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야고보서 2:1-26
<題目> 참된 믿음과 행위
<序言>
전 장 후반부에서 믿음의 도를 행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특히 1:22에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본 장에서도 참된 믿음은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후반부에서는 믿음과 행위에 관계를 원리적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26절에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원리는 바울이 말한 이신칭의 교리와 배치된 것처럼 보여 야고보서의 정경성(正經性)까지 의심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서신의 이신칭의(以信稱義)와 야고서의 이행칭의(以行稱義)는 전혀 대치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조화되는 교훈들입니다 (롬3:28, 갈2:16, 빌3:9, 약1:4, 2:24). 바울은 칭의(稱義)의 원인과 조건으로서의 믿음을 강조한 것이고 야고보는 칭의(稱義)의 결과로서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믿음 강조한 것이고 야고보는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행위를 강조한 것입니다. 야고보의 그런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본 장에서는 믿음에 수반되어야 할 행위(1-13절), 믿음과 행위에 대한 원리적 관계(14-26절)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本論>
1. 믿음에 수반되어야 할 행위 (1-13절)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믿는 자다운 행위가 따라야 합니다 (1절). 곧 믿음으로 구원(救援)과 칭의(稱義)와 중생(重生)을 얻은 자는 성화(聖化)를 위한 삶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당시 디아스포라들에게 나타난 현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 예로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믿는 자의 공동체 안에서 그런 식으로 서로 구별하고 판단한 것은 악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2-4절). 부요하거나 존귀하게 보이는 자는 좋은 자리에 앉도록 인도해 주고, 가난하거나 천하게 보이는 자는 바닥의 끝이나 구석에 앉거나 서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구별하고 행동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더 근본적으로 외모로 판단하여 자기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는 환대하고 자기에게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라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천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있어서는 안 될 악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①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5-7절).
당시 그리스도인들 특히 디아스포라들은 일반적으로 당시 사회에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부분 가난하고 천대받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주 로마 정부와 관련이 있는 자들이나 부요한 자들로부터 신앙적으로 압제와 박해를 당했습니다. 뿐만 이니라 경제적으로도 부요한 채무자들로부터 법정에 끌려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훼방당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여 믿음을 가지게 하여 영적으로 부요하게 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도록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외부적으로 부요와 가난 그리고 존귀와 비천을 구분하여 선택하여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비록 외부적으로 가난하고 천대받는 부류라도 선택하여 하나님 나라의 은혜에 참여시켰습니다. 개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부적으로 가난하고 멸시받고 천대받는 자를 선택하여 구원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부요하고 존귀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고전1:26-28). 실로 하나님은 성품으로 보나 그가 하시는 일의 원리를 보나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삼상16:7, 행10:34, 롬2:11, 엡6:9, 골3:25).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외모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의지와 사역 원리에 배치되는 행위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답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②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율법의 근본정신에도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8-12절).
율법의 대강령도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율법의 요긴한 핵심 내용 중 사람과의 관계된 내용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관주와 같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든 율법의 근본정신이 긍휼과 자비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 탐심 등의 내용들이 모두 '사랑하라'는 정신에 따른 구체적인 행동 규범입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율법의 계명이 지시하는 바 참뜻을 지키지 않은 자입니다. 그것은 또 한 율법의 계명 중 한 계명을 어겼다고 하면 사람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결국 사람을 사랑하지 않은 자로서 다른 모든 계명도 어긴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외부적으로 일부 계명을 지켰을지라도 지키지 않은 계명에서 긍휼과 사랑의 정신이 없는 것이 확인된 이상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율법은 한 원리를 가지고 관주처럼 엮여 있기 때문에 한 계명을 어긴 것이 전 계명을 어긴 것이고 한 계명을 지킨 것이 전 계명을 지키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곧 긍휼과 사랑의 정신이 있으면 율법의 계명을 성취하는 자이고 그것이 없으면 외부적으로 지켜도 성취하지 못하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8-11절). 그런 관점에서 보면 가난하고 천대받는 그룹들을 모욕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따르지 않는 자로서 율법의 말씀대로 살려는 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을 대할 때 긍휼과 사랑의 정신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③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받을 심판 원리에도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12-13절).
종말론적으로 누구나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히9:27). 그 때에 믿지 않는 자는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고 믿는 자는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립니다. 그런데 이 공심판에서 믿는 자가 영생복락을 얻어 누리게 되는 것이 자기들의 의로운 공로 때문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담당해 주시므로 입혀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죄대로 갚지 않고 긍휼을 베푼 것입니다. 또한 행위에 따라 상을 주시는 사심판에서도 긍휼이 적용됩니다. 그것은 긍휼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행을 '자유의 율법' 곧 긍휼과 사랑의 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마18:23-35, 6:14). 그 원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5~7장에 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나옵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복음으로 인하여 임하게 된 '하나님 나라'의 기준과 원리를 설교하신 내용입니다. 산상수훈 가운데 가장 먼저 '8복'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 중 다섯번째에 하신 말씀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마5: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대할 때 자기유익을 따라 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을 염두에 두고 긍휼과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2. 믿음과 행위에 대한 원리적 관계 (14-26절)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는 진정한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했습니다. 참 믿음에는 행위가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14절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했습니다. 17절에도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26절에도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 믿음이라고 하고 했습니다. 그 예로 21절에 보면 아브라함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에 대해 바울은 믿음 때문이라고 했으나(롬4:1-5) 야고보는 행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표현이 바울서신들과 대치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전혀 대치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조화되는 교훈들입니다 (롬3:28, 갈2:16, 빌3:9, 약1:4, 2:24)
바울서신은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말하고 있고 야고서는 이행칭의(以行稱義)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고, 야고보는 믿음이 아닌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야고보가 말한 '믿음'과 '행위'가 단어의 어휘는 같지만 말하려는 의미는 전혀 다른 단어입니다. 배경을 보면 바울은 유대 성도들이 구원의 조건을 믿음에 두지 않고 율법의 행위에 두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고, 야고보는 유대 성도들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위로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교적 율법의 행위를 비판한 것이고, 야고보는 유대교적 믿음을 비판한 것입니다. 바울은 칭의(稱義)의 원인과 조건으로서의 믿음을 강조한 것이고 야고보는 칭의(稱義)의 결과로서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복음적 믿음을 제시한 것이고, 야고보는 '이미 복음적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따른 기독교적 행위를 제시한 것입니다. 그런 점을 이해하는 칼빈도 '기독교강요'(基督敎講要)에서 "야고보서는 어떤 방식으로 의롭게 되는가를 의논하지 않고 신자들에게 선행으로 맺는 의를 요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서신들과 야고보는 전혀 대치되지 않고 상호 보완적이며 조화를 이루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야고보서에서는 말로만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행위로 나타내지 않는 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참 믿음은 행위로 증명되고 행위로 온전케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믿음이 있고, 성장의 수단으로서의 믿음이 있고, 은사의 종류로서의 믿음이 있습니다. 바울서신에서 말하는 믿음은 첫번째 의미일 것이고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믿음은 두번째에 해당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 믿음에는 반드시 행위가 있어야 참 믿음으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행위가 없다면 속에 있다고 말하는 믿음은 거짓일 것입니다. 속에 진실한 믿음이 있다 손치더라도 그 믿음은 온전치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① 말뿐인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14-18절).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형제나 자매가 먹을 양식이 없는데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말하면서도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평안하거나 따뜻하거나 배부르지 않습니다.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유익이 없습니다. 입으로만 말하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참 믿음은 행위로 증명되고 온전케 되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위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② 귀신들도 아는 믿음은 있습니다 (19-20절)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거라사 지방에 들렀을 때 묘지 사이에서 군대귀신 들린 사람이 나와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눅8:26-33). 이 때 당시에 제자들도 예수님을 본질적으로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는 베드로의 고백은 이 사건보다 훨씬 뒤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마16:16). 귀신들은 제자들보다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고 자신을 심판할 자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지적(知的)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아는 지식을 믿음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인격적으로 수납해야 하고 행위로 나타내야 합니다. 먼저 알아야 행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행할 마음을 갖지 않는 지식은 오히려 자신을 망하게 하기도 합니다.
③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았습니다 (21-24절).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 땅과 자손에 대한 언약적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자손에 대한 언약을 믿으므로 의롭게 여김을 받았습니다 (창15:6). 그러나 그의 믿음이 진정으로 증명될 때는 하나님이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따라 모리아산에서 독자 이삭을 바칠 때였습니다 (창22:1-14). 그 때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자손에 대한 언약을 믿고 하나님 안에서 살려는 믿음이 있음이 증명된 것입니다.
④ 라합도 행함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았습니다 (25절).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들어갈 때 가나안의 첫성 여리고를 정복할 때 여호수아가 두 정탐꾼을 여리고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발각되어 성 위의 라합이라는 기생 집으로 숨게 됩니다. 라합은 그들을 지붕 삼대에 숨겨 주어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돌아가 보고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이 여리고성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붙이실 것을 믿었습니다. 여리고 성이 멸망할 때 자신은 구원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고 싶어했습니다. 그 믿음은 생명 내놓고 정탐꾼을 숨겨 준 행위로 인정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리고성이 멸망할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수2:1-24, 6:21-25).
<結言>
야고보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잘못된 믿음에 대해 지적했습니다. 참 믿음은 행함으로 증명하고 온전케 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근거하여 구원에 확신을 가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안전성 때문에 믿음 생활에 태만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구원 받은 자는 성화를 위해 더욱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지적 믿음이 아니라 행위가 따르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