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디모데후서 3:1-17

<題目> 말세에 대한 현상과 경계


<序言>

  본 장에서는 바울이 말세에 나타날 죄악과 거짓교사의 잘못을 지적하고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할 것을 당부합니다. 내용구조는 말세에 있을 타락상(1-5절), 말세에 있을 거짓 교훈(6-9절), 말세에 있을 핍박(10-12절), 말세를 당한 성도의 자세(13-17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말세에 있을 타락상 (1-5절)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했습니다 (1절). '말세'는 구약에서는 메시야(그리스도)가 오시기 직전을 의미했습니다 (창49:1, 민24:14, 사2:2, 렘23:20, 겔38:16, 단2:28).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시기 직전을 의미할 때인 세상 끝을 의미할 때도 있고 (마24:3), 그리스도가 오신 다음부터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까지를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행2:17, 약5:3, 벧전1:20). '고통하는'(χαλεποι)은 '위협하는'의 뜻으로서 예수님이 가다라(거라사) 지방으로 가실 때 만난 귀신 들린 자 2명의 사나운 모습으로 표현할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마8:28).  

 

  1)자기를 사랑합니다 (2절). 심리적으로 자기를 사랑해야 자존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이기주의적으로 자기만을 위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보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타락한 것입니다. 말세엔 모든 것이 자기 중심입니다. 이기주의로 살아갑니다.

 

  2)돈을 사랑합니다 (2절). 물질시대에 돈은 모든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됩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하게 됩니다. 돈 자체는 죄나 악이 아니지만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죄의 뿌리가 됩니다 (딤전6:10).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보다 더 사랑할 뿐 아니라 모든 인격과 생의 가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말세엔 돈이 우상화됩니다.

 

  3)자긍합니다 (2절). '자긍하며'(αλαζονεs)는 '자랑하는'의 뜻으로 본래 시골에서 효과없는 약을 선전하며 뽐내는 돌팔이를 일컫는 말입니다. 확실성 없는 것에 대해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는 것입니다.

 

  4)교만합니다 (2절). 교만은 자만하여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는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부정하고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10:4).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습니다 (삼상15:22-23).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약4:6, 벧전5:5). 그래서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고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입니다 (잠16:18).

 

  5)훼방합니다 (2절). 언어생활에서 하나님을 모욕하고 이웃을 무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종말에 두 짐승이 나옵니다. 첫번째 짐승은 바다에서 나온 열뿔 달린 짐승이고 두번째 짐승은 땅에서 나온 새끼 양같이 생긴 두뿔 가진 짐승입니다. 이는 다니엘 7장의 전승인데 거기에 보면 '짐승'은 국가나 국가의 왕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온 첫번째 나온 짐승은 12장에 나온 용(사단)의 지시를 받은 적기독국가나 그 나라의 왕인 적그리스도입니다. 그가 하는 일은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해 훼방하는 것입니다. 또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계13:6). 말세엔 하나님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모욕을 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6)부모를 거역합니다 (2절).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세운 질서를 무시하는 것이고 인륜을 저버린 것입니다 (엡6:1-3). 서울 어느 교회에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젊어서 혼자되어 일평생 희생하며 고생하여 아들을 공부시켰습니다. 나중에 아들이 미국에 유학을 가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미국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윤택하게 살면서도 어머니에게는 돈 한 푼도 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생활비는 물론이거니와 병들었다고 해도 치료비 한푼도 도와주지 않았고 마침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별세했어도 와 보지 않았습니다. 말세엔 부모의 사랑과 희생만 얻고 그만큼 부모를 저버리게 됩니다.  

 

  7)감사치 않습니다 (2절). 감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인정하지 않는 자입니다. 시편에 보면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라"는 관용구가 자주 나옵니다 (시136:1-26).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생활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상황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5:18에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모든 덕의 기초입니다. 결초보은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사람이 건강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은혜를 저버린 자는 배은망덕한 자입니다. 말세엔 감사를 잃어버리고 원망과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8)거룩하지 않습니다 (2절). 거룩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대해 구별된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은 생각지 않고 인본주의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활에서도 지저분하고 더러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말세엔 부정하고 불결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거룩하고 깨끗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9)무정합니다 (3절). '무정하며'(αστοργοι)는 동물들의 어미와 새끼 사이의 본능적인 애정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욥기39:16에는 "그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라고 했고, 예레미야애가4:3에는 "들개는 오히려 젖을 내어 새끼를 먹이나 처녀 내 백성은 잔인하여 광야의 타조 같도다"고 했습니다. 타조는 무정한 새로 이름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무정하다는 것은 부모와 자식간의 원초적인 본능적 애정마저 결핍된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 때는 정에 대해 냉담하고 책임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책임지지 않은 시대는 이미 지났고 부모가 자식을 책임지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돈 문제라면 부모 형제 자식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5:8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10)원통함을 풀지 않습니다 (3절). 앙심이 깊어 화해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마음 속에 독한 시기가 있어서 다툼을 풀지 않습니다 (약3:14).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분을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엡4:26).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마5:24-25).

 

  11)참소합니다 (3절). 거짓으로 헐뜯고 욕하고 중상모략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여자들은 시기하고 질투하여 다른 사람을 악평하므로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고 편당을 가르는 일을 많이 합니다. 여자 직분자들은 참소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딤전3:11, 딛2:3).

 

  12)절제하지 못합니다 (3절). 생리적 욕망이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질과 육체와 감정에 대한 절제가 없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인성을 보면 참지 못합니다. 다른 성품에 비해 인내와 절제가 현저히 떨어집니다. 그래서 기질 검사를 해 보면 대부분 다혈질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려면 믿음과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우애가 있도록 힘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벧후1:5).

 

  13)사납습니다 (3절). 동물적이고 야만적인 것을 말합니다. 격투기 종류를 보면 참으로 잔인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뜻대로 안되면 폭력을 행사하고 난폭하여 서로 물고 찢는 사회가 됩니다.

 

  14)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3절).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경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24:12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이 사랑이 식어진다고 했습니다, 말세엔 악이 성하여 선한 가치관을 찾아보기 힘듭니다.그리스도인은 선을 좋아하고 선을 사모하고 선을 추구하고 선을 도모하고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5)배반하여 팝니다 (4절). 자기의 이익을 위해 친구를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눅6:16, 요13:21). 그리스도인은 신의를 지켜야 합니다. 배은망덕(背恩忘德)해서는 안됩니다. 다윗은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무찌른 일로 인해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과 마음이 통하여 친구가 되었습니다.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것을 알고 다윗에게 알려 주었고 다윗은 그의 도움으로 놉 땅을 거쳐 광야도 도망했습니다. 다윗은 도망하기 전에 요나단과 뜨거운 포옹을 하고 누가 살아남든지 자손을 돌봐 주도록 하자는 약조를 했습니다. 오랜 후에 사울왕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되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혼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찾아서 왕궁에 거하게 했고 왕자처럼 식사를 같이 하게 했고 종 시바를 붙여서 사울의 재산을 관리하여 돕도록 했습니다 (삼하9:1-13). 그리고 나라에 3년이나 기근이 들어서 그 원인이 사울왕 때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기브온 사람들에게 무엇을 원하냐고 했습니다. 그 때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의 후손 7명을 내어 달라고 했고 그들을 사울의 고향 기브아에서 목매달아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 다윗은 요나단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제켜 두고 사울이 리스바에게서 낳은 아들 2명과과 사울의 딸 메랍이 낳은 아들 5명을 내어 주었습니다 (삼하21:1-9). 이것이 신의입니다.  

 

  16)조급합니다 (4절). 말과 행동이 경솔하여 급이 서두르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생각을 깊이하지 않고 기질과 성품을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잠언14:29에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고 했고, 잠언21:5에는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고 했습니다.

 

  17)자고합니다 (4절). 스스로 자만하고 허세를 부리는 자세를 말합니다.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자는 버림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약4:6, 벧전5:5). 그래서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고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입니다 (잠16:18).

 

  18)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합니다 (4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마음으로 오히려 쾌락을 사랑함을 뜻합니다. 요한복음3:19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두움의 좋아합니다. 노아시대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멸망하기까지 깨닫지 못합니다 (마24:38).

 

  19)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합니다 (5절). '경건의 모양'은 종교의 외형적인 행위를 말하고, '경건의 능력'은 그 외형적인 것이 상징하는 내면의 중심 가치를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 때로 본다면 율법주의적인 행위와 율법이 지시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대조로 볼 수 있습니다. 종교의 형태만 갖추지 말고 진리를 가져야 합니다. 기독교의 윤리적 사업에만 치중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복음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말씀의 지식만 갖지 말고 말씀에 합당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에 대한 지식만 갖지 말고 성령의 감동에 합당한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고전4:20).

 

  바울은 '이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했습니다 (5절下). 바울이 디모데에게 2~5절에 나온 19가지 내용에 해당하는 자를 개인적으로 멀리하라는 말이라 하기 보다는 그런 자들을 잘 분별하여 교회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라는 권고의 의미가 강합니다. 디모데에는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공동체의 순수성을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2. 말세에 있을 거짓 교훈 (6-9절)

 

  6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7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

  9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

 

  당시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 여자들은 죄를 중히 지고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지만 결국 진리의 지식에는 없습니다 (6절-7절). 당시에 영지주의 자들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靈主義)는 지식을 통해 진리를 얻으려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헬라 철학의 이원론 영향을 받은 자들로서 영을 선하게 여기나 육은 악하게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엄격한 금욕주의를 하는 부류도 있었고 성적 방종에 빠진 부류도 있었습니다. 당시 헬라인 가정에서는 여자들이 새로운 학문과 예술을 배우기 위해서 학자나 예술가들을 집으로 초청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런 점들을 이용하여 남의 집에 들어 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서 죄 의식에서 벗어나려 하고 유식하다는 인정을 받으려 하고 새로운 지식에 대한 욕망을 가진 어리석은 여자들을 자신들의 지식으로 교화시켰습니다. 그 어리석은 여인들은 영적 지식을 배워 터득하므로 진리에 이른다고 하지만 아무리 배워도 진리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것인데 그것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교사들은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고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고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입니다 (8절). '얀네'와 '얌브레'는 모세가 애굽 바로왕 앞에서 이적을 행할 때에 그에 상응하는 이적을 일으켜 모세를 대적한 애굽의 술객(術客)들입니다 (출7:11,22, 8:7,18). 이들 이름이 구약 성경에 직접 거명된 것은 아니지만 요나단 탈굼이나 외경이나 기독교 초기 문헌 등에 자주 나타납니다.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행22:3) 유대인의 전통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두 사람을 알고 거명한 것일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훼방하고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마귀에게 사로잡혀 부패하게 된 자들입니다. 믿음 곧 기독교 신앙에 관하여서는 불합격자들로서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활동이 있을지라 나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얀네와 얌브레의 결국처럼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9절).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이 만연하여 복음 진리를 능가할 것 같이 보이나 그것은 하나님이 진리와 교회를 보호하시고 그들의 거짓됨을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聖經)과 관련한 용어는 정경과 외경과 위경이 있습니다. 정경(正經, κανων, kanon)은 표준 성경이란 뜻으로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성경이고, 외경(外經, αποκρυφα, Apokrypha) 정경에 들지 못한 성경이란 뜻으로 유대교와 천주교에서 제 2의 경전으로 사용하는 성경이고, 위경(僞經)ψευδεπιγραφα, pseudepigrapha) 허위 성경이란 뜻으로 정경과 외경에도 들지 못한 성경입니다. 정경에는 현재 기독교(개신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66권이 있고, 외경에는 에스라 I II서, 토빗, 유딧, 솔로몬의 지혜, 바룩, 세 소년의 노래, 수산나의 역사, 벨과 용, 므낫세의 기도, 마카비 I II 등이 있고, 위경에는 에녹서, 모세의 승천기, 사야승천기, 아기 예수전, 마리아의 승천기, 도마복음, 유다복음 등 있습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 계시받은 내용을 많이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말라기 이후 중간시대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게시를 받아 기록했습니다. 그 기록한 원본들은 많은 단편들로 존재했습니다. 그 단편들은 여러 사본들로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의 기준이 애매했고 신앙인들에게 혼란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경과 위경 중에는 경건의 교훈과 상반되는 내용이 많고 역사적 사실과도 동떨어진 왜곡된 진술이 많아서 외경과 위경을 무절제하게 사용할 때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연유로 시대가 경과함에 따라 그것들을 합본으로 엮으려는 노력이 요구되었습니다.그래서 많은 신실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노력으로 수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교회 회의를 통해서 오늘날의 66권의 경이 확정했습니다. A.D.90년 경에 유대교의 얌니야회의(Council of Jamnia)에서 구약 성경 39권최종적으로 정경으로 결정하였고 그리고 A.D.397년 카르타고회의(Council of Kartago)에서 신약 성경 27권정경으로 확정하였기독교회에서도 신구약 66권을 동일하게 정경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이 정경으로 결정되는 데는 몇 가지 기준이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인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약속이 있고 (예언성), 하나님께 직접 영감을 받은 선지자들이 기록하였고 (영감성),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증거가 있고 (보존성), 예수님께서 인정한 책이어야 했습니다 (보증성). 신약 성경은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 있고 (계시성), 예수님께 직접 말씀을 들은 사도들이 기록했거나 그들의 후원이 있고 (사도성), 기록자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했고 (영감성), 모든 교회가 종교 회의를 통해 보편적으로 인정한 책이어야 했습니다 (보편성). 그런 기준 하에 채택된 66권의 정경은 완전성과 확실성과 정직성과 진리성과 영원성의 권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시19:7, 8, 119:160, 마24:35, 엡3:5, 갈1:7-9, 계22:18-19). 외경과 위경은 그런 점들을 만족시킨 부분이 있을지라도 모두 만족시키지 못하여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정짓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어서 정경에서 제외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지만 카톨릭(천주교)에서는 외경을 받아들였고 일부 이단들은 위경까지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정경 66권만을 정확무오한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결론적으로 외경과 위경은 성경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의 보조 자료로 사용될 수는 있지만 신앙생활의 규범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정경 66권은 하나님의 뜻과 신앙생활의 원리를 완벽하게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외경과 위경은 교리적 위험성이 있으므로 외경과 위경을 이용하여 신앙생활에 도움을 얻고자 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리하여 4세기 교부 어거스틴(Augstine)은 그의 저서 '하나님의 도성'에서 유사 정경인 외경과 위경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17세기 종교개혁자 루터(luther)나 칼빈(Calvin) 등도 외경과 위경을 거부했습니다.   

 

  바울이 로마감옥에서 에베소에 있던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당시 영지주의 거짓교사들이 진리를 대적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 외경에 나오는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하다가 버림받은 일화를 인용했습니다 (8절). 외경에 나오는 일화를 인용했습니다. 당시에 초대교회에서는 신구약 성경 66권이 정경으로 결정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정경과 위경이라는 개념이 확립되지 않아 위경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지주의 거짓교사들을 비판하면서 당시 잘 알고 있었던 외경의 내용을 자신의 의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위경은 인용한 것입니다.  유다도 정경에 들지 않은 위경인 모세승천기와 에녹서를 인용했습니다 (유1:9,14-15). 사도 요한은 헬라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헬라인들이 사용하는 로고스(λογοs 말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요1:1,14). 사도 바울은 아덴(아테네)의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설교할 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 자연물로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옳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헬라인들의 시(詩)에 자주 나오는 '우리가 신의 소생이라'는 시구詩句)를 인용했습니다 (행17:28). 이른바 바울이 그런 방법을 사용한 것은 이른바 복음적 목적에서였습니다 (고전9:19-23). 바울과 유다는 하나님의 계시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위경을 인용한 같은 독자에 대한 배려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본서인 유다서가 교회종교회를 통해 정경으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본문의 내용도 정경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도를 통해 성령의 감동으로 완전무오하게 기록했고 하나님이 사본의 보존과 공회의 채택을 섭리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표준계시로 주셨다는 것을 받아들여 본 절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3. 말세에 있을 핍박 (10-12절)

 

  10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세에 있을 거짓 교사들의 악한 행위와 그들에 대한 말로를 말한 다음 이제는 자신이 당한 고난을 말하면서 복음 사역자로서 당연히 핍박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 담대해야 할 것을 당부합니다.

 

  바울은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을 디모데가 알고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0-11절). '교훈'은 바울이 설교하고 가르친 복음 진리를 의미합니다 (행17:2-3). '행실'은 바울이 말뿐 아니라 행실로 모범을 보인 것 가리킵니다 (고전4:17, 9:23-27). 바울은 말씀과 신유의 권능의 사도였으나 모든 행위를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행14:8-18). '의향'은 바울의 삶의 목적이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었음을 가리킵니다 (행14:19-22). '믿음'은 하나님을 변함없이 의지하고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 주실 것을 확신한 것을 말합니다 (롬8:38-39). '오래 참음'은 사람들이 대적하고 핍박하는 것에 대해 참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전5:14).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되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살전3:12). '인내'는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끝까지 계속 잘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행14:19-22). '핍박과 고난'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당한 핍박과 고난받은 것을 말합니다 (롬8:17,18, 고후12:10, 골1:24).  

 

  바울은 또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고 했습니다 (11절). '안디옥'은 바울이 선교를 출발한 수리아 안디옥이 아니라 (행13:1-3), 1차 전도여행 때 들린 안디옥을 말합니다 (행13:14). 바울과 바나바는 이 곳에서 많은 개종자를 얻었으나 유대인의 핍박을 받아 추방되었습니다 (행13:14-52). '이고니온'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바울의 일행을 돌로 치려고 위협해서 도피한 곳입니다 (행14:1-7). '루스드라'는 바울이 앉은뱅이를 고친 일로 사람들이 신으로 섬기려 했으나 바울이 막은 곳이고 그 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그 곳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쳐 죽게 한 후 성밖에 내다 버린 곳입니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다시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며 신자들을 격려했습니다 (행14:8-22). 바울은 그런 여러 환난과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디모데는 이런 사실들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런 디모데에게 자신의 당한 어려움과 주께서 함께 하심을 상기 시킨 것은 디모데가 복음 사역으로 인한 고난을 잘 견디고 승리하도록 격려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12절). 예수 그리스도께 합당한 사람을 살려고 하면 당연히 핍박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감당하며 살려 하면 환난, 핍박, 고난, 멸시, 천대, 유린, 손해를 볼 때가 많습니다. 첫째는 악령들이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70인의 제자들을 전도 보냈을 때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항복하더라는 보고를 할 때 예수님이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했습니다 (눅10:18). 베드로전서5:8-9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에 실패하자 '남은 자' 곧 성도들과 싸우려 합니다 (계12장). 둘째, 세상 질서가 하나님의 말씀과 대치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계명은 세상의 가치와 다릅니다. 세상은 우상을 섬기라고 하는 데 말씀은 섬기기 말라고 합니다. 세상은 돈이 최고라고 하고 공부가 최고라고 하고 명예를 누리며 사는 것이 성공이라고 말하는데 말씀은 그것이 성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향락과 쾌락이 행복이라고 하는데 말씀은 그것이 행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과 하나님의 말씀과는 대치됩니다 (요일2:15). 그러므로 그런 구조 속에서 살면서 갈등하게 되고 말씀을 선택하게 되면 어려움이 따르게 됩니다. 단적으로 장사하는 사람들은 주일을 바로 지키려 하면 바로 물질적인 손해가 옵니다. 학생들도 주일에 공부를 하지 않으면 성적이 떨어집니다. 주일날 공부 안 해도 하나님이 주일날 공부하는 사람보다 더 성적이 잘 나오게 해 주시는 것만은 아닙니다. 당연히 성적이 더 안 나옵니다. 그래도 주일날 공부를 안 하면 그만큼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셋째는 세상 사람들이 의로운 사람들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어둠에 속한 사람들은 빛이 있게 되면 자신들의 더러움이 다 드러나기 때문에 빛을 싫어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싫어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이 그들의 행사가 악하다고 증거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요7:7). 세상 사람들이 성도를 미워하는 것은 자신들의 부정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 말씀 지키는 것 때문에, 주께 맡은 사명 감당하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 기뻐해야 합니다. 요한복음15:18-19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17:14에는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께 속한 증거이고 하나님 말씀에 속한 증거이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증거입니다. 신앙이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강물을 거슬려 올라가지 못하고 떠내려 갑니다. 또한 상급이 예비된 증거입니다 (마5:11-12).

 


       4. 말세를 당한 성도의 자세 (13-17절)

 

  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악하고 속이는 자들을 경계시켰습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사람들은 더욱 악해져서 속입니다 (13절).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와 반대되는 사람들입니다 (12절). 거짓 교사들은 가만히 들어와 바른 진리를 변질시키고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말세가 될수록 악한 자는 더욱 악해지고 더러운 자는 더욱 더워집니다 (계22:11).

  

  마지막 때에 악하고 속이는 자들이 득세하지만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뉘게서 배운 줄 안다고 했습니다. 또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14-15절). 디모데는 유아 때부터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성경의 기본 진리를 배웠고 (1:5) 바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진리를 배웠습니다 (10-11절, 행14:12).

 

  ※바울이 말한 성경은 어떤 것인가?

 

  ①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 (15절).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 성경은 구원 얻는 길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알게 합니다 (시19:7, 롬11:11, 빌1:19, 롬3:21-22).

 

  ②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16절).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성경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벧후1:21). 베드로후서1:21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2:13에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③교훈하기에 유익합니다 (16절).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기에 유익합니다 (딤전5:17).

 

  ④책망하기에 유익합니다 (16절). 성경은 잘못된 교리나 행동의 오류를 바로잡고 이단자들의 거짓을 밝혀 내기에 유익합니다 (엡5:18, 딛2:15).

 

  ⑤바르게 하기에 유익합니다 (16절). 성경은 성도들을 진리와 사랑으로 바로잡고 그들이 그 길로 더욱 매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유익합니다 (단12:3, 요21:15-17).

 

  ⑥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16절). 성경은 모든 삶 가운데서 어린아이를 올바르게 교육하고 훈련시기기에 유익합니다. 특히 엄정한 정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⑦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합니다 (17절). 성경은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교사들에게 하나님의 사역을 잘할 수 있는 적합한 사역자로 변화시킵니다 (딤전6:11).

 

  ⑧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합니다 (17절). 성경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충분하도록 변화시킵니다 (2:21, 딤전5:10, 딛3:1).

 

 

  ※ '성경영감설(聖經靈感說)'이란 무엇인가?

 

  ① 성서 영감의 성질 (방법)

 

  a.기계적 영감설 (機械的靈感說)

기계적 영감설(mechanical inspiration)은 성서의 기자들이 말씀을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기록할 내용을 불러주고 기록자들로 하여금 정신활동의 정지 상태에서 필기사처럼 그것을 그대로 받아 적게 했다는 설입니다. 그러나 역사서들에는 역사적 연구와 조사 결과들이 기록되었고, 누가복음에는 기록자가 조사한 내용이 기록되었고(눅1;1-4), 시문서와 예언서와 사도행전과 서간서들에서는 기록자의 개인적인 경험이 주장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내용의 복음서들이 서로 문체와 표현과 강조점이 다릅니다. 그것은 구약 예언서와 신약 서신서들에도 나타납니다.

 

  b.동력적 영감설 (動力的靈感說)

동력적 영감설(dynamical inspiration)은 성서의 저자들이 말씀을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기록자들에게 목적에 있어서만 영감하고 세세한 부분에 있어서는 직접적인 감동을 주지 않았다는 설입니다. 기록자들이 동기와 힘만 제공받았을 뿐 자세한 기록은 자기 지혜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이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영감 자체를 기록자들의 높은 직관력이나 감화된 마음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설은 성서를 일반계시로 격하시키고 성서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설입니다. 인간의 영감을 중시하므로 성서를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으로 믿지 못하게 하는 설입니다. 오늘날에도 종교적 직관력이 뛰어난 사람은 성서와 같은 권위를 가진 계시를 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인본주의적 성경관입니다.

 

  c.유기적 영감설 (有機的靈感說)

유기적 영감설(organic inspiration)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감동시키는데 있어서 기록자의 마음과 성품과 기질과 은사와 재능과 지식과 교육과 교양과 용어와 문체들을 그대로 사용하게 하되, 문서활동에 미치는 죄의 영향력을 배제(억압)하여 오류없이 기록하게 했다는 설입니다. 이 설이 정통 개혁교회에서 주장하는 영감설입니다. 우리는 이 설을 받아들입니다. 사실 성서는 그 출처가 하나님이며 기록자들은 다만 그 뜻을 수용하고 선포하는 역할만 담당한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록자들이 자신들의 역사적 연구 결과를 기록한 점과 자신들의 독특한 문체와 용어로 표현했다는 점과 자신들의 처해진 개인적 특성과 시대적 특징을 따라 기록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② 성서 영감의 범위

 

  a.사상 영감설 (思想靈感說)

하나님께서 성서를 기록할 때 기록자들의 사상만 감동시키고 그 언어에 있어서는 기록자들이 선택하게 했다는 설입니다. 곧 문장 속에 있는 사상만 영감되고 문자와 단어에 있어서는 기록자들의 의지적 선택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상과 언어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올 박사(Dr.Orr)는 '사상은 반드시 형태를 취하여 언어로서 표현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상과 목적을 바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언어에도 가장 적합한 단어를 선택하도록 감동시켰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서 기록자들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기록할 것을 알려 주었다고 했고, 예수님과 사도들이 성서의 단어 하나 하나를 절대적 진리로 인정하여 그 문장들로 교훈과 이론을 폈다고 했습니다 (마22:41-46, 요10:34-36)

 

  b.부분 영감설 (部分靈感說)

하나님께서 성서의 공통적인 문서에만 영감하고 역사적인 부분은 영감하지 않았다는 설입니다. 어떤 학자는 교리적 사건에만, 어떤 학자는 신약 성경에만, 어떤 학자는 예수님 말씀에만, 어떤 학자는 산상보훈에만 영감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서에 나타나는 역사적 기록과 연대적 기록과 과학적 기록은 오류가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이는 성서에 사단과 사람과 짐승의 말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포함된 책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구약의 역사적 기록들도 '성서' 라고 했습니다.

 

  c.축자 영감설 (逐字靈感說)

하나님께서 글자 하나 하나에까지 영감했다는 설입니다. 이는 기계적 영감이 아닌 유기적 영감을 전제로 합니다. 이 설을 완전 영감설(完全靈感說)이라고도 하는데 이 완전 영감설(plenary inspiration)은 성서의 모든 부분(성경 66권)에 영감되었다는 설입니다. 마태복음5:18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라고 했습니다 (원어성경 전제). 요한계시록9:15 '그 연월일시' 는 해석의 확연함을 보여 주고, 창세기13:12에 '소돔까지' 는 타락의 정도를 정확히 알려 줍니다. 이런 면은 글자 하나 하나에까지 관여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설을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험증할 때 구약 성서의 한절 한 단어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結言>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계했습니다. 거짓교사들이 성도들을 미혹하는 일이 많이 있겠지만 그들의 공격을 잘 견디고 그들의 교훈이 교회에 들어 오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누구에게서 어떻게 배운 것을 늘 생각하여 성경을 기준하여 목회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신앙, 다윗의 신앙, 예수님 제자들의 신앙, 교부들의 신앙, 종교개혁자들의 신앙, 청교도인들의 신앙, 미국 선교사들의 신앙, 한국 초대교회 목회자들의 신앙, 일제 때 신사참배하지 않은 목회자들의 신앙을 이어받은 자들에게 배운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성경을 바로 가르쳐 준 것을 기억하여 성경 말씀대로 진리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