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데살로니가후서1:1-12
<題目> 핍박에 대한 격려
<序言>
데살로니가교회는 유대인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키는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에 대한 오해로 바울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첫번째 편지인 데살로니가전서를 통해 충고를 받고서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을 또 다시 두번째 편지인 데살로니가 후서를 엄격하게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우선 그들이 핍박 가운데서도 잘 견디는 것에 대해 위로했습니다. 본 장의 내용구조는 은혜와 평강의 인사(1-2절), 잘한 것에 대한 칭찬(3-4절), 핍박에 대한 격려(5-10절),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목적(11-12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은혜와 평강의 인사 (1-2절)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를 두 번의 편지를 보내게 된 배경을 이해하려면 바울의 전도여행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3차에 걸려 전도여행을 했습니다. 1차는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했고 2차는 남부 유럽을 중심으로 했고 3차는 1-2차에 세운 교회들을 돌아보는 형식으로 했습니다. 사도행전13-18장에 보면 1-2차의 전도여행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수리아 안디옥에서 바나바와 마가와 함께 소아시아 지역의 전도여행을 시작하기 위해 구브로를 거쳐 밤빌리아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마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마가가 돌아간 이유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상처 가운데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전도를 하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귀환을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에서 할례문제를 해결하고 2차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1차 여행에서 돌아온 마가를 데려가는 문제로 바나바와 다투어 결별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실라와 누가를 데리고 떠납니다. 더베를 거쳐 루스드라에 가서 1차 전도여행 때 회심한 디모데를 합류시킵니다. 그리고 바울이 갈라디아나 아시아로 가려는 것을 성령께서 막았습니다. 바울이 성령께서 어떤 방법으로 막았는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무시아로 갔는데 무시아의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사람이 와서 도와 달라는 환상을 보게 되고 그것이 성령께서 지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일행은 유럽 지역인 마게도냐의 첫 도시 빌립보로 갑니다.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회심시켜 루디아의 집을 근거로 전도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귀신 들린 여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낸 이유 때문에 그 주인으로부터 고소를 받아 붙잡혀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천사가 도와 출옥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게도냐의 수도 데살로니가로 가서 야손의 집에서 머물며 빌립보교회에서 보내온 선교비로 전도활동을 하게 됩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강론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헬라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야손의 집을 습격하고 야손과 형제들으 붙잡아 고소합니다. 그들은 붙잡혔다가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게 됩니다. 바울의 일행은 쫓겨 가듯이 뵈뢰아로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뵈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었고 복음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뵈뢰아까지 쫓아와 방해를 하는 바람에 아덴으로 가서 전도활동을 했습니다. 그 곳에서는 헬라 철학자 에피큐러스학파(쾌락 추구)와 스토아학파(지성 추구, 로고스론으로 유명)와 광장에서 논쟁하여 이기지만 전도의 효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실라를 빌립보교회로 보내고 디모데를 데살로니가교회로 보내고 자신은 고린도로 갑니다. 고린도로 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고 성령의 능력으로만 사역을 할 각오를 했습니다.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가정을 만나 그 집에서 머물며 천막 만드는 일을 도우며 전도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실라가 빌립보교인들이 보내 준 선교비를 가져와서 일하지 않고 전도활동에 전념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데살로니가교회에서 돌아와 데살로니가교회의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유대인의 핍박에도 잘 견디고 있으나 주의 재림이 임박한 것으로 알고 일하지도 않으며 생활에 성실하지 않는다는 보고를 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의 보고를 듣고 종말론에 관한 교훈을 바로 가르쳐 주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첫번째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 편지가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첫번째 편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교회가 아직도 바로 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또 다시 더 엄중하게 가르쳐 주어야 할 필요를 느끼고 두번째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그것이 본서인 데살로니가후서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종말론에 관한 바른 교훈을 본격적으로 말하기 전에 먼저 1장에서 문안인사를 하고 그들을 격려하게 됩니다.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공동발신인으로 언급했습니다 (1절上). 그것은 바울뿐 아니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교회와 깊은 관계가 있는 사역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Paul)은 히브리식 이름은 사울(שאול)인데 기독교를 박해하던 데에 앞장섰던 자인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이방세계의 전도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2차 전도여행에서 남부 유럽 마게도냐의 빌립보교회를 세우고 데살로니가교회를 세우고 고린도교회를 세웠습니다. '실루아노'(Silvanus)는 '실라'(Σιλαs)의 로마식 이름입니다. 실라는 예루살렘교회의 유력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 동행했고 빌립보에서는 바울과 함께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고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를 세우고 베뢰아와 고린도에서 사역을 할 때도 함께 했습니다. '디모데'(Timotheus)는 부친은 헬라인이었으나 모친은 경건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1차 전도여행 때 회심하여 2차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합류했고 바울이 빌립보교회와 데살로니가교회를 세울 때 함께 했습니다. 특히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을 할 때 바울을 대신하여 데살로니가교회를 방문하여 살피고 바울에세 보고한 자입니다 (살전3:1-2,6).
바울은 편지의 수신자를 데살로니가교회로 언급하되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로 적시했습니다 (1절下).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빌립보 다음으로 전도활동을 한 곳입니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은 3주간이 지났을 때 안식일에 회당에서 강론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 때 많은 경건한 헬라인들이 개종하므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에 시기한 유대인들이 바울이 거처했던 야손의 집을 급습하므로 인해 바울이 쫓겨나듯이 뵈뢰아 지역으로 떠났습니다 (행17:1-9). 바울은 아덴에서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진리에 대해 충분히 가르칠 수 없었던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디모데를 보내어 돌아보게 했습니다. 그 결과 디모데는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데살로니가교회가 유대인의 핍박이 있는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있지만 주의 재림과 죽은 자에 대한 부활 등 종말론에 대한 오해가 있다는 보고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즉시 첫번째 편지를 보냈으나 몇 개월이 지난 후에 들리는 소식이 환난 가운데 믿음을 잘 지키고 있으나 아직도 주의 재림에 대해 오해로 종말론에 관한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두번째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교회에 대해서도 여전히 '교회'(εκκλησια)로 보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로 보았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선택하고 구원하고 목적을 가진 대상임이 강조된 표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으로 구원한 대상임이 강조된 표현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진리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이 있은지 얼마 안되어(데살로니가서 기록은 A.D.52-53년 경으로 복음서와 다른 서신서들 보다 빠름) 종말론에 대해 혼란을 겪고 그로 인하여 생활에 성실하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에서 세워진 교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이루어진 교회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가 부족함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존귀한 교회로 인정한 것입니다. 실로 교회는 부족함이 있더라도 여전히 교회이며 존귀한 공동체입니다. 구약시대의 언약 백성들도 부족함 투성이었으나 하나님 앞에는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였스니다. 이사야43:4에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고 했습니다. 신약시에 소아시아 7교회도 부족한 점들이 많이 있었으나 하나님 앞에는 가장 가치있는 존재였습니다. 요한계시록1:12-13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고 했고 (계1:11-16), 요한계시록2:1에도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계1:20). '금 촛대'의 모티브는 구약 성소에 있던 금 촛대(등대)인데 그것은 순금 1달란트(34kg)로 쳐서(주조가 아닌 단금질) 만든 것이었습니다 (출25:31-40).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복했습니다 (2절). 이는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축복하는 내용과 같습니다. 민수기6:25-26에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고 했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은혜'(חנן χασιs)는 자격이나 행위나 대가없이 주어지는 호의나 선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한 구원은 순전히 은혜입니다. 에베소서2:8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평강'(שלום ειρηνη)은 화목, 화평, 평화, 평강, 평안, 번영 등의 뜻이 있는데 크게 화목과 평안의 두 개념이 있습니다. 언약적 관계에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불화하여 불안했는데 예수님의 대속으로 하나님과 화목되어 평안이 주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와 죽음과 내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두려웠는데 예수님의 대속으로 구원되어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고 하나님 사역에 참여하므로 더욱 화목과 평안이 많이 경험되어지게 됩니다.
2. 잘한 것에 대한 칭찬 (3-4절)
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유럽에 속한 마게도냐 지방에 들어서면서 빌립보교회를 세운 다음에 마게도냐의 수도인 데살로니가로 가서 야손의 집에 머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율법을 강론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많은 헬라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데살로니가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공격이 있어 뵈뢰아와 아덴을 거쳐 아가야 지방인 고린도로 갔습니다.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여 고린도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던 중 디모데에게 데살로니가교회 형편을 듣고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것이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그리고 수개월 후에 또 두번째 편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데살로니가후서입니다.
그런데 3-4절은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이 잘한 것을 칭찬하는 내용입니다. 전서에서도 그랬듯이 그들이 종말론에 관해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것을 본격적으로 말하기 전에 그들에 대해 감사한 것과 자랑하는 것이 있다고 자존감을 높여 준 것입니다. 바울이 기록한 바울서신 13권을 보면 모두 칭찬부터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요한계시록2-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요한을 통해 소아시아 7교회에 보낸 메세지를 보면 먼저 잘한 것을 칭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리학에서 이른바 '초두효과'(Primacy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초기 정보가 후기 정보보다 중요하다는 이론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내용을 주어도 배열 순서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아무개는 예쁘다 깔끔하다 고집이 세다 결벽증이 있다" "아무개는 결벽증이 있다 고집이 세다 깔끔하다 예쁘다" 내용은 같고 순서 배열만 바꾸었으나 받아들이는 사람의 인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내용이 앞에 있으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부정적인 내용이 있으면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내용의 정보를 먼저 제공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좋은 말을 해주면 마음 문이 열려 나중에 좋지 않은 말을 들어도 수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잠12:25).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며 말씀을 가르쳤던 기간이 아주 짧았습니다.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에 가서 3주간이 지났을 때에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강론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고 유대인들이 야손의 집을 습격하므로 형제들에 의해 급히 밤에 베뢰아로 떠났습니다 (행17:1-10). 그래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한 기간을 생각해 보면 최소 3주간은 넘었겠지만 그리 긴 기간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후부터 현재 바울이 뵈뢰아와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까지 와서 편지를 보낸 기간까지 합쳐도 교회가 세워진 이후 연조가 그리 길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뵈뢰아를 거쳐 아덴에 이르렀을 때 실라와 데모데를 오게 해서 실라는 빌립보교회로 보내고 디모데를 데살로니가교회로 보냈는데 그것은 데살로니가교회의 연조가 짧은데다가 유대인의 핍박이 있었기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였습니다 (행17:15, 살전3:1-5). 데살로니가교인들이 바울에게 배우고 디모데에게 배운 기간이 얼마 안 되었고 심한 핍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굳건했고 서로 사랑으로 격려했고 말씀을 지켜 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두번째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감사하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첫째, 그들의 믿음이 더욱 자란 것이었습니다. 3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동시에 그 고백의 확고함 위에 말씀을 순종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더욱 자라고'에 해당하는 기본형 '휘페라웈사노'(υπεραυξανω)는 υπερ(~을 넘어서)와 αυξανω(성장하다)의 합성어로서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의 믿음이 온전케 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살전3:10).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디모데가 돌아와 데살로니가교회 상황을 보고한 것을 들으니 그들의 믿음이 많이 성장해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짧은 연조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굉장히 성장한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둘째, 그들이 서로 사랑함이 풍성한 것이었습니다. 3절에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고 했습니다.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이 서로 한 몸인 것을 인식하여 어려운 가운데 있는 자들을 물질과 말로 위로하고 격려한 실천을 말합니다. 어려운 가운데 있으면서도 믿음을 지키려는 자들을 서로 격려하고 필요를 채워 주고 돕는 것이 실천적인 사랑입니다 (요일3:18, 행2:44-45).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이 서로 사랑하기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했는데 그 기도대로 그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는 것을 알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셋째, 박해와 환난 중에서도 인내하는 믿음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4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 가운데서도 말씀을 굳게 지키는 믿음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1:6-7에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율법을 강론하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 때에 유대교에 속해 있던 많은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것을 시기한 유대교에 속한 유대인들이 저자거리의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떼를 지어 바울이 기거하고 있던 야손의 집을 습격하고 야손과 그리고 그와 함께 있던 형제들을 붙잡아 읍장에게 끌고 가 고소를 했습니다. 그래서 믿는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를 급히 밤에 뵈뢰아로 보냈습니다 (행17:1-10). 바울과 실라가 떠나자 그들은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은 유대인들과 동족들로부터 박해와 핍박을 당하므로 많은 환난을 겪었습니다 (살전2: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참고 견디며 말씀을 지키는 충성됨을 나타낸 것입니다.
디모데후서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0:22에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환난에서 건져 주실 줄 믿고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요한계시록13:10에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고 했고, 요한계시록14:12에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하며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로마서5:3-4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습니다.
3. 핍박에 대한 격려 (5-10절)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심한 박해와 핍박을 받으므로 큰 환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믿음을 가지고 인내했습니다 (4절). 바울은 그에 대한 의미를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라고 했습니다 (5절上). '공의'(δικαιοs)는 바른, 공정한, 흠없는, 거룩한의 의미이고, '심판'(κρισιs)은 결정, 재판, 판결의 의미이고 '표'(ενδειγμα)는 표시, 표식, 증거의 의미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이 박해를 받는 것은 하나님이 바른 심판의 분명한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을 핍박하고 데살로니가교인들이 그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킨 것은, 종말적으로 하나님께서 핍박하는 자들에게 그에 따른 벌을 내리고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에게는 그에 따른 상을 내리게 되는 명확한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명확한 증거가 된다는 것은 그런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증거가 된다는 의미도 있고 그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구약시대부터 신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가진 의문 가운데 하나는 왜 악한 자들이 의로운 자들을 핍박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고만 계시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왜 악인은 여전히 잘되고 의인들을 고난을 받도록 내버려 두시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시34:19, 합1:2-4).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도 왜 하나님이 핍박자들이 자기들을 핍박하도록 내버려 두는지, 왜 핍박자들은 여전히 잘되는데 자기들은 고난 가운데 있어야 하는지. 하나님이 언제 핍박자들을 벌하고 자기들이 승리하게 해 주실지 의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해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이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이야말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있을 때에 핍박자들은 그 핍박하는 행위가 근거가 되어 그에 상응하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고 그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킨 자들은 그 인내의 행위가 근거가 되어 그에 합당한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5절中).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이 핍박을 받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환난 가운데 두신 것은 그들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상을 얻게 할 자로서 그에 합당한 자격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5:10-12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환난 가운데 믿음으로 인내하면 신앙 인격이 연단되어 성장하고 하나님 나라에서 그대로 상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눅21:19, 19:12-27, 고전3:12-15). 야고보서1:3-4에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1:7에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8:18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고 했습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5절下).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이 핍박을 받는 것은 천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가서 상을 얻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믿음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은 그것이 천상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라는 증거를 보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천상의 하나님 나라에서 상을 얻을 자라는 증거를 나타낸 것이기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증거이기도 하고 지상의 하나님 나라를 견고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믿음으로 인내하면 지상의 하나님 나라가 연단되어 더 강해지고 더 능력이 있어집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서 믿음으로 인내하는 교회와 성도가 영적으로 견고해집니다. 디모데후서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야고보1:3에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받은 이유는 주님의 뒤를 따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베드로전서2:20-21에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자들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라고 했습니다 (6-7절上). '공의'(δικαιοs)는 '의로운' '바른' '공정한' '공평한' 등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성품을 가진 분입니다. 그 공의는 악을 행한 자에게는 진노하셔서 형벌을 내리시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기쁘게 여겨 상을 내리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롬2:6-8). 그래서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을 핍박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핍박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인내로 믿음을 지킨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은 안식으로 갚아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환난'(θλιψιs)은 핍박, 환난, 고통 등을 의미하고, '안식'(ανεσιs)은 위안, 편안, 안식 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핍박자들에게는 형벌을 내리고 핍박을 받는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산 자에게는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와 싸우는데 시간과 힘을 낭비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살전5:15). 로마서12:19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13:10에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에 해당하는 구문이 한글 개역판에서는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로 번역했었습니다. 개역개정판을 따를 경우 성도들이 박해자들에게 사로잡히기도 하고 칼에 죽기도 한다는 의미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Johnson, Charles, Lohmeyer, Moffatt). 개역판을 따를 경우 성도들이 박해자들을 사로잡으려 하면 자기들이 사로잡히고, 성도들이 박해자들을 칼로 죽이려 하면 자기들이 칼에 죽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Morris, Mounce, Ladd). 두 번역 다 일리는 있지만 헬라어 구문을 보면 개역판의 번역이 더 옳을 것 같습니다 (Ει τιs αιχμαλωσιαν συναγει ειs αιχμαλωσιαν υπαγεν ει τιs εν μαχαιρα αποκτενει δει αυτον εν μαχαιρα αποκτανθηναι -GTS). 종말에 환난이 절정에 이를 때는 사로잡으려 하면 오히려 사로잡히고 죽이려 하면 오히려 죽게 됩니다. 박해자들을 대적하여 이기려 하면 도리어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대적하면 오히려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될 뿐입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이 사단에게 온 세상을 다스리고 성도와 싸워 이기도록 허락한 때로서, 사단에게 권세를 받은 적그리스도가 누구도 당할 자가 없는 힘을 가지고 박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박해를 받아도 혈육으로 대적해서는 안됩니다. 그 때에 성도에게 가져야 할 중요한 신앙덕목은 인내와 믿음입니다.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고 인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42달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성도가 이기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7:21-22).
예레미야27:11-12에 "그러나 그 목으로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메고 그를 섬기는 나라는 내가 그들을 그 땅에 머물러 밭을 갈며 거기서 살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 내가 이 모든 말씀대로 유다의 왕 시드기야에게 전하여 이르되 왕과 백성은 바벨론 왕의 멍에를 목에 메고 그와 그의 백성을 섬기소서 그리하면 사시리라"고 했고, 28:12-13에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꺾어 버린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기를,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거짓선지자 하나냐가 참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 있던 멍에를 꺾은 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나무 멍에를 꺾었으나 쇠 멍에를 만들어 메우게 한다고 했습니다. '멍에'는 소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 씌우는 기구입니다. 소가 멍에를 멘다는 것은 주인에게 복종하고 봉사하고 섬긴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유다가 바벨론 멍에를 멘다는 것은 바벨론을 섬기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바벨론 멍에는 전혀 바뀔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나무 멍에를 꺾었으니 쇠 멍에를 만들어 메운다는 것은 이미 메운 나무 멍에가 꺾였으니 또 다른 멍에를 만들되 쇠 멍에로 만들어 메운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무 멍에를 꺾었으나 동일한 쇠 멍에를 만들어 그 멍에 자체가 꺾일 수 없는 멍에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곧 바벨론 멍에는 어떤 요인에 의해서든지 취소되지 않고 반드시 성취되는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바벨론에 70년 동안 붙여 놓을 계획을 가졌으니 70년 동안은 바벨론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연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곳에서도 성소가 되어 주셔서 만나 주신다고 했습니다 (겔11:16, 렘29:12-13). 그러므로 고난의 현장에서 대적하여 싸우기 보다는 믿음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릴 것이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7절下-9절).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하늘로부터 예수님의 능력을 행사할 천사들을 데리고 불꽃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살전3:13, 4:16). '하늘'은 대기권이나 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영계를 말합니다.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신 것은 예수님의 위엄과 권세를 나타내는 상징 현상이며 심판에 대한 권위를 나타내는 암시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릴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두 종류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종류의 다양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을 말합니다.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로서 믿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그들을 심판하여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본체와 나타난 영광에서 떠나 주님에게서 영원히 멀어지고 주님의 긍휼과 은혜에서 영원히 단절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의 심판 곧 영원한 고통의 지옥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날에 그가 강림하여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0절上). '그 날'은 '마지막 날'로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때 곧 행악자들이 심판을 받는 때를 말합니다. 그 날은 행악자들에게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는 때이지만 성도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영광의 날입니다. 모든 믿는 성도들은 기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드리고 경탄을 자아낼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묘사를 마친 후에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는 표현을 덧붙였습니다 (10절下).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이 바울과 그 일행이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모든 믿는 성도가 기쁨으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며 경탄하게 될 때에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시키려는 의도입니다.
4.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목적 (11-12절)
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바울과 일행은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항상 기도했습니다. 신앙 연조가 짧은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이 많은 핍박과 환난 가운데 있지만 인내로 믿음을 잘 지켜서 신앙이 성장하기를 기도했습니다. 본 절들에서는 그들이 그렇게 항상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와 목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그들을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1절中).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는 5절에 나왔던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와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을 부르신 것은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잘 지켜 신앙이 성장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1절下). 모든 선을 이루기를 기뻐하면서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가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한 일을 추구하고 선한 일을 행하기를 힘쓰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믿음으로 삶이 변화되어가는 역사가 있기를 원해서입니다.
셋째,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그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들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2절). 마지막 때에 주를 고대하던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들도 주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살았는데 주님이 오셔서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주님을 찬양하게 되고, 또한 주님이 믿음 지킨 그들에게 상을 주시므로 그들이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結言>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은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신앙 연조가 짧은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인내하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애매히 받는 고난이든 죄 때문에 받는 고난이든 선을 행하므로 받는 고난이든 인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롬5:3-4, 약1:3-4, 벧전1:6-7).