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디모데전서 1:1-20
<題目> 정통교리의 사수
<序言>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를 바울서신이라고 하는데 바울서신에는 교리서신, 목회서신, 옥중서신 등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는 디모데후서, 디도서와 함께 목회서신에 속합니다.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을 때에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고 있던 제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본서의 목적은 크게 그릇된 교훈을 경계할 것과 교회 행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적으로 필요한 교훈이 되고 개인적 신앙생활에 필요한 말씀입니다. 본장의 내용구조는 문안 인사(1-2절), 거짓교훈에 대한 경계(3-11절), 주께 받은 은혜에 대한 간증(12-17절), 배도자에 대한 경계(18-20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문안 인사 (1-2절)
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본서의 기록자는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예수의 사도가 된 자입니다 (1절). 사도(αποστολοs)는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복음 전도를 위해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2절). 디모데는 아버지는 헬라인이지만 어머니와 할머니는 유대인으로서 그들에게 경건하게 약육되었습니다. 디모데후서1:5에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청년 때에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만나게 됩니다 (행16:1-3). 바울은 그 후로부터 디모데를 조력자로 동행시켰고 디모데는 바울을 도우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빌립보서2:22에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영적으로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고 문안했습니다 (2절). '은혜'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구원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섭리하시는 사랑입니다. '평강'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의 결과인 평안입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임을 인식하며 그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바란 것입니다.
2. 거짓교훈에 대한 경계 (3-11절)
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8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9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10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바울은 로마에서 2년간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된 뒤 디모데를 데리고 그레데섬을 지나 에베소에까지 왔으나 디모데를 그 곳에 남겨 두고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 (32절).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러 둔 것은 그 곳에 거짓교사들의 미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다른 교훈을 가르칩니다 (3절). 정통 교훈과 대치되는 거짓 교훈으로서 이단사상을 말합니다.
둘째, 끝없는 신화와 족보에 착념합니다 (4절). 유대주의자들은 가문을 중요시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끝없는 족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인물들의 가상 족보를 만들고 자신들을 그 후예들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변론거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본질에서 벗어나 헛된 논쟁만 일삼습니다 (5-6절). 바울이 원하는 바는 청결한 마음을 가지고 선한 양심을 가지고 거짓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거짓없는 믿음은 자신의 권위와 이익을 위해 불순한 동기로 믿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동기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그 본질적인 기독교 정신을 버리고 헛된 논쟁거리로 이야기만 늘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넷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합니다 (7절).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그것으로 명성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말하는 것이나 확증하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자들입니다. 자기들이 율법을 말하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려 하는지 모릅니다. 율법은 법있게 쓰면 선한 것입니다. 율법은 원래 하나님의 선한 뜻에 따라 정당하게 사용하면 선한 것입니다. 율법은 원래 옳은 사람을 위해 세운 것이 아닙니다. 불법한 자, 복종치 않는 자, 경건치 않는 자, 음행하는 자, 남색하는 자, 탈취하는 자, 거짓말 하는 자, 맹세하는 자,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해 세운 것입니다. 이는 죄를 알게 하고 악한 자가 복음으로 나아오게 하는 역할입니다 (롬7:7, 갈3:24). 바울은 이 복음을 맡아 전하는 자였습니다 (8-11절).
3. 주께 받은 은혜에 대한 간증 (12-17절)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예수님께 감사하는 것은 자신을 능하게 하신 예수께서 자신을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심이라고 했습니다 (12절). 이는 주권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주께서 바울을 선택하고 회심시키고 직분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본래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상관하지 않고 직분을 맡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의 긍휼로 회심하여 봉사 직분을 맡게 된 것입니다. 주의 은혜로 된 것이요 사랑으로 된 것입니다 (14절).
바울이 전에는 훼방자이며 핍박자이며 포학자라고 했습니다 (13절). 그가 유대교에 있을 때 주를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순교에 앞장섰던 자이고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 뿐 아니라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까지 색출하여 압송하려 했던 자였습니다 (행7:54-60).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음성을 접하고 거꾸러져 회심했습니다. 그 후에 복음 사역을 하면저 자신이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적에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행22:19-20). 평생 스데반을 죽인 사건을 생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낮아졌습니다. 다윗도 한번 범한 죄 때문에 밤마다 요가 젖고 침상이 뜨도록 회개했습니다 (시6:6). 베드로도 예수님 부인한 사건 때문에 닭이 울 때마다 회개하며 낮아졌습니다.
바울은 또 자신이 죄인 가운데 괴수라고 했습니다 (14절). 죄인 사운데 가장 나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한 것은 첫째는 스데반 죽인 죄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죄 때문일 것입니다 (행7:54-60). 둘째는 자기 속에 있는 부패한 죄성을 인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롬7:15-25). 예수님이 말씀하신 들보와 같은 것입니다 (마7:3-5). 자기 들보는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티는 밖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잘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행동만 보고 헤아리고 판단하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자기 속에 있는 들보와 같은 죄성을 인식하면 얼마나 큰 죄인이지 알게 되고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세력인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죄인 가운데 괴수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도 고린도전서15:9에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고, 에베소서3:8에는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주께서 오래 참으심을 보이신 것은 주를 믿어 영생을 얻은 모든 성도들에게 본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6절). 자기에 대해 오래 참으시고 복음에 대한 귀한 직분을 맡겨 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17절).
4. 배도자에 대한 경계 (18-20절)
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 (18절). '예언'은 바울이 가르친 하나님 말씀을 말하고 '선한 싸움'은 영적 전투를 말합니다. 영적인 싸움은 좁게는 개인의 신앙을 넘어뜨리려는 대상과 싸우는 것이고 공동체적으로는 신앙 공동체를 무너뜨리려는 대상과 싸우는 것입니다. 악령과 거짓 교훈과 죄와 죄성과 더불어 싸우는 것입니다. 바울의 의도는 디모데가 개인적으로 선한 싸움을 싸울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리려 하는 거짓된 교훈을 분별하여 물리쳐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후10:4-5, 엡6:12). 거짓된 교훈은 개인의 신앙을 파멸로 이끌고 교회 공동체의 존재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사역을 무력화시킵니다. 디모데가 사역하는 에베소교회에는 그런 자가 두 사람 있었습니다. 후메네오와 알렉산더입니다. 이들이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말하지 않고 있지만 아마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딤후2:17-18, 4:14). 바울은 이들을 징계했었다고 했습니다 (20절). 20절에 "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 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는 것은 교회로부터 사단의 영역인 비기독교 세계로 쫓아냈다는 표현으로서 교회에서 출교(黜敎)했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그들을 가려내어 징계한 것은 저희로 훼방을 받지 말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교회가 진리를 세우고 사역을 하는 데 훼방을 받지 않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징계의 목적은 첫째는 본인이 회개하고 돌아서게 하고 둘째는 교회의 거룩성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회개가 불가능할지라도 교회가 진리를 세우고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데 치명적인 방해를 받을 경우엔 출교를 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 (18절). 싸우는 도구와 기준은 바울이 가르쳐 준 바른 말씀입니다 (딤후3:14, 엡6:13-17). 소극적으로는 말씀에 벗어난 거짓된 교훈을 분별하여 물리치는 것이지만 적극적으로는 바른 교훈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굳게 해야 합니다. 말씀에 착념하여 신비주의와 자유주의의 교훈을 배제해야 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19절). '믿음'은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에 대해 신뢰하고 순종하는 실천적 의지를 말합니다. 그 믿음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온전한 것입니다. '선한 양심'은 하나님을 향한 양심을 말합니다. 원래 양심은 선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이후에는 더럽혀졌고 교육이나 환경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난 사람은 거듭난 영의 지배를 받으면 고유의 선한 양심으로 회복되어집니다. 3:9에는 이를 '깨끗한 양심'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1:3에는 '청결한 양심'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3:21에는 이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한 양심은 하나님을 찾아가고 성령의 일을 추구하고 말씀 순종을 기뻐합니다. 이 양심을 버리게 되면 믿음이 파선하고 맙니다 (19절). 믿음이 있어도 이 양심을 버리게 되면 믿음에 영향을 받아 마치 배가 부서져서 침몰하게 되는 것처럼 믿음이 깨져서 타락하게 됩니다. 한번 양심을 속이기 시작하여 습관이 되면 양심이 화인 맞은 자가 되고 맙니다 (딤전4:2). 양심이 화인(火印) 맞은 것처럼 된다는 것은 살이 불에 데여 굳어지므로 감각이 없어지는 것처럼 점점 가책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이 둔해지기 전에 신앙 양심에 예민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이 선한 양심을 버린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범사에 양심을 따라 주를 섬겼다고 했습니다 (행23:1). 엘리야도 이 양심에 예민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왕상19:9-12).
<結言>
바울은 디모데에게 율법을 잘못 하는 그릇된 이단들에 대해 경계했습니다. 이단은 다른 복음을 전하여 성도 개인의 신앙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교회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예수님이 말세에 사람의 미혹 곧 거짓선지자의 미혹을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마24:4). 오늘날 많은 이단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바로 배워 말씀대로 비진리에 양보하지 말고 진리에 굳게 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