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갈라디아서1:1-24
<題目> 복음에 대한 변호
<序言>
일명 '소(小)로마서'라고 불리는 본서는 구조적으로 로마서와 유사합니다. 주제면에 있어서도 로마서가 강조하고 있는 이신득의(以信得義)원리가 일관되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문안 인사(1-5절),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책망(6-10절),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한 변호(11-24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문안 인사 (1-5절)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을 '사도'라고 칭하면서 그것은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1절). '사도'(使徒, αποστολοs)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전도를 위해 보냄을 받은 자라고 소개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도의 조건을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부활하실 때까지 함께 다닌 것과 예수님이 부여한 복음 전도를 위해 선택받은 자로 여겼습니다 (행1:21-26). 그런데 바울은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목격하거나 맛디아처럼 공식적으로 선출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연유 때문에 유대인 교사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했고 그에 따라 바울이 가르친 이신득의의 교훈도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복음전도의 사명을 주어 보낸 사건을 근거로 자신을 사도라고 한 것입니다 (행9:1-7, 26:14-18). 그래서 자신이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수리아에 있는 안디옥교회에서 파송을 받았지만 (행9:17, 13:1-3)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보낸 사도라고 했습니다. 당시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을 미혹하는 유대 교사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면서 바울이 가르친 바른 복음을 부정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미혹받은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을 권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사도라는 사실을 전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때에나 사역자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웠다는 사실을 인정되지 않고는 그 사역자가 가르친 바른 진리가 세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2-3절). '함께 있는 모든 형제'는 3차 전도여행 중 고린도에서 보낸 편지로 볼 때 고린도에 선교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 믿기 시작한 사람들을 통틀어 한 말일 것입니다 (Hendricksen). 그 중에서도 바울과 함께 갈라디아교회들이 당한 문제를 염려하며 그들의 신앙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G.Osbome). '갈라디아 여러 교회'는 구체적으로 어느 교회를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1차 전도여행(A.D.46-48년) 때 세운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는 축복의 인사는 바울에게 거의 정형화된 표현입니다. '은혜'(χαριs)는 문자적으로 '호의' '선물' '기쁨' '감사'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의미상으로는 죄로 인해 죽게 된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용서해 주시고 죄의 모든 결과에서 구원해 주신 선물을 말합니다. 넓게는 대속으로 인한 구원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계속적인 선물들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평강'(ειρηνη)은 문자적으로 '화목' '평화' '평안' '안전' '안식' '번영'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주신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모든 복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은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입니다.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기 몸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4절).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죄로 말마암아 죽어 지옥하게 된 자기 백성의 죄값을 대신 치러 죄를 없애므로 죄와 죄의 모든 결과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차적으로 악한 세대에서 건지는 것입니다. '악한 세대'(πονηροs~αιων)는 '악한 세대' '사악한 세상'(evil world-KJV) 등의 뜻입니다. 세상은 악령이 지배하고 인간의 죄성이 지배하기 때문에 모두 악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하시려는 뜻을 거부하고 오히려 온갖 욕망으로 자기들의 의로운 행위로 의롭게 여김을 받으려 하기 때문에 사악합니다. 육체의 연약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그런 세상의 구조와 환경과 사상과 통념에서 저항하거나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순전히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구원하므로 그 세상 사고에서 벗어나게 하려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으로 의롭게 된 자는 자기의 방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사고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이 이어서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고 했습니다 (5절). '영광'(δοξα)은 '거룩' '위엄' '영예' 등으로 뜻으로서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계획과 목적 등이 실현되어 그의 영예가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택한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고 악한 세대에서 건지려는 계획과 목적이 실현되고 그의 영예가 영원히 나타나기를 원한 것입니다. '아멘'(αμην)은 '굳건히' '확실히' '진실로' 등의 뜻으로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의 의미입니다.
2.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책망 (6-10절)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복음'(福音)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ευαγγελιον)으로 '기쁜 소식' '좋은 소식'입니다 (good news).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그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고 부활하셔서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 어떤 노력으로도 죄와 형벌에 대해 구원을 얻을 수 없어서 절망 가운데 있는 있는 존재인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대속해 주시므로 그를 믿기만 하면 죄를 용서받고 의롭게 되어 구원을 얻는다니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바른 복음'이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以信得救).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以信得義). 로마서1:17에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고, 로마서3:28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했고, 로마서5:1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 혹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사람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복음'이란 바른 복음과 다른 복음으로서 복음이 아닌 것을 말합니다. 특히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시킨 율법주의자들이 말하는 복음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왜곡시킨 것으로서 바른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를 속히 떠나 다는 복음을 따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6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부르신'은 하나님이 죄와 죄의 모든 결과로부터 구원하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선택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구원하여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죄와 죄의 모든 결과로부터 구원한 것은 어떤 행위의 노력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전한 바른 복음의 도리였습니다. 그 복음을 받아 구원을 받은 자는 마땅히 그 도리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속히 다른 복음을 따랐습니다. 바울은 그것에 놀라고 분하고 실망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다른 복음은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고 다만 어떤 사람들이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7절). 바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는 것을 말하는 도리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한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얻는다는 것을 말하는 교훈입니다. 그것은 복음의 의미를 왜곡한 것으로서 바른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알고 있는 바른 복음을 변질시킨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들이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들이라도 자기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8절).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은 바른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이신득구(以信得救)의 내용이었습니다 (행4:12).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외의 내용은 다른 복음으로서 바른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누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란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천사가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바른 복음을 전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 다른 복음을 전달하는 천사가 있다면 그것은 선한 천사가 아니라 악한 천사로서 악령인 사탄이나 마귀나 귀신일 것입니다. 고린도후서11:14-15에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자기들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9절).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사람을 좋게 하거나 기쁘게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좋게 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사람들의 기쁨을 구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10절).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책망하고 나서 그 책망이 듣기에 몹시 기분이 나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바른 교리를 세우기 위해 그런 책망을 할 수 밖에 없음을 피력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사역에서 사람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때론 사람보기에 좋게 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는 그 또한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9:19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에게는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처럼 율법에서 자유한 자에게는 율법에서 자유한 자처럼 대한 것, 곧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으로 대한 것은 사람의 비위를 맞춰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아무쪼록 복음의 효과를 얻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고전9:20-23). 그러나 복음 진리가 훼손되어 성도들이 바른 복음에서 떠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성도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 책망을 해서라도 돌아오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사람을 배려한 것이든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것이든 어떻게든지 하나님이 주신 복음전도의 사명을 감당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정신을 가진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있어서는 기분이 상할지라도 책망을 해서 바른 복음을 세우도록 하려 한 것은 그가 얼마나 바른 복음을 세우려는 열정이 있는지, 얼마나 성도의 영혼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교회를 위하는지,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정신이 있는지를 알게 해 주는 부분입니다.
오늘날에도 바른 진리를 훼손하여 순수한 교회를 파괴하고 순전한 성도를 교리적으로 타락하게 하는 이단 교훈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교훈이 들어오는 것을 생명 내놓고 막아야 합니다. 주께서 7교회 중 에베소교회에 대해서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물리친 것을 칭찬했고 버가모교회와 두아디라교회는 발람의 교훈과 이세벨의 교훈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 책망했습니다 (계2:6,14,20). 우리는 이단의 교훈을 생명 내놓고 막아야 합니다 (삼상17:33-34).
3.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한 변호 (11-24절)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11-12절).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 전승받거나 교육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색출하여 결박해 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말씀하시므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사실을 알았고 그 예수님으로부터 그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행9:4-26).
바울이 원래 유대인으로서 유대교에 있을 때 유대인중 여러 연갑자들보다 지나치게 믿어 조상의 전통에 대해 더욱 열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14절). '조상의 전통'은 유대인들이 만든 율법적 전승과 규범들을 말합니다. 그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율법에 대해 배우기 위해 길리기아 다소에서 예루살렘까지 유학을 왔고 유대교의 대학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되었고 문하생들 가운데서도 뛰어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율법적 전승과 규범에 대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연구하고 지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고 멸했다는 것입니다 (13절). 대제사장의 재가를 받아 예루살렘(유대)에서 다메섹(수리아)까지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고 결박하고 심지어는 복음을 전하던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데까지 앞장섰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어머니 태로부터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부르셔서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게 하기 위해 그를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15절). 하나님이 바울을 구원하여 이방전도자로 삼기 위해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니 주권적 은혜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 주시고 속에서 성령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전도가 목표가 되고 가치가 되고 기쁨이 되고 능력이 되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바울은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고 사도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16-17절). 복음 전도 사명을 위해 사람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하고 이방인의 사도로 사명을 받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어떤 사람과도 의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이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만난 예수님과 그가 받은 복음은 너무나 강력하여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출신과 유전과 학문과 경험을 한꺼번에 바꾸어 놓았고 그에게는 더 이상의 확인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들르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아라비아가 광범위하기 때문에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라비아와 다메섹은 바울에게 복음에 대한 영향을 줄 만한 사람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그 후 3년 만에 예루살렘에 가 게바(베드로)를 방문하여 그와 15일을 함께 지냈고 그 기간에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는 다른 사들을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18-19절). 바울이 베드로를 만나 자신이 회심하고 이방전도를 위해 보냄 받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동생 야고보를 잠깐 만나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난 사실을 말한 것은 예루살렘에 가기는 했지만 그 곳에서 자신이 가진 복음과 사역에 대해 배울 어떤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았고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지만 짧은 기간 동안 만나므로 그들에게 기초적인 확인은 했지만 그들에게 배운 것이 아님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말하는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20절). 그 후에 바울이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자기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바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21-24절).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를 들러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다가 수리아 안디옥에서 함께 사역하기를 바라는 바나바의 요청을 따라 수리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행9:30, 11:25-26). '길리기아'는 지금의 터키 남동부 연안지역이고 '수리아'는 지금의 시리아 지역입니다. 그 지역의 유대인 교인들이 바울을 직접적으로는 알지 못할지라도 간접적으로라도 알고 있는 바, 자기들을 박해하여 복음을 멸하려 했던 자가 이젠 그 복음을 전한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길리기아와 수리아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는 곳이 아니므로 바울에게 복음에 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 자신이 복음전도 사역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 나타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거짓없는 참 복음인 것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하게 되고 그에게 이방 전도 사역에 대한 사명을 부여 받은 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에 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연도 아니고 자신에 의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 의한 것도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49:1에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고 했고, 예레미야1:5에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고 했습니다. 에베소서1:4-5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부르심과 사역에 대한 부르심이 사람에 의한 것도 자신에 의한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은혜에 의한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자가 구원과 신앙과 사역에 대한 정체성이 확고한 자입니다.
<結言>
바울은 유대 거짓 교사들로부터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고 자신이 전한 복음에 견고히 서길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전한 복음이 바른 복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적인 개인 역사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20절에서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삶과 사역에서 '하나님 앞에서'(ενωπιου του θεου, before God) 정신을 가졌습니다. 사도행전23:1에서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한 고백과 상통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도 종교개혁 정신으로 이어져 온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를 신앙의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우리도 삶과 사역에서 있어야 할 정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