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빌레몬서1:1-25

<題目> 그리스도인의 용서

 

<序言>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 머물러 있을 때 두란노서원을 개설하여 2년 동안 강론했는데 그 때 골로새 출신인 에바브라와 빌레몬이 함께 바울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습니다 (행19:9-10, 몬1:10). 그리고는 골로새로 돌아와 복음 전도에 힘썼는데 그 때 빌레몬은 자기 집을 개방하여 예배를 했습니다 (몬1:2). 그것이 골로새 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Onesimus)라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 오네시모가 주인인 빌레몬의 금품을 훔쳐 로마로 도망했습니다. 당시 대도시 로마는 범죄인들의 은신처 역할도 했었습니다.  

  한편 바울이 로마에 투옥되어 있었던 2년 동안 바울은 비교적 방문객들을 만나 자유롭게 말씀을 가르치고 전할 수 있었습니다 (행28:17-31). 그 기간에 빌레몬의 금품을 훔쳐 도망했던 오네시모가 바울을 어떻게 만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고 바울의 사역을 돕는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몬1:10). 바울은 오네시모를 오랫동안 자기 곁에 두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로마법에 의해 노예는 주인에게 돌려 보내야 했습니다 (D.A.Caeson). 그렇게 될 경우 오네시모가 어떤 위험에 처해질지 알 수 없었습니다 (A.C.Hervey). 그래서 골로새서를 두기고 편에 보내면서 두기고와 함께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게 되는데 주인인 빌레몬에게 편지를 써서 두기고 편에 함께 보내게 됩니다 (몬1:12, 골4:7,9). 그 내용은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고 다시 자유롭게 해주어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바울 자신에게 보내 달라는 부탁입니다 (몬1:16-19). 그것이 빌레몬서입니다.

  내용구조는 문안 인사 (1-3절), 빌레몬의 선행에 대한 감사(4-7절), 오네시모를 위한 당부(8-16절), 오네시모의 부채에 대한 변재 약속(17-22절), 끝맺는 인사(23-25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문안 인사 (1-3절)

 

  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2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발신자는 바울입니다. 바울(Paul)은 문안 인사를 하면서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이라고 소개했습니다 (1절).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을 마친 뒤 예루살렘교회에 구제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다가 붙잡혀 가이사랴에서 2년 동안 구금되어 있다가 로마로 호송되어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고 (행19:21, 21:15,26-35, 25:11) 그 곳에서 본서를 기록했습니다 (1,9,10,23절). 곧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역을 하다가 갇힌 자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본 서신을 기록하면서 '형제 디모데'를 송신자에 포함시켰습니다 (1절). 디모데(Timothy)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을 할 때 3년 동안 함께 사역을 했습니다 (행19:22, 고후1:1). 아마도 그 기간 동안 에베소에 와서 바울에게 말씀을 배운 빌레몬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와 빌레몬의 친분 관계를 생각하여 디모데도 자신이 편지를 쓰게 된 문제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수신자는 빌레몬입니다. 편지의 수신자에 대해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라고 했습니다 (1-2절). 편지를 받는 최초의 수신자는 빌레몬입니다. '빌레몬'(Philemon)은 소아시아(터키) 리쿠스 계곡의 골로새 출신으로서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 에바브라와 함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자입니다. 그 후에 골로새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며 자기집을 개방하여 교회를 세운 자입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떠난 다음에도 복음전도와 교회를 위해 전적으로 헌신한 자였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바울은 그를 사랑하는 동역자로 칭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 외에도 '자매 압비야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압비야'(Apphia)는 빌레몬의 아내로 추정되고 (Theodoret, Lohse, Vincent, Meyer), '아킵보'(Archippus)는 빌레몬의 아들로 추정됩니다 (Chrysostom, Theodoret, Carson, Hendriksen, Muller). 그것은 빌레몬서가 빌레몬의 노예 문제를 다루기 위해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점에서 빌레몬의 가정 식구들에게도 관계된 내용이라 바울이 그들도 편지를 보기를 원했을 것이라는 점에서입니다. 특별히 아킵보에 대해서는 '우리와 함께 병사된' 자라고 했습니다. 에바브리가 골로새를 비롯하여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까지 설교 사역을 했는데 그가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이단의 교훈에 대해 변증할 수 있는 신학적 지식을 배우기 위해 로마에 가 있는 동안 그 설교 사역을 아킵보가 대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골4:17). 그런 점에서 이단의 교훈으로부터 교회를 지켜야 하는 영적 싸움을 부단히 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울이 그 점을 알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병사된' 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네 집에 있는 교회'는 빌레몬의 가정이 가정교회의 장소였음을 말합니다. 라오디게아에는 눔바의 집이 가정교회로 모이는 곳이었는데 (골4:15) 골로새에는 빌레몬의 집이 가정교회로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집에 모이는 가정교회의 모든 일원들에게도 이 편지를 보게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도망간 노예 오네시모를 받는 문제는 비단 빌레몬 가정의 문제만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빌레몬 가정에 모이는 가정교회의 모든 일원들에게도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한 가정의 문제는 영향력에 있어서 공동체의 모든 일원들에게 관련되어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모든 일원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교회 공동체의 유기체적 특성을 잘 알게 해 줍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한 사람의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로 국한되지 않고 교회 전체의 문제로서 모든 성도가 그 집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고전12:12-27).


  그리고 인사 내용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입니다 (3절).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전한 것입니다. '은혜'(χαριs)는 구속사적 호의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율법의 정죄로 죄와 죽음과 지옥의 형벌에 놓은 우리 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죄를 사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호의를 말합니다. 그것은 창세 전에 선택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대속해 주시고 성령으로 불가항적으로 믿어지게 역사해 주시고 성령의 단독적 역사로 영이 거듭나게 해 주시고 성령으로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시고 성령의 도움으로 영적 성장과 인격 성장과 신앙 성장 곧 성화를 이루게 해 주시고 궁극적으로 반드시 천국가게 해 주시고 천국에서 복락을 누리에 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신 은혜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은혜를 받은 자에게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복이 평강입니다. '평강'(ειρηνη, 히.שלום)은 평화와 화평과  화목의 의미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평안의 의미입니다. 인생에서 죄, 죽음, 지옥 등의 본질적인 문제로 두려워 합니다. 어떤 노력을 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공포를 일으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속과 관련된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평안해집니다. 확대하면 삶에서 느끼는 모든 고난과 고통과 시련 유혹 문제도 우리에게 불안을 주지만 성경을 깨달아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상태에서 구원했고 우리에 대해 어떻게 대하시고 우리에게 어떤 목적을 가지셨는지 깨닫게 되면 평안이 있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에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므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하므로 평안을 가졌고 (창45:7-8), 욥은 극한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서 견뎠고 (욥23:10), 엘리야는 실패로 인한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왕하19:15-16). 특이한 것은 성경에서 언제나 '은혜'와 '평강'의 순서를 바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평강과 은혜'로 바꾸지 않고 언제나 '은혜와 평강'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지 않고는 진정한 평강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속사적 은혜를 항상 묵상하고 성경 말씀을 부지런히 배워 하나님이 우리에게 삶 가운데 베푸시는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럴 때 평안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빌레몬의 선행에 대한 감사 (4-7절)

 

  4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5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7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바울은 빌레몬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 드렸고 기도할 때마다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4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도에 대한 사랑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5절). 빌레몬(Philemon)은 에바브라와 함께 골로새 출신으로서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서 3년간 사역을 할 때 바울을 찾아가 복음을 듣고 말씀을 배운 자입니다. 그래서 에바브라와 함께 골로새로 돌아와 에바브라와 함께 복음을 전했고 자기 집을 개방하여 교회가 시작되게 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그에 대한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사랑하여 희생적으로 섬기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그런 사실에 대해 듣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골로새교회의 지도자인 에바브라가 이단 문제로 바울을 찾아왔는데, 그 에바브라로부터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에바브라(Epaphras)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 머물러 사역을 할 때 골로새에서 빌레몬과 함께 찾아가 복음과 말씀을 듣고 빌레몬과 함께 골로새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운 자입니다. 또한 골로새교회에서 설교사역을 해 온 지도자입니다. 그는 빌레몬이 처음부터 어떤 믿음을 가졌고 성도들에게 어떤 사랑을 베풀었는지 잘 아는 자였습니다. 바울은 그로부터 빌레몬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오네시모를 통해서도 들었을 것입니다. 오네시모(Onesimus)는 빌레몬의 노예였는데 금품을 훔쳐서 로마로 도망했다가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바울을 돕던 자입니다. 그는 빌레몬 가정에서 살면서 빌레몬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사랑을 나타냈는지 잘 아는 자였습니다. 물론 그가 회심하기 전에는 그렇게 보지 않았을 수도 있었지만 회심하여 사역을 돕는 자가 된 후에는 빌레몬이 얼마나 훌륭한 일꾼인지 알게 되었을 것이고 바울은 그에게서도 빌레몬에 대해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믿음의 교제가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한다고 했습니다 (6절). '교제'(κοινωνια)는 공동체의 공통적인 목적과 가치와 사역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관계와 동정과 연합을 의미합니다. 빌레몬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사랑의 교제를 나타냈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선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선'(αγαθοs)은 사랑을 말합니다. 빌레몬이 믿음으로 나타낸 사랑의 교제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사랑을 경험하고 인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누리는 복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그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와 믿음을 가지고 믿음의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을 형제라고 칭하면서 빌레몬에게 성도들의 마음이 그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바울 자신이 그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7절). 빌레몬이 성도들에게 나타낸 사랑으로 인해 성도들이 마음이 평안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로 인하여 상당한 위안과 기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복음 사역을 위해 구금되어 있는 바울에게는 빌레몬의 희생적이고도 헌신적인 모습이 큰 행복감을 가지게 한 것입니다.


  빌레몬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그 사랑의 실천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물질적 심리적 영적 모든 부분에서 나타났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빌레몬처럼 믿음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하며 사랑의 실천으로 일원들에게 위로가 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우리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릴 구원해주신 것에 감격하고 복음 전도를 하고 교회 공동체를 세워 가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과 사랑의 교제를 해야 합니다. 특히 고난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야고보서1:27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가진 심정이고 그리스도인이 가진 성품이며 가치입니다 마태복음25:31-46에 나오는 양과 염소 비유에서 잘 보여 줍니다 (계14:3-5, 21:8). 그 심정을 가지는 것이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입니다. 디모데후서3:9에 집사의 자격을 말하면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고 했습니다. 그것을 아는 자들이 우리가 가진 가치와 축복을 알고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게 됩니다.  

 


       3. 오네시모를 위한 당부 (8-16절)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빌레몬(Philemon)은 소아시아 골로새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자기 집을 개방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에게는 오네시모(Onesimus)라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오네시모가 주인 빌레몬의 금품을 훔쳐 로마로 도망했습니다. 그러다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는 바울을 만나 회심하고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계속 자기 곁에 두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로마법에 노예는 주인에게 되돌려 보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되돌려 보내되 빌레몬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납하고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 들이고 다시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로마로 되돌려 보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목적 하에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그런 내용을 쓴 편지를 함께 보낸 것입니다. 그 편지가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사도권을 가지고 아무 거리낌 없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말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랑으로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8-9절). 권위가 아니라 사랑으로 간구한 것입니다. 바울은 나이 많은 자신이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해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9-10절). 연장자 입장에서 구한 것입니다. 또한 오네시모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구한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전에는 빌레몬에게 무익했으나 이제는 바울 자신과 빌레몬에게 유익하므로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낸다고 했습니다 (11-12절). 그가 빌레몬의 노예로 있을 때나 도망했을 때는 참으로 무익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회심하여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바울에게나 빌레몬에게나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기 심복이라고 했습니다 (12절). '심복'(σπλαγχνον)은 '내장' '마음'으로서 바울이 자기 자신처럼 생각하는 가장 애정있는 동역자임을 표현한 말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기에게 머물러 있게 하여 복음을 위해 갇힌 중에서 빌레몬 대신 자기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빌레몬의 승낙없이는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않고 빌레몬의 선한 일이 억지로 되지 않고 자의로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13-14절). 바울은 빌레몬이 자기를 돕기를 원한다는 가정 하에 오네시모가 그 사역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를 계속 곁에 두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빌레몬의 승낙없이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권으로 명령하면 억지로라도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바울에게 보내겠지만 바울은 빌레몬이 자의로 해주길 바란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과 오네시모도 기쁠 뿐만 아니라 빌레몬이 선한 행동이 잘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오네시모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빌레몬으로 하여금 오네시모를 영원히 두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15절).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도망한 것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인 형제로서 영원히 함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금품을 훔쳐 도망한 것을 합리화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네시모의 잘못된 행동을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선한 목적을 이루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않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고 했고, 바울 자신에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빌레몬에게 더욱 그러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16절). 그래서 이제부터는 오네시모를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관계에 있는 바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육신적인 관계와 영적인 관계를 함께 가지고 있는 빌레몬은 당연히 그를 형제로 받아 들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도이기 때문에 사도의 권위로 빌레몬에게 명령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랑으로 간청했습니다 (8-9절). 바울은 사역의 효과를 위해 그 권한을 다 쓰지 않고 낮은 심정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사례비를 받을 권리가 있는 것에 대해 군 복무, 포도 농사, 양 떼 기르는 것 등 일반적인 예로 들었습니다. 또한 율법, 성전 제도, 주의 가르침을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런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고린도전서9:12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 했습니다 (고전9:15). 정당한 권리라도 복음 사역을 위해 포기하는 자세입니다. 권리도 복음 사역을 위해 주어진 것인데 복음 사역에 방해가 될 때는 포기하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금품을 훔쳐 도망한 것을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된 선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15-16절). 오네시모의 잘못을 합리화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잘못을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선한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개인의 잘못을 보기 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시각입니다. 개인의 잘못이 있을 때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는 시각이기도 합니다.

 


       4. 오네시모의 부채에 대한 변재 약속 (17-22절)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20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21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22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노라.

 

  바울은 8-16절에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보내면서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주 안에서 용서하고 그리스도인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바울에게 보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이어서 자기를 동역자로 여긴다면 그를 자기를 영접하듯이 영접해 달라고 했습니다 (17절). 빌레몬은 에베소에서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말씀을 배운 자로서 골로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자기 집을 개방하여 교회 공동체를 이룬 자였습니다. 그는 바울과 같은 목적을 공유한 바울의 동역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바울을 동역자로 여기는 것처럼 오네시모도 바울이 심복처럼 여기는 동역자이니 바울을 영접하듯이 영접해 달라는 간청입니다. 그러면서 만일 오네시모가 불의를 행한 것이 있거나 빚진 것이 있으면 바울 자신 앞으로 계산하라고 했습니다 (18절).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빚진 것은 오네시모가 도망갈 때 훔쳐 간 금품, 오네시모가 도망하므로 인해 하지 못한 일에 대한 손해, 오네시모가 도망하므로 인한 몸 값 등일 것입니다. 당시 몸 값은 보통 500데나리온(1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일당)이나 어떤 전문적인 일에 숙련된 사람은 100배나 높은 값에 매매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그런 많은 빚을 해결해 줄 재정적 능력이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빚을 자신이 갚겠다고 하면서도 빌레몬이 바울 자신에게 빚진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19절). 빌레몬이 바울에게 진 빚은 빌레몬이 바울을 통해 복음을 접하여 회심하고 말씀을 알아 사역자가 되게 한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 그리고 말씀을 알아 사역에 동참하는 것처럼 큰 은혜는 없습니다. 빌레몬을 바울을 통해 그 큰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그것을 생각하여 오네시모가 진 빚, 곧 바울이 갚겠다고 한 빚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란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빌레몬이 자신의 마음을 주 안에서 기뻐하고 평안하게 해 주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20절).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고 사역자로 돌려 보내 주면 바울의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바울은 주의 복음 사역을 위해 감옥에 갇혀 있고 오네시모가 동역자로 필요하고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야 하고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여 다시 보내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빌레몬이 그 간청대로 해 준다면 바울에게는 큰 기쁨과 평안을 얻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빌레몬이 순종할 것을 확신하여 이 편지를 썼다고 했고 빌레몬이 바울 자신이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 안다고 했습니다 (21절). 바울은 사도의 권위로 명령하지 않고 사랑으로 간구하지만(8-9절) 빌레몬이 순종할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말하고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위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빌레몬이 당연히 그 요구를 들어 줄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요구대로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어 맞아들여 주는 데 그치지 않고 빚을 요구하지 않고 노예에서 해방하여 사역자로 보내 주기까지 할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빌레몬에게 자기를 위해 숙소를 마련하라고 했습니다. 빌레몬과 그와 함께 있는 교우들의 기도로 그들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22절). 바울 자신이 감옥에서 풀려 나게 되면 골로새에 들리기를 바라고 있고 그 때 빌레몬이 바울을 편안히 맞을 수 있는 관계가 되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오네시모를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빌레몬에 대한 신임과 확신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21절에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자기를 통해 세워진 사역자로서 자기와 같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바울은 주를 위해 갇힌 자 되었고 갇혀서도 주의 복음 사역이 잘되기를 추구한 자입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보낸 편지 가운데 하나인 빌립보서1:20에 보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를 통해 복음을 듣고 자기에게 말씀을 배운 빌레몬도 같은 정신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주의 복음 사역을 위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사역자로 보내 줄 것을 구한 것입니다. 방법에 있어서도 사도의 권위로 명령하지 않고 사랑으로 간청한 것입니다. 8-9절에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도 빌레몬이 마땅히 순종할 줄 알았습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사역자로 보내는 데에는 많은 손해와 헌신이 필요하지만 바울은 빌레몬이 자기의 의도와 목적을 이해하고 순종해 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 간에 이런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목적, 같은 사상, 같은 정신이 있어서 주의 사역에 서로 신뢰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5. 끝맺는 인사 (23-25절)

 

  2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함께 갇힌 에바브라가 문안한다고 했습니다 (23절).

  '에바브라'(Epaphras)는 이방인으로서 소아시아에 있는 골로새(Colossae) 태생입니다. 바울이 3차전도여행 중 소아시아 해변 쪽에 있는 에베소(Ephesus)에서 3년간 사역을 했습니다. 그 때 에베소에서 내륙쪽으로 약 160km 떨어진 리쿠스 계곡(Lycus Valley) 남안에 작은 도시 골로새에서 살던 에바브라가 빌레몬(Philemon)과 함께 바울에게 와서 복음을 듣고 성경을 배웠습니다. 에바브라는 빌레몬과 함께 골로새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고 골로새에서 서쪽으로 14km 떨어진 라오디게아(Laodicea)와 서북쪽으로 12km 떨어져 있는 히에라볼리(Hierapolis, Pamukkale)에도 복음을 전하여 교회가 생기게 했습니다. 그런데 골로새 지역에 이단들이 들어왔습니다. 크게 두 가지 형태의 이단 사상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는 율법주의였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영향으로 할례나 음식 등에서 유대주의적 특성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영지주의였습니다. 그들은 헬라(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금욕주의 경향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이원론 사고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의 신인양성(神人兩性)을 부인하고 육신의 죄가 영혼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론을 가졌습니다. 골로새교회의 지도자인 에바브라와 빌레몬은 바른 신앙을 가지고 그들을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잘못된 이론에 변증하는데 있어서는 신학적 지식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에바브라가 대표로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가서 그 사정을 보고하고 바울에게 더 배워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교회에 들어온 이단을 물리칠 목적으로 바울에게 좀더  배우기 위해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와서 함께 갇힌 자입니다.


  바울은 또한 또한 동역자 마가와 아리스다고와 데마와 누가가 문안한다고 했습니다 (24절). 바울의 동역자들이 골로새교회와 빌레몬에 대해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마가'(Marcus)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인데 유대식 이름은 히브리어로 '요한'이고 로마식 이름이 헬라어로 '마가'입니다. 그래서 '마가 요한'으로도 불립니다 (행12:5). 바울이 그에 대해 '바나바의 생질'이라고 한 것을 보면 (10절) 지중해의 구브로섬 출신의 레위족에 속한 것 같습니다 (행15:37,39). 그는 마가복음을 기록한 자입니다. 그의 집은 예루살렘에 있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의 모여 예배하며 기도하는 곳이었습니다 (행1:13, 12:12-13). 그는 예수님이 생존해 계실 때 청년으로서(막14:51) 예수님을 알았으나 나이가 연소한 관계로 직계 제자의 수에는 들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는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교회에 갈 때 같이 가서 바나바와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 수종자로 동행했습니다. 구브로섬 위, 소아시아 남단에 있는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일행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행13:13). 바울의 사역 방식이 자기에게 맞지 않아서일 수도 있을 수도 있고 여행 중 고난을 견디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도중에 세상적인 유혹이 들어와서 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마가 요한이 떠난 일로 인해 바울은 마음이 상당히 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2차 전도여행 때는 바울이 마가를 데려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바나바는 데려가기를 원했습니다. 아마 바울은 사역에 중심을 둔 것 같고 바나바는 사람에 중심을 둔 것 같습니다. 바울은 한 번 배반한 사람 다시 배반할 수 있고 그럴 경우 사역자들이 낙담하게 되고 사역에 막대한 손해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바나바는 마가가 자기의 생질(甥姪, 누이의 아들)로서 한 번 실수했더라도 기회를 줘서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결국 바나바와 바울이 심히 다투어 결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배를 타고 구브로로 갔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갔습니다 (행15:37-41). 바나바가 간 구브로는 1차 전도여행지로서 바나바의 고향이기고 하고, 바울이 간 수리아와 길리기아는 예루살렘 공회의 수신지로서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바울이 로마에서 감옥 생활을 할 때 그가 함께 있었고 바울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고 했습니다 (10절). 골로새교인들이 마가에 대한 명을 받았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마가에 대한 의심을 불식시키고 마가를 잘 영접해 달라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것입니다. 아마 마가가 뒤에 뉘우치고 로마에서 바울을 잘 도운 것 같습니다.  


  '아리스다고'(Aristarchus)는 데살로니가의 마게도냐 출신으로서 유대교에서 회심한 사람입니다. 그는 바울을 만나 바울이 3차전도여행 때 에베소에 같이 가서 사역을 하다가 바울이 데메드리오 소동으로 인해 체포되었을 때 함께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행19:29). 그리고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의 마지막에 드로아에서 다시 바울과 동행하여 예루살렘 회의에 참여했고 (행20:4,6),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호송될 때 함께 승선했습니다 (행27:2). 바울은 그에 대해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라고 했습니다 (10절). 바울이 아리스다고를 자신과 함께 갇힌 자라고 표현한 것에 대한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습니다. 에베소에서 데메드리오 사건으로 인해 함께 감옥에 갇힌 사실을 두고 한 말인지, 가이샤라에서 로마로 호송될 때 함께 동승한 사실을 두고 한 말인지,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수종든 사실을 두고 한 말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함께 고난당한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된 것에 함께 동참하는 자라는 것에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데마'(Demas)는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이 로마에서 일차로 투옥되었을 때 함께 있어서 골로새교회에 문안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석방되었다가 재차 투옥되었을 때는 누가와는 달리 바울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가 버렸습니다. 디모데후서4:10-11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재차 투옥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떠났는데 그 때 데마도 떠난 것입니다. 데마는 바울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의 부요와 즐거움을 좇아 데살로니가로 떠난 사람입니다. 세상에 빠져 아예 사역을 그만두고 떠난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역을 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많이 배워도 신앙적인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요일2:15). 세속적인 욕망을 지지 않아야 끝까지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레스게와 디도는 어떤 이유 때문에 바울을 떠났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데마'가 바울을 버리고 갔다는 말에 이어지고 '갔고'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보면 바울이 사역을 위해 파송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바울의 2차 투옥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더 이상 바울과 사역을 같이 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떠난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데마가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낼 당시인 1차 투옥 당시에는 함께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가'(Luke)는 이방인으로서 수리아(시리아) 안디옥 출신으로 여겨집니다 (Eusebius, Hist, Ⅲ4, 행6:5, 11:19-27, 13:13, 14:26-28, 15:1,2,30-40). 그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드로아에서 동행하여 빌립보까지 갔고, 3차 전도여행에서는 빌립보에서 동행하여 예루살렘까지 갔습니다 (행16:11-17, 20:6-16, 21:1-26). 그 후에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가는 배를 탈 때 동승했습니다 (행27장).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로마에 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석방되어 재차 투옥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떠났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그 때에도 바울에게 남아 바울을 도왔습니다. 디모데후서4:10-11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받는 의사'라고 했습니다 (골4:14). 그리고 그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의학적 용어가 많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눅14:2, 8:43-44, 행3:7, 9:33, 13:11). 그것은 누가가 의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시 학문의 중심지였던 다소(Tarsus)에서 의술을 습득한 것 같습니다. 그는 바울이 전도여행 할 때 의술로 동역한 것 같고 바울이 투옥되었을 때 주치의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 점을 보면 누가는 신의가 있었으면서도 자신이 부름받은 사명을 잘 감당한 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기능적 특질을 잘 개발하여 사역에 활용했고 성경도 그런 배경을 이용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바울은 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 심령과 함께 있을지라고 축복했습니다 (25절). 빌레몬과 그의 가족 그리고 교회에 주의 은혜가 있기를 축복한 것입니다.

 

<結言> 

  빌레몬서는 피상적으로 보면 바울이 빌레몬 개인에게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낸 편지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배경에서 바울이 주의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동역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의 섭리를 얼마나 믿는지, 문제 해결을 위한 시각이 얼마나 통합적인지, 당사자의 인격을 얼마나 세심하게 배려하는지 나타납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구원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희생적인 용서와 헌신적인 협력이 있어야 할 것이 암시적으로 호소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