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갈라디아서6:1-18

<題目> 마지막 권면과 맺는 말

 

<序言>

  본 장은 본서의 결론부분으로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마지막 권면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에 사뭇 준엄한 권면을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로 세우려는 바울의 심정의 반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실천적 명령(1-10절), 마지막 권고와 끝맺는 말(11-18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실천적 명령 (1-10절)

 

  바울은 1-4장에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이신득구의 교리를 강조했습니다. 5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은 자는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을 이루기를 힘써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중생한 자는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일을 버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곧 성령의 인도를 받아 죄성을 제어하고 신앙 인격이 말씀대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6장에서는 성령의 열매 곧 말씀대로 만들어진 신앙인격이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제시했습니다.    

 

  ①범죄자에 대해 신령한 자가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으라고 했습니다.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자들은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자신을 살펴보아 자기도 시험을 받을 까 두려워 하라고 했습니다 (1절). 여기에서 '범죄'(παραπτωμα)는 실수나 과오나 탈선을 말합니다. 곧 고의적이거나 계획적이거나 적극적인 범죄가 아닌 육신의 약함으로 인한 우발적인 범죄를 말합니다. 그 범죄가 다른 사람에 의해 알려져 드러나게 될 경우엔 바로 잡는 것이 필요한데 그 때에는 '신령한 너희'가 바로 잡으라고 했습니다. '신령한 너희'는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으로서 신앙 인격이 성숙하여 상황을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성령으로 행하는 성숙한 사람은 사안에 대한 이해력과 분별력이 있고 덕스럽게 해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만일 그런 자가 바로 잡지 않고 신앙 인격이 미성숙한 자가 바로 잡으려 한다면 적절하게 다루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 범죄자에게 반발심이 들게 할 수 있고 공동체 전체에 갈등을 만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령한 자는 범죄자를 바로 세우되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과 온순한 태도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범죄자를 사랑하는 마음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도와주려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범죄자는 자신을 도와주려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으면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바로 세우는 일은 신앙인격이 성숙한 지도자 해야 하고 그것도 겸손과 온순한 태도로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범죄자를 바로 세웠다 하더라도 바로 잡는 자는 바로 잡은 다음에도 자신을 살펴보아 자기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바로 세웠다 해도 자기도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와 같은 유혹(temptation)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바로 세우면서도 자기도 그와 같은 실수를 범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9:27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짐을 서로 져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했습니다 (2절). '짐'은 범죄로 인한 좌절과 범죄로 인한 책임과 범죄하게 하는 유혹 등을 의미하고 그 짐을 서로 '지라'는 것은 계속적으로 함께 나누고 감당하고 협력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서 율법의 완성이며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5:13-14, 롬13:10).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고 했습니다 (3절). 스스로 속이는 자 곧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는 자는 남의 짐을 져 줄 수 없습니다. 신앙 인격이 성숙하지 못한 자이면서도 성숙했다 생각하여 다른 사람을 바로 세워 주려 하는 자는 스스로 속이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도 실족하게 하고 자기도 실족하게 되기 때문에 스스로 속이는 자인 것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살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않으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고 했습니다 (4-5절). 각자가 자기가 한 일을 살펴 보면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되는 일이 있을지라도 다른 사람에게도 자랑거리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연약한 존재일 뿐 자기의 짐을 져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자랑스럽게 여길지라도 남에게도 그런 것은 아니니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다른 사람을 바로 세우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맡은 일만 잘 하라는 것입니다 (고전12:5).

 

  ②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6절). 하나님 말씀을 배우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자를 공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시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7절). 스스로 속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며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은 나쁜 것을 심고 좋은 것을 거두기를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나쁜 것을 심고 좋은 것을 거두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을 무시 한 것으로서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곧 사역자에게 좋은 것으로 함께 하지 않고 자신이 영적인 말씀을 받기를 기대하거나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돕고 자기의 영적인 양식을 위해 사역자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이 스스로 속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 했습니다 (8절). '영생'은 '영원한 생명'으로서 육체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사역자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며 신앙 인격의 속성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죄성을 따라 육체의 일로 기울어져 사역자의 필요를 무시하는 자는 육체적인 것은 확보할지 몰라도 영적인 것은 얻지 못하되, 성령을 따라 신앙 인격으로 사역자의 필요를 채우는 자는 영적인 것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며 때가 이르매 거둘 것이라고 했습니다 (9절). 선을 행하다가도 때로 유혹을 받아 낙심하게 되기도 하고 피곤하여 낙심하게 되기도 합니다. 사역자를 돕는 일이 때로 지칠 때도 있지만 영이 살고 인격이 자라고 하나님 일이 되어지고 하나님 나라에서 상을 얻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지속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믿음의 가정들에 할지라고 했습니다 (10절). 사역자를 돕는 일을 착한 일로서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확대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모든 믿는 가정들을 기회가 있는 대로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 문단은 믿는 자가 모든 생활에서 실천해야 할 부분으로 확대해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구원받은 자가 사역자에 대해 행해야 할 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와 관련한 사역자의 정신과 아울러 신앙이 성숙한 성도가 사역자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를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최우선해야 하며 경제적인 필요에 얽매이지 않아야 하며 말씀을 배우는 자에게 물질적인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합니다. 누를 끼치지 않으려 해야 합니다 (고후11:9, 살전2:9, 살후3:8). 바울은 신령한 말씀을 주는 자이기 때문에 육신의 필요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예(군 복무가 대가를 받는 것, 농사나 목축하는 자가 곡물과 젖을 얻는 것)로 보나 율법의 가르침(일하는 소의 망을 씌우지 말라)으로 보나 예수님의 가르침(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으로 보나 사례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9:15에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씀을 배우는 자들로부터 육신의 필요를 요구할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구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목적인 말씀을 가르치는 데 있지 육신의 필요를 얻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며 자신이 가르친 말씀이 권위를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육신의 필요를 얻는 데에 집중하는 것은 삯꾼 목자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요10:12-13). 구약시대에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사역을 하면서 제물에 욕심을 냈기 때문에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삼상2:12-17,29-30,34). 그러나 말씀을 배우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게 육신의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그 사역에 전무하므로 육신의 필요를 얻기 못하기 때문에 말씀을 배우는 자들이 공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육신의 필요에 관심을 소비하므로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에 전무하지 못하여 말씀을 배우는 자가 영적 양식을 제대로 공급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인들은 눈병으로 고난을 겪는 바울에게 자기들의 눈이라도 빼어 주려 했습니다. 4:15에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 수넴 여인은 엘리사가 길갈에서 수넴 지역으로 사역을 나갔을 때 자기 집에 방을 만들어 거하게 하고 공궤하므로 아들을 얻게 되고 아들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도움을 얻게 되었습니다 (왕하4:8-37).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게 필요를 채우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돕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을 공궤하는 것은 하나님 일을 돕는 것이고 자기 영이 사는 길입니다. 그것이 신앙 인격이 성숙한 자의 모습이며 성령으로 사는 자의 모습이며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의 마땅한 행위인 것입니다.

 


         2. 마지막 권고와 끝맺는 말 (11-18절)

 

  본 단락은 본서의 결론 부분으로서 바울이 마지막 권고를 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경계와 더불어 기독교 신앙은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이라는 기본 원리를 다시 한 번 강조하였습니다.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은 마지막 권고를 하면서 자기 손으로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했습니다 (11절). 바울이 지금까지는 대필을 시켰다가 마지막 부분에서는 본서가 자신의 글임을 확인시키는 동시에 마지막으로 중요한 권고를 한다는 의미에서 직접 자필로 쓴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고전16:21, 골4:18, 살후3:17).


  그리고 바울은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기 위함 뿐이라고 했습니다 (12절).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받기를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인간적인 면만 생각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기를 주장하는 것은 그것을 옳은 진리로 여기거나 복음전도의 유익이 된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박해를 면하기 위함 뿐이라는 것입니다 (행16:3, 눅2:21).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박해를 면하기 위함 뿐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싫어했습니다. 전통적인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구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 가운데 하나는 그가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이었습니다 (신21:23). 더욱이 그는 자신들이 세운 율법적인 행위의 의를 부인한 자입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예수를 싫어했고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율법을 완성하신 십자가 사건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와 효과를 전하는 바울을 공격했고 그의 선교사역을 방해했습니다. 갈라디아의 율법주의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고 그의 십자가의 의미와 효과를 압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한다면 그 십자가 죽음이 모든 율법의 요구를 완전이 이룬 것과 택함 받은 백성들의 죄를 대속(대리적 속되)한 것과 그 대속을 믿음으로 죄와 죽음과 내세 형벌에서 구원받게 된 것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율법의 대표 행위인 할례가 의롭게 하거나 구원을 받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전할 경우 당연히 유대의 유대주의자들의 핍박과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와 효과를 알면서도 그 유대주의자들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예수를 믿는 사람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눈에 보기에 그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13절). 갈라디아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할례를 받고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도 할례받을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율법을 지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유대주의로부터 박해를 피하고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었습니다. 육체로 자랑하려는 것이라 함은 할례를 주장하는 것이 율법 지키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좀도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어 자기들을 따르는 자들이 많은 것으로 자랑삼으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잘못 나가더라도 자기들의 종교적 유익만 얻으면 된다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진리와 신앙이 세워지는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육신적인 유익과 영욕을 위해 사역을 하는 삯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자기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자기가 세상에 대해 못 박힌다고 했습니다 (14절). 바울은 갈라디아 율법주의자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택한 백성들을 율법의 요구와 정죄 그리고 그 죄의 결과에서 구원하기 위해 그들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신 사건입니다. 바울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것이 가장 큰 은혜라고 생각했고 그 복음을 온 세계에 전파하고 그 진리를 세우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며 목표이며 가치이며 만족이며 기쁨이며 자랑이었습니다 (행20:24, 딤후4:7, 고전2:2, 빌1:20-21). 그러다 보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자기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자기가 세상에 대해 못 박힌다고 했습니다. '세상'(κοσμοs)은 원래 물질세계, 인간의 문화와 문명을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 육체적 욕망과 이익을 위해 사는 가치관과 생활양식일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와 그로 인한 믿는 자의 구원이 강조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이 절에서는 단순히 죽음이라는 의미만 차용한 것입니다. 곧 바울은 자기는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에게 있어서 그 세상은 죽었고 그로 인하여 자기도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도 세상에서 죽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신앙 가치관이며 특히 사역자에게 필요한 사역 가치관입니다.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만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15절). 이는 5:6의 재론입니다. 할례(割禮)는 남자의 성기 끝 표피를 자르는 의식으로서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표로 행했던 의식입니다. 그 할례는 구약 율법의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고 했으며 할례를 행하므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했습니다 (以信稱義, 以信稱救). 그러기 때문에 할례를 받은 자인지 할례를 받지 않은 자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으로서 할례를 받았든지 이방인으로서 할례를 받지 않았든지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재창조된 거듭난 영(重生한 靈)을 의미합니다. 거듭남은 죄로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서 거듭난 영은 새로 지음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할 자들의 죄를 대속(代贖)해 주셨기 때문에 그 대속을 믿는 자는 의롭다함(稱義)을 얻어 죽었던 영이 거듭나게(重生) 됩니다. 이제 거듭난 영은 죄성과 더불어 싸우고 하나님 말씀대로 만들어지므로 점점 자라나게(聖化) 됩니다. 거듭남은 성령의 단독적 역사로 되었고 자라남도 성령의 도움으로 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구약 의식을 행했느냐 행하지 않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그 대속을 믿음으로 성령에 의해 거듭난 영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영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점점 성장해 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영을 살리려고 오셨고 그 영이 살아나야 천국에 가고 그 영이 자라난대로 천국에 가기 때문에 개인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입니다.  

   

  바울은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라고 했습니다 (16절). '이 규례'는 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모든 가르침을 말합니다. 소극적으로는 율법과 할례를 주장하는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이신득구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소극적으로 죄성과 더불어 싸우고 적극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말씀대로 사는 것을 포함한 것입니다. 그 규례를 받아들여 행하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3:29, 4:28, 롬2:29, 9:7-8). 바울은 그들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라'고 축복했습니다. '평강'의 '에이레네'(ειρηνη)는 '평안' '평강' '평화' '화목' '번영' 등의 뜻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샬롬'(שלום)에 해당된 단어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행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구속과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만큼 내적 평안이 있고 외적 화목이 증진되는 것입니다. '긍휼'의 '엘레오스'(ελεοs)는 '사랑' '긍휼' '자비'의 뜻입니다. 히브리어 '헤세드'(חסד)에 해당하는 단어로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무한한 사랑, 택한 백성을 어떤 반응과 상황과 상태에서도 버리지 않는 계속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 후로는 누구든지 자기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는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17절). 바울의 내적 고통은 유대주의자들로부터의 직접적인 공격 때문이라 하기 보다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지들의 교훈에 미혹되는 것을 지켜보는 안타까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이 자기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주의 이단 교훈에 미혹되는 자들이 없기를 바라는 호소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흔적'에 해당하는 '스티그마타'(στιγματα)는 목장 소유주가 소나 양 같은 짐승에 자기 소유를 나타내거나 주인이 종에게 자기 소유임을 나타내기 위해 낸 자국이나 찍은 낙인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바른 진리를 세우다가 얻게 된 수많은 고난의 흔적을 말합니다. 바울은 사역에서 고난으로 얻은 흔적과 박해로 얻은 흔적이 몸에 있었을 것입니다 (고후11:22-27). 바울이 그 말을 한 것은 어떤 고난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바른 진리를 세우려 했다는 것을 제시하므로 자신은 그것을 위해 사는 자임을 밝히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인생과 사역에서 목적에 속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가장 영광된 것이었습니다 (롬8:18).  


  바울은 마지막으로 형제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심령에 있을지라고 했습니다 (18절).   바울이 다른 편지들과 다르게 개인적인 안부나 인사를 하지 않은 채 축복하는 간구로 마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를 내 놓으시고 이 땅에 비하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죄와 죽음과 내세의 형벌에서 구원하시고 죽었던 영을 다시 살리시고 성령을 내주하게 해 주신 은혜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의 은혜가 계속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은 은혜 아래서 거듭난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갈 때가지 성령의 도움을 받아 율법주의 같은 잘못된 교훈에 미혹되지 않고 바른 진리에 서서 구원을 잘 이루어가기를 축복한 것입니다. '아멘'(αμην, אמן)은 '진실하다'는 뜻으로서 말씀의 진리됨을 말하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結言> 

  바울은 율법주의의 미혹을 받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자는 진리(以信稱義, 以信稱救)를 힘 주어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어 거듭난 성도는 내주하신 성령의 도움을 받아 죄성과 더불어 싸워 제어하고 말씀대로 신앙인격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 삶에서 나타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균형 잡힌 바른 신앙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