별되었다’는 의미로서 거룩한 장소나 대상물에도 사용되었지만 사람에게도 적용하는 말입니다. 특히 언약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용하는 말이었습니다. 출애굽기19:6에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구약에 나온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이 된다는 구절이 신약의 교회에 동일하게 적용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2:9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육신적 이스라엘이 영적 이스라엘로 대체된 것입니다. 이제 교회가 새 언약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소유이고 제사장 나라이고 거룩한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처럼 혈통적이 아니라 믿음으로 언약 안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회가 성도의 단체로서 거룩한 것은 하나님이 언약 안에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았기 때문이고 이차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들을 성도라 일컫는 것은 예수 믿는 자들이 구별된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감독'(監督, επισκοποις, bishops)은 '장로'라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딤전5:1, 딛1:5-7, 벧전5:1-2) 교회 전체를 가르치는 일과 치리하는 일을 관장하는 교회 공동체의 리더를 말합니다. 초대교회 초기에는 '감독'과 '장로'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2세기 초 이후에는 감독과 장로를 구분했습니다. '감독'은 교회 전체를 감독하면서 가르치는 일에 전담하는 자로서 교회에서 한 명만 두었습니다 (오늘날 목사 직책에 해당). '장로'는 교회 회중의 어른으로서 주로 치리와 행정을 담당하는 자였고 한 교회에 여러 명을 두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장로 직책에 해당). '집사'(執事, διακονοις, deacons)는 교회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자들입니다. 당시 집사는 교회의 실제적인 일들을 담당했습니다. 심지어는 구제와 전도와 설교까지 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문안인사를 하면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도 함께 문안 한 것은 교회에서의 그들이 차지한 권위 때문인 것 같습니다.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온 헌금은 그들의 일치단결된 마음이 가능케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면에서 본다면 교회의 고난을 가중시키는 불화가 그들로 인하여 고착화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의 교회에는 리더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③ 인사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입니다 (2절).
2절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고 했습니다. 이 문안 인사에는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가지는 진정한 사랑이 나타납니다. '은혜'(恩惠, grace)에 해당하는 ‘카리스’(χαρις)는 ‘기쁨’으로 해석될 때도 있지만 ‘선물’ ‘호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받는 선물 곧 혜택을 말합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언약하신대로 대가없이 베풀어주신 구원의 선물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친히 자기 백성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고 언약하셨는데, 하나님이 그 언약대로 죄로 죽게 된 백성을 죄와 그 결과로 오는 사망과 그 주변의 모든 고통 가운데서 구원해주신 것이 은혜입니다. 선택(選擇)과 사죄(赦罪)와 중생(重生)과 칭의(稱義)와 성화(聖化)와 영화(榮華)가 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그 은혜의 절정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救援)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은혜'라는 말은 상당히 곡해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았다'고 표현하는데 그것은 기본적으로 변형된 표현입니다. 엄밀히 말해 설교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알게 하는 수단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차적 의미로 조금 확대 적용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확인시키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은혜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할 때는 적어도 설교의 메시지가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담고 있을 때 사용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과 사역을 깨달았을 때 사용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가지신 계획과 목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주권적 구원, 성령을 통해 성취하시는 섭리를 깨닫고 확인하고 감격할 때 사용해야합니다. 설교에서 알레고리적 해석이나 주관적 계시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설교, 개인적인 사상이나 주장을 담고 있는 설교 등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설교에서는 조금 자제해야합니다.
'평강'(平康, peace)에 해당하는 ‘에이레네’(ειρηνη)는 구약의 히브리어 ‘샬롬’(שלום)에 해당하는 단어로서 ‘평안’ ‘평화’ ‘화평’ ‘번영’ 등의 뜻입니다. 이 평강은 은혜의 결과입니다. 곧 '평강'이라 함은 은혜받은 결과로 나타나는 평안 곧 행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은혜'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공짜로 주신 구원의 선물이라 할 때, '평강'은 그 은혜로 누리는 행복인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이 실제로 주신 구원의 은혜로 얻은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 아들로 삼아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죄를 없이해주고 성령님으로 성화를 이루게 하고 마침내 천국에 가게해 주신 것을 누리는 행복입니다. 죄와 죽음과 내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공포 가운데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셔서 행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차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 때 얻어지는 행복감입니다. 우리는 죄와 그 결과인 죽음과 그 증후군들인 여러가지 다양한 고통들로 평안을 누릴 날이 없습니다. 오늘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모르고 안다고 해도 해결할 능력이 없고 내일의 결과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근심하며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과 사역을 알면 평안을 얻게 됩니다. 성경말씀과 성령의 조명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가지시고 어떻게 섭리해 오셨고 어떻게 목적을 이루실 것인지 깨달을 때 안정을 찾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 인한 평강입니다. 그 평강은 우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고 자기 마음이 편안해지고 다른 사람과 화목을 나타내고 자연만물과 건전한 교류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빌립보서의 발신자는 바울입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가이사 황제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수신자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입니다.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빌립보'라는 세속적 영역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갇혀있는 바울이 세상의 범주에서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인사하는 것은 진정한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인사에는 바울의 진실한 사역관이 묻어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합니다'하는 인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야합니다.
2. 빌립보교회에 대한 감사 (3-8절)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바울은 옥중(獄中)에서 빌립보교회에 편지하면서, 빌립보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와 기쁨으로 간구하는 것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3-4절).
① 빌립보 교인들이 사역에 참여한 것을 감사했습니다 (5절).
5절에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는 이유입니다. ‘복음을 위한 일’은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사역을 도운 사실을 두고 한 말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전도를 위해 사역에 참여했고 그로인해 복음전도에 큰 효과를 가져왔음을 나타내려 한 말입니다. 그들이 바울 자신의 사역을 도운 것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전도를 위함이었고 그로인해 자신이 전하는 복음전도가 더욱 효과있게 전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을 때 빌립보 교인들이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보내온 헌금을 받아들고 한없이 감격했을 것입니다. 헌금 자체 때문이라기보다는 자기 혼자 복음을 위해 일하다가 고난을 겪고 마침내 죽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의 헌물은 그들이 함께 하고 있다는 위로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복음을 위해 돕더니 끝까지 돕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이 빌립보 교인들이 성장한 것으로 생각되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들이 복음전도 사역에 도움을 준 것은 사역자가 늘 잊지 않고 감사할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첫날부터 이제까지'는 바울이 빌립보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로마 감옥에 갇혀있을 당시까지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마게도냐의 빌립보에서 복음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헌신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사람 한 사람이 서서 '마게도냐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청하는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환상을 계시로 마게도냐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마게도냐 지방에 들어가 첫 성(城)인 빌립보에서 전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처음 도착하여 기도하기 위해 강가에 나갔다가 자샛 옷감 장사 루디아를 만나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그때 루디아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청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을 치는 귀신들린 한 여종을 만나서 귀신을 쫓아내주었습니다. 그로인해 여종의 주인이 고소를 해서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을 찬미했는데 천사가 착고를 풀어주고 옥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 상황을 접한 감옥의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바울과 실라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간수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모셔다가 온 식구가 세례를 받고 기뻐했습니다. 루디아는 자기 집을 개방했고 간수는 친절히 대접했습니다 (행16:8-34). 빌립보교회는 그들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빌립보교회는 계속해서 바울을 도왔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와 고린도에 있을 때도 헌금을 보내 주기도 했고 (빌4:16, 고후11:9), 예루살렘에 갈 때도 헌금을 해 주었습니다 (롬15:15-17). 당시 로마 감옥에 있을 때도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물질을 보내어 위로해주었습니다 (빌2:25).
빌립보 교인들은 그 옳은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도 많은 환난과 시련이 있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을 주께 드리는 심정으로 자원하여 힘에 지나도록 연보를 했습니다. 고린도후서8:1-5에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빌립보)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옳은 일을 한번 하고 맙니다. 그러나 옳은 일은 힘들 때에도 지속적으로 해야합니다.
② 빌립보 교인들이 은혜에 참여함을 감사했습니다 (6-8절).
첫째,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전도 사역에 참여한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빌립보교회에 대해 가지신 뜻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6절에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착한 일'은 일차적으로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전도 사역에 참여하게 한 것을 두고 한 말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빌립보교회에 대한 목적을 가지시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섭리하시는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전도 사역에 참여하여 복음전도를 효과있게 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이미 복음으로 구원받은 그들이 구원을 이루어가는 성장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시작과 성장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에 대한 목적을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미 구원을 주셨는데 그 구원이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그 구원이 완성될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둘째,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7절에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늘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마음속에 늘 간직하는 이유는 그들이 바울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바울과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매임'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갇힌 상태를 말하고,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옳음을 변증하고 천명하는 일을 두고 한 말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들어가고 재판 때에 법정에서 자신이 왜 붙잡혀 왔는지 왜 죄가 없는지를 밝혀야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어떤 것인지 왜 자신이 그 복음을 전해야하는지 확실히 변증해야했습니다. '은혜'는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은혜'란 원래 하나님이 대가없이 주신 구원의 선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본문에서 말한 은혜는 바울 자신이 복음 전하는 일을 하고, 복음 전하는 일 때문에 고난을 받고, 고난 중에도 복음이 진리 됨을 선포하는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 전하는 자로 부름받거나 복음을 위해 수고할 자격이 없는 자인데, 하나님이 불러서 그 일을 맡기시고 그 일을 위해 고난도 받게 하시니 그 직책과 사역을 은혜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 자신을 도운 것은 그 은혜에 동참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면서 참으로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고 동역자들에게 여러 번 배반당하고 함께 하는 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복음전도의 문이 열렸음에도 디도가 오지 않아 마음이 편치 않아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간 적도 있었습니다 (고후2:12-13). 바울이 처음 변명할 때에 다 버리고 바울과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딤후4:16). 디모데후서4:10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일반인들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직계 제자가 아니었고 전에 그리스도인을 핍박한 전과가 있고 자기 병을 낫지 못한 것 등 때문에 사도권에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교인들에게 수사학적 설교를 하지 않아서 별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다가 감옥에 갇혀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입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외롭고 고독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인들이 에바브로디도 편에 물질을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에바브로디도가 그의 병을 간호하고 물질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그때 그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혼자 복음 전하다가 혼자 갇히고 혼자 힘없이 변증도 못하다가 죽게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빌립보 교인들의 후원으로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들 때문에 위로가 되어 복음 전하다가 갇힌 것을 기쁘게 여길 수 있게 되고 복음을 변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늘 마음에 둘 수밖에 없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셋째,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주의 심장으로 사모했습니다.
8절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심장'(σπλαγχνοις)은 기본적으로 심장, 폐, 간, 허파 등의 내장(內腸)을 말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곳을 마음이나 감정의 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곧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사모했다는 말은 예수님의 마음(심정)을 가지고 사모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시되 자기 몸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몸을 내어주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성도를 피로 값 주고 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피조세계에 화육인신하셨습니다 (빌2:6-8).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했는데, 부르짖음의 내용은 요한복음 17장 내용을 보면 하나님 뜻을 찾는 내용입니다. 그중에 자기 백성들의 구원에 관한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두고 그토록 부르짖은 것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의 변호자가 되어주십니다 (요일2:1). 이것이 예수님이 교회와 성도를 향한 마음입니다. 바울은 자기 경험 속에서 그 주님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주님의 심장으로 사모한다는 표현은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바울의 빌립보 교인들에게 대한 애끓는 심정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주님의 복음을 위한 마음이 사역자와 성도와의 관계를 참으로 긴밀하게 만들었습니다.
3. 빌립보교회를 위한 기도 (9-11절)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옥중(獄中)에서 빌립보교회에 편지하면서, 빌립보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와 기쁨으로 간구하는 것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3-4절).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을 보고 싶으나 볼 수 없어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한 것입니다.
①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9절).
9절에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사랑(αγαπη)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8:1-2에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빌립보)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환난과 가난 속에서도 바울의 선교활동과 예루살렘 성도 구제를 위해 연보를 풍성히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사랑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증진되고 확대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환난을 면하게 해달라고 하거나 가난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사랑이 더욱 풍성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은 특이한 일입니다. 그것은 아마 빌립보 교인들이 사랑으로 연보를 한 것에 대해 칭찬하면서도 빌립보 교회 내에 있는 분쟁을 지적하고 싶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미 있는 사랑이 더욱 많아져서 내분까지 해결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직접 관계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직접 관계하는 사람을 사랑하기가 더 힘들다는 원리를 제공해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더해지기를 바랐습니다. '지식'(知識)은 사건과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 '총명'(聰明)은 지식을 바탕으로 최선의 것을 선택해내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지식'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아는 인식을 말할 것이고, '총명'은 그 지식을 바탕으로 지적 도덕적 영적인 판단력을 가지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풍성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이미 그들에게 있는 사랑이 하나님의 진리를 알아 지적 도덕적 영적 분별력이 있는 사랑으로 증진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싶어도 언어 소통(communication)에서 이 지식과 총명이 부족하여 오히려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증오하기도 합니다. 사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쟁이 근본원인을 보면 대부분 이 갈등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② 선한 것을 분별하기를 기도했습니다 (10절).
10절에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여 행하는 자들이 되므로 그 질실함이 허물없이 주님 오시는 날까지 보존되어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를 원한 것입니다. '선한 것'(διαφεροντα)은 훌륭한, 뛰어난, 우수한, 최고의, 최선의 것 등을 의미합니다 (what is excellent -KJV, NIV, RSV). 사실 그것들을 분별하는 능력이 총명인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선한 것을 분별하기를 원하는 것은 그들이 분별하기 힘든 애매모호한 선택과 행동들 속에서도 가장 좋은 최선의 길을 선택하므로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자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사랑을 하는데 있어서도 지식과 총명을 가져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로마서12:2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 속에서 최선의 방법과 최고의 가치를 추구해야합니다. 오늘날 성도와 교회가 진실됨이 없고 흠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모든 일에 최선의 방법을 택하지 않기 때문이고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메시지부터가 진리에 바탕을 둔 가치가 아닌 경우들이 많습니다.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 앞에 가장 의미있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해야합니다.
③ 의의 열매가 맺히기를 기도했습니다 (11절).
11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로운 인격적 열매가 맺혀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의’(δικαιοσυνη)는 ‘올바름’ ‘공정함’ 등의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합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히5:13,7:2). 여기에서 의는 에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하여 믿는 자가 얻는 칭의(稱義)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선도가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과 합치하는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의 열매’는 하나님의 뜻과 합치하는 생활의 결과로 이루어진 인격적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엡5:9).
그것은 믿는 자에게 내주하여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갈라디아서5:22-23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인격적 변화를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움으로 성경말씀을 깨달아 성령님이 감동시키는 바를 따라 행하기를 힘써야합니다. 갈라디아서5:25에는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변화된 신앙인격이 하나님 앞에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 자신과 교회의 목표와 목적을 의미가 없거나 최고의 것이 아닌 것에 가치에 둡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 인격적 열매에 두지 않고 사역의 열매에 둡니다. 질적 온전을 추구하지 않고 지나칠 정도로 양과 크기만을 늘어나기를 추구합니다. 그 열매가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과 성령으로 인격이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힘쓰므로 예수님이 오실 때 흠이 없게 나타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3:13에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벧후3:14).
4. 바울의 상황보고와 결의 (12-18절)
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은 A.D.61-63년 기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에 투옥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빌립보서는 A.D.62-63년 옥중(獄中)에서 쓴 편지입니다. 본문에서는 자신이 투옥되어 있는 동안 상황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투옥되어있는 동안 복음사역에 진보가 있었다고 말하고(12절) 그로인해 자신이 크게 기뻐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18절).
바울이 투옥되므로 인하여 빌립보 교인들은 낙심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목자이자 복음전도자인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된 사실을 두고 그 처한 환경을 복음의 패배로 인식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가이사 황제의 관리들에게 붙잡혀 갇히고 사형에 처할 위기의 상황에 놓인 것은 가이사 황제에게 패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 패배의식은 그들의 신앙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사역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보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전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감옥에 있으므로 복음사역이 어떻게 증진되었는지를 알린 것입니다.
①복음이 시위대 안에서 증거되었습니다 (12-13절).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되었습니다. 그 당한 일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12절). 그 내용 중의 하나는 바울의 매임이 시위대 안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13절). 당시 로마에는 9,000여명의 병력이 수비대로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죄수를 돌아가면서 감시했습니다. 보통 그들에게 복음 전할 기회를 얻기는 힘듭니다. 그런데 바울이 감옥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들을 접촉할 기회를 얻게 되고 자신의 죄목을 변명하면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개인적 접촉과 재판석에서의 변명을 들으며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잡힌 것을 알게 되고 왜 그 복음을 전하게 되고 그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충성을 맹세한 관리와 군인들이 주께 복종하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②로마의 성도가 복음을 담대히 전하게 되었습니다 (14절).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되므로 형제 중 다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14절). 로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있었는데 그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되었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힘을 내어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므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위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고해져서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복음 전하는 일에 담대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잡힘은 복음전파를 위축시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진보를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③투기로 복음전도에 열심인 자들도 있었습니다 (15-17절).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된 다음에 로마 그리스도인들이 힘을 얻어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착한 뜻으로 전하는 자들도 있었고 시기와 분쟁으로 전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15절). 착한 뜻으로 전하는 자들은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음 전도자로 세움 받은 줄 알고 바울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복음전도에 동참했습니다 (16절). 하지만 투기와 분쟁으로 전하는 자들은 바울을 괴롭게 할 목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17절). 곧 바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 가운데도 바울의 명성을 시기하여 바울이 투옥되어 있는 동안 자신들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복음전도에 열을 올리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롬14장). 그들은 복음전도 사역을 순수한 목적에서 하지 않고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 한 자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잘못된 목적에서 복음전도에 열심이었지만 그들을 통해서라도 복음전도가 증진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바울 자신이 투옥됨으로 인해 나타난 결과로 본 것입니다.
18절에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서도 기뻐했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감옥에 있음으로 인해 시위대에 복음이 전해지고 로마의 성도들이 복음전도에 열심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복음을 전하는 자들 가운데는 불순한 목적으로 전하는 자들도 있지만 그들이 비록 외모로 일한다 하더라도 그들을 통해서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힘으로 인하여 나타난 복음의 진보를 보면서 자신은 비록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통 가운데 있지만 기뻐하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명성과 유익을 위해 일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감옥 안에서도 그런 의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상황보고 관점은 신앙인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모든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고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시각이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5. 바울의 기대와 소망 (19-26절)
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A.D.61-63년 기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에 투옥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사형될 수도 있었고 석방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사형당해 순교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석방되어 살아서 복음사역을 더 하는 것이 좋을지 갈등했습니다. 그 고민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교회와 성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
①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원했습니다 (19-20절).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힘을 얻어 복음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고 또 자신의 명성을 시기하는 자들이 기회를 얻어 복음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선한 목적으로 전하든 나쁜 목적으로 전하든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는 사실 자체로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14-18절). 바울의 기쁨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19절에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감옥에 갇힌 상황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그 상황이 빌립보 교인들의 기도와 성령님의 도움이 구원에 이르게 할 줄로 믿었습니다. ‘구원’은 실제적으로 보면 석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석방되어 빌립보 교인들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26절). 이차적으로 연단을 통해 영적 성장을 이루게 되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2:12). 그는 끝까지 잘 견디므로 주님 앞에 설 마음도 있었습니다 (21절).
20절에 "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간절한 기대'에 해당하는 ‘아포카라도키안’(αποκαραδοκιαν)는 ‘목’(καρα)과 ‘빼고’(απο) ‘바라보다’(δοκιαν)의 합성어로 목을 앞으로 길게 빼어 멀리서 오는 소식을 조금이라도 빨리 접하려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우리말의 학수고대(鶴首苦待)를 말합니다. 학이 머리를 내미는 것처럼 복을 길게 내밀고 고통을 참아가며 애타게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말로하면 ‘목이 빠져라 기다린다’는 말과 같습니다.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어떤 결과가 오든지 재판정에서 부끄럽게 행하지 않고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를 원한 것입니다. '부끄러워하지'에 해당하는 기본형 시스퀴노마이(σισχυνομαι)는 ‘수치를 느끼다’로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복음에 대해 추하게 행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서1:16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했습니다. 종말적으로 주님을 존귀하게하기를 부끄러워하면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주님도 자신을 부끄러워하리라 생각하고 주님 증거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마가복음8:38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라고 했고, 누가복음12:8-9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라고 했습니다.
20절에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고 했습니다. ‘전과’에 해당하는 ‘판토테’(παντοτε)는 ‘언제나’ ‘항상’의 뜻입니다. ‘온전히’에 해당하는 원형 ‘파스’(πας)는 ‘모든’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오직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모든 담대함으로 살든지 죽든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몸’은 자신의 전 존재를 의미합니다. 재판 결과가 석방이든지 사형이든지 상관없이 자기 존재와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석방된다면 복음전도 사역을 더욱 열심히 수행하므로 그리스도가 높임받고 사형을 받는다면 순교의 제물이 되어 그리스도가 높임받기를 바란 것입니다. 자신의 안위와 명예를 생각하지 않고 어떤 결과가 나오든 자신을 통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만을 추구한 것입니다.
21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사는 근거와 중심과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존재하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살고 예수님을 위하여 사역을 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후5:5). 뿐만 아니라 그는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죽은 것도 유익하다는 것은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고 그리스도와 교제를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23절, 고후5:8), 순교를 통해 그리스도가 높아질 것을 바라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교하므로 다른 사역자들과 성도들을 통한 복음전도의 증진을 가져와 그리스도께 영광이 될 것을 바라본 것인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자신을 주관하고 있는 이가 그리스도인데 그가 어떤 길로 이끄시든지 그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이므로 만족한다는 생각인 것입니다.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이 주의 복음사역에 유익을 가져온다면 만족한다는 믿음처럼, 자신이 죽게 되더라도 그리스도의 목적이 이루어진다면 만족한다는 신앙신념을 가진 것입니다.
②교인들의 믿음의 진보를 위해 살기를 원했습니다 (22-26절).
아무리 가벼운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진지해집니다. 죽음을 앞두고 하는 사람의 말은 참으로 진지한 말입니다.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간혹 보게 됩니다. 늙어서 혹은 병들어서 혹은 사고로 죽어가는 사람을 봅니다. 그 사람들이 죽음을 앞두고 한 말은 얼마나 사무친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가 어떤 말을 하든지 다 들어줍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자가 사형대로 끌려가기 직전에 한 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만일 그 죽음을 앞둔 자가 남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가장 급하게 필요한 말을 할 것입니다. 평생 담아 둔 진실된 말을 할 것입니다. 그 말의 내용은 여태껏 살아온 가치와 목적이 어디에 무엇에 있었는지 알게 할 것입니다. 바울이 죽을지도 모르는 판결을 앞두고 진심으로 한 말이 놀랍게도 빌립보교인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바울은 두 길의 사이에 있었습니다. 사형 언도를 받아 죽게 될 수도 있고 무죄 판정을 받아 석방될 수도 있었습니다. 죽을 수도 있었고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21절에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했었는데, 22절에는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라"고 했습니다. ‘내 일의 열매’는 바울이 복음전도 사역을 하므로 많은 사람으로 구원으로 인도하고 주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한 편으로는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자 하는 욕망도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살아서 일의 열매를 얻고자 하는 욕망도 있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죽는 것이 유익할 것 같았고 한 편으로는 사는 것이 유익할 것 같았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죽는 것도 유익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리스도에게 상급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23절, 고후5:8, 12:2, 딤후4:7-8). '今世에 一日短이면 來世에 一日長이라'는 순교자의 생각과 같은 것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천국 가서 그리스도와 풍성한 교제를 하고자 하는 욕망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는 것도 유익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살아서 복음전도 사역을 하므로 복음전도 사역에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23-24절에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죽어서 그리스도와 완전한 교제를 하고픈 생각도 있었고 살아서 사역의 열매를 맺고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생각하면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으나 살아서 사역을 하는 것이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더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면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좋지만 빌립보 교회의 상황을 생각하면 살아서 사역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그것은 빌립보교회가 아직 연약한 상태에 있고 어려운 가운데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3:1-3,19, 4:2). 그래서 그들에게 좀 더 말씀을 가르치고 믿음의 진보를 가져오게 하고 기쁨이 풍성하게 하고픈 열망이 일어난 것입니다.
25-26절에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도 좋으나 살아서 사역을 가는 것도 좋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교회를 생각하면 살아서 사역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빌립보교회를 위해 살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그들과 함께 거하게 해주실 것으로 확신한 것입니다. 그들과 같이 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자랑이 풍성하게 하게 하기 위해 함께 거하게 해주실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과 함께 있으면 그들의 믿음이 진보되고 그로 인한 기쁨이 있을 것이고 그들에게 자랑할 것이 풍성하게 될 것 때문에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살게 해주실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 유익만 생각하지 않고 교인들의 유익을 추구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살게 할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말한 것처럼 사는 것도 주를 위해 살고 죽는 것도 주를 위해 죽는 자였습니다. 로마서14:8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습니다. 우리 또한 그의 신앙을 본받아 어떤 상황에서라도 주를 위하는 정신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6. 빌립보교회를 향한 권면 (27-30절)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바울은 1장에서 마지막으로 권면을 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는지에 대해 권면을 했습니다. 그 권면은 빌립보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염두에 둔 권면이었습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안으로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부인의 지나친 열성 때문에 서로 불화한 상태였습니다 (4:2-3). 밖으로는 바리새적 율법주의자들이 할례를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말하면서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3:2).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바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서로 한 마음을 가져야하고 그 하나된 마음으로 연합하여 외부의 교리적 공격을 담대히 막아내어야 한다고 권면한 것입니다.
①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고 했습니다 (27절).
27절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생활하라'의 헬라어는 'πολιτευεσθε'(폴리테우에스데)입니다. 3:20에도 'πολιτευμα'(폴리테우마)라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둘 다 'πολι'(폴리)라는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폴리'는 도시를 말하고 '폴리테우마'는 시민권을 말하고 '폴리테우에스데'는 도시 공동체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는 것은 복음에 합당하도록 교회공동체의 삶을 잘 꾸려나가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그러한 용어를 사용한 것은 빌립보 시의 특성과 빌립보 인들이 갖고 있는 시민의식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빌립보 시는 로마의 전역한 군인들을 이주 정착시킨 도시로서 그곳의 시민들은 자신들이 로마의 시민이라는 자부심이 깊었습니다. 그들은 빌립보 시가 야만민족이라 생각하는 트라케족과 접경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그 민족들에게 문명국 로마의 높은 문명을 보여주어야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세상 속에 있는 교회의 위치를 설명하는데 사용한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속한 도시요 시민입니다. 그래서 3:20에는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법대로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갈 것이 아니라 교회를 하나님의 질서와 윤리를 따라 세워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 27절의 의미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했는데 이는 공동체를 꾸려나갈 때에 복음이 갖고 있는 정신, 복음이 제시하는 방법을 따라 꾸려나가라는 말입니다.
②복음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했습니다 (27절).
27절 하반절에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라고 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복음에 합당한 공동체 삶을 이루어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석방되어 빌립보교회에 가게 되거나 혹 가보지 못하게 되거나 하더라도 일심으로 한 뜻으로 복음신앙을 위해 협력하라고 한 것입니다.
'한마음으로 ~ 한 뜻으로'(εν εις πνευμα μια ψυχη)는 문자적으로 '한 영과 한 혼으로'입니다. 그러나 인성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에서의 영과 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목적과 동일한 가치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할 것을 말합니다. 팀워크가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서'(στηκετε)는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굳게 서있는 모습입니다. '협력하는 것'(συναθλουντες)은 경기에서 한 팀으로 함께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미식축구에서 한 팀이 스크럼을 짜고 한 덩어리가 되어 경기하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당시 군대가 방패와 창을 들고 적을 향해 항오를 벌이는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③ 대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28-30절).
28절에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대적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의 핍박도 있었지만 거짓된 교사들의 유혹도 많았습니다. 30절에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큰 싸움이 있었습니다. 복음전도 사역을 방해하는 역사가 많았습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개척할 당시에 점을 치는 귀신들린 여종으로 인하여 감옥에 갇히기까지 한 일이 있었습니다 (행16:16-24, 살전2:2). 그 사실을 빌립보 교인들이 보았습니다. 당시에도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전도를 방해하는 자들로 인하여 감옥에 갇혀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 있는 것을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듣고 있는 사실입니다. 빌립보 교인들도 복음운동으로 인하여 그와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들을 두려워하여 도망하는 자들이 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자들이 되길 바란 것입니다. 영적 싸움을 회피하지 않고 담대히 싸우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대적자들에게는 말망의 증거가 되고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구원의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사역을 방해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복음사역을 방해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증거가 되기도 하고 복음사역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확실한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자체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이고 승리할 수밖에 없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29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은혜주신 목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은혜주신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 그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것이고 그 복음사역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도 그 고난에 동참하려고 애를 썼고 사도 요한도 그 고난에 참여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계1:9). 우리도 주님이 맡긴 사명과 사역을 위해 오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합니다. 사도행전14:22에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라고 했고, 사도행전5:41에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했고, 로마서8:17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結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때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합니다 (요일 3:13). 세상과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성도를 미워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하시는 일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교회와 성도도 당연히 미워합니다. 자기들의 정체와 행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비진리를 따르는 자들이 진리를 따르는 자들을 싫어하는 이유도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의 진리를 세워 나가려 하면 당연히 대적하는 자들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구원의 빙거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요 주의 고난에 참여하는 증거로 알아야합니다. 피하거나 도망하지 말고 담대히 믿음으로 이겨나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