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요한계시록3:1-22

<題目> 일곱교회에 대한 메시지 2

 

<序言>

  2장에서는 소아시아 7교회 가운데 에베소교회와 서머나교회와 버가모교회와 두아디라교회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3장에서는 나머지 사데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해 다루게 됩니다. 내용구조는 사데교회에 보낸 메시지(1-6), 빌라델비아교회에 보낸 메시지(7-13), 라오디게아교회에 보낸 메시지(14-22)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사데교회에 보낸 메시지 (1-6)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사데(Sardis)는 소아시아(튀르키예) 서부에 있는 도시로서 과거 B.C.12C경에 튀르키예(터키)인들이 세운 리디아(Lydia) 왕국이 세운 아크로폴리스(acropolis)로서 B.C.6C경에 리디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사데는 경제적으로 사금이 많이 나고 양모 가공이 발달하여 부요했고, 군사적으로 도시가 높은 성채로 되어 있어서 난공불락의 성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고, 종교적으로는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로마황제의 박해나 우상숭배의 강요가 없었기 때문에 평안한 곳이었습니다. 사데교회는 사도 요한(John)의 전도로 세워졌고, 요한의 제자 멜리토(Melito)가 감독(목사)로 있었기 때문에 복음진리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사데교회는 생명력을 잃은 교회가 되었고 주님으로부터 '살았으나 죽은 자'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어떤 부상당한 독일 군인이 군인 병원에 치료를 받기위해 갔다가, 치료는 받지 못하고 그 병원의 거대한 건물과 잘 구성된 조직만 보고 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사데교회를 살펴보면서 그런 교회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데교회는 오늘날 사업과 조직과 행정과 교세와 전통과 교단과 신학만 자랑하고 내적 생명의 역사가 없는 현대 교회에 대한 경종이 될 것입니다.

 

   1) 주님의 모습

 

  1절에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사데교회에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로 나타나셨습니다. 일곱 영'은 완전하신 성령님을 가리키고 (5:6, 3:9), '일곱 별'은 소아시아 일곱 감독(목사)를 가리킵니다 (1:20). 교회는 주님이 성령님을 통해 목회자를 붙들고 세워갑니다. 사데교회가 외부적으로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이 보시기에 영적으로는 거의 죽게 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2) 주님의 책망

 

  1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고 했습니다. 사데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만 가졌을 뿐 실상은 죽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하는 가운데 있었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영적을 죽은 상태로 보신 것입니다. 사데교회는 모든 면에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경제적으로 풍요했습니다. 사데는 양모 가공이 발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금이 많았습니다. 팍톨루스(Pactolus)강에는 모래를 거르면 사금이 많이 나왔고 주위 산의 흙도 거르면 금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로인해 도시가 부요했습니다. 그것은 신화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B.C.7C경에 그리스(헬라)에 마이더스(Midas)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에 대한 욕심이 한이 없는 왕이었습니다. 하루는 디오니소스(Dionysos)신이 마이더스에게 소원을 들어줄 테니 소원 한 가지를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마이더스는 자기가 손으로 대는 것은 모두 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디오니소스는 그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마이더스가 손을 대는 것은 모두 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먹으려 해도 음식이 금이 되니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슬퍼하는 그에게 외동딸이 달려와 안아주었습니다. 외동딸도 금으로 변했습니다. 마이더스는 자신이 욕심을 부린 것에 대해 후회하고 욕망을 버리겠다고 결심하고 팍톨루스강에 손을 씻고 청빈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죽을 때에도 금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서 발굴된 그의 묘지에는 금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둘째, 군사적으로 안정되었습니다. 사데는 도시 자체가 높은 성채 위에 있었습니다. 사데는 트몰루스(Tmolus)산 줄기 가운데 한 봉우리인 고원지대 위에 세워진 긴 고원 형태의 성채(城砦)였습니다. 3면이 450km나 되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적군이 접근할 수 없고 다만 작은 목처럼 생긴 남쪽으로만 접근할 수 있었는데 그곳조차도 가파른 구불구불한 길로 되어 있어서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쪽만 방어하면 어떤 적군도 점령할 수 없는 천혜의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셋째, 신앙적으로 좋은 환경에 있었습니다. 사데교회는 다른 교회에 비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 가운데 있었습니다. 사데에는 로마황제의 박해가 비교적 없었고, 니골라당 같은 이단들의 미혹이 없었고, 황제숭배와 시벨레(Cybele)여신의 숭배가 있기는 했으나 다른 지역에 비해 극심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데교회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사역을 할 때 바울의 사역으로 생겨졌고, 그것을 사도 요한이 정식으로 세웠고, 멜리토가 목회자로 있던 교회였습니다. 멜리토(Melito)는 주석가였고 변증가로서 성경해석과 설교에 탁월한 목회자였습니다.

 

  사데교회는 경제적인 풍요와 군사적인 안정 때문에 교회가 재정적으로 행정적으로 사업적으로 안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보실 때는 죽은 상태나 다름없었습니다. 자신들은 외부적인 안정과 성장 때문에 살아있는 교회라고 자랑했지만 주님이 보실 때는 생명력이 없는 거의 죽은 교회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태만해져서 성령님의 감동에 대한 사모함도 없고, 말씀에 대한 사모함도 없고, 말씀을 순종하려는 노력도 없고, 신앙인격을 성장시키려는 의지도 없고, 영혼을 살리려는 열정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같이 되었고, 돌만 남은 화석처럼 되었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사체처럼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데에는 외곽 언덕에 이른바 '죽은 자들의 도시'가 있었는데 그곳에 있는 수많은 무덤들처럼 되고 만 것입니다.

 

  프랑스에는 유명한 삶은 개구리 요리가 있습니다. 그 요리는 손님이 앉아 있는 식탁 위에 버너와 냄비를 가져다놓고 직접 보는 앞에서 개구리를 산채로 냄비에 넣고 조리하는 것입니다. 그때 물이 너무 뜨거우면 개구리가 펄쩍 튀어나오기 때문에 냄비 속에는 개구리가 가장 좋아하는 온도의 물을 부어둡니다. 그러면 개구리는 따뜻한 물이 아주 기분 좋은 듯이 가만히 엎드려있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매우 약한 불로 물을 데우기 시작합니다. 아주 느린 속도로 서서히 가열하기 때문에 개구리는 자기가 삶아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기분좋게 잠을 자면서 죽어가게 됩니다. 그처럼 육체적으로 평안하고 신앙적으로 평안할 때 하나님을 떠나기 쉬운 것입니다.

 

   3) 주님의 권면

 

   ①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2절에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사데교회는 평안한 가운데서 세속적인 풍조에 휩쓸려 신앙적으로 안일하고 태만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세상 풍조에 동화되지 않은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4절에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라고 했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세속화되어가는 가운데서도 일부 몇 사람은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나갔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신앙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데 몇 사람이 신앙적으로 살아있는 것은 다 죽은 가운데서 조금 살아남은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나무로 말하면 잎과 가지와 줄기가 다 죽고 뿌리만 남아있는 것 같은 상태인 것입니다. 그루터기만 남은 상태인 것입니다. 부지깽이(불쏘시개)로 말하면 다 타고 손잡이 부분만 남은 상태인 것입니다. 그대로 있으면 다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나무의 그루터기마저 죽고 타고 나면 다시 소성할 근원 자체가 없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아주 다 죽어서 다시 소성할 가능성이 전혀 없어지기 전에 그 남은 것을 굳건하게 하여 다시 살리라는 것입니다.

 

   ②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3절에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사데교회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사역을 할 때 영향을 받았고, 사도 요한에 의해 복음전도를 받았고, 멜리토라는 목회자로부터 말씀을 배웠습니다. 멜리토(Melito)는 사도 요한의 제자로서 주석가이자 변증가였습니다. 성경해석과 설교에 탁월했습니다. 그래서 첫째는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생각하고'(μνημονευε)는 되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지키라는 것입니다. '지켜'(τηρει)는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μετανοησον)는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라고 했습니다 (딤후3:14). 바로 배운 자는 배운 것으로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 배운 말씀대로 살아야합니다. 그리고 바로 배운 자가 바로 배운 것을 잃어버렸다면 다시 돌이켜야합니다.

 

   ③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도둑 같이 이르겠다고 했습니다.

 

  3절에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도둑은 언제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처럼 사데교회가 계속해서 돌이키지 않을 경우엔 주님께서 도둑같이 임하여 심판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가진 좋은 신앙적인 자산으로만 만족하고 있지만 돌이키지 않으면 주님이 생각지 않을 때에 임하여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데교인들은 생각지 않은 때에 도둑같이 이른다는 의미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사데(Sardis)는 튀르키예(터키)인들이 B.C.12C 경에 세운 리디아(Lydia)왕국의 수도였습니다. 사데는 트몰루스(Tmolus)산 줄기 가운데 한 봉우리인 고원지대 위에 세워진 긴 고원 형태의 성채(城砦, acropolis)입니다. 3면이 450km나 되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적군이 접근할 수 없고 다만 작은 목처럼 생긴 남쪽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데 그곳조차도 가파른 구불구불한 길로 되어 있어서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쪽만 방어하면 어떤 적군도 점령할 수 없는 천혜의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아크로폴리스는 어린아이들만으로도 지킬 수 있다는 말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B.C.6C경에 페르시아제국의 고레스(Cyrus)왕이 리디아 왕국을 정복하기 위해 사데를 점령하려고 군대를 이끌고 사데를 포위했습니다. 당시 리디아의 크뢰수스(Croesus)왕은 아크로폴리스 아래에 진영을 갖춘 페르시아군대가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남쪽으로 있는 좁은 통로만 지키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지키던 리디아의 한 군사가 투구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래서 그 리디아 군사가 가파른 절벽의 좁은 길로 내려와 그 투구를 주워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사데 아래 진을 치고 있던 페르시아의 한 병사가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 병사가 페르시아 고레스왕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고레스왕은 특수부대를 조직하여 밤에 그 통로로 올라가 침투하게 했습니다. 페르시아 특수부대는 밤에 한 줄로 그 좁은 통로로 올라갔습니다. 그 통로를 지키던 병사는 페르시아 군대가 그 길을 알지 못하고 안다고 해도 그곳으로 침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졸았습니다. 그래서 페르시아 특수부대는 그곳으로 쉽게 들어가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고 결국 페르시아 군대가 사데를 점령하므로 리디아 왕국을 정복했습니다 (B.C.549). 그런데 그 이후에도 그런 일이 두 번이나 더 일어났습니다. B.C.3C 경에 그리이스(마게도냐)의 알렉산더(Alexander)대왕이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B.C.2C 경에도 로마의 안티오커스(Antiochus)대제가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사데교회에 이 말씀이 주어진 때는 A.D.1C 말이기 때문에 사데교인들은 모두 그 역사적 사건들을 다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도적같이 이른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재림(再臨)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24:42-44"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재림의 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점에서도 도둑같이 이르게 되는 측면도 있지만, 준비되지 않은 자들에게 있어서 전혀 생각지 않은 때에 맞는다는 도둑같이 이르게 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5:2-4"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라고 했습니다 (25:1-13). 그렇지만 반드시 재림 때를 두고만 하신 말씀일 수는 없습니다. 재림 전에도 주님이 생각지 않을 때에 간섭하신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받고도 소홀히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공변된 보응을 받았습니다 (2:2-3). 하물며 율법보다 훨씬 좋은 복음과 성령님과 말씀의 은혜를 받고도 그 생명의 역사를 지키지 않는다면 주님이 반드시 개입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성령님의 감동과 말씀의 은혜와 양심의 가책을 통해 책망하실 때 빨리 돌이켜야합니다 (5:25). 당장에 돌이키지 않고 미적대다가는 언제 징계를 받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4) 주님의 칭찬

 

  4절에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고 했습니다. 사데교회는 금이 많았고 양모가 많아서 풍요로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풍조에 물들지 않고 여전히 요한과 멜리토가 전해준 복음진리를 굳게 붙잡고 신앙의 정조를 지키는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합당한 자들로서 더럽히지 않은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닐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당시 양모산업이 발달한 사데 지역에 사는 사데 교인들에게 있어서 그 의미를 금방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흰 양털은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함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흰 옷'은 순수, 순결, 정결한 행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7:9, 1:14). 세속적인 풍조와 이교적인 풍습에 혼합되지 않고 거룩성을 지킨 자들의 그 행위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19:8"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복음진리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 죄 씻음을 받은 자는 흰 옷을 입은 자입니다 (3:27). 계속해서 죄에 물들지 않고 거룩성을 유지하는 자는 흰 옷을 더럽히지 않는 자입니다 (4:24). 그런 자는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이 함께 하므로 주님이 인정하는 자라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도 주님이 동행함을 나타내므로 주님이 인정하는 인격과 행위를 가진 자로 인정받게 하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5) 주님의 약속한 상급

 

   ①흰 옷을 입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5절에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기는 자에게 흰옷을 입혀주고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흐리지 않고 그 이름을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기는 자'는 세속에 물들지 않고 신앙의 정조를 지키는 자이며, 비록 세속에 물들었을지라도 돌이켜 신앙의 정조를 계속 지켜나가는 자들입니다. '흰옷'은 정결한 행위를 의미합니다 (19:8). 안일한 사회적 풍토 속에서도 처음 받은 은혜를 따라 신앙의 순결을 잃지 않은 자, 권면을 받고 즉시 돌이켜 신앙의 정조를 지키는 자에게는 그 의로운 행실로 인해 거룩해진 인격을 나타내시겠다는 것입니다.

 

   ②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5절에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한글성경 개역판에서는 '내가...흐리지'로 번역했었는데, 개역개정판에서는 '내가...지우지'로 개정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ž사레이포'(εξαλειφω)'내가 없애다' '내가 지우다'의 뜻으로서 기본적으로 개역개정판의 번역이 맞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어떤 공동체에든 그 구성원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에서 이름이 지워진다는 것은 구성원으로서 누리는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하는바 정상적인 생존의 불가능을 의미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원로원에서는 부끄러운 황제에 대해 말살령을 내려 로마 역사에서 그 이름과 행적 전체를 지워버렸습니다. 최초로 말살된 황제가 칼리큘라(Caligula)였는데 그 후로도 두 명이나 더 있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데 교인들로서는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버린다는 것이 어떤 두려움을 주고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안도감을 주는지 잘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구원받은 자의 이름이 기록된 '생명책', 구원받은 자의 선행이 기록된 '기념책', 심판받을 자의 이름과 행위가 기록된 '행위의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생명책'은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인 구원받은 자의 이름이 기록된 책입니다. '이름'은 인격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박탈하지 않는다는 말로서 지옥에 가지 않게 한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20: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본절에서 말한 의미는 단순히 지옥에 가지 않게 하겠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자격과 특권을 더욱 확고히 하겠다는 의미로서, 주님이 그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으로서의 인격을 더욱 영광스럽게 하시겠다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 이름을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에 해당하는 영어성경 NASB에서는 'I will not erase his name'로 번역했지만, KJV에서는 'I will not blot out his name'로 번역했고 NIV에서도 'I will never blot out his name'으로 번역했습니다. erase'지우다'는 뜻이지만 blot'더럽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KJVNIV를 따른다면 지우지 않는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더럽히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천국 시민권을 박탈하지 않는다는 의미보다는 천국 시민권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의미로서, 그 특권을 보장하여 더욱 영광스럽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영적으로 이 세상에서도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결코 분리되지 않고 지옥과 사망과 죄의 권세가 주장하지 못하게 하여 하나님 나라의 시민임을 확증시켜 준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8:35-37"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했습니다.

 

   ③하나님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했습니다.

 

  5절에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주님이 그 인격을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공적으로 시인하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 사람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증언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공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 자격과 특권과 영광을 가지기에 합당한 자라는 것을 증거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 믿음을 지킨 모든 의로운 행위를 인정하시고 증명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곧 마태복음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자를 인정하시고 그가 주님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자임을 증명하십니다.

 

  우리는 굶어 죽는 나라 사람들처럼 극빈에 허덕이지도 않고 전쟁 가운데 있는 나라 사람들처럼 죽음의 위기에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 삶의 위기에 있지 않기 때문에 바른 진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부요해져서 신앙생활을 태만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살전5:2-3). 꼭 주의 재림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언제 주의 징계로 병이 들거나 가난하게 되거나 사고를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날이 오기 전에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이 생명력을 잃어 거의 죽게 된 상태에 있지만 아직 우리 안에 우리가 가진 진리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까지 없어져서 다시 회복할 기회조차도 없어지기 전에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재림 때에 우리를 인정하고 영광을 얻게 할 것입니다 (10:32).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주님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자임을 확인시켜 주실 것입니다 (8:35-37).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진 자격과 특권과 권세와 영광을 누리게 할 것입니다.

 

  전에 중국 개혁신학교에 강의를 다녔는데 그때 통역을 해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60세가 넘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40대에 공장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류마치스 관절염이 찾아왔습니다. 모든 관절이 아프더니 급기야 관절들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손발이 오그라들고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중국 의술로 치료를 받았지만 낫지 못했습니다. 5년 동안 유황 뜸을 받으면서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나을 수 있는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자기 병 때문에 돈도 다 없어져서 집안이 다 망하게 되었고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어서 식구들이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니 식구들만 고생시키느니 자기 혼자만 죽으면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들과 아내를 안고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질질 끌면서 어머니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 둘이 와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기를 보면서 "여기 있었구나 당신 지금 죽으려고 하는 거지?" 하면서 자기를 붙들어 눕혀놓고는 울면서 기도를 하더랍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고쳐 줄 것이니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일에 헌신하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면 병도 낫고 세계적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이 '어떻게 자기가 죽으려는 것을 알았을까?'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 건가?' 생각하면서도 믿어지지 않아서 혼자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정말 계시다면, 병을 낫게 해주실 수 있다면, 나를 세계적으로 쓰실 거라면 나에게 표를 보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 마음에 상이 떠오르게 하더니 자기가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가 심지어는 마음으로 지은 죄까지 영상 돌아가듯이 적나라하게 지나가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경험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는 교회 짓는 데 가서 교회를 다 지을 때까지 봉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 기간 동안 병이 다 나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해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기 위해 중국 동북신학교를 지을 때 돈을 받지 않고 총무로 봉사를 하고 동북신학교를 다니고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 각지에 전도를 하러 다니기도 하고 가정교회들을 돌아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자기가 다니면서 간증을 하면서 전도를 하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성경을 가르치면 회개하며 사도행전적인 역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저는 중국에 일주일 동안 가르치면서도 힘들어서 죽겠는데 어떻게 기차로 몇 일씩 걸리는 곳에 다니면서 그런 일을 합니까?" 그는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죽을 사람 살게 해 주고 다 죽었던 몸을 살려 주셨는데 이제 남은 기간에 하나님을 위해 부지런히 헌신해야하지 않겠습니까?“

 

 

       2. 빌라델비아교회에 보낸 메시지 (7-13)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빌라델비아(Philadelphia)는 고원지대로서 포도농사로 유명하고 상업과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소아시아 7지역 가운데 가장 역사가 짧으면서도 가장 오래까지 남은 도시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는 서머나교회와 함께 유일하게 책망 없이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1) 주님의 모습

 

   ①거룩하고 진실한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7절에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거룩하고 진실하신'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거룩'은 죄에 대해 거부하는 온전한 성품을 말하고. '진실'은 행함에 있어서 성실한 성품을 말합니다. 거룩한 자와 진실한 자는 구약에서 하나님에 대한 칭호로 사용되었고 (1:4, 5:19,24, 10:17,20, 12:6, 51:5, 39:7, 11:9, 3:3)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명칭입니다 (1:24, 2:27, 13:35, 7:26).

 

   ②다윗의 열쇠를 가시신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7절 하반절에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 모습은 이사야22:15-25의 반영입니다. 하나님이 국고와 왕궁을 맡은 셉나를 파면하고 엘리아김을 국고와 왕궁을 맡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사야22:21-22"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 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의 집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엘리야김에게 다윗의 집을 맡게 하기 위해 다윗의 집의 열쇠를 주어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닫을 사람이 없는 권세를 준다고 했습니다. '다윗의 집의 열쇠'는 다윗의 집을 전체를 맡아 관리하는 권세입니다. '다윗의 집'은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언적 용어입니다 (3:6). 그런 의미에서 주님이 다윗의 열쇠를 가졌다는 것은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절대적 주권을 가지셨다는 의미입니다 (28:18, 14:6, 4:12). 그래서 주님이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라고 한 것은 주님이 다윗의 집이 예언하는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권한 곧 영생을 수여할 권세가 있는 자라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를 맡은 자로서 그곳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권세가 있는 자임을 밝힌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주권을 가지신 분입니다. 미래의 천국에 대한 주권을 가지신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의 주권을 가지신 분이기도 합니다 (5:23). 그 권세는 친히 닫으면 열 사람이 없고 열면 닫을 사람이 없는 홀로 가지신 권세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와 현재의 교회들도 예수님의 주권에 달렸습니다. 우리들의 가정과 개인이 잘되고 못 되는 것도 그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127:1, 9:11, 8:18)

 

   2) 주님의 칭찬

 

  8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빌라델비아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글성경 개역판에서는 '적은 능력'이라고 했는데, 개역개정판에는 '작은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적은'은 수량에 관련하여 사용하는 말이고, '작은'은 크기와 관련하여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본형 '미크로스'(μικρος)는 크기와 관련하여 많이 사용하는 단어로서 '작은'(little)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편 '미크로스'(μικρος)의 영어식으로 '마이크로'(micro)인데 마이크로는 '아주 작은'의 의미입니다. 마이크로는 크기의 단위에 붙이는 단어인데 마이크로라는 단어가 어떤 단위를 앞에 붙이면 그 단위의 '100만분의 1'의 크기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1micrometer'라고 하면 1m100만분의1에 해당하는 크기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능력에 해당하는 기본형 '뒤나미스'(δυναμις)는 일반적으로 '능력'으로 많이 번역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그 능력의 의미는 힘의 세기를 말합니다. 그래서 영어성경 KJVNIV에서는 power로 번역하지 않고 strength로 번역했습니다. 곧 본문에서 '뒤나미스'(δυναμις)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어떤 역량을 두고 한 말입니다. '역량'(力量)이란 어떤 일을 이루어 낼 수 있는 힘의 정도를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은 능력'(μικραν δυναμιν, little strength)'아주 작은 역량(力量)'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능력이라는 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는 역량과 실력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는 환경과 조건이 열악하므로 신앙적인 열매를 맺을 역량과 실력이 거의 없었습니다. 빌라델비아교회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빌라델비아는 A.D.17년에 주변의 대지진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A.D.60년에도 주변의 지진으로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두 차례의 큰 지진으로 도시 건물들은 안전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시에서 살던 주민들은 점차 시골로 이주하여 포도농사를 했습니다. 그들의 경제적 수준은 하락했습니다. 그런데다가 도미티안(Domitian)황제 때 로마제국에 필요한 옥수수를 공급하기 위해 그들에게 옥수수를 재배하게 했습니다. 포도농사 지역의 절반가량을 제거하고 옥수수 농사를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포도농사에 의존하던 주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습니다. 그런 연고로 빌라델비아 교인들 역시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신앙적으로도 힘들었습니다. 주민들에게는 포도농사와 관련하여 술의 신 디오니수스(Dionysus)를 숭배했고, 티베우리스(Tiberius) 황제가 지진으로 초토화된 도시를 재건하면서 신전을 세우고 숭배하게 했습니다. 그런 점들 때문에 빌라델비아는 이교의 제의와 축제가 잦아 '작은 아테네'로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교인들을 유혹했습니다. 그런데다가 유대인들의 핍박이 심했습니다. 빌라델비아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그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자신들만이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 시민이며 영생을 얻은 자들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며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교인들을 핍박했습니다. 주님도 그들에 대해 '사탄의 회당'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9). 그런데다가 다른 교회들처럼 요한이나 안디바나 멜리토 같은 유명한 신학자나 목회자도 없었습니다. 교회가 신앙적으로 성장할 만한 어떤 조건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주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빌라델비아교인들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사회적인 우상숭배의 유혹과 유대인들의 갖은 핍박 속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들에게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이라고 했습니다 (10).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열악한 조건과 환경과 역량을 가지고도 끝까지 믿음을 지킨 것입니다. 서머나교회 감독 폴리갑이 콜로세움에서 순교를 당할 때에 빌라델비아 교인 10명이 함께 붙잡혀가 화형을 당했습니다. 소아시아 전체가 이슬람교도들에게 정복당할 때도 유일하게 굴하지 않고 남아 그 도시가 A.D.1392년까지 기독교 도시로 남았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연조도 짧고, 교인들은 우상숭배가 만연한 환경에 있었고, 유명한 목회지도자도 없었고, 소유도 넉넉하지 못했고, 유대인들의 핍박만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부흥할 수 있는 역량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내하며 끝까지 믿음을 양보하지 않았고 말씀을 지켰습니다. 이것이 생명력 있는 신앙입니다. 신앙은 좋은 환경적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말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고 주님이 맡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난이 있어도 인내로 감당하고 약속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아도 인내로서 감당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관심은 얼마나 좋은 조건과 환경을 가지고 얼마나 큰일을 했느냐에 있지 않고, 얼마나 믿음을 지키고 충성되이 순종했느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25:14-30, 12:41-44). 사렙다(사르밧) 과부는 선지자에게 빵 1개를 드리므로 하나님의 일을 도왔고 (왕상17:10-22), 어린아이는 에수님께 보리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드리므로 하나님의 표적을 나타내는 사역에 쓰임받았습니다 (6:3-14).

 

   3) 주님의 권면

 

  11절에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속히 오셔서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속히 오실 것이라는 표현은 심판을 경고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이었습니다 (2:5, 16, 3:3). 하지만 여기에서는 심판에 대한 경고의 의미가 아니고, 위로의 메시지를 주기 위해 사용한 표현입니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로 믿음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주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이 속히 재림하여 세상을 심판하고 빌라델비아 교인들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 면류관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면류관은 왕관이 아니라 승리관입니다. '면류관'2가지가 있습니다. '디아데마'(διαδημα)는 왕관을 가리키고, '스테파노스'(στεφανος)는 승리관을 기리킵니다. 여기에서는 승리관을 말합니다. 운동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주는 것처럼 신앙생활에도 어떤 궁핍과 핍박 속에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에게 천국에서 영광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면류관을 주려고 하는데 그것을 빼앗기지 않도록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 작은 역량으로도 인내로 믿음을 지키는 그 믿음을 끝까지 붙들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께 받을 면류관을 소망하고 평생 동안 주님께 충성했습니다 (딤후4:7-8). 야고보1:12"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벧전1:6-7, 4:13, 7:16-17). 그런데 궁극적으로 천국에서 받은 상급으로서 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주님이 성령님의 감동과 말씀의 은혜와 생활의 섭리를 통해 확인시켜 주시기도 합니다.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지금까지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로 믿음을 잘 지켰는데 도중에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믿음을 지키므로 주님이 믿음의 승리자들에게 주실 위로와 영광과 상을 빼앗기지 말 것을 당부한 것입니다 (12:1-2).

 

   4) 주님의 약속한 상급

 

  ①열린 문을 두었다고 했습니다.

 

  8절에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열린 문'은 종말적으로 보면 천국으로 들어가는 구원의 문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Ladd, Zahn, Rist, Beckwith). 그것은 앞절 7절에서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라고 한 대로 예수님이 문을 여는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예수님이 천국에 들어가게 할 주권을 가진 분임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또한 12절에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고 한 대로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을 얻게 할 주권도 가지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열린 문을 두었다는 말은 천국에 들어가 영광을 얻게 할 구원의 문을 열어두었다는 뜻으로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천국에 들어갈 뿐 아니라 그곳에서 영광을 얻도록 할 것이라 의미입니다.

 

  ‘열린 문은 이차적으로 선교의 문을 포함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Ramsay, Swete, Alford, Clarke, Charles, Holtzmann). 9절에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빌라델비아에는 핍박하던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가 개종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므로 지역 내에서 전도가 이루어질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열린 문을 두었다는 말은 빌라델비아는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남북으로 소아시아의 수도 에베소와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로 연결되어 있어서 선교가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신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빌라델비아교회에 열린 문을 두신 것은 주님이 빌라델비아교회에 대해 가지는 기대와 의지를 보게 하는 부분입니다.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는 말은 주권을 가지신 주님이 열어놓으면 닫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힘든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주님이 천국에 들어가 영광을 얻게 할 뿐 아니라 빌라델비아교회가 부흥을 하고 빌라델비아교회를 통해 복음이 널리 전파될 것인데 그것은 주권을 가지신 주님이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에 누가 막거나 어떤 환경과 상황이 막는다고 해서 안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작은 역량과 실력을 가지고도 믿음을 지키면 주님이 구원의 문뿐 아니라 전도와 선교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14:27, 4:3, 고전16:9, 고후2:23, 3:10, 4:1, 7:56).

 

   ②유대인의 일부가 굴복하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9절에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빌라델비아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할례를 받은 자들만 구원을 받는 자는 주장인 셈입니다. 그에 비해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자만이 아브라함의 언약에 참여한 자들로서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빌라델비아 교인들의 주장이 자기들이 믿는 진리를 대적하는 주장이라 생각하고 빌라델비아 교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사회 풍조의 유혹이 있는 가운데서 그들의 핍박으로 인해 고통이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유대인들에 대해 혈통적으로 볼 때 유대인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는 유대인(하나님의 언약백성)도 아니고 (2:28-29), 오히려 사탄에게 이용당하는 사탄의 회당이라는 것입니다. '회당'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나고게'(συναγωγη)'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빌라델비아 교인들 발 앞에 절을 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핍박하던 유대인 중 일부가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빌라델비아 교회에 입교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빌라델비아 교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 자들인지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증거는 빌라델비아 교인들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에게도 확인시켜주는 것이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확인시켜 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지속적인 고난 가운데 신앙생활에 회의가 들만한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위로가 되는 약속이었을 것이고, 그들은 그 증거가 실제로 나타났을 때는 큰 위로와 확신이 되었을 것입니다.

 

   ③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10절에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고 했습니다.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는 종말론적으로 보면 주님의 재림 때에 있을 대환난을 말합니다.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σε τηρεσω εκ τηs ωρας του πειρασμου)에서 '시험'에 해당하는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ος)는 영어성경들에게서 다양하게 번역했습니다. KJV에서는 temptation(유혹)으로, NASB에서는 test(평가), NIV에서는 trial(시련)으로 번역했습니다. 주님 재림 직전에 큰 환난이 있는데 그 환난은 이 모든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면하게 하리니'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εκ)는 전치사로서 '...으로부터'(from)이므로 '면하게 하리니'는 의역입니다. 바로 앞에 '지키어'(τηρεσω)가 있는 것을 보아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는 직역하면 '너를 시험의 때로부터 지켜주리니'입니다.

 

  이는 시험을 당하지 않게 해준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시험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신다는 의미로 보아야합니다. 종말에 있을 유혹과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보호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에는 그것들 속에서도 해를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신다는 의미도 있고, 그것들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어서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21:18,15"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고 했고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21:5-28은 예수님이 종말에 있을 환난에 관한 내용을 말씀하신 것인데 그 내용 중에 하신 말씀들입니다. 이것을 보면 환난을 당할 때에도 해를 당하지 않도록 지켜 주신다는 의미도 있지만 (16:17-18),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신다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5:3-4, 1:2-4). 요한계시록에 계시된 종말에 있을 환난을 보면 7인 재앙(6)7나팔 재앙(7-8)7대접 재앙(16)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7대접 재앙은 받지 않지만 7인 재앙과 7나팔 재앙을 믿지 않는 자와 함께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이 그런 무시무시한 환난 가운데서도 주님이 조금도 해를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시고 그것을 능히 감당할만한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역경과 핍박 속에서도 인내로 믿음을 지켜서 그 환난을 이기고 있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충분히 느껴졌을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인내로 믿음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더 큰 환난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주셔서 능히 이기게 해주십니다. 그것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때에는 주님이 보호해주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0:13"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④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12절에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고 했습니다. '이기는 자'는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로 믿음을 지키는 자를 말합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코 나가지 않게 해주신다고 했습니다. '기둥'은 안정과 영구에 대한 은유적 표현입니다. 이는 종말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복락을 누리는 자리에서 결코 제외되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둥 위에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님의 새 이름을 기록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표식과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라는 표식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표식을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곧 하나님 나라의 주역으로서 자격과 특권과 영광을 당당히 그리고 영구히 나타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당시 발라델비아 교인들은 이 의미를 잘 느꼈을 것입니다. 빌라델비아는 잦은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는데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폐허 속에서도 오직 신전의 기둥만 남아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빌라델비아에 가면 그 위에 집들이 지어져 있어서 발굴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때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없는데 신전 기둥 3개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빌라델비아는 지진으로 폐허가 된 후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가 재건한 다음 '네오 가이사랴'(Neo Caesarea)라는 이름을 부여했고 후에 플라비아(Flavia)로 개명했습니다 (A.D.70-79).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그런 역사적 경험에서 다시 지진이 일어나도 기둥은 남아있고 다시 재건되어 영구히 있게 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재건되어 새로운 이름이 붙여진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작은 능력을 사용하여 끝까지 말씀을 지킨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기둥 위치에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님이 보실 때에는 당시에도 그런 교회와 그런 성도를 현재한 하나님 나라의 기둥 역할을 하는 자로 보시고 주님의 권세를 사용하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2:9). 마태복음16: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가장 미약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핑계하거나 불평하거나 회의를 가지거나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위로를 바라고 인내로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들을 참으로 사랑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증거를 보여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환난을 당할 때에도 보호해주시고 감당할 은혜를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재림 때에 하나님 나라에서 그 영광이 영원히 나타나도록 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환경과 상황과 조건을 탓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물질, 외모, 능력, 은사 등이 부족해서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오히려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도 충분히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을 지킬 수 있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고,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해 믿음을 지키면 주님이 더 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power brake).

 

 

       3. 라오디게아교회에 보낸 메시지 (14-22)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오디게아(Laodicea)는 수리아(시리아)의 안티오커스 2세가 세워서 아내 이름을 붙인 도시입니다. 안티오커스 2(Antiochus)는 이집트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고, 후에 본 부인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비옥한 땅과 초원이 있었고, 양모와 모직과 안약과 의학교와 은행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바울의 동역자 에바브라를 중심으로 신실한 여성도 눔바의 집에서 가정교회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4:12-15). 라오디게아 교회는 유일하게 칭찬이 없고 책망만 있는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사데교회처럼 로마황제의 박해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사데교회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 몇 사람이 있었지만, 라오디게아교회는 전체가 자기만족과 자기교만에 빠져 신앙적인 열의를 상실한 교회입니다.

 

   1) 주님의 모습

 

  ①'아멘'으로 나타났습니다.

 

  14절에 "아멘이시요~"고 했습니다. '아멘'(αμην)'진실'의 의미로서 하나님의 신실한 성품을 나타낼 대 사용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신실한 분입니다.

 

   ②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나타났습니다.

 

  14절에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하신 충성된 분입니다. 요한복음14:9,11"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기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신 분입니다.

 

   ③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나타났습니다.

 

  14절에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요한복음1:1-3"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했고, 골로새서1:15-16에는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하였습니다 (1:3,26, 8:30, 1:2). 이는 예수님의 선재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2:6).

 

   2) 주님의 책망

 

  ①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고 했습니다.

 

  15-16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결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했습니다. 한글성경 개역판에서는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고 했는데 개역개정판에서는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고 했습니다. 개역판의 표현은 일관성이 없는 번역입니다. '차다' '뜨겁다'는 물질에 대해 사용하는 표현이고, '춥다' '덥다'는 표현은 사람에게 쓰는 표현입니다. 앞에서 '차다'는 표현을 사용했다면 당연히 뒤에도 '뜨겁다'는 표현을 사용해야합니다.

 

  라오디게아 지역은 동쪽으로 14km 떨어진 곳에는 골로새(Colossae)가 있습니다. 골로새에는 카드뮤즈(Cadmus)라는 해발 2,571m나 되는 설산이 있어서 그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아주 차가운 물이었습니다. 북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히에라볼리(Hierapolos)가 있습니다. 히에라볼리는 오늘날 세계적인 관광지 파묵칼레(Pamukkale)라는 곳인데 그곳은 자연 온천수가 있어서 항상 뜨거운 물이 흐릅니다. 대부분의 주경신학자들은 라오디게아의 물이 히에라볼리와 골로새에서 공급되었는데 히에라볼리에서 오는 온천수와 골로새에서 온 설수가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에 오는 동안 미지근해져서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미지근한 물을 먹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근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상황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수리아 안티오커스 2세가 건설한 기획도시였는데 그때 라오디게아에서 쓸 물을 히에라볼리와 골로새가 아닌 라오디게아로부터 약 8km 떨어진 수원에서 수로를 통해 공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물은 주변 골로새 지방 사람들이나 히에라볼리 지방 사람들이 먹는 물에 비해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환경을 비유삼아 라오디게아교회가 그들이 살아가는 물의 환경처럼 신앙적으로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지근한 상태는 부패하기 쉬운 점을 착안하여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책망한 것입니다. 어떤 음식이든지 얼음처럼 찬 물이나 펄펄 끓는 뜨거운 물에서는 병균이 활동을 하지 못하고 죽기 때문에 음식이 부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지근한 물에서는 병균들이 무한적으로 번식하여 음식이 부패하여 먹을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교회의 신앙이 미지근한 상태에 있어서 먹을 수 없어 입에서 뱉어 버릴 수밖에 없는 부패한 음식과 같은 상태에 있어서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인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적으로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가운 것에 대해 세속적으로 타락한 상태를 말하고, 뜨거운 것은 신앙적으로 열심을 낸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곧 찬 것은 이방인들의 우상숭배와 악덕으로 가득 찬 상태를 말하고, 뜨거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상태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런 대조적인 상태를 표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미지근하다는 것은 신앙적으로 타락한 상태도 아니고 신앙적으로 열심이 있는 상태도 아닌 무기력한 상태에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15절 중반절에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이 말씀이 타락하든지 열심히 있든지 하기를 원한다는 말씀이 되고 맙니다. 주님이 무기력한 상태보다 타락한 상태를 더 원한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방인처럼 타락한 상태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무기력한 상태를 더 원할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 무기력한 상태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열심히 있는 상태를 더 원하겠지만요. 더욱이 19절에 보면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고 책망을 하셨는데, 뒤에 권면을 하면서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한다는 말은 회개를 하든지 열심을 내든지 하라는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차다는 것은 회개하는 것을 말하고 뜨겁다는 것은 열심을 내는 것을 말하는 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는 것은 회개를 하지도 않고 열심을 내지도 않는다는 의미로 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교인들은 죄에 대해 애통해 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것도 없고,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열심을 내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무기력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죄를 붙들고 회개함이 있기를 원하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는 열심히 있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입에서 토하여 내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미지근한 물이나 음식물이 쉽게 상하여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주님이 합당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바냐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죄에 대해 책망을 받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2:1, 3:5, 11:20-24).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한 소돔 고모라성과 의인 1명이 없어서 멸망한 예루살렘성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진리를 듣고도 그것을 청종하지 않았습니다 (18:32, 5:1). 마치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고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은 세대와 같은 상태인 것입니다. 마태복음11:1617"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죄에 대해 애통해 하고 의에 대해 열의를 가진 사람을 원하십니다 (22:30).

 

   ②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17절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교회가 미지근한 상태에 있게 된 원인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는 부요했습니다. 금융업이 발달했습니다. 금융거래가 활발하여 은행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전에 튀르키예(터키) 정부에서 그곳을 대대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발굴팀에 참여한 사람이 많은 금궤를 발견하여 그것을 수레에 싣고 훔쳐가다가 걸렸습니다. 그 양이 자그만치 한 리어카(수레) 반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그 내용이 튀르키예 방송 뉴스에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그 지역에 그 정도로 금이 많았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은 의원이 발달했습니다. 당시에는 눈병이 많았는데 그곳에는 안약 원료로 사용되는 브루기아 가루가 많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의학교가 있어서 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안약을 개발하여 판매하므로 많은 수입을 올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직산업이 발달했습니다. 그곳에서는 양을 많이 길렀고 목화가 많이 재배되었습니다. 그래서 양털과 면화로 고급 옷을 생산하여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방직공장이 많이 있고, 관광객들에게 가죽옷을 특산물로 만들어 패션쇼를 통해 많이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지역은 부요했습니다. A.D.60년에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가운데서도 재건을 돕겠다는 로마황제의 제의를 거절하고 자력으로 재건할 정도로 부요했습니다. 그런 지역에서 사는 라오디게아 교인들 역시 부요했습니다. 그런 연고로 그들은 모든 것이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 부요한 마음 때문에 영적인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은 것입니다. 죄에 대해 회개할 필요성도 못 느끼고 말씀대로 살아야할 필요성도 못 느낀 것입니다. 영적으로 미지근한 상태에 있게 된 것입니다.

 

  라오디게아교인들은 외적으로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전혀 없는 부요한 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영적으로는 곤고하고 가련한 상태에 있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 그들은 곤고하고 가련했습니다. 곤고하고 가련하다는 것은 불행하고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곤고한'(παλαιπωρος)은 불행한 것을 의미하고, '가련한'(ελεεινος)은 불쌍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불행하고 불쌍한 가운데 있는 것은 영적으로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금이 많았지만 영적으로는 가난했고, 안약은 많았지만 영적으로는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가운데 있었고, 흰옷은 많았지만 영적으로는 벌거벗은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벧전1:7, 9:39-41, 고후3:3).

 

   3) 주님의 권면 (18-20)

 

  19절에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징계하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듀오'(παιδευω)'징계하다'는 의미보다는 '교육하다' '훈계하다' '훈련시키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자를 훈계하여 교육한다는 것입니다 (12:8, 삼하7:14). 그런데 '사랑''아가파오'(αγαπαω)가 아니라 '필레오'(φιλεω)입니다. 아가파오는 하나님의 사랑 곧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하고, 필레오는 인간의 사랑 곧 친구간의 사랑을 말합니다. 히브리인들이게 있어서 진정한 친구는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와 같은 사랑은 말합니다. 요한복음15:13-14"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선생이 사랑하는 제자에게 훈계하고,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훈계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필레오'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한다고 하신 것은 주님이 신적 위엄으로 책망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혹은 선생이 사랑하는 제자에게 훈계하듯이 한다는 것입니다. 애정 어린 마음으로 따뜻하게 진정 자기 자신처럼 생각하는 마음으로 권면한다는 것입니다.

 

   ①금과 흰 옷과 안약을 사라고 했습니다.

 

  18절에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했습니다.

 

  첫째,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했습니다. 육적으로 금은 많이 가지고 있어서 부요하지만 영적으로 금이 없어 가난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한 것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은 정제된 금을 말합니다. 그래서 연단한 금은 시련 가운데 연단된 믿음을 상징합니다 (벧전1:7, 4:12, 5:3, 23:10). 베드로전서1:7"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바로 살려는 열심을 내면 반드시 시련이 오는데, 그 시련 가운데서 인내 하면 부패한 성품이 빠져나가고 순금같이 정결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시기와 질투와 다툼과 허영과 욕심과 고집과 교만 등이 빠져 나가고 신앙 인격이 만들어져갑니다.

 

  둘째, 흰 옷을 사라고 했습니다.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육적으로는 흰 모직으로 만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옷을 입지 않은 벌거벗은 가운데 수치를 드러낸 상태에 있으므로 흰 옷을 사서 입으라는 것입니다. ‘흰 옷은 의로운 행실에 대한 상징입니다 (16:15, 19:8, 고전3:15). 요한계시록19:8"~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고 했습니다. 금은 내적 믿음의 인격을 말한다면, 옷은 외적 의의 행위를 말합니다. 외적 행위에 있어서도 수치가 드러나지 않도록 제어해 나가야 합니다.

 

  셋째,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했습니다. 육적으로 눈을 뜨고 있지만 영적으로 맹인처럼 보지 못한 가운데 있으므로 육적인 안약이 있는 것으로 자랑하지 말고 영적인 안약을 사서 보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안약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상징합니다 (9:6-11,39 왕하5:10-14). 요한복음9:11"~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만큼 영안이 밝아져 영적 가치 곧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깨닫게 됩니다. 한편 사서라는 말은 수고와 노력과 희생의 대가가 있다는 것이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연단된 믿음과 의로운 행실과 말씀에 대한 순종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얻기를 추구하되 그에 따른 희생이 있을 것을 각오해야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떤 손해와 모욕이 따르더라도 그 가치를 알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3:8).

 

   ②열심을 내고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19절에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의욕없는 무기력한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즉시 회개하고 지속적으로 열심을 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교회와 성도가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죄를 원통히 여기고 하나님께로 돌이켜 말씀 가운데로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상한 심령을 가지고 마음을 찢으며 어찌할꼬 하는 마음으로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51:17, 2:13, 2:37, 3:5-6). 그리고 열심을 내기를 원합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를 원하십니다 (12:11, 벧전3:13).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 말씀을 지키는 열심, 기도하는 열심, 전도하는 열심, 사명을 감당하는 열심,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는 열심이 특심하기를 원하십니다 (22:30, 8:35-38, 11:36-40, 3:16-18, 6:10-16, 2:17, 20:22-24, 고후7:7, 9:2).

 

   ③음성을 듣고 문을 열라고 했습니다 (20).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문밖에 서서 두드린다고 했습니다. ''은 라오디게아교인들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서서'(εστηκα)는 시상이 완료 시상으로서 이미 와서 문 앞에 서 계시는 상태를 말하고, '두드리니(κρουω)는 시상이 현재 시상으로서 지금 계속해서 두드리는 모습을 말합니다.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아 문을 두드리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열라고 이름을 부르며 소리치는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5:2-4, 고후6:2). 이는 인격성을 나타내는 동시에 급박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미 회개하고 열심을 내라는 권면을 했는데 그것은 교조적 권면이 아니라 인격적 권면이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뒤에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당장에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열심을 내라는 권면을 당장 실행하는 것은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서로 먹고 마시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나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상호내주하며 식탁교제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6:35, 55-58). 우리는 교제라 하면 음식을 먹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중국 가정교회 성도들은 신앙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섬긴다는 말도 돈 내서 밥을 사는 데에 많이 사용하는데, 그들은 주를 위해 헌신하는 데에 많이 사용합니다. 그 식탁교제는 온갖 음식과 위로와 기쁨이 있는 교제입니다. 주님은 회개하여 열심을 내는 자에게 성령님을 통해 교제하십니다 (14:23). 거기에는 육적인 부요로 인하여 있었던 위안과 기쁨보다 더 큰 평안과 희락이 있습니다. 돈과 허영과 건강보다 더 큰 행복감을 줍니다 (26:29, 6:56).

 

   4) 주님의 약속한 상급

 

  21절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기는 자는 회개하고 열심을 내는 자입니다. 주님의 권면을 듣고 마음을 열어 실행하는 자입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주님이 자기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동시에 주님이 가지신 권세에 참여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19:28).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고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얻고 하나님의 권세를 누린 것처럼 (16:33, 16;19),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자도 주님이 누린 영광과 권세에 참여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왕자가 거지를 데리고 왕궁으로 가서 자기 자리에서 음식을 먹게 하고 자기 자리에서 집무를 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結言>

  우리가 신앙의 연조가 쌓이면서 속기 쉬운 것 중의 하나는 물질문명에 빠져 신앙적으로 태만해지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의에 대한 열정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세대에 대해 마태복음11:17에서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터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동무들을 불러 두 편으로 갈라서 놀이를 했습니다. 그 놀이는 당시 어른들의 결혼식과 장례식을 빙자한 놀이였습니다. 한쪽 편에서 결혼식에서처럼 피리를 불면 다른 편에서는 춤을 추고 기뻐해야했습니다. 그런데 한쪽 편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쪽 편에서 다른 편에 있는 아이들을 계속 같이 놀게 하려고 장례식에서처럼 애곡을 했습니다. 마땅히 다른 편에서는 가슴을 치며 호응을 해야합니다. 그런데 한쪽 편에서 애곡을 하는 데도 가슴을 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한 것은 당시 세대 사람들이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메시지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관심하고 무시하고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했습니다 (11:17-24).

 

  주님이 문 앞에서 우리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르면서 두드려야 하는데 (7:7, 11:9),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으로 우리를 부르면서 두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