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베드로전서 5:1-14
<題目> 마지막 권고와 인사
<序言>
본 장은 신앙 공동체 생활을 위한 몇가지 권면을 하고 더불어 결론적 권면과 작별인사로 끝을 맺습니다. 불신 사회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다양한 고난들이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고난들도 많은데 신앙 공동체 내에서 고난이 있으면 견디기 힘듭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고난을 잘 견디기 위해서는 신앙 공동체 내에서의 생활이 강건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마지막 장에서 신앙 공동체의 강건함을 위해 권면을 하면서 작별 인사를 합니다. 내용구조는 장로들에 대한 권면(1-4절), 회중들에 대한 권면 (5-11절), 문안과 축복 (12-14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장로들에 대한 권면(1-4절)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베드로는 교회 장로들을 권면하면서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고 했습니다 (1절).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을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서 그것을 증거할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행5:32, 10:39, 요21:15-18, 행1:8).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 사역에 합당한 영광을 얻을 자입니다 (4:13). 이 말을 한 것은 베드로 자신이 교회 장로들과 동역자임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교회 장도들과 같은 위치에 있고 같은 사역을 하고 같은 영광을 바라보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한 것은 베드로가 교회 장로들을 동역자로서 이해하는 마음으로 권면하려는 의도입니다.
'장로'(πρεσβυτερουs)는 연장자(elder)의 의미와, 직분(presbyter)의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 성경들에서는 대부분 elder로 번역했습니다. 1-4절에서 장로에 대해 말하고, 5절에서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서로 겸손으로 허리 띠를 띠라~"고 했는데 '젊은 자들'(νεωτεροι; younger; 연하의, 젊은이)이라고 한 것을 보면 elder의 의미를 가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사역할 때 당시에는 교회 지도자들이 일반적으로 나이가 많은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표현이 가능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2-3절에서 장로에게 권면하는 내용을 보면 presbyter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로의 기원은 구약시대 때부터 시작됩니다. 장로는 구약시대 때부터 사용해온 명칭입니다. 족장시대에는 족장 위치에 있는 사람을, 광야시대에는 지휘관 위치에 있는 사람을, 왕정시대에는 정치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을, 중간기에는 회당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을 장로라고 했습니다. 이 명칭은 신약시대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교회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을 장로라 했습니다 (행11:30, 21:18, 14:23). 초대교회에서는 '감독'(επισκοποs; overseer, bishop)이라는 명칭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딤전3:1, 딛1:7). 장로가 신분과 지위에 관련된 명칭이라면 감독은 사역적 위치와 관련된 명칭으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오늘날은 장로와 목사라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교회법에서 장로를 치리장로라고 하고 목사를 교훈장로라고 합니다. 장로교회에서는 법적으로 장로와 목사를 모두 장로라 하고 그들이 당회(감리교에서 말한 당회와 다름)를 구성하여 교회를 운영해 나갑니다. 장로는 교인들 가운데 선출되어 교회의 행정적인 일들을 담당하고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고시를 합격한 다음 노회나 총회에서 안수를 받아서 임명되며 교회의 교훈적인 사역을 합니다. 장로와 목사는 서로 견제하는 위치가 아니며 협력하는 위치입니다. 장로교회가 스코트랜드와 네델란드에서 시작된 배경들을 보면 장로는 한 교회에 있으면서 교회를 돌보았고 목사는 순회하면서 말씀을 가르며 교리적인 면을 감독했기 때문에 서로 교회를 온전케 하기 위해 협력하는 동역자 관계였습니다. 오늘날은 초대교회 때나 장로교가 시작된 때와 많이 다른 상황에 있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사역적이 분담으로 본다면 장로와 목사가 직분상 따로 있고 그러면서도 항상 같이 시무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장로는 사역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목사는 교훈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모든 사역과 교훈이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사역을 하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장로의 임무는 양무리를 치는 것입니다. 2절에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주님의 양을 치라고 했습니다 (요21:16). 장로의 위치는 양무리를 치는 목자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양무리를 양육하는 직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치는 주된 일은 양에게 꼴을 먹이고 양이 짐승이나 도적으로부터 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하며 양이 추위와 질병으로부터 해를 입지 않도록 돌보는 것이며 양이 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장로의 자세는 ①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해야 합니다 (2절). 사역을 마지못해 억지로 하지 말고 단 마음으로 자원해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성령의 은혜를 따라 자원해서 해야 합니다. ②더러운 이(利)를 위해 하지 말고 즐거운 뜻으로 해야 합니다 (2절). 돈을 벌기 위해서 하지 말고 좋은 뜻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자기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헌신적인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③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양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3절). 자기에게 맡겨진 대상에 대해 권세로 다스리려 하지 말고 본이 되어 좇아오게 해야 합니다. 사역자의 모범은 다스리는 데 있지 않고 섬기는데 있으며 군림하는데 있지 않고 헌신하는데 있습니다. 장로가 그렇게 목자의 임무를 잘 감당할 때 목자장인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4절). 사역이 힘들지만 잘 감당하면 선한 목자장 되시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영원한 가치가 있는 상을 주십니다 (딤후4:7-8).
2. 회중들에 대한 권면 (5-11절)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①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 (5-6절)
'젊은 자들'(νεωτεροι; younger; 젊은이)은 '장로'(πρεσβυτερουs; elder; 연장자)는 들에게 순복하라고 했습니다 (5절上). 위의 내용을 볼 때 단순히 젊은 이가 연장자에게 순복하라는 의미라 하기 보다는 교인이 장로(감독)에게 순종해야 할 것을 가리킵니다. 교회 공동체의 회중은 지도자를 순종해야 합니다. 주께서 그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엡2:20). 뿐만 아니라 그들을 붙들고 운영해 가십니다 (계2:1, 1:20). 그들을 교회 감독(επισκοποs; overseer; 관리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들에게는 합당한 은사 곧 조정과 통합과 관리하는 은사를 주셔서 은사대로 배치시킵니다. 그들을 통해 말씀을 전달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를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삼상15:20).
순종하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 띠를 띠라고 했습니다 (5절中). 교만한 자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세운 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세운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고집대로만 하려 하기 때문에 절대로 순종할 수 없습니다. 사울왕이 불손종한 것은 왕이 된 후 마음이 교만해졌기 때문이고 책망을 듣고도 완고하게 고집 부리며 거역한 것도 교만 때문입니다 (삼상15:23). 그래서 자기 교만과 고집을 꺾어야 겸손하고 온유한 자가 됩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자가 되어야 비로소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것도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뛰어났다는 것은 모세의 순종하는 면을 두고 한 말입니다 (민12:3).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 자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면을 두고 한 말입니다 (마11:29, 고후1:19, 빌2:5-11).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5절下, 약4:6).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붙들어 주시고 구원해주십니다 (시10:17, 147:6, 149:4). 그래서 겸손 자에게는 재물과 지혜와 영예와 영광과 생명이 따릅니다 (잠11:2, 22:4, 29:13). 그래서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고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입니다 (잠18:12). 사단도 교만하여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타락했다가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났고 (유1:6) 사울왕도 교만하여 불순종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삼상15:23). 느부갓네살왕도 교만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가 회개하므로 회복되었습니다 (단4:28-37).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면 때가 되면 높이신다고 했습니다 (6절).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 분이 하는 일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가 낮추면 낮아지지 않을 자가 없고 그가 높여 놓으면 높아지지 않을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려면 자신의 무능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이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력한 자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철저히 순종하는 자들은 모두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한 자들입니다. 모세는 입술이 뻣뻣한 자라고 했고 (출4:10), 이사야는 입술이 부정한 자라고 했고 (사6:5) 예레미야는 아이라 했고 (렘1:6), 바울은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요 죄인 가운데 괴수라고 했습니다 (고전15:8,9, 딤전1:5). 하나님이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②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했습니다 (7절).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염려'(μεριμναν)는 내면에 있는 근심, 걱정, 고민, 번민 등을 말합니다.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불필요한 관심을 쏟고 집착하고 신경쓰고 초조해 하고 불안해 하고 두려워 하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염려는 외부적 상황에 대한 인식 때문에 올 수도 있고 내면의 상태 때문에 올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권고하시기 때문입니다. '권고'(μελει)는 관심을 가지고 돌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과 그들이 당하는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염려를 인간 실존의 본질이라고까지 합니다. 인간은 염려하는 존재로서 염려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혜와 능력이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염려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실재로 일어나지 않은 일들로 염려합니다 (杞憂). 그로 인하여 영혼과 마음과 육체의 고통을 당합니다. 잠언15:13에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했고, 잠언17:22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단이 우리를 망하게 하는 데 사용하는 방편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상황을 악하게 만들고 속에서 염려가 일어나게 하여 스스로 좌절하여 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8절).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글에서도 같은 권면을 했습니다. 빌립보서4:6-7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바울 자신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서를 쓸 때엔 병들어 있었고 재판을 앞두고 있을 때였고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을 때였습니다.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빌립보교인들도 이 일로 인하여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와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보편적인 기도를 말하고, '간구'는 필요(need)를 구체적으로 구하는 기도를 말하고, '감사함으로 아뢰라'는 말은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생각하라는 의미가 있는 동시에,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선한 결과를 이루어 주실 것을 생각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롬8:28, 마6:25-34).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고 했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은 이성으로 상상할 수 없는 평안을 말합니다. 위험의 암시를 느낄 때 염려함으로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나 염려를 주께 맡기도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그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③깨어 마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8-9절).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8절). 4:7에는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 때문입니다 (8절). 그러므로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9절上). 9절 하반절에는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첫째는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가리킬 때도 있고, 둘째는 인간의 불신 문명과 문화를 가리킬 때도 있고, 셋째는 악령의 지배 하에 있는 영역을 가리킬 때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든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마귀의 공격으로 인한 고난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24:9, 요15:18-19).
악령은 사단과 마귀와 귀신이 있습니다. 악령은 본래 선한 천사로 지음받았으나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하늘 나라에서 쫓겨 났습니다 (유6, 벧후2:4). 그래서 하늘 나라에 있지 못하고 지상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지상의 공중 권세 잡은 자자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참람된 말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하고 교회를 쓰러뜨립니다. 그리스도인을 공격하여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이간질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을 방해합니다. 공격의 방법은 가치 예측을 불허하는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며 우리의 가장 약점들을 공격합니다. 어떤 때는 달콤한 것으로 유혹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고통으로 공격하기도 합니다 (고후11:14, 벧전5:8-9). 이 악령들은 자기들의 결국을 알고 자기들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가 될 수록 더욱 발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우리는 마귀를 우리 힘과 지혜로 이길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10:4에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陣)'을 파하는 강력(δυνατα)이라"고 했습니다. 그 '강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능력입니다 ('mighty through God'-KJV, 'divinely powerful'-NASB). 영적 전쟁에서의 싸우는 강력한 무기는 첫째 말씀입니다. 에베소서6:17에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그 자체에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사단을 물리쳤습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말씀으로 사람을 거듭나게 했고, 말씀으로 병을 고쳤고, 말씀으로 환경을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행하면 그 말씀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에 사역을 앞두고 광야에서 40일 동안 기도할 때 사단의 유혹을 어떻게 이겼는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4:1-10). 둘째는 마가복음9:29에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22:40에는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 받게 합니다.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합니다. 마귀의 계략을 알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혜를 얻게 합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었을 때 한 기도, 다니엘이 사자굴을 앞두고 한 기도,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한 기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왕하19:14-19, 20:1-3, 단6:10, 마26:36-39).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로 마귀의 역사를 대적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야고보서4:7에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했습니다.
한편 베드로는 10-11절에서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위로와 권면을 마치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행하시는 일을 언급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을 더욱 온전케 하고 굳게 하고 강하게 하고 견고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여러 원인이 있습니다. 고난은 죄 때문에 올 수도 있고 애매히 올 수도 있고 선을 행하므로 올 수도 있습니다 (벧전2:19-20). 어떤 경우이든지 하나님은 그것을 더욱 온전하고 강하게 하는 계기로 삼습니다 (벧전1:6-7, 약1:2-4).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3. 문안과 축복 (12-14절)
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13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14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12절에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1장 1절에서 5장 11절 까지는 '실루아노'라는 사람에게 대필시키고 12-14절은 친필로 쓴 것입니다. '실루아노'는 '실라'라고도 합니다. 실라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동행 한 자입니다 (행15:22-33, 15:40, 18:5). 그는 베드로에게도 '신실한 형제'라고 부를 만큼 베드로의 사역에 도움을 준 자입니다. 베드로는 그를 통해 권면한 내용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 은혜에 굳게 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13절에는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은 옛부터 세속적 도시의 대표적인 단어로서 로마를 지칭해서 한 말입니다 (계17:5, 18:2). 로마에 있는 교회가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안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도 문안한다고 했습니다. '마가'는 본명이 마가요한으로서(행12:12,25) 바나바의 조카(생질)입니다 (골4:10). 그는 바울의 1차 전도여행 때 동행했으나 2차 전도여행에는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2차 전도 여행을 떠나려 할 때 바나바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 밤빌리아에서 한가지로 행하지 않은 마가를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하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갔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습니다 (행15:36-41). 뒤에 바울이 투옥되었을 때 시중을 들어 바울에게 유익한 자가 되었 (딤후4:11), 그 후에는 마가는 베드로의 제자가 되었고 베드로로부터 '아들'이라고 부름을 받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바울과 디모데와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딤전1:2, 딤후1:2).
14절에는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했습니다. 이런 표현은 바울이 많이 사용했던 표현이기도 합니다 (롬16:16, 고전16:20, 고후13:11, 살전5:26). 입맞춤은 초대교회에서 사용되었던 인사법으로서 2세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3세기 이후에는 남녀가 구분되어 행해졌으나 그것이 언제까지 행해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서로 친밀하고 다정하게 인사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평강이 있을 지어다'고 축복했습니다. '평강'은 히브리어의 '샬롬'이며 헬라어로 '에이레네'입니다. 평강은 하나님 은혜로 말미암는 평안입니다.
<結言>
베드로는 로마에서 소아시아에 흩어져 고난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지막으로 신앙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권면했습니다. 장로에 대해, 회중에 대해 권면했습니다. 끝으로 문안과 축복으로 글을 맺었습니다. 오늘날 성도 개개인이 고난을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합며 극복해야 하며 공동체적으로도 서로 위로하며 극복해 나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