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갈라디아서3:1-29
<題目> 율법과 복음
<序言>
1-2장에서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로부터 복음진리를 지키기 위해 사도권을 변호하는데 집중했습니다. 3장에서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배교를 꾸짖고 율법과 복음의 관련성에 대해 다룹니다. 적극적으로 율법과 복음을 대조시켜 복음의 진의를 밝히고 동시에 율법주의의 거짓을 폭로합니다. 본 장의 내용구조는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책망(1-5절), 아브라함의 의와 믿음(6-9절), 행위와 믿음의 근본적 차이(10-14절), 아브라함의 언약과 율법(15-18절), 율법과 언약의 역할(19-22절), 율법의 역할과 한계(23-25절), 믿음으로 얻는 복(26-29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책망 (1-5절)
바울은 복음으로 구원을 받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을 받아 잠시나마 율법으로 되돌아가려 했던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들을 효과적으로 책망하기 위해 수사학적 질문을 연속해서 던졌습니다. 자신의 논증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답변을 원하지 않는 설의법(設疑法) 형식으로 질문을 했습니다.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했습니다. '어리석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모로스'(μωροs)와 '아노에토스'(ανοητοs)가 있는데 '모로스'는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어 도덕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하고 '아노에토스'는 생각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바 본문에서는 '아노에토스'를 사용한 말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눈 앞에 밝히 보이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주의에 미혹당한 것을 이상히 여기면서 누가 꾀더냐고 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에게 못 박히신 사실과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가 율법의 정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율법에 얽매이는 것은 거짓된 교훈으로 율법주의자들 때문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2절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고 했고, 5절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고 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는데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을 배워 그것을 행함으로 얻은 것인지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얻은 것인지 물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미 성령을 받은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롬8:15, 고전3:16-17, 6:19, 고후1:22). 이는 자연스럽게 3절에 나오는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와 5절의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로 연결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미 예수를 믿어 성령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에 성령받는 것을 성령세례라고 합니다. 성령세례(聖靈洗禮)의 문자적인 의미는 성령으로 죄 씻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을 때에 성령이 내주하셔서 죄 용서받음과 의롭게 됨과 하나님의 아들됨과 거듭나게 되었음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성령세례는 일반적으로 잠재의식 가운데 경험하는 역사이며 결과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요3:7-8). 그것은 성령이 아니면 예수를 믿을 수도 시인할 수도 없으며, 말씀을 들을 수도 깨달을 수도 지킬 수도 없다고 증거하는 성경들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행2:38-39, 고전12:3, 마16:16-17). 일부 오순절주의 자들은 예수를 믿은 이후에 또다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며 그 증거를 방언 등 신비적 은사로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사도행전1:5, 2:1-13과 사도행전8:4-25과 사도행전10:44-48, 11:1-18과 사도행전19:1-7을 근거로 들고 있지만, 오순절날 예루살렘에 성령이 임한 사건은 예수의 탄생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 등의 연속선 상에 놓인 구속사(救贖史)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며 (고전12:13은 개인 구원의 체험), 사마리아와 가이사랴(고넬료 가정)과 에베소에 성령이 임한 사건은 예루살렘에 임한 성령이 사마리아와 소아시아에도 동일하게 임한 것을 보여 주므로 성령으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확대되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특수한 사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행1:8).
갈라디아 교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을 행함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받은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깨달아 행함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받은 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많은 외부적 고난과 내부적 고통 속에서도 그 진리를 세워 왔습니다. 4절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을 받아 율법을 행해야 구원받는다는 교훈을 받아들인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3절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인간의 육체적 노력으로 율법을 깨달아 지킨 것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성령의 단독적인 역사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율법주의의 교훈으로 기울어진 것은 성령으로 시작한 자들이 육체로 마치는 것과 같은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신득구의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것은 구원이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되어진 것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것은 앞으로도 하나님이 책임지고 인도해 주실 것을 붙잡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의와 믿음 (6-9절)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바울은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진리를 증거했습니다. 그것은 율법으로가 아니라 복음으로,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신약성경뿐 아니라 구약성경에서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쳤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행위를 보이기 전에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의로 인정했다고 했습니다. 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언약을 합니다. 창세기12:1-2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5장에서 그 언약을 재확인시켜 주실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이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창세기15:6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7장에서 할례를 받게 합니다. 창세기17:10-11에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2장에 가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내용이 나옵니다. 창세기22:8-9에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행위를 보이기 전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인정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이 행위를 나타낼 때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을 때였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인정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보여 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를 보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미리 선택하여 부르시고 그에게 복을 주시기로 계획했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이 그를 의롭게 하기로 미리 정했기 때문입니다. 의롭다는 선언은 그 근거가 하나님의 의지에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신앙의 모습을 나타낸 것은 그 당연한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4:2-3에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곧 아브라함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것을 기록한 것은 신약시대에 이방인들도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자기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는 것을 알게 해주기 위함입니다. 8절에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언약하실 때 그의 후손가지 포함시킨 것입니다. 창세기12:3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창18:18, 22:18). 그러므로 하나님이 은혜의 방법으로 제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자는 모두 아브라함처럼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됩니다. 7절에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고 했고 9절에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어서 구원받은 자를 이미 선택했습니다. 구원하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에베소서1:4-5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고 했고, 로마서8:29-30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롬9:13,행4:22, 눅22:22). 그것을 우리는 예정(豫定)이라고 합니다. '예정'이라는 말은 도적적 피조물(예수님, 천사, 인간)에게만 사용되며 구원에 관해서만 사용됩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예정하시고 선택한 자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대속하게 하시고 성령을 보내어 믿어지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인정받고 죄에서 구원받고 영이 거듭나게 된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무한히 감사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 대해 태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더욱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3. 행위와 믿음의 근본적 차이 (10-14절)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10절). '율법'은 기본적으로 모세 5경에서 말한 요구를 말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키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율법을 지키는 자를 의롭게 여기십니다. 그러나 신명기27:26에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를 인용하여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모든 것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타락한 존재로서 연약하여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지키지 못해서 율법의 정죄대로 저주를 받게 되므로 저주 아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했다는 것입니다 (11절). 율법 자체는 온전하지만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으므로 율법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박국2:4에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롬1:17). 이 말씀은 하나님이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려 한다는 것을 안 하박국 선지자가 어찌 하나님이 우상을 섬기는 이방 국가를 통해 언약의 대상인 유다를 심판하려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하박국2:4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바벨론은 교만하여 정직하지 못하지만 하박국 선지자를 비롯한 유다 백성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믿음을 가리킵니다. '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뻬에무나토 이헤이에흐'(יחיה באמונתו)는 유대 랍비 70명이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 70인역(LXX)에서는 'εκ πιστεωs μου '으로 번역했습니다. 의미상으로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로 번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박국 선지자에게 한 말이기 때문에 '나의 믿음'은 하나님의 믿음을 말한 것입니다. '믿음'에 해당하는 기본형 '에무나'(אמונה)는 성실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언약백성에 대해 대하시는데 있어서 성실하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언약백성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시고 그에 대한 선한 목적을 가지셨는데 그 목적을 반드시 이루어 가시는 성실함을 말합니다. '살리라'에 해당하는 '이헤이에흐'(יחיה)는 미완료형으로서 기본적으로 '살게 될 것이다'(will live -NASB,NIV)입니다 (적용상 '살아야 한다'로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shall live -KJV). 곧 하박국2:4의 의미는 바벨론이 교만하여 자기들 욕망대로 유다를 치겠지만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 대한 목적을 반드시 이루시는 성실함 때문에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유다를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다 백성이 사는 것은 그들의 실력이나 의지나 노력 등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과 은혜로 사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바울이 인용하여 말하려는 의도는 율법의 행위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되는 것임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또한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다고 했습니다 (12절).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살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믿음처럼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레위기18:5의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인용입니다. 율법은 모두 지켜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 자체는 완전한 것이지만 (롬7:12) 그것을 온전히 지킬 사람이 없기 때문에 율법은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보다는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했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은 자라 했다고 했습니다 (13절). 우리에게 율법이 주어졌지만 우리는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므로 그 율법의 정죄와 그 결과로 오는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내려진 정죄와 저주를 대신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그것을 다 짊어지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마치 팔려 가는 노예의 몸값을 주고 되찾아 온 것같이, 예수님이 우리의 죄값을 다 치르고 우리의 죄에 예속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은 자라'는 말은 신명기21:22-23의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인용입니다. 이는 나무에 달린 자가 저주를 받은 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율법을 어긴 자 곧 부모를 욕되게 한 자를 나무에 달아 죽였을 경우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그 땅을 더럽히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어겨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무에 달려 죽었기 때문에 저주 받은 자인 것이 아니라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저주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율법을 어긴 자는 율법의 정죄대로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정죄를 받아 죽으시므로 우릴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살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14절). 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우리를 구속해 주신 목적을 설명한 것입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이 복이 이방인데 미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고 언약하셨습니다 (창12:1-2).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으므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창15:6). 그것은 아브라함이 특별한 신앙행위를 보이기 이전이었습니다 (창22:8-9).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해 믿음으로 얻은 의를 얻은 것입니다. 그같은 은혜의 방법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이방인에게까지 미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혈통적 선택을 받지 않고 할례를 받지 않고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에게까지도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복을 얻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이 율법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한 믿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입니다. 구약시대부터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신다는 약속이 있었고 (겔11:19, 욜2:28-29), 예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약속이 있었습니다 (요14:16-18, 행1:8). 그 성령의 내주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믿을 때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인 것입니다. 성령을 받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본 단락은 행위와 믿음의 본질적 차이를 설명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행위는 율법의 행위를 말하고 믿음은 예수님의 대속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오직 예수님의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행위의 방법은 그 근거를 우리 인간의 노력에 두는 것이고 믿음의 방법은 그 근거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두는 것입니다.
4. 아브라함의 언약과 율법 (15-18절)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사람 사이의 언약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할 수도 없고 더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15절). 사람의 언약도 함부로 폐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더욱 그렇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17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이후에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기간이 430년입니다. 곧 모세의 율법은 아브라함의 언약 430년 후에 나타난 것입니다. 바울은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닌 것인데 하나님은 그 유업을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18절). '그 유업'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내용을 말하고 '약속'은 언약을 말합니다. '약속으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라'에 해당하는 원문에는 'δι επαγγελιαs κεχαρισται'인데 개역개정판에는 κεχαρισται에 대한 해석이 생략되었습니다. 'επαγγελιαs'의 기본형 'χαριs'(카리스)는 은혜, 호의, 친절 등의 뜻입니다. 'κεχαρισται'의 기본형 'επαγγελια'(에팡겔리아)는 약속, 선고, 알림, 통고 등의 뜻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내용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약속(선고, 알림, 통고)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선고, 알림, 통고)으로 주신 것이며 은혜(호의, 친절)로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15:4-5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했고, 창세기15:7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날 아들을 통해 자손을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을 주실 때 아브라함의 의향을 묻지 않고 순전히 일방적으로 통고하는 형식입니다. 그리고 창세기15:6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믿으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만'(אמן)은 '신뢰하다' '의지하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것은 그의 존재와 성품을 신뢰한다는 것으로서 그의 약속도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포함한 것입니다 (롬4:18). 아브라함이 어떤 인정받을 만한 행위를 보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유업으로 자손과 땅을 주신다는 약속을 받고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그 약속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불신보다는 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증거를 보여 달라는 질문인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와 염소와 비둘기와 비둘기 새끼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계약을 하기 위해서는 계약 당사자들이 짐승을 가져다 쪼개고 그 사이를 지나가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만일 계약을 어길 경우 그 짐승처럼 죽임을 당해도 좋다는 의미로 행한 의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짐승들을 잡아 절반으로 쪼갰습니다 (비둘기는 작아서 쪼개지 않음). 그러자 창세기15:17에 보면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고 했습니다. 당시 계약 관례로 보면 당사자인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쪼갠 짐승 사이를 지나가야 하지만 하나님만 지나가시고 아브라함에게는 지나갈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 약속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보다 완전한 자가 없으므로 하나님 자신이 주권적인 의지를 가지고 이룰 것이니 자기를 믿으라는 맹세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신 형식을 보면 통고 형식이고, 아브라함에게 보이신 증거를 보면 주권적 의지에 근거를 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반면에 율법은 율법을 받은 당사자의 행위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곧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당사자의 행위를 요구하는 율법이 430년 전에 주어진 언약(약속)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되어지는 것을 어찌 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약속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않고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16절). '이 약속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내용을 말합니다. 그 내용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자손과 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자들에게 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내용이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과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신 것인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되어진 것일진대 신약시대에 그 언약 안에 포함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된 것도 당연히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곧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사람의 행위를 요구하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주어지는 복음을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해 되어진 것임을 인식하고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젠 기쁨으로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신앙생활에서 은혜의 방법으로 살아야 합니다.
5. 율법과 언약의 역할 (19-22절)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바울은 지금까지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이신득의의 진리를 말해왔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수여된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19절). 이는 사람이 죄를 범하고도 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죄를 알게 하려고 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범죄하며 살면서도 자신들이 죄를 지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로마서4:15에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죄를 깨닫고 자신들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3:20에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들의 힘으로는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이루어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들을 의롭게 하여 구원해 줄 메시야를 대망하게 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 율법이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9절). 율법은 천사들을 통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7:53에도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히2:2). 그리고 하나님과 백성 간의 중개자 모세의 손을 빌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언약)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다는 것입니다 (창3:15, 창12:2, 15:4-5, 삼하7:12-13). 16절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었습니다. 율법을 죄를 깨닫게 하고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메시야(그리스도)를 대망하게 하는 역할로 주어졌기 때문에 구원(칭의)에 관한 한 메시야가 오신 다음에는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것이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20절). '중보자'(μεσιτηs)는 중개자, 중재자를 말합니다. 중보자는 당사자들 양편을 중개하는 자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천사와 모세라는 중개자를 통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언약)을 주실 때는 자기 편에서 일방적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실 것에 대한 약속은 일방적으로 주어졌으며 주권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창15:4-5,17, 갈3:16). 율법은 중보자를 통해 주셨다는 것은 사람에게도 이행을 요구했지만, 메시야에 대한 약속(언약)은 중보자 없이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권적 은혜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곧 율법은 당사자들에게 내용 이행을 요구하는 조항으로서 죄를 더 많이 깨닫고 죄인임을 더 인식하고 의에 대해 절망하므로 약속인 메시야를 바라보게 하기 때문에 구원(칭의)에 있어서는 필요 없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약속 성취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가지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21절). 율법이 구원(칭의)를 얻는데 불필요하다면 구원을 얻는데 전혀 역할을 못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죄와 죄인됨과 의롭게 되는 데에 불가능하다는 절망감을 가지게 해서 약속(언약)의 내용인 메시야의 필요를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율법과 약속(언약)은 역할과 목적에서 다른 것일 뿐입니다. 율법은 약속을 바라보게 하고 약속은 구원을 얻게 하는 역할과 목적을 가지고 있는 바, 둘 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경륜에 속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고 했습니다 (21절). 하나님이 율법을 주실 때 의롭게 되어 구원을 얻게 할 목적으로 주셨다면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되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그런 목적으로 주셨다면 약속의 내용인 메시야를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에게 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22절). '성경'은 문맥상 율법을 가리킵니다. 율법은 좁은 의미로는 모세를 통해 주신 성문율법을 말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율법서나 구약성경 전체를 말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은 그에 해당하는 'τα παντα'가 중성이지만 사람에 대해서도 남녀를 구분하지 않을 때에는 중성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바, '모든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것은 율법이 모든 사람을 죄에 속박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율법의 조항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사람에게 죄인이라는 정죄를 하고 그 결과 죽음을 선고합니다. 모든 사람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죄와 죄행의 결과로부터 절대로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22절). 사람이 절대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속박하는 율법을 주신 것은 약속을 믿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의롭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깨닫게 하고 죄인임을 알게 하고 스스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지게 하여 이제는 하나님이 주권적 은혜로 주신 약속을 절실하게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 하고 믿게 하게 하여 의롭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곧 율법이 구원(칭의)를 얻는 자체에는 무익하나 약속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칭의)를 얻게 하는 데에는 유익하게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현재에도 율법을 통해 죄를 알고 죄인임을 인식하고 스스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살 수 없는 것을 느끼며 늘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6. 율법의 역할과 한계 (23-25절)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우리는 믿음이 오기 전에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었다고 했습니다 (23절). 인생은 율법의 정죄로 죄인이 되고 그 죄의 결과로 고난과 죽음과 내세 형벌에 놓였었습니다. 율법을 깨달아 행할수록 죄가 많이 드러났고 부패한 성품이 반항하여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두려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율법의 압제와 감시를 받아 왔습니다. 속박되고 매인 바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의 방법으로 죄와 그 결과에서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그 죄값을 다 치르게 해 주시고 그를 믿는 자에게는 그 대속을 근거로 죄 사함과 칭의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대속해 주신 후에는 율법이 더 이상 속박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24절). '초등교사'는 개역성경에서는 '몽학선생'(蒙學先生)으로 번역했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파이다고고스'(παιδαγωγοs)는 '가정교사'입니다 (schoolmaster-KJV, tutor-NASB). 헬라 문화에서는 귀족 같은 부유한 집에는 종의 신분으로 있으면서 아이들을 돌보면서 때로 가정의 예법(의복, 식사 등의 예절)을 가르치는 일까지 담당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책임 가운데 하나는 아이가 집에서 학교로 가거나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동행하여 아이를 보호하며 길을 인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일과는 학교에는 전문지식을 가르치는 '디다스칼로스'(διδασκαλοs)로 일컬어지는 학교교사가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그에게 인도하면 일단의 책임을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아이가 성장하여 16살쯤 성인식이 거행하게 되면 책임과 역할은 완전히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는 다른 일을 하거나 다른 집으로 팔려 갔습니다. 바울은 가정교사가 아이를 학교교사에게 인도해주는 역할을 하고 아이를 학교교사에게 인도해주면 그 역할이 끝나는 것을 비유로 들었습니다. 율법을 가정교사로, 예수 그리스도는 학교교사로 비유한 것입니다. 학교교사는 전문교사이며 참 교사인 것입니다. 율법은 정죄하고 감시하고 억압하지만 죄의 결과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대속으로 죄값을 치러 죄의 결과에서 자유하게 할 수 있습니다. 죄 사함과 칭의 곧 구원을 얻게 합니다. 그런데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스스로는 절대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서,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방법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대속해 주실 때 그와 그의 대속을 믿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대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죄 사함과 칭의 곧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 때에는 율법의 요구와 정죄와 속박이 필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기초로 계속해서 말씀과 성령으로 가르치는 그의 인도를 받아 은혜생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믿음이 온 후로는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25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대속을 믿는 자에게는 구원을 위한 율법의 역할은 끝나게 끝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미혹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도 율법을 지켜서 (특히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이론을 받은 들인 것에 일침을 가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행칭의(以行稱義)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가르침입니다.
7. 믿음으로 얻는 복 (26-29절)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어진 은총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에게 주어지는 복을 세가지로 말했습니다.
①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26절).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을 말합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히브리 관념으로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하나님이 가지신 복을 유업으로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로 회복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동일하게 생각하여 보호하고 인도하고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②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해 세례를 받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했습니다 (27절). '세례'(βαπτιζω)는 물 세례가 있습니다. 물 세례는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는 고백이 있는 자에게 죄 사함(씻음)의 표호로 물로 껴 얹는(혹은 물에 잠기는) 의식입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닌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성령세례가 있습니다. 성령세례(聖靈洗禮)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에 성령님이 내주(內住)하여 죄 사함 받았음을 확신시켜 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들어오신 성령님은 안에서 죄 씻음을 확인해줄 뿐 아니라 거듭난 자임을 확신시켜 주고 하나님의 아들됨을 확신시켜 줍니다 (롬8:14-16, 고후1:22). 성령세례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자들은 예수를 믿고 거듭난 다음에 다시 경험해야 하는 별개의 체험으로 주장합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의 내용을 보면 그런 거처럼 보이지만 (행2:1-4, 8:4-25, 10:17-48, 19:1-7) 그것은 개인의 신상체험 모델로 보기보다는 구속사적인 전망으로 보아야 합니다. 오히려 고린도전서12:13의 내용을 보면 시제가 과거로서 믿는 자는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것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성령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에 받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령세례는 일반적으로 잠재의식 가운데 얻어지며 (요3:3-8)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는 중생(거듭남)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죄인으로서 멸망받게 될 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깨닫고 마음의 평안과 감사와 기쁨이 있고 은사가 나타나고 인격적 열매가 맺히는 것 등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전12:3, 고전3:16, 롬8:15). 물 세례를 받았든지 받지 않았든지 성령세례를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입니다. 당시 로마 풍습에 따르면 성년이 된 자는 성인식을 거행할 때 어린 아이 시절의 옷을 벗어 버리고 어른이 입는 새 옷으로 갈아입는데 그것은 성인으로서의 권리(시민권)를 갖는다는 것을 것을 기념하는 의미였습니다. 그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리를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곧 과거 율법에 매인 생활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새로운 인격과 가치와 목적과 방식과 생활을 하게 되는 특권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욕심을 따라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심령이 새롭게 된 새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엡4:22-24). 바울은 이에 대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했습니다 (28절). 인종과 신분과 성별의 차이없이 모두가 동일하게 그 특권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특권은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③약속대로 유업을 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라고 했습니다 (29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로 구원을 얻은 자는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복을 약속하실 때 아브라함의 후손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창12:2, 15:4-7, 17:7-8). 아브라함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언약)을 믿어 의롭게 된 자로서 하나님이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다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6-7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고 했습니다 (16절).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함께 받게 되는 것입니다. 9절에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유업을 얻는다는 말은 마치 아들이 아버지의 사업과 재산을 물려 받는 것처럼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적 복을 물려받는 자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손과 땅에 대한 복을 주셨는데 그 복 안에 포함된 사람이 되어 언약적 계대에 속한 자가 되고, 뿐만 아니라 구속사적으로 믿는 자의 수와 영역을 확장하는 주역이 된다는 것입니다.
<結言>
율법은 우리가 죄인임을 정죄하고 율법을 온전히 지킬 것을 요구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형벌이 주어진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이 속박되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값을 다 치르고 구원했기 때문에 이젠 율법에 속박되어 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우리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긍정적인 측면으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죄인임을 인식하게 하고 스스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은혜의 방법을 필요로 하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안되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는 역할을 다한 율법을 지켜서 구원 얻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행칭의(以行稱義)가 아니라 이신칭의(以信稱義) 교훈을 굳게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