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디모데전서 2:1-15
<題目> 중보기도와 공중예배의 덕
<序言>
전 장에서는 교회가 바른 교훈 위에 서 있어야 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본 장에서는 교회 안에서의 예배 지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기도해야 할 것과 질서를 지켜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중보기도에 대한 권면(1-7절), 교회 안에서의 남성의 책임(8절),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책임(9-15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중보기도에 대한 권면 (1-7절)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바울은 첫째로 권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절). '간구'(δεησειs)는 긴박한 상황에서 어떤 특별한 성취를 위한 탄원기도를 의미하고, '기도'(προσευχαs)는 하나님을 향한 모든 일반적인 기도를 의미하고, '도고'(εντευξειs)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하는 중보기도를 의미하고, '감사'(ευχαριστιαs)는 과거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기도를 의미합니다. 기도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기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첫째로 권하노니'는 시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중요도의 개념입니다.
바울은 기도의 대상을 '모든 사람을 위해' 하라고 했습니다 (1절). '모든 사람'은 인종이나 민족이나 지위의 차이가 없어야 할 것을 말합니다. 2절에는 특별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자는 로마 황제와 분봉왕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악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2절). '경건과 단정한 중에'는 그리스도인의 고상한 신앙과 덕행을 의미하고,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은 외적으로 전쟁과 환난이 없고 내적으로 근심과 걱정이 없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권세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비록 악한 권세자라도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이 권세자를 두셨다는 관점에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로마서13:1-2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했습니다. 둘째, 인류의 안녕과 질서와 평안을 위해서입니다. 권세자자가 정치를 잘해야 인류의 안녕과 질서와 평안이 있게 됩니다. 셋째, 신앙생활과 사역을 위해서입니다. 위정자들이 정치를 잘해야 사회가 평안하고 그래야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과 사역을 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는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고 기쁘게 받아들이십니다 (3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4절). 진리를 앎으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개별적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기 보다는 택함 받은 사람은 어떤 종족이나 계층에 상관없이 다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의미입니다 (Calvin, Lenski). 하나님은 한 분 뿐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도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5절).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 속전을 주셨습니다.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위해 전도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었고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5-7절).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라 사이를 화목시키기 위해 우리의 몸값을 대신 지불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증거하실 것인데 바울 자신도 그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 중보기도란 무엇인가?
일부에선 '중보기도'란 용어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합심기도' '협력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마 그 동안 한국교회가 '중보기도'란 용어를 예수님께 사용해온 연고로 우리가 중보기도를 한다는 것이 무언가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 같은 마음이 들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권위를 침해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디모데전서2:1-7에는 우리가 중보기도를 해야할 근거를 에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에 두고 있다. 그리고 중보기도는 합심기도로 대치하여 사용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중보기도는 기도의 성격에 따른 종류이고 합심기도는 방법에 따른 종류이다.
A. 중보기도의 정의
중보기도와 관련된 용어는 우리 말로 '도고'란 용어가 있다. 본문에 나오는 디모데전서2:1의 '도고'(禱告, εντευξειs)의 영어 (intercession-KJV)는 사전적으로 중재, 조정, 알선, 아무를 위한 기도 등의 뜻이다. 중보기도와 관련된 용어들을 보면, 히브리어에는 '파가' '팔라'가 있고, 헬라어에는 '엔투그카노'(εντυγχανω)가 있다. 라틴어는 '인터케도'(intercedo)가 있고, 영어에는 '인터세션'(intercession)이 있다. 그런 단어들이 공통적으로 쓰인 것은 '둘 사이를 중재하다'는 의미이다. 혹은 '둘 사이에 서서 한 사람의 유익을 위해 청원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요셉 그리더 (Joseph K. Grider)는 중보기도를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 서서 그들 대신 간청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마음의 관심을 의미한다"고 정의 했다. 그런 점들을 종합하여 정의하면 '중보기도(仲保祈禱)'란 어려움에 처한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서 대신 간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11:5-8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고 했다. 친구 집에 떡을 빌리러 간 사람은 자신을 위해 떡 세덩이를 강청한 것이 아니고 여행 중에 찾아온 자기 벗을 위해서이다. 이것이 중보기도의 의미를 말해 준다.
B. 예수님의 중보기도
디모데전서2:5-6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라고 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중보자로 세우셨다.
누가복음13:6-9에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고 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고 과원지기는 예수님이고 무화과 나무는 인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대에 못 미쳐 멸망하게 된 인간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는 모습이다.
누가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했고 (눅22:31-32), 원수를 위해 기도했다 (눅23:34). 요한복음에서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을 위해 기도했다 (요17:11-19). 제자들이 하나되게 해 달라고, 그들 가운데 기쁨이 충만하게 해 달라고, 그들을 악한 자들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로마서8:34에는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였다. 히브리서7:25에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대언자가 되어 주신다. 요한일서2:1에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했다. '대언자'(παρακλητοs)는 변호자(advocate-KJV,NASB)이다. 우리를 위해 애타는 심정으로 중보기도를 한다. 혹시 우리가 실수하고 범죄하여 잘못된 길로 갈 때 하나님은 죄대로 징계하시려 할 때 예수님이 우리를 변호해 주신다. 하나님의 목적을 두고 대언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두고 대언하며,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대언한다. 그것이 지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시고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그것이 환난과 핍박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긴다 (롬8:28-29,37).
C. 성령님의 중보기도
'성령'의 별명인 '보혜사'(παρακλητοs)가 변호자(advocate) 후원자(supporter) 돕는자(helper)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예수를 믿게 하고 말씀을 깨닫게 하고 죄를 회개하고 의를 행하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기도를 돕는다. 로마서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고 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 특히 우리의 기도를 돕는다. 우리는 어떻게(how) 기도해야할지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무엇(what)을 구할지 모른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에서 '바를'에 해당하는 '티'(τι)는 '어떻게'(how)인데 흠정역(KJV)에서는 '무엇'(what)으로 번역했다 ('빌 바를' : how to pray→ what to pray).
바울은 육체의 가시인 질병을 없애 달라고 세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으나 육체의 가시는 여전히 남아 있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육체의 가시를 준 것은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깨달음과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고후12:7-9). 우리는 연약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최선의 것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고 눈 앞에 보이는 물리적인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해 구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가 바른 것을 구하도록 돕는다. 그래도 바른 것을 구하지 않고 욕심으로 구한다. 자기 방법과 자기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구한다. 그 결과는 선한 결과를 이룰 수 없다. 그러나 성령님은 포기하지 않고 그 불행한 일들 속에서도 선한 결과를 이루어 낼 수 있도록 섭리한다. 본문을 이어지는 말씀과 연결해서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다 (롬8:26-28). 그래서 성도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5:3-5).
그런데 성령은 기도를 돕는 것만이 아니라 직접 기도하시기도 하신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에서 탄식으로 친히 성도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했다 (롬8:26). '성령이-친히'(αυτο το πνευμα; the spirit himself) 간구하는 것이다. '탄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갈망함을 말하는 데 그 탄식의 구체적인 내용은 우리가 인지할 수 없다. 그렇지만 성령은 우리의 이해와 의지와는 별도로 하나님 뜻에 일치하는 축복의 내용을 구하신다.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돕기도 하시지만 우리의 필요를 직접 구하시기도 하신다. 그러고 보면 우리를 위해 하늘에서는 예수님이 중보기도 하시고 지상의 우리 안에서는 성령님이 중보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망할래야 망할 수 없는 존재이다.
D. 성도들의 중보기도
중보기도는 제사장 사역이라 할 수 있다. 구약의 '제사장'(히.코헨)은 '카인'에서 온 말인데 그 의미는 '서다'(to stand)이다. 제사장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이다.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는 직책이다. 그리고 그 사역 가운데 하나는 솔로몬 성전을 기준해 볼 때 '낭실과 제단 사이에 서서' 기도하는 것이다 (욜2:17, 왕상6:3). 낭실은 주로 제사장들이 기도하는 곳이고 직무를 수행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중보 역할을 하는 자이다. 신약에도 레위인들이 24반열로 나누어 한주간 동안 성전 제사를 맡았다. 오늘날 신자는 모두 제사장적 사명을 가진 자들이다. 베드로전서2:9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고, 요한계시록1:6에도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했다. 고린도후서5:18-19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했다.
a. 아브라함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가 죄악이 관영한 것 보고 그 성을 멸하려 했다. 아브라함은 그 사실을 알고 하나님과 멸망할 자들 중간에서 중보기도를 한다. 의인 50인을 인해 멸망하면 안 된다고 탄원한다. 45, 40, 30, 20, 10인까지 내려가며 멸망시키지 말아 달라고 강청한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기도한 것은 그 곳에 조카 롯과 그 가족이 있기 때문이었다 (창18:20-33). 하나님은 그 성에 의인 10명이 없어서 유황불로 멸하는 가운데서도 롯과 그 가족은 구해낸다 (창19;12-22). 그것은 아브라함을 생각해서라 했다. 창세기19:29에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고 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랄로 이주했을 때 그랄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죽이고 그 아내를 위하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누이로 속였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내로 맞이하려 했다. 하나님이 꿈으로 그는 아브라함의 아내니 손대지 말라 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책망하고 후대하여 보낸다. 아브라함이 그를 축복하자 아비멜렉과 그 여종의 태를 열어 자녀를 낳게 한다 (창20:17-18).
b. 모세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나와 시내산 아래 머물 때 모세는 시내산에 기도하러 가서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아론을 위시하여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상을 자기들의 신이라 하며 그 앞에서 뛰어 놀았다. 일종의 제전 의식인 셈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려 했다. 모세는 이튿날 산에 올라가 중보기도를 했다. 백성들이 죄로 말미암으면 멸해야 마땅하나 하나님의 언약과 이름과 영예를 위해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들을 멸하려면 자신을 생명책에서 지워 달라고 했다 자신도 그 백성들과 함께 멸절되는 것이 낫겠다는 심정이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그들을 다 멸하지 않았다 (출32:21-32). 또 백성들이 디베랴에서 악한 말로 원망할 때 하나님이 진 끝을 불사를 때 그들을 위해 기도해서 그쳤다 (민11:1-2).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한 일로 미리암이 문둥병 들었을 때도 그를 고쳐 달라고 기도해서 문둥병이 나았다 (민12:1-12). 고라당의 반역 사건이 있을 때도 한 사람의 범죄로 범죄로 모두 멸하려 하느냐고 엎드려 기도했다. 그래서 고라당은 심판하면서도 회중은 멸하지 않았다 (민16:22).
c. 엘리야
엘리야는 사렙다 과부집에서 후대를 받았는데 그 아들이 죽게 되자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해서 아들이 살았다 (왕상17:21-22). 이스라엘이 비가 오지 않아 고통 당할 때 비를 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여 3년 6개월 동안 오지 않던 비가 내렸다 (왕상18:42-44). 야고보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라고 증거했다.
d. 히스기야
앗수르왕 산헤립이 장수 랍사게를 보내 예루살렘을 에워 싸고 함락 시킬 위기에 있었다. 랍사게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모욕하며 항복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히스기야 왕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성전에 올라가 그 편지를 펴놓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그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해 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 185,000명의 앗수르 군사를 모두 죽였다 (왕하19:14-35).
e. 모르드개
이스라엘 백성이 메데바사(페르시아)에 사로 잡혀 살고 있을 때이다. 아하수에로 왕 때 아말렉의 후예 하만이 모르드개와 유대인을 죽이려고 술수를 써 왕으로 하여금 아달월 13일 하룻 동안 유대인을 모두 숙청시키라는 조서를 바사 120도에 내리게 했다. 어인을 찍어 공포했기 때문에 누구도 변개할 수 없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왕에게 나아가 사실을 아뢸 것을 종용했다. 그리고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은 각 성에서 금식기도를 했다. 결국 아하수에로 왕이 하만의 술수를 알고 하만을 죽게 했고 조서를 변경하여 아말렉 족속을 숙청하라고 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아말렉 족속을 죽이고 기뻐하고 예물을 보내며 절기로 지켰다. 그것을 부림절이라 한다 (에4:16-17).
f. 바울
바울은 유대인들의 구원을 중보기도 했다. 로마서9:3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했다.
이제 가정을 위해, 교회를 위해, 학교를 위해, 도시를 위해,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중보기도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기도이다. 에스겔22:30-31에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했고, 예레미야5:1에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라고 했다.
2. 교회 안에서의 남성의 책임 (8절)
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교회 안에서 특히 공적인 예배에서 남성이 지켜야 할 규율을 말했습니다. 남자들은 교회 안에서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8절). 남자들이 교회 안에서 분노와 다툼을 하기 쉽습니다. 당시 분위기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있었고 때론 다툼과 분쟁으로 발전했습니다. 1절에서 언급되었듯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첫번째로 강조한 것이 기도였습니다. 특히 남자들은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을 가장 첫째로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패를 가르고 다투고 분쟁한다면 기도를 할 수 없거니와 기도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외식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분노와 다툼이 없는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당시 일반적인 기도의 자세는 일어 서서 손을 들고 손바닥을 위로 향해 편 모습이 많았습니다 (출9:29, 17:11, 왕상8:22, 시63:4, 눅18:11). 그런 관점에서 분노와 다투는 가운데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옳지 못한 것이므로 (마5:23-24) 그러한 분노와 다툼을 그치고 거룩한 모습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싸우고 다투는 것은 교만 때문입니다. 서로 높아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기 때문에 싸우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서로 높아지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다투었습니다 (마20:20-24). 서로 낮은 데 처하면 싸울 일이 없어집니다. 또 싸우고 다투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욕심 때문입니다. 서로 많이 이익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싸우고 다툰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약4:1-2).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할 뿐입니다 (약1:20). 서로 욕심을 부리지 않고 마음을 비우면 싸울 일이 없어집니다.
3.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책임 (9-15절)
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바울은 위에서 교회 안에서 특히 공중예배와 관련하여 남자들이 가져야 할 규칙을 말했습니다. 본 절들에서는 여자들이 가져야 올바른 자세와 규칙에 대해 말했습니다. 여자들은 허영과 사치와 자랑으로 덕을 상실하기 쉽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지적을 했습니다.
ⓛ아담한 옷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9절).
아담한 옷을 입으라는 것은 단정한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복장이나 태도나 말에 있어서 적당하고 규모있고 단정하고 품위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②염치와 정절로 단장하라고 했습니다 (9절).
'염치'는 고상한 예절을 말합니다. 겸손한 성품에서 나오는 조심된 예절을 말합니다. '정절'은 확고한 마음을 말합니다. 절제된 마음에서 나오는 확고한 의지를 말합니다. 여자는 겸손과 절제에서 나오는 고상한 예절로 단장하라는 것입니다.
③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하고 했습니다 (9절).
당시에 장식된 세공품이나 화환으로 땋은 머리는 재산이 많음을 나타냈고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도 재산이 많음을 나타내는 것들입니다. 그과 같은 것들의 차림새는 허영을 나타내는 모습들입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모습이라 하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자랑하여 관심을 끌려는 허영된 마음에서 나온 모습입니다.
④오직 선행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10절).
'선행'은 자선행위를 가르칩니다. 여자들이 자산이 많은 것을 자랑하고 다닐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여성도의 아름다움은 외모를 값진 것들로 꾸미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돌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꼭 여성 뿐 아니라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에게 당연히 있어야 할 바입니다.
⑤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고 했습니다 (11절).
여자들은 일절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고 했습니다. 여자에게는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종용하라고 했습니다 (11-12절). 여자들은 공적인 집회에서 남자들과 동일하게 나서려 하지 말고 침묵으로 순종하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이와(하와)가 그 후에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 아담이 뱀의 꾀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자인 하와가 꾀임을 받아 범죄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3-14절). 곧 여자가 남자보다 뒤에 창조되었고 여자가 남자보다 먼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창2:18-25, 3:1-6).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남존여비(男尊女卑)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와 권리상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거나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여자와 남자의 인권을 동등합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늦게 창조되었다는 것은 존재상 종속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창조의 순서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가 남자보다 먼저 꾀임에 빠졌다는 것은 여자가 죄의 원인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여자의 성격상 약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자가 잠잠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상 남자를 따르는 것이 덕이 되고 또한 여자의 특성상 가르치는 일을 맡는 것이 덕을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일반 유대교적 문화 배경을 보면 남자는 매일 하는 기도에서 남자는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는 내용이 있고 여자에게는 교육받을 기회를 주지 않았고 여자를 남자의 소유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해지면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교회에서 남자들과 동등한 자리에 앉아 배우고 성령의 은사를 따라 각종 교회 행사와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여성의 급격한 활동은 엄격한 가부장적이었던 유대인들에게 비난을 받게 되고 교회의 질서가 혼잡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성이 교회의 활동에서 덕을 세워야 할 점을 말하면서 앞장서서 가르치는 일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종용히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바울이 여자가 교회에서 종용히 순종하고 배울 것을 가르친 것은 여자로 하여금 전혀 도무지 가정에서 가족들에게 가르치는 것까지 금하거나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분 자체를 갖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고, 당시 배경을 염두에 두고 교회의 공적인 예배와 활동에서 덕을 세울 것을 말한 것입니다. 아울러 사역에서 여자의 성격적 특성에 맞는 일들을 하기를 권하는 것입니다. 이는 여성이 교회생활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차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15절에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여자도 믿음을 가지면 죄의 결과로 해산의 고통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Scott). 거룩하게 살면 구원을 이루어갑니다 (빌2:12, 벧전2:1-2). 그러므로 여성이 교회 덕을 위해 앞장서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 앞에 신앙적 권리와 은혜와 축복에서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그렇게 하는 것이 남자와 동일한 은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結言>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분쟁하기 쉽고 여자들은 허영을 부리기 쉽습니다. 우리는 교회 생활을 할 때 무엇보다도 기도하면서 덕을 세우므로 건강한 교회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