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데살로니가전서 2:1-20
<題目> 바울의 전도 모범
<序言>
바울은 1장에서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를 회고했습니다. 2장에서는 좀더 자세히 회고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변호를 위한 회고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대적자들 특히 유대인들이 많은 방해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데살로니가 교회가 서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주변 지역에 소문이 날 정도로 변화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곳을 떠난 다음에도 대적자들이 여전히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비난 받는 것이 곧 자기가 전한 복음이 비난 받으므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침해받을 것을 우려하여 당시 자신의 복음 전도와 관련한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기에 이릅니다. 바울의 자기 변호와 자기 변명의 내용은 오늘날 복음 전도 사역자들인 선교사, 목회자, 직분자들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내용 구조는 바울의 데살로니가 전도 모범(1-12절), 바울의 복음전도 메세지 변호(13-16절), 바울의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사랑(17-20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바울의 데살로니가 전도 모범 (1-12절)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3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6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선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의 복음전도 결과에 대해 폄하하는 비방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가 복음을 전한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시켰습니다 (1절). 사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한 것이 실패가 아니라는 사실은 1장에 언급된 대로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진 것이 증거하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삶이 변화된 것이 증거하고 그 삶이 아가야와 마케도냐 온 지역에 까지 소문이 난 것으로 증명됩니다.
바울은 이어서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의 배경을 설명하였습니다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당하고 데살로니가에서도 많은 고난 가운데 복음을 전했다고 호소하였습니다 (2절). 바울과 실라는 마게도냐 첫 성인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고쳐준 일로 인하여 더 이상 수익을 올릴 수 없게 된 여종의 주인으로부터 로마 정신과 다른 기이한 종교를 전한다는 고소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관원들에게 잡혀가 매를 맞고 정확한 재판과 판결도 없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행16:19-34). 바울과 실라가 그 직후 마게도냐의 수도 데살로니가로 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 때에도 고난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3~4주간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할 때 회당 지도자 야손을 비롯하여 유대교에 매력을 느끼고 몰려든 헬라인들(God-fearers)이 복음을 받아들이자 유대인들이 야손의 집을 습격하여 불사르고 야손을 가이사 아닌 다른 임금을 전한다고 고소하였고 그 일 직후 교인들의 권유로 바울과 실라는 베뢰아로 떠났습니다 (행17:1-10).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울과 실라가 베뢰아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줄 알고 그 곳까지 찾아와 소동을 일으키고 방해를 했습니다 (행17:13). 한마디로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도 많은 싸움 곧 고투(苦鬪)하며 복음을 전했는데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① 바울에게는 간사와 부정과 궤계가 없었습니다 (3-4절).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열심히 전했으나 좋지 못한 설교자로 비난받았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복음전파 동기가 순수함을 변호하였습니다. 자신의 권면 곧 복음전도는 간사함이나 부정함이나 무슨 궤계를 가지고 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3절). '간사'(πλανηs)는 '오류'(error)의 의미로서 자신이 전한 복음이 거짓이 아닌 진리임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부정'(ακαθαρσιαs)은 당시 이교 사상들에서 만연한 성적 부정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복음을 전하면서 그런 부도덕한 행위를 조장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궤계'(δολω)는 당시 철학자(sophist)들이 사람들에게 인생에 성공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 준다고 하면서 물질적인 이(利)를 얻은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서 복음을 전하면서 그와 같은 속임수를 가지지 않고 순수하게 전했음을 나타내려는 의도에서 사용한 단어입니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과 복음 전도의 부탁을 받은 바 대로 전한 것이었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4절). 한마디로 바울은 복음 전도를 불순한 동기와 방법과 목적에 의해 하지 않았고 순수한 복음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했습니다. 갈라디아1:10에서는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어느 때에나 사역자는 사역을 통해 자기 이익과 욕망을 채우려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빙자하지만 속에 자기 이권과 관련된 의도가 숨어 있으면 바른 사역자일 수 없습니다.
② 바울은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습니다 (5-8절).
로마 제국 안에는 여러 철학자나 변사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곳 저 곳을 순회하며 강의를 하면서 돈을 벌었고 어떤 이들은 자기의 인기와 영예를 얻었습니다. 바울도 그런 무리들과 같은 모략을 받았습니다. 복음 전하는 일로 자신의 욕심을 이루려 한다는 비난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첨하는 말'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목적을 감춘 채 옳게 보이려고 하는 말을 가리킵니다. '탐심의 탈'은 자신의 속에 있는 욕심을 가리는 위선을 말합니다. '아첨하는 말'이 외적 행동이라면 '탐심의 탈' 내적 동기와 관계된 것입니다. 두 표현의 공통점은 속에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외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곧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속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모략에 대해 '오직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같이 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유모'(乳母.τροφοs)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사용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두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실제 '유모'를 생각하고 사용했을 수 있습니다. 유모는 주인의 자녀를 대신 길러 주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그런 관점에서 사용했다면 바울 자신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대할 때 자기 교인으로 생각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는데 이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를 맡긴 것으로 여기도 자기를 위해 이용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유모' 다음에 나오는 '자기 자녀를'라는 표현을 보면 어머니를 생각하고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사용했다면 바울 자신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대할 때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는 것 처럼 어떤 대가나 조건을 생각하지 않고 희생적으로 대했다는 의미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런 관점이 맞다면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 주기를 즐거워 했다는 표현이 쉽게 이해가 갑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사랑하여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빌2:17). 복음을 유모의 심정으로 전하고 돌봄을 유모의 심정으로 해야 합니다.
③ 바울은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으려 했습니다 (9-12절)
바울은 그가 기록한 고린도전서의 내용을 보면 복음전도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교인들로부터 공궤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당위성은 첫째는 사람들의 예가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병정으로 나가는 사람이 자비량하고 나가는 없고 포도를 심고 그 과실을 먹지 않는 자가 없고 양 떼를 기르고 양 떼의 젖을 먹지 않는 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전9:7-8). 둘째는 모세의 율법도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꾼을 위해 염려해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 밭을 가는 자이든 곡식을 떠는 자이든 곡식을 함께 나눌 소망을 가지고 하는 것인데 신령한 것을 뿌린 자로서 육신의 것을 거둔다고 해서 과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고전9:9-11, 딤전5:18, 신25:4). 셋째는 성전의 규례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일을 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성전 제단에서 나는 것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규약시대에 제사 사역을 감당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백성들이 드리는 십일조와 헌물로 생활을 했습니다 (고전9:13, 레6:16, 7:6,14, 10:12-15, 민5:9-10, 18:8-20, 신18:1). 넷째는 주님의 가르침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으니 복음 전하는 자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 먹을 것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꾼이 저 먹을 것 얻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고전9:14, 마10:10-11, 눅10:5-9). 그런 관점에서 갈라디아서6:6에서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전도 사역을 하면서 생활을 위한 사례비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9:15에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사례비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받지 않았습니다. 고린도교회를 세울 때문 아니라 데살로니가교회를 세울 때에도 그들에게 생활비를 받지 않고 밤낮으로 장막 만드는 일을 해서 생활을 했습니다 (9절, 행18:3). 그것은 본문에 말한대로 교인 가운데 아무에게도 누(累)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9절).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는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전9:12). 당시 소피스트들이 삶의 지혜를 가르쳐 준다고 강의를 하면서 돈을 챙기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사례비를 받게 될 경우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가 그들이 전한 철학의 하나쯤으로 평가 절하되므로 인하여 구원 역사가 일어나지 못할 것을 염려해서였습니다. 바울이 생활을 위한 사례비를 전혀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돈을 보내주었을 때 바울은 그들을 칭찬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할 때도 빌립보교회 교인들로부터 받았습니다 (빌4:14-18). 그들에게 받은 것은 그들은 이미 복음 진리를 받아 믿음이 성숙했기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에 장애를 받지 않기 위해 받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그렇게 한 것은 그들을 사랑해서였습니다.
바울은 그런 점을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어떻게 거룩하고 흠없이 행하려 했는지 그들이 잘 알고 있고 증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항간에 자기 주장대로만 하는 독재자라는 비난이 있었음직 하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을 마치 아비가 자녀에게 대하듯이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했습니다 (11절).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믿음이 어린 자나 믿음이 없는 자에 대해 권리를 다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를 끼치지 말아야 합니다.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무례히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독재자의 모습처럼 군림하려 말고 아비가 자녀에게 대하듯이 대해야 합니다.
2. 바울의 복음전도 메세지 변호 (13-16절)
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16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
바울은 앞 대지 1~12절에서 자신에 대해 변호하기 위해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 어떤 태도로 전했는지 밝혔습니다. 이제 자신이 전한 말씀이 어떻게 열매를 맺었는지 밝힙니다. 아울러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당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위로합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데 있어서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 말씀으로 받고 그 말씀이 그들 속에서 역사하는 것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13절).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을 통해 객관적으로 제시되는 성경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당시 소피스트(sophist)들처럼 스스로 논리를 세워 전하는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말씀이 그 속에서 역사를 했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사고를 사로잡고 행동과 생활을 변화시켰습니다 (히4:12, 행19:20).
그 증거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본받으려 한 점입니다. 유대에 있는 성도와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 할 때 유대인들이 핍박했습니다. 그들은 전에 선지자들을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바울 일행을 복음 전하지 못하도록 쫓아 낸 자들로서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을 대적하였습니다 (행17:5-13). 그들이 복음 전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구원에 대한 은혜가 자신들에게만 있는 전유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기득권에 침해를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박해했던 것도 회당 지도자중 한 사람인 야손이 개종하고 유대교에 관심을 가지고 회당에 모여든 이방인들 이른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God-fearers)이 개종하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기득권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난 다음에도 유대인들로부터 계속 핍박을 받았을 것이고, 또한 본토인들로부터도 우상숭배의 습관을 버린 것 때문에 핍박을 받았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믿음을 양보하지 않고 말씀을 지켰습니다.
디모데후서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신앙을 양보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악령이 방해하기 때문이고 세상이 싫어하기 때문이고 육의 속성이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으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가치관으로 바뀌어 어떤 유혹이나 핍박이나 환난이나 고난이나 질병이나 가난이 와도 말씀을 지킵니다 (히11:33-38, 계20:4). 로마서8:35-37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했습니다.
3. 바울의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사랑 (17-20절)
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과 실라가 3~4주 동안 복음을 전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그러나 회당의 지도자 야손이 개종하고 회당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개종을 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잡기 위해 시장 잡배들을 동원하여 밤에 야손의 집을 습격하고 야손을 붙잡아 읍장에게 고소했습니다. 그 사건 직후 믿는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떠나게 했습니다 (행17:1-10). 그리고 데살로니가에는 디모데가 남아서 사역을 계속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은 핍박을 받는 가운데서 바울과 실라가 다시 돌아올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고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까지 갑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배신감을 가졌을 것이고 바울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과 실라가 그들을 떠나 있는 것은 얼굴이고 마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17절). 곧 얼굴은 헤어져 있지만 마음은 항상 그 곳에 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를 떠난 것은'에서 '떠난 것은'에 해당하는 '아포르파니조(απορφανισθεντεs)'는 '고아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핍박받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떠나 있는 것이 마치 가족이 떨어져 있는 것 같이 여기고 고아처럼 홀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마음이 그들에게 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가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바울은 한 두번 갈려고 시도했으나 사단이 막아서 가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18절). 사단이 어떻게 막았는지 기록하지는 않고 있지만 사단이 방해하여 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을 방문하고 싶어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바울의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쁨과 영광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19-20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바울이 그 앞에 설 텐데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역을 잘했는지의 여부는 그 교인들의 성장 정도가 가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우상을 버리고 믿음을 지킨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모습은 바울이 복음을 바로 전했다는 증거이고 말씀을 바로 가르쳤다는 증거이고 사명을 잘 감당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의 면류관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신앙적으로 잘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그 평가가 주님 앞에서 있을 것을 생각했다는 것은 바울의 투철한 사역관을 보게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의 사역관을 점검하는 게기가 되어야 합니다.
<結言>
오늘날 사역자들이 바울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와 교인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 교회와 교인을 위해 헌신하려는 마음, 교회와 교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와 물질주의로 기울어진 사역자들이 많은 이 때에 바울의 정신을 가진 사역자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