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데살로니가전서1:1-10

<題目> 데살로니가 교인의 믿음

 

<序言>

  바울은 마게도냐의 첫성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여 빌립보교회를 세우고 얌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을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을 집회 장소로 사용했습니다. 그 집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됩니다. 바울은 거기에서 3주간 정도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의 훼방으로 교회의 기초를 공고히 하지 못한채 떠나야 했습니다. 후에 베뢰아와 아덴과 고린도 등 헬라지방에서 선교를 하다가 디모데를 파견하여 데살로니가교회의 형편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 결과 데살로니가교회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에 모범을 보이고 박해 속에서도 꿋꿋하게 믿음을 지켜 나간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에 대한 사도권과 복음의 진정성에 대한 약간의 논란이 있다는 보고를 듣게 되고, 종말론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다는 보고를 듣게 됩니다. 바울은 그 소식들을 접하고 난 다음 글을 적을 필요를 느끼고 편지를 한 것입니다 (살전3:1-6, 행17:1~18:5). 1장은 데살로니가교인의 믿음에 관한 내용인데, 1-3절은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한 인사와 감사에 대해 그리고 4-10절은 데살로니가교회의 선교에 대한 회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인사와 감사 (1-3절)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바울은 동역자인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함께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실루아노'(Silvanus)는 '실라'(Silas)의 로마식 이름입니다. 실라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유대인으로서 바울과 함께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고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허더거 성난 폭도에 의해 도망하기도 했던 사역자입니다 (행15:22,32, 16:23-25). 디모데는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동참했고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폭도에 의해 도망할 때 그 곳에 남아 있다가 복음을 계속 전했고 아덴에 까지 가서 교회 상황을 보고했고 바울은 그를 다시 보내어 목회를 하게 했는데 바울이 고린도에 1년 6개월 머무는 동안 그 곳에까지 와서 데살로니가교회 형편을 보고한 사역자였습니다 (행17:15, 18:1-4, 11). 바울이 아들처럼 사랑하는 사역자였습니다 (딤전1:2). 바울은 이 두사람과 함께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교회에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1절). 그래서 그들에게  '은혜'(χαριs)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구속의 은총을 말하고 '평강'(ειρηνη)은 하나님과의 화목으로부터 오는 평안을 말합니다. 평강은 은혜의 결과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가 역사도 짧지만 성도들이 복음에 근거하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므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장한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교회를 위해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2절). 구체적으로 그들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은혜가 나타난 것을 기억하고 그 은혜가 생각날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3절). 그 내용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는 기독교 신앙의 덕목 가운데 중요한 덕목입니다. 바울서신에 자주 등장하는 덕목입니다. 허나 문장의 구조를 보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중심 단어가 아니고 역사와 수고와 인내가 중신단어입니다.

 

  고린도전서13:13에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는데 그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혹자들은 믿음과 소망보다 사랑이 더 중요한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13:13의 말씀은 배경을 생각해야 합니다. 같은 책 12장에 보면 고린도교회가 직분과 은사 문제로 심각한 갈등과 분열 현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가 신앙적 열심과 은사 활용에 있어서 사랑이 요구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책 13장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내야 할 행동 윤리를 말하면서 결론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중요한데 고린도교회는 특히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같은 책 14장은 사랑이 없으면 신비적 은사라 할지라도 그것이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①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믿음의 역사'(του εργου τηs πιστεωs)는 믿음 가운데서 일어나는 사역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신 확신을 근거한 삶의 변화를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구원받은 사실을 근거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역사가 나타납니다. ②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사랑의 수고'(του κοπου τηs αγαπηs)는 하나님이 성도에게 베푼 사랑을 근거하여 수고하는 것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하나님께 받은 사랑으로 병든 자와 굶주린 자을 돕기 위해 헌신적인 봉사를 많이 했습니다.그들이 사랑을 나타내는 데에는 희생의 대가가 따랐을 것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희생적 수고를 합니다. ③소망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소망의 인내'(τηs υπομονηs τηs ελπιδοs)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소망을 근거하여 참는 것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꿋꿋하게 인내했습니다. 소망이 있어야 인내합니다 (롬5:3-5).

 


         2.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선교 회고 (4-10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바울이 자신과 동역자들 곧 실라와 디모데와 같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차음 전하던 때를 회고 하고 있습니다.

 

  ①바울과 동역자들이 복음을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했습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에서 아시아로 가려 하다가 마게도냐 사람이 '마게도냐로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고 손짓하는 환상을 보고 유럽에 속한 마게도냐로 향합니다. 첫 성 빌립보에서 자주 장사 루디아를 전도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귀신 쫓아낸 사건을 계기로 로마 정신과 다른 종교를 전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의 기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 때 간수의 집안을 전도하게 됩니다. 빌립보 교회는 그들을 통해 세워집니다.

 

  그 사건 후로 바울은 동역자들과 함께 데살로니가로 갑니다. 그 곳에서 3~4주 동안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처음 안식일에 회당을 찾았습니다. 회당을 찾은 이유는 그 곳에서 유대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율법을 낭독하기 때문에 복음을 변증하기 좋은 장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헬라인들로서 유대교에 매력을 느끼고 회당에 모여드는 이른 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God-fearers)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귀부인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지만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고 율법을 배워 삶에 적극적으로 적용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이 회당에서 율법을 해석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대부분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때 회당 지도자 '야손'이라고 하는 사람도 설득되어 자기 집을 복음 전도의 근거지로 내어 주었습니다. 그런 상황들을 유대인들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야손의 집을 습격하고 야손을 붙잡아 읍장에게 데려가 가이사 아닌 다른 임금을 전한다고 고소합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바울과 일행을 밤에 베뢰아로 보냅니다 (행17:1-10).          

 

   바울은 그런 상황에서 처음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를 회고합니다. 바울이 전에는 성령으로 전도하는 것을 금지당하기도 했고 두려워 떨면서 전하기도 했습니다 (행16:6, 고전2:3). 데살로니가에서 전할 때는 달랐습니다. 복음을 말로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능력(영력)으로 전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므로 복음의 열매가 맺힌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핍박이 일어났던 것은 바로 그런 결과였습니다. 전에 훼이스신학교 부학장이었던 이상찬 박사가 말하기를 참 복음을 전하면 복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따라 오는 자들이 생기든지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사람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참 복음을 성령에 의해 전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생기고 그로 인하여 핍박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하다가 어려운 일이 생긴다고 낙심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진짜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계시록12:13에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계12:15,딤후3:12).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고전4:20).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성령께 달려 있습니다 (고전12:3). 말씀(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역사하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게 됩니다.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3:5).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의 아름다운 말로 전하려 말고 능력으로 전하려 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핍박이 올 수 있지만 두려워 하지 말고 또 다른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도 동리를 다 돌아다니기 전에 오신다고 했습니다.

 

  ②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기쁨으로 도를 받았습니다 (6절)

 

  바울과 일행은 데살로니가에서 처음 복음의 말씀을 전할 때를 회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능력과 성령과 확신으로 전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회당지도자 야손를 비롯하여 많은 헬라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으려고 시장 잡배들을 동원하여 야손의 집을 습격했고 야손을 비롯한 성도들을 잡아가 관원들에게 심문을 받게 했습니다. 그 이후에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로 갔습니다 (행17:1-10). 데살로니가에는 디모데가 남아서 사역을 계속했습니다. 그 후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유대이인들의 많은 핍박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에게 말씀을 때부터 성령의 기쁨으로 받았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전하는 자들과 주를 본받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느 때에나 전하는 자가 성령의 역사와 확신을 가지고 전하는 것이 중요하고 듣는 자들은 그 복음의 말씀을 기쁨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합당히 여기고 그 말씀을 지키기를 힘써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모범된 사례들을 보면 말씀을 기쁘게 받아 그 말씀을 지키므로 공동체의 힘이 있었고 복음 전파가 확장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말씀을 어떻게 듣느냐에서부터 성퇴가 결정됩니다 (롬10:17).

 

  ③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9절).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말씀을 들으면서 참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해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 위해 우상들을 버렸습니다. 그들은 헬라인들로서 복음을 듣기 전에는 다신(多神)들을 섬겼으나 복음을 받아들인 다음부터는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삶에서 청산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우상을 온전히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할 때 핍박이 들어오자 바울과 실라는 환난을 피하기 위해 베뢰아로 갔습니다. 그리고 젊은 디모데만 남았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다시 돌아올 줄 알았겠지만 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유대인의 핍박은 계속되었습니다. 제가 생각기에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과 실라에 대한 배반감을 느껴서 신앙생활을 거부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욱 믿음에 굳게 섰습니다. 우리들도 목회자들이 실제로 잘했든지 실수했든지 간에 목회자들을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신앙생활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대개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은 생각 않은 채 지도자들로부터 상처를 받아 실족하게 되면 신앙생활에 거부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당연히 있음 직한 일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상(偶像)'의 히브리어 '아웬'은 '텅빈' '공허' '헛된 것'을 말합니다. 곧 우상은 헛된 형상을 말합니다.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형상은 헛된 형상들입니다. 사람들이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남은 것들로 형상을 만들어 자기들의 신(神)이라고 섬깁니다. 우상은 다 사람의 수공물로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우매한 형상입니다. 능히 복이나 화를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섬기는 사람은 그것과 같이 우매한 사람입니다 (사44:12-17, 시115:4-8). 꼭 수공물이 아닐지라도 서물숭배나 동물숭배나 혼령숭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아닌 어떤 대상이라도 섬기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인들 같이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벤느고는 금신상에 절하지 않기 위해 풀무불에 들어갔습니다.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절하지 않다가 위기를 당했습니다. 우리 나라 초대교회 믿음의 선진들도 일제의 신사참배 거부로 감옥생활과 순교를 당했습니다. 또 제사를 거부하다가 쫓겨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상의 제물(祭物)'은 우상을 섬기는데 사용한 음식들을 말합니다. 초대교회들은 우상의 제물을 멀리했습니다  (행15:29, 고전10:28, 계2:14, 20). 로마서14:1-3은 구약에서 금함 음식에 관한 말씀이고 디모데전서4:4-5은 금욕주의에 대한 말씀이지 우상의 제물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 믿음의 선진들도 제사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겐 영적인 우상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보다 더 신뢰하고 더 의지하고 더 사랑하고 더 지배받는 것은 우상적 존재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보다 더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우상적 존재입니다. 물질, 사람, 단체, 제도, 사상, 교리 등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말세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합니다 (딤후3:1-5).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될 것입니다. 영적인 우상의 제물도 많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양보하고 얻은 유익들이 우상의 제물인 것입니다. 우상과 우상의 제물을 떠나려면 무엇보다도 탐심을 가지지 않아야 합니다 (골3:5).

 

  ④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주의 강림하심을 기다렸습니다 (10절).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많은 환난과 핍박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약속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을 기다렸습니다 (마24:44, 요14:18, 행1:11, 계1:7). 심판 날에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져 주실 예수 그리스도의 임하심을 사모했습니다. 그들은 힘든 삶 속에서도 주께서 오셔서 멸망한 가운데서 구하시고 위로해 주실 것을 바라보고 인내했습니다.

 

  종말적 신앙은 현재의 고난을 이기는 원동력이 됩니다. 힘들 때 주의 강림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내세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께 받을 상급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께서 재림 하시면 이 세상을 심판하고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주께서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기실 것 것입니다. 우리에게 충성된 종이라고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면류관을 벗어서 주께 던지며 '영광과 존귀와 능력이 오직 주께만 있습니다' 할 것입니다 (계4:10-11, 7:17, 21:4).

 

  전라남도 여수 애양원이라고 하는 문둥환자 촌에서 목회를 했던 손양원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제 식민 통치와 6.25 동란과 여순반란 사건을 경험하면서 두 아들이 공산당에게 죽고 자기도 순교 당했습니다.   수많은 수난을 겪은 손양원 목사님이 지은 '주님 고대가'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우리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먼 하늘 구름만 떠도 우리 주님 오시는가 바라봅니다 ~)를 보면 손양원 목사님이 그런 역경이 있을 때 주의 재림을 고대하는 종말 신앙으로 극복해 나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고난을 견디신 것은 부활하여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서실 것을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12:2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지만, 부활이 전제되지 않고는 십자가를 견딜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도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박해를 견뎠습니다 (히11:35-38). 환난 가운데서 즐거워 하며 견딜 수 있는 것은 소망이 있을 때입니다 (롬5:3-5).

 

<結言>

  그들의 신앙이 마게도냐와 아가야와 각처로 소문이 났습니다. 마게도냐의 수도는 데살로니가이고 아가야의 수도는 고린도입니다. 그들의 신앙적 모범이 헬라(그리이스) 반도 전역에 복음이 소개되고 있음을 칭찬한 것입니다 (7-8절). 데살로니가와 같은 모범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