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데살로니가전서 4:1-18
<題目> 실생활과 부활에 관한 교훈
<序言>
1~3장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칭찬과 복음전도자들의 복음 사역 동기를 설명했습니다. 4~5장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부족한 점들에 대해 권면을 했습니다. 특히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오해되고 있는 주의 재림에 대해 중점적으로 교훈했습니다. 내용 구조는 실생활에 대한 교훈 (1-12절), 재림과 부활에 대한 교훈 (13-18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실생활에 대한 교훈 (1-12절)
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2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8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10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11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12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① 거룩한 생활을 위한 교훈 (1-8절)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믿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염려하는 것은 그들이 이방 풍속을 좇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3~4주간 말씀을 배웠으나 아직 윤리적인 면에서는 성숙되지 못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듭났을지라도 아직 성화의 사역에서 자라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르쳤던 것,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곧 하나님의 뜻이 '거룩'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신 것은 거룩한 삶을 사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셨고 성령이 돕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요 하나님의 성령을 저버리는 것이라는 겁니다.
'거룩'은 죄와 악을 떠나는 것입니다. 거룩한 생활을 요구하면서 부정한 생활을 '음란'으로 지적했습니다. 음란하지 말고, 색욕을 좇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의 한계를 넘는 행동을 하므로 이웃 형제를 고통스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음란죄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않고 사는 사회의 대표적인 죄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거룩한 생활을 할 것을 주문하면서 음란과 색욕을 경계한 것은 당시 데살로니가 사회에 대한 반영일 것입니다.
고고학 자료들을 통해 가나안 주민들의 종교를 보면 그들을 바알(Baal)과 아세라(Asherah) 신(神)을 섬겼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바알은 농사와 목축의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신으로 특히 비를 주관하는 신으로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바알 신과 그 배우자인 아세라 여신의 성적 결합이 있을 때 비가 내리고 그로 인하여 다산과 풍요가 생긴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의 행위를 모방하여 그 신들을 기쁘게 하면 유감주술(imitative magic)의 효과로 다산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바알 신전에서는 그 신들의 행위를 모방하기 위해 남창과 여창을 두었습니다. 그들은 제의에 참여한 사람들과 행음을 했습니다. 가나안 족속의 풍습은 우상숭배 외에도 음란한 풍속이 많았습니다 (레18:3-25). 바울 당시에 우상을 섬기는 이방 세계에서는 대부분 그와 비슷한 신적 제의(Cult)로 이루어지는 음란한 행위들이 있었고 그런 공적으로 허가된 관습은 자연스럽게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당시 헬라 문화권의 사람들은 유대인의 율법에서 규정한 '결혼'의 범주를 넘어선 성적 관계를 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복음전도 사역을 하면서 당시 만연된 음행에 대해 철저히 경계했습니다. 사도행전15:20에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방해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헬라인 가운데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개종하려 하는데 유대인들이 그 조건으로 할례를 요구했습니다. 이방인들이 당시 외과 수술을 하는 것도 꺼렸습니다. 또 당시 유대인 가운데 바지를 벗고 다니는 아이들의 발기된 듯한 모습을 보고 음란한 민족이라고 무시하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꺼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할례문제를 담판짓기 위해 예루살렘 공회에 참여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있는 예루살렘 공회에서 변론 끝에 이방인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개종할 경우 할례를 받게 조건을 면해주자 하는 결론을 도출합니다. 그런데 그런 결정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만 좋은 소식일 뿐 할례 관습이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불만을 가질만한 결론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위해 정한 규례가 곧 '우상의 제물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는 멀리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당시 이방 사회에 만연된 우상숭배와 관련한 음행이 유대인 사도들에게는 할례는 양보해도 그것은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이방 사도인 바울에게 있어서도 그것을 더욱 강한 규례로 규정하는 데에 찬성을 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성령이 함께 결정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당시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하고 있는 장소에 있는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경계했습니다. 고린도전6:18-20에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도 소아시아에 보내는 책에서 엄하게 경계했습니다. 니골라당과 발람과 이세벨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은 교회를 칭찬하고 받아들인 교회를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계2:6,15,20).
우리는 이방 풍속 가운데 무엇보다도 음행을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먼저는 피해야 합니다 (고전6:18). 그리고 마음 속에서 음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마5:28).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약4:4).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고 우리가 거룩하기를 요구하십니다 (레19:2). 세상 풍조가 아무리 음행이 조장되어도 우리는 거룩해야 합니다 (약1:27). 하나님 선택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고 성령이 내주하고 하나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사명이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② 형제 사랑에 대한 교훈 (9-10절)
'형제 사랑'은 한 하나님을 모시고 형제 자매된 신자들 간의 사랑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이 가르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마음 속에 역사하는 성령의 감동을 따라 서로 사랑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뿐 아니라 마게도냐 권에 속한 빌립보와 베뢰아 지역에 있는 신자들도 사랑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알고 그들을 칭찬하고 더욱 많이 사랑하라고 격려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요일4:16). 성령께서 믿는 자 마음에 그 하나님의 사랑을 부었습니다 (롬5:5). 그래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사랑의 인격적 열매를 맺히게 됩니다 (갈5:22). 예수님께서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요13:34).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것처럼 큰 계명이 없다고 했습니다 (막12:31).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자,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 예수 그리스리도의 제자된 자, 진리에 속한 자 는 당연히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요일4:7, 요13:35, 요일3:18-19).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성령의 은혜를 받을 때는 공동체가 서로 사랑했습니다 (행2:43-47, 4:32-37).
우리는 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한 성령을 받고 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므로 한 몸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같은 비전과 같은 목표와 같은 사역과 같은 깨달음을 가졌다고 하는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고전12:26-27). 특히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일서3:18-19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2:15-17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행함이 강조된 책은 야고보서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서신들은 믿음이 강조되고 야고보서는 행위가 강조되었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빌립보서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말하고 있고 (롬3:28, 갈2:16, 빌3:9), 야고보서에서는 '사람이 믿음으로가 아니라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행칭의(以行稱義)를 말하고 있습니다 (약2:24). 이 때문에 사람들은 오해하여 서로 사요 필요에 따라 한 쪽의 책만을 강조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서신과 야고보서는 상호 모순되는 내용이 아니라 같은 내용을 말하는 것이고 상호 보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신칭의의 공식은 항상 유대교의 특권의식과 논쟁하는 상황에서 나타납니다. 바울이 '일반적인 행위'가 아닌 '율법의 행위'를 거부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는 의를 획득하기 위한 통로로 간주되었던 율법을 거부하고 믿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신칭의론은 이방인 개종자들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한 약속에 진정한 상속자들이 될 수 있다는 권리를 옹호하려는 독특하고도 제한된 목적을 위해 창출되었습니다. 야고보가 말한 '행위'는 주로 '일반 행위'를 말합니다. 일반 행위와 관련된 행위는 1:4와 2:14을 포함하여 11번 사용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행위'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일반 행위를 뜻합니다. 율법의 행위를 말하기 보다는 단지 기독교적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상과 야고보의 사상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용어의 다른 사용법을 통해 각기 다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사상과 야고보의 사상의 경우는 양자 택일할 성격의 것입니다. 바울은 주로 '(기독교적) 믿음'을 옹호하고 '(유대교적)행위'를 비판하는 반면, 야고보는 주로 '(기독교적) 행위'를 옹호하고 '(유대교적) 믿음'을 비판한 것입니다.
③ 직업에 대한 교훈 (11-12절)
데살로니가교회는 주의 재림의 임박이 임박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하지 않고 소란을 피우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종용히 자기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11절).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3:7-12에서도 동일만 관점의 권면을 했습니다.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창1:28, 2:15). 오히려 일하지 않는 것을 악한 것으로 정죄하고 있습니다 (살후3:10). 우리는 노동에 대한 생각부터 바로 해야 합니다. 노동을 죄의 결과로 온 저주라고 생각하여 노동을 악하게 여기는 저주설도 있습니다 (창3:17~19참조). 성경은 결코 노동을 천한 것으로 가르치지 않고 신성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이 범죄하기 전부터 노동의 기쁨은 복으로 주어졌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행복의 수단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노동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과 안식에 참여할 수 있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출20:9-10). 셋째 외인들 앞에 단정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12절).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넷째, 아무 궁핍함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12절). 경제적으로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엡4:28).
그러므로 우리는 일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고대 헬라 철학자들은 노동을 천시하여 일에 손을 대지 않는 사람일수록 귀한 사람으로 대접했다는데 동양권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상이 있어서 우리 나라에서도 옛부터 노동을 천시하는 사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앞에서는 직업에 귀천이 없습니다. 요셉은 목수였고 바울은 천막 꿰매는 일을 했습니다 (마13:55, 행18:3). 그러므로 소득이 적더라도 아무 일이나 할 수 있는 일을 근면하게 해야 합니다.
특별히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충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였습니다 (요5:17). 우리도 영적인 일을 해야 합니다. 생명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주께서 맡기신 일을 해야 합니다 (고전4:2). 일하지 않는 자는 양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일하는 자가 양식을 얻게 됩니다 (요4:34). 달란트 비유와 므나 비유에서 보듯이 일하는 자가 주의 상을 얻습니다 (마25:14-30). 우리는 한시간 남은 자의 심정으로 일해야 합니다 (마20:1-16).
2. 재림과 부활에 대한 교훈 (13-18절)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데살로니가교회는 믿는 자에게 핍박이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의 재림에 대해 기대하는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은 그들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자신들의 생전에 재림하리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주의 재림 전에 죽은 자들은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교리적으로 잘못된 재림 사상을 바로 잡아 줄 필요를 느끼고 주의 재림과 그 때 있을 성도의 부활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 내용은 오늘날 우리에 대한 재림론을 점검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주의 재림에 관한 내용은 5장에서 다루기로 하고 본 장에서는 성도의 부활에 대한 내용만 다루려고 합니다.
※ 성도의 부활에 관한 교리
본문에서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은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14절). 예수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재림하실 때 죽은 자들이 살아난다고 했습니다 (16절). 살아 있는 자도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고 했습니다 (17절). 고린도전서15:51-52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했습니다.종말에 있을 인류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에게 하늘나라의 진리를 교훈하는 것 중에 정점을 이루는 교리이며 사도 의 복음 내용 중 중심이 되는 교리였습니다. 이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 교리와 함께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최고의 희망일 뿐 아니라 힘과 소망을 주는 진리입니다.
A.부활의 의미
부활(復活)의 헬라어는 '아나스타시스'(αναστασιs)입니다. 이는 '일어나다' '서다'라는 동사 '아니스테미'(ανιστημι)에서 유래한 말로서 기본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6:40, 고전15:12, 롬8:11). 부활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는 죽지 않고 썩지 않고 죄와 관계없는 영광된 인격체 곧 죄와 죄로 인한 고통들과 그 결과로 오는 죽음의 세력을 완전히 이기는 승리의 역사입니다 (고전15:42-47).
B.부활의 확실성
사도 시대 때부터 부활에 대해 믿지 않거나 영적 부활만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행23:8, 고전15:12). 그러나 영육간의 불멸에 대한 타당성은 a.자연계가 증거하고 있고 b.과학적 근거가 증거하고 있고 c.신앙 고백서들이 증거해 주고 있고(사도 신조, 마르셀누스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 아우구스티나 신앙 고백서, 하이델 베르그 신앙 문답서, 스코트랜드 신앙 고백서, 스위스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등)무엇보다도 d.성경이 명백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죽은 자가 살아난 예가 있습니다 (마27:52-53, 눅7:11-15, 요11:38-44) 살아 있는 자가 죽지 않고 변화되어 휴거한 예도 있습니다 (창5:24, 왕하2:11). 물론 앞으로 인류가 부활할 때의 몸과는 다릅니다. 성경은 앞으로 죽은 자가 자시 살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26:19, 단12:2-3, 겔37:7-10, 요5:25, 6:39-40, 고전6:14, 고후4:14, 살전4:16). 살아 있는 자가 변화되어 휴거할 것도 예언하고 있습니다 (마24:40-41, 고전15:51-52, 살전4:17, 계11:11-12). '휴거'(携擧)는 몸이 들림받아 올라가는 것에 대한 한문 표현입니다.
C.부활의 종류
인류의 부활은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이 있습니다. 의인의 부활은 성도의 부활을 말하고 악인의 부활은 불신자의 부활을 말합니다 (행24:15). 성도의 부활은 생명의 부활로서 영생을 위한 부활입니다. 악인의 부활은 최후심판을 거쳐 영벌을 받기 위한 부활로서 부활 자체가 저주입니다 (요5:28-29, 단12:2).
D.부활체의 성질
인류의 부활은 영적인 부활이나 정신적인 부활이 아니라 육체적인 부활입니다 (눅24:39-43, 요20:27-28, 롬8:23).
a.신령한 몸입니다. 부활체는 산 자와 같이 뼈가 있으며 음식을 먹을 수도 있으며 산 자의 눈에 보이기도 하며 산 자와 대화 하기도 한다.(눅24:13-43. 요21:1-23 고전15:36-44) 그렇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연약성이 전혀 없으며 다시 죽지 않는 신령한 몸입니다 (막14:28, 요20:19,26, 고전15:42-44, 고전15:53-54).
b.영광스러운 몸입니다. 성도의 부활체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언약을 받은 몸으로서(골3:4)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며 의의 면류관과 썩지 않는 면류관과 생명의 면류관에 참여할 영광스러운 몸이다 (계20:4, 딤후4:8, 고전9:25, 계2:10).
c.생전 모습의 몸을 띨 것입니다. 아마도 부활체의 형상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도록 생전 모습의 형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불구한 모습으로 부활한다 해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기 때문에 불편함이나 소외감이나 연약함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요20:20,27, 눅24:39, 고전15:4-8, 마27:52-53).
E.부활의 시기
종말에 있을 일반적인 부활은 개인적인 체험이 아닌 전 인류의 동시적인 부활입니다. 종말에 있을 부활의 종류는 신자(성도)의 부활과 불신자의 부활로 나뉩니다. 신자의 부활을 첫째 부활이라고 하고 불신자의 부활을 둘째 부활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신자의 부활은 죽은 자의 부활과 산 자의 휴거(携擧: 몸이 들림받아 올라감)로 나뉩니다.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모든 인류가 부활합니다. 신자의 부활에서는 죽은 자가 먼저 살아나고 그 다음에 살아 있는 자가 휴거합니다. 종말에 일어날 구원사적 사건은 일반적으로 '7년 대환난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 성도의 부활 - 천년왕국 - 불신자의 부활 - 최후심판'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신자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년왕국(千年王國)과 관련하여 신자의 부활과 불신자의 부활이 다른 시기에 있다고 하는 설이 있고 신자의 부활과 불신자의 부활이 동시에 있다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 전천년설(前千年說)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도의 부활이 천년왕국 전에 있고 불신자의 부활은 천년왕국 후에 있다고 합니다 (고전15:23-24, 계20:4-5). 무천년설(無千年說)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역사적인 천년왕국을 부정하기 때문에 첫째 부활인 성도의 부활과 둘째 부활인 불신자의 부활이 종말에 함께 있다고 합니다 (요6:39, 40, 44, 54, 11:4).
대환난(大患難)과 관련하여 성도의 부활이 환난 전에 있다는 설과 환난 후에 있다는 설과 환난 중간에 있다는 설이 있습니다. 휴거의 시기에 관한 설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과 같습니다.
a. 환난 전 휴거설이 있습니다.
환란전휴거설(患難前携擧說)은 대환난 전에 휴거한다는 설입니다. 파인버그, 디이슨, 크리스웰 등이 주장합니다.
교회(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두번 심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보리산 상에서 몸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심판을 받으셨는데, 우리가 심판을 당한다면 주님의 몸이 두번 심판을 받는 것이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노아의 때와 소돔 고모라 때를 예로 들어, 교회가 7년 대환난을 통과하지 않을 것을 계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마24:37). 즉 노아 홍수와 소돔 고모라 유황불 심판이 있기 전에 하나님이 노아와 롯을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환난 전에 구원해 준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눅21:34-35, 살전1:10, 계3:10). 그리고 요한계시록4:1에서 성도가 휴거하고 그 다음에 6장부터 환난들이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대환난을 계시한 6-19장까지 단 한번도 '교회'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24:37은 사람들이 주의 재림 전까지 깨닫지 못하고 방탕할 것을 가리키는 말씀이지 환난 전에 미리 구원해 준다는 의미로 사용한 말씀이 아닙니다 (마24:38-39). 그들의 주장의 큰 오해는 환난과 심판을 동일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21:34-35, 데살로니가전서1:10의 내용은 심판과 멸망에서 구해준다는 의미이지 환난과 시험을 면해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7년 대환난'은 하나님이 적그리스도를 멸망시키듯이 교회와 성도를 멸망시키려는 심판이 아니라 교회와 성도를 연단시키기 위해 허락한 환난입니다. 사단과 불신 세력의 대적을 활용하여 알곡(택자)와 쭉정이(불택자)를 갈라 내고 알곡은 더욱 연단시켜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적어도 요한계시록 6장에 나오는 '7인 재앙'과 8장에 나오는 '7나팔 재앙'은 성도를 연단시키기 위한 환난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4:1은 성도 전체에게 올라오라는 말이 아니라 사도 요한에게 천상예배를 영으로 보여 주기 위해 부르는 모습입니다(겔40:1-2). 6장 이후에 계속적으로 '교회'와 '성도'를 상징하는 '촛대' '감람나무' '증인' '여인' 등이 나옵니다. 성도의 부활은 11장에 기록되었습니다. 11:11에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고 했습니다.
b. 환난 후 휴거설이 있습니다.
환난후휴거설(患難後携擧說)은 대환난 후에 휴거한다는 설입니다. 죠지 래드, 더글라스 무 등이 주장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2:3-8에는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주께서 이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이른바 '소계시록'에 환난을 거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 날에 있을 징조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1절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말세에 있을 징조를 말씀하시다가 13절에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고, 29-31절에는 "환난 후에 주에 임하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같은 성경 마태복음 24장에서 환란을 거친다고 하면서도 다 당하게 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24:21-22에는 "그 날을 감하지 않으면 견딜 육체가 없으므로 그 날들을 감해준다"고 했습니다.
c. 환난 중 휴거설이 있습니다.
환란중휴거설(患難中携擧說)은 대환난의 전반기를 지나고 후반기 전에 휴거한다는 설입니다. 노만 헤리슨, 글리슨 아처 등이 주장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년 대환난'은 전반기 3년반(42달, 1260일)과 후반기 3년반(42달,1260일)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3년반'은 '3일반'과 '세때반'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성도가 대환난을 당하기는 하지만 다 당하지는 않습니다. 요한계시록11:11-12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 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고 했습니다.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은 교회와 성도에 대한 상징용어인데 그들이 삼일반 후에 휴거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다니엘12:11-12에 보면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1,290일을 지낼 것이요- 기다려서 1,335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7년 대환난의 절반인 '3년 반'(1,260일)에서 40일이 지나고 그 때로부터 45일을 더 지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전반기 환난을 지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세가지 재앙이 나옵니다. 7인 재앙, 7나팔 재앙, 7대접 재앙입니다. 이 세종류의 재앙이 점점 발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7인 재앙, 7나팔 재앙은 부분적이고 7대접 재앙은 전체적이라는 것입니다. 7인 재앙, 7나팔 재앙은 긍휼이 있고 7대접 재앙은 긍휼이 없는 무자비한 재앙입니다. 그래서 7인 재앙, 7나팔 재앙은 성도가 당하는 재앙이고 7대접 재앙은 불신자만 당하는 재앙입니다. 그러기에 7인 재앙은 6장에, 7나팔 재앙는 8~9장에, 7대접 재앙은 16장에 나옵니다.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666의 강요가 있는 가장 극심한 환난을 13장에 나오고 그리스도와 성도의 승리는 14장에 나옵니다. 전반부에 나오는 7인 재앙과 7나팔 재앙은 택자와 불택자를 가르고 택자를 연단시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후반부에 나오는 7대접 재앙은 적그리스도와 불택자를 심판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곧 환난중휴거설은 환난은 당하되 다 당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적그리스도나 불신자들과 함께 멸망 않고 구원하기 위해 그들에게 내리는 환난은 당하지 않고 휴거시킵니다. 그러나 성도를 연단시켜 정결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기 위해 부분적인 환난은 당하게 합니다. 두가지 목적을 같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환난을 겪는다고 해서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6장부터 대환난에 대해 말하기 전에 4~5장에서 하늘보좌를 보여 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책(구원계획서)을 받아 인을 떼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신 것은, 미래에 펼쳐질 모든 환난과 구원 계획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예수 그리스도의 시행 하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해주기 위함입니다. 13장에 극심한 환난이 나오지만 14장에서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은 승리하여 시온산에서 새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시나리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목적이 두려워 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앞으로 환난을 겪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환난임을 알게 하고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結言>
하나님이 성도 개인에게 대하시는 원리도 동일합니다. 성도를 회개시키고 거룩하게 하고 장결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고난 가운데서 연단을 시킵니다. 그런 관점에서만 본다면 하나님이 많은 상을 줄 자에게 연단된 인격을 요구하시고 연단을 위해 고난도 많이 허락하십니다 (마16:24, 벧전1:6-7, 약1:2-4, 히12:6-11). 그러므로 성도의 고난은 목적있는 고난입니다. 유익을 위한 고난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고난입니다. 고린도전서10:13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