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베드로전서 3:1-22

<題目> 부부와 고난에 대한 권면


<序言>

  3장에서는 가정의 부부에 대한 권면으로 시작하여 고난에 대한 권면으로 마칩니다. 부부에 대한 권면은 주로 남편에 대한 아내의 태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살펴보면 남편을 아내보다 높은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는 크게 이방 가운데서 고난받는 성도 곧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들에 대해 위로하고 권면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고난받는 성도에 대한 위로와 권면이라는 큰 주제에서 보아야 합니다. 2장 후반부에 이방 사회 공동체에서 성도가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권면했습니다. 거기에서 이방 불신제도와 까다로운 상전에 대해서도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2:13-20). 3장에 나오는 부부에 대한 권면에서도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당시 가정들은 가부장적이었고 특히 믿는 아내가 믿지 않는 이교도 남편과 함께 살면서 고난을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믿지 않는 이교도 남편과 살면서 믿는 아내로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배경을 이해하지 않으면 본 장이 마치 남편의 권위를 옹호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부부에 대한 권면 (1-7절), 성도 전체에 대한 권면 (8-12절), 고난받는 자에 대한 권면 (13-17절), 고난받는 자의 표본 (18-22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부부에 대한 권면 (1-7절)

 

  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1~6절은 아내에 대한 권면이고 7절은 남편에 대한 권면입니다. 이 권면들이 권위나 권리 면을 규정짓는 말씀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권리면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동등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배경을 생각해야 합니다. 필연적으로 가부장적 사회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야 지혜로운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이해하려 해야 합니다. 그리고 창조원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기능적 혹은 사역적 관점에서의 서로 협력관계에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결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주종관계나 상하관계나 우열관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① 아내에 대한 권면 (1-6절)

 

  아내들에 대한 권면의 핵심은 남편에 대한 순복입니다. 남편에 대해 순복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도를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아내의 행위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곧 믿지 않는 남편이 믿는 아내를 비방하더라도 믿는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해야 하는 데 그것은 믿지 않는 남편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않는 남편이라도 믿는 아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흠없고 순결한 행위를 보고 믿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들은 아내의 윤리적 행위로 아내가 믿는 기독교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머리와 옷과 장신구들로 외모를 단장하려고 하기 보다는 마음을 잘 단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겉 사람을 단장하기 보다는 속 사람을 단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속 사람의 단장은 온유함과 안정됨입니다. '온유함'은 남편에 대해 부드럽게 대하는 면을 말합니다. 남편의 태도나 요구를 부드럽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믿는 아내는 삼가 조심하여 온유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잠11:22, 잠15:1) '안정됨'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이 남편을 보필하는 것을 말합니다. 믿는 아내는 타인에 의해 일어나는 동요에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을 유지하여 남편을 잘 보필해야 합니다. 그 안정됨은 '안정된 심령으로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고 한 것을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을 생각하며 변함없이 남편을 위해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5~6절에 보면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둔 부녀들도 그와 같이 남편에게 순복하므로 자기를 단장했다고 합니다. 6절에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라도 아브라함을 주라 칭했습니다 (창18:12).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격인 것처럼 (롬4:11, 갈3:7), 사라도 모든 믿는 자의 어머니격입니다 (갈4:22-31). 믿는 자의 모델인 사라가 아브라함을 잘 순복한 것같이 현재의 믿는 아내들도 남편을 순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믿는 아내를 사라의 딸로 삼았으니 선을 행하며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들이 선을 행하는 것을 방해 하고 난폭하게 할 때가 있을 것이나 그런 가운데서도 두려워 하지 말고 침착하게 용기를 가지고 순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② 남편에 대한 권면 (7절)

 

  1~6절은 아내가 남편을 순복해야 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남편들은 아내와의 관계를 주종관계나 우열관계나 차별관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본적으로 남편과 아내의 인권은 동등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따라 기능적 차이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남편의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특히 본 장에서는 믿지 않은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 당시 관념을 능동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7절은 남편이 아내를 귀히 여겨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귀히 여기기 위해서는 지식을 따라 동거해야 합니다. 첫째는 아내는 저 연약한 그릇이라는 지식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남자 입장에서 대하지 말고 남자 보다 연약한 자로 알고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아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한 자이며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함께 받아 누릴 자로서 동반자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내에 대해 그렇게 대해야 기도가 막히지 않게 됩니다. 아내와 불화하면 신앙생활이 어렵습니다. 또한 아내를 고통스럽게 하고 기도하는 것은 외식과 같아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습니다. 아내를 귀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존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귀히 여기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역을 귀히 여기는 것이고 자기 영혼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아내를 사랑하여 귀히 여기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인성과 관련된 부분이 있고 지식에 관한 부분이 있습니다. 본문은 지식에 관한 부분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아내가 혹은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잘해주려는 것이 오히려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여자는 본질적으로 남자와 다릅니다. 남자는 화성에서 온 사람이라면 여자는 금성에서 온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다릅니다.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그 성향이 다릅니다. 같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남자의 독처함을 해결하기 위해 남자를 돕는 배필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창2:18-23). 그러기에 남자에게 없는 것을 있게 했습니다. 반대로 남자에게 있는 것은 없게 했습니다.

 

  육체적인 부분은 남자는 강하나 여자는 약하고 부르럽고 섬세합니다. 심리적인 부분은 남자는 이성적이고 분리 중심적이고 목적 지향적인 반면에 여자는 감성적이고 관계 중심적이고 과정 중심적입니다. 행동주의 심리학 연구에서 보면 남성과 여성은 염색체(Y)가 다른 것처럼 어렸을 때부터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자동차를 가지고 놀고 여자는 인형을 가지고 놉니다. 남자는 지도를 잘 보는데 여자는 책상 위의 물건을 잘 찾습니다. 남자는 길을 찾을 때 방향 중심으로 찾는데 여성은 지형지물 중심으로 찾습니다. 남성은 한 귀로 듣지만 여성은 두 귀로 듣습니다. 영적인 부분에서도 다릅니다. 은혜받는 면이나 은사가 나타나는 면이 다릅니다. 남자는 종합적이고 논리적이고 결과적인데 은혜를 받지만 여자는 지엽적이고 감성적이고 과정적인데 은혜를 받습니다. 남자는 지식과 지혜와 능력 축사 등의 은사가 주로 강하게 나타나지만 여성은 방언 통역 예언 봉사 위로 등의 은사가 많이 나타납니다. 같은 은사라 할지라도 남자는 둔하지만 강하게 나타나고 여자는 약하지만 섬세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자라도 이런 성향의 차이를 알지 않으면 늘 불화하게 됩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차별이 아니라 화합과 온전을 이루게 해야 합니다.      

 


       2. 성도 전체에 대한 권면 (8-12절)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베드로는 지금까지는 사회 구조와 관계 속에서 성도가 시민으로서, 종으로서,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취해야할 태도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이제 시편34:1-17에 근거하여 공동체 전체에게 결론적인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즉 성도의 공동체적 의무를 들고 있습니다.  

 

   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8절).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고 그것이 율법의 대강령으로서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13:34, 눅10:27). 베드로도 베드로전서1:27에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4:8에서는 무엇보다도 서로 열심히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형제가 고통 중에 있을 때 서로 불쌍히 여기고 체휼하는 것입니다. 체휼한다(συμπαθειs)는 것은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일원이 고통을 당할 때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관점은 여러 가지입니다. 원인론적인 관점과 목적론적 관점과 상관론적 관점이 있습니다. 원인론적인 관점은 죄를 지어서 고통이 왔다고 보는 것이고, 목적론적인 관점은 하나님이 연단시켜 복 주시고 영광받으시려는 목적에서 왔다는 관점이고, 상관론적 관점은 고통당하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고 같이 나누려고 하는 관점입니다. 체휼한다는 것은 상관론적 관점입니다. 그것이 섬기는 정신입니다. 주님도 우리에 대해 체휼하는 분이었습니다 (히4:15). 공동체가 한 몸으로서 다른 지체가 고통을 받으며 같이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고전12:26-27), 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어야 합니다 (롬12:15).

 

   ②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8절).

 

  겸손은 마음을 낮은 데 두는 것입니다. 로마서12:16에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했습니다. 겸손은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2:3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고후11:22-30, 12:1-9). 겸손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자신을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와 같다고 했고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했고 죄인 가운데 괴수라고 했습니다 (고전15:8-9, 딤전1:15).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를 높이십니다. 잠언18:12에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5:5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5:6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모본을 보이셨습니다 (빌2:6-11).

 

  사람이 잘될 때 교만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못해놓고 망하는 경우보다 잘해놓고 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잘하고 나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울왕도 처음에는 겸손했으나 주변국들을 물리치고 강해지자 교만해져서 하나님 명령을 거역하기에 이르렀고 그 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기 시작했습니다 (삼상15:22-23). 히스기야왕도 처음 왕이 되어 겸손했으나 앗수르 군대를 물리치고 질병이 낫자 마음이 교만해져 하나님 은혜에 보답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멸망을 경고받습니다 (대하32:25). 느부갓네살왕도 바벨론이 강해지자 자기가 한 줄 알고 자기 것인 줄 알고 자기 영광 나타내려 하다가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단4:30-34). 그러므로 사람 앞에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③ 악인에게 복을 빌라는 것입니다 (9절).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했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불신자들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이지를 말한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악을 행하고 욕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같은 방법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복을 빌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해 부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복을 빌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마5:44). 바울은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했습니다 (롬12:14). 로마서12:17-21에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④ 악한 말을 그치라는 것입니다 (10절).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을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고 그 입술로 궤휼을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시편34:12-16절의 인용입니다. 베드로는 구약의 내용을 종말적인 의미로 확대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영생의 삶을 추구하고 장차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모하는 자는 마땅히 악한 말을 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3:5-8에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잠언13:3에는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선한 신념을 확고히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풍성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말을 하지 말고 선한 말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4:29에서는 "무릇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든지 공동체에 대해서든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말을 삼가고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⑤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11절).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선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선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7:16-18에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컹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2:34-35에는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선한 생각을 하고 선한 계획을 하고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⑥ 화평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11절).

 

  화평을 구하고 화평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화평'(peace)은 헬라어로 에이레네(ειρηνη)로서 히브리어의 '샬롬'(shalom)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는 하나님으로 인한 평안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고 하나님의 진리를 터득하면 평안을 얻습니다. 마치 어둠 가운데 있다가 빛이 환하게 비취면 평안과 기쁨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안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근거로 다른 사람에게 평안을 전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평안을 누리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공동체에 화평이 있게 해야 합니다. 곧 화평케 하는 자 (the Peace maker)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5:9에 "화평케 하는 자(ειρηνοποιοι; Peacemakers)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개념에서 '아들'의 개념은 아버지의 얼굴을 닮은 자이고 아버지의 일을 하는 자이고 아버지의 땅을 상속받아 기업으로 누리는 자입니다. 그런 관념에서 보면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inheritors)인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고 하나님의 일을 맡고 하나님의 언약적 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축복은 화평케 하는 자의 것입니다.

 

  12절에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감찰하고 보호합니다 (출2:25). 하나님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입니다 (출3:7). 하나님의 낯은 악한 자를 대적하기 위해 바라봅니다 (시34:16).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의로운 행위를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3. 고난받는 자에 대한 권면 (13-17절)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

 

  의(義)를 위해 고난받는 자에 대해 권면하였습니다. 17절에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2:19-20에 보면 애매히 받는 고난이 있고 악을 행하므로 받는 고난이 있고 선을 행함으로 인한 고난이 있는데 선을 행하므로 고난받고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악을 행하므로 고난받는 것은 자기의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지만 선을 행하므로 받는 고난을 하나님 앞에 연단되고 복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므로 유익한 것입니다. 14절에는 의를 위해 고난받으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5:10-12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섬기는 것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것 때문에, 말씀을 지키는 것 때문에, 신앙양심을 지키는 것 때문에, 맡은 사역을 이루기 위해 받는 고난은 하나님의 상이 큽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신앙인격의 성장과 내세의 상급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①열심으로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13절).

 

  열심히 선을 행하면 아무도 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13절). 주의 눈이 의인을 향하고 주의 귀가 그의 간구에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12절, 출2:25, 3:7). 선을 행하는 자는 전혀 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육체의 해를 당할지라도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보호 안에 있기 때문이고 허락된 해는 신령상 유익을 위해 허락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8:28, 약1:2-4, 벧전1:6-7). 종말적으로도 일시적으로 악한 자가 성도를 핍박하여 승리한 것 것지만 종국에는 성도가 승리합니다 (계13-14장). 그런 의미에서 궁극적으로는 악한 자가 선한 자를 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일서5:18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②사람을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4절).

 

  14절 하반절에 보면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라고 했습니다.  인용구 이사야8:12에 보면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사람 자체를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10:28). 그리고 핍박과 죽음을 두려워 하지 말라야 합니다 (행4:19).

 

   ③그리스도를 주로 삼아야 합니다 (15절上).

 

  15절 상반절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인용구 이사야 8:13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 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거룩한 분으로 인정하고 그를 두려워 하라는 것입니다. 곧 본문은 그리스도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핍박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주권을 하라는 것입니다. 잠언3:6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했고, 베드로전서5:6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했습니다.

 

  ④대답할 말을 항상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15절下).

 

  15절 하반절에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은 생각과 생활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소망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비그리스도인은 특히 핍박자들은 그리스도인에 대해 의문을 가집니다. 자신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무엇에 소망을 두고 사는지 의문을 가지고 묻기도 합니다. 그래서 항상 무엇에 소망을 두고 사는지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다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답할 때에 온유함으로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그렇게 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그리스도인들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한 진리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들이 보지 못한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합니다 (딤전3:9).

 

  ⑤선한 양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16절).

 

  16절에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양심'은 직관과 영교와 함께 영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양심'은 교육과 관습과 문화 등의 인습적 환경에 의해 달라 질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한 '선한 양심' '착한 양심' '깨끗한 양심'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따르는 양심을 말합니다. 21절에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신앙 양심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 양심에 예민해야 합니다. 양심이 화인 맞은 자처럼 되거나 더럽혀 져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범사에 이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행23:1).

 


      4. 고난받는 자의 표본 (18-22절)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위에서 의를 위해 고난 받을 것을 권면했습니다. 18-22절은 고난받은 자에 대한 모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로운 분이지만 불의한 죄인들의 죄로 인하여 대신 죽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18절).

 

  ① 예수님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18절下).

 

  8절 끝에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육과 영으로 나누어 육은 죽고 영이 살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육체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싸르키(σαρκι)와 '영으로는'에 해당하는 프뉴마티(πνευματι)는 여격 명사인데 도구를 나타내는 여격이 아니라 영역을 나타내는 여격입니다. '육'은 죽기 전의 생명의 영역을, '영'은 부활한 후 생명의 영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예수님은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했습니다 (19-20절).

 

  19절에 '저가 또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하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내용을 카톨릭에서는 예수님이 죽은 후 연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하고, 영국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죽은 후 지옥에 갔던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해입니다. 본문에 대해 여러 해석들이 있지만 받아들일 만한 두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성령으로 노아를 통해 그 시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해석입니다. 그렇게 볼 때는 본문의 '옥'을 이 세상에 대한 상징으로 봅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십자가 구속을 완성하고 부활하므로 승리한 사실을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했다는 해석입니다. 그렇게 볼 경우는 지옥에 있는 영들을 믿게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에게 선포하여 알려지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20절에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고 했습니다. 첫번째 해석을 따를 경우 실제로 노아시대에 하나님이 홍수를 내리기 전 120년 동안 기회를 주어 심판과 구원 메세지를 전했는데, 하나님을 순종하는 8명은 방주에 들어가 물이 떠 받치므로 심판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은 홍수 때에 물로 심판을 받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이 구원 얻은 자들에게는 구원의 도구가 되었고 심판받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두번째 해석을 다를 경우 전 세대를 거쳐 복음이 제시되었는데 복음을 받아 들인 자는 천국에 가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지옥에 갔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경우 노아 시대의 불순종한 사람들을 지옥에 간 사람들에 대한 대표적 상징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21절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노아 시대의 '물'은 심판 받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도구였지만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구원의 도구였습니다. 왜냐하면 물로 심판할 때에 그 물이 방주에 들어가지 않은 자들은 죽이는 것이 되었으나 방주에 들어간 자들은 방주를 떠 받쳐 올리므로 생명을 구한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물의 상징성은 신약시대에 세례의 상징성과 비슷합니다. 세례 때의 물이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과 부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죄씻음 받은 표에 대한 의식으로서의 상징입니다. 그 세례의 물은 외부적인 육체의 더러운 것을 씻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정결케 하여 하나님을 좇아가게 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③ 예수님은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22절).

 

  22절에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로운 뜻을 위해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시고 승천시켜 하나님 우편에 서게 했습니다. 모든 권세가 복종하게 한 것입니다. 빌립보서2:6-11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의를 위한 고난에 대한 표본이며 결국입니다.

 

<結言>

  베드로는 소아시아에 사는 디아스포라들이 당하는 개인적인 고난을 이해하며 앞으로 당할 전체적인 박해를 내다보며 권면했습니다. 특히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당하는 고난이 의로운 고난임을 전제하고 의로운 고난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의로운 고난의 표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 고난받으므로 영광에 들어간 것을 제시했습니다. 우리는 의로운 고난을 두려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극복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 말씀을 지키고 신앙양심을 지키고 사명을 감당할 때 오는 고난을 잘 이겨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