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갈라디아서4:1-31

<題目>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멍에

 

<序言>

  바울이 1-2장에서 사도직과 복음의 기원에 대해 변호했고, 3장에서는 율법과 대조되는 복음에 대해 험증했고, 이제 본 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험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은 이방인 개종자로 하여금 율법의 굴레에 머물게 하려 한다고 보고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는 율법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이라는 진리를 가르쳐 주려 하는 것입니다. 내용구조는 어린 상속자의 비유(1-7절), 율법주의에 대한 경계(8-20절), 사라와 하갈의 비유(21-31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어린 상속자의 비유 (1-7절)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1-2절). 이는 당시 로마 관습을 예로 들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아버지가 가진 모든 재산은 아버지의 아들이 이어 받기 때문에 아버지가 가진 모든 재산을 이어받을 아들이 그 재산의 주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 관습에 비추어 볼 때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이어받은 아들이라도 그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인이 되기 전까지 어렸을 때는 주인 행사를 할 수 없었고 권리에 있어서 종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성인이 되어 아버지가 정한 성인식이 있기 전까지는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어야 했습니다. '후견인'(επιτροπουs)은 아이를 책임지고 보호하는 보호자(guardians-NASB)을 가리키고, '청지기'(οικονομουs)는 재산을 관리하는 관리자(managers-NASB)를 가리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아들이라도 어렸을 때는 그들 아래서 지도를 받다가 성인이 된 다음에야 비로소 시민권을 가지는 동시에 아버지의 재산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언약적으로 약속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특권을 누리게 되어 있을지라도 어렸을 때는 후견인과 청지기가 비유하는 초등학문 아래서 종 노릇하다가 때가 되어 (3절)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과 속량해 주신 다음에야 비로소 그 특권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초등학문'(στοιχεια)은 기초학문을 의미하는 바 기본적으로 율법에 대해 비유한 말로서 구원과 관련하여 율법의 의문과 관념과 의식과 제도 등의 필요를 주장하는 모든 교훈을 말하고 넓게는 바른 교훈에 서지 못하게 하는 모든 세속적 학문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여기에서는 율법과 관련해서 사용한 말입니다. 율법은 완전한 의행을 요구하고 죄인으로 정죄하고 죽음과 내세의 형벌을 경고하고 스스로는 거기에서 구원 얻을 수 없다는 전적으로 부패함과 무능함과 절망감과 패배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은혜의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하나님이 제시한 은혜의 방법을 사모하게 하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대속해 주실 때 그를 믿어 구원을 얻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다가 정한 때가 되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서 나게 하셨습니다 (4절). '정한 때'는 하나님이 정한 때로서, 시대적으로 율법의 지배를 받으면서 극한 고통과 신음 속에서 하나님이 제시한 은혜의 방법이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때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된 자, 하나님의 아들)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한 것은 인성을 가진 완전한 인간으로서 연약성을 가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인간이어야 하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인간이어야 합니다 (구원자의 조건은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가져야 함). 또한 그를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을 받아서 율법을 지킬 의무를 가진 유대인으로 오신 것을 말하는 바 율법의 정죄 가운데 있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어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 등 율법을 지켰습니다 (눅2:21, 41, 요2:13). 모세의 율법을 외부적으로 지켰다고 하기 보다는 율법 안에 담긴 정신 곧 율법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며 지켰습니다 (마5:17). 마지막에는 율법의 정죄를 받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율법의 정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죽음으로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5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율법의 정죄 가운데 있는 언약적 아들들의 죄값을 대신 치르므로 그를 믿는 자들을 아들의 신분과 특권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에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을 마음에 보내어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6절). 로마서8:15에도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했습니다 (막14:36). 아빠는 아람어 아바(אבא)의 음역입니다. 그래서 아람어 ‘아바’(אבא)를 헬라어 '아바'(Αββα)로 음역했고, 영어성경들에서 '아바'(Abba)로 음역했고, 한글성경 개역판에서 ‘아바’로 음역했습니다. 그런데 한글성경 개역개정판에서 ‘아빠’로 의역하여 개정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이 ‘아바’가 ‘아빠’의 의미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바’를 ‘아빠’의 의미로 봅니다. ‘아바’를 ‘아빠’로 이해하게 된 것은 독일의 학자 ‘요아킴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의 주장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아바’가 갓난아이가 옹알이로 아버지를 부르는 발음이라 생각하고 예수님과 바울이 어린아이가 아버지에 대해 생득적 친밀감으로 부른 용어로 사용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최근에 그 주장을 철회했다고 합니다그러나 최근에는 언어와 문화에 능통한 학자들로부터 ‘아바’를 ‘아빠’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학자는 영국의 ‘제임스 바’(James Barr)와 미국의  ‘머레이 해리스’(Murray Harris) 등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아바’는 ‘아빠’가 아니라고 합니다. 아람어 ‘아바’를 어린아이가 쓰는 ‘아빠’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합니다. ‘아바’는 어린아이들도 사용했지만 성인 자녀들도 사용했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사용할 때는 ‘아빠’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성인 자녀들의 경우 ‘아버지’의 의미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바’는 단순히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말이 아니라 성인 자녀가 아버지를 예의바르고도 진지하게 부르는 구어체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문화적 배경을 보면 가부장적 가족구조로서 자녀는 아버지를 친밀한 대상으로 보기 보다는 두려움 가운데 순종해야 하는 권위적인 대상이었는데, 아버지는 자녀의 주인으로서 자녀를 보호하고 인도하는 자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바울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아바’(Αββα)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친밀함을 나타내기 위한 ‘아빠’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호자이며 인도자임 나타내는 ‘아버지’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람어의 ‘아바’(אבא)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 ‘아빠’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파파스’(παπας) 또는 팝파스’(παππας)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아바’(Αββα)로 음역했으며, 헬라어 ‘아바’(Αββα)를 영어로 번역할 때도 ‘아빠’에 해당하는 ‘대디’(daddy)를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아바’(Abba)로 음역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참고할만한 주장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πατηρ)라 부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영어성경에서 ‘아버지’(Father)의 첫 철자를 대문자로 사용한 것은 일반 아버지와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일반 아버지와 같은 점이 있으면서도 그 차원을 달리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했기 때문이고, 우리를 거듭나게 했기 때문이고,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보호하고 인도하고 섭리하고 경륜하고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후에는 종이 아니고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라고 했습니다 (7절).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인 것과 그가 대속해 주신 것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가진 자가 되었으므로 이제는 종의 위치가 이니라 아들의 위치에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보호자나 관리자의 아래서 관리를 받는 자가 아니라 당당히 하나님의 가지신 모든 특권,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특권,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특권을 받아 누려야 하는 자인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율법의 관리 하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된 자들에게 은혜로 주시는 축복을 누리는 자이므로 다시 율법의 관리 하에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된 축복을 누려야 할 자들인데 다시 율법주의자들이 요구하는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교훈을 받아 들여 율법의 교훈 안에 얽매이는 것을 경계하려는 것입니다. 좁게 보면 율법은 모세의 율법을 말하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말합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원리이고 복음으로 의롭게 되어 구원받는 방법을 받아 들이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구원을 얻으려는 원리입니다. 전자는 인본주의 방법이며 후자는 신본주의 방법입니다. 전자는 억압과 공포와 좌절을 가져오며 후자는 자유와 평안과 감격을 가져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이후에도 신앙 생활을 율법의 원리로 하지 말고 복음의 원리로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8:32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시는 특권인 것입니다.

 


         2. 율법주의에 대한 경계 (8-20절)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믿기 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하나님을 알뿐 아니라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종 노릇 하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8-9절). 갈라디아 교인들이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했다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고 세속적인 목적과 가치와 원리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도'(ειδω)는 사실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고 '호라오'(οραω)는 자각하여 아는 것을 말하는데 비해 본문에서 안다는 것에 해당하는 '기노스코'(γινωσκω)는 관계에 있어서 경험적으로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도 그들을 아신 바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도 그들과의 관계에서 있어서 그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과 하나님의 관계가 얼마나 삶에서 친밀한 관계에 있었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초등학문'(στοιχεια)은 기초학문을 의미하는 바 기본적으로 율법에 대해 비유한 말로서 구원과 관련하여 율법의 의문과 관념과 의식과 제도 등의 필요를 주장하는 모든 교훈을 말하고 넓게는 바른 교훈에 서지 못하게 하는 모든 세속적 학문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여기에서는 율법과 관련해서 사용한 말입니다. '약하고'에 해당하는 기본형 '아스데네스'(ασθενηs)는 연약함과 무력함을 말하고 '천박한'에 해당하는 기본형 '프토코스'(πτωχοs)는 궁핍함과 결핍함을 말합니다. 초등학문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능력이 없으며 조건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넓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데에서 어찌 다시 무력하고 결핍된 그것들에 종 노릇을 하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킨다고 했습니다 (10절). '날'(ημεραs)은 안식일 같은 것을 말하고, '달'(μηναs)은 월삭 같은 것을 말하고, '절기'(καιρουs)는 유월절(무교절)과 오순절(칠칠절)과 장막절(초막절, 수장절) 같은 것을 말하고, '해'(ενιαυτουs)는 안식년과 희년 같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구약시대에 그같은 절기들을 지키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참된 평안과 안식과 자유를 주는 자로서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실 것을 목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절기를 지키는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안식과 자유를 부분적으로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미래에 보내 주실 그리스도를 대망해야 했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셔서 대속해 주신 후에는 그의 대속을 믿음으로 진정한 평안과 안식과 자유를 누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은 그런 구약의 율법에 관한 절기들의 참 목적을 깨닫지 못한 채 그것들을 구원의 방편으로 지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통해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음에도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을 받아 다시 초등학문인 율법의 교훈의 종 노릇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로 하여금 그들을 위해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게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11절).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을 받아 갈등하는 것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복음적 교훈을 가르쳤는데 그 수고가 헛되게 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해 그들과 같이 되었으니 그들도 자기와 같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12절). 바울은 과거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의 의식주의와 율법주의로 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렸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갈라디아 교인들도 유대인의 의식주의와 율법주의에 빠지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 되길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바울은 처음에 갈라디아에서 복음 전도 사역을 할 때 갈라디아 교인들이 얼마나 잘 대해 주었는지를 회상했습니다. 그들은 바울 자신에게 해롭게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12절).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서 복음 전도 사역을 할 때 다른 지역과 달리 갈라디아 교인들은 전혀 해를 가하지 않았고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이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시험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업신여기거나 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천사 같이 그리스도 예수 같이 영접했다고 했습니다 (13-14절). '육체의 약함'에 대해 루스드라에서 겪은 육체적 핍박으로 인한 육체의 쇠약함을 말한다는 이도 있고, 버가의 저지대 해안의 습지대에서 모기 떼로 인해 말라리아에 걸린 것을 말한다는 이도 있고,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간질을 말한다는 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주의 빛을 본 이후로 가졌던 눈병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15절, 6:11, 고후12:7, 행9:1-9,18). 바울의 눈병은 본인에게도 사역을 하는 데에 큰 방해가 되었겠지만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있어서도 외모가 흉하게 보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종 사도라는 자가 자기 병도 고치지 못하는 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음 직합니다. 하지만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것 때문에 바울을 업신여기거나 조롱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천사나 예수님을 대하듯 환영했다는 것입니다. 외모로 보지 않고 그가 전하는 복음 진리를 잘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사명대로 복음 전도 사역을 하는 그를 인격적으로 존경하여 후대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할 수만 있었더라면 자기들 눈이라도 빼어 주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5절). 바울이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복음 전도 사역을 하면서 눈병이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애정을 가지고 할 수만 있으면 자기들 눈이라도 빼어 주려 한 심정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복이 어디 갔느냐고 했습니다 (15절). 하나님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 주어 복음 진리를 전해 주게 한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입니다. 또한 그가 육체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외모로 보지 않고 존경하며 오히려 애정을 가지고 그들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자기들 눈까지도 빼어 주고 싶은 심정을 가진 것은 신령한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하나님이 주신 은총은 다 어디 가고 바울 보다 유대인 율법주의 교사들을 따르고 바울이 전한 복음 진리보다 율법주의 교훈을 따르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처음에 바른 복음을 받고 바른 진리의 가르침을 잘 받은 자들이라도 어떤 다른 요소들 때문에 그 교훈을 가볍게 여기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처음에 바른 교훈을 가르쳐 준 사역자를 애정으로 존경하던 자라도 어떤 이유 때문에 부족하게 여겨 존경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언제나 변함없는 신앙이 귀한 신앙입니다. 노아, 아브라함, 야곱, 모세, 베드로, 바울, 모두 약점이 있었듯이 오늘날 바른 사역자라도 약점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세우시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면, 바른 교리와 교훈을 전하는 면, 교회와 성도를 위해 희생과 헌신하는 면을 보고 계속 존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큰 존중은 그의 교훈을 귀히 여기고 그의 권면을 듣는 것입니다.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참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고 했습니다 (16절). 지금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유대인 율법주의를 쫓는 것을 지적한다고 해서 자신이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거리끼는 관계가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대해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울과 이간시켜 자기들에 대해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17절).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열심히 가르치는 것은 바울 자신과 이간 시키고 바울이 전한 복음 진리를 떠나 자기들이 가르치는 교훈을 따르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일에 대해 열심히 사모함을 받음은 언제든지 좋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18절). 갈라디아 교인들이 열심을 내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지만 그것은 좋은 일에 한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좋은 일에 열심을 내기를 원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자기 자녀들이라고 하면서 갈라디아 교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그들을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했습니다 (19절).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복음으로 낳을 때 해산의 수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그들을 양육하기 위해 그 때 했던 해산의 수고를 또 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해산의 수고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양육하는 목표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났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라도 갈라디아 교인들과 함께 있어 언성을 높이려 함은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해 의혹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20절). 바울은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를 거쳐 마게도냐 지역에서 사역을 했는데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에서 온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을 받아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당시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갈라디아로 갈 수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로 교훈을 한 것입니다. 만일 갈 수만 있었다면 직접 대면하여 왜 바울이 전한 바른 복음을 떠나 잘못된 율법주의 교훈을 좇으려 했는지 묻고 다시 강권하여 바로 세워 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중생(重生)한 자는 필연적으로 성화(聖化)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미 얻은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고 거듭난 영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빌2:12, 벧후3:18, 엡4:13). 구원을 이루고 영이 자라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대로 천국에 가며 그 만큼 영광과 칭찬과 상급을 얻게 됩니다. 성화는 소극적으로는 죄를 벗어 버리는 것이지만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신앙 지도자는 성도가 그 일을 잘할 수 있도록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소명자로 세우신 것은 그 일을 위해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생과 헌신으로 사역을 해야 합니다.

 


         3. 사라와 하갈의 비유 (21-31절)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바울은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에게 미혹된 자들을 향해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이라고 하면서 사라와 하갈의 비유를 들어 율법 아래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1절). '율법'은 좁게는 모세의 율법을 말하지만 넓게는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여 그 후손을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해 주셔서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고 그 후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모내 주시겠다고 언약을 했습니다 (창12:1-3, 13:14-17, 15:1-7, 갈3:16).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족장 아브라함에게는 아내 사라가 있었고 여종 사라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몸에서 날 자를 통해 언약을 이루어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습니다. 사라는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게 되자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기 여종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게 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아브라함이 86세에 하갈을 통해 낳게 되었는데 그 아들이 이스마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사라의 나이 90세에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그 아들이 이삭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고 그 후에 아내 사라를 통해 이삭을 낳은 것입니다 (창16:1-4,15-16, 21:1-5).  


  그런데 이에 대해 바울은 아브라함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여종에게서 낳고 하나는 자유있는 여자에게서 났다고 했고 여종에게는 육체를 따라 낳았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낳았다고 했습니다 (22-23절). '여종'은 여종 하갈을, '자유 있는 여자'는 여주인 사라를 가리킵니다. 여종에게서 낳은 아들은 이스마엘을,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낳은 아들은 이삭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종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낳은 자이고 자유 있는 여자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은 약속으로 말미암아 낳은 자라고 했습니다.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인간의 의지와 방법을 통해 낳은 것이고 여주인 사라를 통해 이삭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해 낳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아브라함이 육체적 방법으로 가능한 나이인 86세에 자기들의 의지와 방법으로 낳은 것이고 사라를 통해 이삭을 낳은 것은 아브라함이 육체적 방법으로 불가능한 나이인 100세에 사라의 나이 99세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낳은 것이었습니다 (창21:5, 18:11). 사라를 통해 이삭을 낳은 것은 절대로 육체적 방법으로는 되어 질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기적적 역사로 낳은 것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낳은 두 여인을 두 언약에 비유했습니다 (24-25절). '두 언약'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말합니다. 하갈을 엣 언약에, 사라를 새 언약에 비유했습니다. 옛 언약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말하고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믿음을 말합니다. 고대에는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서도 그에게서 태어난 아들의 신분이 결정되었습니다. 하갈은 여종으로서 종의 신분을 가진 종을 낳았고 사라는 자유한 여주인으로서 자유의 신분을 가진 주인을 낳았습니다. 옛 언약인 시내산 율법은 그것을 지켜서 구원 얻으려는 자를 율법의 종으로 만들지만 새 언약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것을 믿는 자를 자유하게 합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는 율법을 온전히 행할 수 없는 바 더 많은 율법의 정죄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대리적 속죄의 효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되어 자유하게 됩니다. 옛 언약인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의 종이 된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은 바울 당시에도 예루살렘을 근거지로 그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에서 자유한 자들은 하늘의 예루살렘에 속한 자들입니다. 곧 바울 당시 율법주의자들과 그들에게 미혹된 자들은 지상의 예루살렘에 속한 자들로서 지상에서 평생 율법의 종 노릇하며 살 자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를 얻은 자들은 하늘의 예루살렘에 속한 자들로서 하늘 나라에 갈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믿는 자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의 아들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고 했습니다 (27절). 이는 이사야54:1 인용입니다. 남편이 있는 자 곧 아들을 낳지 못하는 자의 자녀가 남편이 없는 자 곧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아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바벨론 포로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할 자들이 많이 돌아와 유다를 회복할 것을 예언한 내용입니다. 더 멀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적 섭리에 의해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오게 될 것,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적 아들이 된 자들이 많이 나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해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28절). 갈라디아 교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계승한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자의적 방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섭리에 의한 은혜의 방법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29절). '육체를 따라 난 자'는 이스마엘을, '성령을 따라 난 자'는 이삭을 가리킵니다. 23절에서 '약속을 따라 난 자'를 여기에서는 성령을 따라 난 자로 표현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사라를 통해 이삭을 낳을 때 사라가 육체적으로는 더 이상 낳을 수 없는 경수가 끊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곧 성령의 능력으로 낳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삭을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에 의해 낳았기 때문에 약속을 따라 난 자라고 할 수도 있고 성령의 능력으로 낳았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 난 자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이스마엘로부터 놀림과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창21:9). 그처럼 현재에도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을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의지와 방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방법인 성령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갈라디아 교인들을 핍박한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30절).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여주인 사라의 아들 이삭을 괴롭혔는데 그 때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이 이삭과 기업을 함께 얻지 못하도록 쫓아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일로 근심할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대로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았습니다 (창21:8-14). 하나님의 언약대로 하면 육체를 따라 난 종의 아들은 약속을 따라 난 아들과 기업을 함께 가질 수 없는데 만일 육체를 따라 난 자를 내어 좋지 않는다면 후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약속을 따라 난 자의 기업을 빼앗게 되기 때문에 육체를 따라 난 자를 내어 쫓은 것입니다. 그처럼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들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는 자들을 내어 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 하는 율법주의자들을 물리쳐야 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는 결론적으로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고 했습니다 (31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바울 자신과 갈라디아 교인들은 사라가 낳은 이삭이 예표하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약속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인간의 의지와 방법으로 하나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 은혜의 방법으로 성령의 역사로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하나님 나라를 이룰 계승자들입니다. 바울 시대에 율법주의자들 같이 인본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 신본주의 신앙을 가진 우리를 미혹하고 핍박합니다. 육에 속한 신자가 영에 속한 신자를 핍박합니다. 아가서에 나오는 술람미 여자를 핍박하는 자는 예루살렘 여자들이었고 예수님을 핍박한 자들도 유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었고 바울을 핍박한 자들도 유대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일제시대에 최권능(봉석) 목사를 일제에 잡아 준 목사가 오산교회 목사였고, 여순반란 사건 때 손양원 목사 두 아들(동인,동신)을 공산당에게 잡아 준 자가 같은 교회(애양원성산교회) 같은 학교(순천매산고등학교) 다니던 학생(손재선)이었습니다. 종말에도 교회와 성도를 박해하는 자들은 사탄(용)과 적그리스도(바다에서 나온 열 뿔 달린 짐승)의 사주를 받은 거짓선지자들(땅에서 올라온 어린양 같이 두 뿔 가진 짐승)이라고 했습니다 (계 13장). 지금도 바른 말씀대로 살려는 자를 힘들게 하는 자들은 기독교 내에 있는 타락한 기독교인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없습니다. 그들과 그들의 교훈을 물리쳐야 합니다. 오직 복음주의 신앙으로 순교 정신을 가지고 예수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지키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結言> 

  율법주의 교훈은 인간의 의지와 방법으로 하는 원리이고, 복음주의 교훈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방법으로 하는 원리입니다. 우리는 교리적으로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복음주의 신학에 굳게 서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율법주의 원리가 아니라 복음주의 원리로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