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갈라디아서2:1-21

<題目> 사도권과 이신득의

 

<序言>

  바울은 전 장에서 바울의 수도직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1:12). 전 장에서는 다소 주관적 관점에서 증거했다는 본 장에서는 그 증거를 객관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전 장에서 바울 자신의 회심 과정과 초기 행적을 통해 증거했거니와 본 장에서는 외부적인 요인들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예루살렘교회로부터 받은 인정(1-5절),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책망(6-10절), 베드로에 대한 책망(11-14절), 이신득의의 원리(15-21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예루살렘교회로부터 받은 인정 (1-10절)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14년 후에 다시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1절). '14년 후'가 회심한 후로부터 14년 후인지 회심한 후 3년만에 첫번째로 방문했는데 그 후로부터 14년 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1:17-18). 바울이 회심한 후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은 모두 5번입니다. 첫번째는 회심한 후 3년 후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서 방문했고 (1:18, 행9:26), 두번째는 안디옥교회의 구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서 방문했고 (행11:29-30), 세번째는 공회에서 사도권을 변증하기 위해서 방문했고 (행15:1~35), 네번째는 2차 전도여행이 끝날 무렵 가이사야에 들러 안디옥으로 행하던 중에 방문했고 (행18:22), 다섯번째는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붙잡혀 로마로 호송되기 전에 방문했습니다 (행21:15~23:35). 본문에 언급한 방문은 두번째 방문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Bruce, Calvin). 그 때 동행자는 바나바와 디도입니다. '바나바'(Barnabas)는 유대인의 레위지파 출신으로 구브로에서 태어나 바울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 들였고 이방인들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있었고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안디옥교회로 파송되었습니다 (행11:22). 그의 본명은 요셉이었으나 '권위자'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바나바로 불렸습니다 (행4:36). 그는 성령과 믿음에 충만한 자로서 (행11:24) 초대교회의 헌신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회심한 바울을 예루살렘교회에 있는 사도들에게 소개했고 사람들에게 바울의 체험이 진실됨을 변호했고 바울과 함께 동역을 했습니다. 2차 전도여행 중 마가 동행 문제로 결별하기는 했지만 (행15:36-41) 후에 다시 바울의 동역자로 함께 했습니다. '디도'(Titus)는 출생지가 어디인지 국적이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이방인으로서 바울의 전도를 받아 개종한 자로서 바울이 디모데와 함께 '나의 참 아들 디도'라고 할만큼 신임하는 동역자였고 (딛1:4), 바울에 의해 고린도교회에 파견되어 목회사역을 감당하기도 했습니다 (고후8:23, 12:18). 그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그가 로마에서 달마디아로 갔다는 기록입니다 (딤후4:10).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은 계시를 따른 것이며 이방 가운데 전파하는 복음을 예루살렘교회 사도들에게 제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절). '계시'(αποκαλυψιs)는 감추었던 것을 열어 보여 주는 것을 말합니다. 예루살렘 방문이 계시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뜻을 보여 주셔서 그 뜻을 따라 방문했다는 것인데 그 계시의 방법은 환상에 의한 것이었는지 마음의 감동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은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려는 정신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목적은 예루살렘교회 사도들에게 이방 가운데 전파하는 복음을 제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시하되'에 해당하는 기본형 '아나티데마이'(ανατιθεμαι)는 '나타내다' '알리다' '설명하다' 등의 뜻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은 사도들에게 자신이 이방에서 전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며 그 결과로 인한 성과들을 종합적으로 설명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말하면서도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어진 언약적 표징인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고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방 전도를 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할례나 율법이 구원받는 조건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대속을 이루어 주셨으므로 할례나 율법의 의무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고 이방에 교회들이 생겨났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그 사실을 예루살렘교회 사도들에게 설명하며 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과 결과를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동일한 역사로 인정하고 그 인정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힘을 얻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자신이 달음질하는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2절). '유력한 자들'은 예루살렘교회 여러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복음에 대해 공적으로 설명한 것 외에도 여러 지도자들을 개인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에 대해 공적으로 설명하고 개인적으로도 설명했을 텐데 그것은 자신의 달음질하는 것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치 달리기 선수가 목표 지점을 향해 최선을 다해 달리듯이 바울도 예수님이 부여한 이방 복음전도 사역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고전9:26, 행20:24, 빌1:20-21, 3:12-14, 딤후4:7).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자기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3절). '할례'(割禮)는 남자 아이가 태어난지 8일째에 성기 끝의 표피를 베는 의식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자손 대대에 이르기까지 거행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창17:10-14). 유대인들은 신약시대에도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언약에 포함된 자라는 증거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하고 이방인에게도 할례를 받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심지어 유대 교사들은 바울에게 동역자 디도에게도 할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으로 구약의 요구와 의무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신념을 보여주기 위해서 디도에게 할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은 할례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예루살렘교회에 가면서 디도를 데려갔습니다. 그것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이라도 얼마든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전도자가 될 수 있고 목회자의 직분까지도 훌륭하게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할례를 받지 않게 한 것은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 자신과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자유를 엿보고 종으로 삼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4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 교사들을 '거짓 형제'라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복음을 전할뿐 아니라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 하기 때문에 형제 같지만 실상은 형제로 볼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미와 효과를 왜곡하여 은밀하게 복음을 훼손하는 자들로 본 것입니다. 율법의 정죄와 의무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무시하고 그리스도인을 다시 율법의 정죄와 의무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사탄의 일꾼으로 본 것입니다 (고후11:13). 바울은 그들에게 한시도 복종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복음의 진리가 항상 갈라디아교인들 가운데 있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5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 주장에 대해서는 바른 복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전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들이 된 자들이 그 바른 복음 진리 곧 '결함이 전혀 없는 복음'에 굳게 서 있게 하기 위해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일시도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바른 진리를 세우려고 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교인들이 바른 진리에 서기를 노력는 정신이 있는지 알게 하는 부분입니다. 바른 진리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양보하지 말아야 합니다. 심을철 목사는 마귀가 성도를 시험할 때 4단계로 시험한다고 했습니다. 첫번째는 '한 번만'이고 ,두번째는 '남도 그러는데'이고, 세번째는 '염려없다'이고, '차차하자'라고 했습니다.

 


       2.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책망 (6-10절)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복음'(福音)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ευαγγελιον)으로 '기쁜 소식' '좋은 소식'입니다 (good news).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그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고 부활하셔서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 어떤 노력으로도 죄와 형벌에 대해 구원을 얻을 수 없어서 절망 가운데 있는 있는 존재인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대속해 주시므로 그를 믿기만 하면 죄를 용서받고 의롭게 되어 구원을 얻는다니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바른 복음'이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以信得救).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以信得救義). 로마서1:17에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고, 로마서3:28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했고 로마서5:1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 혹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사람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복음'이란 바른 복음과 다른 복음으로서 복음이 아닌 것을 말합니다. 특히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시킨 율법주의자들이 말하는 복음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왜곡시킨 것으로서 바른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를 속히 떠나 다는 복음을 따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6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부르신'은 하나님이 죄와 죄의 모든 결과로부터 구원하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선택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구원하여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죄와 죄의 모든 결과로부터 구원한 것은 어떤 행위의 노력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전한 바른 복음의 도리였습니다. 그 복음을 받아 구원을 받은 자는 마땅히 그 도리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속히 다른 복음을 따랐습니다. 바울은 그것에 놀라고 분하고 실망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다른 복음은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고 다만 어떤 사람들이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7절). '다른 복음'은 '또 하나의 복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복음과 다른 것으로서 복음이 아닌 것을 의미합니다. 바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는 것을 말하는 도리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한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얻는다는 것을 말하는 교훈입니다. 그것은 복음의 의미를 왜곡한 것으로서 바른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알고 있는 바른 복음을 변질시킨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들이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들이라도 자기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8절).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은 바른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이신득구(以信得救)의 내용이었습니다 (행4:12).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외의 내용은 다른 복음으로서 바른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누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란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천사가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바른 복음을 전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 다른 복음을 전달하는 천사가 있다면 그것은 선한 천사가 아니라 악한 천사로서 악령인 사탄이나 마귀나 귀신일 것입니다. 고린도후서11:14-15에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자기들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9절).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사람을 좋게 하거나 기쁘게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좋게 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사람들의 기쁨을 구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10절).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책망하고 나서 그 책망이 듣기에 몹시 기분이 나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바른 교리를 세우기 위해 그런 책망을 할 수 밖에 없음을 피력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사역에서 사람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때론 사람보기에 좋게 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는 그 또한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9:19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에게는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처럼 율법에서 자유한 자에게는 율법에서 자유한 자처럼 대한 것, 곧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으로 대한 것은  사람의 비위를 맞춰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아무쪼록 복음의 효과를 얻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고전9:20-23). 그러나 복음 진리가 훼손되어 성도들이 바른 복음에서 떠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성도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 책망을 해서라도 돌아오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사람을 배려한 것이든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것이든 어떻게든지 하나님이 주신 복음전도의 사명을 감당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정신을 가진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있어서는 기분이 상할지라도 책망을 해서 바른 복음을 세우도록 하려 한 것은 그가 얼마나 바른 복음을 세우려는 열정이 있는지, 얼마나 성도의 영혼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교회를 위하는지,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정신이 있는지를 알게 해 주는 부분입니다.


  오늘날에도 바른 진리를 훼손하여 순수한 교회를 파괴하고 순전한 성도를 교리적으로 타락하게 하는 이단 교훈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교훈이 들어오는 것을 생명 내놓고 막아야 합니다. 주께서 7교회 중 에베소교회에 대해서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물리친 것을 칭찬했고 버가모교회와 두아디라교회는 발람의 교훈과 이세벨의 교훈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 책망했습니다 (계2:6,14,20). 우리는 이단의 교훈을 생명 내놓고 막아야 합니다 (삼상17:33-34).

 


       3. 베드로에 대한 책망 (11-14절)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바울은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게바가 책망받을 일이 있어서 그를 대면하여 책망했다고 했습니다 (11절). '게바'(Cephas)는 아람어(수리아어)로서 헬라어로는 '베드로'입니다. '안디옥'(Antioch)은 갈라디아에 속한 비시디아 안디옥이 아니라 수리아 안디옥을 말합니다. 수리아 안디옥은 수리아의 수도였으며 당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3대 도시 중 하나였으며 고대 세계에서 근동과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중요한 위치에 있어 무역의 중심지로 발달했습니다. 그 곳은 이방교회의 중심지였고 바울이 이방선교의 기지로 삼았던 곳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수리아 안디옥을 방문했을 때 베드로가 잘못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바울이 베드로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지적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오자 베드로가 할례자들을 두려워 하여 그 자리를 떴고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했고 심지어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던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12-13절). 베드로가 안디옥교에서 체류하는 동안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식사는 교회 공동체적으로 하는 애찬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 예루살렘교회에서 야고보가 파송한 유대인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파송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여간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장소에 오자 베드로는 그들에게 이방인과 식사를 함께 한 장면을 보이지 않기 위해 급히 그 자리를 뜬 것입니다. 그 모습에 함께 식사를 하던 유대인들도 자리를 떴고 유대인 출신인 바나바도 그 자리를 떴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할례받은 유대인으로서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한 것을 유대인들이 문제 삼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할례'(割禮)는 남자 아이가 태어난 지 8일째에 성기 끝의 표피를 베는 의식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자손 대대에 이르기까지 거행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창17:10-14). 유대인들은 신약시대에도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언약에 포함된 자라는 증거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할례를 받은 유대인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자로서 거룩한 자들이고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은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부정한 자들이라는 인식을 가졌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이방인들과 함께 교제하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식사도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요4:9). 베드로가 처음에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한 것은 이방인도 믿음으로 동일하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구원을 받는 것은 혈통적으로 유대인이어야 하거나 할례를 받아야 하거나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유대인이든 이방이든 동일한 구원을 받아 거룩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다 (행11:5-7, 15:7-11). 그런데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는 중에 예루살렘교회에서 온 유대인들을 보자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지 않으려는 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이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는 것을 보면 문제를 제기할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은 것처럼 어른 그 자리를 떠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다르게 외식을 한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함께 식사를 하던 유대인들도 베드로의 행동에 영향을 받아 그 자리를 떠나 버렸습니다. 심지어 안디옥교회 지도자인 바나바도 머뭇거리다 함께 이끌려 나갔습니다. 그것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을 것입니다. 같은 그리스도인들끼리 혈통에 따라 차별받는 것도 상처였겠지만 무엇보다도 모체 교회인 예루살렘교회에서 온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신념을 혼란스럽게 한다는 점에서 큰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득구의 바른 복음 진리대로 행하지 않는 것을 공개적으로 시정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특히 베드로의 행동은 복음진리를 세워 나가는데 있어서 막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냉정하게 문책할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에게 모든 자들 앞에서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고 책망했습니다 (14절). 이는 베드로가 유대인이지만 구원관에 있어서 유대인처럼 살지 않고 이방인처럼 살았는데 왜 이제와서 유대인처럼 행동하여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처럼 살게 하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바른 복음진리에 서서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의 행위에 구애를 받지 않았으면서 왜 이제와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처럼 행동해서 복음진리를 혼동스럽게 하느냐는 질책입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질책한 사건에서 두 가지 관점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바울의 관점에서 보면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득구의 바른 복음진리가 훼손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직계 수제자이며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이며 바울의 대선배였습니다. 공개적으로 그의 행동을 질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 개역성경처럼 반말 조로 정죄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되지만 엄중하게 질책을 한 것은 그가 얼마나 바른 복음진리를 세우려 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인 루터나 쯔윙글리나 칼빈도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그 바른 복음진리를 세웠습니다. 오늘날 바른 복음진리가 훼손되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할 정신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관점에서 보면 베드로가 당시 여러 모로 자기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바울이 잘못을 지적할 때 그것도 공개적으로 지적할 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공개적인 지적이 있을 때 베드로가 어떤 반응도 나타내지 않은 것을 보면 바울의 지적을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는 바울이 바른 복음진리를 세우기 위해 책망한 줄 알고 자기의 위신을 생각지 않고 자기의 외식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고 시정한 것 같습니다. 아무리 옳은 것을 말해도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우리와는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행동을 정당화하므로 권위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진리와 복음사역을 위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자가의 권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4. 이신득의의 원리 (15-21절)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울은 본래 유대인으로서 이방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15절). '이방 죄인'은 바울이 이방인을 죄인으로 여긴다는 말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죄인으로 여긴다는 것에 대한 표현입니다. 바울 자신도 유대인이지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했고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16절). '의'(δικαιοσυνη)는 하나님의 속성에 속하는 것인데 하나님 기준에서 옳게 여기는 것을 말하는 바, 의롭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어집니다. 이방인뿐 아니라 유대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행위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다면 누구도 의롭게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언약 백성으로 택하시고 그 후손들에게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그 율법을 온전히 행해야 의롭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을 온전히 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의롭게 하는 방편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그가 대신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시므로 의롭게 하는 방편을 주셨습니다. 그런 고로 그가 택한 백성을 대신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것, 곧 대신 죄를 짊어지고 죄값으로 죽으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것을 믿는 자에게는 그가 이루신 의가 전가되어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롬5:18-19).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에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는 것입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17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믿는 우리가 만일 죄인이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를 짓게 한 분이 된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고 했는데 다시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스스로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18절). 바울은 결코 과거에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던 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해 죽었고 하나님에 대해 살려 한다는 것입니다 (19절).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소망을 완전히 버리고 율법과의 관계를 완전히 끝내고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받아들이므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려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함께 못 박혔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셨을 때 자기도 함께 살았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 안에서 산다고 했습니다 (20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죄를 짊어지고 대속하여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어 그것을 믿는 자기에게 의를 입혀 주셨으니 이제는 이제는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삶을 사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얽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끌려 산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종 노릇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종 노릇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21절). 다시 율법에 얽매여 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3:24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 되고 은혜의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우리에게 전혀 불필요한 것이란 말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구원과 관련하여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깨달아 죄를 더욱 많이 인지하게 하고 사람의 노력으로는 그것을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알게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을 바라보게 하고 하나님이 주권적인 은혜의 방법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로마서3:20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고, 로마서5:20에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3:24에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구원과 관련하여 율법이 주어진 것은 죄를 깨달아 인간으로서는 죄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절감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율법이 불필요한가. 그것은 아닙니다. 믿음과 칭의로 구원을 얻은 자에게 성화를 위해 계속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뜻을 알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 데에 표준이 되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또한 율법을 통해 인간의 무력함을 절감하면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은혜를 더욱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며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성화에서도 율법을 거부한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자기 노력으로 행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도 죄성이 지배하여 여전히 범죄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절망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된 것을 받아 들이므로 감사가 넘쳤고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려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은혜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롬7:15-25, 8:1-2).

 

<結言>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칭의와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는 율법으로는 안되고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신득구(以信得救)의 진리를 굳게 세워야 합니다. 그것은 구원(救援)이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화(聖化)에 있어서도 우리의 행위와 노력과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줄 알고 하나님의 은혜에 이끌려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