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야고보서 1:1-27
<題目> 시험과 믿음에 대한 교훈
<序言>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핍박이 일어나므로 인해 로마 제국 각지에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환난과 시험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공동체 생활에서 사랑을 나타내지 않으므로 공동체가 건강하게 세워지지 못했습니다. 야고보는 우선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진정한 믿음은 행위로 나타내야 한다는 관점을 이해시킬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전반부는 환난 가운데 있는 그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는데 집중하고 후반부에서는 믿음의 행위에 대해 가르칩니다. 1장은 환난 가운데 있는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신앙을 권면합니다. 내용의 구조는 문안 인사(1절), 시험에 대한 교훈(2-18절), 거듭난 자의 새 생활(19-27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문안 인사 (1절)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①발신자는 야고보입니다.
본문의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초대교회에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많습니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는 세 사람이 있다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주의 동생 야고보가 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복음서에 나오는데 예수님의 제자 요한의 형제입니다 (마19:2, 17:1, 막3:17, 5:37). 그의 아버지 세베대는 어부로서 여러 채의 선박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기 잡는 사업을 위해 여러 삯군을 고용하고 있었습니다 (막1:20). 따라서 세베대의 야고보는 아버지의 부(富)로 인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18:15). 그는 갈릴리 바다에서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름을 듣고 형제 요한과 함께 배와 그물을 두고 예수님을 좇아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성미가 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마4:21, 22), 그로 인해 '우뢰의 아들'로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제자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했습니다. A.D.44년에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처형당했습니다 (행12:1-3).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예수님의 12제자 명단에 나오는 것 외에는 언급되지 않은 인물입니다 (마10:3, 막3:18, 눅6:15, 행1:13).그는 예수님의 제자 마태의 형제로서 (막2:14, 행1:13) 초대교회의 문서를 보면 열심당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열심당원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에 의하면 그는 한 때 훌륭한 애국자였고, 후에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고, 금욕적 자기 수양에 힘썼던 자였고, 12제가 가운데 기도를 가장 많이 하는 제자였고, 시리아에서 전도를 하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와 돌에 맞아 죽게 되었는데 숨이 끊어지지 않자 유대인들이 그를 톱으로 켜서 죽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신약 성경에서 단순히 '야고보'라고만 했습니다 (1절, 행12:17, 15:13, 21:18, 고전15:7, 갈2:9, 12, 유1:1). 그는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다음에 낳은 아들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지상에서 사역을 하는 동안에는 예수를 믿지 않았지만 (요7:5),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보고 (고전15:7), 성령강림을 기다리던 사도들과 진실한 여인들의 모임에 참여하였습니다 (행1:13-14). 그 후에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행12:17, 15:4-29, 21:18, 갈2:19). 그는 예루살렘 지도자로서 예루살렘교회 출신들이었던 디아스포라들을 위로와 권면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본 서신을 기록한 것입니다.
②야고보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야고보는 자신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종'의 개념은 자주권, 자의권, 소유권이 없는 자입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그 뜻에 따라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위로와 권면을 하는 것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뜻에 의한 것임을 시사하는 표현입니다.
③수신자는 흩어져 있는 12지파입니다.
야고보가 본 서신을 보낸 대상자들은 '흩어져 있는 12지파입니다' 이들은 '12지파'라고 한 것을 보면 유대인 출신을 말합니다. 그리고 2:1에는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라고 한 것을 보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고 '흩어진' 자들이라고 한 것을 보면 유다 예루살렘에 있지 않고 다른 지방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를 말합니다.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α)는 '흩어짐'의 뜻입니다. 곧 팔레스틴 밖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흩어진 사건은 크게 세 번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B.C722년 앗수르의 침략으로 북이스라엘이 패방할 때이고 (왕하17:6), 두번째는 B.C.586년 바벨론의 침략으로 남유다가 패망할 때이고 (왕하21:11,26), 세번째는 로마의 팔레스틴 정복 이후 예루살렘에 박해를 가할 때입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지속적인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와 사마리아와 베니게와 구브로와 수리아와 안디옥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들의 지도자인 야고보는 그들이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여러 시련 가운데 있다는 사실과 공동체 생활에서 사랑이 결여되므로 인하여 나타난 모순들을 해결해 주기 위해 본 서신을 쓰게 됩니다.
2. 시험에 대한 교훈 (2-18절)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①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2-4절).
여러 가지 시험(trial)을 당할 때에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고 허락한 것 것이기 때문입니다 (4절). 시험이 올 때 기뻐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한 목적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험을 허락하신 것은 낮추고 시험하여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장래에 평안과 소망을 주려 함입니다. 정금 같은 믿음이 나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귀하여 주 오시는 날에 영광과 칭찬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입니다 (신8:16, 욥23:10, 히12:10, 벧전1:7). 로마서5:3-5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민족적으로 세대적으로 환난과 고난과 시험을 주신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험과 고난을 통해 선한 목적을 이루어 가신 이유는 고난을 통해서만 정결케 되고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아니면 낮아지지 않고 깨어지지 않고 죽어지지 않습니다. 인격의 찌꺼기가 빠져 나가지 않습니다. 인격의 모난 부분이 깎여 가지 않습니다 (욥23:10). 자신이 부족한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죄가 그쳐지지 않고 하나님 말씀이 귀한 줄 알지 못합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시119:67).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행14:22).
시험 가운데 있을 때 가장 중요한 인격적 덕목은 인내입니다. 전에 김현봉 목사님은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참는 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인내해야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허락한 기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단1:5,12, 룻1:4, 계2:10, 렘29:10, 계13:5). 그러므로 이미 시련 가운데 있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계13:10). 하나님의 정한 때가 되면 풀어지게 됩니다 (계14:1-5). 본장 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②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5-8절).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개역 성경에서 '시험'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페이라조메노스(πειραζομενοs)는 영어에서 세 종류로 번역됩니다. trial(시련), test(평가), temptation(유혹)이 있습니다. 2절부터 말한 '시험'은 trial(시련)의 개념으로 사용된 용어입니다 (NASB,RSV,NIV).
시련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다양한 시련과 고난과 역경을 당할 때 필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지식'은 사람과 사물과 사건에 대한 인식하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지혜는 그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련 가운데 있을 때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고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리를 터득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자기에 대해 어떤 뜻을 가지시고 자기 생애에 어떻게 관여하시는지 터득해야 합니다.
지혜를 구할 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하여 구해야 합니다. 만일 그 지혜가 부족하다면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믿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인색하지 않고 풍성하게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빈번히 구해도 번거롭게 여기거나 책망하지 않습니다.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관대하게 대하시는 분입니다. 사실 시련 가운데 있는 성도가 그 시련을 믿음으로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지만, 하나님은 성도가 간절히 원하는 것 이상으로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구하지 않기 때문에 주시지 않을 뿐입니다. 구하지 않는데 주시는 것은 신령상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4:2-3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시련 가운데 있을 때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의심하면서 구하면 얻지 못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 의심하면서 구하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을 수 없습니다. '의심하다'(διακρινομενοs)는 '사이에'(δια)와 '분리시키다'(κρινω)의 합성어로서 어떤 문제와 상황에 대해 양쪽으로 저울질하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마음이 두 쪽으로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합니다. 두 마음을 품는 자는 정(定)함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이랬다가 나중에는 저랬다가 하여 매우 불안정합니다. 방향과 방법에 대해 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해도 결국 자기 마음대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과 방법을 느끼지 못하거나 느낀다 해도 그 쪽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 어떤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련 가운데 있을 때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하고, 하나님께 구하되 하나님께 대해 의심하지 말고 구해야 합니다. 곧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응답은 그 사람의 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③ 높아짐을 자랑해야 합니다 (9-11절).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9절). '자랑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본형은 카위카오마이(καυχαομαι)로서 '기뻐하다'는 의미입니다 (rejoice-KJV). '낮은 형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위와 육체와 물질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자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양보하거나 손해보거나 모욕당하거나 멸시당하거나 유린당하거나 핍박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고 양심을 쓰고 사명을 감당하려 하다가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딤후3:12).
그러나 주께서 높여 주십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본 절을 "이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는 형제가 있거든 기뻐하십시오. 주께서 높여 주실 것입니다."고 번역했습니다. 신앙생활 때문에 낮아진 사람은 주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마가복음10:29-30에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디모데후서4:7-8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富)한 형제는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10절). 부한 형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위와 건강과 물질에서 어려움을 당하지 않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부한 자들은 스스로 낮아지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부는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방편으로서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므로 그것을 추구하거나 그것에 만족하거나 그것 때문에 교만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한 그리스도인이 낮아져야 할 이유는 인생과 인생이 이룬 일과 인생이 모은 물질이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10절下)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집니다 (11절). 베드로전서1:24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라고 했습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아침 안개와 같습니다 (약4:14). 이 세상의 형적은 다 지나가고 맙니다 (고전7:31). '화무십일홍이요 세무십녀과'(花無十日紅, 勢無十年果)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건강과 권세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젊었을 때는 못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50대가 되면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60대가 되면 활동에 장애가 오게 되고 70대가 되면 죽지 못해 삽니다. 우리의 연수는 70입니다. 아무리 건강해도 80입니다 (시90:10). 아무리 힘있고 건강해 보이고 아름다워 보여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달라집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흰머리가 나고 눈이 어두워지고 이가 빠지고 목소리가 쇠해지고 작은 소리에 잠을 깨고 메뚜기도 짐이 되고 짧은 거리에도 쉬었다 걷고 작은 일에도 섭섭함을 느낍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자녀들이 모여들어 서로 잘하려 하고 조문객들이 왕래하고 하다가 그 영혼이 떠납니다. 육체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전12:1-8). 그 동안 이루어 놓은 것이 무슨 소용 있으며 모아놓은 것이 무슨 소용있습니까?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생명을 취하여 가시면 아무 것도 가져갈 것이 없습니다 (눅12:16-21). 사실 그 전에도 하나님이 불어버리면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사야40:6-7에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그네로 있을 때 두려움으로 지내야 합니다 (벧전1:17). 청년의 때에 창조가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12:1-2). 썩지 않는 약식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요6:27). 가난하든지 부요하든지 물질에 집착하지 말고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부요하면 부요한대로 하나님의 듯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가난하면 인내하여 연단받아야 합니다. 부요하면 교만하지 말고 그 썩을 것으로 썩지 않는 영원히 남는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습니다 (빌4:12).
④ 참아야 합니다 (12절)
개역 성경에서 '시험'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페이라조메노스(πειραζομενοs)는 영어에서 세 종류로 번역된다고 했습니다. trial(시련), test(평가), temptation(유혹)이 있습니다. 그런데 2절에 나온 '시험'은 trial(시련)의 개념으로 사용된 용어입니다 (NASB,RSV,NIV). trial(시련)은 환난과 역경과 고난의 현상이고, test(평가)와 temptation(유혹)은 그 원인입니다. 고난의 원인은 하나님께서 test의 개념으로 평가하거나 성장시키려는 목적에서 주는 경우도 있고, 사단과 마귀와 귀신이 temptation의 개념으로 유혹하여 멸망시키려는 목적에서 가하는 경우도 있고 test와 temptation이 함께 종합적으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test의 개념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 족자 이삭을 바치라고 한 경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여 역경을 당하게 한 경우 등입니다 (창22:1-18, 신8:2,16). temptation의 개념은 사단이 에덴 동산에서 뱀을 통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경우, 사단이 40일 금식기도를 하시는 예수님을 유혹한 경우 등입니다 (창5:1-5, 마4:1-11). test와 temptation이 함께 오는 경우는 욥이 고난을 당한 경우 (욥1, 42장), 종말에 교회와 성도들이 당할 환난의 경우입니다 (계13, 14장). 욥의 경우를 보면 사단은 욥의 재산, 자녀, 건강 등을 공격하여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려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단의 공격을 허락하여 욥을 평가하고 연단시키고 성장시키려는 목적에 이용합니다. 또 종말에 있을 환난을 보면 전무후무한 환난이 있는데 그 환난은 사단이 3년반(42달,1260일) 동안 적그리스도를 통해 핍박하고 거짓선지자를 통해 유혹으로 되어집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단에게 그 기간동안 핍박할 권세를 허락한 것은 그 환난을 통해 알곡과 곡식을 나누듯이 신자와 불신자를 나누고 신자를 더욱 정결케 연단시켜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게 하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본절 12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시험'은 trial(시련)의 개념으로 사용된 용어입니다 (NASB,RSV,NIV). 이 시련의 원인은 위에서 말한대로 test의 의미일 수도 있고, temptation의 의미일 수도 있고 (KJV), test와 temptation가 함께 있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원인에서 온 시련이든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위한 목적을 가지십니다. 어떤 원인에서 온 시련이든 참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는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원인에서 온 시련이든 잘 참고 견디면 하나님께서 인정하게 되고 약속하신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마19:29, 막10:29-30).
그러므로 시련 가운데 있을 때 가장 중요한 인격적 덕목은 인내입니다. 전에 김현봉 목사님은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참는 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시련 가운데 있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계13:10, 14:12). 인내해야 할 이유는 첫째는 하나님의 복 주시기 위한 선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8:16, 렘29:11, 욥23:10, 벧전1:6-7, 약1:3-4). 하나님께서 그 선하신 목적 때문에 섭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5:3-4, 욥23:8-14). 오히려 유익이 되도록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8:28). 둘째는 하나님께서 허락한 기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단1:5,12, 룻1:4, 계2:10, 렘29:10, 계13:5). 하나님의 정한 때가 되면 풀어지게 됩니다 (계14:1-5). 본장 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개역 성경에서 '시험'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페이라조메노스(πειραζομενοs)는 영어에서 세 종류로 번역된다고 했습니다. trial(시련), test(평가), temptation(유혹)이 있습니다. 그런데 2절부터 말하고 있는 '시험'은 trial(시련)의 개념으로 사용된 용어입니다 (NASB,RSV,NIV). trial(시련)은 환난과 역경과 고난의 현상이고, test(평가)와 temptation(유혹)은 그 원인입니다. test(평가) 하나님께서 평가하고 성장시키기 위해서 주는 시험이고, temptation(유혹)은 사단과 마귀와 귀신이 유혹하여 멸망시키기 위해서 하는 시험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시험은 temptation(유혹)을 말합니다. 그런데 악령들로부터 temptation(유혹)을 받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곧 욕심입니다. 욕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επιθυμιαs (lust-KJV.NASB, desire-NIV)는 악한 뜻에 대한 열망 곧 욕망을 말합니다.
13절에 "사람이 시험(temptation)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temptation)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temptation)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시험당할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유혹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혹을 받지도 않으시고 유혹하시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16-17절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 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특별은총(은혜,은사)입니다.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는 말은 사물들의 그림자는 빛의 방향에 따라 그 위치와 모양이 변하는데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좋은 은사를 주시는데 있어서 절대로 변하지 않고 좋은 은사를 일관되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18절에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일관되게 좋은 은사만을 주시는 이유는 구약시대에 곡식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여 영광받으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낳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복음의 역사로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 자녀가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믿는 자를 멸망시키려고 혹은 고통스럽게 하려고 유혹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과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선택하여 구원하신 목적과 섭리를 볼 때 하나님은 믿는 자를 절대로 유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를 고통스럽게 하고 멸망시키려고 유혹하는 자는 사단과 마귀와 귀신이라는 것입니다. 곧 죄에 미혹받아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거나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4절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미혹하는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인데 사단인데 미혹을 받아 넘어가는 것은 자신이 욕심을 가지고 있어서 그 욕심에 끌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욕심은 위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 앞에 옳지 못한 욕망을 가리킵니다 (lust, desire). 그러므로 믿는 자가 미혹을 받아 잘못된 판단을 하고 실패하고 고통을 당하는 책임은 사단에게 있습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그릇된 욕망을 가진 데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이 욕망 때문에 사단이 하나님이 절대 금한 것을 어기도록 유혹할 때 미혹을 받아 넘어갔고 그 결과로 모든 고통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창세기3:5-6에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이 물질욕과 명예욕과 소유욕을 자극하는 유혹을 할 때 하나님께 옳지 못한 욕망을 가지기 않았기 때문에 능히 이겼습니다 (마4:1-11). 그래서 요한일서2:15-17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했습니다.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욕심을 가지면 미혹을 받아 죄를 짓게 되고 죄를 짓게 되면 영적 죽음과 삶의 고통이 따릅니다 (롬6:23). 십계명 중 가장 중요한 계명을 말하라면 누구든지 1계명을 말할 것입니다. 가장 중심 역할을 하는 계명을 말하라 하면 4계명을 말할 것입니다. 가장 근본이 되는 계명을 말하라 한다면 10계명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10계명은 '탐내지 말라'입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상을 섬기는 것도 욕심 때문이고 안식일을 범하는 것도 욕심 때문이고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 등의 모든 계명을 범한 것도 욕심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3:5에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미혹 당하지 않고 죄짓지 않고 실패하지 않고 고통당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탐심을 제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 거듭난 자의 새 생활 (19-27절)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1장 전반부에서는 시험을 당한 성도들에게 시험이 왜 오는 것인지, 시험이 올 때에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후반부는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교훈합니다.
① 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19-20절).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세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첫째, 듣기는 속히 하라고 했습니다. 둘째,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셋째,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이 윤리를 일반적인 윤리의 관점에서 볼 수 있고, 기독교적인 윤리 특히 전반부에서 말해온 '시험'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합니다. 남의 말을 파악하는 데에는 예민해야 하고 자기 말을 할 때는 신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남의 말을 듣기는 싫어합니다. 다른 사람의 주장을 잘 들어야 하고 자기의 주장은 한번 더 생각하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을 내지 않으려고 해야 합니다. 자기의 감정대로 처리를 해서는 안 됩니다. 한번 성을 내면 자신의 주장이 옳아도 다른 사람이 인정하지 않게 되고 더욱이 하나님의 의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옳은 행실을 잃게 됩니다. 모세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므리바 물을 낼 때에 혈기를 부리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신32:48-52).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의 한 촌에 들렸을 때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명하기를 원하나이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고 다른 촌으로 가셨습니다 (눅9:51-56).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업장에서나 감정적으로 일처리를 하면 실패하고 맙니다.
본문의 내용을 기독교적 윤리의 관점 특히 앞에서 말한 '시험'에 대한 교훈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시험을 당할 때에도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합니다.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들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10:13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시험당할 때에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 말씀을 생각나게 하여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에 예민하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합니다. 시련 가운데 있을 때에 성급하게 판단하거나 성급하게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처한 상황을 함부로 평가하여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내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 시험당할 때 그 시험으로 인하여 마음이 격분하고 억울해 하고 분노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련 가운데 있을 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함부로 화를 내거나 분을 발하지 않아야 합니다. 함부로 판단하여 분을 발하면 시련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아람장군 나아만이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 이스라엘에 있는 엘리사에게 왔을 때 엘리사는 그에게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씻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급하게 판단하여 분을 발하고 아람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대로 갔다면 나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의 권고를 받고 마음을 바꾸어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씻어서 깨끗이 나음을 얻었습니다 (왕하5장).
② 도를 행해야 합니다 (21-25절).
'도'는 헬라어의 로고스(λογοs; word)로서 말씀을 말합니다. 말씀은 성격적인 범위 면에서 들려진 말씀이 있고, 기록된 말씀이 있고, 느껴진 말씀이 있습니다. 들려진 말씀은 선지자 사도들이 음성으로 들은 계시로서의 말씀을 말하고, 기록된 말씀은 선지자나 사도들이 계시받은 것을 기록한 성문화된 말씀을 말하고, 느껴진 말씀은 기록된 말씀을 듣거나 읽거나 연구하거나 행할 때에 개인에게 적용된 말씀을 말합니다. 내용적인 범위 면에서 볼 때는 구원을 제시하는 말씀이 있고, 윤리를 요구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기록된 말씀으로서 윤리를 요구하는 말씀들을 말할 것입니다. 곧 기록된 성경 말씀으로서 이미 믿음으로 구원받아 거듭난 성도들에게 지키기를 요구하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적 법도를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수신자들이 이미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또 22절에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에서 '행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에타이'(ποιηται)는 히브리어 '아사'에서 유래한 말로서 윤리적 측면의 행위를 가리킨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25절에서는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가 '율법'이라고 한 것은 수신자들이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유대 지향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얽어 매거나 압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유케 하고 온전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계명은 결코 얽어매기 위함이 아니라 죄와 고통으로부터 자유케 하기 위해 주어졌고 하나님 나라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얻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첫째, 넘치는 악을 내어 버려야 합니다.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은 한가지 의미의 다른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더러운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뤼파리안'(ρυπαριαν)은 본래 옷에 붙어 있는 더러운 때를 의미하나 종종 몸에 불결하게 생긴 상처를 말할 때도 있습니다. '넘치는 악'에서 '넘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릿세이안'(περισσειαν)은 위선이나 더러운 욕망을 말합니다. 곧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은 옷의 더러운 때, 몸의 불결한 상처, 마음의 부패한 욕망, 곧 죄악성을 내어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어 버리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데메노이'(αποθεμενοι)는 옷을 벗어 버린다는 의미로, 사람이 당연히 더러운 때가 있는 옷을 벗어 버려야 하는 것처럼 거듭난 자는 부패한 죄악성을 벗어 버리도록 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2:1-2에도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죄성을 벗어 버리는 노력을 해야 순전한 젖이 상징하는 바 신령한 말씀을 얻게 되고 그 신령한 말씀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나게 합니다. '구원'의 의미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중생(죽었던 영이 거듭남), 둘째는 성화(신앙 인격의 자라남), 셋째는 영화(하나님이 원하는 만큼 온전케 됨)입니다.
둘째, 도를 온유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21절에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수신자들은 이미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말은 받은 말씀을 부정적으로 여기지 말고 긍정적으로 여기라는 말입니다. 말씀을 옳게 여기고 그 말씀을 합당하게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도를 행해야 합니다. 22절에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수용하는 상태에만 머무르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속는 자입니다. 구원에 대한 복음도 들어서 아는 것으로 구원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속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계명도 아는 것으로 변화되고 성장되고 경험되는 것 아닙니다. 말씀을 아는 것으로 말씀에서 약속한 복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알아 듣는다고 해서 자신의 믿음과 신앙 수준이 높아진 것은 아닙니다. 물론 말씀을 아는 것이 행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알지 않으면 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자기 것이 되지 못합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마치 거울을 들여다 보는 자와 같습니다. 당시에 거울은 구리(동)로 만든 거울(색경)이었습니다. 그 거울은 얼굴을 들여다 보면 희미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 얼굴을 곧 잊어 버립니다 (23-25절). 그처럼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자는 그 말씀이 자기 것이 되지 못하고 그 말씀에 기록된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을 행치 않는 자는 그 말씀이 인격에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환란과 핍박과 고난과 시련이 오면 곧 넘어지고 맙니다. 곧 경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신앙의 실력과 능력과 권세가 없기 때문에 시험이 올 때 모든 신앙 연조와 활동이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마태복음7:24-27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 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부지런히 배우고 연구해야 하지만 깨달은 다음에는 행해야 합니다.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는 목적이 행하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1:3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행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③ 경건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26-27절).
앞 절에서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경건이라고 하는 것도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하면서도 삶에서 경건한 모습을 나타내 보이지 않는다면 경건한 자라 할 수 없습니다. 삶에서 경건한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경건한 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속는 자입니다. 행위가 따르지 않은 경건은 위선적인 경건입니다 (마11:19).
첫째, 말(言)을 절제해야 합니다. 26절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혀에 재갈을 먹인다는 것은 말(馬)의 행동을 제어하기 위해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두는 것처럼 말(言)을 제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판단, 비방, 악담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3:10-11에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7:1-2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약2:17).
둘째,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27절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라고 했습니다. 고아와 과부는 당시 배경에서 보면 사회적 경제적 안정을 얻을 수 없는 부류입니다. 그들은 환난이라도 당하게 되면 스스로 역경을 이겨내기가 힘들었습니다. 참된 경건이라는 것은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돕는 것입니다. 요한일서3:17-19에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셋째,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합니다. 27절 하반절에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참된 경건은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경건이라는 말은 거룩이라는 말과 연관됩니다.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죄로부터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경건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말세가 될수록 세상과 교회의 경계가 없어질 것입니다 (계16:12). 모든 사람이 세상 문화에 빠지게 되고 그것 때문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 (계17:1-5). 그러나 하나님께서 신앙 세계에서 떠나 세상에 가까이 있는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지 않습니다 (계11:1-2). 야고보서4:4에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2:15-17에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했습니다.
<結言>
야고보서는 흩어져 이방에서 살아가고 있는 유대인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오늘날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많은 환난과 시련을 당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시련은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있는 시련이기 때문에 인내해야 합니다. 때로 유혹이 있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 속에 욕심을 가지지 않아야 합니다. 탐욕을 가지면 유혹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 환란과 시련 가운데 있을 지라도 신앙 공동체 생활에서 하나님의 의를 세워야 하며 말씀을 행해야 하며 경건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