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빌립보서3:1-21

<題目> 대적자들에 대한 경고


<序言>

  바울은 2장에서 빌립보교인들이 핍박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모범적 겸손을 본받아 서로 섬기는 자세로 교회의 일치를 가지라고 당부했습니다. 3장은 복음의 순수성을 흐리게 하는 유대주의자들을 경계시킵니다. 아마도 바울이 감옥에서 편지를 구술하는 동안 빌립보교회에 유대인들이 나타나 아브라함의 언약의 징표인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온전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므로 신앙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핍박 중에서도 일치와 화평과 기쁨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라는 권면을 잠시 중단하고 유대주의 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올바른 신앙을 설명하는 내용을 구술하게 됩니다. 내용구조는 유대주의자들에 대한 경고(1-3), 바울이 자랑하는 것(4-9), 바울이 알고자 한 것(10-11), 바울의 달음박질(12-16),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계(17-21)로 되어있습니다

    

<本論>

       1. 유대주의자들에 대한 경고 (1-4절)

 

  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①바울은 교회의 안전을 위해 경계했습니다 (1).

 

  1절에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같은 말들을 하려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전에도 빌립보 교인들에게 잘못된 교훈을 전하는 유대인들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자주 했는바 그 내용을 또 편지로 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 글을 또 쓰는 것은 빌립보 교인들의 안전을 위해서라 했습니다. 이미 여러 번 경고했던 유대인들의 시비와 유혹에 대한 경고를 다시 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확실하게 하고 안전하게 하려함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양떼를 잘못된 교훈으로부터 지키고 올바른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이 사도된 의무이기 때문에 전혀 번거롭거나 수고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기쁨으로 쓴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목회정신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참된 목자는 양떼의 안전을 위해 수고함을 기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정신입니다. 요한복음10:11-12"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고 했습니다.

 

   ②바울은 유대주의를 삼가라고 했습니다 (2).

 

  2절에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개들'(κυνας)는 애완용 개가 아니라 길거리에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덤벼들어 해를 입히는 개를 말합니다. '행악하는 자들'(κακους εργατας)은 타락한 혹은 나쁜 일꾼들을 말합니다. ‘몸을 상해하는 일에 해당하는 원형 카타토메’(κατατομη)잘라내기’ ‘절단의 뜻입니다. 이는 할례를 염두에 둔 말인데 할례(禮黨)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 표로 남자아이를 낳으면 난지 8일 만에 생식기의 표피 끝을 돌칼로 베는 의식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유대주의자들을 주의하고 그들이 받아야 한다고 하는 할례행하는 일을 주의하라고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언약적 축복 안에 있는 자들이라고 주장했고 할례 행하는 것을 그 증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자신들만 언약백성으로서 이민족을 개처럼 여기지만 그들이 실상은 개와 같은 자들이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들이라 하지만 실상은 불법을 행하는 악한 자들이고, 할례를 선민의 증거로 여기지만 실상은 그저 자기들의 살 조각만을 떼 내는 자들에 불과하다고 공격했습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을 그토록 신랄하게 공격하는 것은 그들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므로 바울이 전한 이신득구(以信得救)의 바른 복음을 받은 교인들이 미혹을 받겠기 때문입니다.

 

   ③바울은 자신들이 진정한 할례파라고 했습니다 (3).

 

  3절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포함하여 1절에서 나의 형제들로 표현한 빌립보 교인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곧 할례파라라는 말은 바울을 비롯한 빌립보 교인들이 진정한 할례파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할례파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빌립보 교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선택받은 언약백성은 외부적으로 할례를 받은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2:28-29"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고 한 이유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자가 진정한 할례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자들이 진정한 하나님 백성입니다. '봉사하며'에 해당하는 원형 라트류오’(λατρευω)봉사하다’ ‘섬기다’ ‘예배하다등의 뜻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공적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4: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어디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으냐고 질문했을 때 대답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여인이 요구하는 대답은 하지 않고 미래의 일을 말씀하였습니다. 미래에는 영으로 예배하는 때가 오는데 그때에는 예루살렘에서나 사마리아와 같은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어디서든지 영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영과 진리'(εν πνευματι και αληθεια)'성령과 진리로' 혹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를 의미합니다 (in spirit and in truth). 예배하는 자는 '반드시'(δει, must) 성령과 진리로 예배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진리'(αληθεια)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킬 때도 있고 (14:6),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가리킬 때도 있습니다 (16:13). 예배에는 말씀이 있어야합니다. 칼빈도 참된 교회의 표지에 바른 말씀의 선포를 첫 번째로 두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성령입니다. 성령(πνευμα)은 하나님의 영()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보혜사 성령(聖靈)으로 강조됩니다. 보혜사(保惠師)의 헬라어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ς)는 어원적으로 '곁에서(παρα) 돕는 자(κλητος)'라는 뜻으로서 영어성경들에서는 '대언자' '증거자' '변호자' '위로자' '상담자' 등으로 해석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죄를 기억나게 하고 말씀을 깨닫게 하고 미래 일을 알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15:26, 16:7-8, 13-14).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顯在)를 느낄 수 있고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말씀이 적용되게 되고 죄를 회개하게 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게 되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둘째,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자가 진정한 할례파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자랑하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 백성입니다. ‘자랑하고에 해당하는 원형 카위카오마이’(καυχαομαι)자랑하다’ ‘기뻐하다’ ‘영광돌리다등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기초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구속이 우리 신앙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배의 핵심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시대에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기준도 그와 관련이 되어있습니다. 구약에서 모든 제사에서 짐승의 희생 곧 피 흘림이 요구되었던 것도 그와 관련이 있습니다. 제사의 종류 중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로서 짐승의 피 흘림이 없지만 소제 단독적으로는 드릴 수 없고 희생제물이 있는 다른 제사와 함께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의 가장 핵심되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되어야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역에서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존귀케 하고 자랑해야합니다.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기를 원했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정신을 가졌습니다. 오직 자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만 존귀케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일만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만 세워진다면 만족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1:20, 14:8).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자가 진정으로 하나님 백성인 것입니다.

 

  셋째,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가 진정한 할례파라는 것입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 백성입니다. '육체'(σαρξ)는 기본적으로 '' '' '피부' 등을 말하나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인간의 모든 조건이나 배경이나 공적 등에 대한 상징 용어로 사용했습니다. ‘신뢰하지에 해당하는 원형 페이도’(πειθω)확신하다’ ‘의존하다의 뜻입니다. 바울 자신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육체의 것들을 신뢰했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팔 일 만에 할례받은 것, 이스라엘의 족속인 것, 베냐민의 지파인 것, 히브리인인 것, 바리새인인 것, 교회를 핍박한 것 등이었습니다 (4-6). 그러나 회심한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뢰했습니다. 7-9절에는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해주신 것에 감격하여 예수님을 좀 더 알고 예수님을 좀더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육체적으로 신뢰하던 것들을 버리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 백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할례파 같이 외부적인 것을 의존하고 외부적인 것으로 자랑하지 말아야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높이고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 백성된 증표인 것입니다. 그런 추구점을 가진 교회가 진정한 하나님의 기뻐하심은 입은 선택받은 공동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이 자랑하는 것 (4-9절)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는 동안 바울이 세운 빌립보교회에 유대인들이 나타나 바울의 가르침과 다른 교훈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신득구(以信得救)의 교훈을 가르쳤으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언약의 징표인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온전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므로 신앙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유대인들만이 가진 정통성 때문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교훈을 변호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험증하는 것입니다.

 

   ①바울은 율법적으로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4-6).

 

  유대주의자들이 구원의 조건으로 할례를 요구하고 율법 준수를 요구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그들의 정통성에 매력을 가지게 되고 반면 바울에 대해서는 정통성을 의심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구원에 있어서 할례와 율법 준수가 조건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려 할 때 빌립보 교인들이 생각하기를 바울은 유대인이나 히브리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한다는 의구심을 가졌으리라는 암시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도 유대인이고 율법적으로 흠이 없고 오히려 율법적으로 유대주의보다 낫다는 점을 피력했습니다. 고린도후서11:22에는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어떻게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6)인지 구체적으로 나타냅니다.

 

  첫째.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자였습니다. 5절에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라고 했습니다. 유대인 특히 아브라함의 후손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표징인 할례를 받았습니다 (17:12, 12:3). 아브라함의 적자 이삭의 후손은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으나 이스마엘 후손은 30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더욱이 이방인은 유대교로 들어올 때 성인이 되어서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바울이 8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둘째, 이스라엘의 족속이었습니다. 5절에 “~이스라엘 족속이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백성의 대표자인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여 얻은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언약백성의 명칭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으로서 개종한 자가 아니라 순수 유대인 혈통이라는 것을 강조한 말입니다.

 

  셋째, 베냐민의 지파였습니다. 5절에 “~베냐민 지파요~”라고 했습니다. 베냐민은 야곱이 특별히 사랑한 라헬의 아들이었습니다. 베냐민지파는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왕을 배출한 지파이고 전쟁 때 영웅적으로 싸우기로 유명했습니다. 베냐민지파는 이스라엘이 남북왕조로 갈라질 때 유다지파와 함께 남왕조를 이루어 정통성 있는 역사를 지속시킨 지파였습니다. 베냐민지파는 여로보암이 10지파를 데리고 반역할 때에 반란에 참여하지 않고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왕통에 속한 르호보암을 좇은 지파입니다 (왕상12:21-33참조). 여로보암을 따른 북이스라엘 10지파가 벧엘과 단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고 715일 절기를 815일로 바꾸고 제사장을 아무나 세울 때에도 율법적 정통성을 유지한 지파입니다. 앗수르의 이민정책으로 북이스라엘 10지파가 혼혈(混血)될 때에도 순수성을 유지한 지파입니다. 바벨론포로 때에도 신앙에 앞장섰고 (에스더와 모르드개도 베냐민 지파였음) 귀환 때에도 남아있지 않고 성전건축을 위해 유다지파와 레위지파와 함께 유다로 귀환했습니다.

 

  넷째,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5절에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이 있었고 헬라파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은 팔레스틴 출신 유대인들을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은 이방세계에 흩어져있는 유대인 곧 디아스포라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앗수르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 정착하거나 바벨론과 바사와 헬라와 로마를 거치면서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그들이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은 히브리어(아람어)를 사용했고 헬라파 유대인은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은 고유문화를 고집했고 헬라파 유대인은 헬라문화를 수용하는 편이었습니다. 이들을 구분하는 것은 언어였는데 히브리파 유대인은 헬라파 유대인이 헬라 곧 이방문화에 동화된 자들이고 자신들만이 정통성과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바울은 길리기아(지금의 트뤼키예 남부) 다소 출신이지만 부모가 히브리인으로서 아람어를 사용해서 바울도 아람어를 사용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도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5절에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Pharisees)'분리된 자들'이란 뜻으로서 바리새파는 유대 종파 가운데 가장 엄격한 종파였습니다. 당시 유대교에는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와 에세네파와 젤롯파가 있었는데 그중에 율법에 대해 가장 엄격한 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는 당시 유대교가 헬라화 되어가는 것을 반대하고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율법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것을 이어받아 율법해석과 함께 엄격한 율법준수를 하려는 율법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학파입니다. 그때 반대파들에서 이를 비난하기 위해 그들을 바리새인(분리된 자들)이라고 했는데 그들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바리새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바리새인으로 불리는 것에 전통성을 가진 증거로 생각하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에 속했을 뿐 아니라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한 자였습니다 (22;3). ‘가말리엘은 당시 예루살렘에서 바리새파 가운데 가장 높이 존경받는 율법학자(랍비)였습니다. 당시 가말리엘에게 배운 자는 바리새인 중에서도 가장 신학적 정통성을 가진 자로 간주되었습니다.

 

  여섯째,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6절에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라고 했습니다. '열심'(ζηλος)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에 대한 특별한 열성을 보이는 젤롯파의 어원이 되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25장에 보면 출애굽 당시 가나안으로 들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족장들까지도 모압, 미디안 등의 이방여인들과 행음을 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이 미디안 여인을 자기 장막으로 데려와 행음하는 일을 보고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분개하여 창을 들고 들어가 찔러 죽였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순결에 대한 열성이었습니다. 주전 168년 시리아가 통치할 때 유대교 말살 정책을 썼는데, 제사장 마타티아스와 그 아들들(마카비 형제들)이 그 통치자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고 비느하스의 열성을 재현하려 했습니다. 1세기 중반 로마의 통치에 항거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투사들도 비느하스 열성을 본받으려 했기 때문에 그들을 열성당(zelots)으로 불렀습니다. 그들은 그 전통에서 '열성'(zelos)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그것들을 범하는 자들을 폭력으로 대항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열성당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리새인들보다 더 열심히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당시 하나님의 율법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자들이라고 생각되는 그리스도인들을 폭력으로 제거하려 했습니다. 바울도 그들 가운데 앞장서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자였습니다

    

   ②바울은 과거 자랑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버렸습니다 (7-9).

 

  바울은 율법적으로 흠이 없을 만큼 좋은 배경과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었고, 이스라엘 족속이었고, 베냐민 지파였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바리새인이었고,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1-5). 바울이 전에는 유대주의자들처럼 혈통과 율법에 대한 열심을 가장 가치있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을 경험하고 회심(回心)을 통해 인식변화가 생겼습니다 (22:4-11). 그 후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가장 가치있고 고상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완전한 가치전도(價値顚倒)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로 인한 변화만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6: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좀 더 알기를 원했고 얻기를 원했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했습니다. 그 일에 방해되는 것이라면 아무리 좋았던 것들도 해로 여겼고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7절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라고 했습니다. ‘에 해당하는 제미아’(ζημια)상해’ ‘손해’ ‘상실의 뜻입니다. 8절에는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이라고 했습니다. ‘배설물에 해당하는 스퀴바론’(σκυβαλον)’ ‘오물’ (개에게) ‘던져지는 것등의 뜻입니다. 바울는 과거에 자랑할 만한 것들을 손해를 주는 것이나 오물처럼 생각하고 버린 것입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이었습니다. 8절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2:2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인 줄 알고 그에 대해 좀 더 알기를 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좀 더 알아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가 누구인지, 그가 이 땅에 왜 오셨는지, 그가 왜 십자가에 죽으셨는지,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그가 우리 삶에 어떻게 관여하시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8절에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통해 그와 연합되길 원한 것입니다. 그의 성품에 참여하길 원한 것입니다. 요한복음6:55-57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지므로 상호 내주하여 연합하고 그의 성품이 자기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 주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주께 받은 사명 감당하느라고 고난을 받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이루어졌습니다 (딤후3:12, 1:24, 20:22)

 

  셋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었습니다. 9절에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얻을 뿐 아니라 그의 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재림 날에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발견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로서 인정받기를 원한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의 공주 아들이라 일컬음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긴 것은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1:24-26). 히브리서10:32-35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께 속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가장 담대하고 주님께 가장 관심을 끄는 자가되어야 합니다.

 

  9절에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했습니다. ''(δικαιοσυνη)는 법정적 용어로서 옳음을 말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옳다고 인정받을 근거는 율법적 의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난 의로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인정받는 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었으니 삶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아서 영원히 남도록 해야합니다.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경제가 한창 다시 일어설 무렵이었습니다일본의 한 대기업이 미국 일류대학 출신의 고급 엔지니어를 찾고 있었습니다그중에서도 가급적 박사학위도 있고 일본어도 능숙한 미국인을 선호했습니다오랜 수소문 끝에 마침내 그러한 사람을 발견하게 됐습니다그는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선교를 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그들은 즉시 높은 대우와 여러 종류의 혜택을 약속하면서 자기들의 회사에 와줄 것을 제의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그들은 보수가 적어서 그러는 줄 알고 파격적인 제안을 갖고 찾아갔지만 그 때도 그의 대답은 였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대우는 충분합니다그러나 문제는 그 일거리가 나의 삶을 바칠 만큼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3. 바울이 알고자 한 것 (10-11절)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는 동안 유대인들이 아브라함 언약의 징표인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온전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므로 신앙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유대인들만이 가진 정통성 때문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교훈을 변호하기 위해 자신의 혈통과 열심을 근거로 자신도 율법에 있어 흠이 없는 자로서 그들보다 자랑할 것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도 과거에는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 이스라엘의 족속인 것, 베냐민의 지파인 것,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인 것,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하던 것 등을 자랑했다고 했습니다 (5-6).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인 줄 알고 그것들을 해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7-9).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좀 더 알기를 원했습니다.

 

   ①부활의 권능에 대해 알고자 했습니다 (10).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기를 원했는데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에 대해 알고자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빈 무덤이 증거 해주고 (23:1-3), 천사들의 증언이 증거 해주고 (24:4-8), 예수님의 증언이 증거 해주고 (28:8-10, 20:11-18, 고전15:5-8), 수의(壽衣)의 놓인 위치가 증거 해주고 (20:3-7, 20, 27), 파수꾼들의 은폐 노력이 증거 해주고 (28:11-15), 부활체의 현현(顯現) 사건들이 증거 해주고 (고전15:2-8), 목격자들의 생활 변화가 증거 해주고 (24:52-53, 4:19-20, 9:19-21), 교회의 확장이 증거 해줍니다 (2:41-47, 4:33- 37). 고린도전서15:3-4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했습니다. 그 능력은 세상 정권을 이긴 것이고 사탄을 이긴 것이고 죽음을 이긴 것이고 죄를 이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부활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고전15:20, 38-53, 8:11).

 

  그러나 바울은 단순히 그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으로 부활 사실과 그 능력을 알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진정 알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믿는 자의 삶 속에 나타내는 능력을 알고자 한 것입니다 (6:4).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역사적 사실로서만 알기를 원치 않고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살아 현재의 삶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개인적으로 경험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골로새서1:29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하면서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당시는 몸이 병들었고 감옥에 갇혀 사형선고가 내려질지도 모르는 재판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난과 환난과 죽음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에게 적용되어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28:20).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14:16-17). 그는 우리가 범죄할 때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대언해 주시기도 하지만 (요일2:1), 성령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도우십니다 (8:26). 우리는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모든 약함을 극복해 가야합니다. 질병과 죽음의 두려움도 이겨야합니다.

 

  우리는 불가불 죄와 죽음과 질병과 가난 등 여러 가지 고난의 원인들에게 종노릇 하는 환경에서 살아갑니다 (8:19-23). 하지만 고린도전서15:55-57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아야 합니다. 히브리서11:35-38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②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했습니다 (10).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알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범죄하여 죽었으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해야할 고난을 다 당하셨고 마침내 죽으셨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을 지적으로 아는데 그치지 않고 그 고난에 참여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고난당했습니다. 우리는 아담 후손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 문제를 해결하려면 죄 값을 치러야했고 그 죄 값은 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의 대속적 죽음을 믿는 우리는 죄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인으로 선언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아직 죄성이 남아있고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받아야할 고난이 남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겨둔 속죄에 대한 명령에 참여한다는 의미입니다. 죄와 더불어 싸우는 데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죄와 더불어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합니다. 히브리서12:4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특히 죄성과 싸우는 데에는 처절하게 싸워 피 흘리는 것처럼 고난이 따릅니다 (7:15-24).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합니다 (2:20). 옛 사람 곧 물욕과 정욕과 사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5:24, 요일2:16).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속적 고난과 죽음을 당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행하려 하면 고난이 옵니다. 디모데후서3:12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지키려 하면 사탄이 공격하고 죄성이 반대하여 일어나고 세상이 미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당연히 손해와 고난과 환난을 당하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6:38-39).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고난 당하셨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1:24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11:24-28에는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여할 때 주님의 위로를 받게 됩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여할 때 영적 기쁨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다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여할 때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집니다. 영적 속성이 자라납니다. 인격이 연단됩니다. 그 인격은 조개 안의 진주와 같습니다. 제련된 정금과 같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여할 때 능력과 권세가 생깁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여할 때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2:5-11).

 

   ③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11).

 

  11절에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εις την αναστασις των νεκρων)은 일반적으로 의인(믿는 자)과 악인(믿지 않은 자)의 모두 부활을 나타낼 때 쓰이는 표현이나 본문은 의인의 부활을 나타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부활'을 의인과 악인이 함께 부활한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5:29),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각각 설명하기도 합니다 (20:4-6). 바울의 의도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서 의인의 부활에 속하여 천국에 가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한 것이 아니고, 의인의 부활 중 영광스러운 형체에 속하여 상을 얻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부활 때에 의인의 부활 가운데서도 그 영광이 각기 다릅니다. 부활체의 영광이 해의 영광과 달의 영광과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과 별들의 영광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고전15:40-41).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택함 받은 성도가 모두 부활하지만 그 형체의 영광이 다르고, 그들 모두가 구원받아 천국에 가지만 받을 상이 다릅니다 (5:19, 고전3:15, 12:3). 그것은 므나 비유와 달란트 비유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19:12-27, 25:14-30). 이것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는 원리입니다 (고후9:6).

 

  바울이 복음전도의 사명을 다하고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희생하고 믿음 없는 자를 세우기 위해 고난당한 것은 그 영광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딤후4:7-8, 1:24, 고전15:29-32). 모세도 하나님 백성과 고난 받고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받기를 즐거워 한 것은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고 (11:24-26), 이름없는 믿음의 여인들이 죽음을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은 것도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11:35). 결국 주를 위해 희생한 것만 남아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받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주의 고난에 동참하므로 영원히 남아있는 것을 얻으려는 욕망을 가져야합니다. 로마서8:17-18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했고, 베드로전서4:13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세상 모든 좋은 것들을 버렸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지적 앎이 아니라 인격적 앎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의 부활의 권능에 동참하고 부활 때에 영광스런 부활에 참여하려 한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께 관심을 끄는 자가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4. 바울의 달음박질 (12-16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바울이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8-9).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부활의 권능에 동참하고 부활 때에 영광된 자로 나타나기를 원했습니다 (10-11). 바울은 그것을 이미 얻었거나 온전히 이루었다고 자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을 붙잡으려고 좇아가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회심한 이후 인생 전체를 두고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성화를 부단히 이루어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치 고대 올림픽에서 달리기하는 선수가 승리한 후에 받을 상을 생각하고 뒤를 보지 않고 오직 앞에 있는 결승 푯대만 바라보고 달리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12-14). 그리고 누구든지 온전히 이룬 자, 곧 앞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그와 같은 신앙의 달음박질을 해야 한다고 했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시리라고 했습니다 (15-16).

 

   ①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한다고 했습니다 (13).

 

  13절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육체적으로 신뢰했던 것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자랑하던 것들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인이요 베냐민지파요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이요 가말리엘문하에서 수학한 자요 교회를 핍박하던 자요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3-9). 당시 유대인에게 있었던 관념으로 보면 참으로 자랑할 만한 혈통과 지위와 명예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그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1,923년 시카고의 에지와트 비치 호텔에 당시 미국 최대 부호였던 9명이 자리를 같이했을 때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들이 ‘20세기의 신화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때는 황금만능 시기였습니다. 그들은 돈만 번 것이 아니라 큰 회사의 사장들이었기 때문에 교육도 많이 받았고 명성도 있는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볼 때 스타이고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25년 후인 1,948년에 그들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한 사람은 미치고 세 사람은 파산해서 빚에 쫓겨 도피생활을 하다 죽었고 두 사람은 출옥해서 자살 직전 있었고 세 사람은 자살했습니다. 한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세상 것들에는 참 만족이 없고 그것이 없어지는 날에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함이 것들에 소망을 두지 말고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합니다 (딤전6:7).

 

  우리가 신앙생활 하기 전 생활을 동경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애굽에서 나온 후 과거를 동경하다가 징계를 받았습니다. 누가복음9:62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때론 주님 따라가는 일이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땐 과거에 믿기 전 상태로 되돌아가고 싶어집니다. 현재 일이 되지 않을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후서3:13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6:9에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②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한다고 했습니다 (12).

 

  12절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라는 말은 이미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알았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예수님을 아직 예수님을 온전히 닮아가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만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이미 다메섹 도상의 회심 사건 이후 예수님께 붙잡혔는데 이제 자신이 계속해서 예수님을 붙잡으려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울을 붙잡아 구원하셨는데 바울이 이제 그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 부단히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닮아가야 합니다. 중생(重生)을 했으면 이제 성화(聖化)를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이미 얻은 구원을 이루어가가야 합니다. 2:12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나야합니다. 에베소서4: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했습니다.

 

   ③하나님이 주실 상을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14).

 

  14절에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당시 달리기 경주를 비유삼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대 올림픽에서 달리기하는 경주자는 앞에 있는 푯대를 똑바로 보고 경주를 하는데 결승선을 통과하여 승리를 하게 되면 상을 얻게 되었습니다. 심판관이 높은 단 위에서 승리자를 부르면 승리자는 높은 단으로 올라가 상을 받았습니다. 경주자가 달리기를 하는 것은 모두 그 상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인생의 경주에서 레이스를 따라 앞에 있는 결승선만 향해 달려가는데 승리자에게 주어질 상을 바라보고 믿음의 달리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기준으로 달음박질을 하되 마지막에 하나님이 주실 상을 바라면서 달음박질을 한다는 것입니다 (12:1-2).


  바울은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을 받은 다음 예수님을 닮아가면 하나님이 상을 주실 줄 믿었습니다. 디모데후서4:7-8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바울이 노년에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목회에 대해 권면하면서 한 말입니다. 내용의 핵심을 보면 바울이 평생의 목표가 하나님 나라에서 상을 얻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전에 자랑하던 모든 것들을 버리고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실 상을 바라보기 때문인 것입니다.

 

  모세도 그러했습니다. 히브리서11:24-26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습니다.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 심지어 이름없는 여인들까지도 그러했습니다. 히브리서11:35-38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15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고 했습니다. ‘온전히 이룬 자들은 성화에 있어서 완전해진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을 향해 부단히 정진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곧 자기의 불완전성을 인식하고 완전을 향해 부단히 노력하기를 추구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런 가운데 있는 자들이 바울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지기를 바라고 혹시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이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분명히 가르쳐주실 것을 바란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에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성화에서 신앙수준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든지 지금까지 해온 바른 방식대로 계속 정진해 나가야 할 것을 말한 것입니다

 


       5.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계 (17-21절)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바른 신앙을 교란하는 자들을 유대의 교사들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율법의 관습과 전통을 강조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바른 복음진리를 혼돈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바로잡을 필요성을 느끼고 그들을 멀리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고 하늘에 속한 바울 자신과 바울 자신의 동역들을 따르라고 권면했습니다.

 

   ①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17).

 

  17절에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고전11:1). 바울이 자기를 본받으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것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를 위해 헌신하려는 생애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얻고 발견되기 위해 세상의 자랑하던 이전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의 삶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었고 그 안에서 주어질 하나님의 상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범사에 양심을 따라 행하는 자였습니다 (23:1). 오늘날 자기 양 떼를 향해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양심적으로 자신의 신앙, 자신의 윤리적 삶을 모방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참된 목자일 것입니다.

 

  17절 하반절에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울 자신을 비롯하여 동역자인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암시합니다 (2:25,29).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뿐 아니라 신실한 동역자들을 본받는 자들이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는 말은 주변에서 바울 자신과 바울 자신의 동역자들을 앞서 본받는 자들을 눈여겨보라는 것입니다. 가까이서 신앙의 본을 보여주고 있는 자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그들을 본받아 살라는 것입니다.

 

   ②십자가의 원수들을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18-19).

 

  18절에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의 모범과 반대로 살아가는 자들에 대한 개탄입니다. 그들은 3:2부터 바울이 유대인들을 대적자들로 염두에 두었음을 생각할 때 본절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는 유대인들을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로마서9:1-5에서 유대인의 불신앙에 대해 표현하는 슬픔과 일치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동족인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먼저 구원을 얻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므로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을 생각할 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택한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므로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 진리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인 것을 부정하고 예수님의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진리를 부정하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하고,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들을 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침은 멸망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9). 19절에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는 자에게 가해질 영원한 형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17:8,11).

 

  19절에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윤리적 가치관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들의 신()은 배라는 말은 음식에 관한 정결법을 한 말일 것입니다. 그들은 음식에 관해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지정해놓고 그것을 지키므로 거룩해진다고 믿었습니다. 즉 뱃속에 무엇이 들어가는가 하는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므로 그 문제가 우상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는 할례를 두고 한 말입니다 (3:2). 부끄러움의 헬라어 아이스퀴네(αισχυνη)는 사람의 벌거벗음이나 사람의 은밀한 곳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들의 할례는 남자 아이의 8일 만에 성기의 표피 끝을 돌칼로 베는 의식이었습니다. 당시 헬라인들은 운동경기를 할 때 옷을 벗고 했고, 로마문화 자체가 목욕문화였고, 노동하는 종들은 거의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남성들의 할례한 모습은 놀림거리가 되었고 정욕적인 사람들로 멸시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헬라문화에 동화된 자들은 수술하여 할례자국을 없애려하기도 했습니다. 할례문제 때문에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과 논쟁을 통해 이방인이 그리스도교에 들어올 때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으려고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동의를 얻어냈습니다 (15:1-21).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부끄러운 것을 자랑삼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언약민의 표이며 구원받은 표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는 말은 뒤에 나오는 20절의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는 말의 반대 개념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만 마음을 두고 이 세상 일만 몰두하고 이 세상 삶만을 위해 사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딤후3:1-5). 내세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③하늘에 있는 시민권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20-21).

 

  20절에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시()는 마게도냐에 속한 지역입니다.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입니다. B.C.356년 마게도냐(마케도니아)왕 빌립2(Philip,BC359-336)가 이웃하고 있는 야만인들의 나라 드라케에서 나라를 빼앗아 새 도시를 건설하면서 그곳 이름을 자기 이름을 본따 빌립보라고 칭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는 B.C.168년에 로마에 의해 정령당해 로마에 편입되었습니다. B.C.42년 로마에 내전이 일어났는데 옥타비아누스(Octavianus)가 승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전쟁을 종식하고 황제가 되어 빌립보에 안토니우스의 해산된 군대와 퇴역한 자기 군대를 정착시켰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시민은 이탈리아 본토 로마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빌립보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이 주어지고 로마 시민으로서 모든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했습니다. 곧 빌립보는 로마에서 떨어져 야만세계에 있으면서도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그림에 하늘나라와 기독교인들의 관계를 대입시킨 것입니다. 빌립보시가 로마에서 떨어져 야만세계에 있으면서도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의 권위와 혜택을 누리며 로마의 일부인 것에 자부를 갖고 사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지만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하늘을 목적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이고 정욕적이고 세속적이고 마귀적인 세상 문화와 문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 나라의 법과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에 합당한 삶을 살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20절 하반절에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시민권이 있다는 생각을 가진 자는 예수 그리스도 오실 것을 기다려야한다는 것입니다.

 

  21절에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복종케 하실 분으로서 (고전15:27-28), 재림 때에 만물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우리의 약한 몸도 영광의 몸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4:16-17"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15:42-44에는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면서도 하늘에 시민권이 있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자는 당연히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위해 피나는 싸움을 합니다. 그 싸움을 해 본 사람은 피곤합니다. 우리 힘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 속에 도저히 뿌리뽑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셔서 만물을 굴복시키고 우리 몸을 굴복시킬 때를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을 고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7:15-25).

 

<結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배로 신()을 삼고 부끄러운 것을 영광삼고 땅의 일만 생각하며 삽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은 자들의 인생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원수되는 삶입니다. 저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를 닮아가려합니다. 그래서 그의 영광에 참여하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