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야고보서 4:1-17
<題目> 세속적 행위에 대한 권고
<序言>
사도행전 2~4장에 나오는 예루살렘교회의 모습은 실로 역동성 있는 신앙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다툼이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그 다툼의 근본 원인이 정욕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죄적 본질인 정욕대로 살기 때문에 다툼이 있어 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성숙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권고들을 했지만 4장에서도 성숙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죄적 욕망을 잘 다스려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종말과 관련지어 오늘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지적합니다. 내용의 구조는 다툼에 대한 권고(1-5절), 교만에 대한 권고(6-10절), 비방에 대한 권고(11-12절), 허탄한 자랑에 대한 권고(13-17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다툼에 대한 권고 (1-5절)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초대교회 공동체들에서 싸움과 다툼이 있곤 했습니다 (2:1-13, 3:8-9,13-18, 고전6:1-8). 그 원인은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는 정욕 때문입니다 (1절). '정욕'(情欲.헬 헤도논 ηδονων)은 욕심, 욕망, 쾌락, 등의 포괄적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의 이기적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싸우고 다툰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살인하고 시기하고 다투고 싸우지만 결국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 구하더라도 정욕적인 목적에서 구하기 때문에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욕으로 기울어지는 이상 기도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정욕으로 기울어진 자는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공동체의 유익과 다른 지체의 유익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 이익만 구합니다. 정욕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진리와 은혜를 짐승과 벌레 형상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롬1:23-25).
그러므로 우리 공동체가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행복을 누리려면 자기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에베소서4:22-24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옛 사람의 소욕을 쳐 복종시켜야 합니다. 바울은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시킨다고 했습니다 (고전9:27, 15:31). 베드로전서2:11에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서로 싸웁니다.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으려면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 (갈5:16-17).
만일 성령을 좇아 행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면 성령께서 시기합니다. 간음하는 여인들이 육체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세상과 짝하는 것처럼 성도가 정욕으로 기울어져 세상과 짝하면 성령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요한일서2:15-17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에 취하게 되면 그것이 망할 때에 함께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계17:1-2).
2. 교만에 대한 권고 (6-10절)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교만'은 사람에 대한 교만이 있고 하나님께 대한 교만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교만은 남 보나 자신을 더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교만은 하나님 보다 자신을 낫게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역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의 지식과 지혜와 능력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당연히 자유와 방종과 쾌락의 삶을 추구합니다. 정욕으로 기울어지고 세상과 벗된 삶을 추구합니다 (1-5절).
교만의 뿌리는 사단입니다. 교만은 사단의 성품입니다. 사단은 교만하여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났습니다 (유1:6, 계12:7-9). 그는 지상에 내려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되 교만한 마음을 조장했습니다 (창 3장).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6절). 그래서 잠언18:12에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했고, 잠언16:18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했습니다. 교만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망한 대표적인 사람은 사울왕과 느부갓네살왕입니다 (삼상 15장, 단 4장). 그러므로 교만을 철저히 배격하고 겸손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순복해야 합니다 (7절).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자는 하나님을 순복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복종합니다. 하나님이 어디로 이끌든지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했습니다 (마11:29).
둘째는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7절).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귀가 피한다고 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여 이기려면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변화산에서 내려왔을 때 한 사람이 귀신 들려 귀머거리 되고 벙어리된 아이를 제자들에게 데리고 와 고쳐 달라고 했으나 제자들이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아이가 귀신에 압제를 받아 경련을 일으키고 물이나 불에 넘어진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고쳐 주지 못하니 예수님께 고쳐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이에게 귀신을 명하여 물리치고 치유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제자들이 어찌 자기들을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막9:29). 과거에 심을철 목사님은 "마귀는 개와 같아서 엎드리면 도망한다"고 했습니다. 개는 사람이 엎드리면 돌을 집는 줄 알고 돌에 맞을까봐 도망한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성도가 엎드려 기도하면 마귀가 도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함께 따라간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고 졸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마26:40-41). 그 결과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무리들에게 대항하다가 '말고'의 귀를 자르는 실수를 했습니다. 기도해야 마귀에게 속지 않게 되고 시험에 들지 않게 됩니다. 특히 마지막 때에는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잡아 삼킬 자를 찾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벧전4:7).
셋째는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8절).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가까이 하십니다. 간절히 찾으면 만난 바 되어 주십니다 (렘29:13).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손을 깨끗이 씻는 것처럼 죄를 회개하므로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특히 두 마음, 곧 한 마음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면서도 또 다른 한 마음으로 물질과 육체와 세상과 우상에 속한 것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마6:24).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일2:15-16).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을 슬퍼해야 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어 웃는 것을 애통으로, 즐거운 것을 근심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9절).
그렇게 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높여 주십니다. 10절에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5:5-6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3. 비방에 대한 권고 (11-12절)
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형제'는 하나님의 공동체 일원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자들임을 강조하는 용어입니다.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율법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은 율법을 판단하고 율법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레위기19:17-18에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고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구약 율법의 대강령은 몸과 뜻과 정성을 대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막12:29-31, 눅10:27).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고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율법을 비방하는 것이고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율법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율법을 지키지 않은 자입니다.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입법자이며 재판자입니다. 율법을 세운 자도 하나님이고 율법으로 재판할 자도 하나님이십니다. 능히 율법을 따라 구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판단하는 것은 율법을 세운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며 율법으로 재판하실 심판자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또한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그를 지으시고 부르시고 목적을 가지신 하나님을 판단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비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침해한 것입니다.
만일 형제를 비판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비판하고 형제를 헤아리면 하나님도 헤아립니다 (마7:1-2) 형제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과실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마6:15). 형제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하나님도 긍휼을 베풀지 않을 것입니다 (약2:13). 만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자가 백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으므로 감옥에 갇힌 이야기가 이해를 잘 시켜 줍니다 (마18:21-35).
4. 허탄한 자랑에 대한 권고 (13-17절)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야고보가 보기에 흩어진 유대인 성도들 곧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이 허탄한 자랑을 자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디아스포라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타국에서 살아갈 때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어려움도 있었겠지만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점이 경제적인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벌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런데 그들은 농사 지을 땅도 없으니 적은 자본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장사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든지 장사를 해서 돈을 벌려는 태도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하면서 그들의 생활태도를 지적하여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허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13절).
그들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잘못된 이유는 사람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잠27:1). 사람의 생명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는 것입니다. 아침 안개는 태양이 떠오르면 곧 사라지는 작은 물방울들입니다. 사람은 아침 안개처럼 유한하고 연약합니다. 베드로는 인생이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벧전1:24). 욥은 벌레와 구데기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욥25:6). 그러므로 돈을 벌려는 데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시고 어리석은 부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곡식의 소출이 풍성하자 창고를 짓고 편안히 쉬려고 하지만 그 영혼이 당일에 취함을 받으면 그 재물이 되고 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눅12:15-21). 디모데전서6:7-10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주의 뜻이면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15절). 인생의 유한함을 생각지 않고 탐욕에 사로잡혀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살아간다면 허탄한 것을 자랑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허탄한 자랑은 악한 것입니다. 돈을 벌려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육체적 탐욕에 사로잡힌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욕심을 이루려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돈을 벌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뜻을 모른다면 하나님을 위해 살려는 생각을 가지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지식만 가지고 있지 말고 그 지식을 생활에 적용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 (17절).
<結言>
17절에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했습니다. 지식만 가지고 행치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지 깨달았으면 그대로 살려고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