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요한계시록4:1-11

<題目> 하늘보좌와 예배

 

<序言>

  사도 요한 당시를 기준할 때 요한계시록의 시상은 1장은 과거, 2-3장은 현재, 4-22장은 미래에 대한 계시입니다. 그중에 4-5장은 하늘보좌에 대해, 6-19장은 대환난에 대해, 20-21장은 천년왕국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22장은 결론입니다. 그런데 4장부터는 주해의 어려움이 많습니다. 1-3장까지의 해석은 별 차이가 없으나 4장부터는 많이 다릅니다. 4장부터는 우리의 시각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이고, 미래에 이루어질 예언이고, 상징의 표현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주해에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J. Calvin)3장까지만 해석하고, 4장부터는 주해하지 않았습니다. 의미심장한 결정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설교자들은 그에 비해 너무 신중을 기하지 않는 측면이 있습니다. 심지어 무지한 상태에서도 담대하게 해석하여 논란을 일으킨 사람들도 많습니다. 본장의 내용구조는 계시의 배경(1), 하늘보좌의 모습(2-7), 하늘보좌의 예배(8-11)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계시의 배경 (1)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①하늘에 열린 문을 보았습니다.


  1절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2-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 7교회에 대한 계시를 받고난 후에 또 성령님의 감동으로 새로운 계시를 받았습니다 (2). 그런데 요한이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었습니다. '하늘'은 관념적인 곳이 아니라 장소적인 곳으로서 하나님이 계신 곳이며, 예수님께서 초림 전에 계셨던 곳이고 부활 후에 가신 곳이며, 천사들이 있는 곳이며,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의 영(영혼)들이 가있는 곳입니다. 그 하늘을 볼 수 있도록 문이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곳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죽어서 영(영혼)이 그곳을 가보거나 주님 오실 때에 휴거하여 그곳에 가보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세에 있을 때에라도 성령님의 특별한 감동과 감화로 일면을 볼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 같이 순교적 정신으로 말씀을 지킬 때 주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스데반도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사도행전7:55-56"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라고 했습니다.

 

   ②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1절 하반절에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이 음성은 요한이 처음에 들었던 음성과 같았습니다. 1:10"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언급한 것은 본 사건이 앞에서와 동일한 성령님의 감동으로 이루어진 사건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음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입니다 (Charles, Stier). 그 음성의 내용은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마땅히 일어날 일'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인 동시에 반드시 일어날 일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곧 미래에 절대적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계획을 말합니다.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은 장차 이루어질 일들을 보여주려고 하늘로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이는 실제로 몸으로 올라오라는 말이 아니라, 성령님의 감동 가운데 영적 시각으로 올라오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구약의 에스겔서에 보면 바벨론에 가있던 에스겔 선지자가 예루살렘 성전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에 몸이 간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감동에 의해 환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본 것이었습니다 (40:1-2). 그와 같이 몸은 그 자리에 있으나 성령님의 감동에 의한 환상 중에 시각적으로 펼쳐지는 하늘세계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절의 내용은 계시의 전달자로서 환상 중에 계시를 확실히 볼 수 있도록 초대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이 음성을 휴거로 봅니다.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는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구원역사를 세대로 나누고 각 세대마다 구원받는 방법이 다르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대표적인 신학자는 다비(Darby), 스코필드(Scofield), 차퍼(Chafer), 월부어드(Warvoord)가 있습니다. 현재 그 신학의 본산지는 미국의 달라스(Dallas)신학교과 탈봇(Talbot)신학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대주의 신학은 구원론뿐 아니라 교회론과 종말론 등에서도 우리 개혁주의와는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특히 종말론에서 휴거와 666에 대해 현저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우리나라 극단적인 종말론자들과 오순절교단에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세대주의자들은 본문에 나오는 '이리로 올라오라'는 이 음성을 종말에 있을 휴거의 상징으로 봅니다. '휴거'(携擧: 이끌 휴, 들 거)는 종말에 성도가 공중으로 이끌려 들림을 받는 사건을 말합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이리로 올라오라'는 음성을 성도의 휴거에 대한 상징으로 보고, 성도가 종말에 있을 대환난 전에 휴거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환난전휴거설'이라고 합니다. '환난전휴거설'(患難前携擧說)은 종말에 있을 대환난 전에 성도가 휴거한다는 설입니다. 곧 성도가 종말에 있을 대환난을 거치지 않고 하늘로 들림을 받는다는 설입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몇 근거성구가 있습니다.

 

  첫째, 요한계시록4:1입니다. 본절 요한계시록4:1"~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이리로 올라오라'는 음성을 종말에 있을 휴거에 대한 상징으로 봅니다. 그래서 종말에 있을 환난은 6장부터 나오는데 벌써 그 전에 4장에서 휴거에 대한 상징이 있으니 성도가 환난을 당하기 전에 휴거를 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본문 4:1'이리로 올라오라'는 음성은 휴거의 상징이 아니라 (Ford, Johnson, Walvoord), 계시를 보여주기 위한 초대입니다 (Hugles). 종말에 있을 성도의 휴거는 4:1의 내용이 아니라 11:11 내용입니다. 11:11"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고 했습니다.


  둘째, 마태복음24:37입니다. 마태복음24:37"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종말의 때도 노아의 때와 같다는 말씀인데 이 말씀을 근거하여 노아시대에 홍수심판 전에 하나님이 노아를 건져주신 것처럼 성도도 심판을 받기 전에 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환난 전에 미리 구원해준다는 의미로 사용한 말씀이 아니고, 그 다음절부터 보면 사람들이 주의 재림 전까지 깨닫지 못하고 방탕할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24:38-39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셋째, 데살로니가전서1:10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1:10"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이 장래 하나님의 노하심에서 건져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도 재림 직전에 있는 심판을 면해준다는 의미이지,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해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들도 종말에 있을 환난을 경험합니다. 성도가 종말에 있을 모든 환난을 다 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환난을 전혀 당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종말에 성도의 휴거는 대환난 전이 아니라 대환난 중간입니다. 7년 대환난 전반기 이후입니다. 그 근거성구가 많이 있습니다.

 

  첫째, 요한계시록11:11입니다. 요한계시록11:11"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고 했습니다. '3일반 후에' 휴거가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3일반 후'는 종말에 있을 7년 대환난의 전반기입니다. 종말에 있을 대환난을 '7년 대환난'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7'은 실제 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정한 상징수입니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서 '7년 대환난'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서 '3년 반, 3년 반' 혹은 '42, 42' 혹은 '1,260, 1260' 혹은 '3일 반, 3일 반' 혹은 '3때 반, 3때 반' 등으로 표현합니다.

 

  둘째, 다니엘12:11-12입니다. 다니엘12:11-12"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터 1,290일을 지낼 것이요. 기다려서 1,335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1,260'7년 대환난의 전반기이기 때문에 '1,290'은 전반기에서 30일이 더 지난 때이고, '1335'은 거기에서 45일을 더 지난 때입니다. 곧 대환난이 시작되어 적그리스도 세력이 교회를 점령하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한 때로부터 1,290일을 지나고 1,335일을 기다리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한 것은 대환난의 전반기가 지나서 휴거가 있다는 말입니다.

 

  셋째, 마태복음24:13,22,29-30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예수님이 종말에 있을 대환난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1절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말세에 있을 징조를 말씀하시다가 13절에는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고, 22절에는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창세 이후로 전무후무한 환난이 있을 것인데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한 표현이나 택한 자들을 위해 그 날들을 감해주신다고 한 표현은 환난을 전혀 거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환난을 다 당하지는 않지만 환난을 거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29-30절에는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휴거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일어나는데 여기에 보면 환난 후에예수님이 재림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넷째, 데살로니가후서2:3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2:3"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고 했습니다. 종말에 있을 대환난의 절정은 적그리스도와 거짓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일어나고 (13) 성도의 휴거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일어나는데 (살전4:16), 여기에 보면 거짓그리스도의 세력과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나타난 다음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종말에 있을 대환난을 다 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기 환난은 당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환난을 주신 것은 유익을 위함입니다. 요한계시록에 환난 때 있을 재앙을 3가지로 말합니다. 6장에 나오는 '7인 재앙' 8-9장에 나오는 '7나팔 재앙' '16장에 나오는 '7대접 재앙'입니다. 그중에 '7인 재앙''7나팔 재앙'은 대환난 전반기에 있을 재앙이고, '7대접 재앙'은 대환난 후반기에 있을 재앙입니다. 그 재앙의 내용을 보면 '7인 재앙''7나팔 재앙'은 부분적인 재앙이고, '7대접 재앙'은 전면적인 재앙입니다. 그 재앙을 성격 면에서 보면 '7인 재앙''7나팔 재앙'은 하나님이 심판할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와 불신자들의 심판 근거를 마련하고, 참 성도와 거짓 성도를 나누고, 참 성도를 연단시키 위한 재앙입니다. 그리고 '7대접 재앙'은 적그리스도와 거짓그리스도와 불신자를 심판하기 재앙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7대접 재앙'은 당하지 않지만 '7인 재앙''7나팔 재앙'은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성도가 전반기 대환난 기간에 '7인 재앙''7나팔 재앙'을 경험하게 된 것은 육체적으로 보면 좋아할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성도의 유익을 위해 허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6장부터 대환난에 대해 말하기 전에 4-5장에서 하늘보좌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미래에 펼쳐질 모든 환난과 구원계획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해주기 위함입니다. 성도에게 유익을 위해 환난을 경험하게 하지만 감당할 수 있는 부분만 허락하고 감당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시고 성령으로 도우시고 아주 실패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십니다. 그리고 나머지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은 아예 경험하지 않게 합니다.

 

  그와 같은 원리는 대환난이 있기 전에 성도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모든 고난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요한계시록3:10"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고 했습니다.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σε τηρεσω εκ της ωρας του πειρασμου)에서 시험의에 해당하는 투 페이라스무’(του πειρασμου)유혹의’(of temptation -KJV) 뜻이고, '면하게 하리니'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εκ)는 전치사로서 '...으로부터'(from)이므로 '면하게 하리니'는 의역입니다. 바로 앞에 '지키어'(τηρεσω)가 있는 것을 보아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는 직역하면 '너를 유혹의 때로부터 지켜 주리니'입니다. 이는 시험을 당하지 않게 해준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시험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도 마태복음6:13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시험에 들게 마시옵고'라고 기도하게 했지 '시험이 없게 해주시고"라고 기도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시험'(πειρασμος)은 모든 영어성경에서 temptation으로 번역했듯이 유혹을 의미합니다. 고난은 있지만 유혹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6: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성도가 마땅히 고난을 받아야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8: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했고, 빌립보서1:29"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성도에게 오는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허락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1:6-7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목적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감당할 수 없을 때는 피할 길을 주십니다. 고린도전서10:13"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시험'(πειρασμος)은 모든 영어성경에서 temptation으로 번역했듯이 유혹을 의미합니다. 유혹에 넘어갈 시험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혹에 넘어갈 유혹은 피할 길을 주십니다. 시편34:19"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것은 신령상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윗은 고난당한 것이 유익이라고 했습니다. 시편119:71"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오는 크고 작은 환난과 고난과 고통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오는 고난은 하나님이 신령한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해 주신 줄 알고 그 목적대로 믿음으로 연단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서 큰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성장하는 계기로 삼아야합니다. 우리에게 오는 고난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 허락된 것, 감당할 수 있는 것만 허락되었다는 사실, 믿음으로 반응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신념, 감당할 수 없을 때는 하나님이 피할 길을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매일 매일 승리적으로 살아야합니다.  

 

 

       2. 하늘보좌의 모습 (2-7)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사도 요한이 성령께 감동되어 하늘보좌를 보았습니다. 요한이 실제로 몸이 올라간 것은 아닙니다 (2절 참조). 바벨론에 있던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영()이 성령에 이끌려 예루살렘 성전을 보았습니다 (에스겔40:1-2). 그처럼 요한도 같이 몸은 밧모섬에 있으면서 환상 가운데 하늘보좌를 본 것입니다. 2절에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라고 했습니다. '보좌'(寶座, θρονος, throne)는 자리, 보좌, 권좌 등의 뜻입니다. 그리고 보좌 앞에는 수정 같은 유리바다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6절에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라고 했습니다. 보좌 앞에 펼쳐진 '수정(水晶)과 같은 유리바다'(a sea of glass like crystal)는 투명함, 맑음, 빛남, 아름다움, 평화로움, 장엄함, 견고함 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세상 나라는 더럽고 불안하고 분쟁하고 요동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정결하고 아름답고 장엄하고 견고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정결과 불변에 있습니다.

 

   ①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었습니다.

 

  2-3절에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하늘에 있는 보좌를 보았습니다.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었습니다. ‘보좌’(θρονος)는 군주가 앉는 자리로서 통치권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장소입니다. '보좌 위에 앉으신 이'는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47:8). 그 모양은 벽옥과 홍보석 같았다고 했습니다. '모양'(貌樣)의 헬라어 '호라세이'(ορασει)는 문자적으로 '보이는 것'으로서 벽옥과 홍보석 같다는 것은 하나님의 실제 형체가 아니라 환상 가운데 본 광경이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벽옥'(碧玉)은 수정같이 맑은 백색 보석으로서 하나님의 거룩과 성결을 상징합니다. '홍보석'(紅寶石)은 피처럼 붉은 색을 띤 보석으로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는 무지개가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앉아계신 보좌주위에 녹보석 같은 광채가 무지개처럼 둘러져 있었던 것입니다. '녹보석'(綠寶石)은 푸른빛을 띤 비취로서 생명과 은혜와 자비를 상징합니다. '무지개'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나타냅니다. 특히 언약관계에서 불변을 상징합니다 (9:12-13).

 

  그리고 하나님이 앉으신 보좌에서는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났습니다. 5절에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고 했습니다.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과 위엄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기19:16"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그 위엄을 더욱 강하게 드러납니다.

 

   ②보좌 앞에 '7등불'이 있었습니다.

 

  5절에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했습니다. 보좌 앞에 7개의 등불이 켜져 있었는데 이 등불’()에 해당하는 뤼크니아’(λυχνια)는 촛대(λαμπαδες)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횃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좌를 중심하여 펼쳐진 유리바다를 밝히고 (6) 그 위에 계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을 비취고 (5:1-7) '4생물''24장로'의 예배와 찬양을 돕는 역할을 하는 등불입니다 (4:7-11). '등불'은 본문 자체에서 해석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등불이 7개가 있었다고 했는데 '7'수는 하나님의 만수입니다. 보좌 앞에 7등불 켠 것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권 하에 계획한 일을 시행함에 있어서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역사하여 효과있게 적용시키실 것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많지만 본문의 구조와 관련하여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천사와 성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은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획을 시행할 때에 성령께서 섭리해주십니다. 또한 4생물 되는 천사가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데 있어서 섭리해주십니다. 또한 24장로 되는 성도들이 구원과 성화와 사역을 이루는데 있어서 섭리해주십니다. 그 섭리는 완전하신 지혜와 능력으로 해주십니다 (8:26,28).

 

   ③보좌 가운데와 주위에 '4생물'이 있었습니다.

 

  6-8절에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가운데와 주위에 4생물이 있었습니다. 4생물이 보좌 가운데와 주위에 있었다는 말은 4생물이 보좌를 중심으로 둘러서 마주보는 광경을 말합니다 (1:12). 곧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네 지점에 서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De Wette, Charles).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선 생물을 보았는데 그렇게 생긴 동물의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지상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조온'(ζωον)이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살아있는 것' ‘동물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영어성경에서는 '살아있는 피조물'(living creatures NASB, RSV, NIV), '짐승'(beasts -KJV)으로 번역했고, 우리 성경에서는 '생물'(生物)로 번역한 것입니다. 요한은 자기가 본 모습이 이 세상에서 비교하여 표현할 마땅한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언어로 무엇이라고 딱히 표현하기 힘들어서 그냥 살아서 움직이는 존재라고만 한 것입니다. '생물'은 천상의 영적 존재인 '천사'를 가리킵니다 (1:10, 6:2). 천사의 종류는 스랍, 그룹, 미가엘, 가브리엘 등이 있는데 정확히 어떤 천사들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보좌 주위에서 수종드는 스랍이거나 아니면 영광을 수호하는 그룹일 것입니다 (6:2, 1:5-25, 10). 4생물의 특징은 3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 4얼굴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두 번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세 번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네 번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생물이 사자같다고 한 것은 천사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의지하여 강한 능력과 권세로 사역할 것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 생물이 송아지같다는 것은 천사가 하나님 뜻에 온유와 희생과 봉사로 순종할 것을 가리킵니다. 세 번째 생물이 사람같다는 것은 천사가 하나님의 계획에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사역할 것을 가리킵니다. 네 번째 생물이 독수리같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구속역사에 돌이키지 않는 추진력을 가지고 일할 것을 가리킵니다. 이 천사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수종들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수호하는 천사들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점이 있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점이 있습니다. 이는 구약의 성막 휘장의 색깔인 자색, 홍색, 백색, 청색과 관련이 있습니다 (27:16). 4가지 색깔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각 다른 시각에서 기록한 4복음서의 성격과 비슷합니다. 자색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제시하는 마태복음에, 백색은 예수님을 고난받는 종으로 제시해주는 마가복음에, 홍색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제시해주는 누가복음에, 청색은 그리스도를 영원한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는 요한복음에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사자복음, 마가복음은 송아지 복음, 누가복음은 사람복음, 요한복음은 독수리 복음이라고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둘째, 6날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4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사야6:2 말씀에 보면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라고 했습니다. 둘로 얼굴을 가린 것은 경외하는 태도이고, 둘로 발을 가린 것은 겸손한 태도이고, 둘로 나는 것은 빈속한 순종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구속계획의 실현을 돕는 천사들이 이와 같은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앞뒤에 눈이 가득했습니다. 6절에 보면 앞뒤에 눈이 가득했다고 했고, 8절에 보면 안과 주위에 눈들이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눈이 가득하다는 것은 지적 능력이 무한함을 상징합니다. 특히 지혜와 통찰력이 강조된 상징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께 쓰임받기에 합당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지식에 감명을 받아 모든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이 더해집니다. 그리고 그 지식을 활용하여 가장 최선의 방법을 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갑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한 일이 성령님의 완전하신 역사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이렇게 완전한 천사들이 돕기도 합니다. 천사는 그 지적 능력으로 우리가 구원받는데 돕기도 하고, 위급한 환난을 당할 때 돕기도 하고, 우리가 천국에 갈 때도 돕습니다 (20:16, 6:22, 16:22). 히브리서1:14"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④보좌 주위에 '24장로의 보좌'가 둘려 있었습니다.

 

  4절에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는 둘려있는 24보좌가 있었고 그 보좌(자리)에는 24장로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흰옷을 입고 금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24장로'는 구원받은 모든 성도를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의 유대민족 가운데 구원받은 성도들의 대표가 12장로(12족장)이고, 신약의 이방민족 가운데 구원받은 성도들의 대표가 12장로(12사도)입니다. 두 대표를 모두 합치면 24장로입니다. 그래서 24장로는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에 대한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구약 성도들인 유대인이든 신약 성도들인 이방이든 모든 성도들의 대표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24장로들에게는 2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 흰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 색은 의와 성결을 상징입니다. 19:8"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 의로운 행실은 도덕적인 착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얻은 법적인 의로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7:14"~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주홍같이 붉은 죄가 흰 눈같이 씻겨지고 의롭다고 칭함을 얻게 되었는데 (칭의), 그것이 영적 상징으로 볼 때 흰옷을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말씀대로 살 때 더욱 희어지는 것입니다 (14:22참조).

 

  둘째,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금관은 금으로 만들어진 관인데, 여기에서 ’()에 해당하는 스테파누스’(στεφανους)는 왕이 쓰는 왕관이 아니라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승리관(면류관)을 가리킵니다. 이는 하나님이 믿음 증거와 계명의 말씀을 지킨 자들에게 주신 상입니다. 마태복음19:28"~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했고, 베드로전서5:4에는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고 했고, 야고보서1:12에는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고, 요한계시록2:10에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24장로'는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생명을 내놓고 예수 믿는 믿음을 지킨 자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승리자에게 주시는 금면류관을 씌워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하늘보좌와 유리바다 그리고 보좌에 앉으신 이와 7영과 4생물과 24장로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6장부터 계시된 대환란과 구원이 하늘보좌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에 의해 일어나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가운데서 반드시 선한 뜻을 이루실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권세와 성령님의 역사와 천사들의 순종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이 종말에 하시는 일에 대한 목적과 원리는 모든 시대에 부분적으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현재의 재난과 고난도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에 의해 허용된 것이며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반드시 선한 목적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한 목적을 이룰 것이고 성도들에 대한 선한 목적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성령님으로 역사하게 할 것이고 천사를 보내어 수종들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 신앙인임을 확증하고 우리를 연단시켜 사용하시고 우리로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힘든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3. 하늘보좌의 예배 (8-11)

 

  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9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사도 요한이 A.D.95년경 로마 도미니안 황제의 박해 때 붙잡혀 기름 가마의 고문을 당하고 소아시아(튀르키예) 해안에 있는 불모의 바위섬인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 그때에 성령께서 그를 환상 가운데 하늘보좌로 이끌었습니다. 한 보좌가 있고 그 앞에는 수정같이 맑은 유리바다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 보좌에 앉으신 이가 계셨고, 그 보좌 앞에는 7등불이 있었고, 그 보좌 앞에 어린 양이 서 있었고, 그 보좌 주위에는 4생물이 있었고, 그 보좌 좌우로는 24보좌에 24장로가 앉아있었습니다 (2-6, 5:6). ‘보좌에 앉으신 이는 하나님을, '7등불'은 성령님을, '어린 양'은 예수님을, '4생물'은 천사를, '24장로'는 성도를 상징합니다.

 

   ①'4생물'이 경배했습니다.

 

  하늘보좌에 하나님이 앉아계시고 하나님의 보좌주위에는 4생물이 있었습니다. 6-8절에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그렇게 생긴 동물의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지상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조온'(ζωον)이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요한은 자기가 본 모습이 이 세상에서 비교하여 표현할 마땅한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언어로 무엇이라고 딱히 표현하기 힘들어서 그냥 살아서 움직이는 존재라고만 한 것입니다. '생물''천사'를 가리킵니다 (1:10, 6:2). 아마도 보좌 주위에서 수종 드는 스랍이거나 아니면 영광을 수호하는 그룹일 것입니다 (6:2, 1:5-25, 10). 4생물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한 해석은 6-8절 해석에서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4생물'들은 밤낮 쉬지 않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렸습니다. 9절에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라고 했습니다. 4생물이 하나님께 찬양으로 경배를 돌린 것입니다. 그 내용은 8절에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라고 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존재를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찬양한 것입니다. 8절에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고 한 것은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영원한 분임을 찬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계셨고 현재에도 계시고 미래에도 영원히 계실 분입니다 (33:27, 36:26, 135:13, 145:13, 딤전1:17, 57:15). 9절에도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라고 했습니다. 이는 시공의 한계성을 가진 피조물과는 대조되는 초월성입니다. 뿐만 아니라 1: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라고 했습니다 (21:6, 22:13). ‘알파는 헬라어 알파벳의 맨 첫 철자인 알파(Α)를 가리키고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 맨 끝 철자인 오메가(Ω)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은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존재뿐 아니라 사역에 있어서도 구원을 계획하시고 그 구원을 반드시 완성시키는 분입니다 (1:4, 13:48, 3:6).

 

  둘째,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했습니다. 8절에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6:3에도 스랍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찬양했습니다. 거룩하다고 3번 강조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최상급으로 찬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성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거룩하다’(αγιος)는 성품에 있어서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죄악이나 불의의 의지가 전혀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죄로 오염된 피조물들과는 전혀 구분되는 도덕적 완전함인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찬양했습니다. 8절에 “~전능하신 이여~”라고 한 것은 전능한 능력을 가지신 분임을 찬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만물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못하는 것이 없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원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연약한 피조물들과는 대조되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②'24장로'가 경배했습니다.

 

  하늘보좌에 하나님이 앉아계시고 하나님의 보좌 좌우로는 24보좌가 있었습니다. 24보좌에는 24장로가 흰옷을 입고 금관을 쓰고 앉아있었습니다. 4절에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고 했습니다. '24장로'는 구원받은 모든 성도를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의 유대민족 가운데 구원받은 성도들의 대표가 12장로(12족장)이고, 신약의 이방민족 가운데 구원받은 성도들의 대표가 12장로(12사도)입니다. 두 대표를 모두 합치면 24장로입니다. 그래서 24장로는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에 대한 대표를 상징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구약 성도들인 유대인이든 신약 성도들인 이방이든 모든 성도들의 대표자들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흰 옷을 입고는 성도가 예수님의 대속으로 의롭게 된 자들임을 의미합니다 (7:14). ‘머리에 금관을 쓰고는 성도가 승리관을 쓴 것을 말하며 이는 하나님께 받은 영광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믿음의 증거와 계명의 말씀을 지킨 자들에게 주신 상입니다 (마태복음19:28, 벧전5:4, 1:12, 2:10). '24장로'는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생명 내놓고 신앙을 지킨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승리자에게 주시는 금면류관을 씌워주신 것입니다.

 

  '24장로'는 하나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11절에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4생물'9절에 보면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렸는데 '24장로'도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경배찬양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기의 뜻대로 세상을 창조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16-17).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에서 에 해당하는 헬라어 '델레마'(θελημα)는 목적, 결정, 선택 등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선한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에 맞는 결정을 했다는 의미가 있으며, 그 결정에 따른 방법을 선택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만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상에서 받는 모든 환난과 핍박과 고난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이루어진 것, 하나님이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허락한 것, 하나님이 성도들을 연단시켜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허락한 것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고난 가운데서도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섭리해주셔서 선한 목적대로 승리하게 해주실 것을 확신한 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예수님 모친 마리아와 사역을 하다가 로마제국의 당국에 붙잡혀 기름가마 고문을 당하고 밧모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밧모섬은 소아시아(트뤼키예) 앞에 있는 섬(그리스령)으로서 채석장이 있는 돌산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소아시아의 교회와 성도들이 당할 박해를 생각하고 그곳의 교회들과 성도들이 잔해당할 것을 염려했습니다. 소아시아의 구원운동이 실패로 돌아갈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런데 24장로의 찬양은 세상에 대한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 소아시아에서 구원운동을 시작하신 선한 뜻대로 그 목적을 이루어갈 것이라는 확신을 선포한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소아시아에 대해 가지신 선한 목적대로 반드시 승리하게 해주실 것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24장로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를 했습니다. 10절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는 영원성과 절대성을 인정하고 그 앞에 절대적인 존경과 경외를 나타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는 자기들이 쓰고 있던 관을 하나님께 드리며 경배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드리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본형 '발로'(βαλλω)'던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글성경 개역판에서는 '던지며'로 번역했는데 개역개정판에서는 '드리되'로 번역했습니다. ‘드리다’(한글개역개정), ‘놓다’(lay NIV), ‘던지다’(한글개역, cast KJV, NASB, RSV) 등의 의미를 모두 같이 생각하면 의미가 더욱 생동감 있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24장로'가 그 금면류관을 벗어서 하나님 보좌 앞에 던진 것은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Johnson). 하나님이 그들에게 금면류관을 주신 것은 그들이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죽기까지 믿음과 말씀을 지킨 것에 대한 상으로 존귀하고도 영광스럽게 높여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금면류관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며 그 영광을 하나님께 되돌려드린 행동을 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신앙을 지킨 것은 자신들의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생각하고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해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예수님을 보내주시지 않았다면 구원을 받을 수도 없었을 것이고, 성령님을 보내주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령님으로 감동시켜주시지 않았다면 말씀을 깨닫지도 못했을 것이고, 말씀을 지킬 의지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령님으로 동행해주시지 않았다면 환난과 핍박 속에서 믿음과 말씀을 지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 속에서 모진 모욕과 조롱과 유린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믿음과 말씀을 양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가난과 질병 가운데서 극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믿음과 말씀을 양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여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온갖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것을 친히 위로하기 위해 칭찬하여 높여준 것인데 그들은 자신들이 그 영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라 하면서 신앙을 지킨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하나님이 높임을 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조금이라도 신앙을 지킨 것이 있으면 하나님이 하신 것이니 하나님이 영광을 받아야한다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5:10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 보면 "면류관 벗어서 주 앞에 드리세~"라는 가사가 있고 (25), "저 수정 같은 길에서 면류관 벗어서 주 예수 앞에 바치며 늘 찬송 하겠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3393).

 

  하나님 보좌 주위에 있는 4생물들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돕는 이들의 특징을 보여주고, 하나님 보좌 주위에 있는 24장로는 성도들의 최종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들이 경배하며 찬양한 내용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능력과 사역의 완전함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이런 메시지는 밧모섬에 유배가 있는 사도 요한 뿐 아니라 소아시아 7교회 성도들에게도 환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소아시아에 있던 교회들은 로마제국의 박해 가운데 있었고, 사회로부터 우상숭배의 강요를 받았고, 거짓선지자들의 미혹을 받았고, 생활의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온갖 박해와 고난과 시련과 역경과 미혹과 가난 속에서 절망에 빠져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보좌에 대한 계시를 통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하나님의 목적과 섭리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반드시 성도가 승리한다는 사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을 인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견디기 힘든 현실 가운데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게 하는 근거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온갖 고난과 역경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가 포기하지 말아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시편103:19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환난과 고난 가운데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아래 이루어진 것이며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한 선한 목적을 반드시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이 허락한 목적은 연단되어 마지막 때에 구속사역에 가치있게 사용하고 천국에서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예수 믿는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영적 연단과 성장을 이루어야합니다. 그 과정은 참으로 고통스럽겠지만 하나님이 성령으로 도와주셔서 믿음으로 승리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승리관을 씌워 위로하고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4:17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4: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고 했고, 베드로전서5;4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8:18에는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고 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에 대해 찬양할 것입니다. 그때를 생각하며 힘든 가운데서도 신앙을 잃지 않아야합니다.

 

<結言>

  4-5장은 하늘 예배의 광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예배는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에 대한 그림자이며 모형입니다. 그래서 지상의 예배는 불완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하늘의 예배를 모방해야합니다. 찬양과 기도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사역을 확인하고 높여야합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과 섭리를 확인하고 높여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확인하고 높여야합니다. 그것들을 근거로 하나님이 앞으로도 주권적 능력으로 책임지고 승리하게 해주실 것을 바라고 영광과 존귀와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지킨 부분이 있다면 그것도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하나님께 감격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려야합니다. 그런 예배를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어려움으로 인해 침체되고 상처받고 분노한 가운데서 회복되게 됩니다. 회의와 실망과 낙심과 좌절 가운데 있던 데서 감사와 평안을 얻게 됩니다.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견뎌야 할 이유와 현재 상황과 상관없이 미래에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것이 생명력 있는 예배를 드린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이런 예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헌신이 이런 예배이며, 우리가 가장 회복과 치유와 감사와 평안과 기쁨과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방편이 바로 이런 예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