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요한계시록5:1-14

<題目> 인봉된 두루마리와 어린양

 

<序言>

  4-5장은 6-22장의 서론격입니다. 4장에서 하늘보좌의 모습과 하늘예배의 광경을 보여주었습니다. 5장은 그 연속된 내용이면서도 좀 더 극적인 내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4장에서는 성부 하나님이 집중적으로 보여주었으나 5장에서는 성자 예수님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4장에서는 성부 하나님이 집중적으로 찬양을 받은 반면 5장에서는 성자 예수님이 집중적으로 찬양을 받는 내용이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4장에서는 성부 하나님이 주권을 가진 면이 부각되었으나 5장에서는 성자 예수님이 실행자임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사도 요한의 절망(1-4), 두루마리를 취한 어린양(5-7), 어린양에 대한 찬양(8-14)으로 되어있습니다.

 

<本論>

       1. 사도 요한의 절망 (1-4)

 

  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4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①성부 하나님께서 두루마리를 들고 계셨습니다.

 

  1절에 보면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오른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계셨습니다. ‘오른손은 권세와 능력과 힘을 상징합니다. '오른손에'(επι την δεξιαν)는 직역하면 '오른손 위에'로서 이는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두루마리를 쥐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오른손 바닥 위에 놓고 계신 모습입니다.

 

  ‘두루마리에 해당하는 비브리온’(βιβλιον)은 두루마리나 책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이 두루마리는 일반적인 책(codex)의 형태가 아니라 고대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였던 두루마리(scroll)였을 것입니다 (Chales, Walvoord, Ladd, List). 우리가 알고 있는 책의 형태는 2세기에서 1세기 말까지는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B.M.Metzger). 고대에 흔히 문서를 기록하기 위해 사용한 두루마리였습니다 (40:7, 36:2,4, 2:9, 10:7). 대부분 양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 두루마리보다는 파피루스 섬유질로 만든 파피루스 두루마리였습니다. 파피루스는 흔히 갈대라고 하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갈대와는 많이 다릅니다. 손가락만한 두께에 속이 텅 비었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생김새와 질감이 전혀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갈대는 가는 대나무 형태로서 줄기가 딱딱하지만 팔레스틴의 갈대는 일종의 물풀(골풀) 형태로서 연한 섬유질로 되어있어 손가락으로 누르면 고무 튜브처럼 들어갑니다. 그 파란색의 줄기를 물에 담가두었다가 껍질을 빼내면 안에 있는 섬유질만 남게 되는데 그것을 가로 세로로 포개어 눌러놓으면 종이처럼 됩니다. 그렇게 손가락 너비만한 섬유질을 여러 개로 포개어 종이처럼 만들면 너비 15cm 길이 30cm 이내의 크기로 종이가 형성되어 나옵니다. 그 크기의 종이를 20개 정도를 서로 이어서 두루마리로 말아서 사용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들고 계신 두루마리는 안팎으로 썼다고 했습니다. 보통은 모든 문서에 안쪽에만 글을 썼으나 간혹 안팎으로 양면 모두에 글을 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오피스도그래프'(opisthograph)라고 불렀습니다. 안쪽과 바깥쪽 모두에 글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아주 많은 내용이 더 이상 가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게 씌어져있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Vincent). 필요한 모든 것이 다 기록되었다는 것과 반드시 성취될 수밖에 없는 내용이 기록되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 두루마리를 일곱 인으로 봉하였다고 했습니다. 두루마리를 7마디로 봉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요긴한 문서로 사용된 두루마리는 끈으로 묶고 그 위에 밀랍으로 봉인(封印)을 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아무도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는데 7인봉을 했다는 것은 누구도 절대로 풀어볼 수 없는 두루마리라는 것입니다. 곧 두루마리를 7인으로 봉했다는 것은 그 내용이 완전한 비밀에 속한 것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16:25, 고전4:1, 3:3, Alford, Barclay). 그 내용은 앞으로 6장부터 전개되는 내용을 감안하면 종말의 대환난과 그리스도의 재림과 악인들의 심판과 성도들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일 것입니다.

 

  그 두루마리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기록되어 있는 계획책(구원계획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여러 책이 나옵니다. 생명책(20:12)과 기념책(3:16)과 행위책(20:12)이 나옵니다. '생명책'은 구원받은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고, '기념책'은 구원받은 사람의 기념될 만한 선행을 기록된 책이고, '행위책'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이름과 행위가 기록된 책입니다. '계획책'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기록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기록된 책을 계획책이라고 한 것은 제가 임의로 앞에 나온 책들과 같은 명칭으로 만들기 위해 붙인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구속경륜)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절정에 이르렀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한 성령의 강림과 활동으로 더욱 풍성하게 나타났습니다. 그 구원계획은 6장 이후에 나오는 재앙들을 거쳐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로 완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②두루마리의 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2-3절에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한 힘 있는 천사'는 어떤 천사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역사를 예정된 종말로 이끌어가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천사인 것은 분명합니다 (10:1-3, 18:21, Mounce). 한 힘 있는 천사는 하늘 위와 땅 위와 땅 아래까지 들릴 큰 음성으로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고 외쳤습니다. 누가 하나님이 오른 손에 든 두루마리의 인을 떼어 펴기에 합당하냐는 것입니다. 누가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게 하고 실현하고 성취하기에 합당한 자냐는 것입니다. 이는 능력 차원의 적합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로움 차원의 적합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실현하고 성취할 수 있는 의로운 자격을 가진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수사학적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Greijdanus). 결국 그런 자가 없다는 암시를 내포하고 있는 표현인 것입니다.

 

  한 힘 있는 천사의 그 같은 외침에도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 어떤 곳에서도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고 실현하고 성취할 자가 없었습니다. '하늘 위'는 천사들이나 죽은 의인들, '땅 위'는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 '땅 아래'는 죽은 악인들에 대한 관념적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천사나 죽은 자나 산 자나 그 누구도 없었던 것입니다. 창조물 가운데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누구도 알 수 없으며 누구도 그것을 이룰 의로운 자격을 가진 자가 없는 것입니다 (24:36, 벧전1:12, 3:10).

 

   ③두루마리를 펼 자가 없으므로 요한이 크게 울었습니다.

 

  4절에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울었더니'에 해당하는 에클라이온’(εκλαιον)은 시제가 미완료 능동태로서 한 번 운 것이 아니라 계속 운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비참함을 나타낼 때도 사용했고 직업적으로 애곡하는 자들을 지칭할 때도 사용했습니다 (왕상13:30, 22:18, 11:33). 요한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실현시킬 수 없다는 절망감을 때문에 그처럼 탄식하며 운 것입니다. 요한 입장에서 보면 그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중단될 수밖에 없다는 좌절감을 갖게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염려하던 소아시아 교회들의 미래에 대한 절망감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믿음과 인내와 연단에 대한 좌절감도 생기게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해 박해를 받아 밧모섬에 유배까지 온 요한으로서는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위해 환난과 핍박과 고난 중에도 자기 생명을 내놓고 믿음으로 인내하고 있는데 교회와 성도의 최종 승리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없을 때 얼마나 통곡했겠습니까?

 

  눈물에는 여러 종류의 눈물이 있습니다. 슬픔의 눈물, 고통의 눈물, 회개의 눈물, 기쁨의 눈물, 감격의 눈물 등이 있습니다. 요한이 흘린 눈물은 하나님의 일이 안될 것을 생각하여 안타까워서 우는, 보통 사람들이 흘리지 않는 하나님 일을 위한 열정의 눈물입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구원 운동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때문에 눈물 많이 흘렸습니다 (9:1-3, 고후11:24-28). 고린도후서11:28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느헤미야,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일이 되지 않는 것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애통해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8:32, 1:3-4, 5:1, 22:30). 느헤미야1:3-4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우는지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우리도 물질과 육체와 세상적인 일이 안된 것 때문에 안타까워하지 말고 자신의 죄와 자신의 영적인 구원 문제가 때문에 울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안 되는 것 때문에 애통해 하고 절규하고 탄식하고 통곡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자기의 영적인 일,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목적과 가치와 중심으로 산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2. 두루마리를 취한 어린양 (5-7)

 

  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①한 장로가 다윗의 뿌리가 인을 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두루마리의 내용을 알 수 없어서 좌절하여 통곡하고 있을 때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이 울지 말라고 위로하면서 예수님이 두루마리의 인을 뗄 것이라고 했습니다. 5절에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로 중의 한 사람24장로 중 한 사람일 것입니다 (4:4,10). 장로 중 한 사람이 요한에게 울지 말라고 한 이유는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구약시대의 족장이었던 야곱은 유다지파를 사자에 비유했습니다. 창세기49:9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다지파에서 왕이 날 것을 예언했습니다. 창세기49:10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고 했습니다. ''()'통치자의 지팡이'는 왕이 가진 지휘봉으로서 왕권을 말하는 표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지파에 속한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구원자가 날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사야11:1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고 했습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마태는 족보를 통해 다윗의 자손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났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마태복음1:1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에서 났다고 했습니다. 로마서1:3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7인을 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겼으니'(ενικησεν)는 시제가 부정과거로서 단회적입니다. 단번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승리를 얻었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속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시므로 완전히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승리를 가져올 것에 대한 보증이었습니다 (7:27, 9:12, 28).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으로 계셨는데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승리를 하신 것입니다 (2:6, 1;1, 8:58, 1:1-25). 곧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인 성도들을 택하여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려는 계획을 가졌는데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성도들을 구원하므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완전히 성취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종말에 성도를 구원하고자 하는 구원계획도 예수님이 성취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두루마리의 인을 뗄 자라는 것은 예수님이 그 두루마리의 내용을 알게 할뿐 아니라 그 내용을 성취할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럴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실현해나갈 권세를 위임받은 자로서 과거에도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었지만 종말에도 이루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장로의 말은 요한에게 큰 위로와 확신이 되었을 것입니다.

 

   ②보좌 앞에 어린양이 서 있었습니다.

 

  6절에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보니 보좌와 4생물과 24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양이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천사들과 성도들 사이에 서 있는 어린양을 본 것입니다.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어입니다.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표현한 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제사에서 유월절에 속죄제물이 된 어린양처럼 친히 택한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물이 되셔서 구속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본 어린양의 모습은 특이했습니다. 첫째,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전에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흔적을 보고 그 어린 양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7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7'은 완전한 권세와 능력에 대한 상징입니다 (7:7,20, 8:5).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하고도 영원한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그 권세는 부활을 통해 증명되었고 미래에 있을 심판을 통해 증명될 것입니다. 셋째, 7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7'은 본절에서 해석하고 있듯이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 '7'7영입니다. '7'은 완전한 지식과 지혜와 통찰력을 가진 성령님에 대한 상징입니다. 예수님께는 완전하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함께 하시고 예수님은 그 완전하신 성령님으로 사역을 성취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은 그의 전 생애뿐 아니라 승천 후 복음전도를 위해 보내신 보혜사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16:7-8,13, 1:8).

 

   ③어린양이 두루마리를 취했습니다.

 

  7절에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어린양이 나아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취한 것입니다. 두루마리는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기록되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취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 내용을 알게 하고 실현하고 성취할 수 있는 분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계획을 실현해나갈 권세를 위임받은 자로서 그 책임을 맡은 분입니다. 그는 과거에도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이루었지만, 현재에도 구속역사를 이루어나가고 있고, 미래에도 종말에 구속역사를 성취할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구원은 하나님이 친히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 구원은 예수님께서 친히 실현시켜 나가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도성인신(道成人神)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그 열심으로 구속사역을 이루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보내신 성령께서 그 일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도록 역사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면서 힘들어도 요한이 본 이 계시를 생각하면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3. 어린양에 대한 찬양 (8-14)

 

  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하더라

  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4장에서 하늘보좌의 모습과 하늘예배의 광경이 나왔었습니다. 5장은 그 연속된 내용이면서도 좀 더 극적인 내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1-7절은 하늘보좌의 모습이 나왔습니다. 성부 하나님 앞에 선 성자 예수님의 모습이 집중적으로 나타났습니다. 8-14절까지는 성자 예수님에 대한 찬양의 모습과 내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①4생물들과 24장로들이 찬양을 했습니다.

 

  8절에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했습니다. 어린양이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취했습니다 (7). 예수님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구원계획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취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실현시킬 자로 위임받는 장면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4생물과 24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지고 경배의 자세를 취했습니다. 특별한 천사들과 성도의 대표들이 경배의 자세를 취한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이 주체입니다. ’(θυμιαμα)은 구약시대에 성소의 향단에서 피우는 향과 같은 향이었습니다 (33:10). 본문의 향은 본문에서 해석하고 있듯이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141:2). 성도들은 지상에서 예수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느라 많은 고난을 당하고 있으며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마태복음6:10"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 성취에 관한 기도인 것입니다.

 

  4생물과 24장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기록된 책을 실현하기 위해 취하는 모습을 보고 지상에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진 것을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6:10, 8:3-4에 나오는 성도들의 기도는 성도들의 탄원하는 기도입니다. 그 탄원기도도 넓게 보면 구원계획 성취를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인을 떼기 위해 책을 받아 든 시기에 맞추어 4생물과 24장로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지고 나온 것을 보여주신 것은 환난 가운데 있는 교회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계획이 성취될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배경에 성도들의 찬양과 기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 있는 교회가 여전히 낙심 말고 기도해야할 것을 격려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환난 가운데 있는 우리는 낙심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미래를 두고 기도해야합니다 (18:1-18, 살전5:17, 벧전4:7).

 

  한편 4생물과 24장로들이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취하자 거문고를 가지고 엎드려 경배의 자세를 취했다고도 했습니다. 그들이 가진 거문고’(κιθαρα)는 수금(竪琴)으로 하프(harp)와 비슷한 악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악기는 히브리인들이 전통적으로 구약시대에 예배 찬양 때 많이 사용했습니다 (33:2, 98:5, 147:7). 8절에 나온 거문고는 9절에 나오는 새 노래를 부를 때 사용하기 위해 가지고 나온 것일 것입니다. 9절에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새 노래'는 시편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입니다 (33:3, 40:3, 96:1, 98:1). '새 노래'는 헬라어로 '오덴 카이넨'(ωδην καινην, a song new)입니다. ''(새로운)에 해당하는 '카이넨'(καινην)은 시간적인 면에서의 새로움을 가리키는 '네오스'(νεος)와는 달리 질적인 면에서의 새로움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새 계명, 새 방언, 새 이름,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 등에서 ''(new)의 의미와 같습니다 (13:34, 16:17, 2:17, 3:12, 21:2, 21:1, 21:5). 그런 맥락에서 새 노래'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서 불려지는 노래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 노래'는 내용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그가 행하신 일을 찬양한 것입니다. 혹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행하신 일을 찬양한 것입니다. 15:2-3에 보면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고 했습니다. 적그리스도가 세운 우상을 숭배하고 그 이름의 수를 받도록 강요받은 자들이 믿음으로 인내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서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모세의 출애굽 사건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를 세운다고 예언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에 제2의 출애굽을 성취할 구원자(메시아,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출애굽 사건의 구원을 가져다 준 표징이었던 어린양이 자신이라고 했고 모세가 놋 뱀을 높이 들어 죽어가는 자를 살린 것 같이 자신도 십자가에 들려서 구원을 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모세의 출애굽 사건'과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그림자와 몸의 관계로서 본질적으로 같은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기에 상통하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15:1-18). 그것이 예표하는바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경험하는 교회가 예배를 통해 찬양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구원역사와 앞으로 베푸실 구원역사를 찬양하는 것이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 '새 노래'인 것입니다.

 

  본문 9-10절에 보면 4생물과 24장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과 행하실 일들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새 노래'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적으로 확신한 자들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인 것입니다. 그래서 14:3에는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144,0007:4에 보면 성령님의 인을 받은 수로서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며 (14:3)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며 (7:14)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입니다 (7:14). 144,000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자들의 총수로서 상징수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종말적으로 볼 때 큰 환난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찬양할 때 그것이야말로 '새 노래'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4생물과 24장로가 거문고를 가지고 새 노래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할 것을 선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요한과 교회는 환난과 고난을 받고 있는 상태에 있었고 좌절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늘보좌에서 하나님이 가지신 구원계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4생물과 24장로가 거문고로 '새 노래'를 한 것은 그 구원계획이 이미 실현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구원계획이 성취된 것이나 다름없는 승리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많은 환난과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선한 목적이 있는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그 구원계획을 예수 그리스도가 보내신 성령을 통해 반드시 이루실 것을 확신하고 승리의 노래를 하는 신앙을 가져야합니다 (시편119:164, 146:2, 150:6). 이른바 새 노래를 불러야합니다 (149:1, 33:3, 40:3, 96:1, 40:9).

 

  9-10절에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이 보좌 위에 앉으신 오른손에서 인봉(印封)된 두루마리를 취하자 4생물과 24장로가 찬양을 했습니다.

 

  첫째,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다고 했습니다 (9). 9절 상반절에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하기에 합당한 자격을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할 수 있는 분입니다.

 

  둘째,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신 분이라고 찬양했습니다 (9). 9덜 하반절에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인 증거는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린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전에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므로 인종별 언어별 집단별 국가별 차별이 없이 선택한 백성을 속량했습니다. 구약의 고엘(גאל)제도에 보면 빚을 갚지 못해 종으로 팔려간 자를 가장 가까운 친족이 값을 지불하고 자유하게 했습니다. 마치 노예를 값을 주고 구해주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가 죄 값으로 죽어야 할 자리에 대신 죽으시므로 그 피(죽음)로 죄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죄의 형벌인 죽음으로부터 구원했습니다.

 

  셋째, 성도를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았다고 찬양했습니다 (10). 10절 상반절에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실행할 유일한 자격자인 증거 가운데 또 하나는 피로 산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1:6에도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19:6에 보면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야 하는 목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구약시대에 유일하게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직책입니다. 또한 죄인들의 제사를 대신 드려주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중보자 위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도를 피로 사서 하나님 앞에 제사장으로 삼았다는 것은 성도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과 불신자 사이에 중보역할을 할 직책을 얻게 하셨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라'는 구약시대에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 말씀만 따르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의 지배원리와 질서 속에서 살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민족 공동체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성도를 피로 사서 하나님 앞에 나라로 삼았다는 것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공동체로 삼았다는 의미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과 이방 사이에 중보역할을 하므로 영광을 돌릴 자로 삼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2:9에도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릴 구원한 목적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을 이루신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계획을 완성할 자격자인 증거인 것입니다.

 

  넷째, 성도들이 땅에서 왕노릇 할 것이라고 찬양했습니다 (10). 10절 하반절에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저희가~ 왕 노릇하리로다'에 해당하는 '바실류수신'(βασιλευσουσιν)은 현재형으로 나온 사본도 있고 미래형으로 나온 사본도 있습니다. 현재형을 취할 경우 영적인 통치를 말하고, 미래형을 취할 경우 종말적인 통치를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성도는 영이 거듭난 이후 악령과 죄와 육체를 영적으로 통치합니다 (1:18-19, 16:17-18, 2:26-27). 하지만 그것은 불완전전하며 부분적입니다. 종말에 예수님이 재림하여서 부활한 다음에 주의 나라에서 통치합니다 (20:6). 그래서 이 찬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피로 사서 제사장과 나라를 삼은 분일뿐 아니라 장차 우리를 구원한 최종적인 목적을 이루실 분이라는 찬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따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그 구원의 행복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장차 그 구원에 대한 최종적인 목적을 완전하게 성취시켜 주실 것을 대망하면서 영적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도록 사탄과 마귀와 귀신들이 우는 사자처럼 잡아 삼킬 기세로 공격해 오고, 죄성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이루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신앙의 실패를 하게하고, 환경이 질병과 가난과 분쟁과 핍박 등으로 열악하여 행복을 누릴 새가 없습니다. 참으로 거듭난 기쁨과 성령의 감동과 말씀의 은혜는 잠시뿐 슬픔과 고통뿐인 삶을 살아갑니다 (8:23). 그러기에 예수님이 성도는 구원 목적을 완전하게 성취해 주실 때를 고대하면서 매일 매일을 성령과 말씀을 의지해 영적 전투를 해야합니다. 매일 삶에서 지는 경험을 할지라도 예수님이 완전히 승리하게 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12:1,4).

 

   ②천사들이 찬양을 했습니다.

 

  11절에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고 했습니다. 4생물들과 24장로들이 찬양할 때 그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들이 찬양을 했습니다.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했습니다. '만만이요 천천이라'는 표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에 대한 표현입니다 (7:10). 그들의 찬송은 화답송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12절에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대상29:10-12, 7:12). 예수님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을 가지고 계신 분이며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완전하신 속성들과 관련된 표현들입니다. '능력'은 하나님이 가지신 초자연적 능력을 말하고 ''는 하나님이 가지신 풍성한 만족을 가리키고 '지혜'는 하나님이 가지신 무한한 지혜를 말하고 ''은 하나님이 가지신 권세를 말합니다 (고전1:24, 1:11, 고후8:9, 3:8, 고전1:30, 1:9, 11:22).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속성인데 예수님도 하나님과 동등된 분으로서 그 속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존귀'는 하나님이 자리할 위치를 말하고 '영광'은 하나님이 받을 인식을 말하고 '찬송'은 하나님이 받을 경배를 가리킵니다 (1:14, 2:1-11, 2:9).

 

  천사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직접 돕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와 광야에서 기도하실 때와 죽음에서 부활 하실 때에 도왔습니다 (2:8-14, 4:1-11, 28:5-7). 재림하실 때도 도울 것입니다 (살전4:16). 또한 예수님의 구속으로 후사가 된 성도의 구원과 성화를 돕고 있습니다 (1:14). 그들은 그 사역을 하면서 경탄하고 심히 부러워합니다 (벧전1:12). 그런데 그들은 악령들의 역사로 심히 많은 방해를 받습니다. 악령과 대항하여 싸우기가 힘이 듭니다 (10:10-14, 1:9). 그래서 그들도 예수님이 속히 구원사역을 완성하여 악령을 심판하고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③피조물이 찬양을 했습니다.

 

  13절에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의 모든 만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피조물들도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께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라고 찬양을 했습니다. 그에 대한 화답으로 4생물과 24장로도 '아멘'하며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14).

 

  피조물이 찬양했다는 것은 의인화한 표현입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에 충분하도록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로 오염되어 그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본래의 목적대로 쓰임 받지 못하고 악령들과 인간들의 범죄에 이용당하고 있습니다. 그러 인해 만물들이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도 예수님께서 속히 구원사역을 완성하시길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영들과 악한 세상을 심판하므로 회복되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창조된 형태로의 복원이 아니라 더욱 완전한 상태로 회복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육체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만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8:19-23"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고 했습니다.

 

<結言>

  하나님께서 환난 당하고 있는 요한과 성도들에게 하늘보좌를 보여주셨고 그 앞에서 예수님이 구원계획서를 취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생물들과 장로들과 천사들과 만물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모든 환난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며 결국 최종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대로 교회와 성도가 승리하게 해주실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곧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환난과 핍박과 고난과 고통 속에서 절망하고 있는 당시 교회와 성도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고 인내할 것과 계속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북돋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현재에 고달픈 신앙생활을 해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할 구원계획을 신뢰하고 찬양해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찬양인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찬양과 경배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