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빌립보서4:1-23
<題目> 빌립보교회에 주는 권면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미혹하는 유대주의자들에 대해 격분하여 강한 어조로 비판했습니다. 십자가에 원수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배로 신을 삼고 부끄러움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들이라고 공격했습니다. 이제 그런 격분을 가라앉히고 빌립보교인들을 권면합니다. 앞선 장에서 빌립보 교인들은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자라고 했는데 1절에서 "그러므로'라고 하는 접속사가 연결해 주듯이 그 위치에 합당한 공동체 생활을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평강을 위한 권면(1-9절), 후원금에 대한 감사(10-20절), 마지막 문안 인사(21-23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1. 평강을 위한 권면 (1-9절)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①주 안에 굳게 서라고 했습니다 (1-3절).
첫째,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을 사랑의 언어로 권면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고 했습니다 (1절). 모든 표현들이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 대해 가지는 애정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자신의 기쁨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면류관으로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자신의 면류관으로 생각했습니다. 고린도전서9:14-18에 바울은 자신이 주께서 주신 권리 곧 사례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하면서 그러나 자신은 죽을지라도 그 권리를 다 쓰지 않으려고 결심했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자랑할 것이 없음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고 했습니다. 자기 상은 부여받은 사명을 감당하는 것 자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효과있게 하려고 물질에 대한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는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해 투자하고 수고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 자체를 감사해야합니다. 복음을 위해 직분을 받고 쓰임 받고 헌신할 수 있는 것 자체를 감사해야합니다.
둘째,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권면했습니다.
2절에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유오디아(Euodias)와 순두게(Syntyche)에게 이름을 따로 따로 부르며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니아 지역의 빌립보에서 복음을 처음 전할 때 자주 장사 루디아가 교회를 세우는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행16:11-15). 그러나 빌립보서에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아 아마 그가 빌립보서를 쓸 당시에는 빌립보에 있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천막제조업을 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로마와 고린도와 에베소 등지로 돌아다녔던 것처럼 루디아도 물감 사업이 번창했던 고향 두아디라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행16:14).
유럽의 관문인 마게도니아 지역에 빌립보교회 외에 데살로니가교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서도 상류층에 속하는 상당수의 여자들이 바울의 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행17:4). 아가야 지방의 고린도교회에서도 상당수의 여자들이 리더쉽을 발휘했습니다 (고전1:11, 11:2-16, 롬16:1). 그들은 공예배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도도 하고 설교(예언)도 했습니다. 바울의 선교사역에 여자들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리더쉽을 발휘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도 빌립보교회에 리더 역할을 하는 여자들이었고 바울이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라고 한 것을 보면(3절), 그들이 여성이 하는 허드렛일만 한 것이 아니고 교회 성장에 앞장섰던 것 같습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유교적 통념의 영향으로 교회에서 여성을 폄하하고 배제해 왔습니다. 대부분 창세기 2-3장과 고린도전서 14장과 에베소서 5장과 베드로전서 3장 등을 근거로 ‘여자를 남자에게 종속된 자이다’ ‘여자를 죄를 세상에 가져온 자이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구약성경을 보면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된 것처럼 표현된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분들은 당시 유대사회를 반영한 언약적 관점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여성의 위치를 남성과 동일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여성 가운데서 선지자나 사사가 있었습니다. 미리암, 드보라 등이 그런 경우입니다. 또 가장의 역할을 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라합, 아비가일, 나오미 등입니다. 신약에서 브리스길라 같은 여인은 신앙적으로 가장 역할을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경이 여성을 죄의 원인자로 말하거나 남성에게 종속된 위치에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었다고 한 것은 창조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지 아담과 하와의 주종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먼저 먹은 자가 하와라고 한 것은 상황 설명이지 결코 하와가 모든 인류를 죽음으로 몰고 온 범죄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한 것은 당시 로마시대의 고린도교회 상황을 들어 책망하는 내용이지 교회사역에서 남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한 것은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인용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의도이지 아내가 남편에게 종속 관계에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베드로서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삶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기 보다는 아내가 믿지 않는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해야 할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성도 교회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합니다. 물론 여성은 여성이 갖고 있는 특질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성이 하는 일의 스케일이 남성들이 하는 일에 비해 작다고 해서 무시되거나 여성 스스로 뒤로 나아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본문상황으로 다시 돌아와서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지도급 위치에서 교회성장에 지대한 역할을 했지만 바울이 편지를 쓸 당시에는 두 사람이 상당히 의견 충돌이 있었고 그 대립 상태로 인하여 교회 전체가 분열현상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가지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의견 충돌은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목적이 다른 경우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방법이 다른 경우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바울이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라고 한 것은 보면 (3절) 목적이 다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분열한 것은 아무래도 방법 따른 문제일 것입니다. 목적이 같다 해도 방법이 다르므로 분열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 교회사역에서 분리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해결방안은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뿐입니다. 같은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남아짐과 섬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낮아지고 희생하는 겸손의 마음입니다 (빌2:5-8). 오늘날 교회사역에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덕목이 낮아짐과 섬김의 정신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본받는 정신입니다.
셋째, 멍에를 같이 한 동역자들을 도우라고 했습니다.
3절에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여성 지도자 유오디오와 순두게의 화합을 권면한 다음에 ‘멍에를 같이한 자’에게 그들의 화합을 돕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멍에를 같이한 자’(γνησιε συζυγε)는 누구를 가리키는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여러 견해를 부류별로 나누어 보면, 첫 번째 부류는 바울의 동역자들인 디모데, 누가, 실라, 에바브로디도 등일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빌립보교회 감독(목회자)이나 그에 준한 사역자라일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세 번째는 루디아나 유오디오와 순두게의 남편 등 두 여인의 화합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평신도일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세 견해 중 첫 번째 견해는 가능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권면하고 있는 편지의 수신 대상이 빌립보교회이기 때문에 바울이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도우라고 부탁하는 대상도 빌립보교회에 있는 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 않은 것은 당시 수신자들은 누구를 말하는지 능히 알만한 인물이었을 것이데 그렇게 본다면 빌립보교회에 있는 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두 번째와 세 번째 견해는 모두 가능성이 있지만 3절 하반절에 나오는 바울의 동역자들을 언급하며 부탁하는 것을 보아 두 번째 부류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평신도이지만 빌립보교회에 영향력있는 여성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잘못하여 불화하여 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지만 그들이 바울과 함께 복음과 교회를 세워 나가는 일에 헌신한 했던 것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한 사람 곧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라고 한 그 사람에게 그들의 화합을 돕도록 부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세울 때에 헌신했던 사람들이 잘못을 했으나 그들을 정죄만 하지 않고 그들을 세우기 위해 힘을 쏟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일에 수고한 자들이 한번 실수 했다고 해서 아주 부정하는 것은 옳은 정신이 아닙니다. 기독교인 갖추어야할 인격적 덕목 중의 하나는 신의입니다.
한편 바울은 3절 하반절에서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글레멘드와 동역자들이 생명책에 기록되어있다고 했습니다. ‘글레멘드’(Clement)는 로마시대에 흔한 이름인데 여기에서는 누구를 가리키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생명책’은 구원받아 영생을 얻게 될 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책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생명책과 기념책과 행위책과 구원계획서가 있습니다. ‘생명책’은 구원받은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고 (계20:12上,15), ‘기념책’은 구원받은 사람의 기념될 만한 선행을 기록된 책이고 (말3:16), ‘행위의 책’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이름과 행위가 기록된 책이고 (계20:12下), ‘구원 계획서’란 하나님께서 계획한 구원 계획이 기록된 책입니다 (5:1). 요한계시록3:5에서 사데교회에 대해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름’은 인격의 상징입니다.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흐리지 않겠다는 것은 주께서 그가 얻은 구원을 더욱 확고히 하겠다는 것입니다 (출32:32-33). 확증을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21:27). 그리고 그의 인격을 인정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돕는 일은 하나님 앞에 영원히 인정받을 일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희생한 것은 반드시 남아있습니다 (마10:41-42, 막10:29-30). 사도 바울도 그 상을 바라보았습니다 (딤후4:7-8).
②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4-5절).
첫째,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4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기뻐하라'는 말은 18번이나 사용했습니다. '기뻐하라'(χαιρετε)는 현재 능동태 명령형으로서 당시 상황이 어떠하든지 능동적으로 기뻐하라는 명령입니다. 당시 빌립보교회가 처한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도무지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영적 지도자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언제 사형을 받을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밖으로 유대주의자들의 공격이 있었고, 안으로는 여성 리더들의 불화가 있어서 교회가 긴장과 대결과 정죄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 바울은 그들을 향해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고난을 주는 주체인 사탄의 권세를 꺾고 승리하셨기 때문에 주께서 빌립보교회를 통해 이루어질 복음사역도 반드시 승리하게 하실 것을 바라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바울도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기뻐했습니다. 로마 감옥에 갇혀 재판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1:14, 17. 20-23).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 결과가 혹시 사형이라 해도 주 안에서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2:17에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라고 했습니다. 바울 자신이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뻐하면서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든지 기뻐하라고 한 것입니다 (2:17-18).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기쁨으로 찬미하므로 기적으로 감옥에서 나온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행16:19-25), 바울의 권면이 의미있게 들렸을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볼 땐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권을 가지신 주님을 신뢰하므로 기뻐하는 것이 믿음의 진수인 것입니다.
둘째,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했습니다.
5절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고라도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1차적으로 교회 내에서 대립하고 불화하고 미워한 대상들을 말하고, 2차적으로 교회를 공격하고 핍박한 무리를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의 반영입니다. 그것은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느니라’에서 ‘가까우시니라’에 해당하는 ‘엥귀스’(εγγυς)는 시간적으로 ‘가까운’과 공간적으로 ‘가까이’의 의미가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볼 때는 주께서 재림하실 날이 멀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재림하시면 원수는 멸하게 되고 교회는 승리하게 되고 성도는 위로를 받게 되겠기 때문에 기뻐하고 관용하라는 것입니다. 공간적으로 볼 때는 주께서 임재하여 동행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멀리 하늘에서 우리 상황을 관망만 하며 계시지 않고 친히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돕고 계시기 때문에 기뻐하고 관용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는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롬8:26,28,30 참조).
③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아뢰라고 했습니다 (6-7절).
첫째,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6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 근심하거나 걱정하거나 초조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염려합니다. 그 염려로 육체와 마음과 영혼이 고통을 당합니다 (잠15:13, 17:22). 인간은 한계성을 가진 유한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항상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도 자신의 재판결과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빌립보교회의 미래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도 빌립보교회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둘째,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아뢰라고 했습니다.
6절 중반절에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라고 했습니다. 당면한 문제에 대해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로 아뢰라는 것입니다. 염려할 만한 상황에서 염려하지 않으려면 기도를 해야 합니다. 리챠드 레이니(Richard Rainy)는 “아무 것에도 염려하지 않으려면 모든 것에 대해서 항상 기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기도’(προσευχη)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모든 행동을 포함하는 보편적인 기도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간구’(δεησει)는 구체적으로 필요한 것을 구하는 기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염려할만한 상황이 일어날 때 염려만 하지 말고 기도해야합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자각하고 해결점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구체적으로 필요(need)를 구해야합니다 (겔36:37, 눅11:8).
셋째,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했습니다 (6절).
6절 하반절에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감사함’(ευχαριστιας)은 기도하는 마음 자세를 말합니다. 기도할 때 갖추어야할 기본자세는 감사함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을 믿음으로 구하면 들어주신다고 했습니다 (마7:7-11). 그러므로 하나님께 간구한 내용을 들어주실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면서 기도해야합니다. 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시든 결국 가장 선한 결과를 이루어 주실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로마서8:28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였고, 30절에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들까지 내어주신 이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이루실 것을 믿어야합니다. 32절에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우리의 지각으로는 이해가 안 되어도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으로 가장 좋은 것을 일궈 내주실 것을 믿어야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도 찬미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16:22-25). 말씀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경험을 생각해 보면 더욱 확실함을 느끼게 됩니다. 과거에 염려되었던 상황과 하나님이 어떻게 상황을 극복하게 해 주셨는지 생각해보면 현재의 염려되는 상황도 하나님이 선하게 해결해 주시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미래에도 염려되는 상황들이 많이 발생하겠지만 하나님이 선하게 인도해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넷째,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고 했습니다.
7절에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지각’(νους)은 이해하여 깨닫는 지성적 능력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놀라움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평강’(ειρηνη)은 기도의 결과로 오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안전과 평안을 말합니다.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마음과 생각이 염려되고 조급하게 되고 떨게 됩니다. 마치 적군이 성을 포위했을 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자에게는 사람들의 이성적 판단을 뛰어 넘는 방법으로 마음의 성을 지켜주십니다 (요14:27, 엡3:18-20).
④무엇에든지 고상한 덕목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8-9절).
8절에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그와 같은 점이 있으면 항상 그것들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도덕적 혹은 영적으로 탁월한 사고를 가져할 것에 대해 권면한 것입니다. ‘기림’(επαινος)은 칭송이나 찬양을 가리킵니다. 그런 고상한 덕목에 대해서는 바울이 이미 가르쳤고 행동모범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9절에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보았습니다. ‘받고’(παρελαβετε)는 받아들여 취한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1장에 보면 자신이 감옥에 갇히게 된 데 대해 억울하기도 하고 괴롭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적들에 대한 분노와 원한에 대한 생각을 끊고 자신의 투옥이 복음의 진보를 가져온 것을 생각했습니다. 대적들의 불의한 동기에 집중하지 않고 긍정적인 결과에 집중했습니다. 바울은 그로 인하여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유익하다는 관점을 가지고 평안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핍박과 내분으로 얽힌 빌립보교회가 바울의 그런 점을 본받기를 원한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핍박과 내분으로 인하여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살게 되면 내적 평강을 얻을 수 없고 공동체의 삶에서도 평강을 도모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한대로 행동합니다 (잠23:7). 어떤 사고를 가지느냐에 따라 삶의 형태가 결정됩니다. 돈만 생각한 사람은 수전노(守錢奴)가 됩니다. 쾌락만 생각하는 사람은 성적 노예가 됩니다. 적대자에 대한 분노로 가득찬 자는 공격적이어지고 호전적인 사람이 됩니다. 반면 고상한 가치를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고상한 인격이 이루어지고 고상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그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판단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록 옳은 사람이라도 그른 사람에 대해 분노하면 평안이 없고 결국 전체의 평안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잘했는데 후에 분노하고 비판하는 일에 얽매이다가 잘못한 사람 이상으로 비참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고상한 가치들에 집중해야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3:2에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육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영의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지 말고 선한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부정적인 것을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인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절망적인 것을 생각하지 말고 소망적인 적을 생각해야합니다.
바울은 핍박과 내분 가운데 있는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평안을 얻게 하기 위해 ‘주 안에 굳게 서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아뢰라’ ‘무엇에든지 고상한 덕목을 생각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우리가 내적 평안과 공동체의 평안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하겠는지 돌아보아야합니다.
2. 후원금에 대한 감사 (10-20절)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마지막 권면을 마친 후 빌립보교인들이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후원금을 보내준 것을 감사의 표시를 나타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후원금을 보내 준 것에 대해 감사 표시를 하게 될 경우 오해를 할 소지가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물질에 욕심을 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변호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바울이 가지고 있는 재정관을 나타내 보여줍니다.
①빌립보교인들이 후원금 보낸 것 때문에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10절).
10절에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생각하던 것이 마침내 싹이 났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다시 싹이 남이니’에 대항하는 기본형 ‘아나달로’(αναθαλλω)는 ‘소생하다’ ‘번영하다’의 뜻으로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마음으로만 생각하던 것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을 의미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기회가 되지 않아서 바울을 도울 수 없었습니다. 빌립보교인들은 처음부터 바울을 도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2년간 가이사랴 감금되어 있고 난파 사건도 겪는 동안 그를 돕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된 후 에바브로디도 편에 후원금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후원금을 가지고 오자 그들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어 위로가 되었을 것이고 그리던 빌립보교회 소식을 들을 수 있어서 기뻤을 것입니다. 후원금을 받고 빌립보교인들이 선한 마음을 가진 것과 그것을 실행에 옮기게 된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믿음의 분량이 자라난 것을 기뻐한 것입니다.
특히 데살로니가교회에서는 바울이 돈에 대한 탐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다는 비방이 있었고 (살전2:5), 고린도교회에서는 바울이 예루살렘교회를 빌미로 돈을 얻어낼 목적으로 자신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도록 디도를 이용했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었는데 (고후12:16-18), 빌립보교회 만큼은 바울을 신뢰하고 이해했다는 점에서 기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역자에게 가장 큰 기쁨은 교인들이 신뢰하고 후원해 줄 때 생기는 것입니다.
②바울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했다고 했습니다 (11-12절).
바울은 세 차례에 걸쳐 선교여행을 했습니다. 1차에는 아시아 지역 곧 시리아, 구브로, 밤빌리아, 갈라디아 지방을 (안디옥, 구브로, 비시디아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등), 2차에는 유럽 지역 곧 마게도냐, 아가야 지방을 (빌립보, 데살로니가, 뵈뢰아, 아덴, 고린도 등) 다니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3차에는 1-2차에서 세운 교회들을 돌아보며 믿음을 굳게 했습니다. 3차를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가 성전에서 유대인들의 난동으로 로마 군대에 체포되어 가이사랴에 구금되었다가 로마로 호송되어 로마 감옥에 구금되었습니다. 그때는 동역자들도 다 떠난 후였고 몸은 병 들었고 생활비는 다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석방될지 사형될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2차 선교여행 때 세운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바울의 투옥 사실을 알고 안타까워하면서 기도를 했고 바울을 돕기 위해 간호할 에바브로디도를 보냈고 그의 편에 생활비도 보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믿음의 진보를 보인 것에 대해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그들을 위로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감사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이 혹시 오해하여 바울 자신이 후원비를 받은 것 자체가 좋아서 감사를 표시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할까봐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11절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궁핍한 가운데 있었으나 빌립보 교인들이 후원비(선교비, 생활비)를 보내주어서 그것 자체가 좋아서 감사표시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궁핍한 가운데서도 자족했다고 했습니다. ‘자족’(自足)에 해당하는 ‘아우타르케스’(αυταρκης)는 ‘자기’ ‘스스로’의 뜻을 가진 ‘아우토스’(αυτος)와 ‘넉넉하다’ ‘충분하다’의 뜻을 가진 ‘아르케오’(αρκεω)의 합성어로서, 자기 스스로 충분히 만족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고 자신의 내면의 자원으로 만족해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자족하는 신앙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12절에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습니다.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았다는 것입니다. 곧 배부를 때나 배고플 때나 혹은 풍부할 때나 궁핍할 때나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일체의 비결’은 헬라어 성경에 ‘파신’(πασιν)으로만 나와 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기본형 ‘파스’(πας)는 ‘어떤’ ‘모든’ ‘전체’ 등의 뜻입니다. ‘비결’이라는 말은 없고 그냥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 모든 것이라고만 한 것입니다. 풍부할 때이든지 궁핍할 때이든지 모든 상황을 말합니다. 바울은 풍부나 궁핍의 상황이 때문에 자신의 내적 상태가 영향을 받지 않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풍부하여 배부를 때는 자만하거나 방종하거나 방탕하거나 타락하기 쉽고, 궁핍하여 배고플 때는 염려하거나 걱정하거나 낙심하거나 원망하거나 분노하거나 비굴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잠언30:8-9에서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부요할 때나 가난할 때나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내적 평안을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동역자들은 떠나고 몸은 병들고 생활비는 떨어지고 재판결과는 알 수 없고 자신이 하던 복음전도 사역은 중단될 위기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려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내적 평안을 유지한 것입니다.
바울이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었던 것은 인생을 사는 목적이 사명 감당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인생에서 사는 목적이 부요하거나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맡긴 복음전도 사명을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사는 목적은 자신을 통해 예수님이 나타나고 예수님이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이 자신에게 맡긴 복음전도 사역이 잘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1:21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는 목적이 그리스도니 심지어는 죽는 것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하는 것이라는 죽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2:17에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고 했습니다. ‘전제’는 구약시대에 포도주 같은 것으로 부어드리는 제사입니다. 자신을 전제로 드린다는 것은 자신이 죽어 순교의 제물이 되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만 잘된다면 자신은 죽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목적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3차 여행 중 소아시아 지역 에베소에서 자기의 선교계획을 밝혔습니다. 사도행전19:21에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유럽 지역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가서 구제헌금을 모금하여 기근으로 고난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해주려는 계획을 가졌습니다. 그 다음에 로마에까지 가려했습니다. 그것은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므로 복음이 전 세계에 퍼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갔다가 로마 군대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로마 군대의 천부장에게 로마 시민권이 있는 것을 알려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을 권리를 주장했고, 그 때문에 천부장은 그를 가이사랴에 있던 로마 총독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베스도 총독에게 심문을 받으면서 재판을 로마 황제에게 받게 해달라는 호소했습니다. 로마 총독은 배와 선원과 식량과 병사를 준비하여 로마로 호송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 시위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행21-27장).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감옥에 갇히므로 복음전파에 진전이 일어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12-18에 보면 로마의 시위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재판과정에서 재판을 집도하는 황제와 참관하는 고관들과 9,000여명의 군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자신이 무슨 일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고소를 당했는지 변호를 하므로 그들이 복음이 전해지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에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것을 보고 바울이 진짜 하나님이 보낸 복음 전도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들도 순교정신으로 더욱 담대히 열심을 내어 복음을 전하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로마에 있는 복음전도 사역자들이 바울을 사역의 경쟁자로 여겨 시기하고 있던 차에 바울이 감옥에 갇혀 더 이상 사역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을 보고 바울을 앞서기 위해 더욱 열심히 복음전도 사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1:18에 보면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로마 시위대 감옥에 갇힌 일로 인해 복음전도가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기뻐한 것입니다.
요셉에게서도 그런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어렸을 때 형들에게 팔여 애굽 보디발 집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보디발 아내의 무고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미워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을 통해 하나님이 비밀한 뜻을 이루기 위한 섭리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창세기45:7-8에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고 한 고백에서 잘 나타납니다. 실제로 감옥에서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을 만나게 되어 왕께 천거되는 길이 열리고 왕의 꿈을 해석해 주므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흉년 때에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 고센 땅에서 살게 하고 팔레스틴 주변국들을 흉년의 위기에서 건졌습니다. 무엇보다는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민족을 이룰 만큼 창성하여 가나안 당에 들어가 제사장 나라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길에서 여러 가지 예측하지 못했던 고난의 상황을 만납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신앙을 가져야합니다 (딤전6:6). 바른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어야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불행한 환경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비밀에 속한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해 허락하신 것임을 믿어야합니다. 마침내 선한 목적을 이루실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로마서8:28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했고 예수님이 구속했고 성령님이 섭리해주시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선한 뜻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환경에 굴복당하지 말고 내적 평안과 담대함으로 환경을 관리해야 합니다.
미국에 ‘웨렌 위어스비’(Warren W. Wiersbe)라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2,019년 2월에 89세 나이로 별세한 분입니다. 그는 탁월한 신학자이면서 설교가였습니다. 기독교서적 150여권을 저술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온도조절기가 되어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온도계가 되지 말고 온도조절기가 되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온도계는 날씨가 추우면 온도가 내려가고 날씨가 더우면 올라갑니다. 환경에 따라 변합니다. 온도조절기는 날씨가 추우면 온도를 올리고 날씨가 더우면 온도를 내립니다. 환경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황과 환경에 지배를 당하는 자가 되지 말고 상황과 환경을 지배하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③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13절).
바울은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에 대한 결론적 선언을 했습니다.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유난히 우리 한국 교인들이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집 안에도 사업장에도 걸어 놓는 성구입니다. 아마 노르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의 ‘긍정적 사고’의 표현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쉬운 말로 하면 ‘하면 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정주영 전 회장 철학의 기독교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무엇이든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본문의 의도는 문맥 전후로 보아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의도는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자족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처한 환경에 지배받지 않고 내면의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막9:23과 비교).
바울은 모든 것 곧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능력주시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딤전1;12‘ 딤후4:17). 주님에 대한 신뢰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오는 힘으로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내적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환상을 보고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담당하여 죽으신 구원자인 것을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자신을 사도로 불러 복음전도자로 세우셔서 복음을 전할 사명을 주신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해주시고 복음전도 사명을 주셨으니 자신이 사명을 감당할 때 함께 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 의식이 힘을 얻게 했고 능력있게 한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평안을 유지하는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이 안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힘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자족'(αυταρκης)은 헬라 세계의 스토아 철학의 모토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의지의 힘으로 어떤 환경도 감당하고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즉 자기의 의지적 힘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내면은 외부의 환경과 사람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한 자족도 그와 비슷하지만 그 근거가 다릅니다. 자족할 수 있는 근거를 그들은 자신에 두었지만 바울은 예수님께 두었습니다. 결국 자기 의지에 근거를 두는 사람은 포기할 수밖에 없으나 예수님께 근거를 두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은 힘이 부족하여 자주 실패함을 경험지만 예수님은 무한히 가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클레런스 대로우(Clarence S. Darrow, 1857~1938년)라는 법률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무신론자이며 무정부주의자였습니다. 1,930년대 미국에 대공황이 시작되자 자신의 무신론을 선전할 기회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강연을 다니며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이 어려운 사정을 주시겠습니까? 우리는 다 잃어 버렸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신은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라고 무신론을 주장했습니다. 하루는 흑인들을 모아놓고 강연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꿈 재산 노래까지 잃어 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노래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 소리쳤습니다. 갑자기 뒤에서 한 할머니가 손을 번쩍 들더니 "박사님 저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지경에서 노래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주님 때문에 노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노래할 수 있습니다" 주위에서 "맞습니다" "할렐루야 맞습니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한순간 장내 분위기는 바뀌었습니다. 이런 반응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미국 역사 속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에도 좌절하지 않고 소망 중에 노래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환상을 보고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담당하여 죽으신 구원자인 것을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자신을 사도로 불러 복음전도자로 세우셔서 복음을 전할 사명을 주신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해주시고 복음전도 사명을 주셨으니 자신이 사명을 감당할 때 함께 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 의식이 힘을 얻게 했고 능력있게 한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평안을 유지하는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 안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했고 사명을 주었고 함께 해주시고 간구해주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힘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힘들어 견딜 수 없을 때 사는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로마서14:8에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생명을 바쳐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해주십니다. 로마서8:34에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성령님으로 영원히 함께 해주십니다. 요한복음14:16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어떤 환경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내적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6:9-10에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④빌립보 교인들의 후원이 괴로움에 함께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14-16절).
14절에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고 했습니다. ‘괴로움’에 해당하는 기본형 ‘들립시스’(θλιψις)는 압박, 고뇌, 고통 등을 의미합니다. 이 괴로움은 감옥에 갇혀 몸이 병들고 생활비가 없으므로 인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그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빌립보 교인들이 에바브로디도를 보내어 간호하게 해주었고 그의 편에 후원비를 보내어 생활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에게 필요가 채워지게 했을 뿐 아니라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의 고통에 함께 참여해준다는 생각이 들게 한 것입니다.
15-16절에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들이 과거에 도움을 주었던 사실을 들어 그들에게 감사를 표현하였습니다. '시초'는 바울이 빌립보에서 처음 복음전도 사역을 시작할 때를 발합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개척할 당시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마게도냐를 떠날 때'는 마게도냐에 속한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와 베레아 등이 속해 있는 곳을 말합니다. 바울이 마게도냐를 떠나 고린도가 있는 아가야 지방으로 갔는데 그 때도 도와준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 한두 번 도움을 주었던 사실을 들어 그들이 베풀어 준 호의에 감사한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세울 때에 교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다. 또한 데살로니가로 갔을 때에도 그들로부터 한두 번 도움을 받았고 데살로니가를 떠난 다음에도 도움을 받았고 지금 로마 감옥에서도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렇게 시종일관 도와주므로 선교적 고난에 동참해준 것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아시아로 선교 방향을 잡았으나 성령님의 지시를 따라 유럽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유럽으로 가는 첫 관문 역할을 하는 마게도냐(Macedonia)의 첫 성읍에서 빌립보교회를 개척하여 세웠습니다. 그 다음에 같은 마게도냐의 수도 데살로니가(Thessalonica)에서 데살로니가교회를 세웠습니다. 그곳에서 약 3개월 정도 있다가 아가야 지방의 수도 고린도(Korinthos)에서 고린도교회를 세웠습니다. 그곳에서는 1년 6개월 동안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로마 감옥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와 고린도에서는 스스로 천막 만드는 일을 해서 생활의 필요를 채웠습니다. 데살로니가와 고린도가 빌립보보다 훨씬 부요한 지방이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전2:9, 고전9:15). 특히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말을 보면 바울 자신이 군사들의 예를 보나 농부들의 예를 보나 목자들의 예를 보나 모세의 율법을 보나 성전제사 규례로 보나 예수님의 교훈을 보나 사례비를 받을 권리가 있지만 복음의 장애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고전9:7-15). 데살로니가와 고린도에는 당시 철학자들 특히 스토아 철학자들이 삶의 지혜나 삶의 방식을 가르쳐 준다고 강의를 했는데 그들은 돈을 받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바울은 자신도 복음진리를 가르치면서 물질적 도움을 받는다면 그 도시 주민들에게 자신이 그런 철학자들과 같은 사람으로 여겨지고 자신이 전하는 진리는 그들의 가르침과 동일시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전도의 장애를 없애기 위해 복음사역을 하면서 일체의 물질적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물질이 필요했고, 빌립보 지역은 그런 상황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도움을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여 그들의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이 예로 제시한 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 보내면서 어느 동네에 가든지 그곳에서 영접하는 자가 있으면 그곳에 머물면서 먹고 지내라고 했습니다 (마10:7-16, 눅10:1-12). 그런데 가르치는 대상자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죽을지언정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문자적으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상 면에서 철저히 예수님의 정신을 따른 것입니다. 결국 바울이 교인들에게 도움을 받아도 주를 위해 받은 것이고 받지 않아도 주를 위해 받지 않은 것입니다. 근본주의자들처럼 지나치게 말씀의 문자에 얽매이다가 그 말씀의 중심 사상과 배치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선교정신은 예수님의 정신, 바울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방법에 있어서는 시대와 장소적 배경을 참고해야 합니다. 교회사적으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세기 사도들이 전도를 할 때는 대부분 무식하고 가난한 행상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핍박하는 정권들에 의해 화형과 수형을 당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때를 1차 선교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4세기에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이후 중세시대까지는 선교가 없었습니다. 17세기 종교개혁 이후에 로마 카톨릭 내에서 자체 개혁운동이 일어나는데 익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예수회’(The Society of Jesuit)입니다. 그들은 선교를 다시 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과 중국 등 극동지역까지 선교를 했습니다. 그 이후에 개신교도 활발하게 선교를 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선교회가 조직되어 인도에 선교를 했고,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도 인도네시아 등에 선교를 했습니다. 이때를 2차 선교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막강한 경제와 정치와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선교를 했습니다. 이제 3차 선교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한국이 선교사 파송수와 선교비 지출 1위로서 선교대국입니다. 이제 다양화된 시대입니다. 마치 2차 선교시대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피선교 국가와 대등한 위치에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해야 합니다.
⑤빌립보 교인들의 후원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17-20절).
17절에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고난당하고 있을 때 빌립보 교인들이 에바브로디도 편에 헌금을 보내어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와 칭찬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그들에게 그런 칭찬을 한 것은 그들에게 더 많은 선물 곧 헌금을 보내 줄 것을 바라기 때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와 데살로니가교회에서 보여준 것처럼 자비량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고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운 자로서 지난번에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온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칭찬하는 것은 오직 그들을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곧 그들의 과실이 더욱 풍성하기를 원해서라고 했습니다. '유익'(λογον) '열매'(καρπον) '풍성한'(πλεοναζοντα) 등의 용어는 당시에 상업적 용어들을 염두에 둔 용어들입니다. 장사를 해서 이익금이 신용장부에 축적되는 것을 묘사한 말입니다. 곧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보낸 후원금이 더욱 풍성하게 되는 영적 투자라고 보고, 그들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바라서라는 것입니다.
18절에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에게 보낸 헌금은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로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마치 구약시대의 제사에서 제물을 받으심 같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심 직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들도 어려운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하시는 복음전도 사역을 위해 헌금을 해서 보낸 것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빌립보 교인들에게 필요를 채워 주시리라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0절에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힘들 때에도 하나님을 위해 투자를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더욱 많이 주십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할 때 힘든 가운데서 하나님께 헌신한 자를 하나님은 절대로 외면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 일천번제(一千燔祭)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무엇을 줄꼬' 물었고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자 지혜를 주셨고 부귀와 영광도 주셨습니다 (왕상3:1-15).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님 재림하실 때 족히 비교할 수 없는 보상을 해 주시겠지만 이 세상에서도 반드시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마가복음10:29-30에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마19:29).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의 수고를 결단코 잊지 않습니다 (10:42). 전도서11:1에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이 보낸 후원금에 대한 감사인사를 통해 바울의 진실한 사역관과 빌립보 교인들의 헌신적인 신앙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울과 같은 헌신적인 사역자와 빌립보 교인들과 같은 헌신적인 후원자들을 통해 확장되어 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울 같은 정신을 가진 자의 노력과 빌립보 교인들 같은 성도들의 노력에 의해 세워지고 확장되어갑니다. 한국의 개신교 선교역사는 북방루트와 남방루트가 있습니다. 그 북방루트를 통해 들어온 선교 역사를 보면 그같은 사실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John Ross)와 맥킨타이어(John McIntyre)가 있었습니다.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스코틀랜드에서 파송된 중국 선교사였습니다. 로스의 여동생과 맥킨타이어가 결혼을 한 관계로서 처남 매부 지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이 대원군 집권 이래 쇄국정책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시 조선은 외국 선교사나 외국 종교를 받아들이는 자는 사형을 시키는 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성경을 번역하여 전하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이른바 속인주의(屬人主義) 선교방식 곧 대인 선교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로스는 조선에서 나온 조선인을 접촉하려 했습니다. 당시 북경에는 만주인들과 고려인들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 곧 고려문(고려게이트)니 있었습니다. 주로 만주인들은 약품과 비단을, 고려인은 홍삼을 거래했습니다. 로스는 그곳에서 조선인을 접촉하려 했으나 조선인들은 그들과 접촉한 사실이 알려지면 내통죄를 면할 수 없었고 관념적으로 서양인을 짐승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로스가 1년을 노력했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후에 맥킨타이어가 1년을 다니다가 이응찬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평안도 의주 출신으로서 식솔이 많았고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 행상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맥킨타이어는 그에게 많은 사례비를 약속하고 한국어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이응찬은 내통죄로 잡혀 죽더라도 그 많은 돈을 한 번 벌어보기 위해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500단어 정도밖에 몰랐습니다. 후에 이응찬의 친구 서상윤이 중국에 장사를 하러 왔습니다. 서상윤이 장티프스에 걸려 한 주막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맥킨타이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의사를 데리고 가서 계속 왕진하게 했고 맥킨타이어는 15일 동안 그를 떠나지 않고 간호를 했습니다. 그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짐승에게 간호를 받는다는 것과 서양인에게 자신을 드려야 된다는 심성 때문에 갈등했습니다. 서상윤은 "어찌 그리 오랜 동안 생명 부지한 나를 위해 헌신하고 고통을 자초하느냐" "그런 긍휼 베풂이 당신이 갖고 있는 도 때문인 바 그 도에 대해서 나도 알고자 하노라" "나의 생명은 당신의 것이니 나를 가져다 요긴하다가 쓰라"고 했습니다. 서상윤은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서 보통 5,000단어 정도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서상윤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한문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데 더 큰 힘을 얻었습니다. 그 후에 김진기, 백홍기 등도 들어와 번역사역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차려진 번역팀이 2년 동안 노력한 끝에 번역성경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번역된 성경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이었습니다. 서상윤은 번역사역을 하는 동안 신앙이 생겨 세례를 받기를 희망했습니다. 로스가 그들의 위험 때문에 거절하지만 간청에 못 이겨 세례를 주었습니다. 서상윤은 번역된 성경을 한국에 들어가 전할 결심했습니다. 그는 스코트랜드성서공회와 대영성서공회로부터 권서전도인(책을 팔면서 전도하는 사람)으로 임명을 받고 조선국경수비대를 통과하기 위해 한쪽은 주역, 한쪽은 성경을 기록하여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또한 그릇 같은 물건을 싸는 종이로 가장하여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다리미로 다리고 묶어서 밤새 필사했습니다. 한번은 서상윤이 걸려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아는 사람이 풀어주고 책은 압수했는데 그것을 보다가 베끼고 서상윤에게 갔다준 다음에 그 책을 읽고 전도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서상윤은 동생 서경조와 함께 고향 평안도 의주를 떠나 황해도 소래로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그것이 1,884년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소래교회입니다. 서상윤은 이후에 서울에 성서반포소를 만들었습니다. 거기서 맥킨타이어가 인천으로 보낸 성경을 받아 판매했고. 행상인처럼 다니며 책을 팔면서 '예수젼'을 팔았고 그로 인하여 많은 신자가 생겼습니다. 그로 인해 서울에도 기독교 공동체가 생겨 1,887년에 정동교회(새문안교회)가 세워졌습니다.
3. 마지막 문안 인사 (21-23절)
2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22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21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자기와 함께 있는 형제들의 문안을 전했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로마에 머물고 있으면서 바울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디모데와 누가일 것으로 여겨집니다 (2:19, 행27:1).
22절에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문안을 전하면서 특별히 가이사(Caesar’s) 집 사람들 중 몇의 문안을 강조하여 전했습니다. ‘가이사 집 사람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로마 가이사 황제의 가문과 관련된 사람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위대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감옥을 지키는 시위대 사람들과 접촉을 했습니다. 시위대는 로마의 궁궐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부대로서 9,000의 보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9개조로 나누어 윤번으로 감옥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 시위대 사람들 가운데는 황실과 연관된 가문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바울과 관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당시 세계의 패권을 가지고 있는 로마에 제국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주(主)라고 칭하는 황제에게까지 복음이 들어가는 길이 이미 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거기에 의미를 두고 자신이 로마 감옥에 갇힌 일이 오히려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1:12-13에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문안인사를 전하면서 가이사 집 사람들과의 관계를 부각시킨 것은 자신이 당한 고난이 복음의 진보를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의미를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23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축도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바울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어 구원을 얻게 했고 3차에 걸쳐 그의 복음을 전했을 뿐 아니라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행19:21). 살든지 죽든지 그를 존귀케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살게 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1:20, 2:17). 그 은혜가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심령에도 있기를 축복한 것입니다.
<結言>
바울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기쁨’이라는 용어를 무려 16번이나 사용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으나 기뻐할 수 있고 또 교인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당한 일들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고난 가운데 있어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주의 구원사역이 이루어져가는 것, 자신이 받은 사명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뻐한 것입니다. 곧 바울이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워 기뻐하는 것은 사는 목적이 자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른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믿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고후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