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디모데후서 4:1-22

<題目> 디모데를 향한 최후의 권면


<序言>

  바울은 전 장에서 말씀을 지켜 행하려 하면 고난이 따른다고 했고 그렇지만 고난 가운데서도 말씀을 잘 지켜 세워 나갈 것을 권면했습니다. 본 장에서는 전도를 하려면 고난이 따르나 고난을 잘 견디고 전도자의 사명을 잘 감당할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최후의 순간을 기다리면서 하는 마지막 권면은 숙연함이 나타납니다. 내용구조는 전도자에 대한 권면 (1-5절), 생애 결산에 대한 고백(6-8절), 개인적인 당부(9-15절), 주의 동행에 대한 확신(16-18절), 마지막 인사(19-22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전도자에 대한 권면 (1-5절)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바울은 하나님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예수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한다고 했습니다 (1절).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서 엄히 명한다는 것은 명령의 중대성과 엄숙함을 암시합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재림할 때에 살아 있는 자는 휴거하고 죽은 자는 부활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백보좌 심판에서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명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과 재림하므로 이루시고 통치하실 나라를 말합니다. 그것은 데모데가 전도 사역을 잘 할 때에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했습니다 (2절). '전파하라'는 것은 대중 앞에서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모든 사람 앞에 담대히 전하라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는 것은 시간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전하고 싶든지 전하고 싶지 않든지의 의미가 강합니다. 군인이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준비를 갖추고 있는 모습을 반영하는 표현입니다. '힘쓰라' 끈질기게 권고하라는 의미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할 준비를 갖추고 심한 반대에 부딪힐지라도 항상 끊임없이 말씀을 전해야 함을 시사합니다. '오래 참음과 르침으로'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할지라도 인내함으로 전하고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경책하며'는 사람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증거를 제시하여 죄를 뼈저리게 각성시킴을 뜻합니다. '경계하며'는 죄인을 경책하는 과정에서 호되게 책망함을 뜻합니다. '권하라'는 '용기를 북돋우다' '위로하다'는 뜻으로 그릇된 길로 가는 자를 책망할 때 사랑으로 해야 함을 나타냅니다 (고전9:16).

 

  그리고 때가 이르면 사람이 바른 교훈을 쫓지 않고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는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했습니다 (3절). 말세가 될수록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본성을 충족시켜 주는 솔깃한 이야기만 좋아합니다. 복음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감각적인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그릇된 욕심을 충족시켜 주는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또 허탄한 신화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직무를 다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5절). 말이나 행위를 자제하고 고난을 잘 견디고 특별한 임무를 지닌 자로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켜 세울 때에 당연히 고난이 있는 것처럼 복음 전도인의 사명을 감당하려 할 때도 당연히 고난이 있는 줄 알고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마16:24).

 


       2. 생애 결산에 대한 고백 (6-8절)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디모데에게 전도 사역자로서 충성할 것을 권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의 맨 앞에는 ’(γα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입니다. 본문은 앞 절들에서 말한 이유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앞 절인 4:1-5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직무에서 말씀 전파와 오래 참음과 가르침과 경책함과 경계함과 권면함을 충성되이 할 것을 권했습니다. 본문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6절에 보면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떠날 시각이 가까웠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전도 사역을 하다가 첫 번째 투옥된 이후에 석방되었는데 이제 두 번째로 투옥되었습니다 (A.D.66-67). 바울은 이 두 번째 투옥 중에 이제는 석방되지 못하고 사형을 당할 것이라 예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전제와 같이 이미 벌써 부어졌다고 했습니다. 전제(奠祭, σπενδω)는 부어드리는 제사 방법 말합니다 (15:1-10). 구약시대의 제사 종류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드리는 방법에는 화제, 전제, 거제, 요제가 있습니다. 그 중 전제는 부어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제단 위에 희생제물을 올려놓고 그 위에 포도주를 붓는 의식입니다. 이 의식은 희생제사의 마지막 의식으로서 제물이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바울은 구약시대에 희생제물에서 마지막 의식으로 포도주를 부어 전제로 드렸던 것처럼 마지막으로 피 흘려 순교를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졌습니다 (물론 첫 번째 투옥되었을 때도 그런 의지를 가졌습니다. -2:17). 평생 하나님을 위해 복음전도 사역을 해왔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기 위해 순교를 결단한 것입니다.

 

   7절에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대 올림픽의 경기 내용을 비유하여 자신의 생애를 회술한 것입니다. ‘싸움에 해당하는 원형 아곤’(αγων)경기’ ‘싸움’ ‘투쟁등의 뜻으로 고대 올림픽 종목 가운데 레슬링이나 복싱 같은 격투경기를 말합니다 (고전9:24-25, 3:12,14, 12:1-3). 그래서 바울 자신이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것은 복음전도 사역에서 최악의 조건들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영적 전투를 했음을 의미한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사람들을 격동시켜 사역이 실패로 돌아가게 하려 했던 사탄의 역사에 대항하였고, 거짓 진리로 사역을 방해했던 거짓 교사들을 대항하여 바른 교의를 세웠고, 사역을 힘들게 했던 자기 속의 부패한 죄성과 더불어 싸워 이겨 나갔습니다. 그리고 달려갈 길의 원형 드로모스’(δρομος)노정’ ‘행로등의 뜻으로 고대 올림픽 종목 중 마라톤 같은 달리기 종류의 육상경기를 말합니다 (20:24, 2:2). 그래서 바울 자신이 달려갈 길을 다 갔다는 것은 복음전도 사역에서 열악한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해 사역을 감당했음을 의미하는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긴 복음 전도와 교회를 세우는 사명을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10-11). 그리고 믿음에 해당하는 피스티스’(πιστις)확신’ ‘신뢰의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믿음을 지켰다는 것은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자기의 신앙 양심에 따른 고백일 것입니다. 사도행전23:1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고 했습니다.

 

   8절에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후로는 의로운 재판장이 주실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했습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은 의로운 하나님을 가리키는데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옳으신 분으로서 재판도 옳게 하시는 분임을 말합니다. ‘의의 면류관은 믿음으로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로서 성화와 사역에 옳다 인정을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면류관에 해당하는 스테파노스’(στεφανος)는 영예의 상징으로 주는 화관을 말합니다. 당시 면류관은 고대 올림픽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는 월계수 나무 잎으로 엮어 만든 월계관이었습니다. 이는 왕관을 가리키는 디아데마’(διαδημα)와 구분되는 관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줄 면류관을 준비해 두셨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바울이 자신이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여 주실 영예를 주실 것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그것을 얻기 위해 그것을 목표로 평생 영적 전투와 헌신을 했음을 암시해 줍니다. 바울은 성화와 사역에서 전투와 열의를 가졌습니다. 성화에서 자기 죄와 죄성과 싸웠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히브리서12:4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고 했고, 고린도전서9:27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 했고 (7:15-24), 에베소서4: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고 했습니다. 또한 사역에서 숱한 고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열정으로 감당했습니다. 고린도후서11:24-27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했고, 디모데후서4:10-11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했고, 사도행전20:24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고, 빌립보서1: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된 것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라고 했습니다. 죽음 이후에 하나님이 상을 주시는 것은 바울 자신에게만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모든 성도에게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믿음으로 성화와 사역을 위해 살고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성도들에게도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자기도 죽음 후의 상을 얻기 위해 살았을 때 성화와 사역에 가치를 두고 살았던 것처럼, 성도들도 죽음 후에 상 받을 것을 목표로 성화와 사역에 가치를 두고 살 것을 바라는 마음이 묻어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성도는 인생에 있어서 성화와 사역을 최고의 가치와 목표로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인생을 마치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아 상을 얻는 기준은 성화를 이룬 것과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므나비유와 달란트비유가 잘 구분하여 나타내줍니다 (19:12-27, 25:14-29). 사람은 누구나 죽게 되어 있고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9: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14:12에는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벧전4:5)”고 했습니다. 우리가 언제 죽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잠언27:1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의학박사 레이먼드 무디(Ramond A. Moody)1950년대에 ‘Life after life’라는 책을 썼습니다. ‘사후의 세계’ ‘삶 이후의 삶등으로 번역됩니다. 그는 자신이 교수로 있을 때 어느 학생으로부터 자기 할머니가 수술 도중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경험을 들은 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경험을 한 사람 153명을 조사한 내용을 기록한 책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경험을 임사체험(臨死體驗, near-death expeience)이라고 하는데 그 임사체험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찾아다니며 인터뷰해서 조사하여 기록한 내용입니다. 그 책의 핵심 줄거리를 크게 말한다면 두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죽은 후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책에는 죽는 순간 스쳐지나가는 13가지 현상이 나와 있습니다. *의사들의 사망 선고를 듣게 된다 (의사가 사망 선고하는 소리를 들음. 신체 조직과 기능이 저하됨 느낌. 서서히 의식 잃어감). *검은 동굴 속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공간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듯한). *영혼이 이탈한다 (몸을 빠져 나간 영혼이 자신을 바라보는 경험).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다른 사람이 나타남. 자신이 생각하는 저승사자 모습). *시간순서대로 경험했던 일들이 떠오른다 (갑자기 빛이 나타나는데 그 빛은 인격을 가지고 있음. 이때부터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보기 시작하는데 인생사가 시간의 순서에 따라 파노라마처럼 스쳐감). 등입니다. 그 책에 소개된 한 사람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알콜 중독자 한 분이 술을 마신채로 운전하다가 역방향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연히 심한 충돌을 하였습니다. 그 후 자신이 운전대에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모습을 자기가 보았습니다. 앰뷸런스 소리가 나고, 교통경찰이 다가오고, 자신이 병원으로 실려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얼마 후 어두운 터널 같은 곳을 지나자, 밝은 빛이 다가오는 곳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저 멀리 감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분이 보였습니다. 자기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사람들의 반응이 두 가지였습니다. 한 무리는 그 빛을 본 순간 자기 죄들과 평생의 부끄러운 경험이 영화필름처럼 지나가기에 빛 되신 분을 감히 볼 수 없어서 반대로 도망갔습니다. 다른 한 무리는 빛 되신 분을 만나자 너무나 반가워 빨리 뵈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그 분에게 달려갔습니다. 참으로 행복하고 평안한 분위기였습니다. 그 분은 교통사고 나서 죽은 그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대가 땅에 사는 동안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였느냐?” “그대가 땅에 사는 동안에 사명을 얼마나 감당하였느냐?”

 

   둘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후에는 생활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임사체험을 한 사람은 그 체험에 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책에서 어떤 어린 사람은 말했다. 자기는 임사체험담을 오직 자기 어머니에게만 전했습니다. 죽음을 체험하고 얼마 후에 자기가 겪은 경험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자기가 어린 꼬마여서 자기 말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는 아무에게도 그 체험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임사체험을 목사님에게 말하려 했으나 목사님은 자기가 환상을 보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입을 닫아 버렸습니다.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을 말을 하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기 때문에 입을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누가 뭐라 하든 상관없이 자기가 원하는 생활을 합니다. 저자는 임사체험을 한 사람의 공통적인 세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고했습니다. *술이나 마약이나 도박같은 중독자들이 스스로 중독을 끊었습니다. *누구의 권함도 없이 교회를 찾아가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인 경우에도 기회만 되면 어려운 이웃을 찾아 돕고 스스로 착한 일을 마다하지 않고 행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죽게 되고 죽음 후에는 주님을 만나 과거의 모든 일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알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대로 인격을 만들기를 힘써야 하며, 하나님의 맡기신 사명을 따라 사역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에베소서5:16-17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주께 소망을 두고 믿음의 경주를 잘 해 가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빌립보서3: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고전9:26, 3:21). 근대 올림픽에서 육상경기는 트랙 끝에 사각 기둥으로 세워져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렸습니다. 육상경기에 참여하는 자는 높은 단으로 올라가 심판관에게 상으로 주어지는 월계관을 받을 영광을 바라보고 뛰었습니다. 오늘날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들도 상으로 주어지는 금메달을 얻기 위해 뜁니다. 인생의 경주에서도 상을 얻고자 하는 뚜렷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특히 썩지 아니할 영원한 영광을 얻고자 하는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잠언29:18). 바울이 각양 고난을 참고 세상의 출신 성분과 지위와 학식을 배설물처럼 여긴 것은 이 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고후11:24-27, 3:5-14, 딤후4:7-8). 모세가 애굽의 지위와 학술과 보화를 버리고 그리스도와 능욕받고 하나님 백성과 고난받기를 즐거워한 것도 그 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11:24-26).


   둘째, 얽매이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히브리서12:1"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했습니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복장을 최대한 가볍게 하고 있습니다. 경기가 격렬해질 때는 옷이나 신발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특히 기록경기는 가볍고 저항을 줄인 첨단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경주에서도 최대한 가볍게 해야 합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야 하고 얽매이는 것을 줄여야 합니다. 영적 경주에서도 죄와 죄책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다윗은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종일 신음했다고 했고, 죄를 회개할 때는 자유와 기쁨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32:3-4, 119:67, 71-72, 97-103).

 

   셋째, 절제를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9:25"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했습니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출전하기 전까지 피나는 훈련을 합니다. 그런데 그 훈련에 집중하기 위해 먹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철저히 절제합니다. 인생의 경주에서도 욕망을 절제해야 성공합니다. 신앙의 경주에서도 죄적 욕망을 철저히 복종시켜야 합니다. 바울은 그 부패한 죄성에 사로잡히고는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7:23-24). 마음속에 물욕과 정욕과 사욕이 있다면 그것에 얽매여 롯과 롯의 처나 삼손이나 데마처럼 실패하게 됩니다 (9:62). 디모데전서6:9"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4:10-11"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9:26-27절에는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 했습니다.

 

   넷째, 법대로 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2:5"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경기 법칙을 어겼을 경우에는 실격패 합니다. 금메달을 딴 후에도 법칙을 어긴 사실이 발각되면 금메달이 박탈되고 2위했던 선수가 금메달을 차지합니다. 적지 않은 선수가 경기 후에 부정이 발견되거나 약물 복용 사실이 발각되면 실격패 처리되었습니다. 인생에서도 법을 어기면 쇠고랑을 차게 되어 실패를 하고 맙니다. 신앙의 경주도 하나님의 법칙인 하나님 말씀대로 경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헌신적으로 했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지 못합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 공력이 모두 불타 버리고 맙니다 (고전3:12-15).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삼상15:23, 6:7-8, 14:21, 요일5:3).

 

   우리의 인생에서 신앙의 달음박질을 마쳐야 할 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습니다. 일반적 종말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언제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 알 수 없고, 언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때가 올지 알 수 없습니다 (27:1). 포도원에 한 시간 남겨 놓고 들어간 자처럼 일해야 합니다 (20:1-16).



       3. 개인적인 당부 (9-15절)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2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13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14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

  15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①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 했습니다 (9-12절).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고 있던 제자 디모데에게 속히 로마로 오라고 했습니다. 대신 에베소에는 두기고를 보냈습니다. '두기고'는 바울의 충실한 동역자로서(행20:4, 골4:7),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를 전달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엡6:21, 골4:17). 바울은 디모데를 로마로 오게 한 대신 두기고를 에베소에 파송하기로 한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로 하여금 로마로 속히 오게 한 것은 바울이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제자이자 동역자인 데모데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그에게 복음 사역의 중요성과 교회 사역을 위한 권면과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속히 오게 한 것은 자신의 주변에 교제하며 도울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10-11절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데마'는 바울의 동역자였으나(골4:14, 몬1:24) 후에 세상을 사랑하여 사역을 떠난 사람입니다. 데마는 바울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의 부요와 즐거움을 좇아 데살로니가로 떠난 사람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역을 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많이 배워도 신앙적인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요일2:15). 세속적인 욕망을 자지지 않아야 끝까지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갔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했는데 어떤 이유 때문에 바울을 떠났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데마'가 바울을 버리고 갔다는 말에 이어지고 '갔고'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보면 바울이 사역을 위해 파송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12절에서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고 한 것처럼 '보냈고'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레스게나 디도가 데마처럼 아예 사역을 그만 두고 세상으로 빠지지는 않았더라도 바울과 의견을 달리하거나 기 이익을 위해 바울을 떠나 사역을 한 것 같습니다. 어찌 되었든지 바울은 동역하던 사람들이 자기를 떠나므로 인하여 큰 상처와 배반감과 고독함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때에나 진리의 스승을 배반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고, 사역을 자기 주장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이고, 자기 이익을 앞세우려 하기 때문이고, 편안한 길로 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끝까지 함께 있었던 동역자는 '누가'였습니다. 11절에 "누가만 나와 함께 잇느니라"고 했습니다. '누가'는 의사출신으로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부터 바울과 함께 했으며 예루살렘과 아시아에서도 함께 활동했습니다. 특히 바울이 로마 옥중에 있을 때는 바울의 주치의로 대필자로 함께 했습니다. 누가는 참으로 훌륭한 바울의 제자이며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이 어려움에 처하자 모든 사람이 떠났지만 누가는 바울을 떠나지 않고 함께 했습니다.   

 

   ②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11절).

 

  11절 하반절에 보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속히 로마로 오라고 하면서 모두 떠나고 '누가'만 함께 있으므로 '마가'를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마가가 바울 자신의 일에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마가(Mark)는 요한이라고도 합니다. 히브리식 이름은 요한인데 로마식 이름으로 마가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아였습니다 (행12:12). 그는 유대인이며 구브로 출신이었고 예루살렘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골4:10, 행15:37,39). 그의 집은 부자였습니다. 그의 집은 큰 집으로서 2층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2층은 넓은 홀(큰 다락방)로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에 예수님과 12제자가 만찬을 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하고 음식을 장만할 정도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다음에 120명이 모여 기도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할 정도였고, 후에 헤롯 왕의 박해 때 베드로가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이 모여 기도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할 정도였습니다 (막14:15, 행1:13, 12:12). 그의 집은 여종을 두었을 정도였고, 잠을 잘 때 입는 잠옷을 값비싼 세마포로 짠 옷(베 홑이불)을 입을 정도였습니다 (행12:13, 막14:51). 그는 신앙적으로도 좋은 배경에서 자랐습니다. 집안이 유대인으로서 레위 족속의 후손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예수님과 12제자에게 만찬을 준비해 주고, 예수님이 죽은 후 120명이 기도할 수 있도록 집을 내어 주고, 베드로가 갇혔을 때에도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에게 기도할 수 있도록 내어 준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청년 때에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목격하고 오순절 성령 강림을 목격하고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이 모여 기도하는 것에 동참했습니다 (막14:15, 행1:13, 12:12).


  '마가'는 가룟유다와 대제사장이 보낸 무리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성만찬 장소인 마가의 다락방에 갔다가 예수님을 찾지 못하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게 된 것을 마침 잠을 자다가 깨어 보게 되었습니다. 마가는 그들보다 먼저 도착하여 사실을 알리려고 옷입을 새도 없이 베홑이불을 두른채 겟세마네 동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가롯유다와 몽치를 가진 무리들이 예수님을 잡았습니다. 마가는 자기도 붙잡히려 하자 베 홑이불(고급 잠옷)을 벗은 채 벗은 몸으로 도망했습니다 (막14:51-52). 마가는 후에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떠났을 때 전도여행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밤빌리아에서 고생이 심하자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행13:13). 그 후에 바울과 바나바가 2차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바울은 마가를 이전 경험 때문에 데려가지 않으려 했으나 바나바는 자기 생질인고로 데려가려 했습니다. 결국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심히 다투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역으로 떠나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 지역으로 갔습니다 (행15:36-37). 마가는 비겁자이고 배반자로서 복음 사역에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마가는 심각한 실패를 두 번이나 경험했지만 두번째 선교여행에서 외삼촌 바나바를 따라다니면서 조언을 받고 훈련을 받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인 사도 베드로에게 말씀을 배우게 됩니다 (벧전5:13). 그리고 베드로가 로마에 가서 사역을 할 때 베드로의 설교를 통역하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본문 디모데후서4:11에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데마, 그레스게, 디도, 두기고도 없고 누가 한 사람 밖에 없으니 마가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사역을 하다가 투옥되어 순교하기 직전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려오라는 부름을 받고 로마로 가서 바울이 부탁한 사역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거부했던 마가가 후에는 바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이 되었고 바울이 생각할 때 마가가 자신의 요구를 충분히 감당할 정도로 성숙하게 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순교한 후에 로마에 큰 박해가 일어나는데 그 때 로마에서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마가복음을 기록합니다. A.D.64년에 로마의 황제 네로가 로마의 대극장(Great Circus) 근처에 새 궁전을 짓고 싶어서 불을 지르도록 명령합니다. 그로 인해 로마의 14개 행정구역 중 대부분 불타고 4개의 구역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화재를 자신이 일으켰다는 소문이 돌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대화재를 그리스도인들이 일으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군대를 이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고문하고 사형에 처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그 때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3년 후에 바울도 붙잡혀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인도했던 사도들이 순교를 당하고 자기들도 언제 붙잡혀 죽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과 공포 속에서 지하에 숨어들어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마가는 그들을 격려하고 굳세게 해야 할 사명감을 느끼고 베드로에게 들었던 내용을 기초로 하여 마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도 가족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당했고 마침내 붙잡혀 로마 정권에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부활하였다는 내용으로 기록했습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도 예수님을 믿는 연고로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도 살아 계셔서 성령으로 고난의 현장 가운데 있는 그들과 함께 하시니 결코 흔들리지 말라고 격려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마가복음은 A.D.67-7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서 A.D.70년 경에 기록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그리고 A.D.85-90년 사이에 기록된 요한복음보다 먼저 기록된 최초의 복음서입니다. 심지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이 마가복음을 기준하여 기록한 복음서입니다. 마가는 그 위대한 마가복음을 기록한 후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이집트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4-5C의 바나바행전과 마가행전).  


  마가는 좋은 환경 속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연단되지 못했을 때는 신앙과 사역에서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사역자에게 상처를 주고 사역자들끼리 결별하게 하고 사역에 막대한 손해를 입혔습니다. 쓰임 받을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자신도 심한 자책감과 수치심과 절망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섭리로 성장하여 베드로와 바울의 로마 사역에 지대한 도움을 주었고 특히 마가복음을 기록하여 로마에서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바로 세우고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신앙의 유익을 얻게 했습니다. 마가의 실패는 오히려 겸손하게 하여 사도들에게 배우게 했고 사역자들을 이해하여 사역자를 진실로 돕게 했고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의 아픔을 느껴 위로하게 하는 동인이 된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의 상처와 용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사역에 헌신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 부모에게서 지금의 터어키 남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에 의해 이스라엘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가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신봉자가 되어 당시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기독교 핍박에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설교 때 그를 죽이는 데도 앞장을 섰습니다. 온 예루살렘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재가를 받아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까지 색출하여 체포해 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빛으로 나타나 둘러 비추었습니다. 놀라서 엎드려졌는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구시냐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했습니다. 땅에서 일어났으나 앞을 보지 못했고 동행인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까지 갔습니다. 그는 3일 동안 보지 못했고 먹지도 않았습니다. 아나니아가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해 주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해 달라는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는 안수기도를 받고 앞을 보게 되었고 음식을 먹었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받아들였고 그가 자기를 전도를 위해 부르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메섹에서 회당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하자 아라비아로 가서 전도하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때는 회심한지 3년 정도 지났을 때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전에 그가 예루살렘에서 했던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예루살렘교회에 구브로 출신으로서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믿고 자기 소유를 팔아 바치고 착하고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도들과 예루살렘교회 일원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그를 사도들에게 다메섹 사건과 회심에 대해 말하면서 소개했고 예루살렘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죽이려 하자 기독교인들이 가이사랴로 데려가 다소로 보냈습니다 (행9:1-31, 갈1:16-18). 한편 예루살렘교회에 핍박이 일어났을 때 흩어진 기독교인들이 지금의 시리아 지역에 있는 안디옥에 교회를 세지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안디옥교회가 이방인들로 가득 찼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는 사도들이 이를 확인하기 위해 신뢰하는 바나바를 보냈습니다. 바나바는 그 곳에서 성경을 가르치면서 다소에 있던 바울을 데려와 같이 사역을 했습니다. 이 때는 예루살렘에서 도망해온 지 10년 정도 지났을 때입니다. 소명의 확신이 있었으나  그 동안 사역에 부름을 받지 못하다가 13년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바나바를 따라 안디옥에서 1년 동안 사역을 했습니다. 그 기간은 사역자로서 많은 경험을 하며 배우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교회로부터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행11:19~13:3, 갈2:1).


  바울은 사역자에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3차례에 걸쳐 선교여행을 했습니다. 1차는 아시아(터어키 남부)를 중심으로 했고, 2차는 유럽(그리이스) 중심으로 하고, 3차는 1,2차에 다닌 곳을 재방문하는 것으로 했습니다. 바울은 1차 선교여행에서 동역자에게 상처를 받게 됩니다. 사도행전13:13에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요한'은 마가 요한을 말합니다. '마가'는 로마식 이름이고 '요한'은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마가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교회로 올 때 같이 와서 안디옥교회에서 같이 사역을 돕다가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파송을 받아 1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 보조 사역자로 같이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구브로섬에서 밤빌리아 버가에 이르렀을 때 마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가 왜 떠나 버렸는지는 기록되지 않아서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그 일로 인하여 바울은 상처를 받았고 상심이 컸습니다. 이유야 어떻든지 처음부터 함께 하지 않은 것보다 중요한 사역을 할 때 떠난 것이 더 큰 상처를 준 것입니다. 그런데 2차 선교여행을 떠나려 할 때 그 마가 문제로 또 한 번 상처를 받게 됩니다. 사도행전15:37-41에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사역자 문제였습니다. 바나바는 2차 선교여행에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하고 바울은 마가를 데리고 자지 말자고 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하고 바울은 마가를 데리고 가지 말자고 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마가가 조카(생질, 누나의 아들)이기 때문에 전에 실수했더라도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자신이 잘 지도하면 훌륭한 사역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번에 또 데리고 가게 되면 또 다시 그와 같은 일이 발생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다른 사역자들도 침체되고 사역에 큰 손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 합의를 보지 못하고 결별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떠나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떠났습니다. 또 한 번 큰 상처를 안고 2차 선교여행을 떠나야 했습니다.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갔는데 도중에 디모데와 누가도 합류했습니다 (16:1-5). 그리고 3차 선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갔다가 붙잡혀 로마로 호송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되었습니다. 하지만 재차 투옥되었습니다. 그 때 또 한 번 동역자들에게 상처를 받게 되었습니다. 본문 디모데후서4:10-11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친구이자 동역자(골4:14, 몬1:14) '데마'가 데살로니가로 떠났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사역을 떠난 것입니다. 동역자 '그레스게'도 갈라디아로 떠났고, 바울이 '나의 참 아들'(딛1:4)이라고 부른 동역자 디도도 달마디아로 떠났습니다. 그레스게와 디도가 무슨 이유 때문에 떠났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투옥되어 다시 나올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그 동안 사역에 지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떠났는지도 모릅니다. 바울과 함께 하는 사역에 이젠 비전이 없다고 생각하여 각자의 비전을 위해 떠났는지도 모릅니다. 어찌 되었든지 바울은 자신이 가장 힘들 때 신뢰하던 동역들이 자기를 떠나므로 인하여 큰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물론 바울 자신의 성격이나 지도력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었을 수도 있지만 결국 일생에 가장 신뢰하던 동역자들로부터 상처와 배반감과 고독함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의 상처와 용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사역에 헌신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 부모에게서 지금의 터어키 남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에 의해 이스라엘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가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신봉자가 되어 당시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기독교 핍박에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설교 때 그를 죽이는 데도 앞장을 섰습니다. 온 예루살렘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재가를 받아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까지 색출하여 체포해 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빛으로 나타나 둘러 비추었습니다. 놀라서 엎드려졌는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구시냐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했습니다. 땅에서 일어났으나 앞을 보지 못했고 동행인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까지 갔습니다. 그는 3일 동안 보지 못했고 먹지도 않았습니다. 아나니아가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해 주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해 달라는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는 안수기도를 받고 앞을 보게 되었고 음식을 먹었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받아들였고 그가 자기를 전도를 위해 부르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메섹에서 회당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하자 아라비아로 가서 전도하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때는 회심한지 3년 정도 지났을 때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전에 그가 예루살렘에서 했던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예루살렘교회에 구브로 출신으로서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믿고 자기 소유를 팔아 바치고 착하고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도들과 예루살렘교회 일원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그를 사도들에게 다메섹 사건과 회심에 대해 말하면서 소개했고 예루살렘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죽이려 하자 기독교인들이 가이사랴로 데려가 다소로 보냈습니다 (행9:1-31, 갈1:16-18). 한편 예루살렘교회에 핍박이 일어났을 때 흩어진 기독교인들이 지금의 시리아 지역에 있는 안디옥에 교회를 세지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안디옥교회가 이방인들로 가득 찼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는 사도들이 이를 확인하기 위해 신뢰하는 바나바를 보냈습니다. 바나바는 그 곳에서 성경을 가르치면서 다소에 있던 바울을 데려와 같이 사역을 했습니다. 이 때는 예루살렘에서 도망해온 지 10년 정도 지났을 때입니다. 소명의 확신이 있었으나  그 동안 사역에 부름을 받지 못하다가 13년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바나바를 따라 안디옥에서 1년 동안 사역을 했습니다. 그 기간은 사역자로서 많은 경험을 하며 배우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교회로부터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행11:19~13:3, 갈2:1).


  바울은 사역자에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3차례에 걸쳐 선교여행을 했습니다. 1차는 아시아(터어키 남부)를 중심으로 했고, 2차는 유럽(그리이스) 중심으로 하고, 3차는 1,2차에 다닌 곳을 재방문하는 것으로 했습니다. 바울은 1차 선교여행에서 동역자에게 상처를 받게 됩니다. 사도행전13:13에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요한'은 마가 요한을 말합니다. '마가'는 로마식 이름이고 '요한'은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마가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교회로 올 때 같이 와서 안디옥교회에서 같이 사역을 돕다가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파송을 받아 1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 보조 사역자로 같이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구브로섬에서 밤빌리아 버가에 이르렀을 때 마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가 왜 떠나 버렸는지는 기록되지 않아서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그 일로 인하여 바울은 상처를 받았고 상심이 컸습니다. 이유야 어떻든지 처음부터 함께 하지 않은 것보다 중요한 사역을 할 때 떠난 것이 더 큰 상처를 준 것입니다. 그런데 2차 선교여행을 떠나려 할 때 그 마가 문제로 또 한 번 상처를 받게 됩니다. 사도행전15:37-41에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사역자 문제였습니다. 바나바는 2차 선교여행에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하고 바울은 마가를 데리고 자지 말자고 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하고 바울은 마가를 데리고 가지 말자고 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마가가 조카(생질, 누나의 아들)이기 때문에 전에 실수했더라도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자신이 잘 지도하면 훌륭한 사역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번에 또 데리고 가게 되면 또 다시 그와 같은 일이 발생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다른 사역자들도 침체되고 사역에 큰 손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 합의를 보지 못하고 결별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떠나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떠났습니다. 또 한 번 큰 상처를 안고 2차 선교여행을 떠나야 했습니다.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갔는데 도중에 디모데와 누가도 합류했습니다 (16:1-5). 그리고 3차 선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갔다가 붙잡혀 로마로 호송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되었습니다. 하지만 재차 투옥되었습니다. 그 때 또 한 번 동역자들에게 상처를 받게 되었습니다. 본문 디모데후서4:10-11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친구이자 동역자(골4:14, 몬1:14) '데마'가 데살로니가로 떠났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사역을 떠난 것입니다. 동역자 '그레스게'도 갈라디아로 떠났고, 바울이 '나의 참 아들'(딛1:4)이라고 부른 동역자 디도도 달마디아로 떠났습니다. 그레스게와 디도가 무슨 이유 때문에 떠났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투옥되어 다시 나올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그 동안 사역에 지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떠났는지도 모릅니다. 바울과 함께 하는 사역에 이젠 비전이 없다고 생각하여 각자의 비전을 위해 떠났는지도 모릅니다. 어찌 되었든지 바울은 자신이 가장 힘들 때 신뢰하던 동역들이 자기를 떠나므로 인하여 큰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물론 바울 자신의 성격이나 지도력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었을 수도 있지만 결국 일생에 가장 신뢰하던 동역자들로부터 상처와 배반감과 고독함을 경험한 것입니다.


  바울은 상처를 회복했습니다. 본문 디모데후서4:11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갔다가 붙잡혀 로마로 호송되어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풀려나 로마에서 복음전도 사역을 하다가 2차로 붙잡혀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바울의 나이가 많았고 병도 들었고 이제 사형이 내려질 것이라는 암시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터어키 지방에 있는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고 있던 디모데를 로마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와 사랑의 교제를 하면서 신학과 목회에 대해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 당부를 하면서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바울 자신이 죽은 다음에 로마의 복음 사역을 그에게 맡기려는 것인 것입니다. 1차 전도여행에서 도중에 사역에서 떠났다고 해서 2차 전도여행에서 그를 사역에서 배제시키려고 바나바와 결별까지 했는데 이제 자신의 남은 일을 그에게 맡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바울이 마가를 용서하고 그도 주의 일에 쓰임 받을 사역자로 인정한 것입니다. 사역에서 가장 힘들게 했던 마가를 용서하고 사역자로 인정한 것을 보면 말년에 바나바, 데마, 그레스게, 디도도 용서하고 인정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는 말년에나마 상처와 분노의 대상을 용서하고 인정하므로 회복한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쓴 글을 보면  에베소서4:32에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라고 했고, 골로새서3:13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했습니다. 이를 보면 바울은 주님이 자기를 용서해 주심을 생각하면서 자기에게 상처를 준 자들도 용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교회를 파괴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복음전도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자신을 주님이 용서하여 구원해 주시고 성령을 받게 해 주시고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고 복음 전도 사역을 맡겨 주신 것을 생각하여 용서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사랑하거나 신뢰하는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분노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 스스로 내적 고통을 겪으며 부정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제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을 생각하며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삶에서 잘못을 함에도 불구하여 여전히 아직 포기 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여 북돋으시는 주님을 생각하여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우릴 용서해 주신 주님을 생각하여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분노에서 해방되어 내적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용서의 은혜를 베풀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마태복음6:12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그리고 이어서 마태복음6:14-15에서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③겉옷과 책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13절).

 

  13절에 "네가 올 때에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가보'(Carpus)는 본절 외에는 언급된 곳이 없는 사람으로서 자세한 것을 알기 어려우나 드로아 지역에 거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것 같고 바울이 드로아를 방문했을 때 그 집에 들른 것 같습니다. 이제 로마에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21절) 월동을 위해 겉옷(외투)를 가져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책은 가죽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책'은 일반적으로 파피루스(papyrus)로 만든 종이 두루마리입니다. 그런데 가죽 종이에 쓴 것이라 함은 가죽으로 만든 종이 두루마리를 말합니다. 가죽으로 만든 종이 두루마리는 더 고가로서 특별한 책에만 사용되었습니다. 아마 구약 히브리어 성경이거나 구약 헬라어 번역 성경(70인역)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성경을 보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가르치기 위해 좋은 질로 된 성경을 가지고 오도록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성경을 보고 듣고 배우고 묵상하고 지키는데 힘써야 합니다 (계1:3).

 

   ④구리 장색 알렉산더를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14-15절).

 

  바울은 자기에게 해를 많이 입힌 구리 장색 알렉산더를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구리 장색'은 구리(銅) 세공업자(細工業者)입니다. '알렉산더'는 구리 세공업자로서 디모데전서1:19-20의 알렉산더와 동일인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다가 배교하여 이단자가 된 사람으로서, 바울이 전한 말씀을 훼방하고 바울이 로마에서 첫번째 재판을 받을 때 바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주께서 그의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맡기 것입니다. 민족적으로도 하나님의 구원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족속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내에서도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를 대적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킨 무리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개인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대적하고 훼방하는 자들은 심판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움 때문입니다. 바울은 알렉산더와 같이 배교하여 사단에게 넘어간 자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처리되길 바란 것입니다.

 


       4. 주의 동행에 대한 확신 (16-18절)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자신이 처음 변명할 때에 자기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자기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16절). '처음 변명할 때'는 로마에 처음 투옥되었을 때 재판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변론을 한 때를 말합니다. 바울이 로마에 1차로 투옥되었을 때 함께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10-11절에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외부적으로 잘될 때는 많은 사람이 동역했지만 감옥에 갇혀 위기에 빠지자 모두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들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데 당연한 현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옛말에 '주식형제는 천인유요 급난붕우는 일인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표적을 행할 때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따른 자들이 5,000이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는 세 자자만이, 심판 받는 자리에는 두 제자만이 십자가 아래에는 한 제자만 따라갔습니다. 주의 길을 가는 데에 당연히 어려움도 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행14:22).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다 떠났지만 주님이 곁에 서서 강건케 했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사자의 입에서 건지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κηρυγμα)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17절). 바울이 1차로 로마에 투옥되었으나 주께서 함께 하시므로 변론을 성공적으로 하게 되었고 결국 출옥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사자의 입에서 나온 것과 같은 극적인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법정 재판에서 변론을 성공적으로 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 역설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석방된 것은 로마 지역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우리도 복음 사역 감당하다가 혼자라는 느낌이 들어도 주께서 함께 하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 사역 감당하라고 모든 위경에서 건져 주실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위경에서 벗어나면 복음 사역에 헌신해야 합니다.

 

  바울은 주께서 모든 악한 일에서 건지시고 또한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18절). 바울의 생애에는 많은 위경들이 있었지만 주님은 그를 그 모든 위경에서 건지셨습니다 (행18:9,10, 23:11, 27:23-24). 바울은 지상에서 주께서 자기를 위험에서 건지셨을 뿐 아니라 천상의 하나님 나라에도 이끄실 것을 확신하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마지막 순교 시점에서 로마와는 대조되는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진 것입니다.  

 


       5. 마지막 인사 (19-22절)

 

  19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20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21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22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19절). '브리스가(부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부부입니다. 브리스가가 아내이고 아굴라가 남편입니다. 그들은 본도(Pontus) 출신으로서 로마에 살았으나 글라우디오 황제의 반 유대주의 정책으로 로마에서 쫓겨나 고린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장막 제조업자로서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동역하므로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고 (행18:1), 바울의 전도여행에 동행하기도 했고 (행18:18), 바울을 헌신적으로 도왔습니다 (롬16:3-4).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특별히 바울을 도왔으며 에베소에서도 바울을 섬겼습니다 (1:16-18). 바울은 복음 전도 사역에서 도움을 주고 헌신한 자들을 끝까지 기억하고 문안을 했습니다. 복음 전도하는 사역자가 어려울 때 돕는 것은 복음 사역자에게 평생 잊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기도와 간구와 도고와 축복의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바울은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렀고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기 때문에 겨울전에 오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문안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주께서 디모데의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20-22절). '에라스도'는 고린도의 재무이고, '드로비모'는 에베소 출신인 두 사람은 바울의 사역을 도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있고 드로비모는 밀레도에 있기 때문에 디모데가 빨리 왔으면 하는 의도를 나타낸 것입니다. 겨울이 되면 지중해 전역이 파도가 높아 항해하기 어려우므로 겨울이 되기 전에 오라는 것입니다.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는 로마 교회 교우들로서 그들의 이름으로 안부를 전하는 것입니다.

 

<結言>

  바울은 로마 감옥에 2차로 투옥되오 순교를 앞두고 가장 사랑하는 제자이자 동역자인 디모데와 교제하길 원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와 교제를 하면서 하나님의 일에 대해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 일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바울같이 끝까지 복음 사역을 놓지 않는 사역자가 되어야겠고 디모데 처럼 모든 사람이 진리의 스승을 배반하는 가운데서도 진리의 스승을 돕는 사역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