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서론>
1. 기록자
본서의 저자는 사도 야고보입니다(1:1). 1세기경 야고보(James)라는 이름은 아주 흔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야고보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막6:3)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마4:21)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눅6:16). 본서를 기록한 야고보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주의 동생인 야고보는 신약성경에 계속적으로 언급되어왔고(마13:55, 행1:13, 고전15:7),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행15장). 사도행전21:17-25와 갈라디아서2:12에 묘사된 주의 동생 야고보의 특성이 실천적 신앙의 면모가 나타나는데 본서의 특성과 유사하고, 또 사도행전15:13-29에 수록된 야고보의 연설이 어조와 어휘 면에서 본서와 흡사하다는 점에서 주의 동생 야고보가 본서를 기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인 오리겐(Origen), 유세비우스(Eusebius), 제롬(Jerome) 등도 본서가 주의 동생 야고보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증거했습니다.
2. 기록 연대
기록 연대는 A.D.60년 경입니다. 1:2-12, 5:10-11에 보면 본서는 환난과 시험이라는 정황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야고보는 로마 황제 네로(Nero, A.D.54-68) 당시에 순교했습니다. 야고보가 본서를 기록할 때는 적어도 A.D.68년 전, 야고보 자신이 순교를 당하기 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서의 주제인 이행칭의 사상이 로마서의 이신칭의 사상이 전제되고 있다는 점에서 야고보서는 로마서가 기록된 A.D.57년 이후일 것입니다. 1세기 사학자 요세프스는 야고보서가 A.D.62년에 기록되었다고 했습니다.
3. 수신자
수신자는 흩어져 있는 유대인 성도입니다. 야고보서1:1에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고 했습니다. 12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를 말하므로 유대인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창49:28). 수신자가 유대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2:1에는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수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1:1에 "흩어져 있는~"이라고 했습니다. 수신자가 한 지역에 살지 않고 흩어져 있는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예루살렘교회가 말씀과 기도와 교제와 봉사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 이후 지속된 박해로 인해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와 사마리아와 베니게와 구브로와 수리아와 안디옥까지 이르게 됩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자신들만 은혜생활을 하고 주의 명령(행1:8)인 선교를 하지 않으니까 환란과 핍박이 임하게 하여 각 지로 흩은 것이고 그들이 흩어져 사는 지역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됩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이었던 그들에게 신앙적 권면을 위해 서신을 기록한 것입니다.
4. 기록 목적
①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를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당시 유대 지방의 정치적 상황은 로마의 총독들에 의해 다스려 지던 때였습니다. A.D 60-62년에 다스리던 총독 베스도(Festus) 때에는 바울의 재판 문제로 유대인 지도자들과 총독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더욱이 당시 황제였던 네로(Nero, A.D.54-68)는 기독교에 대해 전면적으로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 성도들이 박해를 피해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곳에서도 여러 고난을 겪고 있었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들을 위로하고 인내하도록 권면할 필요를 느끼고 본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②공동체 생활을 하는 성도를 지도하기 위함입니다.
당시 흩어져 유대 공동체 생활을 하던 디아스포라(흩어진) 사람들이 믿음에 대해 오해하고 행하지 않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성도간의 사랑이 식어지고 말과 행동이 거칠어져서 교제가 단절되는 현상들이 나타났습니다. 야고보는 그런 상황에 대한 보고를 접하고 그들에게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줄 필요를 느끼고 본서를 기록했습니다.
5. 바울서신과 본서와 관계
로마서의 주제가 이신칭의(以信稱義)라면 야고보서는 이행칭의(以行稱義)입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빌립보서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를 말하고 있고 (롬3:28, 갈2:16, 빌3:9), 야고보서에서는 '사람이 믿음으로가 아니라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행칭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약2:24). 바울의 주장과 야고보의 주장이 서로 모순되는 듯 해 보입니다. 그러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고 서로 보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이신칭의 공식은 항상 유대교의 특권의식과 논쟁하는 상황에서 나타납니다. 바울이 '일반적인 행위'가 아닌 '율법의 행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는 의를 획득하기 위한 통로로 간주되었던 율법을 거부하고 믿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신칭의론은 이방인 개종자들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한 약속에 진정한 상속자들이 될 수 있다는 권리를 옹호하려는 독특하고도 제한된 목적을 위해 창출되었습니다.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충분한 상속자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신칭의론이 자칫 상실될 뻔 했던 이방인 크리스천의 권리가 보호한 것입니다.
야고보가 말한 이행칭의 공식에서 '행위'는 주로 '일반 행위'를 말한 것입니다. 일반 행위와 관련된 행위는 1:4와 2:14을 포함하여 11번 사용됩니다.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위가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의 양식조차 없는데 너희 중에 누가 그들에게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라' 하고 말하면서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행위'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일반 행위를 말합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는 율법의 행위를 말하기 보다는 단지 기독교적 사랑의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 성도들이 믿음만 강조하고 서로 사랑의 행위를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는 사랑의 행위를 나타내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바울의 사상과 야고보의 사상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용어의 다른 사용법을 통해 각기 다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사상과 야고보의 사상의 경우는 양자 택일할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주로 '(기독교적) 믿음'을 옹호하고 '(유대교적) 행위'를 비판하는 반면, 야고보는 주로 '(유대교적) 믿음'을 비판하고 '(기독교적) 행위'를 옹호하고 한 것입니다. 곧 바울은 기독교적인 믿음을 강조한 것이고 야고보는 기독교적인 행위를 강조한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고 야고보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에게 당연히 사랑의 행위를 나타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두 강조점은 모순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